2023秊 4月9日; 冬至로부터 109日째: 高級韓文 第14講
扃堂 訓長 李源栽
< 대부여의 구서 九誓>
初拜而誓於衆曰勉爾孝于家하라 家有父母妻子하니
초배 이서어 중왈 면이효우가 하라 가유부모처자하니
則誠心誠敬하야 推以友愛하며 誠奉祭祀하야 以報一
즉성심성경하야 추이우애하며 성봉제사하야 이보일
本하며 敬接賓客하야 以善鄕隣하며 勸敎子弟하야
본하며 경접빈객하야 이선향린하며 권교자제하야
以養英才하라. 皆人倫敎化之大者也니 是孝慈順禮之
이양영재하라. 개인륜교화지대자야니 시효자순례지
敢不修行乎아 衆이 一齊應聲曰 諾이니이다. 否者는
감불수행호아 중이 일제응성왈 락이니이다. 부자는
逐之하소서.
축지하소서. (다음주에 계속)
<처음 나온 글자>
誓(맹세할 서)勉(힘쓸 면)誠(정성 성)推(옮을 추)祀(제사 사)報(갚을 보)賓(손 빈)
隣(이웃 린)勸(권할 권)慈(사랑할 자)齊(가지런할 제)諾(대답할 낙)
逐(쫓을 축)踈;疎(트일 소)睦(화목할 목)恕(용서할 서)磨(갈 마)警(경계할 경)
勤(부지런할 근)增(불을 증)護(보호할 호)恢(넓을 회)
張(베풀 장)遜(겸손할 손)脫(벗을 탈)讓(사양할 양)謹(삼갈 근)關(빗장 관)
越(넘을 월)採(캘 채)藝(심을 예)鍊(불릴 련)積(쌓을 적)
舒(펼 서)貶(떨어뜨릴 폄)偶(짝 우)沒(가라앉을 몰)售(팔 수)
劃(그을 획)犧(희생 희)牲(희생 생)整(가지런할 정)肅(엄숙할 숙)
毒(독 독)倫(인륜 륜)膽(쓸개 담)俠(호협할 협)昧(새벽 매)偏(치우칠 편)
嗜(즐길 기)痿(저릴 위)蠢(꿈틀거릴 준)循(좇을 순)沈(가라앉을 침)
溺(빠질 닉)廉(청렴할 렴)潔(깨끗할 결)侮(업신여길 모)謔(희롱거릴 학)
毁(헐 훼)壞(무너질 괴)凌(능가할 릉)侮(업신여길 모)侵(침노할 침)奪(빼앗을 탈)
捲(말 권)竅(구멍 규)擴(넓힐 확)
<해석>
첫 번째 절한 뒤에 서약하여 무리에게 말한다. "너희들은 집안에서 효도에 힘을 쓰도록 하라.
집안에 부모와 처자가 있으니 성심(誠心)과 성경(誠敬)으로써 우애하며, 정성으로 제사를 받들어 이로써 하나의 근본에 보답하며, 공경함으로 손님을 대접하여 이로써 좋은 고을과 이웃이 되도록 하며, 자제(子弟)를 가르침에 힘을 써서 이로써 영재(英才)를 길러내도록 하라.
이 모두는 큰 인륜(人倫)과 교화(敎化)이니 효도와 자애 그리고 순종과 예의로서 이를 감히 닦고 행하지 아니하겠는가?"라고 하시니, 이에 무리들이 일제히 "예. 그렇게 하겠습니다.
아니라고 하는 자는 쫓아내겠습니다"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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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설>
(1) 대부여(大夫餘)
BCE 425년 단군 구물은 국호를 바꿔 대부여라고 하고 다스림을 크게 바꾸었다. 대부여(BCE 425-BCE 238), 북부여(BCE 239-BCE 108) 시대는 제자백가가 활동했던 지나의 춘추(BCE 770-BCE 403), 전국(BCE 400-BCE 221)시대와 겹친다.
(2) 구서(九誓)의 모임
해를 거듭하여도 일이 잘 풀리지 않으니 치화(治化)를 잃고 국력이 날로 약해지는 상황에서 나라의 기풍을 진작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단군 구물은 천제(天祭)의 묘(廟) 마당에 큰 나무를 세우고 북을 매에 달도록 하고 3.7일을 기한으로 하여 서로 권화(勸化)하여 성책(成冊=책으로 만듦)하였다. 이를 구서의 모임이라 하고 항상 구서의 글을 사용했다.
(3) 구서(九誓)의 내용
첫번째 : 인륜교화 → 효, 봉제사, 빈객접대, 선린, 자녀교육
두번째 : 천하교화 → 우애, 화목, 어짐, 용서
세번째 : 학문의 세움과 사업성취 → 스승과 벗에 대한 믿음
네번째 : 국정쇄신, 국부증진,국토수호, 국권회창 → 충, 의
다섯번째 : 군중화합 → 겸손, 양보, 상호존경,
여섯번째 : 정사(政事)를 밝게 아는 일 → 언로, 밝음, 지혜
일곱번째 : 나라 없으면 처자식은 남의 노예로 된다 → 용맹
여덟번째 : 청렴(廉), 겸손, 곧음, 깨끗함(潔), 맑음(淸)
(4) 구서(九誓)의 효과
이때부터 풍속은 순박하고 도타운 것을 숭상하고, 공동의 이익에 힘쓰며, 공동의 일에는 민첩하며, 공덕(公德)에 밝았다. 스스로 예의 있고, 자애로운 풍속을 이루어, 같이 삼신께 돌아와 의지하여 교화되었다.
부여시대는 환단시기(BCE 7197-BCE 425)에 달성된 높은 수준의 문화적 유산과 지나에서 진행된 제자백가의 활동에 자극을 받아 드높은 정신문화를 이룩하였을 것이다. 그러나 아쉽게도 남아있는 것은 단편적인 자료뿐이다.
< 다음 주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