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설 연휴에 극장에서 “캐롤”을, 집에서 VoD로 “Kyss Mig
(Kiss Me)”를 봤다. 둘 다 공교롭게(?) 동성애
영화다. 설 연휴 시작 전부터 ‘캐롤’은 언론에서 간간히 회자되던 영화라 기대를 하고 봤다. “캐롤”을 보고 집에 돌아와 영화의 여운이 가시기 전 몇 가지 메모를 하고는 바로 이어 스웨덴 영화 “Kyss Mig”를 봤다. 두 번째 영화도 동성애 영화라는 것은 영화가
중반으로 접어들 때 알게 되었다. 동성애 영화 두 편은 의도하지 않았지만, 나쁘지는 않았고, 두 편의 영화를 다 보고 난 이후, 나를 불편하게 만드는 몇 가지 것들이 영화에 있음을 알아차렸다.
그게 불쾌한 정도까지는 아니었기에 그나마 다행이었지만, 내가 더 민감하다면
그 불편함이 불쾌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각 영화의 주인공에 해당하는 두 명의 여성, 그러니까 총 네 명의
여성들은 영화가 진행되면서 성장 혹은 변화한다. 스스로에게 솔직해지는 과정을 거친다. 1952년 동성애가 미국에서 처벌받던 시기가 배경인 첫 번째 영화에서 캐롤은 남편에게 아이의 양육권을 온전히
주면서 자신이 테레즈를 사랑하고 있다는 것을 인정하게 되고, 늘 다른 사람의 의견만 따랐던 테레즈는
캐롤을 만나면서 자신이 좋아하는 것들을 찾아가고 자신의 성향을 알아가는 과정이 영화의 얼개다. 두 번째
영화는 이미 커밍아웃을 하고 여자 파트너가 있는 프리다와, 7년을 사귄 남자 친구와 곧 있을 결혼을
준비하고 있는 미아가 서로를 만나 서로에게 사랑에 빠지고, 그 결실에 이르는 과정을 그린 영화다. 파트너가 있는 프리다는 바람을 피운 것을 인정하는 과정에서, 이제
곧 결혼을 하기로 되어 있는 미아는 자신의 성정체성을 인정하는 과정에서 혼란과 고통을 겪지만, 결국은
스스로의 감정을 솔직하게 인정하고 서로를 받아들이는 걸로 영화는 마무리된다. 주인공들에게는 매우 훈훈한
상황, 스스로의 솔직한 감정을 인정하는 용기를 가진 여성들은 자신들이 사랑하는 이들과 행복해지는 시점을
맞이하는 걸로 이야기가 끝이 난다.
나는 왜 이 영화들을 본 것일까? 멋있게 이야기하면 ‘잘 만들어진 영화’라는 평이 있어 그걸 확인하려고 본 거다라고 말하고
싶다. 다시 한 번 물어봤다. 잘 만들어진 영화가 ‘캐롤’뿐이니? 동성애라서
본 거지? 영화를 봤으니 인정하자. 그렇다, 동성애라서 봤다. 또 물었다. 동성애라고
다 보는 거도 아니잖아, ‘브로크백 마운틴’이나 장국영이
나온 ‘해피 투게더’는 안 봤잖아? 맞다. 안 봤다. 같은
동성애지만 게이영화라서 안 봤고, ‘캐롤’은 레즈비언 영화라서
본거다. 물음은 계속된다. 만일 레즈비언 영화라고 하더라도, 비호감 외모를 가진(예를 들어, 허리둘레가
가슴보다 더 큰 비만인 여배우와 너무 마른 체형에 가슴이 거의 없는) 여배우가 출연했더라면 봤을 거
같애? 아니. 에드워드 호퍼의 그림에서 나옴직한 케이트 블란쳇(캐롤)과 자그마한 체구에 이목구비가 뚜렷한 루니 마라(테레즈)가 나눈 섹스 장면이 아름답게 그려진 영화, 그래서 좋았다. 나는 이야기가 재미있고 야한 영화가 좋다. 이런 걸 드러내놓고 말하기는 싫다, 천해 보이니까. 이런 말을 하면, 음흉한 눈빛을 가진 40대 중반의 아저씨로 보일 테니까. 물음의 성격이 조금 달라진다. 그렇게 보이는 건 싫어? 왜 싫어?
네가 아니면 되지, 그렇게 보인다는 게 왜 싫어? 난
내가 근사해 보이고 싶다. 타인의 광적인 추종은 아니지만, 내
말에 무게가 실리고, 내 말과 행동이 타인들에게 영향을 미칠 수 있으면 좋겠다는 욕망이 있다. 훌륭한 인물이고 싶은 욕구. 그런 욕구를 가지고 있는데, 음흉한 눈빛을 가진 중년의 아저씨로 보이고 싶진 않은 거다. 조금만
더 물어본다. 훌륭한 사람이 되고 싶다고 하는데, 그렇게
되기 위해서 어떤 고난과 고충을 감내할 수 있겠니? 쉽게 예를 들어 그렇게 되기 위해서 회사의 부당한
지시를 거부하고 행동할 수 있겠니? 할 말이 없어진다. 어느
지점부터 불편해진 거지? 그래 나는 타인의 시선을 너무 많이 의식하고 있다.
다시 영화 이야기로 돌아가보자. 주인공들은 그렇게 자신들이 사랑하는
사람들과 새로운 인생을 시작하는 지점에 다다랐다. 서로를 응시하는 장면으로 두 영화는 모두 끝이 났다. 주인공들이니까 그렇다 치자. 그렇다면 남은 사람들은? 주인공들을 둘러싸고 있는 주변인들은? ‘영화잖아’라고 무시한다면 주인공들의 변화, 성장, 성취도 무시되어야 하니, 그걸 핑계로 외면하는 것은 답이 아닌 듯
하다.
캐롤의 남편은 자신이 세상을 바라보는 시각이 왜곡되어 있는 것으로 그려져 있으니 무시하기로 하자. 테레즈를 애인이라 여기던 리차드는 그녀가 회사를 그만두고 캐롤과 여행을 떠나겠다고 하자, 말 그대로 광분한다. 테레즈와 여름에 프랑스로 여행가기 위해 배편도
예매를 하고, 테레즈와 미래를 생각했기에 좋은 직장까지 구하고 했음에도, 한 마디 자신과 상의하지도 않고 여행을 떠나는 테레즈에게 후회할거라는 폭언을 하고 떠난다. 리차드는 테레즈와 미래의 꿈을 꾸고 있었는데, 아무런 확답을 하지
않았던 테레즈는 떠난다. 리차드는 어떻게 견뎌야 하는 것일까? 영화에
어떠한 모습으로 그려지던, 남겨진 모습에는 고통을 동반한다.
Kyss Mig는 더 가혹하다. 예전에
커밍 아웃을 한 프리다. 그녀의 파트너인 엘린은 프리다의 외도에 분노한다. 그리고, 프리다가 그렇게 형편없는 사람인지 몰랐던 스스로를 책망한다. 문맥상으로 예전에 다른 이로부터 배신당했던 프리다는 같은 방식으로 파트너, 엘린을
배신하게 된 셈이다. 그리고, 자신이 이성애자라고 알았던
미아는 자신이 동성애자라는 것을 확인하고, 결혼 포기를 결정하자 그녀의 약혼자인 팀은 절망한다. 7년이란 시간 동안 미래의 아내로 생각하던 여자친구가 커밍아웃을 하고 떠나버리는 상황에서 눈물을 떨구던 장면은
너무 가슴에 와 닿았다. 파혼이 확정된 날, 공교롭게 결혼식
피로연 메뉴 프린트가 팀에게 배달된다. 이제 필요 없어진 메뉴 프린트로 하나씩 종이 비행기로 접어 자기
아파트에서 날리던 팀의 모습은 7년의 시간을 공중에 흩어버리는 느낌이었다. 절망. 절망.
왜 나는 캐롤/테레즈와 프리다/미아를
쫓아 스스로의 감정에 솔직해지는 용기에 감화되기 보다, 이들의 결정으로 인해 고통 받는 팀과 리차드의
캐릭터에 신경이 쓰이는 걸까? 미아가 스스로에게 솔직해짐으로써 자신을 찾은 반면, 그 대가로 약혼자 팀은 절망한다. 테레즈가 캐롤을 따라 서부로 여행을
떠나면서 리차드는 발악한다. 그런 주변인들이 계속 눈에 밟힌다. 또
묻는다, 왜? 당하는 사람,
즉 약자에 입장에 서는 게 멋져 보인다. 약자가 아니면서,
약자의 입장에 서서 코스프레를 하고 있지는 않은 건지, 멋있어 보이려고. 그 입장에 오롯이 서지도 못하고 그들의 편을 심정적으로만 지지하고 행동하지 않는 모습, 세월호 진상 조사를 요구하는, 국정교과서에 반대하는, 시민들의 모습을 SNS를 통해 접하면, ‘공유하기’나 ‘좋아요’를 누르기만 하면서, 이 또한 작은 행동이라고 ‘위안’하는 내 모습을 발견한다. 약자의
입장에 서있기만 하면 언제까지나 의로운 사람으로 보일 수 있으니까. 캐롤, 테레즈, 프리다, 미아가
보여주는 정직한 용기는 부럽지만 따라 할 엄두가 나지 않고, 찌질하게 팀과 리차드를 위로한답시고 그들을
신경 쓰고 있다. 참 못났다. 만일 내가 영화로 들어갈 수
있다면, 들어가서 리차드나 팀을 만나 위로의 말을 던진다면, 그들은
나에게 이렇게 받을 거 같다, 친절한 금자씨가 했던 말처럼. “너나
잘 하세요.”
짜임새있는 이야기가 있는 '야한' 영화를 좋아하는 내 모습과 약자 코스프레를 하면서 혼자 의로움에 취하려고 하는 내 모습, 이런 내 모습을 제대로 보는 것이 불편한 거였다. 결국 영화가 불편한 게 아니었다.
첫댓글 글을 맺기 전에 이 영화들에 대해 몇 가지만 더 쓴다.
하나. 영화 캐롤의 배경이 1952년 말에서 이듬해 4월까지다. 한반도에서는 정전협정 논의가 한창 진행되던 시기다. 그 시기에 미국 동부의 생활상은 그러했다는 것이다. 잘 사는 사람들과, 잘 살려고 노력하는 노동자들의 모습. 부럽다란 느낌이다. 일자리가 어디든 있어서 돈을 벌 수 있는 사회, 지금과도 대비가 되고, 그 당시를 기준으로 한국과도 대비가 되는 상황이 부러울 따름이다.
둘. 공항을 한 번이라도 경험을 해본 사람이라면 보안구역 때문에 탑승권과 여권이 없으면 탑승구쪽으로 접근이 불가하다는 것을 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나라 드라마나 영화에서는 그런 사실을 무시하고 비행기 표도 없는 주인공이 탑승구 바로 앞에서 비행기를 막 타려는 상대를 만나게 한다. 말도 안 되는 이야기지만 극적인 묘사를 위해 이해하고 넘어간다. 하지만, 스웨덴 영화 Kyss Mig의 끝부분에 공항 씬에서는 그러지 않았다. 스페인으로 떠나는 프리다를 미아가 공항가서 말리려고 애를 쓰는 장면, 프리다는 탑승구 앞에 서 있고, 미아는 달린다. 보안구역을 어떻게든 넘어가려 하지만, 거기서 좌절한다.
결국 표를 끊어서 스페인으로 프리다를 찾아가는 것으로 영화는 끝이 난다. 현실적이다. 그래서 좋다.
셋. 프리다의 전 파트너, 엘린은 인도계 여성이다. 즉, 버림받는 여성을 스웨덴 본토 사람이 아닌 인도계 여성으로 설정한 부분이 난 불편했다. 내가 보기엔 주인공인 미아, 프리다와 비교했을 때 매력이 상대적으로 떨어지는 외모였다. 편견에 바탕한 캐스팅을 한 건지, 아니면, 별 뜻 없이 캐스팅을 했지만 내가 유달리 쳐다보는 건지는 잘 모르겠다. 이런 부분에 대해서는 좀 둔감해졌으면 좋겠다.
(조만간 볼 예정인 영화, 보고 읽을 게요. ^^)
말로는 구분되는 것 같지만 현실에선 훌륭해 보이고 싶어하는 아저씨와 음흉한 중년 아저씨가 모순되지 않는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저는 캐롤이 야한 영화라고 생각하지 않았지만 레즈비언 섹스는 (다른 드라마나 영화보다) 낯설게 보이더라구요. 익숙한 두 배우가 그렇게 만나는 것을 제가 상상하지 못한 탓인 것 같습니다. 야하거나 낯설거나 아름답거나 불편한 것도 결국 음흉하거나 편견을 못 벗었거나 훌륭해 보이고 싶은 이들의 해석인 것 같습니다. 뵌 적은 없지만 중년의 남성으로 사는 것은 어떤 마음일지 궁금한 처자인지라 철수님의 글 재밌게 읽고 있습니다.
'40대 중반의 아저씨'와 '중년'은 같은듯 다른 느낌이네요. ㅎㅎㅎ
표리부동하면서도 표리부동해서는 안된다는 강박. 얼마전부터 그 강박에서 조금은 벗어나며 자기모순을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댓글 감사해요.
숫컷들의 사랑(브로크 백 마운틴),암컷들의 사랑(캐롤-저도 설에 봤습니다) 다들 아름답게 찍었드라구요.장모님 일로 뇌에 주목하여 뇌에관한 내용들은 관심을 가지고 읽고 있습니다. 지난 10년간 신경미학자들이 발견한 가장 위대한 성취는 "인간의 뇌는 미적 경험을 판단하는 뇌 영역이 따로 마련돼 있으며,아름다움을 보상이라 여기도록 디자인 되어 있어,인간은 생물학적으로 예술을 추구하도록 만들어졌다"는 것입니다.(정재승) 아름답게 보았으면 뇌가 그렇게 느끼게 감독이 잘만든 작품으로 느끼면 되는 거아닌가요.요즈음 LGTB에 대한 관심들이 많아 지면서 동성애 이성애 이런 논의들이 활발이 이루어 지는 것은 좋은 현상이라 보여집
니다. 남성의 여성화를 촉진하는 '클라인펠터 증후군'이라고 들어 보셨나요.인터섹스(INTERSEX)들어보셨나요?남성과 여성의 성기를 함께 갖고 태어났거나,둘중 하나도 아닌 상태이거나,잠재적으로 성기와 성징의 불분명 현상을 타고난 이들을 말합니다.완벽한 남성과 여성의 몸을 가진 이들은 없다는 거죠.남아프리카공화국 육상선수캐스터 세메냐는 2009년 세계육상선수권 여자 800미터 부문에서 우승하는 등 ,월등한 기량으로 남성호르몬 약용 복용을 의심받았지만 인터섹스 운동선수인 것을 부인하지 않았답니다.남성과 여성 사이에는 무수한 다양한 성이 존재한다는 것이죠.동양의 음양사상도 하나 속에 둘을 의미하거든요,사주에도 남자지만
음적인 기운이 많은 사람이 있고,여자경우도 음속에 양기운이 많은 분들이 있고,어렵습니다.
파파님의 관심영역은 어디까지일까 궁금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