혼돈 시기 피어난 ‘명작’ 영취산 설법도
당 패망 후 50년 오대십국 시기
혼란기에도 불교문화는 꽃 피워
둔황 제61굴 석실 〈법화경변상〉
법화경 가르침 상세하게 도상화
그림① 오대에 조성된 둔황 막고굴 제61굴 굴실 내부.
한 번 이룩된 문화는 비록 그것이 기인하는 왕조가 사라져도 끊임없이 이어져 가는 특징을 가지고 있다. 그 강성하던 당 왕조도 안사(安史)의 난(755~763) 이후 그 충격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결국은 세력을 잃게 된다. 907년 당나라가 망하고 959년 송(宋)이 들어서서 중국을 다시 통일하기까지 50여 년간을 중국 역사에서 ‘오대 시기’라고 부른다. 오대십국(五代十國)이 분열과 할거를 거듭하던 혼돈의 시기였지만 당대에 이룩된 찬란한 문화는 그 세력을 잃지 않고 계속 펼쳐졌다. 이 시기에 제작된 둔황 막고굴 제61굴(이하 61굴)의 〈법화경변상도〉를 통해서 당시의 불교문화 예술의 면면을 살펴보고자 한다.
이 시기 후당(後唐)의 장종(莊宗)은 과주(瓜州, 감숙성 안서현)와 사주(沙州, 감숙성 돈황현) 지역을 할거하고 있던 조의금(曹議金)을 사주자사(沙州刺史), 귀의군절도사(歸義軍節度使) 등의 지위를 부여해 이 지역을 공식적으로 다스리게 하였다.
이때 조 씨 일가에 의해 여러 새로운 석굴 사원이 개착됐다. 조의금은 제98굴을 그의 아들 조원덕(曹元德)은 제100굴을, 세 번째로 귀의군절도사에 등극한 조원심(曹元深)은 제256굴을 만드는 등 유례없이 큰 규모의 석굴들이 연달아 조성됐다. 그 뒤를 이은 조원충은 30여 년에 달하는 통치 기간 동안(945~974) 제55굴을 비롯해 제25·53·269·469굴 등을 발원하고, 둔황에서 멀지 않은 안서(安西) 유림굴(楡林窟)에도 석굴사원을 조영했다. 뿐만 아니라 많은 불화(佛畵)와 판화, 사경(寫經) 등도 발원하였는데, 장경동(藏經洞)에서 발견된 돈황유서(敦煌遺書) 가운데에 그 일부가 전하고 있다.
제61굴은 규모나 구조면에서 조원충이 발원한 제55굴과 대칭을 이루고 있다. 두 굴 모두 작은 전실(前室)과 짧은 복도, 그리고 광대한 규모의 주실(主室)로 이뤄져 있다. 현재 전실은 무너져 짧은 복도를 통해서 바로 주실로 들어갈 수 있게 조성됐다. 굴 안으로 들어가면 눈앞에는 바로 큰 단이 펼쳐지고, 주위의 벽은 다양한 벽화들로 가득 채워져 있다. 좌우 벽 상부에는 각종 경전을 도해한 〈경변상도(經變相圖)〉가, 그 아래에는 48명이나 되는 공양인(供養人)의 모습이 빼곡이 그려져 있다. 공양인들 앞에는 방제(旁題)가 있어 각각의 이름을 알 수 있다. 제61굴은 10세기 전반, 조원충의 부인인 적씨(翟氏)가 시주해 만든 굴이다.(그림①)
굴 가운데에 큰 불단을 두고 불단 뒤쪽으로 천정까지 닿는 높은 배병(背屛)을 설치하는 방식은 이 시기에 만들어진 다른 석굴에서 종종 찾아볼 수 있다. 다른 굴과 차별되는 제61굴만의 특징은 바로 배병 측벽에 그려진 벽화이다.
막고굴 제61굴 〈법화경변상(法華經變相)〉의 형성과 발전은 앞서 살펴보았던 일련의 〈정토경변상〉과 시기적으로는 궤를 같이한다. 마치 남인도의 아마라바티 스투파에 설법부조와 같이 제61굴 〈법화경변상〉은 서사적인 기능을 가지고 요잡(繞動)을 행하던 신자들이 경전의 내용을 읽어나갈 수 있도록 좌우 측벽에 봉안한 것으로 보인다.
제61굴 〈법화경변상〉의 내용과 그 특징을 비교해보면, 설법회를 이끄는 주존 석가모니불이 직접 표현되었으며, 또한 〈법화경(法華經)〉 경전에 담긴 교의에 중점을 두고 화면을 구성했다. 이 그림을 그린 화가(츐師)는 〈법화경〉의 풍부한 내용 중 어느 것을 선택해 그림으로 표현할 것인가, 그리고 그것들을 어떻게 유기적으로 구성할 것인가에 대해 다양한 방식으로 인물을 배치하여 도상적 틀을 갖췄을 것이다.
제61굴 〈법화경변상〉은 형식적으로는 정형화되는 추세를 보이고 있다. 전반기 〈정토변상〉과 같이 새로운 도상을 창출하기보다는 주악이나 무용 장면을 좀 더 강조하여 화면 하단에 삽입하는 등 정형화가 이루어지고 있다. 대신에 화면을 구성하는 〈법화경〉 경전의 내용들 사이에 유기적 구성이 더욱 치밀해졌다. 오대(五代, 907~960)에 제작된 막고굴 61굴 남벽의 〈법화경변상〉은 이처럼 정형화된 변상의 대표적인 예이다.
먼저 화면의 중앙을 살펴보면, 중앙의 큰 아치 모양의 반원형 내에는 석가모니불과 좌우에 문수보살과 보현보살이 협시하고 있다. 그 주위에는 보살 및 호법신장, 그리고 사부대중이 설법회에 참석하였다. 석가모니 삼존불 뒤에는 우뚝 솟은 산세가 이어져 이것이 산상설법(山上說法), 즉 영취산 설법임을 알려준다. 영취산 설법회 장면 바로 아래에는 부처님이 오른쪽으로 돌아누우신 가운데 침상 왼쪽에서 불을 지펴 화장을 준비하고, 주위에는 제자들이 오열하며 비통해하는 장면을 묘사했다. 이는 지난 연재의 〈열반경변상도〉 장면을 차용해 〈방편품(方便品)〉을 묘사한 것이다. 즉, 여래가 화장되고 입멸하신 그 열반의 순간 또한 방편의 일환임을 경(經)에서는 밝히고 있다.
그렇다면, 이 방편은 어떤 모습으로 그려졌을까? 경전에서 제시하는 것은 ‘법화칠유(法華七喩)’로 대표된다. 제61굴 〈법화경변상〉에서는 이와 관련한 도상들을 화면 하반부에 배치했다. 먼저 〈방편품〉을 나타내는 〈열반도〉 바로 아래에는 〈비유품〉의 장면이 묘사됐다. 향우(左)측 에는 △〈신해품(信解品; 가난한 아들의 비유)〉 △〈양초유품(藥草喩品)〉 △〈화성유품(化城喩品)〉과, 그 향좌(右)측에는 △〈안락행품(安樂行品; 전륜성왕 머리 속의 보배구슬 비유)〉 △〈여래수량품(如來壽量品; 양의양약의 비유)〉의 내용을 묘사했다. 이러한 비유들은 여래가 중생의 근기에 따라 방편을 달리해 제도하심을 설명하는 것을 도해한 것이다.
그러면 제61굴 〈법화경변상〉 그림 속에서는 중생을 위해 드러내고자 하는 궁극적 진리의 경계는 무엇일까? 중앙의 영취산 설법회 바로 위에는 중국의 목조 전각 형식과 유사한 도상이 눈에 띤다. 탑 내부에는 두 분의 부처님이 나란히 앉아 설법을 나누고, 시방세계에서 여러 불·보살들이 법회에 참석하고자 찾아와 두 여래의 설법을 듣는 장면이다. 이것이 이른바 ‘허공회’를 표현한 것으로, 이 장면은 〈법화경〉 ‘견보탑품’의 내용으로 다보여래가 석가모니불의 〈법화경〉 설법이 진리임을 증명하는 장면이다. 〈법화경〉은 ‘견보탑품’을 기점으로 설법의 무대와 내용이 전환된다.
경의 후반부는 줄곧 땅에서 500유순이나 솟아오른 칠보탑 안에서 석가·다보 여래가 함께하는 ‘허공회’ 설법이며, 방편이 아닌 대승설법의 교의를 직접적으로 설한다. 이때 깨달은 자로서 불타의 존재는 〈법화경〉을 매개로 영속적이고 두루한 법신으로 회향한다. 이것은 화면에서 정확히 석가모니 영취산 설법회 하단에 배치된 ‘방편품’의 내용, 즉 화장되고 소멸될 불타의 몸이라는 관념과 대치하고 있다.
그림② 둔황 막고굴 제61굴 남벽 동측에 있는 〈법화경변상〉
제61굴 〈법화경변상〉 화면에는 영취산 석가모니 설법회를 이루는 반원형 경계의 외연을 따라 무수한 보살들이 구름을 타고 상승하고 있다. 우선 반원형 경계의 향 우(左)측 하단을 살펴보면, 세 개의 봉우리로 표현된 산지로부터 몸을 반쯤 드러낸 보살들의 행렬이 시작된다. 다시 향 좌(右)측 하단을 보면, 녹색 수면으로부터 보살들이 구름을 타고 솟아오르고 모습이다. 이 구도는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스토리가 전개되며, 각각의 무량한 시간을 거쳐 석가모니불과 문수보살의 〈법화경〉 설법을 수지해 온 무수한 보살들이 땅(종지용출품)과 바다(제바달다품)에서 용출하는 장면을 묘사한 것이다. 보살마하살이 미래의 성불을 수기받은 자이자 법신, 즉 〈법화경〉을 수지, 호념, 홍포, 설법할 주체로서 무대의 주인공으로 부상하는 그 순간이다.(그림②)
화면의 상단부에서 ‘허공회’의 주변 공간들은 곧 〈법화경〉을 수지 독송하는 공덕을 찬양하고, 〈법화경〉을 호념하고 설법하는 보살들에 대한 내용으로 채워져 있다. 이들은 온갖 멸시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끊임없이 중생의 불성을 일깨우고(상불경보살품), 〈법화경〉의 수지 및 설법을 맹세하며(권지품), 〈법화경〉의 홍포를 독려하며(수희공덕품), 〈법화경〉을 수지, 독송하는 이들을 수호한다.(다라니품, 관세음보살품, 약왕보살본사품, 묘장엄왕본사품 등)
이와 같은 제61굴 〈법화경변상〉의 구성은 중앙의 축을 따라 배치된 견보탑품·종지용출품·제바달다품·서품·방편품·비유품 등은 중당(中唐, 781~848) 이후 점차 정형화됐다. 물론 이 그림을 그린 화가는 경전의 내용을 치열하게 참구(參究)와 고민을 거쳐서 제작했을 것이다. 그렇다면 이러한 형식의 정형화가 이루어진 원인은 과연 무엇이었을까?
이는 혹자의 말대로 ‘예술적 창의성 저하’로 보기보다는 당시 막고굴 조각상과 벽화의 봉안 방식에 있을 것으로 보인다. 막고굴은 수·당대부터 조각상과 벽화가 혼합된 양상으로 봉안됐다. 이것은 사찰 법당으로 생각하면 중심 예불대상으로서 우선 조각상을 봉안하고, 다음 회화는 공간적 제약상 조각상으로 봉안하지 못하는 다른 존상들을 마치 조각상을 대신하듯이 시각적으로 묘사하고 있다는 점을 들 수 있다. 드물게는 정벽 감실에 조각상을 배경으로 묘사된 경우도 있지만, 대체로 석굴안에 봉안된 다른 〈정토변상〉과 같이 설법회 장면을 묘사한 도상의 영향을 받아 시각적 통일성 및 벽화제작의 효율성을 위해 봉안됐을 것이다.
이를 통해 〈법화경〉에서 설파하는 방편바라밀과 지견바라밀의 관계가 더욱 명확해지고, 경전 내용은 제61굴 〈법화경변상〉에서 더욱 더 함축적으로 구현해 내었을 뿐 아니라, 입체적이고 유기적으로 재구성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