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나천서(羅天瑞) 연보
나천서(羅天瑞, 1332년경 충혜왕(忠惠王) 2년 생~1398년경 조선 태조 7년 5월 22일경 몰; 향년 67세)
고려 시대 후기 절신
진무•문하시중 평장사•삼중대광 문하시중•안천군 안정백 역임
고려 시대 후기 경북 의성 출신 재상
신라 시대 부자(父子) 재상 나인(羅認)•나천업(羅千業)에 이은 제3의 고려 재상
고려 재상 삼형제(三兄弟) 문하시중 나천서(羅天瑞)•재상 나원서(羅元瑞)•문하시중 나문서(羅文瑞)의 첫째 아들
조선 시대 영남의 도덕 가문(道德家門)의 시조
이칭 안정백(安定伯), 안천군(安川君) 봉작•봉군
고려조 공민왕의 요동 정벌 당시 군사 1만 5천 명을 아사(餓死) 위기로부터 구한 인물
나식(羅湜)•나숙(羅淑)•나익(羅瀷)으로 대표되는 조선의 성리학자 가문의 선조
신라 나천업•조선 유성룡과 함께 재상을 지낸 경북 의성 출신의 대표적인 삼정승
두문동72현(1783년 개성 성균관 표절사 위패 120인의 1인, 두문동 정절실 정절반 봉안)
본관 안정(安定) 경북 의성군 안계면 안정 2리
안정(安定) 나(羅) 씨 중시조
자 정백(定伯)
처 동복(同福) 오(吳) 씨
자녀
1남 4녀
1남 합문지후 승봉랑 나직경(羅直卿; 고려 후기 문신, 1392년 고려 멸 후 안정현 은거, 처 해평(海平) 길(吉) 씨, 묘역: 경기도 남양주시 오남읍 양지리 산 62-8번지(구 삭단리), 묘비명: “고려 합문지후 나공 직경지묘”(군부인 해평 길 씨 부좌)(후손 나상규(羅相奎) 건립))
4녀
선조
신라 정승 군위인 나인(羅認, 서기 800년대; 나천업의 부친)
신라 정승 안정인 나천업(羅千業, 서기 800년대; 나인의 아들)
여러 안정인 선조들
3형제
고려조 안정인 문하시중 안정백 나천서(본인)
고려조 상주인 재상 상산백 나원서(둘째 동생)
고려조 군위인 문하시중 적라백 나문서(셋째 동생)
1세손~4세손 독자 승계
1세손(아들) 합문지후 나직경
2세손(손자) 보성군수 나휘(羅暉)
3세손(증손) 죽산현사 나경손(羅慶孫)
4세손(고손) 양산군수 나유선(羅裕善)
5세손 나계종(羅繼宗), 나연종(羅延宗), 나사종(羅嗣宗, 1440년 생~1491년 몰)
6세손 나세걸(羅世傑), 나운걸(羅○傑, 1456년 생~1493년 몰), 사마참봉 나신걸(羅臣傑, 1461년 생~1524년 몰)
7세손 나옥(羅沃)•나식•나숙•나익•나윤(羅潤) 5형제, 나빈(1473년 생~1495년 몰)•나린(1475년 생~1495년 몰) 2형제
8세손
9세손 평산부사 나급(羅級)
10세손 공조참의 나만갑(羅萬甲)
11세손 해주목사 나성두(羅星斗)
12세손 공조좌랑•충청도사 나양좌(羅良佐), 유학자 나석좌(羅碩佐, 1652년 생~1698년 몰)
1332년경 경북 의성군 안계면 안정리 출생
1353년경 동복(同福) 오(吳) 씨(1336년생)와 혼인
1355년경 1남 나직경 출생
1360년경 1녀 출생
1362년경 2녀 출생
1364년경 3녀 출생
1369년 공민왕(恭愍王) 18년 12월 고려 시대 후기 공민왕이 이성계(李成桂)를 동북면(東北面) 원수(元帥), 지룡수(池龍壽)를 서북면(西北面) 원수로 임명하고 만주 요동 수복을 위해 군사 1만 5천 명으로 동녕부 공격
1370년 공민왕 19년 8월 이후 2차 동녕부 정벌에서 11월 요양성(遼陽城)을 점령한 후, 겨울 추위와 식량 부족으로 군사를 되돌려 송참(松站)에 이르러 군사 전체가 아사 위기에 직면했다. 이에 진무(鎭撫) 나천서(羅天瑞)가 곡식 수 백석을 제공해 군사를 살렸다. 그 공로로 문하시중에 임명되었고, 안정백 겸 안천군에 봉작 및 봉군되어 안정현을 식읍(食邑)으로 안천군에 봉해졌다. 4녀 출생
1392년 고려 멸 후, 아들 나직경과 함께 안정으로 귀향해서 야은(冶隱) 길재(吉再)와 함께 금오산에 은거
1397년 조선 시대 전기 태조 6년 두문동 화재 및 두문동 선비 참살 사건. 정몽주, 길재(吉再, 1353년 공민왕 2년~1419년 세종 1년) 등과 같이 두문동72현(杜門洞七十二賢)으로 위패가 모셔졌다.
1398년 5월 22일경 사망 연도 미상. 두문동72현 사건 후에 안정리 해망산에 안장되었다는 추정이 있지만, 확실한 사망 연도는 알려져 있지 않다. 금오산에 같이 은거한 야은 길재가 1419년 세종 1년까지 생존한 것으로 보아 두문동72현 사건과는 무관한 것으로 추정된다. 현재는 1398년 5월경 사망한 것으로 추정하고 있지만, 길재와 마찬가지로 더 오래 생존했을 가능성도 있다. 향년 67세
묘역
두문동 72현 사건으로 서거 후, 경북 의성군 안계면 안정리 산 43번지 해망산(海望山) 계좌(癸坐) 안장(처 동복 오 씨와 쌍분 합장)
묘비명
제1 구묘비. 고려 시중 안천군 나공 천서지묘
제2 구묘비. 고려 시중 안천군 나공 천서지묘
신묘비. 고려 삼중대광 문하시중 안정백 나공 위천서지묘(배위 부부인 동복 오 씨 부좌)
1475년 후손 양산군수 나유선(羅裕善) 서거. 나유선의 셋째 아들 나사종이 부친 상여 행차로 청주 비흥리 옛집에 당도
1486년 후손 경흥부사 나사종이 여진족과 싸우다 전사
1658년 효종 9년 후손 나만갑을 기념하는 “나만갑신도비” 건립
1683년 나만갑의 둘째 손자 나양좌가 나만갑의 묘역 이장
1970년 안정 나 씨 종친회에서 청주 사당 홍양사 건축 발의
1972년 9월 4일 미시(오후 1~3시) 사당 홍양사 대들보 상량(삼세충효문 충신문과 삼효문); 충북 청주 홍양사(鴻陽祠)에 안정 나 씨 6인 위패 봉안
1977년 충북유형문화재 제41호 지정
1978년 국비, 도비, 군비 보조로 건축 완성. 정문 경의문, 홍살삼문, 모충당, 홍양사묘정비, 안정 나 씨 삼세충효비, 충신문, 삼효문, 충의문, 박선이이춘금충의비 배치
1997년 11월 충남 대전 중구 소재 뿌리공원 개장. 나주 나 씨 조형물 “도약과 번영”(라영태 작), 금성 나 씨 조형물 “귀선”(이동범 작), 안정 나 씨 조형물 “몸과 지체”(나상길 작) 설치.
2023년 안정 나 씨 회덕파 6세손 사마참봉 나신걸을 기념하는 안정 나 씨 회덕파 참봉공 종중묘원 나신걸 묘역 정비; 5월 9일 오전 11시 「현존하는 최고(最古)의 ‘나신걸 한글편지’ 보물지정 기념 고유제」가 충북 보은군 탄부면 매화리 산12-1번지 안정 나 씨 회덕파 선영에서 안정 나 씨 대종회 주최, 회덕파 참봉공 종중 주관, 『동양일보』 후원으로 개최
배향
충북 청원 홍양사 배향(안정 나 씨 6인 위패)
두문동서원 두문동72현 120인의 절신(絶臣) 1인으로 배향
* 본관 안정(安定): 본관 안정(安定)은 경북 의성군 안계면 안정리에 소재하며, 지역 명칭은 신라 시대 아시혜(阿尸兮), 아을혜(阿乙兮)였고, 757년 신라 시대 경덕왕 16년 안현현(安賢縣)이었으며, 940년 고려 시대 태조 23년 안정현(安定縣, 安貞縣)이었고, 1421년 조선 시대 세종 3년 안정현과 비옥현을 통합한 안비현(安比縣)이었으며, 1423년 조선 시대 세종 5년 비안(比安)으로 개칭되었다(「안정 나씨」, 『위키백과』 참조).
* 홍양사: 1970년 안정 나 씨 종친회에서 사당 홍양사의 건축이 발의되었고, 1972년 9월 4일 미시(오후 1~3시) 사당 홍양사 삼세충효문 충신문과 삼효문의 대들보가 상량되었으며, 충북 청주 홍양사(鴻陽祠)에 안정 나 씨 6인 위패가 봉안되었다. 1977년 충북유형문화재 제41호로 지정되었다. 1978년 국비, 도비, 군비 보조로 건축물을 완성하고, 정문 경의문, 홍살삼문, 모충당, 홍양사묘정비, 안정 나 씨 삼세충효비, 충신문, 삼효문, 충의문, 박선이이춘금충의비 등이 배치되었다. 충북 청주 안정 나 씨 사당 홍양사는 충북 청원군 내수읍 비중리 110-1번지에 소재하며, 시조 안천군 나천서, 충정공 나사종, 장음정 나식, 정음(淨陰) 나숙(羅淑, 출생 연도 미상~1546년), 구포(鷗浦) 나만갑(羅萬甲), 명촌(明村) 나양좌(羅良佐) 등 안정 나 씨 6인의 위패를 모셨다.
* 나정승(羅政丞) 이야기: 경북 의성군 단밀면 위중 1, 2리는 옛 단밀현 나 씨 토성(土姓)의 봉토였으며, 나 씨는 경북 지역의 토착 성 씨였다. 나 정승은 신라 시대 서기 8백년대 신라 정승 나인(羅認)과 신라 정승 나천업(羅千業) 부자 재상과 또한 고려 시대 재상 삼형제 문하시중 나천서, 재상 나원서, 문하시중 나문서 등 여러 인물들이 있지만, 그 가운데 현재는 단밀면 부근에는 신라 정승 나천업유허비와 나천업의 묘역 그리고 나 정승을 기리는 나정(羅亭)이 있거나 그 흔적이 남아 있다. 현재 나천업유허비는 소실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나천서의 둘째 동생 나원서가 상산백(상주의 옛 지명)을 봉토했으며, 그 지역 상산고을 단밀면 위중1리 저곡(渚谷)마을과 용곡1리 도리비마을에 나천업의 묘소, 나천업유허비, 나정이 있었다. 나천업의 묘역은 경북 의성군 점곡면 사촌(경북 의성군 단밀면 위중1리 저곡마을)에 소재하며, 나정도 저곡마을 부근에 소재하고, 나천업유허비는 경북 의성군 단밀면 용곡1리 도리비마을에 소재했다. 신라 정승 나천업은 문창후 고운 최치원의 장인이었으며, 문창후 최치원보다 높은 최고위 정승에 자리하고 있었다. 조선 시대 먼 후손 나만갑이 이곳을 찾아 묘역을 증축 정비하고 사초를 하며 조상을 추모했다는 역사적 기록이 남아 있다. 한편, 나천업의 부친 신라 정승 나인은 경북 비안 출신이며, 묘역은 경북 비안군 북쪽 15리 해망산(海望山)이다. 한편, 군위인으로 알려진 신라 정승 나인과 안정 나 씨 시조 나천서는 둘 다 안정 해망산에 묘역이 있다. 경주 최 씨 족보인 『경주최보』(慶州崔譜)에는 최치원이 857년 생이며, “문창후 최치원의 부인은 나 정승 업(業)의 여식이다”(崔致遠文昌侯配羅氏政丞業之女)라고 기록되어 있다고 한다. 이 기록으로 나천업이 서기 800년대 신라 시대 인물임을 알 수 있으며, 나만갑 등의 안정 나 씨 후손들이 그들의 묘역을 관리한 것을 알 수 있다. 현재는 경북 의성 단밀면 위중리와 용곡리 등 저곡마을 나 씨 토성(土姓) 지역에는 나 씨가 거의 남아 있지 않다고 한다.
* “고려의 유(有) 삼나(三羅)”: “고려의 유(有) 삼나(三羅)”는 고려 시대 후기 공민왕조 나 씨 재상 3형제 나천서, 나원서, 나문서를 가리킨다. 세 인물 모두 안정인이었으며, 첫째 형 나천서는 문하시중 안정백(안정)에 봉해졌고, 둘째 동생 나원서는 재상 상산백(상주)에 봉해졌으며, 셋째 동생 나문서는 문하시중 적라백(군위)에 봉해졌다. 이들 중 나천서는 안정 나 씨 시조가 되었으며, 나문서는 군위 나 씨 시조가 되었다. 또한 1392년 고려 멸 후, 나천서는 길재와 같이 금오산으로 은거하기도 했으며, 나천서의 독자 아들 나직경의 처가 해평 길(吉) 씨였으며, 나천서의 손녀 역시 야은 길재의 손자와 결혼함으로써 길재의 손자가 나천서의 손녀사위(孫壻)가 되는 혼인 관계를 맺기도 했을 정도로 친분이 두터웠다.
* 안정나씨삼세충효비: 안정 나 씨 사당 홍양사가 소재한 충북 청원군 북일면 비중리는 안정 나 씨 세거지이다. 1475년 나사종이 부친 양산군수 나유선의 상여 행차로 청주 비흥리 옛집에 당도했다는 기록이 있다. 홍양사의 삼세충효문에는 삼세충효비가 세워져 있다. 그 유래는 1486년 경흥부사 나사종이 여진족과 싸우다 전사하자, 나사종의 아들 나운걸이 여진족과의 전쟁에 백의종군했으나 부친의 원수를 갚지 못하고 부친 나사종의 3년상을 마치고 자결했다. 나운걸의 아들 나빈과 나린 형제가 여진 정벌에 나섰으나 다시 실패했고 부친 나운걸의 3년상을 마치고 자결했다. 한 가문에서 3대에 걸쳐 4인의 죽음이 연이어지자 조선의 충효의 표상이 되었고, 이들을 기념해 나사종에게 시호 “충정”이 하사되었고, 나운걸과 나빈•나린을 기념해 삼효문이 세워졌다. 나사종의 주검을 끌어안고 울다가 여진족에게 죽임을 당한 관기 박선이와 아복 이춘금을 기념한 “박선이이춘금충의비”가 홍양사에 세워졌다. 또한 홍양사 경내에는 “안정나씨삼세충효비”가 세워져 있다(연숙자, 「24. 안정 나씨」, 『충청타임즈』 참조).
* 우리나라 최초의 한글 편지 저자 안정 나 씨 6세손 사마 참봉 나신걸: 「현존하는 최고(最古)의 ‘나신걸 한글편지’ 보물지정 기념 고유제」가 2023년 5월 9일 충북 보은군 탄부면 매화리 산 12-1번지 안정 나 씨 회덕파 선영에서 안정 나 씨 대종회 주최, 회덕파 참봉공 종중 주관, 『동양일보』 후원으로 개최되었다. 안정 나 씨 회덕파 6세손 사마 참봉 나신걸을 기념하는 안정 나 씨 회덕파 참봉공 종중묘원 나신걸 묘역이 정비되었으며, 나신결 묘비명은 “사마참봉 안정 나공 위신걸지묘(배위 신창 맹 씨, 배위 은율 송 씨 삼합폄)”이다.
* 조선의 두 나 씨 나식•나숙 형제와 조선의 성리학자 가문 삼형제 나식•나숙•나익: 조선의 두 나 씨 나식•나숙 형제와 조선의 성리학자 가문 삼형제 나식•나숙•나익(羅瀷, 1507년~1537년)을 낳고 가르친 아버지 창릉참봉•증 사헌부지평 나세걸(羅世傑)은 자녀 5남 1녀를 두었다. 1남 남대사직 나옥(羅沃), 2남 참봉 나식, 3남 부제학 나숙, 4남 한림 나윤(羅潤), 5남 부사 나익이 그들이다. 이들은 모두 조선의 훌륭한 성리학자로 성장했다고 한다. 나세걸은 고려조 승봉랑 합문지후 나직경의 후손으로서, 고조부 보성군수 나휘(羅暉), 증조부 죽산현사 나경손(羅慶孫), 조부 양산군수 나유선(羅裕善), 부 한성부참군•증 통례원인의 나계종(羅繼宗)의 직계이다. 나세걸의 처는 풍양(豐壤) 조(趙) 씨 대사헌•공조참판 조익정(趙益貞)의 여식이며, 나세걸의 묘역은 풍양현 삭단리(경기도 남양주시 오남읍 양지리)에 소재한다.
* 안정(安定) 나(羅) 씨: 안정 나 씨는 중시조가 고려 공민왕조 문하시중 안정백을 역임한 나천서(羅天瑞)이며, 나천서는 금성 나 씨 시조 나총례의 11세손으로 안정 나 씨를 금성 나 씨의 분적 계통으로 보기도 하며, 신라 시대 800년대 이후 최치원(崔致遠) 활동기에 부자(父子) 재상을 지낸 나인(羅認)의 묘역을 안정 나 씨 후손 나만갑(羅萬甲)이 사초하고 증축했다는 역사적 근거로 나인이 안정 나 씨의 직계 조상이며 안정 나 씨의 먼 시조라고 보기도 한다. 현재는 신라 정승 나인은 군위 나 씨 원조로 분류된다. 나주 나 씨가 금성 나 씨에서 분적되었고, 안정 나 씨, 수성 나 씨, 군위 나 씨, 비안 나 씨 등도 금성 나 씨의 분적이나 분파에 불과하다는 설과는 달리, 나 씨 각 성 씨들이 각기 다른 본관으로 분리되어 오랜 역사를 존속했다는 이론이 가능하다. 그러나 나 씨 각 본관 성 씨들이 시대에 따라 동향(同鄕)이나 혼인 관계로 서로 활동을 같이 하기도 하는 것으로 보아 각 성 씨들이 독립된 계통인가가 중요하진 않다는 건 확실하다.
중시조 나천서에게는 둘째 동생 고려 재상 나원서(羅元瑞)와 셋째 동생 고려조 문하시중 군위 나 씨 시조 나문서(羅文瑞) 3형제가 있었다. 삼형제가 모두 고려 재상을 역임했으며, 그중 둘이 안정 나 씨와 군위 나 씨의 시조가 되었다. 나천서의 고손(高孫) 양산부사 나유선(羅裕善)에게는 아들 3형제가 있었으며, 맏아들 한성부참군 나계종(羅繼宗), 둘째 아들 청산현감 나연종(羅連宗), 막내아들 선전관•증 병조판서 나사종(羅嗣宗) 등이 있었고, 이들이 안정 나 씨 가문을 번성케 하는 데 크게 기여했다.
안정 나 씨의 중시조인 나천서의 선조들에는 서기 8백년 대 신라 시대 최치원 활동기 신라 부자(父子) 정승 나인(羅認)과 나천업(羅千業)이 있다. 나천업은 나인의 아들이자 문창후 최치원의 빙부(聘父, 장인)이기도 하다. 경주 최 씨 족보인 『경주최보』(慶州崔譜)에는 최치원의 처가 최치원의 장인 나 씨 정승 업(業)의 여식으로 기록되어 있다고 한다(“崔致遠文昌侯配羅氏政丞業之女”). 이들 가운데 나인과 나문서는 군위 나 씨 2정승이며, 나천업과 나천서는 안정 나 씨 2정승이라고 한다. 나인, 나천업, 나천서, 나원서, 나문서를 나 씨 5정승이라고 부른다. 중시조 나천서는 신라 때 나천업, 고려 나천서, 조선 유성룡으로 이어지는 경북 의성 출신 3정승에 해당하며, 안정인 출신으로는 그 외에도 신라와 고려 때 나인과 나원서, 나문서 등의 여러 재상들이 있었다.
안정 나 씨 중시조에 해당하고 영남 나 씨 가문 3정승에 해당하는 나천서의 묘지는 오랜 기간 실전되었다가 후에 후손들에 의해 수소문 끝에 꿈을 꾸고 해몽으로 찾았다는 설도 있다. 시조 묘역의 위치는 안정리 해망산 부근이며, 신라 선조 나인과 나천업도 안정 지역 출신이었고, 고려 조상 나천서 3형제도 안정 지역 출신이라는 사실은 분명하다. 안정리 부근은 본래 나 씨가 개척해 봉토했으며, 후에 나 씨, 신 씨, 손 씨가 세거지로 함께 살았다고 하며, 현재는 신 씨가 일부 남아 있고 손 씨는 한 세대 정도 남아 있다고 한다. 고려조 참의정승 나윤의 자제들로서 고려조 재상 3형제 가운데 첫째 아들 나천서는 공민왕조 문하시중 안정백 안천군에 봉토하고 안정 나 씨 시조가 되었으며, 둘째 아들 나원서는 고려 재상으로 상산백(商山伯, 옛 상주 지명)에 봉토되었고, 셋째 아들 나문서는 고려조 문하시중을 역임했으며 적라백(赤羅伯, 옛 군위 지명)에 봉토되어 군위 나 씨의 시조가 되었다.
나천서를 중시조로 한 안정 나 씨는 4대조를 독자(獨子)로 이었으며, 5세손 양산부사 나유선(羅裕善)에 이르러 삼형제 1자 한성참군 나계종, 2자 청산현감 나연종, 3자 경흥도호부사•증 병조판서 나사종으로 경파, 회덕파, 청주파로 3분되면서 안정 나 씨 가문이 번성하기 시작했다. 안정 나 씨는 나세걸의 자손에 이르러 영남의 성리학자 가문으로 뿌리를 굳건히 했다. 을사명현 “조선의 두 나 씨” 나식과 나숙, 조선 영남의 성리학자 가문 나식, 나숙, 나익 삼형제를 두었다. 안정 나 씨는 증 좌의정 나만갑 대에 이르러 정엽의 사위로 혼인 관계를 이루었으며, 여러 명문 가문들과 혼사를 왕성히 하면서 명문 가문으로 자리를 잡았다. 또한 나양좌 대에 이르러서는 소론으로 정파를 분명히 하기도 했다. 안정 나 씨 시묘는 경북 의성군 안계면 안정동 계좌에 소재하며, 안정 나 씨 대종회관은 충남 대전시 서구 월평동 227번지에 소재한다.
나 씨의 본관은 전국 총 55개로 산재해 있다고 하며,대표 본관은 나주, 금성, 안정, 군위(軍威), 수성(壽城), 의성(義城), 비안(比安), 정산(定山) 등이다. 안정 나 씨 시조는 고려 공민왕조 문하시중 나천서이며, 1세손 합문지후 나직경, 2세손 보성군수 나휘(羅暉), 3세손 죽산현사 나경손(羅慶孫), 4세손 양산군수 나유선(羅裕善), 5세손 나계종, 나연종, 나사종 3형제, 6세손 나세걸, 7세손 나식, 나숙, 나익 외 5형제, 9세손 평산부사 나급(羅級, 1552년~몰년 미상), 10세손 공조참의 나만갑(羅萬甲)으로 계보가 계승되었다.
특히, 나만갑은 안정리 해망산의 나인의 묘역을 몸소 사초하고 증축하는 등의 효성이 지극한 행동을 했고, 이는 신라 말 부자 정승이 안정 나 씨의 직계 조상임을 입증하기도 한다. 10세손 성균관전적•사헌부감찰•호조좌랑•성균관직강•형조참의•홍문관교리•형조참의•증 좌의정 구포 나만갑을 기념하는 나만갑신도비가 1658년 효종 9년 세워졌다. 비문의 글은 좌의정 김상헌이 썼고, 송준길이 글씨를 썼으며, 김수항이 비문을 새겼다. 나만갑신도비는 1683년 나만갑의 둘째 손자 나양좌가 묘역과 함께 이전했다. 나만갑신도비는 경기 시도유형문화재 제126호이다. 나만갑의 둘째 손자 나양좌는 해주목사 나성두의 아들이며, 희릉참봉, 동몽교관, 상의원, 주부, 평강현감, 공조좌랑, 충청도사, 삭령군수 등을 역임하고 1687년 영변으로 유배되었던 안정 나 씨의 인물이다(「김진우의 족보이야기」 참조).
* 안정 나 씨 주요 인물: 안정 나 씨 주요 인물에는 중시조 나천서의 6세손 경흥부사(1486년)•추증 병조판서 나사종(羅嗣宗, 1440년~1491년; 시호 충정(忠貞)), 선릉참봉•을사명현 나식(羅湜, 1498년~1546년; 호 장음정, 창릉참봉•증 사헌부지평 나세걸(羅世傑)의 5남 1녀 중 둘째 아들), 부교리•교리•사헌부장령•직제학•부제학•승지•을사명현 나숙(羅淑, 출생연도 미상~1546년; 창릉참봉•증 사헌부지평 나세걸(羅世傑)의 5남 1녀 중 셋째 아들), 병조좌랑•성균관전적•한산군수•공주목사•평산부사•추증 도승지•추증 영의정 나급(羅級, 1552년~1602년), 병조정랑•사헌부지평•홍주목사•형조참의 나만갑(羅萬甲, 1592년~1642년), 이산현감•해주목사 나성두(羅星斗, 1614년~1663년), 한성좌윤•정주목사•영흥부사•함경남도병마절도사•삼도통제사 나홍좌(羅弘佐, 1649년~1709년), 조선 후기 서예가 형제 진사•헌릉참봉•정릉참봉•동몽교관•의금부도사•연천현감•함창현감•익위•돈녕부정•위솔 나열(羅烈, 1731년 영조 7년~1803년 순조 3년)•나걸(羅杰) 등이 있고, 현대의 인물들에는 청주시장 나기정(羅基正), 방송 PD 나영석(羅暎錫) 등이 있다(「안정 나씨」, 『위키백과』 참조).
* 군위 나 씨: 군위(軍威) 나 씨의 본관 군위는 경북의 중심 지역에 위치하며, 신라 시대 노동면현(여두멱)이었으며, 757년 통일 신라 경덕왕 16년 군위현으로 바꾸고 숭선군(선산)의 속현으로 삼았으며, 1018년 고려 현종 9년 군위현을 상주목의 속현으로 두었고, 적라현이라고도 했으며, 1896년 조선 고종 33년 8월 4일 군위현을 군위군으로 승격 개칭했으며, 1914년 3월 1일 인근 지역을 병합해서 군위군이 되었다. 1979년 5월 1일 군위면이 군위읍으로 승격했으며, 2023년 7월 1일 대구광역시 군위군으로 편입되었다.
군위 나 씨는 고려 재상 3형제 가운데 셋째 아들 나문서가 고려조 삼중대광 문하시중 적라백(赤羅伯, 옛 군위 지명)에 봉토되어 군위 나 씨의 시조가 되었다. 나문서의 묘역 소재지는 경북 군위읍 하곡리 산 6번지이다. 나문서의 묘비명은 구비명이 “고려 시중 삼중대광 적라백 나공 문서지묘”이며, 나문서의 신비명은 “고려 삼중대광 문하시중 적라백 나공 문서지묘”이다. 군위 나 씨 세보(世譜)에 따르면, 시조 고려 재상 문하시중 나문서(羅文瑞), 1세손 홍로서승 나석량(羅奭良), 2세손 지신사 나혁(羅赫), 3세손 통덕랑 나건(羅鍵), 4세손 진사 나주세(羅冑世), 5세손 지중추부사 나명우(羅明佑), 6세손 찰방 나윤(羅贇), 7세손 진도군수 나광수(羅光秀), 8세손 경기도사 나희준(羅希俊), 9세손 참봉•통정대부 나사륜(羅嗣倫) 등으로 계보가 계승되었다. <끝> <나종혁 글>
* 참고 자료: 위은숙, 「나천서」, 『디지털의성문화대전』, <http://uiseong.grandculgture.net>; 「안정 나씨」, 『위키백과』; 「안정나씨, 군위나씨 시조 묘」, <http://m.blog.naver.com>; 김진우, 「김진우의 족보이야기―(23) 안정나씨(安定羅氏)」, 『디트NEWS24』; 연숙자, 「24. 안정 나씨」, 『충청타임즈』; 「안천군묘지명탁본」, 국립민속박물관 e뮤지엄, 공공누리공공저작물 자유이용허락, 공공누리 출처표시 조건 이용허락물, <http://emuseum.go. kr>; 이정웅, 「단밀의 나정승(羅政丞)과 나정(羅亭) 이야기」, <http://ljw1674.tistory.com> 참조.
* 나종혁 출판예술문화 후원금을 모금합니다. 출판예술인 나종혁의 후원금은 금액에 관계없이 후원이 가능합니다. 후원금 계좌 국민은행 012-21-0653-488 (예금주 나종혁), 우체국 100073-02-217008 (예금주 나종혁). 많은 후원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