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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광에서 30년
김선학 원묘행 /송파2구
원망도 했습니다. 광덕큰스님께서 못된 제자들을 거두신 걸요. 하지만 스님께서는 차별 없는 정도를 지키신 것 또한 저희는 잘 압니다.
다 보이는 수를 쓰고 문도스님들을 휘두르며 불광형제들을 기만하는, 내세를 믿지 않는다고 거침없이 말하는 문제 많은 승려. 오계만 지켜도 우러르련만. 펜을 들면 안 좋은 말이 쏟아져 나와 웬만하면 펜을 안 들고 싶었는데, 환희심에 넘쳐 행동이 가벼워지고 했던 순간을 또 느끼고 싶지만 돌아보면 아픔만 느껴지는 듯합니다.
제가 처음 불광법회와 인연을 맺은 것은 딸아이가 불광유치원에 유아, 유치반 2년을 다니면서 서서히 참여하게 되었습니다. 매주는 아니고 당시 어머니가 아프셔서 가끔 나갔는데 법회 측에서 전화 연락이 온 것을 어머니는 의도적으로 말씀 안 하셔서 모르고 지내다 우연히 딸아이 약을 구하려 조금 먼 곳에 있는 약국에 갔다가 어떤 분이 제 반지를 보고 절에 다니냐고 말을 걸어와 대화를 하다 보니 송파2구 총무님이셨습니다. 전화를 했었다는 말씀도 들었고요. 그 후 정식으로 송파2구 2법등 식구가 되었습니다.
법회에 참석하면서 합창소리에 너무 감동을 하여 ‘나도 하고 싶다’ 하지만 애들도 어리고 교회에 다니는 큰 시누가 아버님 돌아가신 후 어머니에게 영향을 주고 있기에, 염려스럽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송파2구 명등 보리안 보살님께서 젊은 사람이 합창을 해야 한다면서 밀어부쳐서 용기를 내어 오디션을 보고 연습도 나가고 정확한 음과 박자를 내기 위해 딸이 다니는 피아노 학원도 다녔습니다.
겨울에 롯데호텔 공연장에서 공연도 하며 새로운 세계에 눈을 뜨게 되었습니다. 그러다가 ‘보현행원송’ 공연을 하게 되어 하루에 두 번 연습을 나갈 때도 있었는데 ‘아하’라는 조그만 테이프 녹음기를 사서 주머니에 넣고 다니며 계속 듣고, 내 자세는 어떠한지 남편이 캠코더로 노래하는 모습을 찍어 고개가 약간 왼쪽으로 기우는 걸 바로잡기도 하며 열심히 연습을 하고 세종문화회관에서 대공연을 할 때는 너무너무 행복했습니다.
오십일 기도도 열심히 나가고 추울 때는 씻고 시간이 없어 머리를 못 말리고 나가면 머리카락이 서로 얼어붙고 해도 너무 즐거웠습니다. 공부도 해야겠다 마음먹고 입문교육 바라밀교육을 배우는 도중 송암 스님 사건이 터져 어느 거사님이 보광당에서 마이크 잡고 설명하시는데 절에서 어찌 이런 일이 일어나는지. 집에 오는 내내 다리가 풀려서 걷기가 힘들었습니다. 초발심인 저는 저의 확신은 없고 배운 대로 동체대비, 동일생명 때문에 법회시간에 합창단이 합창거부에 모두 단석에서 보광당 바닥으로 내려앉았는데 저와 몇 명은 노래를 불렀습니다. 물론 각자 판단해서입니다. 선배들한테 ‘니가 뭘 안다고 안 내려 오냐’라고 질책당하기도 했습니다. 저는 법회에 음성공양이 없으면 안돼 라고 생각하며 버텼습니다. 그후 합창단에서는 많은 선배들이 불광법회를 떠났습니다.
지오스님이 주지로 오신 후 저는 입단한 지 얼마 안 되었는데 결석 안 하고 열심히 참석했다는 이유로 소프라노 파트장을 맡게 되었습니다. 노랫말은 법문이고 합창은 기도다 하는 생각으로 다녔습니다. 그때는 크고 작은 공연이 많아 너무도 바쁘게 지내게 되었는데 우연찮게 악보장까지 겸하게 되었습니다. ‘보현행원송’ 이후 ‘부모은중송’에 대해 계속 말이 있어왔는데 지오 스님 가시고 지환 스님 오셨을 때 거론하게 되었습니다. 그럴 때마다 지환 스님은 무척이나 화를 내시곤 했는데 합창단 임원들은 모두 사라지고 끝까지 남아 야단맞는 사람은 저뿐이었습니다. 그러면 지환 스님은 집으로 전화해서 ‘보살이 미워서 그런 거 아니야’하고 달래주곤 했습니다. 임원들은 명교사 교육을 받아야한다해서 바쁜 와중에 명교사 7기로 졸업했습니다.
그렇게 지내다 국립극장 극장장이었던 박범훈 교수님을 만나러 국립극장에 가게 되는데 총무님(단장)은 이유가 있어 못가니 저보고 가라해서, 생각해보니 파트장인 제가 혼자 가는 건 그림도 안 좋고 힘도 안 될 것 같아 메조파트장님과 같이 가겠다고 해서 지환 스님과 셋이서 회의를 하러 가는데 당시 운전도 못하는 저는 지하철을 택했습니다. 지금 생각하면 택시라도 타고 가면 될 것을 역시나 지하철 요금도 모르냐고 또 야단맞았습니다. 회의 도중 박범훈 교수님은 누군가 자기에게 보낸 편지가 아직도 자기 책상서랍에 있다며 내용을 얘기할 때 깜짝 놀랐습니다. 몇 년 전 제가 보낸 거였지만 모른 척 했습니다. ‘보현행원송’ 공연 때 오백 명의 인원으로 우리 힘으로 공연을 했는데 다른 사찰들의 합창단들을 참여시키려 하는 것은 옳지 않다는 내용이었습니다. 큰스님의 업적을 지키고 박범훈 교수님의 욕심을 막으려 보낸 편지였습니다.
회의 마치고 국립극장 실장이 우리를 불광사에 데려다 주었는데 스님은 우리를 다경실에서 기다리라 하시곤 한 시간이 넘도록 소식이 없으니 실장님이 가겠다고 일어나는 걸 좀 더 기다려 달라고 붙잡았습니다. 조금 후 올라오라고 연락이 와서 가보니 많은 스님들이 계셔서 놀랐습니다. 지환 스님이 그 자리에서 국립극장 회의와는 좀 다른 얘기를 하시길래 말참견을 했더니 벼락같이 소리를 지르시기에 나도 모르게 눈물이 났습니다. 그 순간 실장님이 일어서서 결정적 얘기를 한 듯했습니다. 저는 너무 놀라 자세한 내용은 기억이 안 났습니다. 그날도 지환 스님은 모두 헤어지는 순간 따로 불러 ‘보살이 미워서 그런 거 아니야’라고 달래주었습니다. ‘부모은중송’을 위해 참고 또 참았습니다. 그분의 성격은 그때 파악한 듯 했으나 불광정상화를 위해 힘이 되어 주신다기에 고마웠는데 결국 불광법회를 등지시네요.
그후 ‘부모은중송’은 추진이 되었습니다. 박범훈 교수님은 작곡되는 대로 보내주시고 악보장인 저는 교정을 보았습니다. 긴장의 연속이었습니다. ‘보현행원송’ 때와는 달리 단원들에게 보시도 받고 의상도 우리가 선택하여 참석자에게만 맞춰줘야 하는 일을 하며 임원진은 너무 바빴습니다. 우여곡절 끝에 드디어 국립극장에서 불광의 힘으로 ‘부모은중송’이 울려 퍼지고 큰스님께서 힘겹게 무대에 오르셔서 인사말씀 하실 때는 눈물이 났습니다.
광덕큰스님과는 대화 한 번 해본 적 없고 가장 가까이가 딸 때문에 절에 갔다가 호기심에 지하를 가보고 싶어 몇 계단 내려가는데 큰 스님이 꼿꼿한 자세로 올라오시어 마주쳤습니다. 저는 합장할 줄도 모르고 빤히 쳐다보니 온화한 미소로 답해주셨습니다. 그리고 법회 때 뵌 게 전부입니다. 그때의 청아한 모습은 늘 간직하게 되었습니다. 법회 때 카랑카랑한 목소리로 하시는 법문은 요점만 말씀하시는데도 시간이 모자랄 정도였습니다. ‘부모은중송’ 공연 후 약 2년 반 후에 그동안 많이 편찮으셔서 공식석상에서는 뵐 수 없었던 광덕 큰스님은 입적하셨습니다. 뭔가 무너지는 느낌에 많이 슬펐습니다. 나는 복도 없네.
그후 지정 스님이 법주로 10년 계셔야 된다는 말에 자꾸 힘이 빠지고 절망감이 들기도 해 멀리 떠나고 싶은 생각도 들었습니다. 지성 스님과의 마찰로 절이 힘들어질 때 지성 스님께 이유는 모른 채 ‘형님이니까 양보하시면 어떠냐’고 말씀드리니 빙그레 웃기만 하셨습니다. 결국 지성 스님 떠나시고 그 와중에 저희는 대학원 1기로 졸업했습니다. 상좌들이 10년씩 법주하기로 한 것이 수정되어 5년씩으로 바뀌면서 지홍 스님이 왔습니다. 소문에 의하면 조계사에서 돈 문제로 안좋은일이 있었다고 하는데, 그런 스님을 혜담스님은 왜 모셔왔는지 이유는 모르지만 불광 비극의 시작이었습니다.
보광당이 낡아 비만 오면 대야를 늘어놓아야 했는데 지홍 스님께서 중창불사를 한다 하여 너무도 고맙고 최선을 다해 협조하고 싶었습니다. 2011. 7. 명등 부촉을 받고 구 식구들에게 중창불사 권선을 하기 위해 종무실에 가서 그동안 송파2구 중창불사 내역을 뽑아달라 하니 그 전엔 전산화가 안 되어 없다고 하길래 그럼 수기라도 했을 거 아니냐 했더니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 그때까지만 해도 일처리가 “왜 그래?”라고만 생각했지 의심은 안 했습니다. 총 입금과 총 출금도 모른 채 명등들은 불사금 모연하는데 내몰렸습니다.
2013. 6. 명등을 회향하고 바쁘지 않게 살아야겠다 했는데 2015~2016 합창단장을 해야 했고 더구나 2016~2017 서울경기남연합합창단 총무까지 맡게 되어 더욱 바빴습니다. 2017년 가을엔 해마다 하던 방식이 아닌 전국에서 1,000명이 모여 롯데 대공연장에서 ‘보현행원송’을 공연하게 되었습니다. 책임자는 지금의 불광법회 음악감독이신 김회경 선생님이셨습니다. 이때 또한 어려운 일이 많았는데 감옥에서 나온 지 얼마 안되는 박범훈 씨가 지휘자로 나서겠다는 걸 임원진들이 반대하고 나섰습니다. 그 와중에 각 도에 선생님과 임원들이 연습을 살피러 다녔습니다. 제주도까지 갔었습니다. 박범훈 씨는 스님들을 이용해 더욱 강하게 밀고 들어와 아주 큰 사태가 벌어졌습니다. 저는 우리 광덕큰스님의 ’보현행원송’을 선택해주신 점에 감사했고 박범훈 씨는 아직 자숙해야한다는 의견이 많아 쉽게 합의점을 찾기 힘들었습니다. 나중엔 감정싸움 비슷하게 흐르는 듯했습니다. 많은 어려움을 이겨내고 롯데 대공연장에서 전국 1,000명의 합창단이 부르는 ‘보현행원송’이 울려퍼졌습니다. 그후 ‘보현행원송’은 전국 곳곳에서 공연되었습니다.
이제는 정말 조용히 살겠구나 했으나 2018년 지홍사태로 불광이 들썩이고 송파2구는 흔들리기 시작했습니다. 아무도 명등 하겠다는 사람이 없으니 할 수 없이 2019. 7~ 2022. 12 사이에 또 명등을 맡게 되었습니다. 명등으로서 첫째 송파2구가 흩어지지 않게 해야 했고 왜 정상화를 해야 하는지 확신을 줘야 했고 할 수 있다는 믿음을 줘야 했습니다. 게다가 코로나까지 힘들게 했습니다. 1시간도 넘게 통화를 하며 몇 번 시도하여 마음을 굳히게 한 분도 계시고 여전히 보시금 내러 종무소에 드나드시는 분도 계시어 설득하고 통제해야 했습니다.
제일 아쉽다고 생각한 것은 왜 선학보살님들이 알 만한데 판단을 그렇게 했을까? 선학들이 뭉치는 구는 어려운 중에도 잘 헤쳐 나가던데. 가짜 법회장 추천서 싸인 사건이 터졌는데 선학 보살 2명이 사인했다는데 둘 다 송파2구 선학입니다. 선학방에서 하차시키라고 연락이 왔습니다. 확인을 해야겠다고 하니 톡으로 추천서를 보내왔습니다. 너무 어이가 없어 말이 안 나왔습니다. 저는 현 명등이자 선학이어서 선학방에 속해 있습니다. 선학방이니 방장이 해야한다고 하며 옥신각신 하다 결국 제가 명등이니까 해야 한다는 여론에 밀려 제가 짐을 졌습니다. 선학보살님들이 180여 명이나 있는 곳에서 그냥 넘어갈 일도 아니긴 했습니다. 너무도 친했던 사람에게 냉정해야 하는 입장이 참으로 난감했습니다. 그중 한 분이 상중이어서 막재가 지나면 해야겠다 하고 조금 기다려주고 나서 선학방에 장문의 글을 올리고 끝에는 톡방에서 나가라고 했습니다. 그 분은 바로 나가고 법등에서 조차 나갔습니다. 또 한 분은 사과하고 계속 남아 있습니다. 구에서 정말 일할 수 있는 나이의 보살들이 저쪽으로 향했습니다. 이유는 스님이니까.
그들이 신뢰하는 스님들은 우리에게 신뢰를 주지 못해 문제가 불거지고 있는데도 맹목적인 그야말로 맹신을 하고 있었습니다. 우리도 스님을 특히 큰스님의 제자들이어서 더욱 맹목적으로 신뢰하다 이게 아니구나 정신을 차리고 모든 것을 바로 세우는 일(정상화)에 노력을 하고 있는데 그들은 계속 맹목적이고 정신을 못 차리고 있습니다. 중창불사금의 감사를 거부하던 지홍 스님은 결국 다른 문제로 시작되었지만 재판정에서 본인의 입으로 400억 불사라는 말이 나와 알게 되었습니다. 본래 있던 토지에 세운 건축물, 전문가들은 얼마 정도 들었다는 것을 짐작합니다.
의심가는 부분이 한두 가지가 아니지만 중창불사 시작 때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유치원이라 어렵사리 비싼 땅 구하고 건물을 세워 유치원부터 개원했는데 나중에 유치원 공금횡령이 밝혀져 재판정에 서게 된 지홍 스님의 말 ‘유치원은 자기가 목탁쳐서 제사 지내 번 돈으로 세웠다’고 하여 방청석은 웃음바다가 되어 법정요원에게 제지당하는 일이 벌어졌습니다. 결국 징역형을 선고 받았으며 거짓말도 정도껏 해야지 부끄러움을 모르는 인간이구나를 또 한 번 느꼈습니다. 중창불사란 단순히 건물이 낡아 새로 세운다라고 생각했는데 건물을 새로 세운 사람이 창건주가 된다는 요상한 법(지홍 주장) 때문에 광덕 큰스님의 불광이 어느 틈에 배은망덕한 지홍의 불광이 되었음을 알게 되고는 분노가 일었습니다. 반드시 방법을 찾아 되돌려 놓아야 합니다.
공부할 때는 환희심이 넘쳤는데 이렇게 큰 문제가 발생하리라고는 꿈도 꾸지 않았는데, 왜? 편안하게 공부하고 수행할 수가 없는 건지. 왜? 배운 대로 실천할 수가 없는 건지.
왜? 배운 대로 못했으니까.
여전히 뒤에서 스님들을 조정하고 있다고 믿게 만드는 지홍 스님,
동일생명으로 인정해야 하나요? 차별해서는 안 된다?
지홍 스님이 불자들 공부 많이 시키네.
명등방에서 서로 정보도 공유하고 의논도 하고 했는데, 너무도 약속 안 지키는 지정 스님, 폭력적인 지환 스님 제자 진효 스님을 비난하는 글을 여러 차례 올린 결과 고소당해 30만원 벌금 판결을 받았습니다. 청명 거사님과는 재판 동기입니다. 사조직의 도문 거사는 제 개인톡으로 가만두지 않겠다고 협박을 했는데 대인배 차원에서 고소는 안 했습니다. 불교닷컴에서 도문 거사와 법명은 기억 안 나지만 변호사인 거사 그리고 저 세 명이 인터뷰를 하러 갔는데 도문 거사와 그 변호사는 서로 경쟁이나 하듯이 지홍 타도 발언을 했지만 결국 그 분들은 사조직으로 가서 요직에 앉았습니다. 누가 농담으로 저는 왜 안 갔냐고 묻더군요. 이익에 의해 제 신념을 바꾸지는 않습니다. 독립운동가이셨던 저의 친할아버지의 피가 조금은 흐르고 있지 않나 합니다.
저는 우리 송파2구가 흩어지지만 않게 하려고 노력했었습니다. 코로나가 무서워 절에 못 나오시는 분도 꽤 계셨고 시끄러운 게 싫어서 못 나오시는 분도 계셨고 하지만 카톡으로 늘 소식을 전하고 또한 서류에 인감이나 사인이 필요할 때는 집이 멀면 빠른 우편을 이용하고 직접 찾아가 받아온 경우도 있습니다. 불광의 모든 명등들이 이와 같이 하셨습니다. 이 힘은 어디서 오는 걸까요? 침착하고 바르게 불광법회를 이끌어주시는 현진 박홍우 법회장님. 저돌적이고 자기 신념이 뚜렷한 청명 거사님. 조용히 내조(?) 하시는 선비 도안 법회팀장님. 옳지 않은 일엔 참지 않고 나서는 차석부회장님 보성화 보살님. 가족들의 전폭 지지를 받으며 여러 개의 법원 판결을 기다리는 전 사무국장 행원성 보살님. 경험이 풍부해서 좋은 아이디어를 내시는 문수혜 보살님. 등등 기라성 같은 거사님과 보살님들의 원력이 아닌가 합니다. 그들을 길러내신 분은 바로 광덕 큰스님이십니다.
불광에서 겪었던 기쁨과 슬픔, 기억나는 대로 두서 없이 적어보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