붓다와 보살 숭배
3. 불국토의 관념
불교 우주론의 관점에서 보면 시간과 마찬가지로 공간도 무한하다. 무한한 공간은 시방(十方)
으로 펼쳐져 있으면서 무한한 우주와 세계로 가득차 있다. 이 무한한 범위 안에 불국토라
불리는 어떤 우주가 있다. 보통 불국토라는 말은 붓다의 영향력이 미치는 영역을 가리킨다.
불국토의 개념은 대승사상에서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지만 이것이 대승에만 있는
것은 아니다. 출세간부(出世間部, Lokottarav?da)의 경전인 『대사(大事)』에서는 붓다가
상대적으로 희유한 존재이기 때문에 그가 존재하지 않는 우주나 세계가 많이 있다고 한다.
더욱이 『대사』 에서는 하나의 불국토에 두 명의 붓다가 존재할 수 없다고 한다. 왜냐하면
그것은 한 명의 붓다로는 자신의 임무를 다하기가 충분하지 않다는 것을 함축하기 때문이다.
붓다가 상대적으로 희유한 존재라고 할지라도 무한한 전 우주에 수많은 붓다들과 현재
붓다가 되려는 수많은 십지보살들이 존재한다.
이들 각자는 무한한 중생들을 해탈로 이끌지만, 결국 일체 중생을 남김없이 다 해탈시킬
가능성은 없다. 그것은 비록 무한한 붓다들이 무한한 중생들을 해탈시킨다고 해도 여전히
고통받는 수많은 중생들이 남아 있기 때문이다(『Mah?vastu』 1949-56: I, 96 이하).
현재의 붓다가 석가모니이기 때문에 인간들은 남쪽의 사바(娑婆, Sah?) 세계에 살고 있다.
불국토의 개념은 한편으로는 석가모니의 지혜, 즉 깨달음의 영역으로부터 나왔으며 다른
한편으로는 석가모니의권위와 영향, 즉 행위의 영역에서 나온 것이다. 거기에 석가모니
붓다의 경우 숲에서 태어났듯이, 붓다가 태어난 실제 지리적 장소를 더할 수 있다. 당연히
이 세 장소는 크기상 다르다. 대승에서 붓다의 지식(대승불교의 시각에서 보면, 그의 자비)은
무한하다고 종종 말한다. 비록 그의 직접적인 영적 힘이 광대하지만 주된 의미에서 그의
불국토, 즉 그 붓다를 중심으로 해서 나타난 한정된 영역에 영향을 미칠 뿐이다.
붓다의 중요한 역할은 그의 불국토에서 중생들을 가르치는 것이다. 그러나 기본적인
의미에서 불국토는 단지 붓다가 출현한 장소만을 나타내지는 않는다. 오히려 보살로서의
생애 동안 성불한다는 것은 그의 불국토를 ‘청정하게 하는 것’이고, 불국토는 어떤 의미에서
그의 대자비의 결과이다(Fujita 1996a: 34-5).
다시 말해 불국토의 존재는 보살로 서의 위대한 붓다의 생애에 의지한다. 지혜와 자비라는
붓다의 무한한 행위가 중생들이 ‘성숙할 수 있는’ 장소인 불국토를 만든다. 잠재적으로
성숙할 수 있는 중생들도 자신들의 행위를 통해서 다시 태어나는 불국토의 형성에 공헌한다.
더욱이 보살은 스스로 붓다의 불국토에, 즉 붓다 바로 앞에 다시 태어날 수 있고, 선정 속에서
그곳을 체험한다.
불국토는 영적인 발전에 분명히 도움을 주는 조건들로 가득찬 곳이다. 따라서 불국토는
보살이 붓다를 볼 수 있는 곳이며 수행을 위해 매진할 수 있는 장소이기도 하다. 또한
불국토는 자신의 노력으로 중생들을 청정하게 하는 곳이고, 보살이 정진하는 목표이다
(Rowell 1935: 385 이하, 406 이하).
그리고 한 경전에 의하면 붓다는 도덕적으로, 영적으로 도움을 필요로 하는 중생들이 있는지
알아보기 위해 낮에 세 번, 밤에 세 번 불국토를 살펴본다고 시적으로 표현한다
(Lamotte 1962: 396-7).
따라서 보살은 자신의 불국토를 정화하며, 붓다가 영향력을 미치는 그 세계는 보살 시절 그가
행했던 청정한 행위의 결과이다. 여기에 한 가지 문제가 있다. 석가모니의 사바세계는 완전히
청정한 곳이 아니라는 점은 모든 곳에서 똑같이 설명한다. 실제로 이 세계는 완전히 오염된
불국토이다.
대승경전들은 청정한 불국토, 오염된 불국토, 혼합된 불국토의 세 가지 불국토에 대해서
말한다. 예를 들어 오염된 불국토에는 비불교도, 고통받는 중생들, 혈통 등의 차별, 파계한
중생들, 지옥과 같은 낮은 단계, 열등한 행위 그리고 열등한 승려(비대승 부파) 등이
존재한다.
그곳에서 보살의 훌륭한 행위와 붓다가 실제로 현현하는 것은 대단히 드문 일이다. 사실 이
석가모니의 세계는 대승불교의 경건한 추종자들에게는 매우 암울한 곳이다. 이와 달리
아미타불의 극락과 같은 청정한 불국토는 다음과 같은 곳이다.
아름답게 장식되어 있고, 오염이나 악이 없으며, 타일이나 자갈로 포장되어 있지 않으며,
가시나 엉겅퀴도 없고, 배설물이나 그 외의 불결한 것들이 전혀 없다. 이곳의 땅은 높거나
낮지 않아서 평평하고, 언덕이나 계곡이 전혀 없다. 땅은 유리로 되어 있고 거리에는
보석이 달린 나무들이 있다. 큰 길에는 금으로 줄을 그어 놓았다. 모든 곳에는 보석으로
장식된 꽃들이 흩뿌려져 있어 깨끗하고 청정하다. (Hurvitz 1976: 120에 있는 『Lotus S?tra』
그러한―동아시아에서는 ‘정토’라고 말하는―청청한 불국토에는 아주 오랫동안(혹은 영원히)
그곳에 살면서 그곳에 사는 중생들을 버리지 않는 붓다가 있다. 석가모니는 단지 40년만
그렇게 했을 뿐이다. 그곳에는 많은 보살들이 존재하며 악마인 마라(M?ra)는 거기서 사악한
짓들을 할 수 없다. 이러한 불국토는 깨달음에 이르는 길을 발전시키는데 더 없이 훌륭한
장소임에 틀림없다.
반면 현재의 사바세계, 특히 세존이 열반에 든 뒤의 세계는 매우 부적당한 곳이다. 수많은
불국토가 존재하고 따라서 시방세계에 걸쳐 바로 이 순간에 수많은 정토가 존재하므로 실로
가장 중요한 임무는 반드시 이 정토에 다시 찾아가는 것이며 결국 그곳에 다시 태어나는
것이다.
초기불교에서는 사후에 선행으로 천상에 다시 태어나지만, 천상세계도 모두 영원하지 않은
윤회에 세계로 결국 좌절과 고통으로 가득 차 있다고 가르친다. 불교 용어에서 정토는 결단코
천국(svarga)이 아니다. 오히려 불교도는 천국이 아니라 선택된 정토에 태어나기 위해 올바른
명상(예를 들면 염불)들을 수행해야 하고, 자신의 선행과 공덕의 직접적인 과보를 방편으로
가리켜야 한다.
정토를 얻는 것이 쉽지는 않지만, 석가모니 시대에 인도에서 사람들이 그렇게 되었다는
이야기 들로부터 알 수 있듯이 정토에서 붓다와 그의 가르침이 존재하기 때문에 중생은
상대적으로 쉽게 열반을 얻을 수 있고, 혹은 성불의 길로 상당히 쉽게 나아갈 수 있다. 사실
정토에서 열반을 얻는 것은 석가모니 시대에 인도에서는 매우 쉬운 일이었을 것이다. 정토는
청정하지 않은 인도의 과거와 현재보다 정법을 수행하는 데 훨씬 도움이 되는 곳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천국과 달리 정토에서는 더 이상 통제할 수 없는 윤회는 불필요하다.
이것은 대단히 논리적이며 불교 사상의 발전과 완전히 일치한다. 붓다가 없는 현생은
깨달음을 얻기 힘든 장소이다. 그렇지만 무한한 우주 안에 석가모니를 포함한 붓다들이
아직 존재할 것이다. 명상 속에서 그들을 보고, 이들의 훌륭한 가르침을 들을 수 있다.
따라서 붓다 앞에 다시 태어나는 것을 막는 것은 없다.
결과적으로 열반 혹은 완전한 성불을 추구하기 위해서는 대부분의 경우 붓다가 현전하는
정토에 다시 태어난 것과 같은 직접적인 목표의 달성을 요구한다. 사후에 정토에 다시
태어날 것이라고 보장받은 수행자는 지금 여기서 ‘불환과(不還果, an?g?min)’를 얻을
것이다.
즉 더이상 이 세계에 환생하지 않지만 곧 바로 아마 바로 다음 생에 깨달음을 얻을 것이다.
이것은 불교 수행에서 진보된 단계이고, 보통 대부분의 사람들이 붓다를 상실한
현상태에서 깨달음을 얻을 것이라고 기대하는 것보다 더욱더 진보된 단계이다.
그러나 불쌍한 석가모니를 남겨 두고 어디서 이 일을 하는가? 그의 불국토는 오염되어
있으며 따라서 보살로서의 그의 청정행은 분명 뚜렷한 효과가 없다. 『유마경(維摩經)』에서
사리불(舍利弗)의 말을 인용해 보자.
만일 보살이 마음이 청정할 때에만 오직 그 불국토가 청정하다면 석가모니불이 보살로서
생애를 보낼 때 그의 정신은 분명 오염되었음에 틀림없다. 그렇지 않다면 어떻게 이
불국토가 오염되어 있는 것처럼 나타날 수 있겠는가? (Thurman 1976: 18)
게다가 아직 이 세계에는 구원받아야 할 많은 중생들이 있는데 석가모니는 열반해서
존재하지 않는다. 따라서 그는 자비심이 부족한 것이 틀림없다.
이 문제들을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은 많이 있다. 첫째, 단지 모든 붓다들은 실제로
동일하다고 말할 수 있다. 석가모니는 특정 시간과 공간에 중생들을 돕기 위해 나타났다.
비록 그가 열반에 들었다고 해도 다른 붓다들이 많이 있으며, 수많은 정토도 역시
존재한다.
이 붓다들은 사바세계에서 끊임없이 중생들을 돕고 있다. 또한 이것은 불신(佛身)사상과
결합할 수 있다. 석가모니는 청정한 불국토에 있는 다른 붓다들의 화신(化身)이다.
그들은 바로 이곳의 중생들을 돕기 위해 모든 방법을 동원해서 활동하는 존재이다. 다시
말하면 오염된 불국토는 진정한 불국토가 아니라 청정한 불국토를 가진 붓다의 방편일
뿐이다.
혹은 (『법화경』에서처럼) 이 초세간적인 붓다가 석가모니일 수 있다. 또 다른 전략은
불국토를 붓다가 활동하는 영역으로 이해하는 것이지만 그의 이전의 활동으로 불국토가
반드시 청정해지는 것은 아니다. 그는 자비롭기 때문에 붓다는 구원받을 특정한
중생들에게 가장 적당한 불국토를 창조한다.
이 전략은 현저하게 아미타불과 아촉불에 집중되어 있는 정토 의례들로부터 석가모니의
예전 위치를 복원하려는 『비화경(悲華經, Karu??pu??ar?ka S?tra)』에서 눈에 띄게 받아
들여졌다. 이들 다른 붓 다들은 중생들이 그들의 정토에 도달할 수 있다고 가르친다.
그러나 가장 위대한 보살, 참된 보살은 오염된 불국토의 붓다로 태어나기를 서원하는
자비심을 지닌다(Yamada 1968: I, 78). 석가모니가 이 역겨운 사바세계에 출연한 사실은
그의 엄청난 자비심을 보여 주는 것이다.
그러나 사리불이 던진 의문과 이후의 동아시아 불교에서 나타나는 가장 심각한 딜레마에
대한 해답은 『유마경』에서 가장 잘 설명해 주 고 있다. 이처럼 오염된 불국토가 실제로는
정토이다. 다만 이곳에 사 는 중생들의 마음 때문에 오염된 것처럼 보일 뿐이다. 만일 이
세계에 산들이 있고 정토에서는 모든 곳이 평평하다면 그것은 마음속에 산들이 있기
때문이다.
석가모니는 불완전한 붓다가 아니다. 그에게는 모든 것이 청정하다. 오염은 오염된
깨달음의 결과이며 또한 오염된 중생들이 청정해질 수 있도록 붓다가 자비심으로 창조한
세계이다(Thurman 1976: 18-9; Rowell 1937: 142 이하 참조). 따라서 정토를 얻는 참된
방법은 우리 자신의 마음을 청정하게 하는 것이다.
또 다른 방법은 우리가 이미 정토에 있음을 알아차리기만 하면 된다. 이것은 이미 완전한
깨달음을 얻은 붓다임을 알기만 하면 된다는 불성(여래장)사상과 매우 흡사하다. 또한
이것은 정토는 단지 고요하고 깨끗하며 찬란하고 청정심(淸淨心)이라는 선(禪)의 개념보다
조금 더 진전된 것일 뿐이다. 그러므로 정토는 실제 ‘천상의 장소’가 아니라 깨달음 자체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