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르멜의 소리
아무것도 너를 슬프게 하지 말며
아무것도 너를 혼란케 하지 말지니
모든 것은 다 지나가는 것 다 지나가는 것
오 하느님은 불변하시니 인내함이 다 이기느니라
하느님을 소유한 사람은 모든 것을 소유한 것이니
하느님만으로 만족하도다 ♬♬
10월 15일 축일, 가르멜 수녀들은 그네들의 사모 聖 예수의 데레사가 작사했다는 복음성가를 부르면서 진짜, 하느님만으로 만족해 보였다. 그러나 내 마음은 제의를 벗자마자 차쿠로 내달리고 말았다. 월동준비가 걱정이었다. A4용지에 조목조목 적은 준비목록을 차쿠에 보내면 모두 중국 허수녀의 몫인데, 과연 잘해 내려나?
그러나, 얼마 못 가 “그 높은 산 중” 베드로의 마음이 되어서는 산 아래의 일들일랑 잊고 싶어지는가. 기도 소리 때문이다. 갈멜의 소리는 걱정을 잊게 할 만큼 사로잡는 데가 있다. 그것은 앗아가서가 아니라 주어서, 시도 때도 없이 흘러 주어서 내 온 자리를 마르지 않는 우물터거나 한여름의 숲이거나 눈보라 치는 밤의 화롯가로 만들고는 내 다정한 벗의 소곤소곤한, 아니면 긴 밤을 달래는 어머니의 도닥거림처럼 들려왔다. 어째, 이분들은 기도하기 위해 먹고 자고 일하는 것 같다, 오로지.
기도 소리만이 아니다. 봉쇄인지라 사람의 그림자는 비치질 않으나 하루 세 끼 식사 폰소리는 틀림이 없다. 몇 번의 밥상을 받아보고 ‘손수 요리를 한다면 하루 총 얼마 걸릴까? 그 시간 정돈 나도 강론 준비를 해야겠다.’고 작심할 때였다. “최양업 영성 특강”을 해달라는 부탁이 있었고, 이마저도 “그냥, 한 달간의 미사 강론 중에 최신부님 얘기를 넣을게요.” 해놨더니, 갈멜의 시간은 정말 나만의 알찬 시간이 되었다.
어제, 동창회를 갔다가 미사 전에 돌아와 허겁지겁 복음서를 펴니 “하느님 나라는 (작은) 겨자씨와 같다.”는 내용이었다. ‘최양업 얘기’를 넣겠다고 하길 잘했다 싶었다. 그의 “일상 中 작은 순교”와 “신출귀몰”한 행적이 고리로 연결되었기 때문이다. 당시, 중앙 포청은 물론 지방 나졸까지 조직적으로 추적을 했는데, 어떻게 쏙쏙 빠져 다니셨을까? 아무리 생각해봐도 이건 엄청난 기적이나 도술, 커다란 액션으로서가 아니다. 오히려 그 반대였을 거다. 최양업 생애의 중심 키워드를 꼽는다면 단연 “순교”와 “신자”였다. 이 둘은 서로 딜렘마이기도 했다. 순교하고 싶어도 성사에 주린 신자 때문에 그럴 수 없었다. 중국 소팔가자에서 고향의 합동 부고에 접했을 때이다. “르그레즈와 스승님, 저의 부모와 형제들을 따라갈 공훈을 세우지 못했으니, 그리스도 용사들의 장렬한 전쟁에 참여하지 못했느니, 저는 정말 부끄럽습니다. 이렇듯이 훌륭한 내 동포요 용감한 내 겨레인데, 저는 언제 고난의 잔을 마실 수 있을까요?” 글쎄, 나 같은 사람이 큰 어려움에 봉착하면 “에이, 최악의 경우 죽기밖에 더하겠어?”하고 용기를 낼 것이다. 그러나 최양업에게는 최선의 경우이었다. “가진 일체를 남김없이, 깡그리 봉헌하는 마무리”로서 늘 꿈꿨던 순간이다. 그러니 두려울 게 없었다. 큰일일 게 없었다. 위험한 순간에도 평정을 잃지 않으니 작은 것까지, 작은 틈까지 볼 수 있었다. 겨자씨만 한 말 한마디도 정확하게! 또 녹아들게! 거기다가 덤비는 포졸의 마음마저 어루만져 주었다면, 서한에 나오듯 “저들의 의견이 엇갈릴” 만도 했을 거다. 가장 인간적인 인간으로, 작은 자, 작은 입자가 되어 술술 물처럼 빠져나오셨을 것이다.
“어때요, 수녀님들! 최양업 신부님이 오늘 강론하셨다면 ‘크게 이루시는 분은 하느님이요, 우린 다만 작은 것에서 최대한 그분의 뜻과 나라를 찾을 뿐이라.’고 하시지 않았을까요?” 이렇게 아귀를 맞춘 강론과 미사를 끝내고, 방안에 돌아왔을 때였다. 중국 카톡 소리가 계속 나더니 사진들이 오는데 오, 어찌 된 일인가? 남자 손이 나서야 할 월동준비를 완료했다는 차쿠 사진들이 아닌가. 나는 그저 천주께 감사! 한마디 하고 허수녀에게 엄지척 이모티콘을 보낼 뿐이다. 와! 와우! 감탄사만 넣어줄 뿐이다. 이러할 때 “♬아무것도 너를 걱정케 하지 말∼고♬”라는 노래가 절로 나오려다, 말았다. 최근 뉴스에서 본 자영업이 생각났기 때문이다. 차쿠는 이리 지나가 본다지만, 작금 코로나 불황 업계의 걱정은 도대체 어찌하랴.
첫댓글 . “가진 일체를 남김없이, 깡그리 봉헌하는 마무리”
세속적인 인간이 따라가기 힘든 과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