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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렐루야. 할렐루야. 하나님의 은혜와 평강이 오늘도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귀한 성도님들의 삶과 가정 가운데 충만히 임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2023년도 우리 하나님께서 지키시고 보호하시고 인도하셨고 오늘 이 자리에 서게 했음을 우리가 감사와 찬송과 영광으로 올려드릴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한 해 가운데 풍성하게 임하셨던 그 하나님의 사랑을 내 마음 가운데 가득 채우고 우리 좌우에 계신 분, 앞뒤에 계신 분들하고 우리 서로 고백합시다.
주 안에서 사랑합니다.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신광야에서 먹을 문제로 인하여 모세와 아론을 원망했던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나님께서는 바로 그날 저녁에 메추라기떼를 보내주셨죠.
또한 아침마다 만나를 먹을 수 있도록 비같이 내려주심으로 인해서 그들이 원망했던 음식의 문제 이 문제를 아주 말끔하게 해결해 주신 것입니다. 특별히 만나를 통해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시험했다고 성경은 이야기하잖아요.
여러분 무슨 시험이었는지 기억이 나십니까? 백성들이 여호와의 말씀에 순종을 하는지 순종을 안 하는지 순종 여부를 확인하시기 위한 시험이었던 거예요.
그런데 여러분 이 시험은 단지 확인 차원에서 끝난 것이 아니었습니다. 이들이 광야의 여정 속에서 얼마나 하나님을 신뢰하는가 신뢰하는 가운데 하나님을 역사를 어떻게 보낸 것인가에 대한 그러한 훈련의 시간, 그래서 하나님과 긴밀히 만나는 시간이라고 볼 수가 있는 것이죠.
또 이 시험은요. 그들만 가르치고 훈련하는 시간이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대대로 이어지는 후손들이 이 놀라운 사실을 알게 하기 위해서 만나 한오멜을 항아리에 담아 간수하라. 그렇게 하나님께서 명령하셨다는 것입니다. 우리 앞선 말씀인데 16장 32절을 같이 한번 읽어봅시다.
모세가 이르되 여호와께서 이같이 명령하시기를 이것을 오멜에 재워서 너희의 대대 후손을 위하여 간수하라. 이는 내가 너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낼 때에 광야에서 너희에게 먹인 양식을 그들에게 보이기 위함이니라 하셨다 하고,
즉 먼 훗날 가나안 땅에 들어가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태어나고 그곳에서 생활할 때 항아리에 담긴 만나를 보고서 음식이 없던 광야 시대에 우리 선조들을 먹이신 분이 하나님이시다. 그 만나를 주심으로 출애굽에서 가난까지 오는 이 여정 가운데 하나님께서 먹이셨다는 것을 가르쳐주기 위함이었던 것이죠.
이 가르침의 목적은 이스라엘 백성들로 하여금 대대 손손 하나님만을 경외하기 위한 목적이 있는 것입니다. 또한 하나님의 백성으로 살게 하기 위한 하나님의 특별한 조치였다라는 거예요.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내 인생을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물론 내 인생 내가 벌어서 살고 먹고 존재하는 것 맞습니다만 잘 한번 생각해 보셨으면 좋겠습니다. 내 인생 내가 벌어먹고 사는 것 같지만 실상 우리를 먹이시는 분은 하나님이시오. 우리를 입히시는 분도 하나님이시오. 우리를 자라게 하시는 분도 하나님이심을 믿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찬양하지 않습니까? 주는 날을 기르시는 목자이십니다. 나는 주님의 귀한 어린 양, 푸른 풀밭, 맑은 시내 물가로 나를 늘 인도하여 주신다. 주는 나의 목자. 그렇게 우리가 고백하면서 저를 따라 꼴을 먹이시는 그 하나님의 은혜를 우리의 입술로 고백하는 것이지 뿐만 아닙니다. 우리가 가는 길도 마찬가지죠. 그래서 내가 걸어가는 것 같지만 우리를 인도하시는 분이 하나님이시다. 할렐루야.
그래서 우리는 고백합니다. 나의 갈 길 다 가도록 주님 나를 인도하셨습니다. 무슨 일을 만나든지 나는 형통합니다. 이것이 우리의 신앙의 고백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여러분 실제 이스라엘 백성들이 출애굽에서 지나온 여정들을 한번 보시면서 그들을 어떻게 인도하셨는가 그들을 어떻게 먹이셨는가를 다시 한 번 상기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사진을 함께 보실까요? 여러분 하나님께서 라 셋을 출발하게 하셨죠? 따라가 주실 수 있으면 따라가 주시면 좋겠어요. 저 위에서부터 내려가시면 될 것 같아요. 람셋을 출발해서 사실은 블레셋 땅의 길로 가면 사해 길이었지만 하나님께서 그 길로 인도하지 않고 홍해길로 인도하셨다는 거예요. 그래서 낮에는 구름기둥, 밤에는 불기둥으로 인도하시면서 숲곳에서 그곳을 거쳐 애담으로 인도하셨던 것이죠.
다시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명령해서 에담을 출발해라 그렇게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인 이들은 비아롯 앞, 즉 바엘스본 맞은편에 장막을 쳤다. 성경은 그렇게 기록해 주고 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이 인도하심은 이들을 광야에 갇힌 신자로 만들어 놓은 거예요. 앞에는 홍해 좌우로는 갈 수 없고 뒤에서는 누가 따라옵니까? 애굽 군대가 따라오는 그리하여서 바로 왕이요. 이스라엘 턱밑까지 쫓아오는 그러한 상황에까지 이르게 된 것이죠.
그런데 전능하신 하나님께서는 그 누구도 상상하지 못한 방법을 사용하셔서 홍해를 가르시는 것입니다. 진퇴 양난에 빠져 있던 이스라엘 백성들을 하나님의 방법으로 구원해내셨다는 거예요.
더 놀라운 사실은요. 애굽 군대는 그 홍해에 수장되었다는 거예요. 이제 홍해를 건너서 수루 광야에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사흘 길을 걷는 동안 마실 물이 없었다는 거예요. 마침내 눈앞에 말하라는 그러한 우물이 보였는데 웬 걸요? 오아시스인 줄 알았더니 먹어보니 쓴 물이었습니다. 도저히 먹을 수 없어 불평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죠.
그러나 우리 하나님께서는 그때에도 그들의 불평 속에서 은혜를 베풀어 주셨던 거예요. 나뭇가지 하나로 쓴물을 단물로 변화시키는 사건을 보이셨고, 뿐만 아니라 이스라엘을 물샘 열둘과 종료나무 70그루가 있는 물이 충만한 곳으로 인도하셨다.
그곳이 어디입니까? 엘림이라는 장소였다는 거예요. 다시 하나님께서 그곳에 장막을 풀었던 이스라엘 백성들을 이동시키지 엘림과 시내산 사이에 있는 신광야에 들어가게 됩니다.
그런데 이제는 물의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먹을 문제, 음식의 문제로 불평하게 됩니다.
하나님은 원망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다시 한 번 은혜를 주시죠. 그것이 바로 만나와 메추라기떼였다는 거예요. 그렇게 그들의 삶에 먹는 문제도 해결되었습니다.
그리고 다시 하나님의 명령을 따라서 독가와 알루스스를 거쳐서 오늘 본문의 현장인 르비딤에 도착하게 된 것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이 먹이신 모습이 보이십니까? 하나님이 인도하신 모습이 보이십니까?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2023년도를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들에게 우리 하나님께서 먹이시고 입히시고 길러주셨다는 이 사실 뿐만 아니라 저와 여러분들을 여기까지 인도하셨다는 이 사실을 믿음으로 고백하는 귀한 성도님들이 되실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그 고백이 있을 때에 2024년도를 시작하는 우리의 삶 가운데도 그 하나님을 신뢰할 수 있는 거예요. 그 하나님을 의지할 수 있는 거예요. 그리고 오늘도 내일도 앞으로도 입히시고 인도하시는 그 하나님을 기대하고 소망하는 것입니다. 저와 여러분들이 그러한 소망을 가지고 오늘을 잘 마무리하고 2024년도를 멋지게 출발하는 복된 성도님들이 되실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하나님의 인도하심에도 불구하고요. 여러분 백성들에게는 또다시 원망이 생겼습니다. 광야의 여정 속에서 두 번째 식수난을 만나게 된 것입니다. 오늘 본문 1절을 같이 읽어보실까요?
이스라엘 자손의 온 회중이 여호와의 명령대로 신광야에서 떠나 그 노정대로 행하여 루비딤의 장막을 쳤으나 백성이 마실 물이 없는지라
여러분 여호와의 명령을 따라서 이동한 거예요. 그리고 장막을 쳤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실 물이 없었다는 게 그들의 현실이었던 거예요.
그렇다면 지금까지의 과정을 생각해 본다면 이스라엘 백성들의 반응과 행동은 어떠해야 옳은 것일까요? 특별히 물의 문제는 이미 수루 광야에서 하나님의 은혜가 어떻게 임했는지 그들이 충분히 경험했던 것이었죠. 쓴물이 단물로 변화되었고 예비하셨던 오아시스 엘림에서 하나님의 풍성함을 경험했던 기억이 있습니다.
그런 기억과 은혜가 있다면 지금 나에게 동일한 문제로 찾아왔을 때 어떻게 해야 합니까? 또다시 베풀어주실 은혜를 바라봐야죠. 그 하나님께서 역사하실 것을 소망해야죠. 그리고 기도하는 것이 옳은 것 아니겠어요? 그것이 하나님을 신뢰하는 것이고 하나님의 역사를 인정하는 것이겠죠.
하지만 오늘 성경은 이들의 반응을 모세와 다툼으로 묘사해 주었다는 걸 2절 앞부분인데요. 같이 보실까요?
백성이 모세와 다투어 이르되 우리에게 물을 주어 마시게 하라.
여러분 백성들이 모세하고 다투었다는 것은 이 백성들의 원망이 앞서 했던 원망과는 사뭇 달랐다는 것을 표현해 주는 것입니다. 실제 이들은 모세를 향해서 거침없는 불평을 터뜨리면서 돌팔매질을 할 정도로 매우 공격적으로 비난을 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가 모세의 기도인 4절을 통해서 추론할 수가 있습니다. 4절 같이 한번 보실까요?
모세가 여호와께 부르짖어 이르되 내가 이 백성에게 어떻게 하리까? 그들이 조금 있으면 내게 돌을 던지겠나이다.
그래서였을까요? 이번에는 모세도 물러서지 않고 이들의 항의에 맞서서
어찌하여서 나하고 다투느냐 어찌하여서 여호와를 시험하느냐며
너희들 여호와 시험하는 거 중단해라. 매우 강한 어조로 호통하는 것을 볼 수가 있어요. 2절 말씀 같이 봅시다.
백성이 모세와 다투어 이르되 우리에게 물을 주어 마시게 하라. 모세가 그들에게 이르되 너희가 어찌하여 나와 다투느냐 너희가 어찌하여 여호와를 시험하느냐?
여러분 다시 한 번 생각해 보셨으면 좋겠어요. 앞에 있었던 여러 가지 기적과 체험, 10가지 재앙이라든지 물이 변하는 사건이라든지 음식을 주는 사건 이런 거 다 다 접어두고서라도 당장 신광야에 들어와서 경험했던 매일 아침에 경험했던 것이 무엇입니까? 만나를 주신 거 아니겠어요? 비같이 내려주시는 그 풍성한 만나를 경험하는 것이 바로 앞에 있었던 것이죠.
무슨 말이냐면 이들은 모세에게 불평하는 그날 아침에도 뭘 경험했어요?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했어요. 그 원망하는 그 아침, 그 아침에 하나님의 은혜로 내려주신 만나를 그들이 주어서 먹고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한다. 그렇게 기도하지 않았겠어요.
그런데 불과 몇 시간이 되지 않아서 그들은요. 당장 마실 물이 없자 모세에게 돌팔매질할 기세로 다투기 시작했다는 것입니다. 그들의 원망의 목소리를 한번 같이 읽어보실까요? 3절입니다.
거기서 백성이 목이 말라 물을 찾음에 그들이 모세에게 대하여 원망하여 이르되 당신이 어찌하여 우리를 애굽에서 인도해 내어서 우리와 우리 자녀와 우리 가축이 목말라 죽게 하느냐
우리 우리 우리 하나님은 온데간데 없고 오직 우리 이들은 지금 죽을 것 같다고 원망하고 있지만 실상은 죽지 않고 오늘도 우리라는 공동체가 살아있었던 것이죠.
여러분 오늘의 삶을 살게 하신 것 하나님의 은혜와 축복인 것이죠. 특별히 그 자리에까지 인도하신 에벤에셀 하나님이 계셨기에 지금 원망의 목소리를 는 내 존재가 그 자리에 여전히 살아 있었다는 것이죠.
다시 말씀을 드리면 마실 물이 없어 죽을 것 같은 상황이었지만 여전히 그들은 생명을 가지고 하나님의 인도를 받고 있었다는 거예요. 하나님의 은혜였던 것이죠. 오늘을 살게 하신 하나님의 은혜가 그들에게 있었다는 거예요.
그런데 이들은 눈앞에 당면한 문제인 마실 물이 없다는 이유로 애굽으로부터 구원하여 오늘의 삶을 허락하신 그 인도하신 하나님을 놓쳐버린 것입니다. 도리어 왜 그곳에서 우리를 끌어내어서 이곳에서 죽게 하느냐 원망만 가득했던 것입니다.
여러분 그 원망 속에는 무엇이 담겨 있습니까? 여기까지 인도하신 하나님에 대한 부정이 오늘도 살아 역사하시는 그 하나님에 대한 믿음의 상실입니다. 따라서 이들의 행동은요. 은혜를 모르는 패역한 행동과 같았다고 우리는 규정할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혹시 우리의 모습이 나의 삶의 모습이 이 이스라엘 백성들과 같지는 않았는지 오늘 한번 좀 깊이 생각하고 묵상해 보셨으면 좋겠습니다. 오늘의 삶을 허락해 주셨는데, 내 앞에 당면한 문제로 인해 지금까지 인도하신 그리고 오늘도 역사하신 그 하나님 앞에서 여전히 불평과 원망의 자리에 서 있지는 않습니까? 여러분 2023년 마지막 주일 마지막 날입니다.
한 해를 돌아보시면서 오늘 내가 살아 숨쉬는 것, 아까 찬양했잖아요. 태어난 것도, 살아 숨쉬는 것도, 아침 해가 뜨고 밤에 달이 뜨는 것 모든 것이 하나님의 내가 설령 조금 아플지라도 내가 오늘 하나님을 찬양할 수 있다는 나의 경제적인 어려움이 있을지라도 여전히 내가 먹는 데, 우리 하나님께서 먹이시고 입히시고 기르시는 데, 여러분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하나님의 은혜고 하나님의 인도하심이고 오늘까지 함께하셨다라는 그 고백이 우리의 입술을 통해서 고백될 줄 믿습니다. 저와 여러분들이 이 믿음의 고백을 통해서 우리의 마지막 이 시간, 또 앞으로의 삶이 원망과 불평의 말이 아닌 감사와 찬송의 고백이 저와 입술을 통해서 선포되어질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원망이 강해지자 모세가 한 것은 무엇일까요? 모세는 기도합니다. 뿌리 짖어서 기도합니다. 4절 말씀 같이 보실까요?
모세가 여호와께 부르짖어 이르되 내가 이 백성에게 어떻게 하리이까 그들이 조금 있으면 내게 돌을 던지겠나이다.
하나님 내가 이 백성들을 어떻게 하면 좋겠습니까? 지금 이 백성들이 저에게 돌을 던지려고 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이 상황 속에서 한번 그림을 그려보십시오. 그동안의 일정들을 쭉 보면서 백성들은요. 어려운 문제가 만나면 뭐 합니까? 원망과 불평합니다. 모세는요. 그러한 상황 때마다 뭐 합니까? 기도했다는 거예요. 홍해 앞에 서 있을 때 백성들이 모두 원망했죠. 하지만 모세는 그 앞에서 기도합니다. 수르 광야에서 마라의 쓴물을 만났을 때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원망했죠.
하지만 그 모세는 하나님 앞에 기도합니다. 신광야에서 먹을 것이 없을 때 원망했죠. 그러나 여러분 모세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어요. 이제 오늘의 현장인 루비듬에서도 백성들은 모두 원망하지만 모세는 한결같이 하나님 앞에 부르짖었다는 거예요.
이처럼 여러분 백성들은 문제를 만나면 원망 모세는 그 문제 앞에 기도 우리가 신앙생활하면서 어떤 사람은요 문제 앞에 원망하는 사람이 있고요. 어떤 사람은 문제 앞에 기도하는 사람이 있답니다. 그리고 여러분 더 중요한 사실은 우리 하나님은 한결같이 응답해 주셨다는 거예요. 할렐루야
그들이 원망한 것도, 모세가 기도한 것도 하나님께서 응답으로 역사하셨다. 모세는 일관되게 기도했고 백성들은 일관적으로 원망했다. 하나님께서는 변함없이 우리에게 은혜를 베풀어 주셨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저와 여러분들이 하나님의 응답의 역사를 보고 사는데 원망해서 응답받은 것이 아니라 부르짖고 기도해서 응답받는 멋진 성도님들이 되실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5절에 보시면 두 가지 명령에 응답, 두 가지 명령으로 응답을 해 주십니다. 5절을 한번 같이 읽어보실까요?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백성 앞을 지나서 이스라엘 장로들을 데리고 나일강을 치던 내 지팡이를 잡고 가라.
먼저 모세에게 백성 앞에 가라는 거예요. 그런데 지금 모세가 지나가야 될 백성들이 어떤 자세를 취하고 있어요? 돌 들고 있어요? 그 앞에 지나가다가 누구 한 명이 선도해서 돌 던지기 시작하면요. 군중 심리라는 게 있잖아요. 사람들 다 던질 수밖에 없다니까요. 그런 자리를 하나님이 가라는 거예요. 가라. 백성들 가운데로 가라. 그래서 이 백성들의 이목을 집중시키게 한 것이죠.
참 쉽지 않은 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백성들 앞에 지나가는 거예요. 그리고 이스라엘 장로들을 데리고 지팡이를 손에 잡고 가라 그렇게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여기서 중요한 것은 지팡이를 표현할 때 나일강을 치던 지팡이라고 했다는 것이죠.
여러분 나일강을 치던 지팡이는 어떤 지팡이입니까? 과거에 뱀이 또한 지팡이로 지팡이가 뱀으로 바뀌었던 그러한 지팡이죠. 10가지 재앙을 내릴 때뿐만 아니라 이스라엘 백성들을 홍해로 건널 그때에도 애굽 군대를 수장시킬 그때에도 이 지팡이를 사용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지팡이의 능력이 있다는 것이 아니죠. 하나님께서 모세의 지팡이를 도구로 사용해서 초자연적인 능력을 보여주시면서 전능하신 하나님 유일하신 하나님을 이미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보여줬다는 것입니다.
그 지팡이를 들고 갈 때 이스라엘 백성들이 무슨 생각을 하겠어요? 너희들이 지금 돌을 집어 던질 만큼 믿지 못하여 불만과 불평을 노출하느냐 이 지팡이로 전능하신 하나님, 유일하신 하나님을 너희가 다시 보게 될 것이다. 이것을 하나님께서 보여주시기 위해서 그들 가운데로 지팡이를 나의 강을 쳤던 그 지팡이를 들고 가거라 그렇게 이야기하신 것이죠.
그리고 계속해서 명령하십니다. 6절입니다.
내가 호렙산에 있는 그 반석이 거기서 내 앞에 서리니, 너는 그 반석을 치라. 그곳에서 물이 나오리니 백성이 마시리라. 모세가 이스라엘 장로들의 목전에서 그대로 행하니라.
모세는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모세 앞에 서 계시겠다.
니가 그곳으로 오면 내가 그 반석 옆에 그리고 너 앞에 멋지게 서 있겠다.
그렇게 약속을 해 주신 거예요. 여러분 의심하고 그것을 원망하던 사람들에게 완전히 그 원망을 불식시키기 위해서 필요한 게 뭐예요? 물이잖아요. 물 그런데 그 원망의 근거가 되는 물을 주시기에 앞서서 하나님께서 내가 반석 그 옆에 그리고 너 앞에 서 있겠다 그렇게 말씀하시는 거예요 무슨 이야기예요? 모세 너의 하는 일에 내가 지지하겠다. 반드시 도와주실 것이다라는 것을 우리 하나님께서 실제 본심으로 약속해 주신 것입니다.
결국 모세는 말씀에 순종해서 그대로 행하게 되었다고 성경은 기록하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믿음은요. 순종입니다. 믿음은 행함이라는 거예요. 저와 여러분들이 2023년도 하나님께서 지지하시고 도우심으로 오늘 이 자리까지 왔습니다. 그것을 믿으십니까? 저와 여러분들이 그것을 믿는다면 그 믿음 앞에 순종하며 사랑하는 귀한 성도님들이 되셨으면 좋겠습니다. 우리 안의 불신으로 원망과 불평이 아니라 우리 안에 함께하시고 지지하시는 그 하나님의 은총을 힘입어서 나아가는 그래서 이제 몇 시간이 지나면 2024년도가 될 텐데 24년도에도 우리 하나님 나를 지지해 주시고 나를 응원해 주시고 나를 도우시겠다는 그 약속의 말씀을 붙잡고 저와 여러분들이 한 걸음 한 걸음 우리 주님과 동행하는 복된 걸음이 되실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마지막으로 한 가지만 생각해 보겠습니다. 실상 광야는 물이 많습니까? 없습니까? 없어요.
그게 현실이에요. 물을 찾기 어려운 곳이 광야입니다. 두 번에 걸쳐 원망하게 되었던 이스라엘 백성들의 마음을 한번 깊이 헤아려 보십시오. 이들이 물이 잠깐 없었다고 원망했을까요? 여러분 광야에서 하룻길을 한번 걸어보십시오. 물 없이 제가 전에 말씀을 드렸잖아요. 저희도 이스라엘 가가지고 광야 사막에서 교수님이 갑자기 내리라는 거예요. 모자도 넣고 물도 넣고 잠깐만 내리면 된다. 잠깐 내렸습니다. 버스가 윙 갑니다. 그리고 저희가 모자 없이 물 없이 5분 걸었어요. 제가 그때 이스라엘 백성들의 마음을 충분히 이해했습니다.
여러분 5분만 걸어도 원망 나오게 생겼더라고요. 그런데 사흘 동안 물이 없었다. 이것이 이들의 삶의 현실이었다는 거예요. 여러분 광야의 여정을 걸어가는 동안 물을 만난다는 것은 그리 쉬운 것이 아닙니다. 잠시 채워지는 것 같지만 또 물이 부족해서 허덕이며 걸어가는 것이 그들의 인생이죠.
그런데 여러분 우리의 인생을 광야라고 표현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광야 같은 인생길을 걸어가는 데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물인데 실상 여러분 한 해를 돌아보건데 참 힘들고 팍팍한 우리의 삶. 그래서 물을 갈급했던 우리의 모습들을 보지 않습니까? 그런데 여러분 예수님께서 사마리아인에게 말씀하신 그 말씀을 우리가 좀 기억했으면 좋겠어요.
요한복음 4장 14절 말씀인데요. 같이 읽어보실까요?
내가 주는 물을 마시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내가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
하나님께서 광야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위해서 반석을 치게 하셔서 그 반석에서 물을 나오게 하셨던 거죠. 오늘 저와 여러분들을 살아가는 삶의 현장 가운데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샘물을 허락해 주시겠다. 그리고 그 약속을 이루어 주셨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세상의 물은 마시면 줄고 없어지고 갈증이 나지만 우리 주님이 주시는 물은 생명수가 될 뿐만 아니라 영원히 사는 솟아나는 샘물이다. 그렇게 말씀하셨다는 것입니다. 얼마나 감사한 일이겠습니까? 마셔도 마셔도 줄지 않는 샘물, 물이 없어 죽을 것 같은 우리의 문제를 논하지 않도록 영원한 생수 예수 그리스도께서 저와 여러분들에게 되어 주셨다는.거예요.
그런데 자문 13장 14절에서는 이런 말씀을 주십니다. 같이 읽어보실까요?
지혜 있는 자의 교훈은 생명의 샘이니 사망의 그물에서 벗어나게 하느니라.
지혜 있는 자의 교훈 다시 말해서 생명의 샘은 말씀의 샘과 같다는 거예요. 이는 말씀이 육신이 되어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표현해 주는 것이기도 하죠. 따라서 우리의 영원한 생수 되신 예수 그리스도는요. 말씀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아모스서 8장 11절 말씀을 붙잡고 이 시대를 살아야 하는데 우리 같이 읽어보실까요?
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보라. 날이 이를지니 내가 기근을 땅에 보내리니 양식이 없어 주림이 아니며 물이 없어 가람이 아니오. 여와의 말씀을 듣지 못하니 기다리라.
구약 시대에도 그랬지만 마지막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도 동일합니다. 양식이 없어 줄이지 않습니다. 물이 없어 가라지 않는 거예요. 여호와의 말씀을 듣지 못함이 우리에게 기가리라고 선포해 줍니다.
목사님 무슨 말씀이에요? 제가 1년 동안 어제 끝났죠. 365일 그래도 말씀 올려주는 거 저 말씀 매일 들었습니다. 들으신 분도 있고 안 들으신 분도 있겠지만 들으신 분들에게는 감사와 다 이루신 것에 대해 축하의 박수를 보내드리고 하지 못하시는 분들은 내년에는 제가 올려드리지 않지만 개인적으로 말씀을 펼치셔서 읽으셨으면 좋겠습니다.
교회에서 말씀도 듣고 성경 일독도 하고 영상으로 말씀도 듣는데 무슨 말씀합니까? 그렇게 말씀할 수도 있겠죠. 그런데 여러분 말씀을 듣는다는 것은 그냥 귀로 듣는 것이 아니라 순종의 삶, 하나님의 뜻대로 사는 삶으로 나아가는 것을 이야기합니다.
여러분 한번 개인적으로 스스로에게 질문을 해보십시오. 과거 순수하게 믿을 때만 해도 순종했던 말씀이 이제는 내 생각과 판단으로 인해서 또한 세상과 타협함으로 인해서 순종하기 어려운 것들이 생기지 않았나요? 그런 것들을 우리는 따져봐야 돼요. 그래서 예레미야 선지자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선포한 말씀이 있어요. 예레미야서 2장 13절인데 같이 읽어보십니다.
내 백성이 두 가지 악을 행하였나니 곧 그들이 생수의 근원 대신 나를 버린 것과 스스로 웅덩이를 판 것인데, 그것은 그 물을 가두지 못할 터진 웅덩이들이니라.
여러분 이스라엘 백성들은요 하나님을 버리지 않았습니다. 세상과 타협했을 뿐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들에게 나를 버렸다. 그렇게 선언한 것이 여러분 이들은 나름대로 스스로 웅덩이를 만들었습니다. 즉 내 판단과 기준으로 웅덩이를 만든 것이죠.
여러분 과거에는 그렇게 생명과 같이 여겼던 주의 성수가 이제는 타협의 자리에 있는 주의 성수가 되지는 않았나요?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했던 기도의 자리가 이제는 뭐 살 만하니까 하나님과 그 기도의 자리가 순수성을 잃고 잃어버리지 않았나요? 모든 것을 다 드리겠다고 과거에 하나님 앞에 나의 삶을 바치고 나의 예물을 드렸던 그 마음의 순수성이 혹 세상과 또한 내 방법과 판단에 의해서 변화되지 않았나요?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이후로 살아계신 하나님의 말씀이 저와 여러분들에게 영원히 목마르지 않는 샘물이 되어서 내가 과거에 순수하게 하나님과 약속하고 따랐던 그 순수한 믿음, 그것들이 저와 여러분들에게 회복되어져서 정말 하나님 중심의 삶을 2024년도에 멋지게 살아낼 수 있는 그러한 성도님들이 되실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 Messenger’s Note:
“In his heart, a man plans his course, but the LORD determines his steps.” (Proverbs 16:9)
“Nevertheless, not my will but yours, be done.” (Luke 22:42)
“And when the angel stretched out his hand toward Jerusalem to destroy it, the LORD relented from the calamity and said to the angel who was working destruction among the people, ”It is enough; now stay your hand.“ And the angel of the LORD was by the threshing floor of Araunah the Jebusite.
And David built there an altar to the LORD and offered burnt offerings and peace offerings. So the LORD responded to the plea for the land, and the plague was averted from Israel.” (2 Samuel 24:16,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