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의 의미는 한 번 진리를 보는데 있다. 사람들이 말하기 좋아하는 행복과, 쾌락과, 사랑과, 성공과 명성은 호르몬의 명령에 불과하다. 내가 누구인지 모른다면, 내가 왜 사는지 모른다면, 내가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 존재인지 모른다면 짐승과 다르지 않다. 인간이 인간인 이유는 대화가 되기 때문이다. 대화를 통하여 더 높은 단계로 올라서기 때문이다. 대화가 되지 않는다면 고장난 라디오와 같다. 방송국의 전파를 수신하지 못한다면 더 이상 라디오가 아니다. 진리의 부름에 응답하지 못한다면 더 이상 인간이 아니다. 더 높은 단계로 올라서지 않으면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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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리는 인류가 믿고 의지하는 것이다. 인간은 변화 속에서 불변에 의지한다. 진리는 자명한 것이다. 자명한 것은 내부 메커니즘 안에서 작동하는 것이다. 진리는 내부에 있고, 필연에 있고, 절대성에 있고, 일원성에 있다. 진리는 공간의 밸런스에 그것이 있고 시간의 전략에 그것이 있다.
진리 - 필연, 내부, 절대, 일원, 밸런스와 전략
비참 - 우연, 외부, 상대, 이원이나 다원, 확률
진리가 있는 이유는 우주가 있기 때문이다. 신이 있다는 말은 우주의 자원들이 모두 연결되어 통일적으로 존재한다는 말이다. 우주를 부정할 수 없고 통일성을 부정할 수 없다. 우주는 자체논리에 의해 자명한 존재다. 외부에서 에너지, 물질, 공간, 시간, 정보를 끌어모아 조립하지 않았다.
나의 존재를 부정할 수 없다.
내가 속한 우주를 부정할 수 없다.
나와 우주의 연결을 부정할 수 없다.
술어는 주어를 부정할 수 없다. 부분은 전체를 부정할 수 없다. 라디오는 방송국을 부정할 수 없다. 고장난 존재와 자명한 존재가 있을 뿐이다. 진리의 필연성과 절대성은 연결의 메커니즘 내부에서 자명한 것이다. 아이의 아빠가 누구인지 의심할 수 있지만 엄마가 누구인지는 자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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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리는 자명하다. 자명한 것은 연결된 메커니즘 안에서 자체적인 의사결정에 의해 움직이는 것이다. 내가 낳은 아기가 내 아이라는 것은 자명하다. 진리의 반대는 비참이다. 진리는 안에 있으므로 믿고 의지하는 것이며 비참은 밖에서 겉돌고 있으므로 의사결정이 불가능한 것이다.
인간은 필연보다 우연, 절대보다 상대, 연결보다 단절을 좋아한다. 단절되어 외부에서 얼쩡거리는 것은 자명하지 않다. 인간은 자명하지 않은 모호함을 좋아한다. 자신을 방어하려고 한다. 우주 안에서 우주를 직시하지 않고, 진리와의 대면을 두려워하고, 신과의 조우를 무서워 한다.
두려워하며 자신을 방어하려고 하므로 인간은 무엇이든 그것이 밖에 있다고 간주한다. 내가 문을 열어주지 않으면 안으로 들어올 수 없다고 믿는다. 우주를, 진리를, 신을 외부의 존재로 인식한다. 틀렸다. 진리는 인간이 내부의 존재라는 의미다. 안으로 들어와서 신호를 받고 있다.
신의 문제
미세조정 우주가 어떻고 지적 설계가 어떻고 하며 확률 개념으로 신의 존재를 증명하려는 태도가 있다. 근본적인 자세의 문제가 있다. 모든 변화가 밖에서 일어난다고 전제하는게 오류다. 밖에서는 우연이 안으로 들어오면 필연으로 바뀐다. 외부의 상대성이 내부의 절대성으로 바뀐다.
내부필연 - 외부우연
내부 절대성 - 외부 상대성
안을 기준으로 삼으면 내동설이고 밖을 기준으로 세우면 외동설이다. 구조론은 내동설이다. 변화는 안에서 일어난다. 밖에서 일어나는 일은 우연이고 안에서 일어나는 일은 필연이다. 밖에서 보면 로또의 당첨 확률은 814만 분의 1이지만 안에서 보면 무조건 당첨번호가 나오게 되어 있다.
안이냐 밖이냐는 동전의 양면이다. 왜 인간이 50퍼센트 확률을 못 맞출까? 진지하지 않기 때문이다. 인류 중에는 생각이라는 것을 하는 사람이 없다는 증거다. 절대 뇌를 사용하지 않는다. 자동차가 고장이 나도 외부충격 원인과 내부마모 원인이 다른데 그것을 구분하려는 생각조차 없다.
아마존강에 물줄기가 백만개라 해도 물은 결국 바다로 흘러간다. 많은 물줄기들 중에 하나가 우연히 바다를 찾아낼 확률은 백만 분의 1이지만 무조건 찾아낸다. 물줄기는 아마존강 '안에' 있기 때문이다. 아마존강은 오대양 '안에' 있기 때문이다. 왜 안을 보지 않고 밖을 보며 헛소리를 하지?
중력상수가 어떻고 아미노산이 어떻고 하며 여러가지 단서를 증거랍시고 내밀고 있지만 모두 외부지향적 정보다. 왜 바깥만 보는가? 발상의 전환이 필요하다. 아미노산이 우연히 필요한 단백질을 만들 확률이 1조 분의 1이라면 애초에 그러한 결과를 예상하고 아미노산이 탄생해야 한다.
단백질이 너무 쉽게 만들어져도 조절이 방해받는다. 공간의 밸런스와 시간의 전략이 있다. 특히 시간의 전략은 미리 시뮬레이션을 돌려본다. 알파고는 1천억 번을 연산해서 이세돌을 꺾고 답을 찾는다. 우주가 알파고라면? 외부의 창조주가 갑자기 끼어들어 우주를 만들어낸 것이 아니다.
우리가 손으로 무언가를 만들 때는 외부에서 가져온 진흙을 주무르거나 외부에서 가져온 돌을 깎아 만든다. 객체는 당연히 외부에 있다는 생각은 인간의 경험칙이다. 그런데 원인이 내부에 있다면? 방귀를 뀌는 원인은 뱃속에 있다. 똥과 오줌과 노폐물은 내부에서 필연적으로 나오는 거다.
외부우연 내부필연. 공간의 밸런스와 시간의 전략은 내부를 통제한다. 누가 어디를 타격하든 상관없이 깨지는 지점은 내부의 약한 고리로 정해져 있다. 천하람이 이재명을 욕해도 쓰리쿠션 찍고 욕은 김건희에게 간다. 물은 낮은 데로 흐르고 욕은 더러운 데로 흐른다. 내부는 필연을 따른다.
신은 우주 밖의 존재인가, 우주 안의 존재인가? 이 물음에 먼저 답하라. 확률은 극에서 극으로 바뀐다. 둘 중 하나다. 50퍼센트 확률인데 왜 생각을 해보지도 않고 당연히 신은 우주 바깥에 있다고 숨은 전제를 깔아버리는 것일까? 신이 우주 안의 존재라면 신은 수염난 할아버지가 될 수 없다.
우주는 외부가 없다. 신이 외부에서 필요한 자원을 끌어모아 무언가를 만들어낸다는 생각을 버리고 공간의 밸런스와 시간의 전략을 따라 내부에서 자체적으로 의사결정한다는 생각을 해야 한다. 외부의 자원을 끌어모으는 것은 인간이다. 신은 인격체가 아니다. 인격체처럼 보일 수는 있다.
구조론은 내부지향적 사고다. 소는 누을 자리를 보고 다리를 뻗는다고 했다. 내부에서 움직이려면 공간의 밸런스와 시간의 전략을 따라야 한다. 우주는 결과를 알고 길을 잡는다. 필연의 길을 찾아낸다. 외동설 사고에 매몰된 사람과는 대화할 수 없다. 안 아니면 밖인데 왜 밖만 고집하는가?
생각하라. 우주는 있는가 없는가? 둘 중에 하나다. 우주가 없다고 말하는 사람은 그 사람 자기 자신의 존재도 없어야 하므로 그 사람과 대화할 수 없다. 우주가 있다면 통일적인가, 파편적인가? 우주가 통일적이라면 의사결정이 안에서 일어나고 파편적이라면 의사결정이 밖에서 일어난다.
우주가 파편적이라면 에너지, 물질, 공간, 시간, 정보를 별도로 조달해서 다른 차원에 있는 다른 우주로 그것들을 가져가서 별도로 조립해서 우리우주를 만들었다는 말이다. 지적 설계라느니 미세조정이라느니 하는 사람은 우주가 외부에서 조립된 파편적 존재라는 전제를 깔고 들어간다.
왜 멋대로 가능성을 제한하지? 그런 사람과는 대화할 수 없다. 전제를 숨기고 특정한 방향으로 몰아서 가스라이팅을 시도하는 사람과는 대화를 할 수 없다. 세뇌공작을 하려는 사람과는 대화할 수 없다. 전제를 숨기지 않고 모든 가능성을 검토하는 사람이 아는 사람의 대화상대가 될 수 있다.
우주는 통일적이거나 파편적이다. 우주가 파편적이라면 우주의 우주가 있고, 신의 신이 있어야 한다. 우주의, 우주의, 우주와 신의, 신의, 신이 있어야 한다. 계속 간다. 방향은 확산방향이다. 피곤하다. 우주는 통일적이다. 우주가 통일적이면 신은 우주 안에 있고 신은 신 자신을 디자인한다.
안에서 일어나는 변화는 공간의 밸런스와 시간의 전략이 계를 통제한다. 물체의 변화는 반드시 무게중심을 거친다. 우주가 탄생할 수 있는 가능성은 하나, 로또 당첨번호도 하나다. 내부에서 결정되면 들어가는 구멍과 나오는 구멍은 하나다. 아기도 수컷의 유전자가 들어간 곳으로 나온다.
악의 문제
신이 악을 막을 의지는 있지만 능력이 없는가? 그렇다면 신은 전능하지 않다. 신이 악을 막을 능력은 있는데 의지가 없는가? 그렇다면 신은 선하지 않다. 신이 악을 막을 능력도 있고 의지도 있는가? 그렇다면 이 세상의 악은 어디에서 기인한 것인가? 신이 악을 막을 능력도 없고 의지도 없는가? 그렇다면 왜 우리가 그를 신으로 불러야 하는가? [에피쿠로스의 역설]
‘악의 문제’라는 타이틀로 방대한 내용이 나무위키에 기술되어 있다. 인류는 방대한 삽질을 하고 있다. 황당한 내용이다. 인간은 도무지 생각을 안한다는 증거다. 악은 인간의 행위다. 악이 존재하는게 아니라 악행이 존재하는 것이다. 그런데 대부분 악이라는 원소나 물질이 존재하는 것처럼 말한다.
행위가 악인데 동사를 쓰지 않고 명사를 사용한다. 장난하냐? 이것들은 진지하지 않다. 그냥 심심풀이로 말장난을 하려는 것이다. 진지하게 생각하는 사람이 지구에 한 명도 없다. 이 행성에서 외로움을 느끼는 이유다.
악은 선의 반대다. 악이 존재하는게 아니라 선이 존재하는 것이다. 밥을 먹으면 똥이 나오고 선을 행하면 악의 찌꺼기가 남는다. 음식쓰레기 분리수거처럼 그것은 필연적으로 나오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사회의 선인들을 감시해야 한다. 요리사가 요리만 잘 하고 음식쓰레기는 그냥 버렸는지도 모른다.
어떤 선한 사람이 주석님 사진이 비를 맞고 있다고 소리질러서 이후 모든 북한 주민이 괴롭게 되었다. 어떤 선한 사람이 사또님을 위해 송덕비를 세우자고 제안하는 바람에 조선왕조가 망했다. 존댓말 처음 만든 사람도 선한 사람일텐데 이후 한국인은 괴롭게 되었다. 처음 방송에서 선배님이라고 호칭한 연예인도 선한 사람일텐데 개콘 망했다. 모든 망하는 것의 배후에 선을 넘은 선이 있다.
우리가 합리적이지 않으면 안 된다. 많은 경우 선은 비합리적이다. 효용이 비용을 넘는 선은 악이다. 어떤 착한 사람이 스승의 은혜에 감사하는 바람에 이후 모든 학부모가 촌지를 바치게 되었다. 교실붕괴로 이어졌다.
악이 존재하는 이유는 선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독립적인 악은 없다. 합리적인 선과 비합리적인 선이 존재할 뿐이다. 선의에 의한 행동이 결과가 나쁘면 악이다. 당장 좋은 것도 시간이 흐르면 나빠진다.
순수한 악은 없다. 순수한 악은 악 자신에게도 악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악은 자기 자신에게만 선하거나. 가족들에게만 선하거나. 패거리에게만 선하거나, 자기 계급에게만 선하거나, 일시적인 기분으로만 선하거나 하는 식으로 문을 닫아건다. 닫힌사회는 악이다. 작은사회가 악이다. 정의당이 순수한 악인 이유다.
마약을 섭취하는 자도 지금 이 순간의 자기 기분에는 선하다. 기분이 좋다. 좋으니까 선이다. 내일은 생각하지 않는다. 결과가 잘못되면 악이다. 잘못되는 이유는 공간의 밸런스를 조절하지 않고 시간의 전략을 쓰지 않기 때문이다.
공간의 밸런스와 시간의 전략이 선이며 밸런스를 어기고 전략을 깨뜨리는 행위는 악이다. 부분이 전체를 넘으면 악이다. 비용이 효용을 넘으면 악이다. 단기적인 이득이 장기적인 권력을 넘으면 악이다.
인간이 선을 지향하므로 악이 발생한다. 흥부가 놀부를 만들었다. 선은 합리적이어야 한다. 감성팔이, 진정성타령, 성찰놀이, 품성놀이, 인성놀이, 생태타령이 선을 비합리적으로 만든다. 사람을 격동시켜 영향력을 행사하려는 관종 특유의 권력의지가 개입하는 순간 곽튜브 되고 강형욱 된다.
개대장의 위악이 낫다. 김기덕은 알고 있었다. 그의 주인공들이 위악을 저지르는 이유다. 그러나 사회에 팽배한 위선의 발톱을 피하지는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