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현대 그리스도인 시리즈 (3)
그리스도의 주권이 모든 영역에 미치게 하라
(참고: 니콜라스 월터스토프의 『정의와 평화가 입맞출 때까지』 (Until Justice and Peace Embrace))
롬 11:36
I. 서론
오늘 우리가 참고할 도서는 니콜라스 월터스토프의 <정의와 평화가 입맞출 때까지>입니다. Christian Century라는 기독교 잡지에서 이 책에 대한 추천문을 쓰면서 이런 말을 했습니다. “이 책의 표지에 ‘이 책이 당신을 변화시킬 수 있다’는 경고문을 붙여야겠다.” 만약 오늘 제 설교를 듣고, 여러분 삶에 전혀 변화가 일어나지 않는다면, 제가 설교를 잘못한 것입니다. 그런 분은 꼭 책을 사서 읽어 보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이 책의 내용을 이해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이 책이 강연의 내용을 책으로 펴낸 것이라는 것을 염두에 두고 읽는 것입니다. 이 책의 저자인 니콜라스 월터스토프(Nicholas Wolterstorff)는 현재 예일대학교 명예 교수인데, 1981년, 네덜란드 암스테르담에 있는 자유대학교에서 이 책의 내용으로 강연을 했습니다. 당시 자유대학은 개교 100주년을 맞이하여, 이 대학의 설립자이자, 네덜란드 수상을 지낸 아브라함 카이퍼를 기념하여 “Kuyper Lecture”라는 강연를 처음으로 개최했습니다. 이 “Kuyper Lecture”에 제1회 강연자로 니콜라스 월터스토프가 초대된 것입니다. 그러니까, 카이퍼와 월터스토프가 서로 밀접한 관련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이 책의 내용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아브라함 카이퍼를 먼저 알아야 합니다.
아브라함 카이퍼는 어떤 사람입니까? 아브라함 카이퍼는 “헤르만 바빙크, BB 워필드”와 함께 세계 3대 칼빈주의자로 불립니다. 그러니까, 쉽게 정리해서 말씀 드리면, 존 칼빈 – 아브라함 카이퍼 – 니콜라스 월터스토프. 이렇게 3 사람이 다른 시대를 살았지만, 같은 신학을 가진 사람들이었다는 것입니다. 물론 존 칼빈은 초대 교부였던 성 어거스틴의 신학을 이어받은 사람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이 책을 잘 이해하기 위해서는 책의 저자인 니콜라스 월터스토프 뿐만 아니라, 아브라함 카이퍼, 존 칼빈, 그리고 성 어거스틴에 대한 배경 지식을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하지만, 오늘 짧은 설교 시간에 이 모든 사람들을 다 다룰 수는 없습니다. 그래서 오늘은 이 책의 직접적인 배경이 되는 아브라함 카이퍼에 대해서 말씀을 드린 후, 니콜라스 월터스토프에 대해서 말씀드리겠습니다. 그러니까, 오늘 설교는 두 개의 설교를 한꺼번에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설교는 다른 때보다 조금 더 분량이 많습니다.
II. 본론
1. 첫째, 아브라함 카이퍼
아브라함 카이퍼는 1837년 네덜란드 마슬라이스(Maasluis)에서 목회자 가정의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만 12세의 나이에 레이덴 대학(Leiden University)에 입학해서 이 대학에서 학사, 석사, 박사 학위를 모두 받았습니다. (전공은 신학이었습니다.) 26세의 나이에 신학 박사가 된 이후, 카이퍼는 목회도 했습니다. 하지만, 카이퍼가 유명하게 된 이유는 목회 외적인 부분에서 다재다능한 모습을 보였기 때문입니다. 그는 신문사와 대학교와 교단과 정당을 설립했습니다. 그리고 1901년부터 1905년까지, 네덜란드 총리로도 활동을 했습니다. 그는 많은 어록을 남겼는데, 그 중에서 가장 유명한 말은 1880년 10월 20일, 그가 암스테르담 자유대학교를 설립하면서 그 대학에서 개교 연설을 하면서 한 말일 것입니다. “우리 인간 삶의 모든 영역에서 만유의 주재이신 그리스도께서 ‘나의 것이다!’라고 외치지 않는 영역은 한 치도 없습니다.” 이것을 간단하게, “영역 주권”이라고 말합니다. 이 “영역 주권”이 바로 오늘 설교를 이해하는 열쇠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이 영역 주권에 대해서 구체적으로 알아보기 전에, 한 가지 점검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이 영역 주권이 과연 성경적인가? 아니면, 한 신학자가 말한 자기 주장에 불과한 것인가? 이것부터 따져보아야 합니다. 오늘 성경 본문을 제가 한 번 읽어 보겠습니다. 롬 11:36, “이는 만물이 주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고 주에게로 돌아감이라 그에게 영광이 세세에 있을지어다 아멘” 영어 성경으로도 한 번 읽어 보겠습니다. “For from him and through him and to him are all things. To him be the glory forever! Amen.” 두 가지 성경 버전을 읽었을 때, 가장 먼저 눈에 띄는 것이 무엇입니까? “주님에 대한 강조”입니다. 영어 성경에서는 주님 즉, 하나님이 먼저 나옵니다. 그리고 만물이 가장 뒤에 나옵니다. 영어 성경에서 강조하는 것은 만물이 아니라, 만물의 창조자이신 주님입니다. 이것은 헬라어 원문도 영어 성경과 같은 어순으로 주님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또한, 영어 성경에는 “만물”이 “all things”라고 번역되어 있습니다. 이것은 인간의 삶의 영역을 포함한 모든 것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주님으로부터 만물이 나오고, 주님으로 말미암아 만물이 존재하고 있고, 주님에게로 만물이 돌아간다.” 이것은 무슨 의미일까요? 웨스트민스터 신학교에서 조직신학을 가르쳤던 존 머리(John Murray)라는 분이 있습니다. 한국에서는 이 분의 이름을 “잔머리”라고 유머스럽게 부릅니다. 이분이 이 구절에 대해서 <로마서 주석>에서 다음과 같이 설명을 했습니다. “하나님은 만물이 그로부터 나왔다는 의미에서 만물의 근원이시다. 하나님은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존재하게 된다는 의미에서 만물의 중개자이시다. 하나님은 만물이 그에게로 돌아간다는 의미에서 모든 만물이 영광을 돌려야 할 최종 목표이시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창조하지 않으셨다면, 어떠한 만물도 존재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지금 만물을 붙잡아 주지 않으신다면, 어떠한 만물도 존재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모든 만물의 존재 목적은 하나님께 영광과 찬송을 돌리는 것이다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아브라함 카이퍼가 주장한 “인간 삶의 모든 영역이 그리스도의 것이다”라는 영역 주권은 지극히 성경적인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도 이 만물 안에 포함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창조하셨기 때문에, 우리가 존재할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지금도 우리를 붙들어 주시기 때문에, 우리가 존재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의 삶의 궁극적인 목표는 하나님께 영광과 찬송을 돌리는 것입니다. 그렇게 살아가는 우리 모두가 될 수 있기를 축원드립니다.
이제 아브라함 카이퍼가 말한 “영역 주권”에 대해서 구체적으로 살펴보겠습니다. 아브라함 카이퍼가 말한 “영역 주권”을 영어로 말하면, “Sphere Sovereignty”입니다. “Sphere”는 한국어로 “구”입니다.’ 구는 3차원적인 원입니다. 공을 생각하면 쉬울 것 같습니다. 구는 다른 3차원 도형과 다르게 그 중심이 정중앙에 있습니다. 그런데, 그 구의 중심, 즉 영역의 중심이 “그리스도”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영역 안의 모든 것들이 활동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아브라함 카이퍼는 인간 사회에는 다양한 영역들이 있다고 말했습니다. 예를 들면, 가정, 교회, 국가, 정치, 경제, 교육, 예술, 스포츠 등입니다. 그리고, 각각의 영역은 구별되어야 하지만, 각 영역의 주권은 그리스도에게 있다고 말했습니다. 이것이 중요한 대목입니다.
1) “각각의 영역은 구별되어야 한다”
이것은 이해하기 쉽습니다. 예를 하나 소개해 드리겠습니다. 이 예는 풀러신학교 총장을 역임한 리처드 마우(Richard Mouw)의 책 <개인적으로 간략하게 소개하는 아브라함 카이퍼>에 나오는 내용입니다. “각기 다른 세 가지 관계를 맺고 있는 여성과, 남성이 있다고 생각해 봅시다. 그 여성은 한 젊은이의 어머니입니다. 그리고 그 여성은 가족이 다함께 출석하는 교회의 장로입니다. 그리고 그 여성은 그녀의 아들이 교수로 있는 대학의 총장입니다. 그런데 이 여성의 젊은 아들이 심각한 범죄를 저질렀습니다. 그녀는 대학의 총장으로서 그를 해고해야 합니다. 그리고, 교회의 장로로서 그를 징계하는데 동참해야 합니다. 하지만, 그녀는 어머니로서 자신의 아들을 여전히 사랑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자신의 아들이 비록 잘못을 저질렀지만, 아들과의 관계는 결코 끊으려고 하지 않습니다. 당연한 말입니다. 만일 그 젊은이가 어머니에게 “엄마, 어떻게 나를 교수직에서 해임시킬 수 있어요? 난 당신의 아들이잖아요.”라고 항의한다면, 그 젊은이는 영역들의 경계를 허물어뜨리고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각각의 영역이 구별되어야 한다는 것은 이해하기 쉽습니다. 그녀가 범죄를 저지른 아들의 어머니라고 해서, 대학의 총장으로서, 교회의 장로로서의 역할에 영향을 받으면 안 된다는 것은 누구나 인정할 것입니다.
2) “각 영역의 주권은 그리스도에게 있다”
이것은 어떻게 이해할 수 있을까요? 인간 삶의 모든 영역에서 그리스도의 주권이 실현되고 있습니까? 우리의 가정, 교회, 국가, 정치, 경제, 교육, 예술, 스포츠 등, 이런 영역에 그리스도의 주권이 미치고 있습니까? 만약 그렇지 않다면, 이것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요? “영역 주권”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죄로 인한 인간의 타락”에 대해서 먼저 이해해야 합니다. 아브라함 카이퍼는 이 부분에 대해서 존 칼빈의 영향을 받았습니다. 칼빈의 신학 사상은 흔히 TULIP이란 단어로 표현됩니다. TULIP은 영어의 다섯 가지 앞 글자를 조합해서 만든 단어입니다. Total Depravity: 전적 타락, Unconditional Election: 무조건적 선택, Limited Atonement: 제한 속죄, Irresistible Grace: 저항할 수 없는 은혜, Preservation of the Saints: 성도의 견인.
이 TULIP에서 첫 번째, “전적 타락” 부분을 올바로 이해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전적 타락”의 일차적 의미는 “인간이 전적으로 타락해서 스스로의 힘으로 구원을 받을 수 없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이것을 이런 식으로 이해하면 안 됩니다: 인간이 완전히 타락해서, 타락한 인간으로부터 어떠한 선한 것도 나올 수 없다. 왜냐하면, 타락한 인간도 선한 행동을 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전적”이라는 의미를 “절대적”이라는 의미로 해석한 결과입니다. 우리는 “전적”이라는 의미를 “절대적”이 아니라 “전체적”이라는 의미로 해석해야 합니다. 영어로 말씀 드리면, “absolute”가 아니라 “total”인 것입니다. 그러니까, “전적 타락”의 이차적인 의미는 “인간 삶의 전 영역이 부패했다”는 말입니다. 예를 들면, 가정, 교회, 국가, 정치, 경제, 교육, 예술, 스포츠 등, 이 모든 영역들이 부패했다는 것입니다. 왜 그럴까요? 그 이유는 간단합니다. 부패한 인간이 이 영역들을 다스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이것이 왜 중요할까요? 두 가지 이유 때문입니다. 첫째, 그리스도의 주권이 인간 삶의 영역에 미치지 못하는 이유를 설명해 주기 때문입니다. 부패한 인간이 전 영역에서 왕 노릇을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둘째, 인간 삶의 전 영역에서 그리스도의 주권이 원래대로 회복되도록 하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사명이라는 것을 말해 주기 때문입니다. 아브라함 카이퍼가 1898년, 미국 프린스턴 신학교에서 열린 “Stone Lecture”에서 다음과 같은 말을 했습니다. “죄가 들어오지 않았더라면, 하나님은 인간의 모든 삶의 영역에서 유일한 왕으로 남으셨을 것입니다.” 무슨 말입니까? 죄로 인하여 인간이 삶의 전 영역에서 왕노릇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기에 우리의 사명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원래의 창조 질서로 회복하는 것이 우리의 사명입니다. 이것은 이 세상에서 완전히 이루어지지 않을 것입니다. 이것은 예수님께서 재림하실 때, 완전히 회복될 것입니다. 하지만, 그 날이 오기까지, 우리는 하나님의 주권이 이 땅 구석구석까지 미치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여기까지가 간략하게 설명해 드린 아브라함 카이퍼의 “영역 주권”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2. 둘째, 니콜라스 월터스토프
지금부터는 니콜라스 월터스토프에 대해서 말씀드리겠습니다. 니콜라스 월터스토프는 1932년, 미네소타의 비글로우(Bigelow)에서 태어났습니다. 1956년, 24세의 젊은 나이에 하버드 대학교 대학원에서 박사 학위를 받았습니다. 전공은 철학이었습니다. 그 후 지금까지, 60년이 넘는 기간 동안 그리스도인 철학자로서 살아온 인물입니다. 책에서 많은 내용을 다루는데, 우리는 그 중에서 세 가지만 간략하게 생각하면서 은혜를 받고자 합니다.
1) 사회 구조의 영역을 개혁하라
월터스토프는 먼저, 회피하는 종교의 문제에 대해서 지적합니다. 회피하는 종교는 문제를 개혁하려고 하지 않고, 문제로부터 도피하는 것을 말합니다. 대표적인 예로, 중세 시대의 사람들이 이에 해당합니다. 종세 시대 사람들은 사회 구조가 사람의 작품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만드신 질서라고 생각했습니다. 마치, 사자가 짐승의 왕으로 태어나는 것이 하나님께서 정하신 질서이듯이 인간 사회의 구조도 하나님께서 만들어 놓은 질서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왕은 계속 왕이고, 귀족은 계속 귀족이고, 평민은 계속 평민이고, 노예는 계속 노예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사고 때문에, 중세 시대 사람들은 잘못된 사회 구조를 개혁하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다른 한 편으로, 하층민들은 현실 세계에서 도피하려고 했습니다. 그래서, 속세를 떠나 깊은 수도원에 들어가서 하나님을 명상하며 사는 삶이 최고로 고상한 삶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교회에서 공식적으로 임명된 직책만을 하나님께서 주신 소명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한 마디로, 직업에 귀천이 있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이런 중세 시대의 사고를 개혁한 사람이 바로, 루터와 칼빈이었습니다. 루터는 중세 사고에서 한 걸음 발전했습니다. 루터는 모든 직업이 하나님께서 주신 소명이라고 말했습니다. 직업에 귀천이 없다고 말한 것입니다. 하지만, 칼빈은 여기서 한 걸음 더 발전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소명에 따라 자신에게 맞는 직업을 찾아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이것은 직업에 귀천이 없을 뿐만 아니라, 잘못된 사회 구조를 개혁하려고 한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 두 사람의 차이점을 아시겠습니까? 루터는 중세 사고에서 한 걸음 발전하기는 했지만, 여전히 중세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그 사회의 구조를 바꾸려고 하지는 않았습니다. 여전히 중세 사회의 질서를 존중했던 것입니다. 월터스토프의 설명을 들어 보겠습니다. “루터는 여전히 사회의 전반적 직업 구조를 하나님이 정하신 것으로 생각했지, 우리가 만든 것으로써 필요할 때에는 재조정할 수 있는 것으로 보지 않았다.” 그러니까, 루터는 발전된 중세 시대적 사고를 가진 사람이었습니다. 하지만, 칼빈은 달랐습니다. 부패한 인간이 만든 잘못된 사회 구조는 얼마든지 바꿀 수 있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어떻게 이런 생각을 했을까요? 바로, 그의 신학 때문입니다. 우리가 조금 전에 살펴본, 인간의 “전적 부패”입니다. 인간의 부패로 말미암아 잘못된 사회 구조가 생겼기 때문에 그 사회 구조는 개혁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개혁해야 한다고 본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정하신 질서가 아니니까 당연히 가능하다고 본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만일 우리 주위에 잘못된 사회 구조가 여전히 남아 있다면, 우리는 그것을 개혁할 수 있고, 또 개혁해야 합니다. 그리고, 지금도 여전히 잘못된 사회 구조로 고통 당하는 나라들이 많이 있습니다. 우리는 그들을 위해 기도하고, 그 곳이 개혁될 수 있도록 도와 주어야 합니다.
2) 경제 영역을 개혁하라
니콜라스 월터스토프는 이 부분을 설명하면서, 암스테르담 자유대학교 경제학 그리고 사회철학 명예교수인 봅 하웃즈바르트(Bob Goudzwaard)의 이론을 참조했습니다. 먼저, 하웃즈바르트는 “크레마티스티게”를 비판했습니다. “경제” 해당하는 헬라어에는 “오이코노미아(oikonomia)와 크레마티스티게(chrematistike)” 두 단어가 있습니다. “오이코노미아”에서 영어 단어 economics가 나왔습니다. 오이코노미아는 위탁된 자산을 이윤이 생기도록 잘 관리해서 거기서 일하는 모든 사람들이 생계를 유지하도록 하는 경제 행위를 말합니다. 반면, 크레마티스티게는 더 많은 이윤을 남기기 위해 다른 사람을 희생시키면서까지 이윤을 추구하는 경제 행위를 말합니다.
하웃즈바르트는 서구 문명에서 ‘경제’라는 단어가 시간이 흐를수록 ‘크레마티스티케’ 쪽으로 흐르게 되었다고 비판했습니다. 그러니까, 개인적인 영역에서는 이윤이 모든 사업의 유일한 목표가 되었고, 국가의 영역에서는 국민총생산의 증대가 유일한 목표가 되어 버렸다는 것입니다. 그 결과, 경제 성장이 모든 가치와 규범 위에 군림하고 말았습니다. 이러한 경제 성장을 하웃즈바르트는 하나의 우상 숭배로 보았습니다. 왜냐하면, 어느 정도 가치 있는 것을 궁극적 가치로 취급해 버렸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무엇이 경제 영역에서 최종 목표가 되어야 합니까? 월터스토프는 모든 경제 활동이 정의와 샬롬을 이루는 것이 되어야 한다고 강조합니다. 왜냐하면, 이것이 그리스도께서 통치하시는 모습이기 때문입니다. 정의와 샬롬에 대한 부분은 조금 후에 설명을 해 드리겠습니다.
3) 빈곤의 문제를 개혁하라
니콜라스 월터스토프는 사회 구조의 영역과 경제 영역에 대해서 다룬 후, 이제 “빈곤의 문제”를 다룹니다. 월터스토프는 먼저, 빈곤이 하나님의 뜻이 아니라는 것을 강조합니다. 그의 말을 들어 보겠습니다. “한 사회에 가난한 자들이 있다는 사실은 그분의 뜻에 어긋나는 일이다. 왜냐하면, 그분의 나라가 완성되면 가난한 자가 전혀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우리가 사는 세상에 대량 빈곤이 있다는 것은 교회와 인류의 치욕이라고 말합니다. 그의 말을 들어 보겠습니다.
“교회와 인류의 치욕은 대량 빈곤 자체만이 아니다. 더 심각한 문제는, 이러한 비참한 빈곤 문제가 오늘날 불가피한 것이 아니라는 점에 있다. 아니, 이보다 더 심각한 문제는, 빈곤한 사람들의 수만큼, 전례 없는 풍요를 누리는 자들이 있다는 점이다. 풍요 속에 가난이 있고, 빈부의 격차가 더 벌어지고 있는 현실, 이것이 바로 우리의 치욕이다.” 그 다음, 중요한 말을 합니다. “’왜 가난한 자를 보살펴야 하는가?’라고 묻는다면, 그 질문에 대한 가장 진지한 응답은, 우리가 그렇게 하지 않으면 하나님이 주신 바 가난한 자가 가진 권리를 침해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내가 최대한 강조해서 하고 싶은 말은, 가난에 대한 관심은 자선의 문제가 아니라 권리의 문제라는 것이다. 샬롬에 대해 묵상해 보고 모든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이라는 공통 분모를 갖고 있음을 성찰해 보면, 그렇게 결론을 내리지 않을 수 없다.”
아마도 이 부분이 책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일 것입니다. 저는 여기서 니콜라스 월터스토프의 천재성이 나온다고 생각합니다. “왜 우리가 가난한 자들을 보살펴야 하지요?” 우리는 이런 질문을 받으면, 보통 어떻게 대답합니까? 우리는 보통, “그들이 불쌍하니까요. 그냥 마음이 끌려서요.”라고 말할 것입니다. 신앙이 조금 있는 분들은, “가난한 자들을 돕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니까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 드리기 위해서요.”라고 대답할 것입니다. 그러나, 월터스토프는 그렇게 대답하지 않았습니다. 이것을 “하나님께서 주신 권리의 문제”라고 대답한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권리”가 무엇입니까? 표준국어대사전을 보니까, 이렇게 설명했습니다. “어떤 일을 행하거나 타인에 대하여 당연히 요구할 수 있는 힘이나 자격” 그러니까, “부자가 가난한 사람을 보살피지 않는다”는 것은 “가난한 사람이 당연히 요구할 수 있는 것을 누리지 못하게 하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왜 그럴까요? 그 해답이 바로, 이 책의 제목인 “정의와 평화”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III. 결론
이 부분만 설명을 해 드리고, 말씀을 맺도록 하겠습니다. 월터스토프의 말을 다시 인용해 보겠습니다. “샬롬에 대해 묵상해 보고 모든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이라는 공통 분모를 갖고 있음을 성찰해 보면, 그렇게 결론을 내리지 않을 수 없다.” 두 가지 중요한 단어가 나옵니다. “샬롬”과 “하나님의 형상이라는 공통 분모”이라는 단어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샬롬”이 무엇입니까? 샬롬은 영어로, peace이고, 한글로는 평화입니다. 우리는 성경적인 샬롬의 개념부터 명확하게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성경적인 샬롬은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전쟁이 없는 평화로운 상태를 말하지 않습니다. 월터스토프의 설명을 직접 들어 보겠습니다. “샬롬은 무엇보다 먼저 하나님과 바르고 조화로운 관계를 맺고, 그분을 기쁘게 섬기는 상태를 가리킨다.” 샬롬은 관계와 실천으로 이루어져 있다는 것입니다.
진정한 샬롬은 하나님과 올바르고 조화로운 관계가 있어야만 성립될 수 있습니다. 이것은 궁극적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가능하게 되는 것입니다. 예전에는 심판을 받아야만 했던 재판관과 죄수의 관계였지만, 이제는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가 된 것입니다. 그리고, 진정한 샬롬은 하나님을 기쁘게 섬기는 상태가 있어야만 성립될 수 있습니다. 이것은 실천을 말합니다. 어떤 실천이 하나님을 기쁘게 섬기는 실천입니까? 바로,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과 반대 방향으로 살아가면서, 하나님과 진정한 샬롬을 누리는 것을 기대할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는 성경에서 가난한 자들에게 어떻게 하라고 말씀하십니까? 구약과 신약에서 한 구절씩 인용해 드리겠습니다. 잠 3:27, “네 손이 선을 베풀 힘이 있거든 마땅히 받을 자에게 베풀기를 아끼지 말라” 요일 3:17, “누가 이 세상 재물을 가지고 형제의 궁핍함을 보고도 도와줄 마음을 막으면 하나님의 사랑이 어찌 그 속에 거할까보냐” 우리 손에 베풀 힘이 있으면, 그것을 베풀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 손에 세상 재물이 있으면, 그것으로 궁핍한 자를 도와 주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런 실천이 있을 때, 하나님과의 샬롬이 있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형상이라는 공통 분모”는 무엇을 말할까요? 이것은 이 책의 제목 중 한 단어인 “정의”에 대해서 말하고 있습니다. 월터스토프의 설명을 들어 보겠습니다. “정의는 샬롬의 필수 요소이다. 그 이유는 샬롬이 윤리적 공동체이기 때문이다. 설사 미국의 모든 흑인이 노예 상태에 만족하고 있었다 하더라도, 샬롬은 성취될 수 없었다. 샬롬은 윤리적 공동체이기에, 정의가 결여되었을 때, 상처를 입기 때문이다.” 무슨 말입니까? 이 부분을 유심히 보아야 합니다. 과거 미국의 흑인들이 노예 상태였을 때, 그들이 그 상태에 만족했다고 하더라도 샬롬은 성취될 수 없었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흑인들이 노예 상태로 있는 것은 정의가 결여되어 있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어떤 분은 이런 질문을 할 수 있습니다. “흑인 노예들이 만족했다면 괜찮은 것 아닙니까?” 월터스토프는 아니라고 말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된 인간이 노예로 산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정의가 아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다시 본론으로 돌아와 봅시다. 빈곤의 문제도 마찬가지로 접근해야 합니다. FAO(Food and Agriculture Organization of the United Nations)의 자료를 보니까, 지금 먹을 것이 없어 굶어서 죽는 사람만, 하루에 25,000명에 달한다고 합니다. 계산을 해 보니, 3.4초당 한 명씩 죽는 꼴입니다.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된 사람이 굶어서 죽는 것은 하나님의 정의가 아닙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런 상태를 방치하는 부자들과 부자 나라들은 하나님과 진정한 샬롬을 가질 수 없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지금 하나님과 진정한 샬롬의 관계에 있습니까? 만일 그렇게 생각하신다면, 그 근거가 무엇입니까? 가난한 사람들도 우리와 똑같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된 사람들입니다. 일용할 양식은 그들이 마땅히 누릴 수 있는 권리의 문제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이번 성탄절은 어떻게 보내시겠습니까? 우리 주위를 돌아봅시다. 우리의 보살핌이 필요한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정의와 샬롬의 모습을 보여 줍시다. 우리의 삶을 통하여 그리스도의 주권이 이 땅 위에 임하길 간절히 소망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