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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나날이 좋은 날 원문보기 글쓴이: 천하태평
917년 신라 (54)경명왕(박씨) 재위:917-924(7년) 즉위
고려의 후삼국 통일
1)太祖(25년)- 2)惠宗(2년4)- 3)定宗(3년6)- 4)光宗(26년2) - 5)景宗(6년2) - 7)穆宗폐(11년4)- 7남 대종(旭) - 6)成宗(16년3)- 8남 안종(郁)헌정 - 8)顯宗(22년3) -19)德宗(3년4)-210)靖宗(11년8)-311)文宗(37년2) - 112)順宗(3개월)- 213)宣宗(10년7) - 14)獻宗(1년5)- 315)肅宗(10년) - 16)睿宗(16년6) - 17)仁宗(23년10) 17)仁宗 - 118)毅宗폐(24년7) - 319)明宗폐(27년) - 22)康宗(1년8) - 23)高宗(45년10) - 24)元宗(15년) - 25)忠烈(33년6) - 26)忠宣(5년3)- 520)神宗(6년4) - 21)熙宗폐(7년11) 26)忠宣 - 27)忠肅(24년) - 28)忠惠(6년10) - 29)忠穆(4년10)- 30)忠定(2년3)- 31)恭愍(22년11) - 32)禑王(13년9) - 33)昌王(1년5) - 34)恭讓王(3년) 신종의 7대손 |
918년 고려 건국 태조 918-943(25년) – 궁예 축출(궁예는 청주 호족 세력) – 홍유, 배현경, 신숭겸, 복지겸.
– 군사 지도자의 연합
- 고려 전기 인구 약 400만 . * 태조 왕건
920년 견훤이 신라의 합천 초계를 공격하자 신라가 고려에 구원을 요청, 왕건이 도움.
고려. 도읍을 송악으로 옮김.
924년 신라 (55)경애왕(박씨) 재위:924-927(3년) 즉위
- 견훤, 시나의 20개 성을 뺏고, 後唐의 藩臣을 자처하며 절도사의 관직을 받는다.
926년 거란(요遼)이 발해를 멸함
* 견훤
927년 견훤이 신라를 침공, 신라 경애왕 사망, (56)경순왕 재위:927-935(8년) 즉위
(견훤이 “나라 일을 맡은 대리인 = 權知國事”으로 앉힘)
– 왕건이 구원하러 갔다가 공산 전투에서 참패
927년 7월, 안동에서 왕건 대승리,
930년 고창 전투에서 왕건 승리.
933년 왕건이 後唐의 책봉을 받음
934년 운주 전투에서 왕건 승리.
935년 3월 후백제 정변(견훤,금산사 유폐. 6월 고려에 歸附.) - 견훤 투항, 상부(尙父)로 예우.
935년11월 신라 멸망 신라 경순왕이 고려에 항복, 경순왕을 경주 사심관으로 삼음
936년9월 고려가 후백제를 병합하여(일리천 전투) 후삼국 통일
<참고> 고려초 왕건의 주요 대책 * 훈요십조 (943년)
1 2천 여명의 공신 책봉
2 향리의 자제를 경성에 볼모로 잡는 기인제其人制, 공신을 출신 주(州)의 사심관事審官으로 임명.
3 6명의 왕후와 23명의 부인에서 25명의 왕자와 9명의 왕녀를 얻었다.
4 승여를 우대하고, 고구려 수도였던 평양을 새롭게 건설하고, 발해가 멸망하자 많은 발해인을 받아 들이다.
5 통혼의 여건이 안 되는 호족에세는 王氏로 賜姓
* 기인제其人制, 사심관事審官
<고려 전기 정치 세력>
1 무공 공신 세력 2 신라 6두품 세력 3 지방 호족 세력(기인제其人制,사심관事審官)
*고려의 신분제도 * 정호(丁戶)와 백정(白丁)
940년 토성분정(土姓分定) 정책 * 토성분정(土姓分定) 토성분정(土姓分定)
- 역분전(役分田) 지급- 개국공신들에게 공에 따라 토지를 분급 * 수조권 * 역분전(役分田)
940년: 역분전(役分田) 976년: 전시과 976년 시정전시과 998년 개정 전시과 1075년 경정 전시과
* 최언위(崔彦撝) 최은함(崔殷諴) * 최승로(崔承老)
943년 고려 2대 혜종(왕건의 장자→33세) 즉위 943-945(2.4년) – 모후는 나주 오씨, 돗자리 무늬 자국의 주름.
- 나주의 해상 세력(박술희)
** 고려의 중앙 관제
945년 3대 정종(혜종의 아우, 23세)923-949, 945-949(3.6년)
- 외척인 忠州 劉氏 세력이 태종의 사촌 동생 왕식렴의 西京 세력을 업고 즉위.
- 왕규(廣州 호족)의 난, (왕식렴의 난으로 보는 관점도 있음) – 박술희와 왕규 세력 몰락
- 개경 세력 몰아내고, 서경 천도 추진하다가 반발에 부딛치다.
*왕식렴
946년 백두산 화산 폭발
947년 광군[光軍] 설치: 국왕에 직속된 지방 출신의 군사 ** 고려의 군사
<참고> 혜종,정종 치세의 외척간 투쟁은 강력한 외척에게 왕실이 의지하는 선레를 남겼다.
949년 고려 4대 광종(정종의 동복 아우) 925-975, 949-975(26.2년) - 신라계 * 균여(923~973)
956년 고려 광종이 노비안검법을 실시 - 3 지방 호족 세력 견제(私兵의 조직이 거의 노비들로 이루어져 있었음 )
958년 고려 광종이 과거 제도를 실시(광종 시 8번) – 귀화인과 지방 호족 중용. - 1 무공 공신 세력의 견제
(능력에 기초한 과거도 세습적 사회 신분에 따라 응시자격이 결정되었다.)
960년 후주 멸망하고, 조광윤(趙匡胤)이 송(宋) 건국 (~1126).
963년 12월 고려 송의 연호를 사용
964년 2차 호족 숙청: 태조 이래 최고의 권력을 행사하던 박수경의 서경세력 제거.
(후에, 혜종의 아들 흥화군, 경종의 아들 경춘원군마저 죽임)
975년 고려 5대 경종(광종의 장자) 955-981, 975-981(6.2년)
- 화합 정책과 공신들의 재 등장(광종 때 핍박 받던 신하들에 자유를 줌).
경종의 왕후
1 헌숙왕후 김씨 2 헌의왕후 유씨 3 헌애왕후 황보씨(천추태후) – 穆宗의 어머니.
4 헌정왕후 황보씨- 顯宗의 어머니. 5 대명궁부인 유씨
(6대 성종의 두 자매인 헌애왕후와 헌정왕후, 고종 사촌인 헌숙왕후는 호족을 견제하려던
백부 광종의 근친혼 정책에 따라 모두 광종의 태자 경종의 왕비가 되었다.)
** 고려시대의 토지제도와 수취체계 * 고려의 토지제도
<참고> 토지의 구분
수조권에 따라 공전: 국가가 직접 조세를 거두는 토지
사전: 관리를 비롯한 개인이 조세를 거두는 토지
소유권에 따라 국, 공유지: 왕실이나 관청 등이 소유한 토지
민전: 귀족이나 관리, 농민 등개인의 사유지. – 매매, 상속, 기증, 임대등이 가능.
공전은 1국가소유지로서의 공전과 2국가수조지로서의 공전(국가가 수조)으로 나눌 수 있고,
사전은 1사유지로서의 사전과 2분급수조지로서의 사전(개인이 수조)으로 나눌 수 있다.
민전은 소유권적으로는 사전이지만 수조권적으로는 공전 또는 사전이 될 수 있다.
*전시과 체제에서는 수조권이 국가에 있으면 공전, 개인에 있으면 사전이었다.
976년 정권을 독차지하고 있던 왕선은 복수법을 빙자해 태조의 아들인 천안부원군을 죽여 물의를 일으키자.
왕선을 귀양보내고 함부로 사람을 죽이는 행위와 복수를 금하는 조처를 취하였다.
976년 시정전시과 실시(신진 관료계와 공신계를 모두 체제 안으로 흡수 통합하려는 포석): 친위세력 구축
998년 개정전시과(군인에게도 전지와 시지를 줌): 무신 우대 정책 * 전시과 (田柴科) 전시과
1075년 경정전시과(현직 관료에게만 줌): 수조권의 대상이 되는 토지가 부족해서
979년과 986년, 송이 연운십육주 회복을 위한 북벌 개시. 대패 (고려에 지원병 요청)
*고려의 중앙 관제 * 고려 지방 행정조직 * 특징
※ 지방 행정제도의 변천
981년 고려6대 성종(경종의 사촌동생이며 매제(광종의 사위)이자 처남) 961-997, 981-997(16.3년)– 신라계가 추대
- 유학 정치 이념의 실현, 중추원과 문하성을 정규 조정 안에 편성, 중앙 집권체제의 창출.(팔관회, 연등회 폐지)
- 호족의 힘에 밀려 노비안검법 폐지.
* 성종(헌정, 헌애왕후의 간통 사건)
982년 최승로의 건의를 받아들여 관제 개편
- 전국의12개 州에 州牧이란 외관을 파견.(문치 행정을 처음 시행 - 임금이 지방까지 전부 장악)
- 양주, 광주, 충주, 청주, 공주, 진주, 상주, 전주, 나주, 승주, 해주, 황주,
<참고> 고려 시대 군현은 모두 500여 곳. 그 중 수령이 파견되어 직접 다스린 곳은 110여 곳.
나머지 400여 곳의 속현은 수령의 통제를 받는 향리가 실질적인 행정을 담당했다.
983년 지방 관서(지방 호족)에서 무기를 수거(지방 사병의 실질적 소멸)
992년 유학사상을 가르치는 국자감[國子監] 개교.
993년 * 음서제 실시 – 음서로 고위직까지 오른자는 적고 생활 안정책 정도로 보는 게 좋다.
- 양경(개경,서경)과 12목에 常平倉 설립 - 의창義倉제 실시
1차 침입 2차 침입 3차 침입
993년 요 遼(거란) 1차 침공: 여진과 정안국 (定安國,938~986) 정벌을 마무리한 여세로 고려를 침공(80만)
서희가 거란의 소손녕과 담판, 강동 6주를 양도받음(여진 견제)
- 송과 단교하고 거란과 통교, 遼의 연호 사용.
1 5대 경종의 왕후 : 셋째헌애왕후 황보씨(천추태후) – 穆宗의 어머니. 넷째헌정왕후 황보씨- 顯宗의 어머니.2 6대 성종의 누이 헌애(애인 김치양), 헌정(애인 안종) 3 7대 穆宗에게 아들이 없자 김치양과 천추태후는 둘 사이에서 낳은 아들로 후사를 이을 계획4 穆宗이 강조를 불러들였는데 강조는 오히려 穆宗까지 죽임. (강조의 정변)- 강제 출가해서 승려가 된 대량원군을 8대 顯宗으로 추대 |
997년 고려7대 목종(경종과 천추태후(헌애왕후)의 아들) 18세 즉위. 980-1009, 997-1009(11.4년)
- 천추태후(김치양) 섭정 * 김치양.천추태후(헌애왕후)
* 남색의 상대 유행간[庾行簡]
998년 개정 전시과(군인에게도 전지와 시지를 줌) : 무신 우대 정책
1004년 遼와 宋 전연의 맹(澶淵之盟)
1002-1007년 탐라에서 화산 폭발.
1005년 중앙에서 임명한 관원을 군현에 배치(20명: 18년 56명의지주와 현령 20명. 1105년 현령 27명…)
1009년 강조의 정변(김치양과 천추태후의 세력 제거, 목종 폐위, 강제 출가시켰던 대량원군을 顯宗으로 추대 )
8대 현종(태조의 아들 안종~996과 헌정왕후~992의 아들 )17세,992-1031, 1009-1031(22.3년) - 신라계의 지지를 받음
- 근친혼이 아닌 13명의 다양한 성씨의 왕후와 후궁을 둠
*강조
1010년 요遼 (거란) 2차 침공(요, 성종 친정,40만,2개월) 강조 포로(사망). 현종은 공주를 거쳐 나주까지 피신.
- 개성 함락, 현종이 입조한다는 조건으로 회군, 퇴로에 양규와 김숙흥 등의 공격(양규 전사)
1011년 개경에 돌아온 현종은 요에 친조하지 않았고, 강동 6주를 반환해 달라는 요청에도 응하지 않았다,
1013년 거란과 국교를 끊고 다음 해에 송나라와 다시 교류.
1018년12월 요 遼 (거란) 3차 침공(소배압,10만)- 청야 전술
- 고려의 군현제도 완성
1019년 강감찬(948-1031) 귀주대첩: 遼 (거란)군 대파.
<전쟁 결과> 1 고려 거란 국교 회복. 2 고려는 요의 연호를 사용
3 고려-송-요 3국의 대등한 세력 균형. * 여요전쟁(30년) * 고려-거란 전쟁
1)太祖(25년)- 2)惠宗(2년4)- 3)定宗(3년6)- 4)光宗(26년2) - 5)景宗(6년2) - 7)穆宗폐(11년4)- 7남 대종(旭) - 6)成宗(16년3)- 8남 안종(郁)헌정 - 8)顯宗(22년3) -19)德宗(3년4)-210)靖宗(11년8)-311)文宗(37년2) - 112)順宗(3개월)- 213)宣宗(10년7) - 14)獻宗(1년5)- 315)肅宗(10년) - 16)睿宗(16년6) - 17)仁宗(23년10) |
1031년 고려9대 덕종(현종의 장남) 16세 즉위. 1016-1034, 1031-1034(3.4년)
1034년 10대 정종 17세 즉위1018-1046 1034-1046(11.8년) 평화기
(현종과 원성태후의 둘째 아들이자 덕종의 친동생이며 문종의 이복 형)
1039년 광종때 폐지된 노비종모법(奴婢從母法)을 다시 부활, 노비 여성에게서 태어나는 자녀는 노비가 되도록 함,
1044년 천리장성 완공
* 공음전
[고려 100년의 평화기] 1046-1156 - 신하가 국왕을 지배하는 방향으로 전개
1046년 11대 문종(현종의 3남)이 28세 즉위 1019-1083 1046-1083(37년) - 고려의 황금기
- 송과 다시 정상적인 국교. * 최충
1055년 최충이 구재학당 세우다
1067년 흥왕사(興王寺)를 세움 - 대각국사 의천 義天
1076년 경정 전시과(현직 관료에게만 줌):수조권의 대상이 되는 토지가 부족해서
<참고> 중앙 관원의 세습적 집단을 창출함으로써 호족 연합을 문신관료 제도로 대체,
11세기 후반에 해주 최씨(최충), 경원 이씨(이자연)의 문반 가문이 등장
이허겸 - 이한이자연 - 이석 - 사숙왕후(13선종의 정비이자 14헌종의 어머니)- 이호 - 장경궁주 이씨(12순종의 제3비)- 이자겸 - 순덕왕후 (16예종의 제2비, 17인종의 어머니) - 연덕궁주 이씨(17인종의 왕후)- 복창원주 이씨(17인종의 왕후)- 이자량- 이정 - 이자의- 원신궁주 이씨(선종의 제3비, 한산후 균의 어머니) |
* 왕실과 경원이씨 가문의 혼인관계
1083년 12대 순종(문종의 장남3개월) 37세로 즉위,1047-1083, 1083-1083(3개월)
1083년 13대 선종(문종의 2남) 즉위. 1049-1094, 1083-1094(10.7년)
1085년 왕의 아우 의천(義天)이 송나라에 들어가 2년 동안 불법을 공부하고 돌아옴
1094년 14대 헌종(선종의 장남1.5년)이 11세로 즉위1084-1097, 1094-1095(1.5년)
- 나이가 어리고 소갈증으로 병약하여 어머니 사숙태후가 수렴청정
1095년 이자의가 생질인 한산후 균을 옹립하려 하자 계림공 왕희(숙종)가 미리 알고 장사 고의화를 시켜 이자의를 살해.
* 이자의
1095년 15대 숙종(문종의 3남 순종과 선종의 동복아우10년) 조카를 밀어내고 즉위41세, 1054-1105,1095-1105(10년)
1096년 6촌 이내의 혼인 금지.
1097년 대각국사 의천 천태종 세움 * 대각국사 의천
1099년 남경(南京)개창 도감 설치, 1104년 南京宮 낙성
1102년 고주법(鼓鑄法)을 제정하여 해동통보(海東通寶) 1만5000관을 만들어 문무백관과 군인들에게 분배.
1104년 1차 여진정벌(대내적으로 문벌의 귀족세력에 대한 견제가 목적 - 국왕 중심의 통치 질서 수립) - 고려 패배
- 별무반 창설 - 신기군(神騎軍 기병), 신보군(神步軍 보병), 항마군(降魔軍 승병). 17만
1105년 16대 예종(숙종의 장남16.6년)이 27세 즉위.1079-1122, 1105-1122(16.6년)
- 열 집 가운데 아홉 집이 비었다.(流亡) - 감무 파견
1107년 2차 여진정벌 : 윤관이 여진을 침공, 동북 9성 공략(실패한 정벌) * 윤관 * 고려 여진 전쟁
윤관,동북 9성 강동 6주
1109년 지방 군현에 관둔전을 설치(지방재정 충당).
- 여진에 동북 9성 반환
1115년 여진족 아골타(阿骨打), 황제를 칭하고 금(金) 건국,
* 왕실과 경원이씨 가문의 혼인관계
1122년 17대 인종 仁宗(예종의 장남)이 14세 즉위.1109-1146, 1122-1146(23.10년) 한안인 ↔ 이자겸
- 인종의 숙부 대방공 왕보의 역모사건 왕보의 역모 사건 * 이자겸
– 외조부인 이자겸이 실권(이자겸의 3녀, 4녀를 인종과 결혼시킴)예종 때 등용한 인사 50여명을 살해.
1125년 여진(金)이 거란(遼)을 멸함.
1125년 여진(金)이 고려에 군신관계 요구, 보주 지역 영유권을 확약 받는 조건으로 금나라를 상국으로 섬기다.
1126년2월, 국왕의 쿠테타 = 이자겸 의 난 (인종의 장인이자 외할아버지)
- 인종의 이자겸 제거 기도 실패, 궁궐 방화, - 인종은 이자겸의 집에 연금.
- 이자겸은 법성포 유배. 다음해 무신 척준경도 정지상의 탄핵으로 암타도에 유배
* 이자겸 * 척준경
1127년 북송의 휘종(徽宗),흠종(欽宗)이 금(金)의 포로가 됨. 북송 멸함 = (정강의 변). 남송 건국
1127년 정지상 등의 추천으로 묘청을 왕사로 삼음
1129년 서경에 새 궁궐 완성.
묘청의 세력
<참고> 고려 왕조가 군현의 절반에 중앙관원을 파견하는데 2세기 반이 걸렸다.
<참고> 문벌 귀족 : 경원 이씨. 파평 윤씨, 해주 최씨, 경주 김씨
<참고> 고려의 지배층 변화
호족과 육두품 → 문벌 귀족 → 무신 → 권문세족 → 신진 사대부
1146년 고려18대 의종(인종의 장남24.7년) 즉위.1127-1173,1146-1170(24.7년)
- 환관과 내시를 친위 세력으로 끌여들여 왕권 강화에 노력.
* 환관 정함 [鄭諴]
1151년 정습명 - 의종의 비행과 향락을 간하고 사직, 자결~
1152 홍성, 1155 완산, 1162 황해도와 강원도, 1163-64 경상도 지역에서 유망농민을 중심으로 농민 항쟁
17)仁宗 -118)毅宗폐(24년7) -319)明宗폐(27년) - 22)康宗(1년8) - 23)高宗(45년10) - 24)元宗(15년) - 25)忠烈(33년6) - 26)忠宣(5년3)-520)神宗 (6년4) - 21)熙宗폐(7년11) |
1170년 무신정변, 무신정권(100년) 수립, * 내시 김돈중
19대 명종(인종의 3남, 의종의 동복 아우) 즉위. 의종은 거제도로 유배. 1131-1202 1170-1197(27년)
* 이의방 * 이고 * 정중부
1171년 이고의 반란 도모, 이의방(1170-1174, 4년), 에 의해 피살
1173년 김보당, 거제에 유배된 의종을 경주로, 의종은 이의민에 의해 살해. * 김보당의 난
이의방의 딸(사평왕후) 태자비가 되다. 이의방은 조위총의 난을 진압하러 두 번째로 서경에 갔다가 패하고
돌아오는 길에 정중부(1174-1179 5년)의 아들 정균과 승려 종참에게 살해당함.
1176년 공주 명학소에서 망이·망소이의 난[亡伊 亡所伊] * 향,소,부곡 * 부곡(部曲)
- 신분제 타파를 목적으로 충청도 지역에서 일어난 농민과 천민들의 봉기.
<참고> 민란
1172년: 서북의 창주, 성주, 철주의 3주민의 항쟁 1176년: 망이·망소이의 난
1182년: 전주 군인과 관노의 항쟁 1198년 만적의 난
1177-79년 서북 지방에 조위총 여중()의 봉기 지속
무신집권 시대의 민란
1179년9월 경대승26세(1179-1183 4년- 病死), 문신들과 결탁하여 정중부와 그의 아들 정준을 살해.
– 기존의 최고 권력기구인 중방을 무력화 시키고, 새로운 권력 집단인 도방을 신설 - 개인 경호 부대(사병).
- 실력 있는 무신들의 연립 형태를 이룸(무신 정권 이전으로 복귀시키려 노력). – 이의민이 경주로 피신
<참고> 고려사 열전에서 반역의 무신으로 다루지 않았다
* 중방 → * 도방
1183년 경대승 병사, 이의민(1183-1196 13년)이 경주에서 명종의 부름을 받고 상경, 실권 장악
1188년 보조국사 지눌, 정해결사 조직. * 지눌
1191년 이규보의 <동명왕편> * 동명왕편(東明王篇) 내용
<참고> 명종의 小君 10여명, 모두 승여가 됨.
1193-94년 김사미·효심의 난 * 김사미의 난과 효심의 난 한계점
무신정권 지배 기구 농민과 천민의 저항
순서 | 이름 | 시작년도 | 완료년도 | 집권 | 왕 | 비고 |
1대 | 이의방 | 1170년 | 1174년 | 4년 | 19明宗 | 의종 폐위, 강종의 장인 |
2대 | 정중부 | 1174년 | 1179년 | 5년 | 의종 폐위 | |
3대 | 경대승 | 1179년 | 1183년 | 4년 | ||
4대 | 이의민 | 1183년 | 1196년 | 13년 | ||
5대 | 최충헌 | 1196년 | 1219년 | 23년 | 20明宗폐21神宗22熙宗폐23康宗24高宗 | 명종 폐위, 희종 폐위 |
6대 | 최우 | 1219년 | 1249년 | 30년 | 24高宗 | 최충헌의 아들 |
7대 | 최항 | 1249년 | 1257년 | 8년 | 최충헌의 손자 | |
8대 | 최의 | 1257년 | 1258년 | 1년 | 최충헌의 증손자 | |
9대 | 김준 | 1258년 | 1268년 | 10년 | 24高宗25元宗 | 최항의 측근 |
10대 | 임연 | 1268년 | 1270년 | 2년 | 25元宗 | 최항의 측근 |
11대 | 임유무 | 1270년 | 1270년 | 1년 | 임연의 아들 |
1196년4월, 최충헌(-1219 23년) 최충수(-1197) 형제가 이의민을 살해하고 정권을 장악, * 최충헌
- 4대 62년 최씨 정권(-1258) 수립. * 두경승(杜景升) 두경승 (두경승)
1197년 최충헌이 66세의 명종을 폐위시키고 20대 신종(인종의 5남)을 즉위시킴 1144-1204 1197-1204(6.4년)
- 최충수, 자신의 딸을 태자비로 삼으려다가 형 최충헌과 충돌,살해.
1198년 만적의 난*만적의 난 에 관해서
<참고> 최치원이 나라의 대사와 인사권을 마음대로 휘두르다
1199년 명주(강릉)에서 도적 때가 일어나 삼척, 울진 2현을 함락.- 경주지역 농민 항쟁
1202년 도방을 다시 설치. 탐라 독립 운동 * 도방
1204년 21대 희종 (신종의 장남) 선위을 받음. 1181-1237 1204-1211(7.11년)
1211년 희종, 내시 왕준명 등과 함께 최충헌을 죽이려다가 실패. 도리어 폐위 당하여 강화로 유배.
1211년 22대 강종(19대 명종의 장남) 60세로 즉위 1152-1213 1211-1213(1.8년)
1213년 23대 고종 (강종의 장남) 22세로 즉위1192-1259 1213-1259(45년) * 이규보
- 할아버지 19명종이 유배될 때 아버지 22강종과 마찬가지로, 8세부터 안악현에서 따로14년간의 유배 생활.
1216년 몽골군에 좇겨온 거란의 한 무리를 강동성에서 섬멸.
1216년 강동성 전투(고려·몽골·동진(東眞)의 연합군이 남은 거란 유종을 정벌한 전투)
1218년 몽골군에 쫓긴 거란(金)군이 한반도 북부로 밀려들어오자, 몽골군이 강동성에 거란군을 몰아넣고 군량 지원을 요청
1219년 최충헌 → 최우
1219년 야별초夜別抄 설치. (최우가 권력 보호를 위해 조직한 사병)
<무인 실세> 1219-1249 최우(이)(30년)
1249-1257 최항(최우와 창기 사이의 서자8년)
1257-1258 최의(최항과 여종 사이의 서자 11년)
1258-1259 김준(金俊:최충헌의 가노였던 김윤성의 아들)이 실권을 맡았다.
1225년 최우가 정방(政房)과 서방(書房)을 설치. – 문신들이 관직에 진출하는 통로가 됨
1231- 1232년 몽골 1차 침공(살리타)-충주까지 진격 - ※ 여몽전쟁 29년 간략사1231-59지도
- 몽골, 서북면 14개 요성에 72명의 다루가치를 남김 * 다루가치 다루가치
1232년6월, 강화천도 1232년8-12월, 2차 침공, 살리타 전사 * 여몽전쟁
- 대구 팔공사 부인사에 간직했던 초조대장경 화재로 상실. * 고려-몽골 전쟁 (30년 항쟁)
1233년 몽골, 남송과 연합하여 카이펑을 함락, 금(金)나라를 멸함.
1235-1239년 몽골의 제3차 침입,
- 4년간에 걸쳐 전국 각지를 휩쓸었다(전주, 경주).
1236년 강화에서 팔만대장경 조판에 착수. (-1251) 완성.
1238년 경주 《황룡사(皇龍寺) 9층목탑》 소각당함
1254-1256년 몽골의 제6차 침입, - 나주,목포: 상주,대구,합천까지 약탈: 북서부 지방 완전 파괴,
남녀 약 2십만의 포로를 끌고 감, 태자의 입조를 약속.
- 지배층의 과도한 수탈과 몽골의 약탈로 이중의 고통을 격었다.
1257년 몽골의 제7차 침입,(1258년 철령 이북지역이 몽고의 쌍성총관부의 지배에 들어감)
1258년 김준 등이 3별초의 힘을 빌어 최의를 살해.
(이후,새로 군사적 독재자가 되려는 부류와 문신사이의 투쟁 20년)
1258년 쌍성총관부 설치(-1356): 함경남도 화주(영흥)에 설치한 통치기구(초대 총관 조휘로부터 종증손 조소생까지 세습)
’ 쌍성총관부
1259년 (고종 46년) 왕의 출륙과 입조를 약속하고 태자 전(倎) 등 40여 명을 몽골에 보내고, 몽골에 항복.
* * *
고종 46년(1259)부터 원종 9 년(1268)까지 김준(金俊)이 실권을 맡았고, (68년,임연에게 제거당함),
원종 9 년(1268)부터 원종 10년(1269)까지 친정을 하였으며,
원종 10년(1269)부터 원종 11년(1270)까지 임연(林衍)이 실권을 맡았으며,
원종 10년(1269) 6월~11월에 잠시 영종(英宗)이 옹립되었으나, 원나라의 압력에 의해 폐위.
(12월 원종, 몽골에 입조.)
원종 11년(1270)에 임연의 아들, 임유무(林惟茂)가 잠시 실권을 맡았고,
(5월 귀국한 원종이 서경에서 강화 철수 명령. 반대하는 임유무를 제거)
원종 11년(1270)부터 원종 15년(1274)까지 다시 친정을 하였다.
1259년 24대 원종(고종 의 장남 ) 강화(볼모)차 원에 갔다가 고종이 죽자 귀국,41세. 1219-1274, 재위:1259-1274(15년)
1260년 쿠빌라이(蒙 5대 元1대 세조: 34년) 상도(上都)에서 몽고의 칸으로 즉위(~1294).
1268년 임연으로 하여금 실권자인 김준을 죽이게 했으나, 이어 집권한 임연과 또다시 대립.
1269년 원종, 임연에 의해 폐위되었으나, 원나라의 도움으로 5개월 만에 다시 왕위에 올랐다.
- 전민변정도감을 설치(권신에 빼앗겼던 토지 돌려줌 - 또 다른 권력자에 돌아감) * 전민변정사업
1269년 동녕부지도 설치(-1290): 최탄 등이 서경에서 반란을 일으키고 자비령 이북의 서해도 6성과 함께 원에 투항,
원은 서경에 동녕부를 설치하고 6성(평안도지역)을 직할통치하였으며 원나라와 국경이 되었다.
1270년 임연이 등창으로 죽자 그의 아들 임유무가 지위를 승계.
1270년 개경 환도, 무신 정권 종결
1271년 녹과전(녹과전祿科田) 제도 성립(녹봉을 제대로 받지 못하는 관리에게 토지를 분급한다는 원칙을 마련)
- 쿠빌라이 칸, 국호를 원(元)이라 힘(1271~1368).
1274년 원에 입조해 있던 세자 심(충열왕)과 쿠빌라이의 딸 제국대장공주와 결혼
1298년(8월) 충선왕
1308~1313년(5년) 복위 충선왕
* 제국대장공주
1274년6월, 25대 충렬왕(원종의 장남) 1236-1308, 재위1274-1298-(8개월)-1308(24+10년)
- 5월 제국대장공주와 혼인하고 변발·호복 등 몽골 풍속에 따랐다, 8월에 돌아옴.
- 재위 34년 동안 11차례 원에 왕래하고, 1284년에는 1200의 수행원이 따라갔다.
- 대토지 소유의 발달로 일반 농민의 빈곤이 심해짐. * 안향
1274년 고려와 원나라의 연합군이 1차 일본 침공 (주력은 고려 병력)
10월. 몽골,고려(김방경),남송군: 2만6천. 900척 * 원나라의 일본 원정
1275년 원나라의 계속되는 공녀 요구에 호응, 처녀들의 혼인 금지 조치.
1277년 원나라의 병마를 사육하기 위해 제주도에 목마장 설치.
1278년 다루가치와 원의 군대, 그리고 홍다구를 비롯한 부원(附元) 세력을 원으로 소환케 함. – 독자적인 왕권 행사.
1279년 남송(南宋) 멸망.
1281년5월, 2차 일본 침공(고려 병력과 망한 남송의 중국 병력) * 삼국유사 * 정동행성(征東行省)
* 홍다구
1288년( 1298, 1301년) 전민변정도감(田民辨整都監)을 설치
* 전민변정사업
1290년 합단의침입: 哈丹賊이 원나라 쌍성총관부의 쌍성을 함락, 다시 고려의 등주(지금의 함경남도 안변)를 함락하자,
왕은 강화로 피난.(-1291)
1290년 동녕부를 폐지, 국토 회복.
1296년 홍자번의 편민 18사
1297년 제국대장공주 사망, * 유청신(부곡 향리 출신)
세자 원(충선왕)이 귀국하여 궁인 무비와 환관 도승기, 최세연 등을 죽이고 원나라로.
1298년1월 26대 충선왕이 24세로 선위를 받음.1275-1325, 재위1298, 1308-1313(8개월+5년)
1277년 세자로 책봉, 다음 해 원나라에 가서 몽골 이름을 받음.
1296년 몽골 황실의 진왕(晋王) 카말라의 딸 보탑실린 공주(계국대장공주)와 원도에서 혼사
(8월에 계국대장공주의 조비 무고 사건으로 인해 국새를 내어놓고 원으로 압송 - 충렬왕 복위)
1307년 원나라의 성종이 죽자, 충선왕은 3대무종(武宗)을 옹립하는 쿠테타에 참여. 이로써 원 황실과의 친분이 두텁게 되어
심양왕에 즉위하였으며
1308년 충열왕 사망하자, 26대 충선왕이 34세로 복위 <심양왕 겸임> 1308-1313(8개월+5년)
1310년 5월 충선왕, 두 달만에 숙부 제안대군에게 치세를 대행케 하고 원나라에 가서 전지(傳旨)를 통하여 국정을 행함.
왕이 해마다 많은 물품을 원나라로 가져가고 계속 원나라에 머물었다, 왕의 귀국 운동에도 귀환하지 않자
세자 감을 왕으로 추대하려는 움직임. - 세자 감과 그 세력을 살해.
1313년~1330년(17년) 충숙왕(충렬,충선, 충숙왕은 나라의 감독을 신하에 맡기고, 원의 수도에서 대부분의 시간을 보냈다)
1330년~1332년(2년) 충혜왕(1315-1344)
1339년~1344년(5년) 복위 충혜왕(사냥과 주색에 빠짐)
1344년~1348년(4년) 충목왕1337-1348 (충혜왕의 장남) 8세 즉위 - 모후 덕녕공주(德寧公主) 섭정
1348년~1351년(2년) 충정왕1338-1352 (충혜왕의 서자 2남) 10세 즉위(附元勢力이 추대) 元 순제가 충정왕을 폐함(52년 강화에서 독살)
1351년~1374년(22.11년) 공민왕(충숙왕의 아들) 22세 즉위.
1313년27대 충숙왕(충선왕의 2남) 20세. 1294-1339, 재위:1313-1330, 1332-1339(17년+7년) (고려말을 못함).
- 심양왕직을 고수하던 충선왕이 몽고로부터 고려로 돌아가라는 압박에 못견뎌 선위. 충선왕이 상왕 행세
- 충선왕은 조카 왕고를 고려의 세자로 세움(훗날의 불씨).
1314년 충선왕이 자신의 심양왕 직위를 조카이자 세자인 왕고에게 넘겨줌. - 충선왕, 연경으로 돌아감
1320년 원의 3대무종(武宗) 세력 거세.(고려왕도 무종 세력임)
충선왕, 토번 사캬로 유배(-1323) (1325년 연경에서 51세로 사망)
1321년 충숙왕, 심왕당(왕고)의 참소(왕후 복국장공주 의문의 죽음,구타 설)를 받고 원나라에 소환, 3년간 잡혀 있었다
- 왕고가 국왕 행세
1323년 원나라 영종이 살해되고 태정제가 즉위, 태정제는 충숙왕에게 국왕인을 돌려주고. 왕고는 다시 심양으로 돌아감.
1325년 귀국한 충숙왕은 왕고에게 양위하려 했으나, 한종유 등 의 반대로 취소하고, 왕자 정(충혜왕)을 세자로 삼은 뒤
1330년 양위.
26)忠宣 - 27)忠肅(24년) - 28)忠惠(6년10) - 29)忠穆(4년10)- 30)忠定(2년3)- 31)恭愍(22년11) - 32)禑王(13년9) - 33)昌王(1년5) - 34)恭讓王(3년) 신종의 7대손 |
1330년 충숙왕이 선위, 28대 충혜왕(충숙왕과 공원왕후 홍씨의 장남 6.10년)16세 즉위 - 고려의 연산군
1315-1344, 재위:1330-1332, 1339-1344(2+5년)
- 포악한 왕, 강간과 음행, 사무역(私貿易)으로 재화를 모음, 무리한 세금 징수하여 유흥에 탕진,
* 사급전
1332년 향락과 여색으로 연경에 소환(-1336). 충숙왕 재 즉위
1339년 충숙왕 사망하자 충혜왕이 재즉위
- 5월, 부왕의 후비인 수비 권씨, 8월에는 또 다른 부왕의 후비인 경화공주 백안홀도를 강간
1340년 원나라로 끌려갔던 충혜왕이 다시 고려로 돌아 옴. – 2월 기황후, 원 혜종의 제2황후로 책봉
1343년 주위의 반대를 무릅쓰고 삼현(三峴)에 새로 궁궐을 지음
1344년 충혜왕이 원나라에 의해 다시 폐위되어 원나라 게양현으로 유배를 가다가 악양현에서 죽었다. * 기황후
* 기철 * 고용보(高龍普)
1344년29대 충목왕(충혜왕의 장남) 8세 즉위. 1337-1348 재위:1344-1348(4년.10개월)
- 모후인 덕녕공주(德寧公主)가 섭정
1347년 정치도감 설치(주로 권문세족이 중심이 되어 부원세력을 제거하려함 - 토지 탈점 징벌)
1348년 충목왕 병사, 30대 충정왕(충혜왕의 서자 2남)1338-1352 재위1348-1351(2.3년) 10세 즉위 – 附元勢力이 추대.
- 재위하는 동안 적모(嫡母) 덕녕공주(德寧公主)가 섭정을 하였다.
1350년 고려 국내에서 처음으로 왜구의 습격이 있었다.(공민왕 재위 기간115 회의 왜구 침입, 우왕 재위 기간378회)
1351년 元 순제가 파국으로 치닫는 고려의 모습을 보고 충정왕을 폐위하고(52년 강화에서 독살)
31대공민왕(충숙왕의 아들) 21세, 1330-1374 재위:1351-1374(22년.11개월)
- 10년의 숙위 생활을 끝내고, 고려 복식으로 갈아 입고 귀국. * 이제현(1287~1367) *《역옹패설》
- 변발, 호복 착용 폐지. 56년 원나라 연로 폐지
1353년 기황후의 아들이 원나라의 황태자가 됨.(만만태자가 고려에 와서 기황후 어머니를 모시고 거대한 축하연)
1354-56년 원나라의 지원 요청으로 최영, 이방실, 안우, 김용, 정세운, 병력 2천을 이끌고 원나라에 파병(홍건적의 난)’
1356년5월, 정동행성(征東行省) 이문소[理問所]를 폐지(61년 원의 위협으로 복구) * 쌍성총관부지도
쌍성총관부(1258-1356)를 격파하고 잃은 영토를 회복.- 이자춘, 이성게가 내부에서 호응 다루가치
공민왕, 부원세력 기철 일족 멸함. – 원의 간섭 종식 * 기철
- 이후 고려의 정치는 기존의 권문세족과 신진 사대부기 서로 대립하는 가운데 전개됨.
쌍성 총관부 공민왕의 영토 수복 홍건적과 왜구의 격퇴
1358년 최영이 이끄는 고려군이 4백 척 규모의 함대로 오예포(吾乂浦)에 침략한 왜구를 물리침.
1359년12월 홍건적 1차 침공. (왕이 안동으로 피신) * 홍건적의 고려 침공
1361년10월 홍건적 2차 침공. 1361년 11월 개경 함락 (-1362)
1362년 나하추, 쌍성총관부를 탈환하기 위해 내습, 이성계에 대패. * 조소생
1363년 흥왕사의 변 – 국왕 측근 세력의 핵심적인 위치의 김용이 원나라의 지원을 받던 덕흥군과 내응하여
흥왕사의 행궁에서 공민왕의 시해를 기도했으나 최영에 의해 진압. 그러자 덕흥군은 1364년
원나라군 1만 명을 이끌고 고려의 서북면에 침입. 최영과 이성계에 의해 섬멸되었다.
1363년 문익점, 목화씨
1364년 신돈의 계혁정책 시행 * 신돈(1322-1371)
1365년 노국공주 사망. (1349년 결혼)
신돈을 왕의 師傅로 삼음(사실상의 섭정) - 내재추 [內宰樞] 설립
1366년 공민왕이 전민변정도감(1288,1298,1301, 1352,1381, 130년 동안7차)을 설치하고 신돈을 판사로 임명
- 권문세족이 부당하게 빼앗은 토지와 노비를 본래의 소유주에게 돌려주거나 양민으로 해방시켰다.
* 전민변정사업
1367년 성균관을 다시 지음(신진사대부 세력 결집) * 사대부 * 신진사대부
1368년 원(元)나라 망함. 명(明)나라 건국(1368~1644). * (원 혜종) * 기황후
1369년 명과 고려 조공-책봉 관계 성립
1370년 기철에 대한 보복으로 원이 동녕부에 침공하자, 이성계 동녕부 정벌.
1371년 임견미 세력에 의해 신돈 제거
1374년 제주도 목호의 난. – 최영이 진압. * 이색(1328-1396)
9월, 공민왕(44세), 홍윤, 등에 의해 시해.
<참고> 극심한 가뭄: 1365, 1368, 1372, 1374, 1376, 1377년
<참고> 왜구 - 일본의 남북조 혼란기(1336~1392)
고려 시대 왜구의 침입은 1223년(고종 10년) 김해 지방에 침입하였다는 것이 처음이다.
이후 100여 년 동안 기록에 나타나는 왜구의 침입은 10여 차례 정도이다. 충정왕 2년(1350년)부터
왜구의 침입이 본격화 되기 시작하였다. 우왕 때는 재위 14년 동안 378회의 침입을 받았다.
1374년 32대 우왕1365-1389 재위:1374-1388(13.9년) (공민왕의 장남 - 사냥과 주색에 빠짐) 9세 즉위
- 우왕 재위 기간378회의 왜구 침입
- 이인임등 권문세족이 우왕 옹립, 이인임이 섭정(1383년에 친정). 친원 정책 (정도전, 전라도 귀양 )
- 권문세족의 토지 탈점, 인사행정 문란, 왜구의 침략 극심, * 최영
1380년 이성계, 운봉에서 왜구 퇴치(정몽주도 함께 참전)
<왜구의 침입> * 고려말 왜구
- 공민왕 재위 기간115회, 우왕 재위 기간378회의 왜구 침입.(1375-1379 사이 90회)
홍산 대첩(최영1376), 진포대첩(1380), 황산대첩(이성계1380), 남해대첩(관포대첩)(최무선1383),
<참고> 고려 후기에 중앙 관원층을 팽창시킨 요인
1) 기존 중앙 가문이 스스로 팽창
2) 과거를 거쳐 새로운 향리 인물이 지속적으로 등용
3) 무공으로 승진의 기회를 얻음
1387년 12월 명나라, 철령 이북의 땅이 원나라에 속했던 것이므로 요동에 귀속시켜야 한다는 이유로 철령위鐵嶺衛 설치
1388년 1월 우왕의 심복인 최영이 이성계를 끌어들여 친위 쿠데타 단행, 이인임 일파(임견미,염흥방↔조반) 제거
5월 이성계, 조민수가 위화도 회군(병력 4만)을 통해 정권을 장악, 최영 숙청, 우왕폐위.
고려 33대 창왕(우왕의 장남) 8세 즉위 1380-1389 재위:1388-1389(1.5년)
* 위화도 회군
1389년 34대 공양왕(20대 신종의 7대손2.4년) 즉위 1345-1394, 재위:1389-1392(2.4년)
1389년 박위가 대마도 침공
1390년 안찰사를 관찰사로 대체, 30여명의 감무(현령) 배치. – 지방에 중앙 관원을 임명한 최초의 중요한 사건이었다.
- 역사상 처음으로 문반이 통제하는 진정한 지방 관찰사 제도를 갖게 됨.
1391년 사전 개혁(私田改革) – 개혁론(정도전)과 수정론(이색) * 조준 [趙浚]
과전법(科田法) 공포(사전을 급격히 줄이고 공전을 늘렸다). 관료 본인 즉 一代에 한하여 수조권을 인정해 준 제도
1) 토지 국유화에 따른 私田의 재분배, <참고> 守信田(과부 수절), 恤養田(어린 자식)
2) 수확의 5/10가 일반화되었던 수조율을 대폭 경감, 국고와 경작자 사이에 개재하는 중간착취 배제
역분전[役分田] 전시과(田柴科) 과전법(*과전법 科田法) 균전제(均田制) 정전제(丁田制) 연수유답(烟受有沓)
*정몽주(1338-1392)
<참고> 고려의 중앙 관원 가문과 관인층의 구조는 (무신 집권, 몽고 간섭기를 거치면서도)왕조 끝까지
전체적으로 견고한 연속성을 보였다. (조선 건국을 거치면서도 영속성은 지속되었다.)
* 정도전(1342-1398)
1392년 3월 정몽주 제거
7월17일 조선의 태조1335-1408 재위:1392-1398(6.3년)
1393년 조선 태조가 국호를 조선으로 개칭, 면리제[面里制] 시행
- 저선의 사은사 이염이 명에서 구타당함(이후 조선 사신 입국 거부)
1394년 한양 천도 조선경국전 [朝鮮經國典] ** 조선의 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