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르다드의 서, 제34장 어머니 알에 대하여
미르다드가 말했다.
“오늘 밤은 적막하니 미르다드는 그대들과 함께 ‘어머니 알(Mother Ovum)' 에 대해 명상하고 싶다.
공간과 그 속에 있는 것은 알(Ovum)이며, 시간은 그 알의 껍데기이다. 이것이 ‘어머니의 알’이다.
대기가 지구를 감싸고 있듯, ‘진화한 신(god evolved) ' , 즉 커다란 신(macoro god)’이 이 알을 감싸고 있다. ‘커다란 신은 육체를 갖지 않은 생명으로, 무한하게 소멸하지 않는다.
‘내포된 신(god involved)’ , 즉 ‘작은 신(micro god)' 이 알 속에 있다. ’작은 신‘은 육체를 가진 생명이며, ’커다란 신‘과 마찬가지로 무한하며 소멸하지 않는다.
이 ‘어머니 알’은 인간의 잣대로 잴 수는 없지만 한계를 갖고 있다. 그 자신이 무한한 것은 아니지만, 모든 면에서 무한과 경계를 맞대고 있다.
우주에 있는 모든 사물이나 존재는 모두 작은 신을 갖고 있는 시공에 불과하다. 그러나 내포된 작은 신은 각각의 성장단계에 따라 다르다. 인간 속의 작은 신은 동물 속의 작은 신보다 시공의 폭이 크다. 동물 속의 작은 신은 식물 속의 작은 신보다 시공의 폭이 크다. 마찬가지로 작은 신이 갖는 시공의 넓이는 피조물의 범위에 따라 변한다.
보이는 것이든 보이지 않는 것이든, 모든 사물이나 존재를 대표하는 알은 ‘어머니 알’속에 가지런히 놓여 있다. 즉 커다란 알은 그 틈새에 자기보다 조금 더 작은 알을 감싸 안고 있고, 이런 식으로 가장 작은 알까지 이어진다. 가장 작은 알은 무한히 작은 시공에 둘러싸인 중심핵이다. 알 속에 알이 있고, 그 알속에 또 알이 있어서, 인간의 숫자로는 헤아일 수 없다. 이 알들은 모두 신의 수정란(受精卵) 이다. 나의 동행자들이여, 이것이 바로 우주이다.
그러나 나의 이 말은 그대들 입장에선 너무 막연할 것이다. 혹 언어가 완전한 ‘이해’로 이어지는 안전하고 튼튼한 사다리의 가로대가 될 수 있다면, 기꺼이 나의 이 말을 그러한 가로대로 삼고 싶다. 만약 그대들이 미르다드가 바라는 높이와 깊이와 넓이에 도달하고 싶다면, 정신을 초월한 것으로 언어를 초월한 것에 열중하라.
언어란 기껏해야 지평선을 보여 주는 빛에 불과하다. 언어는 지평선으로 가는 길이 아니며, 지평선 자체는 더더욱 아니다. 따라서 어머니 알이나 가지각색의 알, 커다란 신과 작은 신에 대해 내가 말할 때, 문자의 뜻에 집착하지 말고 빛을 쫓으라. 그렇게 하면 내 언어가 그대들의 허약한 이해에 강력한 날개가 될 것이다.
주변의 자연(自然)을 생각해 보라. 자연이 알의 원리로 이루어졌음을 느끼지 못하는가? 진정 알 속에서 모든 창조물의 열쇠를 발견할 수 있다.
그대들의 머리, 심장, 눈은 알이다. 모든 열매와 그 씨앗은 알이다. 물방울이나 모든 생물의 정자도 알이다. 그리고 무수한 천체가 하늘에서 자신의 신비로운 궤도를 돌고 있다. 이 모든 것들은 성장의 단계가 각기 다른 생명의 정수 -작은신-를 부화시키켜 알로 돌아가는 것 아니던가?
창조의 과정은 진정 신비하고 연속적이다. 어머니 알의 표면에서 중심으로 가는 생명의 흐름과, 그 중심에서 표면으로 가는 생명의 흐름은 아무런 장애 없이 계속 진행된다. 중심 핵에 있는 작은 신은 시간과 공간 속에서 확장해 감에 따라, 알에서 알로, 생명의 최저 단계에서 최고 단계로, 최소의 시공을 갖는 최저의 존재에서 최대의 시공을 갖는 최고의 존재로 이행한다. 하나의 알에서 다른 알로 이행하는 데 필요한 시간은 순간에서부터 영겁까지 실로 다양하다. 이 과정은 어머니 알의 껍질이 깨지고, 작은 신이 커다란 신으로 출현할 때까지 계속된다.
생명은 이렇게 펼쳐지고 성장하고 진보하지만, 이는 사람들이 흔히 말하는 일반적인 성장이나 진보와는 다르다. 인간의 입장에서 말하는 성장이란 양(量)을 축적하는 것이며, 진보는 앞으로 나가는 것이다. 그러나 여기서 말하는 성장이란 시간과 공간 어느 곳에서나 팽창하는 것이며, 진보는 모든 방향으로 균등하게 뻗어가는 활동이다. 요컨대 앞과 똑같이 뒤로도, 위쪽과 똑같이 아래쪽, 옆쪽으로도 뻗어나가는 것이다. 따라서 궁극적인 성장이란 공간을 뛰어넘는 것이며, 궁극적인 진보란 시간을 초월하는 것이다. 이렇게 해서 커다란 신에 녹아들면서, 그가 가진 시간과 공간의 구속으로부터 벗어나 자유에 도달한다. 이러한 자유만이 자유라는 이름을 가질 가치가 있다. 그리고 이것이 인간에게 정해진 운명이다.
벗들이여, 나의 말을 심사숙고하라. 그대의 핏속까지 이 말을 완전히 흡수하지 않으면, 자신이나 남을 자유롭게 하려는 그대들의 노력이 자신이나 남들을 속박하는 쇠사슬을 더욱 늘릴 뿐이기 때문이다. 그대들이 이해를 바라는 이들에게 도움을 주듯이, 미르다드는 그대들에게 이해를 주고 싶다. 극복을 통해 자유로워지기를 갈망하는 종족들은 그대들이 자유로 인도하듯이, 미르다드는 그대들에게 자유를 주고 싶다. 그래서 미르다드는 한 걸음 더 나아가 이 알의 원리를 해명하려고 한다. 특히 인간과 관련된 부분만큼은.
인간보다 하등한 존재는 모두 한 무리의 알에 감싸여 있다. 다양한 식물이 있으면 식물들을 위한 알도 그만큼 많이 있다. 진화가 더 된 것은 자기보다 진화가 덜 된 것을 내포하고 있다. 곤충도, 어류도, 포유류도 마찬가지다. 더 진화한 것은 언제나 아래 단계의 것을 그 중심핵까지 내포하고 있다.
일반적으로 알의 노른자와 흰자가 새끼를 성장시키는 데 쓰이듯, 알에 내포된 알은 어느 것이나 그 속의 작은 신을 양육하는 데 쓰인다.
더 큰 알로 옳겨갈 때마다, 작은 신은 시공의 음식이 그 전의 알에서 자신을 키워 주었던 음식과는 조금씩 달라진다는 것을 알게 된다. 이렇게 해서 시공의 넓이에도 차이가 생긴다. 작은 신은 기체 속에 있을 때는 분상되어 형태가 없지만, 액체 속에서는 더 응축된 형태가 되고 점차 형태를 갖춘다. 한편 광물 속에서는 더 명확한 형태와 고체성을 얻긴 하지만, 더 고차원적인 형태에서 주어지는 ‘생명’의 속성은 없다. 작은 신은 야채 속에 있을 때는 성장하고 가지 치며 느끼는 능력을 지닌 형태가 된다. 동물 속에 있을 때는 느끼고 움직이고 번식하고 기억하며, 사고(思考)하기도 한다. 그러나 인간 안에 있을 경우에는 이 모든 것에 덧붙여 인격, 깊이 생각하는 능력, 자신을 표현하는 능력, 창조하는 능력까지 갖게 된다. 사실, 인간의 창조를 신의 창조와 비교하는 것은 대건축가가 세운 영예로운 사원이나 장대한 성채를 어린이가 만든 장난감 집과 비교하는 것과 같다. 하지만 어쨌든 그것도 창조이다.
인간 개개인은 개별적인 알이 된다. 더 많이 진화한 인간은 덜 진화한 인간과 모든 동식물 같은 저차원의 알을 그 중심핵까지 모두 내포하고 있다. 한편 가장 진화한 존재 -극복자-는 인간과 인간보다 하등한 알 전부를 내포하고 있다.
한 인간을 내포한 알이 크기 까지의 짧은 기간 밖에 포용하지 못하고 공간의 지평은 눈이 미치는 곳 이상을 담기는 그 사람의 시공이 갖는 지평의 넓이로 측정된다. 그의 시간 의식은 유아기부터 현재까지밖에 미치지 못하는 반면, 또다른 지평은 기억조차 할 수 없는 태고부터 까마득한 먼 미래까지, 눈으로는 도저히 미치지 못하는 광대한 공간을 포용한다.
인간을 성장시키는 음식은 똑같지만, 영양을 흡수하고 소화하는 인간의 능력은 똑같지 않다. 왜냐하면 인간은 똑같은 시간과 장소에 있는 똑같은 알에서 부화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들의 시공의 넓이는 다르다. 따라서 완전히 똑같은 두 사람을 발견할 수는 없다. 모든 인간 앞에 풍요롭게 펼쳐진 똑같은 식탁에서 어떤 사람은 황금의 순수와 아름다움을 만끽하는가 하면, 반대로 어떤 사람은 황금 자체를 양식으로 삼아 늘 배를 곯고 있다. 사냥꾼은 사슴을 발견하면 그 사슴을 죽여 없애려고 기를 쓴다. 똑같은 사슴을 발견한 시인은 사냥꾼 따위는 결코 꿈도 꾸지 못하는 시간과 공간으로 날개에 실려가듯 인도된다. 미카욘은 샤마담과 똑같은 방주에 살면서도 궁극의 자유를 꿈꾸었고 시간과 공간의 제약에서 해방된 정상의 꿈을 꾸었다.
그에 비해 샤마담은 더 길고 억센 공간과 시간의 그물에다 자신을 속박하느라 바빴다. 미카욘과 샤마담은 무릎이 닿을 정도로 가까이 있으면서도 멀리 떨어져 있었다. 미카욘은 샤마담을 담고 있다. 그러나 샤마담은 미카욘을 담지 못한다. 따라서 미카욘은 샤마담을 이해할 수 있지만, 샤마담은 미카욘을 이해할 수 없다.
극복자의 삶은 모든 인간의 삶을 담고 있으므로 어느 쪽에서든 인간의 삶과 접한다. 하지만 어떤 인간의 삶도 극복자의 삶 모두를 접할 수는 없다. 지극히 단순한 인간에게 극복자는 가장 단순한 자로 나타난다. 고도로 진화된 인간에게 극복자는 고도로 진화한 자로 나타난다. 그러나 극복자에겐 극복자말고는 느낄 수도 이해할 수도 없는 측면이 항상 존재한다. 그 때문에 극복자는 고독하며, 여전히 자기 주재의 세계에 있는 것처럼 느낀다.
작은 신은 제약을 싫어한다. 작은 신은 인간의 지성을 훨씬 능가하는 지성을 사용해 자신을 시간과 공간의 제약으로부터 해방시키려 한다. 지성은 저차원의 존재에서는 본능이라 불린다. 보통 사람들은 이 지성을 이성이라 부른다. 좀더 고차원적 인간은 예언자적 감각이라 표현한다. 이 지성은 모든 것이자 그 이상의 것이다. 어떤 사람은 이름없는 이 힘을 ‘성령’이라 부르지만, 미르다드는 ‘성스러운 이해의 영(靈)’이라 부른다.
시간의 껍질을 깨고, 공간의 한계를 넘은 최초의 ‘사람의 아들’은 정확시 ‘신의 아들’이라 불리고 있다. 자신의 신성(神性)에 대한 그의 이해는 ‘성령’ 이라는 이름으로 적합하게 불리고 있다. 그러나 확신하건대, 그대들 역시 신의 아들이며, 그대들 속에서도 ‘성령’은 활동한다. ‘성령’에 따라 활동하라. 결코 ‘성령’에 대항하지 말라.
그러나 시간의 껍질를 깨고, 공간의 한계를 넘어설 때까지는 ‘내가 신이다’라고 말하지 말라. 오히려 ‘신이 나이다’라고 말하라. 이를 마음속에 잘 새겨 놓으라. 그렇지 않으면 오만과 허망한 공상이 마음을 더럽히고, 자기 안에 있는 ‘성령’의 활동에 거역함으로써 궁극적인 해방을 늦추고 있기 때문이다.
시간을 정복하기 위해서, 그대는 시간과 함께하면서 시간과 싸워야 한다. 공간을 제압하기 위해서는 공간에게 공간을 먹이로 주어야 한다. 시간과 공간 어느 쪽에게나 친절한 주인으로 산다면 그것은 시간과 공간의 포로로 남는 것이며, 선과 악의 끝없는 광대 놀이에 인질로 머무는 것이다.
자신의 운명을 발견하고 그 운명을 성취하기를 바라는 자는 응석을 부리며 시간을 허비하지도 않고, 태평스럽게 걸으며 공간을 낭비하지도 않는다. 짧은 인생에서 공허한 시간 낭비는 완성을 가로막는다.
따라서 시간과 공간에 마음을 점령당하지 않으려면, 모든 것에 대한 소유욕을 버려야 한다. 소유하려는 것이 많으면 많을수록 그만큼 소유당한다. 소유하려는 것이 적으면 적을수록 소유 당하는 것도 그만큼 적어진다.
모든 것에 대한 소유를 포기하고, ‘신념’ , ‘사랑’ 그리고 ‘성스러운 이해’를 통한 해방을 갈망하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