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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윤복 작 풍속도화첩 중 주유청강(국보 135호).
기생과 악공, 배를 동원한 양반들의 화려한 놀이 문화를 보여주는 작품이다. 간송미술관 소장
"서너 달 동안 홀로 잤다고 해서 고결한 척 은덕을 베푼 요량이라면 결코 담담하고 무심한 사람이라고 할 수 없지요. 편안하고 결백한 마음을 지녀 밖으로 화사한 미색을 끊고 안으로 사사로운 생각을 없앤다면 굳이 편지까지 보내 공을 자랑할 필요는 없을 것입니다."
조선 선조 때 대학자인 미암 유희춘의 아내 송덕봉(1521~1578)이 남편에게 보낸 편지의 내용이다. 고향인 해남에 머물던 유희춘은 57세 되던 1569년 11월 임금의 경연을 주관하는 부제학의 중책을 맡아 상경해 서울에서 홀로 생활했다.
아내의 편지는 이듬해 6월 받았다. 부인의 안부를 묻는 편지에 대한 답장이었다. 유희춘은 서울에서 혼자 살면서 여자를 가까이 하지 않았노라고 자랑하며 그 공을 인정해 달라고 했던 모양이다. 답장은 그런 이기적인 남편을 질책하는 내용 일색이다. 송덕봉의 이 답장은 유희춘이 쓴 미암일기에 전문이 수록돼 있다.
그녀는 "예순에 가까운 나이로 이처럼 혼자 잔다면 당신의 기운을 보양하는 데 매우 이로운 것이므로 이는 결코 제게 갚기 어려운 은혜를 베푼 것이 아닙니다"며 "군자는 행실을 닦고 마음을 다스려야 한다고 들었습니다. 이는 성현의 밝은 가르침이니 어찌 나 같은 아녀자를 위해 억지로 힘쓸 일이겠습니까"라고 꾸짖었다.
그러면서 "저는 또한 당신에게 잊지 못할 공이 있으니 가볍게 여기지 마세요"라고 경고한다.
부인은 "저는 옛날 당신의 어머니가 돌아가셨을 때 사방에 돌봐주는 사람이 없고 당신은 만 리 밖(함경도 종성)에 (귀양 가) 있어서 하늘을 향해 울부짖으며 슬퍼하기만 했지요. 그래도 지성으로 예법에 따라 장례를 치러 남에게 부끄럽지 않게 했는데 곁에 있던 어떤 사람은 '묘를 쓰고 제사를 지냄이 비록 친자식이라도 이보다 더할 순 없다'고 말하였습니다.
삼년상을 마친뒤 만 리 길에 올라 험난한 곳을 고생스레 찾아간 일은 누군들 모를까요. 제가 당신에게 이처럼 지성스럽게 대한 일을 두고 잊기 어려운 일이라 하는 것입니다. 당신이 몇 달 동안 홀로 잤던 공과 제가 했던 몇 가지 일을 서로 비교하면 어느 것이 가볍고 어느 것이 무겁겠습니까."
송씨는 마지막으로 "바라건대 당신은 영원히 잡념을 끊고 기운을 보양하여 수명을 늘리도록 하세요. 이것이 제가 밤낮으로 간절히 바라는 바입니다"라고 당부했다. 이 같은 부인의 질책에 유희춘의 답글이 능글맞다. "부인의 말과 뜻이 다 좋아 탄복을 금할 수 없다."
미암일기. 보물 260호.
미암일기는 유희춘이 1567년(선조 즉위년) 10월 1일부터 1577년 5월 13일 죽기 전날까지 10년에 걸쳐 친필로 쓴 일기이다. 명종말 선조초 고위직을 역임하면서 경험한 사건을 비롯해 당대 정치, 사회, 경제 상황와 풍속 등을 기록하고 있다.
아내와의 애정, 집안 경제, 건강 등 개인 생활사도 사실적으로 담고 있다. 조선시대의 개인 일기로는 가장 방대한 것으로 사료로서 가치가 매우 높아 보물 260호로 지정됐다.
아내 송덕봉은 담양에서 태어났으며 어려서부터 학문과 시문을 익혔다. 16세인 1536년 9년 연상의 유희춘과 혼례를 올렸다. 유희춘이 함경도 종성으로 유배 가 있는 동안 시어머니를 봉양하고 시어머니의 3년상을 치른 후 남편의 유배지를 홀로 찾아가 남편과 함께 유배생활을 견뎠다.
슬하에 1남1녀를 뒀다. 일기에서 그녀는 당당하고 호방한 기상을 가졌으며 명민하면서도 서사에도 두루 능한 것으로 묘사된다.
유희춘은 여자를 멀리하라는 아내의 부탁에도 첩도 두고 있었고 그 주변에 기생도 더러 있었다. 그는 20년간 귀양생활을 하다가 풀려났다. 그때의 기분을 일기에 적었다. 그런데 첩의 집에 길조가 생겨 자신이 행운을 입었다는 얘기를 한다.
그가 고향으로 돌아온 1567년(선조 즉위년) 12월 5일 일기에는 "첩의 집 배나무가 그전에 죽었다가 지난 을축년(1565년)에 비로소 소생해 병인년(1566년)에 가지와 잎이 싹트더니 금년에는 열매를 맺었다. 이는 참으로 길조가 뚜렷이 드러난 것"이라고 했다.
그녀는 남편에게 부부간에도 신의를 지켜야 한다고 일깨웠다. "내가 뜻한 바를 이루고 나서 신의를 저버리는 옛 친구를 보고 그의 신의가 부족함을 탄식하자 부인이 말하기를 '차라리 남이 나에게 신의를 저버릴지언정 나는 남에게 신의를 저버리는 일이 없어야 하니 우리는 절대 그러지 맙시다' 하였다." (1569년 8월 12일)
전라 감사에 부임해서는 기생들을 가까이 뒀다. "옥부용(玉芙蓉·기생)을 불러다가 만나 봤다. 그는 임인년(1542·중종37) 봄에 설서(說書·정7품 벼슬)로 있을 때부터 사귀어 온 친구이다. 금년에는 옥경아(玉瓊兒·기생)와 친밀하게 지내니 전주에 두 사람이 있게 되었다. 우스운 일이다." (1571년 5월 6일)
5월 11일 일기는 전라 감사 유희춘을 방문한 봉안사(실록을 사고에 봉안하기 위하여 파견된 관리) 박순이 술을 함께 마시면서 "(유희춘이) 평생 여색을 가까이 하는 일이 드물었는데 옥경아를 유독 어여삐 여긴다"면서 특별히 옥경아에게 술잔을 잡아 주었다고 기술한다.
앞서 2월 남편이 전라 감사에 제수됐을 때 담양의 아내는 "정욕을 절제하여 기운을 보전하라"고 했고 유희춘은 "그러겠다"고 답했다.
1572년 10월 유희춘은 종2품 동지중추부사에 임명돼 서울로 올라왔는데 부인도 함께했다. 서울에서 둘은 금실이 좋았다. "부인과 함께 서로 태평의 즐거움을 누리는 것을 하례하며 화기가 넘치니 금실의 어울림이 만년에 더욱 깊다." (1572년 10월 20일)
일기는 동시대 다양한 인물과 그 인물의 문장을 평가하는 대목도 여럿 등장한다. "승지 기대승이 회재 이언적의 행장(行狀·죽은 사람의 평생을 적은 글)을 보내왔다. 대개는 아주 좋으나 다만 가끔 허술한 곳이 있었다." (1568년 2월 22일)
"내가 대궐문을 나와 퇴계(이황) 선생 댁으로 가서 묻기를 '대감께서는 주자를 대성(大聖)으로 생각하십니까. 대현(大賢)으로 생각하십니까' 하자 답하기를 '어떻게 성인이 되겠는가. 다만 공부가 극진한 데에 이르렀을 뿐이니 이른바 배워서 알았고 이롭게 행한 대현이라 할 수 있네' 하였다. 퇴계의 이 견해는 세속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한 것이니 유감이 아닐 수 없다." (1568년 8월 14일)
"수찬(修撰) 유성룡이 들어왔는데 그 학문과 문장이 정밀하고 합당하였으며 사람 됨됨이도 아낄 만하여 매우 기뻤다." (1570년 5월 1일)
"정철이 기대승의 서거를 전했다. 놀랍고 슬프기 그지없다. 이 사람은 (중략) 강단 있고 과감하여 자기 생각대로 행하고 말을 쉽게 하여 기로(耆老, 원로대신)들을 비판해 구신(舊臣)과 정승들에게 크게 미움을 샀다." (1572년 11월 7일)
임금은 어떻게 평가받았을까. 학문에서 따라올 자가 드물었던 유희춘은 매일 새벽 임금과 고금의 학문을 토론했다.
"성상이 이르기를 '누구나 자기 자신을 알지 못하오. 그대가 나를 보건대 좋은 정치를 할 수 있겠소' 하였다. 이이가 대답하기를 '영명하신 전하께서 어찌 하지 못하겠습니까' 하고 희춘은 빨리 나아가 아뢰기를 '전하께서는 청명하고 공정하시어 참으로 큰일을 할 성품이십니다. 다만 타고난 바탕이 고집스러워 통창(通敞·시원스럽게 넓고 환함)하지 못하신 데가 있습니다" 하였다." (1574년 2월 1일)
그가 살던 시대의 세태도 잘 묘사된다. 중국으로 가는 사신단이 물건을 잔뜩 싣고가 장사를 하는 것을 두고 중국에서 큰 웃음거리가 됐다.
"내가 또 말하기를 '연경으로 가는 사신이 일 년에 대여섯 번에 이르러 중국으로 가는 길 일대가 어려움을 견디지 못하여 하늘을 향해 외치고 목이 메니 차마 들을 수가 없습니다. 대개 한 사신이 가는 데는 짐을 싣고 가는 말이 일백 수십 필에 이르러 길가의 백성들이 수레를 끌고 나오기가 지극히 어렵습니다.
연경에 도착하면 그 조정에서의 대우가 유구국보다 못합니다. 그것은 유구의 사신은 짐이 적고 우리나라 사신은 짐이 너무나 많고 하인들도 모두 무역을 하기 때문입니다. 이제부터는 국가에서 통사(통역)만 요동에서 무역을 하도록 하고 사신은 양식으로 쓸 쌀만 가지고 연경으로 가도록 한다면 중국의 폐단도 덜어주고 우리나라도 되레 청렴결백해지게 될 것입니다." (1568년 4월 13일)
4월 25일자 일기에서 선조가 그의 말을 받아들여 100년이 폐단이 고쳐졌다고 썼다.
비상시를 위해 식량을 준비해 둬야하지만 조선중기 국가 식량 비축량은 1년치가 채 못됐다.
"국가의 비축량이 일찍이 국가의 기강이 해이해져 권세를 지닌 간신들이 뇌물을 받아 창고지기가 쥐새끼마냥 무수히 도적질한 데다 임술년(1562년·명종17년) 이후로 해마다 국상이 생겨 1년 동안 사용한 쌀이 14~5만섬에 이르러 비축한 쌀이 이제는 10만섬도 채 되지 못하니 매우 한심스럽다고 하였다." (1569년 윤 6월 8일)
신입 관원을 괴롭히는 관행은 이 당시에도 널리 행해졌다. 선조가 크게 노해 엄단할 것을 지시했다.
"주상께서 전교하기를 '새로 급제한 사람을 4관(성균관, 예문관, 승문원, 교서관)에서 신래(新來)라 지목하여 학대하고 모욕하는 등 못하는 짓이 없다. 시궁창의 더러운 진흙을 그 얼굴에 바르고 이를 당향분(唐鄕粉)이라 하고 관과 의복을 찢고 더러운 물속에 밀어넣어 귀신 형상을 만들어 사람이 차마 볼 수가 없다. 몸을 상하기도 하고 병을 얻기도 하는 경우가 빈번히 있을 뿐만 아니라 체모에도 손상이 참으로 많다.
이러한 폐속은 예문에도 없고 중국에도 없는 일인데 관습이 되어 고칠 줄을 모르니 무식하기 짝이 없다. 앞으로는 신참과 고참 간에 이를 바로잡아 살필 것이며 더럽히고 학대하며 희롱하는 일을 일절 엄히 고치도록 하라. 만약 옛 습관을 그대로 따르는 사람은 적발하여 죄를 다스리도록 예조에 이르노라" 하였다.
신래를 학대하여 더럽히거나 손상시키는 일은 나도 전일에 여러 번 명공(名公)과 현사(賢士)들에게 말했던 것이다." (1569년 9월 13일)
관료들이 사임하고 낙향할 때 전별식은 요란하기 이를 데 없었다. 1569년 9월 유희춘은 병을 이유로 세 번이나 사임장을 올렸지만 임금이 만류했다. 대신 휴가를 가라고 명했다. 조정의 관료들은 돌아가면서 전별식은 마련해 주었다.
21일부터 27일까지 이어진 전별식은 안주와 반찬이 곁들여진 술자리가 마련된 것은 물론 기녀와 악공까지 동원됐다. 한강을 건너는 선상까지 전별객들이 몰려 고향으로 가는 여정이 지체됐고 아내는 끝내 먼저 출발해 버렸다. 1570년 11월 또 사직을 하고 고향으로 내려왔다. 역시 시끌벅적한 술자리가 곁들여진 전별식이 쇄도했다.
▶유희춘(1513~1577)=전라도 해남에서 출생했으며 26세에 과거에 급제했으며 홍문관 수찬(정 5품), 사간원 정언(정 6품) 등을 역임했다. 훈구파가 사림의 잔당을 제거하기 위해 일으킨 양재역 벽서 사건에 연루돼 1547년부터 20년간 제주도·함경도 종성·충청도 은진 등지에서 유배생활을 했다. 1567년 선조즉위와 동시에 3정승의 상소로 석방됐다. 대사성, 부제학, 전라도 감사, 예조·공조·이조참판을 지냈다. 선조에게 학문을 가르쳤다.
[출처] : 배한철 매일경제 영남본부장 : 고전으로 읽는 우리역사 / 매일경제 프레미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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