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를 리드한 장신 가드 강현숙
1970년대 아시아를 넘어 세계를 위협한 한국여자농구의 위상은 장신 가드 강현숙(54)의 손끝에서부터 시작됐다.
당시 172cm의 장신 가드였던 강현숙은 세계 최강 미국을 두 번이나 꺾는 주역이 됐고, 세계여자농구 베스트5 포인트가드 부문에 두 차례나 이름을 올리며 세계를 깜짝 놀라게 했다. 그는 한국여자농구 장신 가드의 시작이었다.
농구와 어울릴 것 같지 않은 외모신데, 어떻게 인연을 맺게 되셨나요? 광희초등학교 때 담임선생님이 농구하고 싶은 사람 손들라고 해서 저도 모르게 손을 번쩍 들었죠. 그렇게 하게 됐어요. 그날 집에 가자마자 “엄마 나 농구 선수 됐어!”라고 소리를 질렀죠. 아버지가 도시락 가방에 ‘농구선수 강현숙’이라고 써 주셔서 들고 다니던 기억도 나요.
손을 번쩍 드셨다니, 원래 운동을 좋아하셨나봐요? 꼭 그런 것도 아니었어요. 아버지께서 스포츠를 워낙 좋아하셔서 그 당시에도 야구를 보러 다니실 정도였죠. 저를 낳고서도 “우리 현숙이 나중에 농구시켜야지”라고 하셨다고 하더라고요. 말이 씨가 됐는지 그 뒤로 농구 얘기는 한 번도 들은 적이 없는데, 손을 들었으니까요.
무작정 시작한 농구를 계속하게 된 계기가 있다면요? 한 번도 그만두고 싶은 생각을 안 했어요. 그 당시 가장 유명했던 박신자 선수처럼 잘 하고 싶은 마음뿐이었죠. 일기장에 ‘박신자 선수처럼 훌륭한 선수가 되자’라고 적어놓고 그 일념으로 훌륭한 선수가 되기 위해 노력했어요.
실제로 ‘제2의 박신자’라는 말도 들으셨는데, 운동 신경은 타고나셨나 봐요. 모르겠어요. 체격이 좋았던 것도 아니고, 성격도 내성적이라 운동을 할 만한 조건은 전혀 없었거든요. 운동을 하면서 체격이 점점 좋아지긴 했었죠. 그냥 필연적인 인연이 있지 않았나 생각이 들어요.
어려서부터 포지션이 가드였나요? 중학교 2학년 때부터 공식 대회에 처음 출전하고, 주전으로 뛰기 시작했죠. 가드를 주로 맡긴 했지만, 올 어라운드 플레이어에 가까웠죠. 가드를 보면서 주득점원 역할을 했었으니까요. 상대팀이 저를 막으려고 항상 박스 앤 원 디펜스를 했던 기억이 나요.
당시 가드로서는 신장이 큰 편이었잖아요. 어려서는 그렇게 큰 편이 아니었어요. 특히, 중학교 3학년에서 고등학교 올라갈 때 키가 많이 컸어요. 성장통 때문에 무릎이 아팠을 정도였으니까요. 실업팀 언니들이 “현숙이 키 많이 컸다”는 말도 많이 했었죠.
연습량이 정말 많으셨다고 들었어요. 굉장히 많이 했어요. 그 당시에는 오전부터 오후 4시까지 수업을 다 했었죠. 수업이 끝난 뒤 본 연습을 하고 선수들이 다 가면 혼자 남아 연습을 했었어요. 무학여고 체육관이 밤이 되면 엄청 무서웠어요. 체육관 안에 들어와 있는 비둘기들이 울면 애기 울음소리 같기도 하고요. 그래도 참고 하는 거죠. 드리블부터 슛까지 개인 기량이 향상될 수 있는 훈련은 연구를 거듭하면서 정말 많이 했었어요. 새벽에 담을 넘어 들어가 연습을 하기도 했으니까요.
훈련의 강도가 어느 정도였나요? 운동 끝나고 집에 가면 너무 힘들어서 밥 먹으려고 하다가 숟가락을 쥔 채로 뒤로 쓰러져 잠들 정도라고 할까요? 제 특기가 오버 헤드 패스였는데, 그냥 된 게 아니에요. 처음에는 가까이서 벽에 공을 튀기면서 연습하다가 백보드에 맞추기 시작하는 거죠. 그러다 자유투 라인, 3점슛 라인, 하프라인까지 그 거리를 늘렸어요. 그 패스를 위해 부수적인 훈련도 많았죠. 어깨 힘을 키우기 위해 물구나무서기와 팔굽혀 펴기를 했었고, 손가락 끝으로 엎드려뻗쳐도 하고요.
근성이 대단하셨나 봐요. 물구나무서기나 줄넘기, 운동장 몇 바퀴, 계단 뛰기 몇 회를 속으로 정하면 힘들어도 무조건 해냈어요. 스스로 채찍질을 한 거죠. 남하고 똑같으면 절대 성공할 수 없거든요. 운동을 하면서 목표를 정하고, 근성이 생긴 것 같아요. 목표가 확실했기 때문에 힘들어도 좌절하지 않고 끝까지 갈 수 있었던 원동력이 될 수 있었던 거죠.
오버 헤드 패스가 주특기였다니 신기해요. 포인트가드로는 제가 국내는 물론 세계적으로도 큰 편이었요. 장신 가드다 보니까 시야가 넓어 오버 헤드 패스가 힘 있고 높게 됐었죠. 특히, 박찬숙하고는 눈만 맞으면 패스가 될 정도로 콤비였어요. 지금도 전주원이 비교적 큰 편이지만, 리더 역할을 할 수 있는 대형 가드가 나와야 한국농구가 더 발전할 수 있을 거예요.
오른손과 왼손을 모두 자유자재로 사용하셨던 것 같아요. 오른손잡이인데, 왼손을 참 잘 썼어요. 왼손으로 연습을 정말 많이 했었죠. 공을 안고 잘 정도로 손에서 공이 떨어지지 않았고, 좁은 집 마당에서도 끊임없이 드리블 연습을 했어요. 아버지도 왼손을 잘 쓰셨던 것을 보면 잠재적으로 왼손에 감각이 있던 게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들지만요.
포인트가드를 맡으셨는데, 어떤 스타일이셨나요? 소속 팀에서는 포인트가드면서 주득점을 하는 선수였죠. 한 경기 43점(당시에는 3점슛 제도가 없었음)을 넣었을 정도로 팀의 골게터였죠. 대표팀에 와서는 제가 굳이 득점을 하지 않아도 되기 때문에 패스 위주로 팀을 조율 했어요. 하지만, 가드도 득점력은 필수예요. 가드가 득점력이 있어야 어시스트를 더 잘 할 수 있거든요. 나보다는 다른 선수를 우선 하는 것은 당연하지만요.
가장 힘들었던 기억이 있다면요? 무학여중·고가 공립이어서 학교 재정 뒷받침이 전혀 없었어요. 그래서 고등학교 올라갈 때 타교로 전학을 많이 갔었죠. 전 그런 여건 때문에 학교를 옮기기 싫었어요. 힘들어도 내 학교에서 하고 싶은 마음이 많았죠. 그 당시 가정형편도 어려웠기 때문에 어머니는 한 명밖에 없는 딸을 잘 못 먹인다는 생각에 농구를 그만 했으면 하는 바람도 있었던 것 같아요. 그래도 학부형들이 좋은 쪽으로 화합해서 선수들을 위해 도와주시고, 지도하시는 선생님도 선수들을 위해 끈끈하게 뭉쳐서 잘 이끌어갈 수 있었어요. 어린 마음에도 목표를 정한 것을 바꾸기 싫었고, 성당을 다니면서 신앙을 통해 흔들림 없이 힘을 낼 수 있었던 것 같아요.
박찬숙, 정미라와 함께 환상의 트리오를 이루셨어요. 1년에 7~8개월은 대표팀에서 함께 한솥밥을 먹었죠. 박찬숙이 고등학교 1학년 때였던 1975년 국제대회부터 세대교체가 이뤄지기 시작했죠. 포워드를 맡았던 조영란과 정미라도 그 때 함께 활약했어요. 거의 3년 동안 함께 생활하면서 고생한 덕에 78년 방콕 아시안게임에서 우승을 할 수 있었죠. 결국 지난 3년 동안 호흡을 맞췄던 것이 빛을 발한 거죠. 대표팀도 세대교체라는 게 하루아침에 이뤄지지 않는다는 것을 알았어요.
부상도 많았을 텐데, 기억에 남는 부상이 있다면요? 76년 홍콩 ABC대회 때 중국과 결승전에서 지면서 준우승을 했어요. 그 때 운동하면서 가장 큰 부상을 당했었죠. 대회를 앞두고 연습을 하다가 왼쪽 손가락이 공에 부딪혀 탈골이 되면서 살이 찢어져 뼈가 밖으로 튀어나왔었죠. 곧 바로 수술하고 실밥도 풀지 않은 채 붕대로 감싸고 출국을 했어요. 진통제 먹으면 빨리 낫지 않는다고 해서 그 상태로 참았죠. 예선은 뛰지 못했는데, 결선에서 테이핑을 하고 아픈 것을 참고 뛰었던 기억이 나요.
국가대표는 8년, 대표팀 주장은 3년을 하셨어요. 78년부터 80년까지 주장을 했었죠. 그 당시에는 진덕, 선덕이라고 해서 1, 2군처럼 상비군이 있었어요. 평가전을 통해 계속 대표팀을 뽑았기 때문에 연속으로 대표팀을 하기 쉽지 않았죠. 열심히 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운도 따라야 했죠. 저는 장신 가드라는 이점이 있었던 것 같아요. 그만큼 기대도 커서 잘 하는 것만이 유일한 보답의 길이라 생각했죠.
주장을 맡으면서 선수들을 이끌기 쉽지 않았을 것 같아요. 주장을 하면서 특별한 카리스마는 없었어요. 동기 중 대표팀에 저밖에 없어 후배들과 오히려 잘 어울려 지내는 편이었어요. 동기처럼 다가가 은근히 통솔하는 방법을 택했죠. 사실, 운동장에서 요령 안 부리고 더 열심히 하는 것이 가장 효과가 좋았어요. 모범을 보이는 것 자체로 후배들은 저를 따르게 되니까요.
가장 기억에 남는 경기가 있다면요? 대표팀 1년 차 때 출전한 모스크바 유니버시아드대회가 기억에 남아요. 그 당시만 해도 소련은 철의 장막이라고 해서 갈 수 없는 곳이었거든요. 그 때 남자배구, 테니스, 여자농구 세 종목이 갔었어요. 비행기 타고 공항에 내렸을 때의 위압감과 숙소에서 나오면 납치해 갈 것 같은 느낌은 지금도 잊을 수가 없어요. 그런데 의외로 소련 관중들은 우리를 많이 응원해줬어요. 작은 선수들이 빨리 뛰어다니면서 잘 하는 모습에 반한 거죠. 그 때 3위를 했었는데, 태극기가 소련 땅에서 올라간다는 것만으로도 뿌듯했어요. 스포츠외교의 중요성을 그 때 깨달았죠.
1979년 서울에서 열린 세계여자농구 선수권대회에서 준우승을 했잖아요. 지금 삼성이 홈 경기장으로 쓰고 있는 잠실실내체육관이었어요. 체육관이 가득 찼었죠. 이번 남자프로농구 챔프전 때 관중이 가득 찬 것을 보니까, 그 때 생각이 나더라고요. ‘아, 내가 정말 좋을 때 농구를 했었구나’라는 생각이 들었죠. 빨리 여자농구가 다시 활성화되면 좋겠다는 바람뿐이죠.
그 대회에서 세계 최강 미국을 꺾었어요. 홈이라는 이점도 있었지만, 워낙 강한 팀이었기 때문에 기억에 남죠. 그 대회 첫 경기에서 강팀 캐나다를 상대로 완패했어요. 그 뒤로 호텔 제 방에 선수들이 모두 모여서 각오를 다졌어요. 절대 한 게임도 지지 말자고요. 미국이 원정에서 하면서 조금 위축이 되기도 했지만, 우리는 눈빛 자체가 달랐죠. 그런 각오가 실력 이상의 플레이를 나오게 만들었나 봐요. 캐나다 전 패배가 약이 된 거죠. 너무 신나게 해서 경기가 끝나고 머리가 쭈뼛쭈뼛 설 정도로 흥분을 했었어요. 승자 승으로 우승후보 미국과 캐나다 사이에서 우리가 준우승을 차지했었죠.
박찬숙이 1975년 미스 월드 바스켓 상을 받았을 때 선배들이 시샘을 많이 했다고 들었어요. 전혀 그런 것 없었어요. 운동 외적으로 받는 상이었잖아요. 박찬숙은 고등학교 1학년이었기 때문에 어린 자체로 싱그러운데다 키가 커서 외국에서 봐도 눈에 띄었으니까요. 오목조목하지는 않아도 인물이 워낙 잘 생겼으니까요.
국가대표 마지막 은퇴 경기였던 홍콩 ABC 대회(1980년) 우승을 하셨어요. 프레올림픽에서 티켓을 못 따온 것에 대한 상실감이 너무 커서 협회에 대표팀을 그만두겠다고 말했죠. 그런데 명분이 없는 거예요. 대회는 9월이었지만, 그 해 11월에 결혼 날짜가 잡혀 있었거든요. 남편과 의논을 한 결과 마지막 마무리를 잘하고 은퇴를 해야겠다는 결론을 내렸죠. 은퇴 경기라 선포하고 대회에 다시 나가게 됐어요.
그 대회에서 중국을 상대로 역사에 남을 대승을 거뒀어요. 홍콩에서 열린 경기였지만, 중국에서 사상 처음으로 생중계를 한 대회였어요. 그래서 그런지 중국이 긴장을 좀 한 것 같더라고요. 중국의 특징이 한 번 무너지면 계속 무너지고, 또 한 번 분위기를 타면 걷잡을 수 없이 타오르는 팀이거든요. 우리가 초반부터 기를 죽이자고 마음먹었죠. 연습 코트에서부터 소리를 지르기 시작해서 그 기세로 워밍업을 하면서도 계속 소리를 질렀어요. 중국 애들이 완전히 얼어버리더라고요. 아마 30점차로 중국을 이긴 전례는 그 때밖에 없을 거예요.
세계베스트5에 한 번도 선발되기가 어려운데, 포인트가드 부문에 두 차례나 선발이 되셨어요. 1979년과 1980년에 선발이 됐어요. 처음에는 서울에서 열린 세계선수권대회라 센터 부문 박찬숙과 함께 선발이 됐었죠. 우리가 준우승을 차지하기도 했고요. 그 다음해 불가리아 프레올림픽에서는 우리가 예선 탈락을 했는데도 제가 세계베스트5에 뽑혔죠. 외국에서 인정을 해줬다는 것에 개인적으로는 영광이었지만, 예선 탈락을 했기 때문에 슬펐던 기억이 나요.
과거 ‘얼짱’ 스타로 유명하셨잖아요? 그 때는 잘하고 예쁜 선수들이 많았죠. 저도 팬들이 참 많았어요. 팬레터도 많았고, 집으로 찾아오는 팬들도 있었어요. 박정희 전 대통령 아들이라고 하면서 집으로 찾아올 정도로 극성팬들도 있었으니까요. 이성으로 다가오는 고등학생 팬도 있어서 학부모가 저한테 전화를 해서 한 번 만나달라고 할 정도였죠. 그 당시 순수한 감정으로 학부모와 함께 만난 적이 있었는데, 그 학생이 지금 결혼해서 미국에서 교수가 되어 있더라고요. 그런 것 보면 스타들이 사춘기 시절 팬들을 선도하는 것도 의미 있는 일인 것 같아요. 은퇴하고 30년이 다 되어 가는데, 아직도 연락을 해주는 팬들이 있어서 저는 참 행복한 사람인것 같아요.
세계지도에 직접 모은 300여개의 배지를 달아놓으신 애장품이 있으신데, 후배들에게 유행이 되고 있어요. 처음에 만든 제 지도가 가장 잘 만든 것 같더라고요. 호호. 거의 전 세계 나라를 다니면서 외국 선수들과 배지를 교환하면서 생각해낸 아이디어였는데, 후배들과 공유할 수 있어 좋아요. 제가 다닌 나라를 보면서 세계가 한 눈에 보이는 기분이거든요. 제 아이들도 이런 기분을 누리게 해주고 싶어요.
박정희 전 대통령께 사인볼을 전달하기도 하셨어요. 세계선수권대회 당시 잠실실내체육관을 건립하고 첫 대회였어요. 박 대통령이 연습할 때 한 번 오셨었죠. 육영수 여사께서 돌아가신 뒤 박근혜 씨가 퍼스트레이디 역할을 했을 때죠. 가까이서 전달해 드리는데, 손이 가장 인상적이었어요. 키가 상당히 작으셨지만, 손이 굉장히 크고 투박했던 느낌이 나요. 카리스마가 손에서 느껴졌었죠. 반면, 청와대에서 봤던 육영수 여사는 한복의 어깨선이 너무 잘 어울리셨어요. 반대로 손은 상당히 가녀린 느낌이었죠.
은퇴와 함께 갑작스런 결혼을 발표했어요. 결혼 상대자 (현 김종완 체육진흥회 상무이사)가 당시 동아일보 체육부 기자셨잖아요? 김정남(현 울산 현대 프로축구 감독) 감독이 남자축구대표팀을 맡았던 시절 태릉선수촌에서 “언제까지 농구만 할 거야? 동아일보 김 기자라고 있는데, 한 번 만나 봐”라고 말씀하셨어요. 선생님 봐서 한 번 만난다고 했는데, 그 뒤로 인연이 된 거죠. 한 번 만나고 안 만나려고 했는데, 강북 집에서 강동에 있는 성당까지 제가 새벽 미사를 드리는 것을 알고 항상 찾아와 뒤에 앉아 있더라고요. 그러다 79년 세계선수권대회에서 캐나다에 패한 날 밤에 전화를 해서 “낙담하지 말고 잘하라”고 격려를 해줘서 마음이 조금 열리기 시작했죠. 그 뒤로 주변에서 계속 괜찮다고 하니까 결혼 생각까지는 없었는데 괜찮은 사람으로 느껴지더라고요. 여자로서는 부족한 부분이 많았는데, 저를 이해를 해줘서 편했어요.
지금 후배들이 뛰는 모습을 지켜보면 어떠신가요? 운동할 수 있는 여건이 훨씬 좋아져서 스스로 운동만 잘 하면 성공할 수 있는 기회가 열렸다고 생각해요. 요즘은 재활 시스템이 잘 되어 있어서 우스갯소리로 “우리 때 그런 시스템 있었으면 바닥에 발이 붙어 있지 않게 뛰어다닐 거다”라고 얘기를 할 정도죠. 선수들 체격부터 모든 조건은 다 좋아졌는데, 아쉬운 것은 기초예요. 중·고등학교에서 운동을 할 때 승부를 떠나 기본기를 잘 다졌으면 좋겠어요. 프로에서 기초를 새로 배울 수는 없잖아요. 경험만 싸이면 얼마든지 빛을 낼 수 있거든요. 한 가지 더 바람이 있다면 프로도 중요하지만, 국제대회에서 잘 해서 스타플레이어가 많이 나왔으면 좋겠어요. 그래야 여자농구 활성화도 이룰 수 있고요. 여건이 좋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라고 봐요.
다시 태어나셔도 농구를 하시고 싶으세요? 알고는 못할 것 같아요. 농구는 정말 좋아요. 다시 운동을 하라 그러면 얼마나 힘든지 알기 때문에 다시 시작 못할 것 같아요. 대신 농구장 따라다니면서 신나게 보러 다닐 거 같아요.
강현숙
1955년 2월 12일 태생인 강현숙은 장신 가드 출신으로 무학여중·고를 졸업하고 외환은행에서 선수 생활을 했다. 은퇴 후 그는 외환은행 코치를 역임했고, 현재 한국여자농구연맹(WKBL) 경기감독관과 대한농구협회 기술이사를 맡고 있다. 또한 그는 1972년부터 1980년까지 청소년대표팀을 시작으로 여자국가대표팀에서 활약하며 국제대회에서 우승 5회, 준우승 3회를 기록했고, 세계베스트5에 두 차례나 포인트가드 부문에 이름을 올렸다.
글 서민교 기자 사진 문복주 기자, 본인 제공
JUMPBALL 2009년 06월호(발행일 05월 25일)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