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 자료는 미당 문학관 기행에 즈음하여 1986년도 청람 독서일기를 재정리하여 참고자료로 등록합니다. 미당 서정주 선생님의 시의 세계를 일별하는 데 도움이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청람 - 강진원 ...........................................................................................................................................
. “나는 언제나 문학을 대할 때 무겁고 진지한 사상보다는, 가볍고 아름다운 노래의 편을 들고자 했다. 노래에는 날개가 달려 있다. 그래서 시는 매 순간 우리의 눈앞에서, 상상력 앞에 <지나가고 있다>. 그 나타남과 사라짐 사이의 역동적 공간 속에서, 잡으려고 하면 사라지고 사라졌는가 하면 다시 나타나는 그 안타까움의 자장(磁場) 속으로 순간순간을 즐거워하려고 노력했다.”
. “논리적 사고의 틀이 가장 확실하게 잡혀 있는 시인이 미당이라는 사실을 나는 확신한다. 이점은 상대적으로 未堂의 커다란 장점이다. 그러나 未堂 자신은 은연중에 자신이 지닌 강한 논리적 욕구에 의해 구속당하고 있다는 자각이 강하다. 그럴 때 未堂은 대담해진다. 그래서 未堂은 쌓아올린 사상과 논리를 대담하게 <작파해 버린다.> 이렇게 작파해버리는 未堂은 아름답고 서늘하다. 궁극적으로 未堂 詩의 아름다움은 낡은 표현이지만 그래도 다른 표현보다는 언제나 귀중한 <自由>의 아름다움이다.” - 저자의 <머리말> 중에서
1. 『未堂 徐廷柱 詩選集』
. 이 전집은 1941년에 나온 처녀 시집 『화사집(花蛇集』, 1948년의『귀촉도(歸蜀途』, 1956년의『徐廷柱 詩選集』, 1960년의『신라초(新羅抄)』, 1968년의『동천(冬天』, 1972년의 『질마재 신화(神話)』, 1976년의『떠돌이의 詩』, 1980년의『西으로 가는 달처럼 ... 』, 1982년의『학(鶴)이 울고 간 날들의 詩』... 10권을 텍스트로 하였다.
2. 시의 출발 - <벙어리의 절규>
. 첫 시집『화사집(花蛇集』은 전체적으로 <벽(壁)>의 테마를 깊이 깔고 있다. 未堂 초기 詩의 <생명감>이라든가 「대낮」,「맥하(麥夏」,「봄」,「正午의 언덕에서」등의 제목, <푸른 하늘이다>와 같은 표현이 주는 저 주체할 길 없는 빛의 인상에도 불구하고 시집 전체의 밑바닥에는 벽에 갇힌 자의 어둠이 잠재해 있다.
. 첫 페이지를 장식하는 시「자화상(自畵像)」도 <애비는 종이었다.>로 시작한다. 종이라는 아버지의 사회적 신분은 물론 가장 현실적인 벽이다. <애비는 종이었다.>는 표현의 과거시제라든가 시인 자신의 아버지에 직업 문제에 대해 <어려서부터 마음에 걸려>했다는 점으로 미루어 보아 이 대목이 실제 사실과 관련이 있을 수도 있다. 그러나 시적 표현은 항상 사실 이상이다. 보다 더 포괄적이고 넓은 해석을 요하는 사실이기 쉽다. 과연 이 전집 전체를 훑어보면 종이라는 표현은 「자화상(自畵像)」으로부터 거의 30년 가까운 세월이 지난 다음에 다시 나타난다.
“1948년 8월 15일 / 일본의 종노릇에서 풀리어나던 때 ...「다시 비정의 산하에」 서른 살까지는 일본 놈들의 종밖에 못되었다가” ... 「멕시코에서의 수혈」
. 이로 미루어보면 <종>은 개인의 현실보다 당시 민족의 식민지적 현실과 더 깊은 관련이 있는 것 같다. 未堂 자신도 후일 다음과 같은 자기변호의 기록을 남기고 있다. “<애비는 종이었다(...)>의 한 구절은 일정 하의 농촌 태생의 내 위치를 비유적 ․ 상징적으로 표현한 것일 뿐”이라고 하고 있다.
. 같은 시에서 눈여겨 보이는 밤, 흙으로 <바람벽>한 호롱 불, 죄인, 천치(天痴) 등과 더불어 그 <종>은 보다 포괄적이고 근원적인 의미에서 <갇혀 있음>의 경험을 표현한 것으로 보아야 한다. 시인을 가두고 있는 「벽(壁)」은 참다운 시의 체험과 자아를 갈라놓는 벽이다. 시인은 또 다른 어느 산문에서 이 벽을 <그리스 신성(神性)>의 육 벽(肉壁)으로 체험하고 있음을 말하기도 한다.
. 이리하여 마침내 외부 세계와 자아 사이의 이 절망적인 단절이 바로 <벙어리처럼, / 오 - 벽아!>라는 눌변의 절규로 표현되어 있다. 언어를, 자신의 언어를, 세계와 소통하는 도구인 참다운 언어를 찾고 있는 시인이 가장 먼저 부딪친 벽이 <벙어리>라는 것은 썩 어울리는 일이다. <벙어리>와 같은 범주에 속하는 것이 바로 <문둥이>이며, <부흥이>이다. 둘 다 인식의 세계에 이르지 못한 어둠의 존재들이다.
. 인식에 대한 간절한 욕망은 갇혀 있음으로 해서, 어둠 속에 잠겨 있음으로 해서, 침묵 속에 묻혀 있음으로 해서, 더욱 강한 에너지로 압축되어 폭발 직전에 이른다. 그 폭발 직전의 에너지가 겉으로 드러난 것이 <숫개마냥 헐덕어리는> 나의 모습이며, <석유 먹은 듯 ... 석유 먹은 듯 ... 가쁜 숨결>이며, <핫슈 먹은 듯 취해 나자빠진> 능구렝이이며, <땀 흘려 땀 흘려 어지러운> 나이며, <새로 자라난 치(齒)가 모다 떨리는> 전류이며, <오도도 떠는> 열 손가락 등이다.
3. 공격적 생명력
. 자아의 어둠 속에 갇혀 있는 상황이 초래한 결과는 저 최초의 맹목적인 생명력, 즉 폭발 직전의 에너지인데, 그 에너지를 경험하면서 거기에 반응하는 방식은 여러 가지일 수 있다. 가장 소극적인 방식이 <우름>과 눈물이다. 또 다른 소극적 방식은 폭발의 위험으로부터 거리를 유지하는 것으로 「水帶洞 詩(수대동 시),「엽서」가 보여주는 체념과 망각, 그리고 과거와 고향에로의 회귀라는 모습으로 나타난다.
. 未堂은 단연「화사(花蛇)」를 그의 처녀작으로 택하고, 시집 표제로까지 삼은 것이리라. 비평가들은 이 시인을 <생명파>라 일컫고, 때로는 보들레르的이라고 해석한다. 과연 <사향(麝香) 박하(薄荷)의 뒤안길>에서의 <배암>은 보들레르의 냄새를 물씬 풍긴다. <우리 할아버지의 안해(아내)가 이브라서 그러는 게 아니라>든지 <내 裸體(나체)의 예레미야 畵(화)>는 비록 <아니라>나, <내 나체(裸體)>의 등과 같은 부정을 포함하면서도 서양의 기독교적 세계, 기독교적 <신화(神話)>를 연상시킨다.
.「화사(花蛇)」가 표현하고 있는 시인의 태도는 양면적이다. 배암은 우선 <을마나 크다란 슬픔으로 태어났기에 저리도 징그러운 몸뚱어리냐>에서 보듯이 부정적인 악의 모습, 혐오감과 저주의 대상이다. 그것은 동시에 <麝香(사향) 薄荷(박하)의 뒤안길>이라는 매혹적인 공간 속에 등장하여 <꽃 다님> 같은 유혹의 모습을 띤다. 생명은 이처럼 혐오와 매혹, <징그러움>과 <꽃 다님 보담도 아름다운 빛>이라는 이율배반의 모습을 띠고 있다. 그래서 시인은 <다라 나거라>라고 외치면서도 동시에 <돌팔매를 쏘면서>도 <저놈의 뒤를 따르는> 것이다.
. 같은 생명력을 포함하고 있는 시들 가운데 비교적 형태적 율격(律格)을 갖추고 있는 다른 시편보다도 「花蛇(화사)」나 「바다」가 우리에게 감동을 주는 것은 길 없는 에너지를 저 <육성의 한계를 훨씬 넘어서는> 숨찬 어조로 표현하고 있기 때문이다.
4. 이슬과 피
. 未堂論 중에서도 가장 탁월한 글 중의 하나인 「지옥과 열반」(『서정주 연구』, 동국 문학인회 편, 1975년)에서 千二斗 씨는 다음과 같이 지적한 바 있다. “서정주의 생애를 지배하여 온 것이 그 숙명적인 바람이라면, 그러한 바람을 불러일으키게 하는 기본적인 유인이 되는 게「피」이다. 「花蛇集(화사집)」에서 「東天(동천)」에 이르기까지 그의 시에는 언제나 몇 방울의 피가 섞여 있기 때문이다.
. 이것은 물론 시「자화상(自畵像)」의 마지막 연(聯) ... “찬란히 타오르는 어느 아침에도 / 이마 우에 언친 시의 이슬에는 / 몇 방울의 피가 언제나 서껴있어 / 빛이거나 그늘이거나 / 혓바닥을 늘어뜨린 / 병든 숫 개만 양 헐덕어리며 나는 왔다.
. 이 聯 속에서 우선 긴 前聯, 나아가서는 시 「壁(벽)」으로 대표되는 <갇혀 있음>, 어둠, 벙어리의 마음속에서 폭발 직전에 있는, 언어 이전의 욕구 등 지극히 부정적인 상황과 다른 한편 <찬란히>의 밝음, <틔워오는>의 열림으로 대표되는 아침, 그 아침이 가져오는 <이슬>로서의 시는 서로 강한 대립관계를 보여준다.
. 이슬 속에 섞인 피 - 이것이 바로 未堂이 당면한 최초의 시적 인식이다. 그가 가장 먼저 만나는 세계는 피의 어둠, 피 속에서의 갇힘, 그리하여 병든 개처럼 헐덕여야 하는 동물의 세계이다. 그가 말하는 <그리스的 육체성>이란 바로 개 ․ 花蛇 ․ 靑蛇 ․ 능구렝이 ․ 山 돼야지 ․ 산 노루떼 ․ 개구리 ․ 머구리 ․ 부흥이 ․ 숫사슴 ․ <짐생> ․ <雄鷄(웅계)>들, 나아가서는 동물적인 세계로 환원된 <애비> ․ <애미> ․ <애기 하나 먹고> 우는 문둥이 ․ <배암 같은> 계집 ․ <즘생스런 우슴>의 가시내 ․ <피가 잘 도는> 가시내의 세계다.
. 그 피의 세계 속에 전신을 던질 때 피는 저주의 대상인 동시에 물리칠 길 없는 유혹이 된다. 참다운 시적 동력은 저주와 매혹 사이의 긴장된 자장(磁場) 속에서 생겨나는 원초적 생명력이다. 그 생명력이 시인을 거의 맹목적으로 치달리게 한다.
. <헐덕어리며>, <가쁜 숨결로>, <웬 몸이 달어>, <식 식 어리며>, <작구(자꾸만)>, <원수여 너를 찾어>, <불볕의 떼를 꿈과 함께 나는 가슴으로 먹고>, <숫사슴의 춤추며, 눈이 항만 하야>, <카인의 새빨간 수의를 입고>, <무언의 해심에 홀로 타오르>며 등의 모든 어구들은 한결같이 <나는 왔다>, <다라 나거라>, <뒤를 따르라>, <쫓다>, <갔다>, <너를 찾아간다>, <뛰어가라> 등의 동사를 꾸며주고 있다.
5. 망각과 침몰의 門
. 진한 붉은색 사이에 혹 다른 색들이 나타나기는 하지만 그것은 여전히 징그러운 백색《(쑥 니플 지근지근 니빨이 허어여케 / 짐생스런 우슴>, <박아지 꽃 허어 여캐>이거나 적색의 밀도를 더욱 높여주는 <푸른> 하늘, 아니면 붉다 못해 짙푸른 빛으로 변해가는 <뽕나무에 오디 개 묻은 靑蛇(청사)> 뿐이다. 그러나『귀촉도(歸蜀途)』로 옮겨오면서 밀도와 열과 적색의 강도가 약해지면서 백색과 청색은 점차로 그 영역을 넓혀간다.
. 변화의 조짐은 이미『화사집(花蛇集)』그 자체 속에 잠재해 있다. 어두운「壁」속에 그리고 뜨거운「대낮」과 「麥夏(맥하)」의 열기 속에 갇혀있는 시인은 비록 맹목적인 방식으로나마 생명력의 추진을 받아 달려간다. 그 질주의 방식은 이미 그 치열성 자체만으로도 어느 정도 해방의 가능성일 수 있다. 「바다」는 여전히 <반딧불만 한 등불 하나도 없이> 캄캄함 어둠이지만 그 상황에 대한 시인의 반응은 훨씬 강하다. 단순한 체념이 아니라 <애비를 잊어버려/ 애미를 잊어버려/ 형제와 친척과 동무를 잊어버려/ 마지막 네 계집을 잊어버려>와 같은 능동적 단절과 구체적이고 결단에 찬 떠남, 마침내는 <침몰하라!>이다. 이같이 망각과 떠남과 침몰이라는 막다른 행위를 통해서 발전되는 것이 門(문)이다. “가슴속에 匕首(비수) 감춘 서리길에 타며 타며/ 오느라, 여기 지혜의 뒤안길이/ 비장한 네 荊莿(형자)의 門이 운다.”
. <뒤안 깊이> 나 있는 門은 어디로 열리는 것일까? 울고 있는 門으로 서풍이 불어온다. 시「西風賦(서풍부」에 처음으로 나타난 불교적 테마인 <관세음>이 자고 있다는 것은 흥미롭다. 그러나 그 <관세음>은 곧 「부활」로 인도해 주게 된다.
. “... 燭(촉) 불밖에 부흥이 우는 돌門을 열고 가면 江 물은 또 몇 천 린지” ... <밖>으로 인도하는 門이 아니라 <깊이>로 인도하는 門은 기적을 낳는다. <무슨 무지개>를 타고 왔는지 알 수 없는 저 叟娜(수나)의 부활을 실현시킨 너무나 손쉬운 환상의 門을 未堂은 자주 인용하게 된다. 돌 門 밖의 <또 몇 천 린지>의 江 물을 따라 더난 존재가 하늘의 무지개를 타고 내려오는 이 같은 순환운동, 부활 혹은 둔갑의 궤적은 장차 未堂의 긴 시적 여정 속에서 가장 풍요한 테마 중의 하나로 부상하게 된다.
. 시 『부활(復活)』은 未堂 시에서 점차로 큰 비중을 차지하면서 마침내『신라초(新羅抄)』, 『질마재 신화(神話)』, 『학(鶴)이 울고 간 날들의 詩(시)』로 이어지는 설화 시편들의 첫 암시라고 볼 수 있다.
6. 하늘로 향한 푸른 시선
. 이제『귀촉도(歸蜀途)』로 오면 그 <하늘>이 가장 지배적인 역할을 담당하게 된다. 『화사집(花蛇集)』은 하늘의 시가 아니라, 철저히 땅의 시였다. <푸른> 색채와 동반하여 등장하는 단 하나의 하늘은 저 드높은 정신의 세계라기보다는 <물어뜯어야 할> 지극히 지상적인 대상에 불과하다. 문둥이에게 <서러운> 하늘빛, 아니면 <미친 하늘>, 구름에 가린 하늘, 그 밖에는 모두 암야의 별 이나 은하 물 정도로 암시되어 있었다. 花蛇(화사)가 <슴여> 드는 곳은 땅이다. 그리고 숱한 인간, 아니 동물적인 인간들이 <나자빠지>거나 <엎드리었>거나 <자빠뜨려 놓여> 있다. 이 땅과의 親和(친화)는「입맞춤」에 오면 <땅에 긴 긴 입맞춤으로 오오 몸서리친>으로 극에 달한다.
. 푸르른 빛은『귀촉도(歸蜀途)』전체를 관류하고 있다. 거북이의 느리고 서투르지만 <푸르른> 목에서 서서히 푸른빛은 퍼져나간다. 간혹 조개껍질의 <붉고 푸른 무늬>나 <청혼의 꽃밭>처럼 붉은색이 섞이기도 하지만 곧 푸른빛에 압도되고 만다. 그리움을 위한 역동적 거리감으로 존재해야 한다는 <푸른 銀河(은하) ㅅ물>에서부터 푸른색에도 강도 높은 수식어들이 동반되어 <서럽지도 아니한 푸른 하늘>, <우물같이 고이는 푸름>, <퉁기면 울릴 듯한 가을의 푸르름>, <눈이 부시게 푸르른 날>을 거쳐 <아 - 미치게/ 짙푸른 하늘>, <하늘이 왜 이리도 푸른가>에 이르기까지 푸른빛은 고조(高調)의 음계를 밟고 (하늘로) 상승한다.
7. 玉 빛의 상승
.『서정주 시선』은 바로 『신라초(新羅抄)』이후에 보여주게 될 저 빈번, 신속, 용이한 둔갑의 묘법에 도달하기 위한 훈련이요 예행연습이라고 볼 수 있다.「自畵像」속의 이슬에 <서꺼>져서 처음 출현했던 <피>는 신기하게도 이 시집에 이르면 완전히 자취를 감추어버린다. 단 한 군데 <붉은 꽃닢>을 빌어 그 색깔이 나타나지만, 그것은 새로운 <녹음> 속에서 잠시 <펄펄펄 펄펄펄 떨어져>내리는 <붉은 꽃닢>의 이변에 지나지 않는다.
. 그 <짙푸른> 빛 역시 점차로 엷어지면서 그 대신 나타난 <玉빛>이 주조를 이룬다. 땅 위의 인간이 그리워하고, 바라보기만 할 뿐 닿을 수 없는 <하늘>의 푸르름과는 하늘 쪽으로 밀어 올려주는 역할을 하고 있다.
.「無等을 보며」... “어느 가시 덤불 쑥굴헝에 뇌일지라도/ 우리는 늘 玉 돌 같이 호젓이 무쳤다고 생각할 일이요/ 靑苔라도 자욱이 끼일 일인 것이다.” ... 여기서 <玉 돌>은 <우리>, 즉 인간에 비유되어 있고 지상적인 돌의 모습을 띠고 있으면서도 그 <호젓함>과 색깔로 하늘을 닮아간다. 이 옥돌이 아마도 <싸늘한 바위> 속에 불어넣은 <푸른 숨ㅅ결>이 만든 투명한 돌인 듯싶다. 호젓이 묻혀 있음과 그 위에 자욱이 끼는 청태(靑苔)는 하늘과의 상당한 격리상태를 의미하고 있지만 하늘에 대한 강한 열망과는 전혀 다른 <거리감>, 일종의 태연한 거리감을 암시하고 있다.
8. 날아오르는 연습
.「추천사(鞦韆詞)」... “西으로 가는 달같이는 나는 아무래도 갈 수가 없다/ 바람이 파도를 밀어 올리듯이/ 그렇게 나를 밀러 올려다오/ 香丹아.” ... 여기서 지상적인 것에서 아주 떠나버리고 싶다는 욕망 뒤에 숨어 있는 역설적 애착을 읽어내는 그의 감성은 매우 적절하다. 그러나 우리는 <채색한 구름>을 <허무한 하늘로> 읽기보다는 <울렁이는 가슴>과 동격 즉 지상적인 세계에서 투명한 하늘로 상승하는 운동의 진행형으로 보고 싶다. <달같이> 가는 것이 다시 한 번 수평적 이동이라는 것이다. 鶴이 <강물이 흐르는> 날아가는 것과도 유사하다. <바람이 파도를 밀어 올리듯이>는 수평이동에서 수직 상승으로의 전환과 동시에 바다에서 하늘로의 전환을 한데 묶어놓은 결미다. 바로 <그네>가 그리는 곡선의 궤적이다.
.「光化門」에서는 땅과 하늘을 이어주는 역학으로서의 곡선이 매우 동적으로 표현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하늘이 <고이고> <치-ㄹ 치-ㄹ 넘치고> 또 <넘나드는> 光化門의 지붕은 조선 사람의 <보선코>에, 그리고 다시 푸른 광명을 <실ㅅ고> 있는 <날갯죽지>에 은유되고 있다.
. 이 동적인 곡선은「山下日誌抄」마지막 연에서 <그네>의 모습으로 다시 나타난다. “문득, 한 큰악한 향기의 가르마와 같이 그것을 가르고, 한 소슬한 젊은이를 실은 金 빛 그네를 나를 향해 내어 밀었다. 마치 山이 바로 그 자기 아니면 그 아들딸이나 들날리는 것처럼 ... ” 山이 마침내 한 소슬한 젊은이를 실은 그네가 되어 <들날려>지는 숙련에 도달한 것이다. 叟娜(수나)가 타고 <내려왔던> 무지개가 이번에는 방향을 전환하여 소슬하게 <날아오른다>
9. 친화력과 거리
.『서정주 시선』전체를 가득 채우는 또 하나의 분위기는 하늘과 땅의 친화(親和)의 분위기다. 그것도 <우리 둘이는 웬 몸이 달아>와 같은 성급한 친화가 아니라, 유연한 우회 곡선의 친화이며 연한 푸른빛, 즉 옥색의 친화이다. 이 시집 속에서의 모든 행위나 관계가 유연하고 완만하고 점진적이다. 지어미는 지아비를 <물끄러미> 우러러보고 설움과 분노는 <조용히> 흐른다. 학(鶴)은 저승 곁을 <어루만지듯> 날고, 아지랑이는 <녀릿 녀릿> 피어오르고, 소리를 쳐도 <속으로> 소리치고, 사랑을 가져도 <남몰래> 가진다. 수양버들은 <다수 굿이> 흔들리고, 눈발은 <푹으은히> 내려오고, 난초도 <밋밋이> 살아간다. 처녀들은 <도란도란 도란거리며>, 햇볕에 <나직이 노래 불러 울린다.> 어리어도 <삼삼> 어리고, 봄빛은 <푸르무레> 들고, 열매들은 <반쯤> 붉고, 꽃잎사귀들은 황혼의 어둠 속에 <자자>들고 <아스라하게> 침잠한다. 그리고 山은 한결같이 저렇게만 <어루>만진다.
. 이 유연한 친화는 하늘과 땅 사이뿐만 아니라, 모든 자연물 상호 간, 인간과 자연, 인간과 인간 사이로 점점 더 확대된다. <靑山>과 <芝蘭>, 玉 돌과 靑苔, 저승과 鶴, 洛花와 치마 폭, 눈발과 처녀 아이들, 北岳과 三角, 고무나무와 난초, 반쯤 붉은 감과 못물, 山과 구름이 서로 친화한다.
10. 거울 ․ 聖畵(성화) ․ 繡(수) 틀
.「菊花 옆에서」... “그립고 아쉬움에 가슴 조이는/ 머언 먼 젊음의 뒤안길에서/ 인제는 돌아와 거울 앞에 선/ 내 누님같이 생긴 꽃이여“ ... 여기서 <거울>은 현재의 나와 욕망에 휘둘렸던 젊은 시절의 나 사이에까지도 <머언 먼> 거리를 만들어 놓고 있다. 그러나 그것은 단순한 단절이 아니라 거리를 둔 친화를 의미한다. 거울에 비친 나도 여전히 어떤 나의 모습이기 때문이다. 그 인식이 피워낸 꽃이다.
.「鶴(학)」에서 보이는 누이의 繡(수) 틀 역시 聖畵(성화)나 거울과 같은 테두리 속에서 해석될 수 있다. ... “누이의 어깨너머/ 누이의 繡(수) 틀 속에 꽃밭을 보듯/ 세상을 보자“ 이 어깨너머라는 바라보는 방법, <수틀의 테두리>, <누이>와의 인척 관계 - 이렇게 시인과 세상 사이의 관계는 세 차례에 걸쳐 간접화되고 거리를 획득하면서도 누이, 수틀, 꽃밭의 친화력을 유지할 수 있게 된다.
11. 欲界 第二天
.「善德女王의 말씀」... “짐의 무덤은 領 위의 欲界 第二天/ 피 예 있으니, 피 예 있으니, 어쩔 수 없이/ 그름 엉기고, 비터 잡은 데 - 그런 하는 속”
未堂의 제4시집 『신라초(新羅抄)』는 이렇게 시작된다. 즉 <한 소슬한 젊은이를 실은 금빛 그네>가 들날려 오른 후에 처음으로 당도한 주소가 바로 이곳, 즉 <하늘 속>, 신라의 하늘이다. <그 소슬한 젊은이는 이제 하늘에 도착했을까? 이제 그 도착 여부를 알 수 있을 것 같다. <그런 하늘 속>이라고 선덕여왕은 분명히 말한다. 하늘도 다 같은 하늘이 아니다. <그런>이란 단서가 붙은 하늘이다. 즉 <欲界 第二天>이다. 無色界 아래, 또 色界 아래의 欲界 중에서도 第一天인 지옥 바로 위, 거기가 欲界 第二天이다. 이곳은 <피>가 있는 곳이고, 구름이 있는 곳이고 비가 만들어지는 곳이다.
. “그것을 나는 단심으로 측근 하여/ 내 체내의 광맥을 통해, 십이지장까지 이끌어 갔으나/ 거기 끊어진 곳이 있었던가/ 오늘 새벽에도 별은 또 거기서 逸脫(일탈) 한다. 일탈했다가는 또 내려와 관류하고, 관류했다간 또 거기 가서 일탈한다./ 腸(장)을 또 꿰매야겠다.” ... 『신라초(新羅抄)』는 장이 터지는 고통스러운 작업이다. 무엇을 위한? 물론 <별>에 이르기 위한 작업이다. 아니다. 그보다는 오히려 가장 높이 떠서 빛나는 天上的 <별>을 가장 인간적인 살의 기관인 腸(장)에 이끌어 들여 소화시키려는 작업이라고 하는 것이 더 정확하다. 이것은 상승과 하강의, 이를테면 고통스러운 변증법 rx은 것이다.
12. 피의 행방
. 이곳은 여전히 <欲界>인 만큼 <피 예 있으니>의 세계다. 아직도 피는 혐오의 대상인 동시에 지상적 생명의 동력이라는 이중적 속성을 지니고 있다. <살의 일로서 미친 사내>를 만나는 것, 즉 <다스려>야 할 대상이 피다. 그러나 동시에 <피 예 있으니, 피 예 있으니/ 너무들 인색치 말고/ (...) 노는고 (...) 위로코/ 첨성대 위엔 첨성대 위엔 그중 실한 사내를 놔라> 즉 피는 연민과 너그러움과 사랑과 위로의 기능을 가지고 있으며 나아가서는 <실한 사내>를 만들 수 있고 또 그를 <첨성대 위에> 올려놓을 수 있는 힘을 공급한다.
. “그래도 그 어지러운 불이 다 쓰러지지 않거든/ 다스리는 노래는 바다 넘어서 하늘 끝까지,” ... 피 속에 담긴 불이 강하면 강할수록 이를 다스리는 <노래>는 더욱 높이 치솟아서 <하는 끝>까지 뻗칠 것이다. 未堂의 시는 피와 불을 다스리는 <노래>다. 그래서 女王은 말한다. 그 불이 <늘 항상 더 타고 있거라.라고 말한다. 그러나 그때의 불, 혹은 피는 <어지러운 불>이 아니라 <하지만 사랑이거든/ 그것이 참말로 사랑이거든>이라는 구체적인 단서가 불은 불이요 피다. 사랑의 피는 흔하지 않다. 그런 피를 만나자면 오래 기다려야 한다.
.『신라초(新羅抄)』의 세계는 상승과 하강이 교차하는 세계, 즉 <증발>과 <비터 잡아> 떨어지는 세계다. <푸르고도 여린 門들>은 위로 열리고 <霜降(상강)>의 문은 아래로 열린다. 하늘과 땅 사이의 관문과 구름과 이내(嵐)의 세계다. 그러나 구름은 열릴 수도 있지만 닫혀 있어서 하늘에 아주 날아오르는 것을 방해하기도 한다.
13. 피의 증류와 분해
. 일단 구름에 세계에 이른다는 것은 <느글거리어 못 견딜> 피를, <전기 올듯하는> 피를 증류(달여서/ 여름날의 제주 같은 소주나 짓거나>) 할 수 있게 됨을 뜻한다. 소주로 증류해도 여전히 그 속에 <불>이 남게 되어 안 된다면 달이고 남은 찌꺼기로 <먹이나 만들어>서 수묵화를 만들 수도 있을 것이다. 형상의 수묵화가 아니라 <後光>의 수묵화다. <허이옇고도 푸르스름한 後光을 채색하는/ 물감이나 될 수 밖에 없네.> 이것이 바로 이내(嵐)의 구름이다.
. 시「無題」에 나오는 피를 달여 만든 술의 이미지는「봄볕」의, 내 옛날의 막걸리 친구였던 바람이며 구름도> 연상시킨다. 피와 너무 이별해서 오히려 피가 좀 모자랄 듯한 回甲 달 무렵이 되면 未堂은 <소주>에 꿔주었던 피를 다시 찾아다 쓰기도 한다.『동천(冬天)』의「無題」에서 그리고 붉은 빛깔이 굳어져 <먹>이 되는 과정은 『떠돌이의 詩』의「슬픈 여우」에서 더욱 구체적으로 연장된다.
. 이렇게 하여 피를 분해한 물이 증발하여 구름이 되든, 먹으로 칠한 後光이 이내(嵐)가 되든 마침내 언젠가는 <햇빛보다 더 먼 데로/ 쑤욱 들어가 버릴> 수 있다는 미래가 기약된다. 쑤욱 들어가 버리는 것으로 보아 후일 원숙한 경지에 들어 시인이 시의 <사발>이나 <피리>에 담게 될 한국적인 <無>의 세계가 될 것 같다.
14. 四十代의 <구름 없는 하늘>
. 시인은 구름에까지 와서 밭을 갈면서 <구름 없는 하늘>을 기웃거린다. 시「여수(旅愁)」의 마지막 두 聯 “하지만 가기 싫네 또 몸 가지곤/ 가도 가도 안 끝나는 머나먼 여행/ 뭉 클리어 밀리는 머나먼 여행” “그리하여 사상만이 바람이 되어/ 흐르는 내 형제의 앞잡이로서/ 철따라 꽃나무에 기별을 하고/ 옛 애인의 창가에 기별을 하고/ 날과 달을 에워싸고 돌아다닌다./ 눈도 코도 김도 없는 바람이 되어/ 내 형제의 앞을 서서 돌아다닌다.” ... 구름 속의 여행은 <뭉 클리어 밀리는 머나먼 여행>이다. 윤회의 사슬 속을 쳇바퀴 도는 <안 끝나는> 여행이다.
. 최초의 시「自畵像」속에서 <스물 세 해 동안 나를 키운 건 8할이 바람이다>라고 노래했던 이 시인은 四十이 되어 그 <바람>을 다시 만난다. 시인은 <바람>이 되어 겨울의 <冬天>에 이르게 된다. 그 겨울 하늘은 씻기고 씻기어 거의 <無 >에 가깝다. 그 無의 한가운데 <피>도 <살>도 이별한 <눈썹>이 심기게 된다. 그 눈썹마저 없었더라면 언어도 시도 없는 <아무것도 없음>이 될 뻔했다. 아니 시는 벌써 언어의 옷을 벗어버리고 싶은 충동마저 표현하고 있어서 때로는 아슬아슬하다.
15. 無를 담는 그릇
. 제5시집『동천(冬天』은 시 전집 속에서도 가장 두드러지게 無로 가득한 시집으로서 시인이 無를 이해하고 無를 만들어가는 과정을 구체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未堂은 동양의 전통 속에서 無의 해석을 구한다. 공자는 <눈으로 보아도 보이지 않고 귀로 들어도 들리지 않는 것>이라 했고, 노자는 <찰흙을 빚어 그릇을 만들어 놓으면 그 아무것도 없는 빈 데가 있어 그릇 노릇을 하는 것이다.>라고 했다. 물질적인 존재가 그냥 잇는 것으로서의 有 라면 영적인 無는 <늘 살아 있는 것>으로서 그 생명력과 영원성은 『동천(冬天』이후 未堂의 시를 움직이는 동력이 된다.
. 그릇은 그릇 속에 담긴 내용물의 크기, 질, 성격을 규정한다. 특히 물 안개, 공기, 향기, 숨결, 혼과 같이 <가장 아스라하고 곧 霧散(무산) 한 것>이 내용물일 때는 그것을 담는 그릇과 불가분의 관계에 놓인다. 다른 한편 無와 物 과의 관계는 단순한 용기와 내용 사이의 외적 관계에 그치지 않고 無가 물질에 <붙어> 있거나 <베어> 있거나 <서려> 있거나 <어려> 있는 경우처럼 보다 내밀한 침투성의 관계로까지 발전할 수 있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16. 無의 발생
. 無는 적어도 그 발생 과정에 있어서는 物의 <사라짐>이라는 형태를 취한다는 뜻이다. 『동천(冬天』속에서 「無의 意味」라는 제목의 시는 物 이 점진적으로 사라지는 과정을 드러내 보임으로써 無의 출현을 손가락질한다. 꽃나무가 서 있던 곳이 <제각(祭閣) 앞>이라는 사실은 꽃나무의 사라짐이 여느 사라짐과는 달리 삶을 대하는 근원적인 태도, 시인의 근본적인 사유 태도와 관련된 종교적이고 의식적인 것임을 암시한다. 꽃나무에 핀 꽃이 <진다> 남아 있는 나무 둥치마저 <고갈해 문드러진다.> 이것은 객관적이고 물질적인 소멸의 순서이다.
17. 구름 ․ 門 ․ 가을 - 하늘
. 『신라초(新羅抄)』속에는 이미 그 無에 이르는 가능성이 매우 끈질기게 암시되어 있었다. 그러나 거기서는 有와 無라는 차원에서가 아니라 불교적인 공간체계에 따라 구름을 지나 더 높은 하늘로 열리는 <門>의 이미지로 표현되어 있었다. 도처에서 門이 열리고 있다. <노래가 낫기는 그중 나아도/ 구름까지 갔다간 되돌아오고> “나는 네 닫힌 門에 기대섰을 뿐이다/ 門 열어라 꽃아 門 열어라 꽃아.”라고 꽃을 향하여 호소하는 시인에게 門은 부족한 대로나마 <틈>을 제공한다.
. 시 「石榴(석류) 開門(개문)」은 핏빛 알들을 떨구기 위하여 문을 여는 가을의 노래다. “어쩌자 가을 되어 門을 삐걱 여시나?/ 수두룩한 자네 딸, 잘 여문 딸/ 上客이나 두루 한 번 가 보라 시나?“ ... 시인은 마침내 자연의 순환에 순응함으로써 내면적 초월의 욕구를 만족시킬 수 있는 가능성을 엿본다. 그것이 바로 석류 알들의 상객으로서 신행길을 <따라가는 시인>의 발걸음이다. <가을>은 이렇게 하여 <푸르고도 여린 門들이 열릴 때>이고 <十月>은 <내 새 雁旅(안려)의 길이 서슬 푸리 열리는 달>인 것이다.
. 그러나 그 길을 따라가면 나타나는 하늘은 광활하고 자유로운 공간임에는 틀림이 없지만 거기에는 동시에 매우 어두운 죽음의 그림자도 동반되어 있다. 이때 열리는 門은 <지나간 소만의 때와 맑은 가을 날들을/ 내 이승의 꿈 잎사귀, 보람의 열매였던/ 이 대추나무를/ 인제는 저승 쪽으로> 들이미는 죽음의 門이다. <갈밭 가는 소리를 하늘에 내며> 찾아가는 곳은 「雲母 床石의 제기(祭器)처럼 와 있는」무덤 앞이다.
18. 사라짐의 詩學
. 꽃은 사라져도 꽃 냄새는 남는다. 그리고 뒤따라 꽃향기도 사라져 간다. 눈에 보이지도 않게 사라져 가는 꽃향기 또한 無를, <아무것도 없으면서도 기막히게 있는 것>을 손가락질해 보이면서 무의 공간을 확대한다. 그래서 “연꽃/ 만나러 가는/ 바람이 아니라/ 만나고 가는 바람같이 ... 엊그제/ 만나고 가는 바람 아니라/ 한두 철 전/ 만나고 가는 바람같이...” 인 것이다. 만나고 <가는> 바람 따라 꽃향기도 거기에 실려 왔다가 無 속으로 사라진다. 어제 만나고 가는 바람에서 한두 철 전 만난 바람으로 옮겨 갈수록 향기는 無에 더욱 가까워지고 그 공간은 더욱 확대된다. 향기는 그래서 無로 가는 길 위에 있다.
19. 無의 핵(核)
. 未堂의 시관(詩觀)을 실제로 뒷받침하고 있는 것은 불교의 윤회전생 및 혼교(魂交)의 개념이다. 未堂의 無를 허무주의가 아니라 영원 주의로 연결하는 교량이 바로 이것이다. 無化는 단순한 사라짐이 아니라 참다운 소생, 영원 부활의 계기다. 이것이 未堂의 후기 시 전체의 밑바닥에 깔려 있는 낙관주의다. 無의 발생에 의해서 비로소 발견되는 생명을 未堂은 혼(魂), 혼령(魂靈)이라고 부른다. 이와 같은 無化 혹은 純化를 통해서 마침내 핵(核)을 찾는 과정은 <사라짐>의 과정과 병행하여 동시에 진행된다. . 우리는 그와 같은 궁극적 국면을 「無의 意味」에 나오는 <꽃씨>에서 찾을 수 있다. 無의 核을 드러내는 행위는 흔히 씻다. 해우다, 닦는다와 같은 동사의 힘을 빌리고 있다.「冬天」은 바로 이와 같은 방식으로『동천(冬天』과『徐廷柱文學全集』전체에 걸친 無의 작업을 간결하게 요약하고 있다.
. “내 마음속 우리 님의 고운 눈썹을/ 즈믄 밤의 꿈으로 맑게 씻어서/ 하늘에다 옮기어 심어놨더니/ 동지섣달 나르는 매서운 새가/ 그걸 알고 시늉하며 비끼어 가네.” ... 1,2행은 나와 님과 눈썹의 지상적 세계이며, 4,5행은 새의 천상적 세계 즉 하늘이다. 3행은 전반과 후반을 잇는, 혹은 땅에서 하늘로 전환되는 의미의 통로인 동시에 변환점이다. 그 기능이 바로 <옮기어 심는> 동작이다.
. <눈썹>은 未堂의 시 전체에서 핵(核)을 이루는 이미지 중의 하나다. 초기부터 未堂에 있어 그리움의 대상이 되는 여인은 항상 눈썹으로 대표 되었다. <속눈썹이 기이다란, 계집애>, <눈썹이 검은 금女 동생> 등 눈썹은 그리하여 지상적 육체의 마지막 남은 핵(核)인 동시에 벌써 천상적 마음의 출발점이다.
20. 꽃다운 선사(禪師)의 기호학
. 無化가 새롭고 영원한 생명의 출발이듯이 이별은 새로운 만남의 계기다. 모든 물질로부터 해방되고 마지막 핵(核)과도 작별하고 나면 오직 투명한 인식이 눈만 남게 된다. 이것이 未堂의 표현을 빌면 <靈交(영교)>라는 것이다. 『동천(冬天』이후의 시들은 이리하여 기이한 기호학의 장(場)이 된다. 이별은 거리를 만들지만 새로운 생명들 사이에는 그 거리를 연결하는 눈에는 보이지 않는 통신망이 가설되어 있다.
21. 간지럼과 연민
. 未堂의 영원 주의는 적어도 시 속에서는 확신으로보다는 어떤 그리움과 열망인 채 남아 있는 것이다. 無와 영원을 엿본 시인은 영원에 대한 그리움 못지않게 그 영원한 윤회전생의 결과로서 생겨난 덧없는 삶의 형식에 대한 깊은 공감과 사랑을 느낀다. 이러한 공감과 사랑은 단순한 恨의 공감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삶을 바라보는 건강한 거리를 동반한다.
.『질마재 신화(神話)』이래의 모든 시를 특징짓게 되는 <간지럼> 먹이기는 가장 전형적인 이미지라 할 수 있다. 이 간지럼은 지금까지 거의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무겁고 심각하게 느껴졌던 시의 걸음걸이를 매우 가볍게 만들어 준다. 똑같이 불교의 인연관과 관련이 있는 시 <추운 겨울에 흰 무명 손수건으로 하는 기술(奇術)>은 「나그네의 꽃다발」처럼 공허하지 않다. 그것은 시의 전혀 새로운 형식에서 온 결과다. 시의 연극적 구성과 연극의 지문에 해당하는 괄호의 사용, 그리고 직접화법이 허용하는 <탈, 탈, 타알 털어 보인다>와 같은 의태어의 대담한 활용 및 시에서 기피해온 구어체와 비속어의 자유로운 기용 등은 시의 자유를 어느 면에서 심각하게 방해해온 형이상학의 관념으로부터 해방시킬 수 있는 가능성을 열어 준다.
22. 시인의 계절
. 「自畵像」은 <애비>, <애미>, <늙은 할머니>, <외 할아버지>가 두루 등장하는 23세의 청년 나이 때이다. 그의 시선은 주로 가시내나 낭자들에게 쏠려 있다. 『귀촉도(歸蜀途』에 이르면, 여자들 가운데 목화 꽃을 피운 <누님>이 등장한다. 이미 여자를 바라보는 시각이 부분적으로 변하고 있다. 『徐廷柱 詩選集』에 보면, 벌써 <우리는 우리 새끼들을 기를 수밖엔 없다>고 노래한다. 누님이 <머언 먼 젊음의 뒤안길에서/ 인제는 돌아와 거울 앞에 선> 때는 이때다. 거울 속에 자신의 얼굴이 보인다. 그래도 남은 그리움이 있다면 <가시내>들에 대한 폭발적 열정이 아니라 <친척의 부인>의 치마 폭에다가 떨어진 꽃잎을 갖다 놓는 정도에 그친다.
. 未堂의 시가 본격적인 변화를 보이고, 선덕여왕이 구름에 도착하는 신라초(新羅抄)』에서야 비로소 <마누라>가 등장한다. 그러나 아직은 관계가 간접적이어서 百結의 <마누라>다. 그와 동시에 시인은 벌써 <上客> 가는 처지에 이른다. 이때의 계절은 가을이며, 이 무렵이「四十」이다. 『동천(冬天』의 겨울철에 당도하면, 남의 마누라가 아니라 <내 아내>를 비롯해서 <내 아들>과 <친정 간 내 며느리>들의 방이 보인다. 『徐廷柱 文學選集』에서는 <내 아내>가 장독대에 물을 떠놓고 벌써 삼천 번씩이나 빌고 있다. <너와 내가 까놓은 저 어린 것들>이 걱정되고, <납치되어 간 형>도 생각난다. 관심의 범위가 자신의 속에 이글거리는 피와 가시내라는 자아 중심으로부터 가족, 형제, 돌아가신 어버이, 겨레, 조국, 마침내는 단군할아버지에 이르기까지 확대되는 때가 바로 이 무렵이다. 관심의 무한한 확대는 시「마흔다섯」이 말하는 『동천(冬天』의 경험을 거치고 난 결과다.
. “마흔다섯은/ 귀신이 와 서는 것이/ 보이는 나이. 참 대 밭같이/ 참 대 밭같이. 겨울 마늘 낼/ 풍기며,/ 처녀귀신들이/ 돌아와 서는 것이/ 보이는 나이. 귀신을 기를 만큼 지긋치는 못해도/ 처녀귀신하고/ 상면(相面)은 되는 나이. ... 무지개를 타고 처녀 아이들의 가슴속에 되돌아오는 <수나(叟娜)! 叟娜! 叟娜!>에게 달려가는 열정으로부터 이 <처녀귀신>은 얼마나 먼 거리에 와 있는가?
. <내가 거짓말 안 한/ 단 하나의 처녀귀신이 ... 문둥이山 바윗금 속에도 길을 내어/ 그 눈썹이> 다시 찾아오면 시인은 이제 감탄사를 발하며 맞이하는 대신 그저 <상면(相面)>이나 하고 <유랑해 가게> 된다. 이 고즈넉한 거리와 초연함과 잔잔함은 물론 정신적으로 귀중한 것이지만 「나그네의 꽃다발」같은 공허한 시를 만들어내기도 한다.
. 그러나 『질마재 신화(神話)』는 회갑이 가까워 오는 未堂을 <한라산정의 산신녀>처럼 <시르미 난초 밭에 뉘어놓고 간지럼을 먹이고/ 오줌 누어 목욕시키고> 마침내 저 튼튼한 옛 고향으로 돌려보낸다. 『떠돌이의 詩』에는 이리하여「애기의 꿈」과 회갑 노인의「망향가(望鄕歌)」가 공존하게 된다. 이 공존은 동시에 <갈보 계집아이>와 <내 소학교 쩍 동기>의 공존을 가져온다. 여기서는 간지럼의 순진성과 삶에 대한 깊은 공감, 그리고 어느 정도의 그리움과 섭섭함이 기묘한 균형을 이룬다.
. “가장 재미났던/ 또래의 계집아이들과 서로 몸에/ 간지럼 먹이고 놀던 게 불쑥 그리워/「뭐 더 할 거 있니?」하며/ 그 갈보 계집아이와 낄낄 낄낄 낄낄거리며/ 한 식경을 겨드랑에 발바닥에 서로 간지럼 먹이며/ 참 여러 십 년 만에 한바탕 잘 웃고 놀다. 내 회갑기념 시화전에서 번/ 오천 원짜리도 한 장 쓰윽 꺼내주고/ 며칠 뒤에 만나자고 했는데/ 또 와 보니/ 그 애는 그새 벌써 보따리를 싸/ 어디론가 또 한 구비 떠돌이 길을 떠나고 없고/ 딴 애하고/ 시인이 똑같은 흉내를 두 번/ 되풀이하는 것도 뭐하고 하여/ 이걸로 이것으로 끝이구나 하니/ 못내 섭섭타.
.『화사집(花蛇集』의 숨 가쁜 여름, 『신라초(新羅抄)』의 가을, 『동천(冬天』의 겨울, 그리고 『질마재 신화(神話)』이후의 간지럼 먹이기와 기나긴 귀향의 도정을 거치고 나면 어떤 계절이 또 오게 되는 것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