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륜스님 반야심경 13강-불생불멸 불구부정 부증불감 사리자 시 제법공상 사리자야 이 제법이라는 것은 모든 법, 존재들이 공상 (공의 모양), 공은 존재의 참모습, 이 세상 모든 것들의 드러난 모양이 아닌 참모습, 본질의 세계. 이것은 곧 텅 비어있음, 공이다. 드러난 현상의 차원에서 중생의 눈으로 본 세계로 논하는 것이 아니고 제법이 다 공하다는 차원, 제법실상의 차원,부처님의 깨달음의 세계 이런데서 본다면, 현상계에서 볼 때는 분명 태어나고 멸하고 사라지는 것이 있지만 본질의 눈, 꺠달음의 눈으로 볼 떄는 태어난다. 사라진다 죽는다고 하지만 사실은 그러하지 않다. 예로 바닷가에 가서 바다를 보면 파도가 생겨나고 사라진다. 어떤 떄는 크게 작게, 길게 짧게 친다. 헤아릴 수 없는 파도가 치고 있다. 파도 하나하나를 보면 생기고 사라짐(생멸)을 말할 수 있지만 바다 전체를 본다면 파도가 생겨나고 사라지는 것이 아니다. 물이 출렁거릴 뿐이다. 생긴다지만 생기는 것도 아니고 사라진다고 하지만 사라지는 것도 아니고 다만 출렁거릴 뿐이다. 불생불멸은 변하지 않는다는 뜻이 아니다. 불생불멸을 변하지 않는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근본교리인 제행무상과 불생불멸은 서로 모순이 아니냐고 본다. 제법이 무상하기 때문에 불생불멸이다. 변하기 때문에(무상) 무상하므로 사실은 생겨난다는 말도 사라진다는 말도 맞지 않다. 생겨난다. 불생, 사라진다 불멸. 사라지지 않는 것이 아니고 사라진다고 할 수 없다는 것이다. 생겨나고 사라진다는 것은 사물을 잘못 관찰하는 것이다. 2차원과 3차원 비교. 금을 그어놓고 개미를 가둬두었을 때 2차원에서는 개미는 금 밖으로 나올 수 없으나 3차원에서는 내가 개미를 들어서 금 밖으로 들어내어놓으면 가능하다. 개미는 사라진 것이 아니다. 1차원은 수직선의 앞뒤만 있다. 좌우가 없다. 그것은 마치 파이프 속과 같다. 파이프 속은 앞뒤만 있지 좌우가 없다. 파이프 속을 꽉 채운 두 개의 구슬이 부딪혔다. 피해갈 수 없다. 하나는 이기고 지는 것처럼 하나는 뒤로 가고 하나는 앞으로 가고 밀고 당기는 것, 너 죽고 나 살든지, 내가 죽고 너가 살든지, 내가 이기고 너가 지고 너가 이기고 내가 지고 오직 이 길밖에 없다. 내가 전진하기 위해서 너는 죽어야 한다. 2차원에서는그 구슬이 옆으로 피할 수 있다. 비켜갈 수 있다. 해결이 너무너무 쉽다. 너도 살고 나도 살고, 너도 내 볼일 볼 수 있고 나도 내 볼 일 볼 수 있다. 차원을 달리해서. 우리는 자기라는 생각에 사로잡혀 수직선같은 1차원에서 살고 있다. 그래서 갈등이 생겼을 때 해결이 힘들다. 그러나 한 차원 높여서 내려다보면 하나도 어려울 것이 없다. 그럴 필요가 없다. 슬쩍 비키면 된다. 누가 나한테 욕을 하거나 화를 내면, 너가 그러니 나도 그러할 수밖에 없다. 이것은 1차원. 부처님께서는 상대가 욕을 하고 화를 내니 빙긋이 웃었다. 그것은 한 차원 높은 세계다. 부처님께서 걸식을 갔는데 음식을 주는 바라문이 화를 내고 욕을 했다. 우리 같으면 이 때, "음식을 주지 않으면 되지 왜 화를 내느냐"고 할 것이다. 그러면 상대도 "너가 왜 아침부터 내 집 앞에 서 있었느냐? 너가 내 집 앞에 서 있지 않았으면 내가 너한테 욕을 할 이유가 없다. 너가 먼저 여기 와서 서 있지 않았느냐?"며 응대할 것이다. 그러면 우리는 "이 길이 네 길이냐? 내가 음식을 달라고 하지도 않았잖느냐. 난 다만 서 있었을 뿐이다.그런데 왜 욕을 하냐?" 이렇게 서로 시비를 할 것이다. 우리는 늘 이런 옳고 그름에 빠져있다. 부처님은 이런 바라문의 모습을 보고 빙긋이 웃었다. 부처님은 슬쩍 비켜섰다. 지나가라고. 그럼 지나보내고 가면 된다. 바라문이 웃는 걸 보고 또 시비를 한다. 왜 웃느냐? 부처님은 그 말에 대꾸를 하지 않았다. 우리 같으면 웃지도 못하냐 너가 욕한다고 내가 욕하면 좋겠냐고 또 옳고 그름을 따진다. 그러나 부처님은 거기에 개의치 않는다. "당신 집에 손님이 가끔 옵니까?"고 묻는다. "오지요." "선물 가져 옵니까?", "가죠 오지요.", "그 선물을 안 받으면 그 선물은 누구 겁니까?" "가져온 사람거죠. 아니 왜 갑자기 손님 얘긴 왜 하느냐?" "당신이 나에게 욕설의 선물을 줬다.그래서 내가 웃으면서 받지 않았다. 그렇다면 그 욕설은 누구 거냐? 그때 그 바라문이 깨치고 부처님께 어리석었다고 사과했다. 이기고 지고 옳고 그름의 문제가 아니다. 그러면서 음식을 줬다. 한발 슬쩍 비켜서니까 철천지 원수가 아주 절친한 친구가 되었다. 우리는 생멸의 세계에 빠져있다. 그러나 제법이 공한 도리를 알게 되면 생이 생이 아니며 멸이 멸이 아님을 알게 된다. 우리는 시비의 속에 갇혀있다. 그러나 한 차원 높이면 옳다 하지만 옳은 것도 아니고 그르다 하지만 그른 것도 아니다. 옳고 그름의 문제가 아니다. 이것이 깨달음의 세계. 제법이 공한 세계. 그 차원에서 보면 이렇다. 범부중생의 세계는 1 차원과 같다면 깨달음의 세계는 2차원. 범부중생의 세계가 3차원이라면 깨달음의 세계는 4차원. 범부중생의 세계보다 깨달음의 세계는 한 차원 높다. 같은 차원에서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아니다. 범부중생은 1차원에서 고는 없고 낙만 있으면 좋겠다고 해서 지옥은 싫고 천당은 좋아한다. 한 차원 높여서 보면 고와 락은 다 고다. 고락이라는 것이 취할 바가 없다. 둘 다 버린다. 불교에서 말하는 열반이라는 것은 고락을 여읜 고락을 떠난 한 차원 높은 세계의 제법이다. 중생의 세계에 있어서 이기고 짐. 승패. 패하긴 싫고 이기고 싶다. 이겨서 얻는 그 즐거움이 아니고 승패를 떠난 이기고 지는 논리가 아니다. 비켜주면 되니까. 욕을 했을 때 맞받아서 욕을 해서 상대를 굴복시켜 내가 이겼다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잘못을 깨닫고 나한테 사과를 해서 내가 이긴 기쁨이 아니고 승패를 떠난, 옳고 그름을 떠난 세계, 그래서 그도 살고 나도 사는, 그도 행복하고 나도 행복한. 바라문은 깨달아 기분이 좋고, 그래서 그는 기쁜 마음으로 공양을 올렸고 부처님은 공양을 드셨다. 그는 깨달아서 좋고 공양을 올려 복을 지어 좋고 부처님같은 훌륭한 스승을 둬서 좋다. 어리석어서 붓다를 비난을 했지만 붓다는 그에게 그 비난의 과보로 화를 준 게 아니다. 그를 꺠우쳐서 기쁨과 복을 줬다. 붓다가 준 게 아니라 그가 스스로 얻었다. 차원이 다른 세계다. 단순히 생멸이 있고 없다의 문제가 아니다. 생멸이 있다는 것은 중생의 세계다. 깨달음은 생이라 하지만 생이 아니고 멸이라 하지만 멸이 아닌 세계. 그것은 곧 비유를 한다면 중생은 고락의 세계에 빠져 있고, 깨달음은 고락에서 벗어난 윤회에서 벗어난 열반의 세계,.열반의 즐거움은 고락의 락이 아니다. 전혀 차원이 다르다. 그런데도 우리는 중생의 차원에서 늘 이 문제를 바라보기 때문에 열반을 고락의 락처럼 이해한다. 승패도 없는 세계에서 붓다의 위대한 승리를 승패가 있는 세계에서의 승리와 동일하게 이야기한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그 법을 이해하는 것은 자기 식대로 자기 생각대로 이해하기 때문에 오늘날 우리 불교가 기복의 울타리를 못 벗어나고 있다. 그 기복이라고 말할 때 복은 행과 불행의 행이다. 그러나 진정한 복은 행과 불행을 떠난 행이다. 이것은 차원이 다른 얘기다. 우리는 어리석기 때문에 법의 실상을 보지 못하기 때문에 늘 착각 속에서 헤매고 있다. 그래서 조건이 붙어있다. 시 제법공상 이 모든 법이 공한 세계 그런 차원에서 보면, 부처의 세계에서 보면, 꿈을 꿀 대 강도에게 쫓기고 있다면 그 꿈 안에서는 강도가 있고 난 두려움을 갖고 있고 도망을 가고 구원을 요청한다. 관세음보살이 나를 구원해주면 고마운 존재다. 그런데 눈을 뜨면 꿈이구나. 이걸로 끝나야된다. 꿈이구나. 제법공상. 참의 세계. 공의 세계, 공의 모습에서는 눈을 뜨면 강도도 없고 두려워할 일도 없고 도망갈 일도, 도움을 요청할 일도, 도와줄 자도 없다. 이것이 불생불멸이다. 존재의 본질은 생기는 것도 사라지는 것도 아니고 다만 변화할 뿐이다. 그 변화가 여러 종류의 변화다. 물질은 상태의 변화. 분자의 변화. 화학의 변화. 원자의 변화, 핵 변화. 신진대사.생명의 변화. 우주에는 별들의 변화. 지구상에 있는 바위들은 바위들의 변화. 지구의 변화 등 여러 차원의 변화가 있다. 시간적으로 너무 짧게 공간적으로 너무 좁게 관찰을 해서 무상과 무아를 알지 못한다. 제법이 공한 줄을 모르기 때문에 생겨나는 인식현상이다. 정신적인 측면에서 볼 때, 저는(법륜스님) 북한 난민을 많이 도왔다. 그래서 국군 포로도 만났다. 그들이 고향에 올 수 있도록 조용히 도와준 적도 있는데, 그 사람들 얘기를 듣고 고향에 찾아가보면 고향 사람들이 그가 살아있다는 것을 전혀 믿지 않는다. 어제 저녁에 그 사람의 47주기 제사를 지냈다고 했다. 돌아가셨다고 통지받고 유품받고 유품은 거의 없어져서 제대로 찾지도 못했다. 국가보상 연금도 받고 매년 제사지냈다. 그러면 살아있다는 말을 듣기 전까지는 죽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실제로는 살아있었다. 살아있다는 정보를 듣고는 살아있는 것이 되었다. 그러나 살아있다는 정보를 전할 때 그 사람은 죽어버렸다. 죽었다는 사실을 다시 통보하지 않으면 살아있는 것이 된다. 살았다 죽었다는 정확히 말하면 정보의 .내가 낳아서 내 아들이 아니고 내 아들이라는 인식이 내 아들이다. 병원에서 애기가 바뀌면 그냥 모른다. 내 부모다 하는 것도 마찬가지다. 단순히 정보만이 아니라 우리의 사물을 인식하는 프로그램, 그 프로그램과 그에 따른 정보. 이것이 오늘날 우리들이 나고 죽음의 문제. 인식상의 문제다. 어떻게 인식하느냐. 오늘날 우리는 인식상의 문제가 잘못된 정보가 제공되면 죽은 사람도 산 것이 되고 살아있는 사람도 죽은 것이 된다. 인식상의 오류로 생멸이 있는거지 인식상의 오류가 사라져버린다면 사실은 난다 할 것도 없고 난다 하지만 나는 것도 아니고 죽는다 하지만 죽는 것도 아니다. 이 생멸로 인해 일어나는 우리의 모든 괴로움은 다 무지로부터 생겨나는 것이다. 이걸 확연히 깨쳐야 생사가 없는 도리를 안다. 불생불멸의 도리는 영원히 안 죽는 걸 생각한다. 무상과 정 반대되는 항상함, 영원을 생각하지만 영원의 개념이 아니다. 난 것은 반드시 멸해야된다. 파도가 일어나서 사라지지 않을 수 없다. 파도가 일어나는 것이 안 사라지는 것이 불생불멸이 아니라 파도가 일어나고 사라지는 것을 전체적인 차원에서 내려다보면 다만 출렁거릴 뿐이지 생기고 사라짐이 아니다. 지금도 출렁거린다. 좁게 인식하면 파도가 생기고 사라지는 것이다. 전 세계 바다에서 하루에도 끝도 없이 파도가 생겨나고 사라진다. 전 지구상에 있는 생명의 바다에서 수많은 생명의 물결이 끝도 없이 출렁거리고 있다. 파도가 일어났다고 기뻐할 일도 아니고 파도가 사라졌다고 슬퍼할 일이 아니다. 간다하지만 간 것도 없고 온다 하지만 온 것도 없고 다만 변하고 있다. 이런 데서 오늘 우리들은 본질적인 질문에 답해야한다. 가장 본질적인 질문 "나는 누구인가. 나에게 돌아와서 질문을 받는 나는 누구인가? 나라고 하는 이것이 무엇인가? " 우리는 이렇게 가상의, 환상의 어떤 생각에 사로잡혀서 마치 꿈 속에서 강도를 만나서 마치 그것이 있다고 생각하고 밤새도록 쫓기는 것과 같이 어떤 환영에 사로잡혀서 평생을 쫓기며 살아가고 있다. 그 환영에서 깨어나야된다. 그래서 가장 본질적인 질문 너는 누구인가 또는 나는 누구인가. 나라고 하는 이것이 무엇인가. 중국어로 시삼마, 이 뭐꼬. 본질적인 질문으로 들어가게 될 때 환상에서 깨어날 수 있다. 나라고 하는 데서 파생된 게 나의 것이라고 하는 아소. 내가 옳다고 하는 아집, 여기에 대해 다시 본질적인 질문을 받고 탐구를 해야한다. 그것이 누구의 것인가. 정말은 누구의 것인가. 네가 옳다 하지만 정말은 옳은 것인가? 어째서 옳은가를 끝없이 탐구해 들어가면 내것이라 할 것도 너 것이라 할 것도 우리것이라 할 것도, 자연의 것이라 하늘의 것이라 할 것도 없는, 누구의 것이라 할 것이 없는 누구의 것이라 할 것이 없는, 그것이 무엇이라 이름붙이든, 그것이 나의 것이든 너의 것이든 우리 것이든 하느님의 것이든 우주의 것이든 그것은 다 우리들의 망념에 불과하다. 옿다그르다 하는 것도 마찬가지다. 꿈을 깨는 소재에 불과하다. 본질적인 질문을 받음으로 해서 그것을 우리가 참구(화두)함으로 해서 꿈에서 깬다. 우리는 늘 꿈속에 살고 있다. 인생은 꿈과 같다고 말하는 것이다. 넌 누구인가도 있지만 넌 어디서 왔는가? 학교에서 집에서 결국은 어머니 배 속에서. 그 전에는 어디서 왔는가? 모른다. 어디로 가느냐? 학교 집 결국은 죽는다 죽은 다음에는 어디로 가느냐 모른다 결국 어디서 온지도 어디로 갈지도 모른다.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 곳도 모르면서. 온 곳도 모르고 갈 곳도 모르면서 우리는 바쁘다. 마치 가을 바람에 휘날리는 낙엽처럼. 이런 것도 깊이 탐구해 들어간다면 불생불멸의 깨달음을 얻는다면, 그런 이치를 깨닫는다면 올래야 올 곳이 없고 갈래야 갈 곳이 없는, 오고감이 없는 불래불문. 온다해도 온 곳이 없고 간다해도 간 곳이 없는, 오고갈 수가 없다. 붓다가 꺠달음을 얻었을 때 붓다를 칭하는 호칭이 타타가타. 옴도 없고 감도 없는 자다. 다른 말로 하면 여여히 오고 여여히 간 자다. 고타마시여하고 부르니 부처님이 나를 더이상 고타마라 부르지 말고 타타가타라 부르라 함. 나를 높이란 얘기가 아니다. 오고감이 없는자. 이것이 바로 불생불멸의 길이다. 꿈 깨듯이 악몽을 꾸다 깨듯이 오늘날 우리의 인식상의 오류(무지)에 우리가 사로잡혀 있다. 여기서 깨닫게 된다면, 여기서 깨어나게 된다면, 눈을 뜨게 된다면, 고뇌하고 있는 이것 땜에 죽겠다 저것 땜에 죽겠다, 온갖 아우성, 초조하고 불안하고 시기하고 질투하고 미워하고 원망하고 괴로워하고 슬프하고 외로워하고 방황하고 들뜨는 모든 괴로움이 마치 폭풍우가 몰아치지만 해가 나게 되면 고요해지듯이, 번뇌로부터 벗어나서 편안한 경지에 이르게 된다. 설령 다시 꿈 속에 빠지더라도, 헤매다가도 금방 자각해야한다. 도망가다가도 꿈이란 생각이 들면 도망가지 않고 눈뜨려고 한다. 망념이란 걸 알면 희로애락에 빠지지 않고 금방 정신을 차리게 된다. 경계에 사로잡히지 않으려한다. 또 내가 경계에 사로잡혔네, 또 내 생각에 빠졌구나. 화내고 짜증내고 미워하고 원망하고 괴로워하고 슬퍼하는 속에서도 그 물결에 빠지지 않고 허우적대지 않고 금방 정신을 차려 제 상태로, 원상태로 돌아올 수가 있다. 남이 볼 때는 똑같아 보이지만 그렇지 않다. 물에 빠져서 허우적대는 사람하고 물에 빠진 김에 조개나 줍자고 주워오는 사람하고는 삶의 태도가 다르다. 겉으로 보면 똑같은 세상을 사는 것 같지만 전혀 다르다. 그는 스스로를 괴롭히지 않고 행복하고, 남을 괴롭히지 않고 도움을 주고, 세상에 온갖 중생을 이롭게 하는 삶을 살아간다. 이것이 대승보살의 삶이다. 그런 대승보살의 삶을 보고 사리푸트라가 너무너무 존경해서 사리푸트라가 관자재보살에게 물었고, 관자재보살은 이런 대승보살의 삶은 법의 실상이 공한 줄을 꿰뚫어 알아야 한다. 그래야 이런 삶이 나올 수가 있다. 우리는 인생의 괴로움에서 벗어나려면 돈이 제일이라는 생각, 출세, 인기, 건강이 제일이라고 하는 생각에 빠져서 지금 진정한 행복의 길로 못간다. 이런 생각으로는 해탈의 길을 갈 수가 없다. 우리는 부처님 이름을 빌어서 계속 그것만 구하고 있다. 불법 만난 인연이 소중함을 안다면 우리들이 깨달음을 얻어서 '미르바나'를 성취해야된다. 그러면 세상의 복은 부차적으로 따라온다. 이런 부수입이 죽자사자 그것을 향해서 구하는 것보다 결과적으로 더 많다. 그런 부수입은 없어도 좋고 필요하면 따르게 된다. 이것이 진정하게 복을 구하는 법이다. 정말 복을 구하려면 해탈과 열반이라는 참다운 복을 구해라. 고락에 빠질 수밖에 없는, 노력은 적게하고 이익은 많이 보려고 하는 좋지 않은 심보. 설령 그렇게 해서 복을 얻었다고 하더라도 인과의 법칙에 의해 다시 갚아야 하는 그런 우복을 구하지 말고, 정신을 차려 붓다의 진실한 가르침에 귀의해야한다. 그래서 우리가 다 참다운 자유인 해탈과 참다운 행복인 열반을 성취하자는 것이 반야심경의 가장 핵심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