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부 성소와 임마누엘 / 2)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임마누엘
2)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임마누엘
요1:1절에 의하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라는 언급에서 성부(聖父) 하나님과 성자(聖子) 하나님이 나란히 소개되어 있다. 창1:1절은 “태초에 하나님(히. 엘로힘, 하나님들)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에서도 복수(複數)의 하나님이 소개되어 있다.
요한복음 1장 14절은 그 성자 하나님이 육신(肉身)이 되셨다고 하였다. 곧, 사람이 되셨다고 하였다. 여기서 우리는 1절과 14절에 사용된 동사가 서로 다르다는 흥미로운 사실을 발견할 수 있다.
①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요1:1)에서는 존재(存在)를 나타내는 헬라어 동사 ‘에이미’ (영어의 be 동사)가 사용되었다.
우리는 이것을 존재 동사라고 할 수 있다. 다시 말하면, 성자 하나님의 영원한 존재를 말하고 있다. 예수님의 영원한 존재와 관련하여 요한복음은 이 존재 동사를 계속 사용하고 있다. 예를 들면 “나는 세상의 빛이다”에서 헬라어의 ‘에고 에이미’(I AM)로서 빛의 존재이신 자신을 나타내신다.
이 ‘에고 에이미’는 일찍이 여호와께서 애굽에 노예로 사는 이스라엘을 구원하기 위하여 모세를 보낼 때 “여호와가 누구냐?”고 물으면 “나는 스스로 있는 자”(I AM)로 소개하라고 하셨던 그 말씀이다.
“모세가 하나님께 아뢰되 내가 이스라엘 자손에게 가서 이르기를 너희의 조상의 하나님이 나를 너희에게 보내셨다 하면 그들이 내게 묻기를 그의 이름이 무엇이냐 하리니 내가 무엇이라고 그들에게 말하리이까 하나님이 모세에게 이르시되 나는 스스로 있는 자이니라 또 이르시되 너는 이스라엘 자손에게 이같이 이르기를 스스로 있는 자가 나를 너희에게 보내셨다 하라.”(출3:13-14)
“나는 스스로 있는 자”를 칠십인 역(LXX, 히브리어를 헬라어로 번역한 구약성경)에서는 ‘에고 에이미 호온’ 즉, “I AM WHO I AM”인데, 14절에서 “I AM has sent me to you”라고 하였다. 곧 “I AM이 나를 너희에게 보냈다” 함으로써 ‘에고 에이미’는 하나님의 호칭이 되었다. 예수님은 이 동일한 용어를 자신에게 사용함으로써 자신의 신성을 드러내셨다.
② “육신이 되어”(요1:14)에서는 한 존재에서 다른 존재로의 탈바꿈을 나타내는 ‘기노마이’ 동사가 사용되었다. 편의상 이 동사를 탈바꿈 동사라고 하자. 마치 애벌레가 호랑나비로 변하는 것이다. 애벌레가 호랑나비는 될 수 있을지라도, 호랑나비가 애벌로 되돌아갈 수는 없다. 말씀이 육신이 되신 것, 곧 하나님이 사람이 되신 것을 성육신(成肉身, incarnation)이라 한다.
하나님이신 예수님이 사람이 되신 것은 호랑나비가 애벌레로 되돌아 갈 수 없듯이 그 인성을 영원히 간직하신다는 뜻이다. 흥미로운 것은 요한이 예수님의 성육신을 성소에 비유하여 표현한다는 것이다.
조금 후에 이것을 취급할 것이다. 아마도 이런 표현을 한 것은 사도 요한 뿐일 것이다. 여기서(14절) 요한이 사용한 또 다른 동사(動詞)는 매우 특이한 것이다. 이것은 특별히 성소와 관련이 되어 더욱 그렇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신다는 헬라어 ‘스케노오’는 성소를 지칭하는 단어이다. 이것은 성소를 지칭하는 명사 ‘스케네’의 동사형으로서 출애굽기 25장 8절에서 언급한 “너희 중에 거할”과 어원이 같다. 행간(行間) 축어역 성경은 ‘스케노오’를 ‘태버내클드’(tabernacled)로 번역하였는데 매우 흥미롭다.
‘태버내클드’는 구약의 이동 성소를 지칭하는 단어이다. 이 단어를 동사로 표현한 것이다. “성소가 되다” 또는 “성소이다” 등으로 번역할 수 있을 것이다. 다시 말하거니와 여기서 말하는 ‘태버내클드’는 구약의 이동 성소를 일컫는 것이다. 하나님이 처음 성소를 지으라고 명하실 때, “내가 너희 중에 거할 (히, 샤칸) 성소”(출25:8)라고 말씀하셨다.
예수님이 사람이 되신 것은 호랑나비가 애벌레로 되돌아 갈 수 없듯이, 그 인성을 영원히 간직하신다는 뜻이다. 여기서 “거할”은 요한 1:14의 “우리 중에 거하시매”와 어원적으로 같다. 곧 헬라어 ‘스케네’의 자음과 히브리어 ‘샤칸’의 자음은 동일한 skn이다. 이 말은 히브리어 “거할”을 헬라어로 음역(音譯)을 했다는 의미이다.
이런 용례에 비추어 이 구절을 번역한다면 이렇게 될 것이다: “말씀이 우리의 성소가 되셨다.” 다시 말하면, “말씀이신 하나님이 우리의 육(肉)을 취하시고 오셔서 우리의 성소가 되셨다.” 곧, 예수님이 우리의 성소가 되셨다는 뜻이다. 사람으로 오신 예수님이 성소가 되심으로써 우리의 임마누엘이 되신 것이다.
아담과 하와가 에덴에서 추방된 후 사람이 그 동산으로 다시 들어가는 길이 완전히 차단되었으므로(창3:24), 회복의 방법은 인간이 하나님께로 들어가는 대신 하나님이 사람에게로 나오시는 길 외에는 방법이 없었다. 하나님은 빛의 영광중에 계시고 사람은 죄의 어둠 가운데 있으므로 하나님이 사람을 대면하시기 위해서는 그 빛을 가리셔야 했다.
하나님이 사람과 함께 사시기 위하여, 곧 그 영광을 가리고 함께 거하시기 위하여 그 거처를 구약에서는 성소를 통하여, 신약의 초입에서 사람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는 자신의 신성을 인성 속에 감추시고 임마누엘이 되셨다. 그리하여 그는 우리와 함께 하시는 살아 있는 성소가 되신 것이다.
마태, 마가, 누가 그 어느 누구도 예수님의 지상 생애를 이렇게 성소와 연결시키지 않았다. 다만 마태는 이사야의 글을 인용하여 성소가 되신 예수님을 우회적으로 표현하였다. “주께서 친히 징조로 너희에게 주실 것이라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사7:14)
그것을 인용한 마태는 임마누엘의 의미를 덧붙였다. “이를 번역한즉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 함이라”(마1:23). 하나님이 구약에서는 성소를 통하여 우리와 함께 하셨다. 그러나 요한의 복음서에서는 하나님이 사람이 되셔서 사람과 함께 하신 성소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발견할 수 있다.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이신 말씀(로고스)이 사람으로 오셔서 우리의 성소가 되셨다. 사람으로 오셔서 우리와 함께하신 하나님, 그의 이름은 임마누엘, 곧 예수 그리스도이다. 결론적으로, 우리의 성소이신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돌아가셨을 때 성소의 휘장이 찢어진 사건은 결코 우연일 수가 없다. 성소는 곧 예수 그리스도의 분신이었다고 할 수 있다.
“예수께서 다시 크게 소리 지르시고 영혼이 떠나시다. 이에 성소 휘장이 위로부터 아래까지 찢어져 둘이 되고 땅이 진동하고 바위가 터지며”(마27:50-51). 요한은 일찍이 그의 복음서에서(2장) 이 사상을 다시 천명하고 있다. 예수님께서 유월절에 참석하려고 예루살렘에 이르셨을 때, 그가 성전에 가셨던 사건이 나온다.
성전을 정결케 하는 과정에서 유대인들과 마찰이 일어났다. 왜냐하면 성전 정결은 유대인의 권위에 대한 정면 도전이었기 때문이다. 성전은 유대 지도자들의 전유물인데, 성전 정결의 사건은 도무지 묵과할 수 없는 대사건이었다. 그래서 유대인들은 “당신이 어찌하여 이런 일을 행하느냐. 이런 일을 행할 만한 권세가 있느냐. 그럴 만한 무슨 표적을 우리에게 보여주겠느냐?”고 물은 것이다.
이에 예수님께서 다음과 같이 답변하셨다. “이 성전을 헐라 내가 사흘 동안에 일으키리라 유대인들이 가로되 이 성전을 사십 육 년 동안에 지었거늘 네가 삼 일 동안에 일으키겠느뇨 하더라 그러나 예수는 성전 된 자기 육체를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라”(요2:19-21). 여기서 예수께서 언급하신 성전, 곧 ‘나오스’는 첫째 칸 성소와 둘째 칸 지성소를 일컫는 것으로서 성소의 핵심이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돌아가셨을 때 찢어진 휘장도 이 ‘나오스’의 휘장이었다. 그것은 그의 육체를 상징하는 것이었다(히10:19-20). 예수님이 우리의 임마누엘이 되실 수 있었던 것은 그가 이 땅에 계신 동안이었다. 그러나 승천하신 후에는 그가 우리의 직접적인 임마누엘이 되실 수 없었다. 그래서 떠나시기 전에 다른 임마누엘을 약속하셨다.
그것은 바로 성령 하나님이시다.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시리니”(요14:16). 여기서 “다른” 보혜사라는 의미는 같은 등급의 보혜사라는 뜻의 헬라어 ‘알로스’가 사용되었다. 예수님이 보혜사요, 성령도 예수님과 동일한 등급의 보혜사라는 뜻을 담고 있다.
보혜사 성령 하나님도 성소에 계시는가? 그렇다. “그(성령)가 너희와 함께 거하심이요 또 너희 속에 계시겠음이라”(요14:17). 여기서 바울의 글을 빌리면 뜻이 더욱 명확하다. “너희는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계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냐”(고전3:16).
예수님께서 승천하신 후 성령께서 우리와 가장 가까운 임마누엘이 되셨다. 왜냐하면 우리 안에 계시기 때문이다. 성전 정결 사건을 다른 복음서 저자들도 언급하고 있지만(마 21:12-13; 막11:15-17; 눅19:45-46), 요한처럼 예수님의 사역과 죽음을 성전에 연관시키고 있지는 않다.
그만큼 요한에게는 예수님의 사명과 성전이 깊은 관계를 가지고 있음을 보여주었다. 이제 요한의 성소 복음을 좀 더 구체적으로 살펴보고자 한다. 대부분의 성경은 성경 제일 뒤편에 성막과 성소의 평면도와 지성소 안의 모습을 보여주는 사진들이 있다. 먼저 성경 뒤편을 찾아서 확인하신 후, 이제 성소의 각 기구가 예수님을 상징적으로 어떻게 보여주는지를 살펴보자.
할렐루야! 아멘!
첫댓글 아멘충만르 ♡♡♡
성소되신 우리 주 예수님이 우리속에 성령님으로 거하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