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적 감식력을 기르는 한 방법 : 달과 6펜스 1 긴 강 (longriver)
아무리 예술을 사랑한다 해도, 또는 사랑하고 싶을지라도 예술적 감수성이 결여되어 있는 경우 매우 난감해집니다. 저의 경우 특히 미술의 경우가 그렇습니다. 음악의 경우, 비록 직접 부르는 것이나 연주하는 것은 꿈도 못 꾸지만 듣는 것에는 대체로 어려움이 없습니다. 그런데 미술은 음악과는 매우 다른 것 같습니다. 음악과 마찬가지로 그림을 직접 그린다는 것은 물론 꿈도 꾸지 않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음악에서의 듣는 귀와 같은 역할을 하는 보는 눈까지도 없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곤란을 느끼는 와중에, 이번 추석의 긴 연휴는 넉넉히 여유가 있어서 30여년 만에 서머셋 모옴의 『달과 6펜스』를 다시금 집어들게 되었습니다. 대학시절 나의 혼에 상처를 내어 불에 댄 듯 했던 그 느낌과, 고갱을 모델로 하였다는 스트릭랜드의 매우 특별했던 예술혼을 다시금 느껴보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번에는 스트릭랜드 곁에서 우왕좌왕 어리대던 조연이 먼저 눈에 들와왔습니다. 더크 스트로브라는 인물입니다. 서머셋은 더크를 예술을 사랑하는 사람으로 설정하고 있습니다. 특히 이번에 제가 더크에게 관심을 갖게 된 것은 그가 예술적 감식력을 가졌다는 것 때문입니다. 마치 모차르트를 알아본 살리에르처럼, 더크는 스트릭랜드의 천재적 예술성을 알아봅니다. 그러나 살리에르가 모차르트를 질투하고 음해한 것과는 정반대로 더크는 부인과 스튜디오를 빼앗고 끝없이 조롱과 비웃음을 보낸 그를 이해하고 경외하면서 도움을 줍니다.
서머셋은 더크를 솜씨가 형편없는 화가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그림에 문외한이기에 나는 도대체 어떤 그림이 형편없는 것으로 간주되는 것인지도 자못 궁금합니다. 책에 있는 대로 옮겨 보겠습니다.
“더크는 평범한 소재에 끈덕진 열정을 가지고 있었다. 그의 스튜디오의 그림들은 수염이 더부룩하고 눈이
커다란, 고깔을 쓴 농부들이며, … 구름 한 점 없는 하늘 을 뒤로 하고 사이프러스 나무 그늘에서 노닥거리거나 …
했다. 꼼꼼하고 정성스 레 색칠한 그림들이었다. …
그의 그림을 보노라면 모네나 마네, 그리고 그밖에 인상파 화가들은 세상 에 나오지도 않았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
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더크는 자신을 미켈란젤로와 같은 대단한 화가는 아닐지언정 사람들의 가슴에 낭만을 심어주는 팔리는 그림을 그린다는 것에 대해 나름 자부심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서머셋은 바로 이런 환상으로 말미암아 더크가 진실을 보지 못하고 무자비한 현실에 눈감은 채, 관념적인 영혼의 눈으로 보았던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평범하고 낡아빠진 이상이지만 이상은 이상이기에, 이것이 바로 더크의 특이한 매력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진부하면서도 곱게만 보이는 소재들은 그 내용적 측면에서도 더크를 형편없는 화가로 묘사하는 이유로 추가됩니다.
하나같이 거짓되고, 불성실하고, 겉만 그럴싸하게 그리는 것.
더크는 친구들에게 놀림을 당하면서도 칭찬을 듣고 싶고 자기만족에 빠져 자신의 그림을 늘 보여주곤 합니다. 서머셋은 더크처럼 성실하고 정직하고 솔직한 인간이 어째서 이런 불성실하고 겉만 번지르르한 그림만을 주구장창 그려대는지, 그리고 어떻게 이렇게 인물과 작품이 모순적일 수 있는지 고소를 금치 못합니다. 남의 그림을 논평할 때는 참으로 정확하고 참신한 비평적 감각을 유지하고 있지만, 자신의 그림에서는 어째서 그리 진부하고 통속적인지 의아하다는 것입니다.
더크는 자기 자신은 엉터리 화가이면서도 타인의 미술에 대한 감각은 아주 섬세하고 열정적이며, 비평은 참신하고 날카롭게 합니다. 또한, 옛 대가의 작품을 볼 줄 알고 현대 화가들에 공감할 줄 알아서 가히 온고지신(溫故知新)하다고 할 만 합니다. 게다가, 여느 화가들과는 달리(서머셋의 말을 그대로 옮김^^), 음악이나 문학과 같은 다른 예술들에도 조예가 깊습니다. 무엇보다도 당시에 아무도 주목하지 않던 스트릭랜드의 작품에 열광하면서 그의 천재성을 알아보고 있습니다. 그럼 이제 저로 하여금 특별히 더크에게 관심을 가지도록 한 그의 ‘미적 감식력’을 살펴보겠습니다. 그는 아름다움의 생산과 미적 감수성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아름다움이란 예술가가 온갖 영혼의 고통을 겪어가면서 이 세상의 혼돈에서 만들어내는, 경이롭고 신비한
것이야. 그리고 또 그 아름다움을 만들어 냈다고 해 서 아무나 그것을 알아보는 것도 아냐. 그것을 알아보자면
예술가가 겪는 과정을 똑같이 겪어보아야 해요. 예술가가 들려주는 건 하나의 멜로디인데, 그것을 우리 가슴
속에서 다시 들을 수 있으려면 지식과 감수성과 상상력을 가지고 있어야 해”
역시나 예술적 재능이나 미적 감식력을 가진다는 것은 아무에게나 주어지는 것은 아니군요. 천재적 예술성의 전제 조건은 영혼의 고통인 것 같은데, 이것의 실체가 무엇인지는 아직 언급하지 않겠습니다. 잘은 모르지만, 이 세상의 혼돈이 영혼의 고통을 가져 올 수도 있고, 반대로 예민한 영혼의 고통 속에서 세상의 혼돈에 민감하게 반응할 수도 있을 것 같다는 짐작을 해 봅니다. 무감각하고 겉만 번지르르한 그럴싸한 인간들에게는 드러나지 않을 예술적 차원인 것 같습니다. 아무튼 이제 아름다움을 알아보는 미적 감식력을 어떻게 기를 수 있는지 더크의 조언을 정리해 보겠습니다.
첫째, 예술가가 겪는 과정을 똑같이 겪어보아야 한다.
둘째, 지식과 감수성과 상상력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이 첫 번째 조언을 검토해 볼 때, 예술가는커녕 비평가가 되기도 쉽지 않겠습니다. 무슨 수 로 예술가가 겪는 영혼의 고통을 겪어낼 수 있겠습니까? 그러한 고통이 아무에게나 허락되는 것도 아니고, 그러한 고통을 아무나 겪어낼 수 있는 것도 아니지 않습니까? 두 번째 조언도 쉬운 일은 아니지요. 저 같은 경우, 지식의 습득은 어느 정도 가능할 것 같지만, 감수성과 상상력은 점점 고갈되어 가는 것 같아 부끄러울 지경이거든요.
더크는 자신의 작품을 무시한 스트릭랜드의 모욕에 대해 분개하는 아내에게 천재를 대하는 한 방법을 일러줍니다.
“여보, 그 사람은 천재라니까. … 세상에서 천재보다 굉장한 건 없어. 천재들에게 야 그게 큰 부담이 되지만
말야. 천재들에게는 너그럽게 대해 주고 참을성 있게 대해 주어야 해”
재승덕(才勝德)을 부끄러운 것으로 아는 우리네 풍토에서는 자못 신선한 말이네요. 진부하고 통속적인 작품만 그리고 “뚱뚱보 토비 벨치 경의 몸뚱이에 로미오의 열정을 지닌 격이었다. 착하고 너그러운 성품을 가진 사람이었지만 늘 실수투성이였다.”고 묘사되는 더크이지만, 그의 인성은 결코 통속적이지 않은 것 같습니다. 어쨌든 더크가 일러주는 천재를 대하는 법은 다음과 같이 정리할 수 있겠습니다.
천재를 대하는 법 : 너그럽게 대해 주고 참을성 있게 대한다.
이제 마지막으로 더크가 천재의 작품을 대하는 장면을 소개해 보겠습니다. 더크는 스트릭랜드에게 버림받은 자신의 아내가 죽어버린 이후, 자신의 스튜디오를 들렀다가 거기서 아내를 모델로 그린 그림을 발견합니다. 질투에 사로잡혀 그림을 갈기갈기 찢어버리려던 더크는 순식간에 얼어붙습니다. 그때의 천재의 작품에 직면한 감정은 다음과 같이 묘사됩니다.
“ … 갑자기 가치 관념이 다른 세계로 들어선 듯한 기분이었다. 일상의 사물들에 대한 반응이 전혀 다른 나라에
온 외국인처럼 어리둥절하여 서 있었다 ….” “뭐랄까? 전혀 생각지 못했던 어떤 힘으로 넘치는 새로운 혼을 발견
하였던 것이다. 강렬하고 특이한 개성을 대담하고 단순하게 묘사한 것만은 아니었다. 살결은 열정에 가득한 어떤
관능, 불가해한 어떤 것을 품고 있는 관능으로 채색되어 있었는데, 그렇다고 채색에 그치는 것만은 아니었다.
중량감, 그러니까 육체의 무게를 뚜렷하게 느끼게 해주는 그런 중량감에 그치는 것만도 아니었다. 거기에는 어떤
영적인 것이, 혼을 어지럽히는 전혀 새로운 어떤 영성이 깃들어 있어 생각지 못한 방향으로 상상을 이끌어 가면
서, 영원한 별들만이 빛나는 어둡고 텅 빈 우주를 암시하는 것만 같았다.”
더크가 천재적 작품을 통해 받은 느낌은 다음과 같이 정리할 수 있겠습니다.
첫째, 기존의 가치 관념과는 다른 세계로의 진입,
둘째, 어떤 힘으로 넘치는 새로운 혼,
셋째, 관능적 채색이지만 어떤 새로운 영성이 깃든,
넷째, 벌거벗은 영혼이 신비를 찾아 모험의 여정을 떠나는 것과 같은 것.
인용된 원문의 출처 : 『달과 6펜스』 ( 서머셋 모옴, 송무 옮김, 민음사 )
첫댓글 잘 앍었어요. 6펜스가 다라고 하는 시대에 달을 보려고 하는 영혼이 보여요.
게시된지 한달이 지나서 알게, 읽게됨 송구스럽네요.
낯설은 그림을 보게될 때마다 긴강님의 글이 겹칠겁니다.
대출한 책을 뒤로 하고 당장 도서관을 뒤져봐야 겠습니다.
그리고 텃밭 스케치에 대한 조급함이 복잡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