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출처: 영남지리답사 원문보기 글쓴이: 松河 李翰邦
오천정씨(영천 선원) 직계조상 행적 요약
1대 - 정습명
고려시대 향공(鄕貢)으로 문과에 급제하여 내시(內侍)에 들어갔고, 인종 때 국자사업(國子司業)
기거주(起居注)지제고(知制誥)를 역임, 최충(崔沖), 김부식(金富軾) 등과 함께 '시폐 10조(時弊十條)'를 올렸으나 인종으로부터 거부당했다. 1146년(인종 24년) 예부시랑이 되어 태자(太子)인
의종(毅宗)에게 강서(講書)하고, 공예왕후(恭睿王后)가 둘째 아들 대령후(大寧侯)를 태자로
세우려는 것을 저지하여 인종으로부터 신임을 얻어 승선(承宣)에 올랐고, 1149년(의종 3년)
한림학사에 이어 추밀원주지사(樞密院奏知事, 정3품 벼슬)를 지냈다. 선왕의 유명을 받들어
의종에게 거침없이 간함으로써 왕의 미움을 사게 되어 영일 오천에 귀향하여 마지막 상소를
올리고 자결하셨다.
2대 - 정섭균
위위주부(衛尉注簿) 벼슬 역임, ‘고려시대 관직표’에 의하면, oo주부라는 벼슬은
종7품 벼슬에 해당하는 것으로 추정됨.
3대 - 정겸목
내시주부(內侍主簿) 벼슬 역임, 2대조와 마찬가지로 종7품 벼슬에 해당하는 것으로 추정됨.
4대 - 정인신
태학박사(太學博士) 역임, 고려시대에 국자감(최고국립교육기관)에 속한 종7품 벼슬에 해당,
태학은 국자감의 한 분과로서, 문무관 5품 이상의 자손과 3품관 이상의 증손에 한해 입학
가능하며 정원은 300명인데, 태학박사는 이들에게 논어, 역경, 시경, 서경, 삼례, 효경,
삼전춘추 등을 가르치는 오늘날의 서울대교수직에 해당.
5대 - 정지태
전서(典書) 벼슬 역임, 전서는 고려 후기의 정3품 관직으로 조선시대 판서 벼슬에 해당.
6대 - 정종흥
진현관 제학(進賢館 提學) 역임, 진현관은 고려시대 학식이 풍부한 문신들을 뽑아
학문을 연구하고 임금을 시종케 하던 관전(館殿)으로서, 제학은 정3품 벼슬에 해당.
7대 - 정 림
판도판서(版圖判書) 벼슬 역임, 판도판서는 판도사(版圖司)의 으뜸 벼슬. 31대 공민왕(恭愍王)
11년(1362년) 호부 상서(戶部尙書)를 고친 이름으로, 뒤에 호조 전서(戶曹典書)로 고쳐졌다가
조선시대 3대 태종 때에 호조 판서(戶曹判書)로 됨.
8대 - 정인언
전공판서(典工判書) 벼슬 역임, 본래 영일정씨는 시조 정습명 이래로 영일에 세거하였으나,
고려말 포은 정몽주가 순절하자, 가문이 위기를 맞이하게 되었고, 이에 전공판서였던 정인언이
그의 아들 공조판서 정광후와 함께 영천의 당시 천민촌(賤民村)이었던 전촌(錢村, 지금의 영천시
도동)으로 은거하게 됨에 따라 영천이 영일정씨의 새로운 세거지가 됨.
9대 - 정광후
정광후(鄭光厚)는 고려조에 문과에 올라 검교한성윤(檢校漢城尹), 상주목사(尙州牧使) 등을
역임했으나, 큰집인 포은 정몽주(鄭夢周) 선생의 순절을 보고 벼슬을 버린 뒤 그의 부친인
전공판서 정인언과 함께 영천(永川)의 당시 천민촌(賤民村)이었던 전촌(錢村, 지금의 영천시
도동)에 숨었다가, 조선 초기 강압에 의해 공조판서(工曹判書)를 제수받아 마지못해 벼슬을
역임하신 분이다. 정광후는 그의 부친인 전공판서 정인언과 함께 포은선생이 이방원에 의해
격살되기 직전 포은선생의 아들들(정종성, 정종본)을 개성에서 경기도 부근으로 은닉시켜 가
문의 대를 잇게 한 후 홀연히 벼슬을 버리고 영천으로 내려와 숨어 살다가 이성계
등으로부터 벼슬을 사양할 경우 멸문지화(滅門之禍)를 입게 될 것이라는 위협을 받고 이
를 모면하기 위해 부득이 벼슬길에 올라 가문의 대를 겨우 잇게 되었다.
10대 - 정 위
정광후의 세 아들 중 장남으로서 돈용교위(敦勇敎尉, 조선초기 정 6품 벼슬), 웅무시위사
후령사정(雄武侍衛司 後領司正) 벼슬 역임, 자라의 은혜 갚음으로 인해 정위가 당지산(唐旨山,
지금의 영천경찰서 너머의 뒷산)에 명당을 얻었다는 일화는 유명하다. 조선시대에는 서당에서
제자가 책 한권을 다 배우면 책거리 떡을 하여 스승의 은혜에 보답하는 아름다운 풍습이 있었는데, 정위는 어린 시절 모친으로부터 책거리 떡을 받아 가지고 서당으로 향하는 도중 자라 파는 장수를
만나게 되었다. 자라 파는 장수는 어떤 사람과 한참 흥정을 하고 있었는데, 여러 마리의 자라 중
한 마리가 눈물을 뚝뚝 흘리며 나이 어린 정위를 쳐다보았다. 이에 나이 어린 정위는 자라가
팔려가는 것을 불쌍히 여겨 자라 파는 장수에게 떡을 다 줄 테니 자라와 바꾸자고 제안하여
승낙을 얻었다. 이후 어린 정위는 떡과 바꾼 자라를 가까운 물에 놓아주니, 자라는 고맙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이며 인사를 하고 물 속으로 사라졌다. 결국 스승의 은혜보다 팔려가 죽을
자라를 살려주는 생명존중을 택한 것이다. 이후 세월이 흘러 정위의 모친이 사망하자 묘터를
찾아 여기저기 헤매다 당지산(唐旨山, 지금의 영천경찰서 너머의 뒷산)에 이르러 큰 자라
한 마리가 상주(喪主)인 정위의 앞길을 기어가기에 이상한 생각이 들어 그 자라를 따라가니
그 자라가 언덕에 이르러 양지 바른 곳에 멈추어 섰다. 정위는 그곳의 산세를 살펴보니 과연
명당터에 해당하여 묘터를 여기로 정했다. 그 결과 아래에서 살펴보는 바와 같이 한 집안에서
문과 9급제가 나서 가문의 위세를 드높였고, 약 600년을 내려오면서 자손은 수천호에 이르고
벼슬길에도 그 명성을 이어갔고, 효도와 우애 및 문행과 훈공이 길이 이어지는 가문이 되었다.
결국 자라가 생명의 은인에게 명당을 점지해 주었다고 생각되며, 그리하여 영일정씨 후손들은
절대 자라를 먹지 않는 풍습이 생겼다 한다.
11대 - 정문예
조선 태종 2년(1402년)에 생원 급제하여 영산유학교도(靈山儒學敎導)를 지내시고,
그의 아들 5명[정종소, 귀소, 지소, 치소, 의소]과 손자 3명[정이휘, 이교, 이심]까지
문과 급제하여 한 집안에 과거9급제가 나서 이른바 '해동 9급제' 가문이라는 명성을
드높였다. 현재 영천 자양면 기룡산 소재 영일정씨 선산 자락(이른바 ‘하천재’)에 '해동 9급제'
가문임을 칭송하는 ‘하천세덕송’ 기념비가 서 있다. 영천 도동에서 영천 대전으로 이거하신
영천 대전동 입향조(入鄕祖)이시다. 아들로는 [정종소, 귀소, 지소, 치소, 의소]가 계시다.
12대 - 정종소
세종 29년(1447년)에 문과 급제하여, 성균관 학유로 성삼문, 박팽년, 이개, 류성원 등과
교류하시었고, 성균관 학유, 학록, 학정, 박사를 거쳐 이조좌랑(정6품)의 벼슬에 올랐으며,
이후 영천(榮川, 오늘날의 영주) 군수 때 향약을 제정해 향서당을 짓고 기문하니 후에
점필재공(김종직)이 공경해 오천(烏川)의 정(鄭) 선생님이라고 호칭하셨다. 의성군수,
예천군수, 안동진관첨 절제사, 함양군수, 경연관봉상 사정사성으로 관직을 이어가다가,
성삼문, 박팽년 등이 단종 복위를 꾀하다 실패하여 처형당한 이후 벼슬을 버리고 낙향하여
은거생활을 하면서 학문에 전념하셨다.
13대 - 정이휘
병술년(1466년)에 문과 급제하여 장수도찰방, 지평, 양주목사를 거쳤으며, 부친인 정종소와
4분의 숙부인 [정종소, 귀소, 지소, 치소, 의소]와 서로 교류하신 점필재공(김종직)과도 교분이
두터워 자주 시문을 주고받으며 친하게 지내셨다. 부친 및 숙부님과 함께 단종사건을 계기로
벼슬을 버리고 낙향하였다가 성종 때에 이르러 다시 벼슬길에 올랐으나, 연산군(무오사화)의
화를 피해 또 다시 부친 및 숙부님들과 함께 벼슬을 버리고 낙향하시기에 이른다.
14대 - 정차근
선무랑(宣務郞, 조선시대 종6품 관직) 벼슬 역임. 당시 기묘사화 등으로 많은 유림들이
목숨을 잃고 유배되는 등 혼란한 정세에 실망하여 영천 대전동에서 영천 자양면 노항리로
옮겨 그곳에서 학문에 정진하는 등 조용히 은거하셨다.
15대 - 정윤량
장사랑(將仕郞, 조선시대 종9품 관직), 창릉참봉(昌陵參奉, 조선시대 종9품 관직, 우리는
흔히 TV 사극에서 '참봉 어르신'이라는 말을 들을 수가 있다) 벼슬을 제수받았으나 사양함.
약관(弱冠) 20세의 나이에 퇴계 이황의 문하에 들어가 제자로서 유학하였으며, 학행(學行)이
있고 성리학(性理學) 탐구에 전심하여 금계(錦溪) 황준량(黃俊良)이《계문제자록(溪門弟子錄)에
그것을 찬미하여 적었다. 이후, 김응생(金應生) 등과 함께 재물을 모아 태학(太學: 成均館)의
제도를 본떠 자양서당(紫陽書堂)을 짓고 학규(學規)를 정하여 후배 교육에 진력하였다.
1553년(명종 9)에는 진사(進士) 노수(盧遂), 생원(生員) 김응생 등과 뜻을 모아 영천의
부래산(浮來山, 영천시 임고면 우항리 소재) 밑에 우리나라 두 번째의 사액서원(賜額書院)인
임고서원(臨皐書院)을 창건하고 정몽주(鄭夢周)를 제향(祭享)하게 하여 유학진흥에 크게 공헌
하였다. 또한 공자(孔子)를 추앙하여 동네이름을 노항(魯巷: 영천시 자양면 노항리)으로 고치고 자호를 노촌(魯村)이라 하였다. 정윤량이 영천 자양면 기룡산 자락에 명당을 얻은 일화도
유명하다. 정윤량은 그의 부친인 선무랑(宣務郞) 정차근(鄭次謹)이 기묘사화를 피하여 영천의
대전에서 이곳 노항(魯港)으로 옮겨 올 때, 그는 겨우 다섯살이었다. 어릴 적부터 효성이
지극하여 이름 대신 ''정 효자''로 불리어졌다. 그러나 아버지를 일찍 여의었다. 아버지가
병석에 눕자 어린 정 효자는 옷을 벗고 자리에 누운 일이 없었다. 먹고 자는 것조차
잊어버리고 아버지 머리맡에서 병간호를 하며 어머니와 근심을 같이하여 정성을 다하니
보는 이마다 놀라며 탄복했다. 그러다가 아버지가 돌아가시자 애통해 하는 모습이 더할 수
없이 애처로웠으며 예를 행함에 조금도 어긋남이 없었다. 이윽고 묘 터를 잡아 장례를
치르는데, 백발 노승이 지나가면서 "정 효자 댁의 묘소를 어찌 이곳에 와 쓰는지 이상한
일이로다."하면서 혼잣말처럼 중얼거리고 지나갔다. 이 소문을 들은 상주(喪主) 정 효자는
일을 중지시키고 부리나케 그 노승을 뒤쫓았다. 십리쯤 가서 고개를 넘으니 뜻밖에도
그 노승은 기다리고 섰다가 "상주(喪主)가 올 줄 알았다."하면서 앞장서서 여기 이
기룡산(騎龍山) 기슭에 와서는 지팡이로 혈(穴)을 짚었다. "이 혈은 기룡의
좌장혈(左掌穴)이요! 부귀를 겸하여 가운이 융성할 것이며 힘차게 내리 쏟는 기룡의
정기를 받았으니 위인이 날 터이며, 물 흐름이 보이지 않으니 부자도 날 것이요.
이와 같이 크고 귀한 판국(版局)에는 손세도 좋아 이 세상에 바로 정 효자요."하는 것이다.
정 효자는 이 노승을 집으로 모셔다가 후히 대접할 양으로 소매를 끌었으나 노승은
사양하며, "노승은 신령의 명을 받고 온 설학(雪學)이오, 다시 만날 날이 있을 것이니
오늘은 길이 바빠서 곧 가야하오. 너무 심려하지 마시오."하고는 기어이 떠났다.
뒤따르던 정 효자가 언덕 위에 오르니 이미 노승은 온데 간데 없었다. 이 정 효자는
여묘살이 3년을 마치고 퇴계(退溪) 이황(李滉)선생 문하에 가서 수업하여 뒤에 많은
제자를 길러 내었으며 향풍(鄕風)도 예법에 맞춰서 다시 고친 명성이 높은 학자였다.
16대 - 정세아
임진왜란 때의 의병장으로, 그 전공으로 병조판서(兵曹判書)에 추증됨. 1558년(명종 13년)
사마시에 합격하고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그의 아들 정의번 등과 함께 900여명의
의병을 모아 편대를 정하고 격문을 작성하여 의병을 규합, 의병대장이 되어 영천(永川)에서
적을 무찔렀다. 그때 곽재우(郭再祐)는 의령에서, 권응수(權應銖)는 신령에서 각각 기병하여
서로 성원하였다. 그해 8월 권응수의 지휘 아래 영천 의병장 정대임(鄭大任), 정천뢰(鄭天賚),
조성(曺誠), 신해(申海) 등과 함께 영천 박연(朴淵)에서 왜적과 싸워 큰 전과를 거두고
영천성을 수복한데 이어 다시 경주의 왜적을 격퇴하니, 이로 인하여 낙동강 왼쪽이
온전하였다. 이듬해 평양과 서울이 차례로 수복되자 군사를 조희익(曺希益)에게 맡기고
영천시 자양(紫陽)으로 돌아갔다. 체찰사 이원익(李元翼)에 의하여 여러 번 천거되었으나
사양하였고, 나중에 황산도찰방(黃山道察訪) 벼슬을 잠시 지내고 곧 사직하였다. 임진왜란
이후에는 장현광(張顯光) ·조호익(曺好益) ·이준(李埈) 등과 학문을 토론하며 후진을
양성하였다. 병조판서에 추증되고 영천의 환고사[環皐祠, 영천시 임고면 선원2리(대환마을)
소재]에 봉향되었으며, 임진왜란 당시의 행적을 기록한 [호수실기]가 있다.
참고로, 호수공 정세아는 슬하에 4형제분을 낳으셨는데, 그 중 1남인 정의번(백암공)은
아래에서 살펴보는 바와 같이 왜적에게 포위된 부친을 살리고 장렬히 전사하셨는데,
나랏님은 그 충과 효를 기려 종2품에 해당하는 이조참판의 벼슬을 하사하셨으며, 호수공
정세아의 4남 정수번의 둘째아들 정호례(해남현감)가 그 양자로 들어와 후일 정시심(호군공,
오늘날 쓰리스타 계급), 정석달(함계처사), 정중기(형조참의, 정3품 벼슬) 등으로 대를 잇게
되었다.
또한, 호수공 정세아의 2남인 정유번(처사공)은 임진왜란이 끝난 후 조용히 초야에 묻혀
학문에 정진하고 벼슬길에 나아가지 않으셨는데, 슬하의 3형제 중 1남인 정태안(鄭泰安)은
현감 벼슬을 하셨고, 2남인 정호지(鄭好智)의 외손자인 양극선은 문과에 급제 통정대부로서
목사의 벼슬을 역임하셨고, 3남인 정호공(鄭好功)은 의성군 사곡면 양지리의 구눌마을을
개척하는 등 그 후손 대부분이 의성(사곡), 경산(와촌) 등지에 흩어져 있다.
한편, 호수공 정세아의 3남인 정안번(만호공)은 무과에 급제하여 어모(禦侮)장군(將軍)(정3품
당하관) 용양위 부사과의 벼슬을 하셨고, 참의(參議) 권극립(權克立)의 따님과 혼인하여
슬하에 정호인{1627년 인조 5년 문과에 급제하여 예조, 호조정랑 등을 거쳐 양산, 합천군수,
진주목사 등을 역임하는 등 여러 고을의 수령을 지냈고, 1636년 병자호란 때도 의병을
일으키는 등의 공훈으로 선무공신(宣武功臣) 3등의 녹훈(錄勳)을 받았으며, 대구 청호서원
(靑湖書院)에 제향되신 분이다}, 정호문(정9품 벼슬인 종사랑 역임) 2형제분을 낳으셨고,
정호인(진주목사)의 증손자가 바로 훈수 정만양, 지수 정규양(두 분을 가리켜 '횡계
양수선생'이라고 일컫는다)이시다.
마지막으로, 호수공 정세아의 4남인 정수번(호군공)도 무과에 장원급제하여 1605년
감포만호(甘浦萬戶), 이어서 재포만호를 거쳐 무의만호의 벼슬은 부친 병환으로
사양하시었고, 후에 충좌위후부장(忠佐衛後部將)을 지내고 이어 용양위부사과를 거쳐
나중에 부호군(副護軍)에 올라 신무기를 만들고 신병법을 보급하여 연마하게 하니
왕이 이를 듣고 크게 기뻐하여 내금위장(內禁衛將) 종2품(從二品) 벼슬에 발탁,
승진하였으며, 이윽고 순찰사(巡察使)의 청에 의하여 전국 병영을 사열하며 순시 중에
남방 병비를 보강하고 병술을 높이기 위하여 경상좌도 병영에 군무 중 질병으로 생을
마치셨는데, 슬하에 정호의(정6품 벼슬인 승의랑 역임, 아내는 용궁전씨), 정호례(해남
현감으로 정의번의 양자로 들어감), 정호신(정6품 벼슬인 승훈랑 역임) 3형제분을 낳으셨다.
17대 - 정의번
정의번은 임진왜란 때의 의병장 정세아의 첫째 아들로서, 임진왜란 때의 충과 효를 기려 호조정랑(戶曹正郞, 정5품 벼슬)에 이어, 좌승지(左丞旨, 정3품 벼슬), 나중에는 이조참판(吏曹參判, 종2품 벼슬)에 추증됨. 1585년(선조 18) 가을에 성균관 생원(成均館 生員)에 합격하셨고,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부친인 정세아와 더불어 의병을 일으켜 영천에서 승리, 영천성을 수복하고, 이어 경주에 진격하여 좌장군 박진(朴晋)의 패전으로 적에게 포위되어 위기에 빠진 부친 정세아를 구출하기 위하여 혈전을 벌여 마침내 부친인 정세아를 구출하고 정작 정의번 자신은 적에게 사로잡혀 적에게 끝내 굴복하지 않고 장렬히 전사하셨다. 그러나 시신을 찾지 못하여 옛날 입던 의관(衣冠)과 시(詩)를 묻어 장사를 지내니 이를 일러 ‘시총(詩塚)’이라 한다. 슬하에 후사가 없어 동생 정수번(鄭守藩)의 둘째 아들 정호례(鄭好禮)를 양자로 들여 대를 잇게 하였다. 1784년(정조 8년)에 왕명에 의해 정려가 내려져 '충효각'이 세워졌으며, 영천의 환고사[環皐祠, 영천시 임고면 선원2리(대환마을) 소재]에 부친인 정세아와 함께 봉향되셨다.
18대 - 정호례
내금위장(조선시대 종2품의 무관) 정수번의 둘째 아들로서, 백부인 이조참판 정의번이 임진왜란 때 경주 전투에서 후사가 없이 돌아가시자 이조참판 정의번의 양자로 들어갔다. 1636년 무과에 급제하여 병자호란 당시에는 어가를 모시고 남한산성에 들어가 성을 지키고, 부친인 이조참판 정의번이 왜놈에게 죽었다 하여 평생 왜구의 물건을 쓰지 않았다고 한다. 1659년 해남현감이 되고 청직하고 염개하였으며, 임기를 마치고 돌아갈 때는 행낭 속에 치자나무 한 화분만이 있을 뿐이니 해남고을 백성들은 공의 덕을 기리기 위해 청덕비가 세워져 현재도 있다 한다. 이러한 공의 청백함을 어사 남구만이 장계를 올려 포상이 이루어졌고, 잠시 고향 영천 대전동에 있을 때 농사철에 논에 물이 없는 것을 보고 영천군수로부터 도움을 받아 영천 북부에 있는 일명 '대내실' 못을 만드니 당시 고을 사람들이 모두 그를 높이 칭송하고 좋아했다 한다. 벼슬을 마치고 귀향하여 영천시 임고면 선원리에 최초로 터를 잡은 선원리 입향조(入鄕祖)이시다.
19대 - 정시심
1661년 무과에 급제하여 용양위 부사과, 훈련원 판관, 남포절제사, 훈련원 부장(副將), 용양위 부호군 겸 전주영장(전주지역 일대의 최고군사령관), 절충장군 충무위 대호군(조선시대 종3품 벼슬, 현재의 쓰리스타 계급)으로서, 함경도 우후 병마절도사 아래 부장(副將), 내금위장 겸 사복장 등을 역임하셨다. 풍모와 기품이 비범하고 단정하였으며, 아름다운 턱 수염이 무릎에 닿을 정도였다 한다. 묘소를 영천시와 포항시의 경계를 이루는 운주산 정상 부근으로 정했는데, 여기에도 일화가 있다. 정시심은 생전에 아주 친하게 지낸 최씨 성을 가진 친구이자 풍수인이 있었는데, 어느 날 정시심은 최씨 친구에게 "자네는 산에도 많이 다니니, 이 지역에서 제일 좋은 묘터는 자네가 하고, 그 다음으로 좋은 명당자리 한곳을 추천해 달라."고 하자, 최씨 친구가 웃으면서 "제일 좋은 명당을 하나 봐둔 곳이 있기는 한데, 내가 묻히기엔 좀 어려워. 자네에게 추천함세."라고 화답하고는 그 곳으로 정시심을 직접 데리고 가서 보여주었다. 명당터를 직접 본 정시심은 최씨 친구에게 "이 좋은 자리를 자네가 하지. 어째서 나한테 주는냐?"고 묻자, 최씨 친구가 "이 곳은 그냥 시신을 묻어서는 명당이 될 수 없고, 송진을 바닥에 깔고 시신을 묻어야만 명당이 되니... 나 역시 이 자리가 욕심은 있으나, 사는 게 가난하니 어려워. 이 자리의 주인은 바로 자네라네."라고 대답하였다. 이후 정시심이 별세하자, 아들 정석달을 비롯한 일가친척들이 모두 모여 의논하여 풍수인 최씨 친구의 말대로 기계, 청송지역에서 송진을 가져오는 자에게는 송진 양 만큼의 소금을 주리라고 소문을 내어 송진 1가마니를 모아 넣고 묘를 썼다고 전해 온다. 그 음덕으로, 정시심의 손자인 정중기가 문과에 급제하여 정3품 벼슬인 형조참의에 오르는 등 자손 대대로 융성하게 되었다고 한다.
20대 - 정석달
조선 후기의 성리학자(주리론자)로서 인품과 덕망이 높았으며, 갈암 이현일(당시 영남사림의 총수, 이문열의 소설 '선택'에 등장하는 장씨 부인의 아들)의 문하에서 수학하였으며, 병와 이형상, 횡계 양수(훈수 정만양과 지수 정규양 형제) 등과 학문을 토론하며 평생을 학문 탐구에 전념하셨다. 저서로는 가례혹문(家禮或文)이라는 예서를 저술하시고, 당시 사농공상의 유교적 사상에 기인하여 평생 시장에 들르지 않으셨다 하며, 중년기 이후에는 우주 및 인체의 이치를 밝히는 발몽설(發蒙說)을 집필하셨으며, 특히 병와 이형상의 기원론에 대한 '答(답) 이병와 理氣(이기) 辯(변)'은 1988년 부산 동아대교수팀에 의해 논문으로 발표된 적이 있을 만큼 성리학(주리론)에 조예가 깊으셨다. 하지만, 노년에 고향인 선원리에 천연두가 창궐하여 안타깝게 돌아가셨다. 문집 3권이 남아 있는데, 제1권에는 한시 300여수가 수록되어 있고, 제2권에는 문인간에 교류하신 편지글들이 수록되어 있으며, 제3권에는 발몽설(發蒙說), 이기변(理氣辯), 선원기(고향인 영천 선원마을의 아름다움을 읊은 수필) 등 수필, 제문, 축문 등이 수록되어 있다. 흔히 영천에서는 남조북정(南曺北鄭)이라는 말이 있는데, 그 뜻은 영천의 벌족은 남쪽에는 조씨, 북쪽에는 정씨란 의미로 통용되나, 사실은 영천에서 벼슬길에 나아가지 않고 오로지 자연 속에서 은거하면서 학문 탐구에만 전념한 2명의 유명한 학자가 위기지학(爲己之學, 과거에 뜻을 두지 않고 오로지 자신의 인격 수양을 목적으로 하는 학문을 의미함)의 도의지교(道義之交)를 맺었는데 영천 남쪽의 병애(屛厓) 조선장(曺善長) 선생과 영천 북쪽의 함계(涵溪) 정석달(鄭碩達) 선생이 바로 그 분들이어서 당시 향림(鄕林)에서는 두 사람을 가리켜 '남조북정(南曺北鄭, 영천 남쪽에는 병애 조선장 선생, 영천 북쪽에는 함계 정석달 선생)' 또는 '남북은자(南北隱者, 영천 남쪽과 북쪽에 각 은거한 2명의 고고한 선비)'라고 칭한 데서 기원한다. 영천 임고면 선원리 입구에 함계정사(涵溪精舍)가 있다.
21대 - 정중보
부친인 정석달의 3남으로서, 앞서 살펴본 바와 같이 부친인 정석달이 고향인 영천 선원마을에 천연두가 창궐하는 바람에 사망에 이르자, 천연두를 피해 정석달의 1남인 정중기(1727년 영조 3년에 문과에 급제하여 승정원주서, 결성현감(結城縣監), 사간원정언을 거쳐 정3품 벼슬인 형조참의를 역임)는 영천시 임고면 매곡마을로 옮기고, 정석달의 2남인 정중우(영천 제헌국회의원을 역임한 정도영이 그 후손임)는 영천시 화북면 자천마을로 옮겼으며, 정석달의 3남인 정중보(조선시대 정5품 벼슬인 통덕랑을 역임하셨고, 슬하에 1남 정일건, 2남 정일휴, 3남 정일릉을 낳으셨는데, 2남과 3남은 쌍둥이 아들임)는 영천시 임고면 선원마을에 계속 남아 고향을 지켰는바, 현재 영천시 임고면 매곡마을에 본적을 두고 있는 정씨들은 정중기의 후손, 영천시 화북면 자천마을에 본적을 두고 있는 정씨들은 정중우의 후손, 영천시 임고면 선원마을에 본적을 두고 있는 정씨들은 정중보의 후손이다.
[출처] 오천정씨(영천 선원마을) 직계조상 행적 요약|작성자 정승호
http://blog.naver.com/PostList.nhn?from=postList&blogId=kula89¤tPage=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