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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계초심학인문(誡初心學人文)
본 초발심자경문은 송광사에 계신 지묵스님께서 '법보신문'에 쓴 글을 옮긴 것입니다.
지눌 스님 쓴 한국판 백장청규(百丈淸規)
청정한 수행자의 생활 엿보여
연재를 시작하며
이 책은 본문 907자로 구성된 한국판 백장청규(百丈淸規)이다. 본래는 1205년 동안거(冬安居)를 시작할 때에 수선사(修禪寺) 중창불사 회향을 기념으로 하여 발표된 수선사의 청규(淸規)였다. 수선사는 송광사(松廣寺) 이전의 옛 이름으로 불사 전에는 지금 화엄전 규모의 3, 40칸 정도 밖에 안 되는 작은 암자에 불과하였다. 당시 지눌(知訥) 스님의 춘추는 마흔 일곱 살이었다.
우리는 율장(律藏)에서 부처님 당시의 수도생활 모습을 찾아볼 수가 있듯이 계초심학인문(誡初心學人文)을 통해서 송광사 스님네의 청정한 수도생활 모습을 찾아볼 수가 있다. 생활 주거 공간인 가람 구조는 조선 말기까지만 해도 수선사, 용화전, 문수전, 화엄전, 해청당, 임경당, 도성당 등으로 구역이 확실한 칠전당(七殿堂)을 유지해 왔으며, 조계산 이 도량은 지내본 이들이 한결같이 말하는 ‘어머니의 태반(胎盤) 안에 든 것 같이 아주 편안하고 조용하여 은거(隱居)하기에 딱 좋은 분위기’이다.
조선 초기부터는 초발심자경문(初發心自警文) 한 권으로 엮어져서 전국 사찰 규모의 청규로 널리 보급되기에 이르렀다. 그만큼 이 초발심자경문의 내용이 당시 상황에 어울리고 아주 많이 필요하였다고 볼 수가 있다. 그리고 이 이후부터는 우리나라 스님네의 저서인 초발심자경문이 소의경전(所依經典)의 하나로 널리 읽히기 시작하였으니 이때를 불교의 자립이 잘 다져진 시기로 보아도 무방할 것이다.
내용을 살펴보면, 우리나라의 승가풍토에 맞도록 백장청규의 정신을 다시 결집한 것이 많고 몇몇 군데는 문장을 그대로 옮겨온 부분이 있다. 이 까닭은 물론 지눌 스님이 부처님의 근본 정신으로 돌아가 수행하기 위해서는 계정혜(戒定慧) 삼학(三學), 특히 계율과 그 시대 그 환경에 맞는 청규가 바탕이 되어야 한다고 믿었기 때문인 것이다.
저자 지눌(知訥) 스님은 한국 불교를 중흥시킨 분으로, 신라의 원효(元曉) 스님, 고려의 지눌(知訥) 스님, 조선의 서산(西山) 스님 등, 어떤 관점에서는 우리나라 삼대 스승의 한 분으로 꼽히는 선지식이라고 할 수가 있다.
조계산노납지눌지(曹溪山老衲知訥誌)
조계산은 지눌 스님이 선종의 정맥 육조 혜능(六祖惠能) 스님의 종지를 잇는다는 뜻에서 기존의 산명 송광산에서 바꾼 것이다. 육조 혜능 스님의 행화(行化)도량은 광동성 조계산 남화사(南華寺)이다.
보통 글쓴이를 ‘해동 사문 목우자 술(海東 沙門 牧牛子 述)’이라고 하고 있으나 송광사(松廣寺) 목판본을 따른다. 조계산 송광사 화엄전에는 3,900 장의 목판을 봉안한 판전(版殿)이 있다. 여기 계초심학인문(誡初心學人文) 목판본에서 옮겨온 내용이 ‘조계산노납지눌지(曹溪山老衲知訥誌)’이다. 이것은 1612년에 판각한 것.
이와 같이 송광사 진장(珍藏) 초발심자경문(初發心自警文) 목판본을 저본으로 삼고 의심나는 부분은 다른 본에서 보충할 것이다.
과(課)는 편의상 행자실 강의 노트에서 ‘초발심자경문(初發心自警文) 49과’를 토대로 하였다.
계초심학인문(誡初心學人文)의 내용은 세 문단으로 나눈다.
첫째 문단은, 처음 발심하여 입산한 초심자들의 언어습관, 몸가짐과 마음가짐을 가르친 사미(沙彌)의 청규. 부초심지인(夫初心之人)∼영향상종(影響相從)까지 내용이다.
둘째 문단은, 일반 대중 청규. 거중료(居衆寮)∼기위유지혜인야(豈爲有知慧人也)까지 내용이다.
셋째 문단은, 선원 납자 청규. 주사당(住社堂)∼끝까지 내용이다.
<2> 계초심학인문(誡初心學人文)
초발심의 그 마음이 곧 깨달음
성인의 말씀 금쪽같이 여겨야
夫初心之人은 須遠離惡友하고 親近賢善하야 受五戒十戒等하야 善知持犯開遮하라. 但依金口聖言이언정 莫順庸流妄說이어다.
초심자는 반드시 좋지 않은 스승으로부터 멀리 떠나고 선지식을 친근히 모셔야 하며, 오계 십계 등 계를 받아서, 지키고 어기며, 열고 닫을 줄을 잘 알아야 하느니라. 오직 성인의 금쪽 같은 말씀만을 의지할 것이요, 용렬한 이들의 망언은 따르지 말아야 하느니라.
부초심지인(夫初心之人)
부(夫)자는 문어(文語)에서 평문(平文) 첫머리에 놓는 글자이다. ‘대저’의 뜻.
‘초심지인’은 초심자, 초발심자(初發心者). 처음 도를 닦겠다고 마음을 일으킨 사람이며, 맑고 깨끗한 마음을 지닌 입문자(入門者)를 가리킨다. 법성게에 ‘초발심 시변정각(初發心 是便正覺)’이란 말이 있다. 깨닫고 보니 초발심 바로 그때가 깨달음의 순간이었다는 말이다. 이만큼 초심 시절이 깨달음을 성취한 순간과 같다는 뜻이다. 돌고 돌아보니 본래 제자리에 와 있었다는 한 도인의 말과 부합하는 말이다.
수원리악우(須遠離惡友) 친근현선(親近賢善)
‘수(須)’자는 조건을 나타내는 부사로 반드시, 모름지기의 뜻.
원리(遠離)는 멀리 떨어지다는 뜻.
악우(惡友)는 나쁜 이, 악지식(惡知識)이며 선우(善友)는 착한 이, 선지식(善知識)이다. 이 부분 풀이는 여태까지 좀 막연하였는데 다행히 강설자의 스승이신 해인사 종진(宗眞) 스님의 명백한 풀이에 힘입어 주저 없이 선지식, 악지식으로 풀이한다.
현선은 악우의 반대. 선지식이다. 옛사람들은 도덕이 높은 이를 기준 삼아, 도덕이 완성된 이부터 성인(聖人), 현인(賢人), 선인(善人)으로 구별하였다.
오계십계(五戒 十戒)
① 불살생(不殺生) : 산목숨을 해치지 않겠으며, 자비로운 마음으로 모든 중생을 사랑하겠습니다.
② 불투도(不偸盜) : 주지 않는 물건을 갖지 않겠으며, 보시를 행하겠습니다.
③ 불음행(不淫行) : 음행(재가자의 경우는, 사음邪淫)을 하지 않겠으며, 순결을 지키고 자기 극복의 힘을 키워 청정한 삶을 살겠습니다.
④ 불망어(不忘語) : 거짓말을 하지 않겠으며, 남에게 피해와 아픔을 주는 말을 삼가 하고 진실한 말을 하겠습니다.
이상이 불계(佛戒)의 근본 사계(四戒)이고 성계(性戒)이다. 사미 10계, 비구 250계, 비구니 348계 등도 모두 이 근본 사계를 벗어나지 않는다.
⑤ 불음주(不飮酒) : 술은 취하도록 마시지 않겠으며, 술을 멀리하여 늘 맑게 깨어있는 삶을 살겠습니다.
이상이 재가자와 출가자의 공통인 기본 오계이고 아래 십계까지 합해서는 사미(沙彌)십계이다.
⑥ 부좌와 고광대상(不坐臥高廣大床) : 높고 너른 큰 침상에 앉거나 자지 않겠으며, 검소하게 생활하겠습니다.
⑦ 불착 화만영락 향유도신(不着華 瓔珞香油塗身) : 꽃다발이나 목걸이를 걸지 않겠으며, 향유를 바르지 않고 몸에 꾸밈이 없이 살겠습니다.
⑧ 부자 가무작창 고왕관청(不自歌舞作唱故往觀聽) : 노래하고 춤을 추지 않겠으며, 짐짓 가서 구경도 하지 않고 수도 정진만을 하겠습니다.
⑨ 불착 금은전보(不着金銀錢寶) : 몸에 금은 보배를 지니지 않겠으며, 무소유의 삶을 살겠습니다.
⑩ 비불시식 불양가축(非不時食不養家畜) : 오후가 지나서는 음식을 먹지 않겠으며, 가축을 기르지 않고 출가정신대로 살겠습니다.
<3> 계초심학인문(誡初心學人文)
계율은 문과 같아 때에 맞게 여닫아야
집착 못버리면 삭발해도 출가는 헛 일
선지지범개차(善知持犯開遮)
계율이 청정하게 지켜질수록 승가와 불교는 더욱 발전한다. 계율은 바로 불교의 생명이기 때문이다.
지범개차법(持犯開遮法), 줄여서 개차법(開遮法)은 선지식이 계율의 언어문자를 자구(字句)대로 잘 따르지 않았어도 오히려 언어문자 대로 잘 지킨 이보다 훨씬 더 부처님의 근본정신을 잘 살린 경우로 보고 이를 정법화(正法化) 한다.
계율은 벽이 아니고 문이다. 벽은 항상 굳게 막혀 있으나 문은 그렇지 않다. 열려야 할 때에는 열리고 닫혀야 할 때에는 닫힌다. 이것이 바로 개차법이다.
개차법을 잘 쓴 선지식의 경우를 보면, 백장 스님은 비구는 일을 하지 말라는 비구계를 파하고, 하루 일을 하지 않으면 하루 먹지 않는다는 선농일치(禪農一致) 사상을 주창하여 천년의 총림 가풍을 일깨웠고, 서산 스님은 비구는 전쟁터에 가지 말라는 비구계를 파하고 승병을 몸소 일으켜 호국불교 기치를 높이 받들게 하였으니 눈밝은 선지식의 일거수일투족(一擧手一投足)은 이와 같이 법 밖에서도 법 아닌 것이 없는 것이다.
지계(持戒) 차계(遮戒)는 계율을 지키는 것이고 범계(犯戒) 개계(開戒)는 계율을 파하는 것이다. 선지식이 어떤 경우에는 계율을 굳게 지키라[遮戒] 하기도 하고, 또 어떤 경우에는 계율을 파하는 것을 허락하기도[開戒] 한다. 언어문자로 한번 정해진 계율은 좁은 테두리 안에 갇히고 또 굳은 화석이 되어버린다. 삶은 살아 움직인다. 그러기 때문에 살아 움직이는 시대와 사회 속에서 벌어지는 언어 밖의 다양한 케이스를 계율로써 다 적용할 수는 없다.
선지식은 수정할 것은 수정하고 보완 할 것은 보완하며 때로는 범위를 좀 더 넓혀서 내면으로는 계율을 더 잘 지키기 위한 것이지만, 외형으로는 일단 계율을 파하기도 한다. 왜냐하면 큰 법익(法益)을 위해서는 작은 법익을 버릴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불계(佛戒)는 부처님만이 개폐가 가능하다. 그러기 때문에 청규가 필요하며, 그 시대 그 사회의 생활 규범인 청규는 안목이 열린 선지식이 제정하여 공포할 수밖에 없다. 청규(淸規)는 불계를 어떻게 더 잘 살리느냐에 중점을 두고 제정하기 때문에 설사 불계와 청규는 서로 어긋난 부분이 있다 하더라도 근본에 있어서는 계율을 파하였다고 볼 수가 없다.
〈제2과〉
旣已出家하야 參陪淸衆인댄 常念柔和善順이언정 不得我慢貢高니라.
大者는 爲兄하고 小者는 爲弟니 有諍者어던 兩說로 和合하야 但以慈心相向이언정 不得惡語傷人이어다.
이미 출가하여 청정한 대중을 모시고 지내는 바에는 아만심에서 제 잘난 체 하지는 말라.
먼저 계를 받은 이는 형이요, 나중에 계를 받은 이는 동생이라. 만일에 말다툼을 하는 이가 있으면 양설로 화합시켜서 오로지 자비심에서 서로 어울리게 할 것이며 심한 말을 써서 사람의 마음을 상하게 하지는 말라.
기이출가(旣已出家)
출가(出家)에는 의복 출가, 몸 출가, 마음 출가 등 세 가지가 있다. 출가자의 옷차림을 하였어도 출가가 아니고, 세속을 벗어나 산에 살고 모양다리를 갖추어 삭발을 하였다고 하여도 아직은 출가가 아니다. 오직 집착의 집, 삼계(三界)에서 벗어나 마음에 걸림이 없다면 이것을 일러 참다운 출가라고 말한다.
부처님이 제자들에게 출가를 하도록 권한 것은 부처님 이전에도 인도 사회에서는 수행자들이 자기 집을 떠나서 진리탐구의 생활을 했기 때문이었다. 예나 지금이나 마찬가지로 수도에 전념하기 위해서는 역시 출가의 방법을 택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4> 계초심학인문(誡初心學人文)
자기 내세우지 말고 화합 주력해야
재물-음욕은 출가수행자에게 ‘독약’
화합(和合)
다도(茶道)의 네가지 정신이 화경청적(和敬淸寂)이며 다선일미(茶禪一味)라고 하여 다도(茶道)와 선(禪)이 만나는 자리가 바로 화경청적(和敬淸寂). 화기애애하면서 그 가운데에 공경스런 마음을 잃지 않는다. 간혹 한쪽으로 치우쳐서 친해지고 부드러워지면 기본 예의까지 잊으나, 화합은 그런 게 아니다. 근본바탕은 청정한 마음, 고요한 마음이다. 그래서 도인은 청정 적적한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영아행(쵥兒行)을 한다. 어린애와 같이 부드러우면서 화기가 넘치고, 착하기는 말을 할 수 없으며 순하디 순하다[柔和善順].
생명은 물 흐름처럼 흐르는 것. 모난 돌처럼 툭 튀기만 하고 뻣뻣해지면 독불장군 소리를 듣는다. 이만큼 화합이 최우선한 것이 불교이다. 우리 역사에서 거목(巨木)이신 원효 스님. 원효 스님이 살아생전에 하신 일을 단 두 글자로 표현한다면 화쟁(和諍)인데 매우 시사하는 바가 크다. 벼가 익어지면 고개를 숙이듯 큰스님네들도 공부를 할 때에는 대쪽같이 뻣뻣하다가도 더 익어지면 유화선순(柔和善順)으로 돌아오는 게 보통이다.
스님을 가리키는 중 승(僧)은 범어의 승가(samgha 僧伽)를 줄인 말. 번역하면 중(衆)이고 뜻은 화합(和合)을 가리킨다. 율장에서는 비구계를 받은 네 사람 혹은 세 사람 이상이 화합하면서 모여 산다는 뜻에서 승가란 말을 쓴다.
〈제3과〉
若也欺凌同伴하야 論說是非인댄 如此出家는 全無利益이니라. 財色之禍는 甚於毒蛇하니 省己知非하야 常須遠離어다.
만일 도반을 업신여겨서 시비를 논설한다면, 이와 같은 출가는 전혀 이익이 없느니라. 재물과 여색의 화는 독사보다 심하니, 제 몸을 살펴서 그릇된 점을 알아, 항상 멀리 여의어야 하느니라.
재색지화(財色之禍)
“여색 같은 유혹이 이 세상에 한가지여서 다행이지 만일 두 가지였더라면 도를 닦을 마음이 나지 않았을 것이다.”라고 부처님도 술회하셨다.
재물과 여색은 물론이고 지은 복(福)까지도 집착하면 공부인에게는 윤회의 근본이 되며 과거 현재 미래 삼생(三生)의 원수라고 효봉(曉峰) 노사는 표현하셨다. 소유에 끄달리기 때문이다.
우리에게는 대개 행복의 비밀이 소유(所有)에서 오는 듯이 보이지만 최대최악의 불행 역시 소유에서 온다는 사실을 종종 잊는데, 중생 마음인 여래장(如來藏)의 다스리기 어려운 점이다. 여래장(如來藏)은 진여(眞如)가 번뇌 속에 묻혀 있을 때이고 번뇌에서 벗어나면 법신(法身)이다.
필요하지만 소유에 매이는 건 금물. 공부인에게는 특히 독약이다.
대원사 공양간 벽에 붙은 글귀를 보니 정말 밥에 대한 고마움으로 가득 차 있다. 소유(所有)하면서도 이만한 고마움이라면!
특히 끝 구절에, 그게 사람이 아닌 거여, 하는 소박한 말씨가 마음에 와 닿는다.
〈밥〉
천천히 씹어서 / 공손히 먹어라 / 봄에서 한여름 겨울까지 /
그 여러날 비바람 땡볕으로 / 익어온 쌀 곡식 채소 아닌가 /
그렇게 허겁지겁 삼켜버리면 / 어느 틈에 고마운 마음이 들겠느냐 /
사람이 고마움을 모르면 / 그게 사람이 아닌 거여 /
<5> 계초심학인문(誡初心學人文)
남이 감추려 하는 것 알려하지 마라
세수-양치질-세탁에도 道가 있다
〈제4과〉
無緣事則不得入他房院하며 當屛處하야 不得强知他事하며 非六日이어든 不得洗浣內衣하며 臨 漱하야 不得高聲涕唾하며, 行益次에 不得 突越序하며
반연(攀緣)이 있는 일이 아니면 다른 이의 방이나 요사채에 들어가지 말며, 남이 가려둔 곳에서는 구태여 알려고 애쓰지 말며, 6일이 아니면 내의를 세탁하지 말며, 세수하고 양치질을 할 때에는 큰 소리로 코풀거나 침 뱉지 말며, 대중 공양을 받을 때에는 당돌하게 차례를 어기지 말며,
행주좌와(行住坐臥)
옛사람의 공부인 예법은 물 하나라도 쏟아 부을 때에, 한번에 왈칵 붓지 않고 세 번 나누어서 따복따복 붓도록 가르쳤다. 얼굴을 씻고 이를 닦을 때에도 한편으로 마음을 씻고 마음을 닦는 것이며 이렇게 행주좌와(行住坐臥)의 쉬운 가르침 속에도 담겨있는 뜻은 깊다.
당병처(當屛處) 부득강지타사(不得强知他事)
첫째 풀이는, 지나가다가 실내에 햇볕 가리개나 발이 쳐져서 가려진 곳 등은 굳이 들추어서 들여다보지 않는다.
둘째 풀이는, 불미스런 일은 특히 그렇고 남이 감추고 싶어하면 더 이상 캐묻지 않는다. 또 다른 사람이 알지 못하도록 중요한 일을 의논하는데 억지로 가서 듣고 알려고도 하지 않는다. 그러기 때문에 공부인은 다른 사람의 일에 대하여 좋든지 궂든지 신경 쓰지 않는다. 이런 사정을 모르고 출가인의 과거 인연을 물어, 무슨 사연이 있어 출가를 했으며, 속가에서는 무슨 직장을 가졌는가 등등을 캐묻는 것은 큰 실례이다.
비육일(非六日)
지금은 거의 사장(死藏)된 언어. 옛날 세탁물은 이, 벼룩, 빈대 등 물 것이 많아 솥에 삶아야 했고 그러자니 본의 아니게 살생을 많이 하게 되었다. 삶을 때에, 발보리심(發菩提心)하라, 하고 발원하지만 그렇다고 살생을 면한 것도 아니었다. 기왕이면 죽는 날이 곤충류의 길일(吉日)이면 좋았다. 길일은 3일, 13일, 23일과 6일, 16일, 26일인데 후자 6일자만을 택하였다. 제석천에 의해 특별히 곤충류가 제도되는 날이기 때문에 이날 죽으면 좋은 데로 간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당시 송광사 수백 명 대중의 마음 씀씀이가 이렇게 자상했던 것이다. 요근래에 범어사에서는 옛 가풍을 되살린다는 취지인지, 동산(東山) 노사 당시부터 대중공사에 의해 6일, 16일, 26일에 삭발 목욕 세탁을 해오고 있다.
다른 근거로 육재일(六齋日)이 있다. 사천왕(四天王) 권속이 제석천의 명을 받아 사천하(四天下)를 순시, 선악을 낱낱이 보고하는 여섯 날이 육재일인데 바로 6일이라고 한다. 8일은 동천왕, 14일은 남천왕, 15일은 서천왕, 23일은 북천왕이 직접 순시하고 29일과 30일은 권속을 보내 순시한다. 이 6일을 두려워하여 흉일이라고 하며, 또는 다른 뜻으로 악귀가 짬을 보는 날이라고도 한다. 비시불식(非時不食) 계를 지켜 오후에는 음식을 먹지 않으며 새 옷으로 갈아입고 세탁을 하는 등 여법(如法)하게 지내야 복덕을 갖춘다고 한다.
지금 다섯 총림 선원에서는 결제 대중이 14일과 그믐 전날에 삭발을 하고 목욕과 세탁도 한다. 보살계 경전 《범망경(梵網經)》에서 보름과 그믐날에 포살(布薩)법회를 가지도록 정하고 있고 그 전날에 준비하는 과정에서 삭발 목욕을 하기 때문이다.
옛 백장 청규 가풍을 말하는 문헌에서는 목욕하는 날이, 곡우(穀雨)에서 하지(夏至)까지는 5일에 한번, 하지에서 처서(處暑)까지는 매일, 처서에서 추분(秋分)까지는 5일에 한번, 추분에서 곡우까지는 반달에 한번 하였다고 한다. 가까운 일본의 경우는 정규 삭발 목욕일이 4일, 9일로 한 달에 여섯 번으로 스님네의 머리가 조금이라도 길어질 새가 없는데 출가위상을 말하는 방포원정(方袍圓頂)이란 말과 같이 네모난 가사에 둥근 머리 모습이다.
<6> 계초심학인문(誡初心學人文)
하심과 묵언은 모든 수행자의 금언
걸음은 먹이 노리는 범처럼 신중히
〈제5과〉
經行次에 不得開襟掉臂하며 言談次에 不得高聲戱笑하며 非要事어던 不得出語門外하며 有病人이어던 須慈心守護하며 見賓客이어든 須欣然迎接하며 逢尊長이어든 須肅恭廻避하며
걸을 때에는 옷깃을 벌리고 팔을 흔들지 말며, 말을 할 때에는 큰소리로 떠들거나 희롱하여 웃지 말며, 긴요한 일이 아니면 산문 밖으로 나가지 말며, 환자가 있으면 자비스런 마음으로 보살피며, 객을 대하게 되면 흔연히 맞아들이며, 어른을 만나면 공손하게 길을 피해야 하느니라.
경행(經行)
경행은 행도(行道)라고도 하는데 범어로 Vih<&25156>ra 비하라(毘訶羅)이다. 몸을 풀기 위한 운동으로, 공부인이 좌선 중에 일어나서 일정한 구역을 지나는 것을 말한다. 망상이 떠오르거나 졸음이 올 때 다리가 아플 때 경행을 한다. 특별한 예로 잠이 많았던 춘성(春城) 스님의 경우는 밤에 잠을 쫓기 위해 경행으로만 정진하며 지냈다고 한다.
큰방에서 대중이 함께 하는 것은 50분 좌선 정진에 10분간 포행(布行)인데 포행 방향은 탑돌이 방향과는 달리 시계 바늘이 움직이는 반대 방향이다.
걸음걸이는 임제종 가풍은 무사와 같이 빠른 발걸음이고 조동종 가풍은 반보 간격으로 조심스럽게 떼어놓는 느린 발걸음이다. 또 앉는 방식에서는 벽을 바라보고 앉는 면벽(面壁)은 조동종 가풍이고 서로 마주 보고 앉는 대좌(對坐)는 임제종 가풍이다. 이렇게 보면 현재 조계종은 종헌종법에서 임제종 가풍을 종지로 삼고 있다고 밝혔으나 앉는 자세만은 조동종을 따르고 있는 편이다.
고인네는 용행호보(龍行虎步)를 승행(僧行)으로 지키라고 당부하였다. 뒤를 돌아 볼 때에는 얼굴과 목만을 돌리지 않는다. 몸 전체를 돌려서 돌아본다. 걸어다닐 때에는 항상 공부인의 자세로 호랑이가 먹이를 노리고 걷듯이 조심스럽게 해야 하는데 수도인은 한시라도 긴장을 풀어서는 안되기 때문이다.
언담(言談)
절 행자실 벽이나 수련장 양벽에는 이런 두 글귀가 대개 붙어 있다. 하심(下心)과 묵언(默言). 출가자의 초심(初心)은 이 두 말이면 족하다. 마음은 아주 밑바닥까지 낮추며, 말은 아껴 쓰되 성스러운 침묵을 동반하여 필요한 말만을 한다.
빈객(賓客)
빈객은 객승과 참배객 내빈.
옛날에는 객승의 걸망을 뺏다시피 하여 짐을 받아들고 방안으로 모셨다. 그리고는, 인사 올립니다, 하고 큰절을 올렸다. 다음에, 공양은 드셨습니까? 하고 묻고는 공양상을 차려서 올렸다. 삼박사일(三泊四日) 머물고 떠날 때까지 조석 문신(問訊)을 다녔을 만큼 빈객 대접은 지극정성이었다.
객이나 내빈은 절 집안에서 삼박사일 이상 머문 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부득이 더 머물고자 한다면 일단 절 밖으로 나갔다가 들어오는 방편을 썼다. 일본 절, 중국 절의 경우도 마찬가지.
가람구조로 보면 빈객을 모시는 곳은 대웅전 좌우 측근에 객당(客堂)이라고 있었다. 대웅전 참배 후에 바로 찾아들기 쉽도록 한 것이다.
이런 객당은 송광사에 6·25 전까지만 해도 대웅전 바로 앞에 있었다고 한다. 종무소를 겸한 용화당이 객당 역할을 한 것인데 지금은 해청당(海淸堂) 뒷전으로 물러나가 멀리 떨어져 있다.
<7> 계초심학인문(誡初心學人文)
만족할 줄 아는 사람이 큰 부자
가장 친해야 할 이는 선지식
〈제6과〉
辦道具하되 須儉約知足하며 齋食時에 飮쾽을 不得作聲하며 執放에 要須安詳하야 不得擧顔顧視하며 不得欣厭精퀎하고 須默無言設하며 須防護雜念하며
도구를 마련하되 검약하여 만족할 줄 알며, 공양을 할 때에는 마시고 씹을 적에 소리내지 말며, 집고 놓을 적에 반드시 조심히 하여 얼굴을 들고 돌아보지 말며, 맛있고 맛없는 음식을 좋아하거나 싫어하지 말며, 묵묵히 하여 말하지 말며, 잡념이 일어나지 않게 막으며,
판도구(辦道具)
도구는 부처님이 제정하신 비구의 육물(六物)로, 비구의 몸에서 항상 떠나지 않는 여섯 가지 물건을 가리킨다.
① 승가리 : 9조에서 25조까지의 대의(大衣) 가사. 마을이나 궁중에 들어갈 때에 입는다.
② 울다라승 : 예불, 독경, 포살 때에 입는 중의(中衣) 7조 가사.
③ 안타회 : 울력을 할 때나 잘 때에 입는 하의(下衣) 5조 가사.
④ 철(鐵)다라 : 쇠로 만든 발우 그릇. 응량기.
⑤ 니사단 : 앉을 때에 깔고 앉는 것. 작은 가사 모양으로 생겼는데 좌선이나 재를 모실 때에 쓴다.
⑥ 발리사리벌라 : 물 속의 벌레를 걸러버리고 물을 마시기 위한 주머니로 녹수낭(쫶水囊).
대개 선종에서는 대표적인 것으로 삼의일발(三衣一鉢)을 꼽는다. 검소한 수도생활에서는 승복으로 옷 세 벌에 발우 한 벌이면 족하다는 뜻이다.
검약지족(儉約知足)
만족할 줄 아는 것이 큰 부자요
건강이야말로 큰 재산.
가장 친해야 할 이는 선지식이고
열반은 무엇보다 큰 기쁨.
만족, 건강, 선지식, 열반 이 네가지는 부처님의 말씀으로, 만족할 줄 알고 검소한 데에서 마음의 큰 부자가 된다는 가르침이다.
다음은 식당 작법으로 발우 습의이다. 여기에는 삼대원칙이 있다.
습관에 따라 조금씩 발우 습의가 다른 경우가 있으나 다음 세 가지 원칙에 어긋나지 않으면 다 같이 수용하도록 하고 있다.
첫째는, 청정(淸淨)이다. 천수(千手) 물이 들어올 때나 나갈 때에 청정한 그대로여야 한다. 백 명이 공양을 들고 발우를 씻었어도 천수물은 청정해야 한다. 또 음식도 그와 같이 청정해야 한다.
둘째는, 적정(寂靜)이다. 발우를 펴는 데서부터 공양하고 발우를 싸는 데까지 조용한 분위기라야 한다.
셋째는, 위의(威儀)이다. 앉는 자세는 허리를 바로 펴서 앉으며, 시선은 발우와 그 주위만을 본다.
재식(齋食)
재식(齋食)은 스님네의 점심 대중공양을 가리킨다. 오전 9시부터 11시 사이를 사시(巳時)라고 하는데 이 사시에 대중이 점심공양을 한다. 계율에 따르면, 사시가 지난 시간에 불자는 물 이외 어느 것도 먹지 않아야 하는 것이다.
재는 오포사타(烏浦沙陀, 빠리어upavasatha, 범어uposatha).보통 재일(齋日), 증장(增長)으로 번역한다. 다달이 육재일(8, 14, 15, 23, 29, 30)이 있는데 이날 특히 선근(善根)이 증장(增長)한다고 하여 오후불식(午後不食)을 지킨다. 육재일은 생활환경이 변화하여 오후불식 등을 매일 지키기 어려운 불자를 위한 방편법이다.
<8> 계초심학인문(誡初心學人文)
음식 먹는 행위도 수행의 연장
극단적인 욕망-고행 모두 피해야
〈제7과〉
須知受食이 但療形枯하야 爲成道業하며 須念般若心經하되 觀三輪淸淨하야 不違道用이어다.
밥을 받는 것이 다만 몸이 마름을 치료하여, 도업을 이루기 위함인 줄을 알아야 하며, 반야심경을 염하되, 삼륜이 청정함을 관하여 도용을 어기지 말지니라.
수지수식 단료형고(須知受食 但療形枯)
밥을 받아먹는 것이 큰 공부의 하나이다. 우선 몸이 마르는 것, 몸이 여위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서이다. 한편으로는 몸은 마음을 담는 그릇이다. 그러기 때문에 몸과 마음은 둘이 아니고 하나이다. 바른 수행이라면 끝없는 욕망에 내맡겨서도 안되겠지만 지나친 고행을 일삼아서도 안된다.
부처님이 피골이 상접할 정도의 고행을 하실 때였다. 육체를 혹독하게 다루어서 죽음 직전에 와 쓰러졌다. 당시 주변에는 이런 고행자가 많았다. 불로 뜨겁게 해서 오래 견디기, 가시덤불 속에 들어가 움직이지 않고 오래 견디기, 물만 먹고 단식하며 오래 견디기, 잠을 안자고 오래 견디기, 말을 안하고 오래 견디기 등으로 초인적인 경지를 맛보고 이를 통해서 해탈하고자 노력하였던 고행자는 부지기수였다. 이때 부처님의 어머니가 꿈에 나타나서 일러준다. 남방의 장경에 들어있는 내용이다.
“불쌍한 내 아들아, 어쩌자고 그 고행을 하느냐? 몸은 마음을 담는 그릇이다. 그릇이 깨어지면 무엇으로 담겠느냐? 고행을 멈추어라, 내 아들아!”
그리하여, 고행을 멈추고 니련선하로 나아가 목욕을 하고 그때 수자타가 올린 유미죽 공양을 받고 정신을 차린다. 이 이후 부처님은 건너편 보리수 아래서 칠일 낮 칠일 밤 선정 삼매에 들어 깨달음을 성취한다.
위성도업(爲成道業)
이 음식은 어디서 왔는고(計功多少 量彼來處)
내 덕행으로 받기 부끄럽네(忖己德行 全缺應供)
마음의 온갖 욕심 버리고(防心離過 貪等爲宗)
몸을 지탱하는 약으로 알아(正思良藥 爲療形枯)
도업을 이루고자 이 음식을 받습니다(爲成道業 應受此食)
공양 전후에 외우는 식당작법(食堂作法)으로 《소심경(小心經)》이 있는데, 이 가운데에 아주 중요한 내용이 ‘오관게(五觀偈)’이다.
《석문의범(釋門儀範)》에 따르면, 옛날 사용했던 《반야심경(般若心經)》 식당작법은 마하반야바라밀다심경을 포함한, 오관게 등 공양 중에 읊는 염불 전체이다. 보조 스님 당시 사용했던 식당작법이 어떤 내용이었는가는 확실치 않지만 분명한 사실 하나는 280자로 된 〈마하반야바라밀다심경 관자재보살 행심반야바라밀다시 … 〉하고, 이것만을 염송한 것은 아니었다.
관삼륜청정(觀三輪淸淨)
삼륜은 첫째 보시하는 사람, 다음이 보시를 받는 사람, 그 다음이 보시를 하는 물건을 말한다. 청정은 아무 욕심이 없어 맑고 깨끗하다는 뜻.
삼륜청정은 보시(布施) 바라밀이고 보시 바라밀은 삼륜청정이다. 주어도 준 바가 없고 받아도 받은 바가 없다. 이래서 마음속의 어두운 욕심 장벽을 허물어뜨리고 광명에 가득 찬 정각을 드러낸 것이다.
득지본유 실지본무(得之本有 失之本無)란 말은 벽암록 원오(圓悟) 스님의 말씀이다. 얻었다 해도 본래 있었던 것, 잃었다 해도 본래 없었던 것, 하는 공(空)의 정신이다. 공(空)은 실체가 없다는 뜻이다. 《금강경》에서는 공의 비유로 여몽환포영(如夢幻泡影) 여로역여전(如露亦如電) 하고 다섯 가지를 든다. 꿈으로 여기고 환상, 영상과 같이 본다. 아침 이슬과 같고 인연을 만난 번갯불이 순간적으로 스치는 것과 같이 본다. 여기에는 집착을 하려고 해도 집착을 할 대상이 없다. 실체가 아니기 때문이다. 출가자는 평생 시주 은혜를 입기 마련이지만, 그렇다고 마음의 부담이 되어서는 안된다. 다만, 더욱 도용(道用)을 위해 마음을 쓰리라, 하고 정진하면 되는 것이다.
<9> 계초심학인문(誡初心學人文)
조석으로 근행하되 게으름 피우지 말며
대중이 행하는 차례를 어지럽히지 말라
〈제8과〉
赴焚修하되 須早暮勤行하고 自責懈怠하며 知衆行次에 不得雜亂하며 讚唄祝願하되 須誦文觀義언정 不得但隋音聲하며 不得韻曲不調하며 瞻敬尊顔하되 不得攀緣異境이어다.
향 사르고 예불에 나아가되 조석으로 근행하여 스스로 게으름을 꾸짖으며, 대중이 행하는 차례를 알아서 어지럽히지 말며, 범패하고 축원할 때에는 글을 외우면서 뜻을 관할지언정, 다만 음성만 따르지 말고, 곡조를 고르지 않게 하지 말며, 성현을 공손히 우러러 뵙되 다른 경계에 반연하지 말지니라.
수조모근행(須早暮勤行)
새벽 3시 예불 올리는 일 등이 아침 일과, 조과(早課)이다. 절에서는 옛부터 불전(佛前) 신심을 제일 신심으로 쳐서 불전과 멀어진 이는 그만큼 신심이 덜한 이로 간주를 하였다. 108배 절하기와 새벽 정진, 독경, 기도 올리는 일은 초심자의 기본이다.
노스님네는 낮이나 저녁에도 예불 시간이 되면 객이 있든 없든 상관 않고 예불 종소리에 맞춰서 법당으로 향하였다. 구산(九山) 어르신 스님은 평소에, “숟가락 잡을 심(힘) 있지? 제 발로 해우소 다닐 심(힘) 있지? 그럼, 예불 울력 나와!” 하셨다. 이렇게 중환자가 아니면 예불, 울력, 큰 방 공양에 철저한 것이 송광사 노스님의 옛가풍이다.
자책해태(自責懈怠)
게으름은 망상 번뇌를 자초한다. 절에 처음 입산한 이가 새벽부터 밤늦게까지 한시도 쉴 새가 없이 동분서주하도록 한 것은 다 까닭이 있다. 밥하고 법당 청소하고 변소 청소하고 노스님네 방 청소하고 아궁이에 불을 때고 밭에 가서 반찬거리를 장만하다 보면 허리를 펼새가 없이 하루해가 다 지나간다. 여섯 달 동안 행자생활은 세속의 물을 빼고 출가의 물을 들이기 위해서 꼭 필요한 기간이다. 만일 한가해진 시간이 있으면 망상번뇌 때문에 괴로움을 느끼게 될 것이다.
그래서 행자는 불교학 같은 학문을 통해 교리를 익히기보다는 마소와 같이 힘든 일을 하는 것을 종으로 삼는다. 이 가운데에 스스로 터득하는 출가 정신이 있고 이 공부가 뒷날 발심에서 부처님처럼 정각을 증득하기까지의 알찬 밑거름이 되는 것이다.
지중행차(知衆行次)
법당에 가서 예불을 드릴 때와 나올 때 등의 장면이기 때문에 대중이 움직이는 순서를 잘 알아서 적절히 처신해야 한다. 가까운 일본과 중국은 법당 출입문이 하나로 통일이 되어 있다. 대개는 중앙문 출입이다. 이래서 웃어르신부터 서열대로 따라 나오기 마련인데 우리네는 사정이 사뭇 달라 그렇게 되기가 어렵다. 동서남북 사통팔달 문마다 다 출입이 자재하다. 해인사 통도사를 비롯해서 몇몇 가풍이 있는 사찰은 그래도 어르신 중심으로 줄을 잘 서는 편이다.
찬패축원(讚唄祝願)
찬패는 범패라고도 하는데 부처님의 공덕을 마음속으로 깊이 믿어 시가(詩歌)로써 찬탄한다는 뜻이다. 축원은 발원문, 생일 축원, 망인 천도 발원 등이 있는데 그런 것도 축원에 속한다.
송문관의(須誦文觀義)
글을 소리 내어 읽고 거기에 따른 의미를 세밀하게 관찰한다는 뜻이다. 염불을 하는 이에게는 다른 방법이 없고 오직 정성 하나가 전제된다. 소리의 좋고 나쁨이 없고 의식의 능숙하고 서투름이 없다. 대중과 서로 조화를 이루어서 정성스럽게 하면 된다. 옛가풍에서 보면 객은 사흘을 입 속으로만 염불을 하라고 하였다. 왜냐하면 절마다 음곡이 달라서 자칫 불화음을 낼 수가 있기 때문이다.
첨경존안(瞻敬尊顔) 부득반연이경(不得攀緣異境)
불보살님의 성상을 우러러 바라보면서, 실제 생존하신 불보살님 전에 예불을 올리는 것처럼 정성을 다하되, 조금도 딴 생각을 갖지 말라는 뜻이다. 딴 생각이란, 머리 속에 세속의 딴 일을 생각한다거나 눈길을 여기저기 주어 정신 집중이 잘 안 된 경우이다.
<10> 계초심학인문(誡初心學人文)
자신의 업장이 산과 같은 줄 알아
마음으로 뉘우치고 몸으로 참회하라
〈제9과〉
須知自身罪障이 猶如山海하고 須知理慘事慘으로 可以消除하며 深觀能禮所 皆從眞性緣起하며 深信感應이 不虛하야 影響相從하라
자신의 죄 업장이 마치 산과 바다와 같은 줄을 알아서, 마음으로 뉘우치고 몸으로 참회하여야 가히 소멸할 수 있는 줄을 알아야 하며, 절을 올리는 이와 절을 받는 이가 모두 참된 성품으로 인연하여 일어난 줄을 깊이 관하며, 감응함이 헛되지 않아 그림자와 메아리가 서로 따르는 줄을 깊이 믿을지니라.
수지자신죄장(須知自身罪障) 유여산해(猶如山海)
자기의 죄와 허물이 산과 바다만큼 많은 줄을 알아야 비로소 공부가 된다고 하였다. 뿐만 아니라, 정견(正見)을 가진 사람의 생각은 밥을 먹고 살아가는 일도 죄와 허물이라고 하는데 어떤 사람은, 남을 해롭게 한 일도 없고 도적질을 한 것도 아닌 데 이게 무슨 죄와 허물이라고 하는가? 하고 물을 것이다. 마음 공부에 관심이 없는 사람, 눈앞의 욕심덩이로 꽉 채워져 있는 사람은 무슨 좋은 말이 귓속에 들어갈 수가 없다. 그렇다, 죄와 허물이 깊이 생각될수록 공부도 깊어진다. 왜냐하면 겸손한 초발심자에게는 천하가 감사해야 할 은혜의 대상으로 다가오기 때문이다.
이런 까닭에, 남을 위해 한번 생각하는 것이 내 자신을 위해서 열 번 생각하는 것 보다 참으로 값진 시간이다.
수지이참사참(須知理懺事懺)
신 구 의 삼업 참회 중에서 의(意) 즉 이치로 참회하는 것을 이참(理懺)이라고 하고 신(身)과 구(口)로 참회하는 것을 사참(事懺)이라고 한다.
이참은 이와 같다. 죄란 본래 무자성(無自性)이라는 사실과, 자성 청정심 역시 어떤 번뇌에 물들지 않는다는 사실을 선정삼매 속에서 관찰하여 훨훨 털어 버리는 것이다.
사참은 예배, 절 등 몸으로 하는 것과 염불, 경을 읽는 것 등 입으로 하는 것이 있다.
참회 방법으로는, 일단 법사나 큰스님께 찾아 뵙고 진실하게 죄와 허물을 말씀 드려서 스님의 가르침에 따르면 된다. 가령 아주 큰 죄나 허물은 불보살님 전에 기도를 올려, 자신의 정수리에 불보살님이 손을 뻗쳐서 수기(受記)를 하는 것으로 끝난다. 그 외 작은 죄나 허물은 스님의 지시대로 하면 끝난다. 또 재물로써 배상해야 할 일이면 능력에 따라 배상하고 진심으로 사죄하면 된다.
대중 참회법은, 대중 앞에 나서서 이렇게 고한다.
“저는 이러이러한 허물을 지었기에 대중 스님께 깊이 참회합니다. 앞으로는 다시 이런 허물을 짓지 않도록 하겠습니다.”
반드시 스스로 죄를 발로(發露)하고 나서 다시는 이런 죄를 짓지 않겠다는 약속을 하는 두 가지 조건이 따른다.
심관능례소례(深觀能禮所禮) 개종진성연기(皆從眞性緣起)
능례는 예를 올리는 주체자 중생이고 소례는 예를 받는 객체자 부처님이다. 무엇을 깊이 관찰하는가. 예를 올리는 중생과 예배를 받는 부처님이 다 진여법성(眞如法性) 하나에서 연기한 것인 줄을 관찰한다는 뜻인데, 부처와 중생은 불이(不二), 하나는 이룬 부처이고 다른 하나는 아직 이루지 않은 부처일 뿐 진여법성에서는 차이는 없다는 생각이다.
연기(緣起)는 인연생기(因緣生起)의 준말. 인연생기는 이 세상의 모든 것은 그냥 혼자 독불장군으로 있는 것이 아니고 반드시 서로서로 영향을 주고 영향을 받으며 이렇게 하여 인연하여 생긴다는 말이다.
심신감응불허(深信感應不虛) 영향상종(影響相從)
감(感)은 나의 정성이 부처님께 전달된다는 말이고 응(應)은 거기에서 반드시 반응이, 불보살님의 가피력(加被力)이 나타난다는 말이다. 이것은 마치 골짜기에 소리가 울려 퍼지면 메아리가 되어 되돌아오고, 물체가 있으면 반드시 그림자가 생기는 것과 똑같은 이치이다.
<11> 계초심학인문(誡初心學人文)
승부를 다투어 서로 논란함을 삼가며
머리를 맞대고 앉아 잡담함을 삼가라
〈제10과〉
居衆寮하되 須相讓不爭하며 須互相扶護하며 愼諍論勝負하며 愼聚頭閒話하며 愼誤着他鞋하며 愼坐臥越次하며 對客言談에 不得揚於家醜하고 但讚院門佛事언정 不得詣庫房하야 見聞雜事하고 自生疑惑이어다
대중방에 머물 때에는 서로 양보하여 다투지 말며, 서로 도와주며, 승부를 다투어 논란함을 삼가하며, 머리를 맞대고 앉아서 잡담함을 삼가하며, 남의 신발을 잘못 신지 않도록 삼가하며, 앉고 눕는 차례 어기는 것을 삼가하며, 객을 만나 이야기를 할 때에는 절 집안의 추함을 드러내지 말고, 다만 절 집안의 불사를 찬탄할지언정, 고방(庫房)에 나아가서 잡사를 견문하고 스스로 의혹을 내지 말지니다.
거중료(居衆寮) 수상양부쟁(須相讓不爭) 수호상부호(須互相扶護)중료(衆寮)는 큰 방, 대중방, 선방 등이다.
싸우지 말고 서로 형제처럼 돕고 친하게 지내도록 하였다.
옛사람은 이렇게 말하였다. 풍수가 아주 나쁜 땅에서도 착한 마음을 지닌 사람이 많이 모여서 지내면 복지(福地)가 되는데 이것은 선정삼매의 기운이 어리고 서려서 땅의 기(氣)가 바뀌기 때문이다.
반대로, 천하 길지(吉地)에서도 화합하지 않은 대중이 모여 지내면 나쁜 땅이 되어 삼재팔난이 끊임없이 다가온다고 하였다.
신토불이(身土不二). 몸도 땅과 다르지 않다. 아무리 나쁜 몸으로 태어 났고 못난 가문에서 자랐어도 착한 마음을 먹고 남을 위해 마음을 열고 지내는 사람이라면 32상과 80종호를 갖춘 불보살이다. 1000일 동안이면 피부가 바뀌고, 3000일 동안이면 뼈가 바뀌고, 10000일 동안이면 골수가 바뀐다는 말도 이와 같다.
신쟁론승부(愼諍論勝負)
승부의 세계에서는 반드시 승자, 패자가 있고 승자 역시 언젠가는 패자의 길을 걷기 마련이다. 승부 시비에서 벗어나려면 생각이 일어나면 일어난 대로 다 말해서는 안된다. 생각이 떠올랐어도 잘 걸러서 지금 적당한지 살펴보고 말을 해야 한다. 문화수준이 낮은 사람일수록 생각이 튀어 오르면 오른 대로 제멋대로 말하고 제멋대로 행동한다. 제 한 몸만 생각하는 어리석음을 떠나야 품위 있는 문화인이다.
신취두한화(愼聚頭閒話)
모여서 소일거리가 없이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결국 좋은 말 대신 남의 허물을 잡고 말하는 쪽으로 떨어진다. 법정 스님은 한때 이런 교훈을 말씀하셨다. 대중방에서는 토굴처럼, 토굴에서는 대중방처럼. 대중방에서 대중생활을 잘 하려면 호젓한 토굴에서처럼 조용하게 지내고, 반대로 토굴생활은 대중생활에서처럼 근면하게 지내야 진정 수도자라고.
대객언담(對客言談) 부득양어가추(不得揚於家醜)
객을 맞이해 이야기를 꺼낼 때에, 좀 부끄러운 절 일, 불미스러운 내용은 밖으로 드러내서 말하지 말라는 말이다. 왜냐하면 듣는 사람의 신심을 떨어뜨릴 수가 있기 때문이다. 착한 사람의 이야기를 나누면 선신(善神)이 가까이 다가와 귀를 기울려 듣고 나쁜 사람의 이야기를 나누면 악신(惡神)이 가까이 다가와 귀를 기울려 듣는 다는 고사가 있다. 선신이 옹호를 해도 일을 이룰까 말까 하는데 악신이 가까이 있으니 어떻게 일대사 마치기를 기약하랴.
부득예고방(不得詣庫房) 견문잡사(見聞雜事)
고방(庫房)은 원주실이나 종무소의 창고 같은 곳이다. 소임자가 아닌데 공연히 고방에 가서 잡다한 여러가지 일을 보거나 듣고 의심을 내지 말라는 말이다. 공부를 하는 사람은 사판(事判)의 살림하는 소임자 스님의 처소에 가지 않는 것이 좋다. 차라리 공부인에게는 매사가 모르는 게 약이 된다.
<12> 계초심학인문(誡初心學人文)
다른 사람의 미움을 사거나
도닦는 마음을 잃지 말지니라
〈제11과〉
非要事어든 不得遊州獵縣하야 與俗交通하야 令他憎嫉하고 失自道情이어다. 有要事出行이어든 告住持人과 及管衆者하야 令知去處하며
요긴한 일이 아니면, 이 마을에 갔다가 저 마을에 다니면서, 속인들과 더불어 교제하여, 다른 사람의 미움을 사거나, 자기의 도닦는 생각을 잃지 말지니라.만일 요긴한 일이 있어 나가게 되면, 주지 스님과 대중 소임자에 알려서 가는 곳을 알게 하며,
비요사(非要事)
산이 좋은데 왜 밖으로 나갈 것인가. 긴요한 일은 첫째, 자기의 병 치료만 만부득하게 필요한 일이고 둘째, 남을 위해서 동사섭(同事攝)을 하기 위한 일이다. 그외 사중일로는 시장 보기, 관청 행정 일 등이 있다.상제(喪齊)에는 대중이 마을 단월(檀越)의 집에 들어가 독경 염불을 하기도 하였다. 고운(孤雲) 최치원 선생의 간절한 입산시.
僧乎莫道 靑山好
山好何事 更出山
試看後日 吾 跡
一入靑山 更不還
스님들이시여, 청산이 좋다고 말씀들하지 마십시오.
산이 좋을진댄 왜 자주 산 밖으로 나오십니까.
시험삼아 저의 뒷날 자취를 보시겠습니까.
한번 청산에 들면 다시 밖으로 나오지 않는 저의 모습을.
그는 가야산 홍류동 계곡에 선 농산정(籠山亭) 부근에서 혹은 장경각(藏經閣) 아래 학사대(學士台) 나무 주위엣 말년을 보내다가 흔적이 없이 사라졌는데, 하도 학(鶴)과 같이 맑게 살다가 사라졌기 때문에 사람들은 신선(神仙)이 되었다고 믿고 있다.
여속교통(與俗交通) 영타증질(令他憎疾)
아무리 도력(道力)이 높은 분이라 할지라도 속인과 어울려서 오래 지내게 되면 대개 좋지 않은 영향을 주기 마련이다. 왜냐하면 중심심은 정도(正道)에서 벗어나 있기 때문이다. 평등심을 잃지 않기란 참으로 어려운 일이다.하물며 이제 갓 입산출가한 초심자에게는 포교의 일환이라 하더라도 무리다. 적어도 승납 10년이 지나야 남의 앞에 나설 자격이 있고 스승될 자격이 있어 상좌를 허락한 율장을 보더라도 알 수가 있다.옛 스님은 말씀하셨다.
“스님이 가장 스님답게 돋보이는 자리는 산중 절에서 정진하고 있는 모습이다.”이런 산수(山水)의 빼어난 입지 조건을 버리고 포교의 일환으로 도심지에 나서려면 그만한 원력과 수행력이 따라야 할 것이다. 자칫 하다가는 제 자신의 얼마 안 되는 수행력도 물러날 뿐만 아니라,이웃에게도 공연히 신심(信心)을 떨어뜨리게 하는 역효과가 나기 때문이다. 그래서 절에서는 “잘 해보려고 하는 게 병이다.”하는 말로써 경계한다.
고주지인(告住持人) 급관중자(及管衆者)
옛날 주지 스님은 방장(方丈)이고 조실(祖室)이었다. 요즘도 중국이나 일본에서는 주지와 방장을 같은 말로 쓰고 있다. 우리의 경우에는 해인사, 통도사, 송광사 등 오대 총림 대찰에서는 방장 스님이 어른이시고 그 외 큰절에서는 그냥 주지 스님이 어른이시다. 회주(會主)는 본래 염불회 특히 만일염불회의 주관자로서 회주 스님을 모셨으나 요즘은 그냥 작은 절의 주지 스님의 웃 어르신을 모시는 존칭으로 쓰고 있다. 산문 밖으로 출입할 경우에는 법도를 지켜서 어르신 스님께 알리도록 되어 있는데, 어린 사미는 어르신 스님의 동행이 있어야 하고 그렇지 않을 경우에는 적어도 두세 사람이 어울려 다니도록 되어 있다. 초심자이기 때문에 참으로 중요한 시기를 맞아 수도에만 전념해야 하고 그렇지 못할 경우 크게 후회하는 일이 생기기 때문이다. 간혹 입산자가 하산(下山)을 하는 일도 이런 법도를 어긴 데서 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