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훈 마차도 이종격투기 (舊.대구이종격투기 칠곡지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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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유게시판 스크랩 (펌) 그레이시 주짓수와 UFC의 탄생
스피럴 가드 추천 0 조회 50 11.02.24 11:13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엘리오 그레이시와 그레이시 주짓수  
 

 

 

 

 

앞서 중세의 일본 주짓수(유술 柔術)가 유도를 거쳐 마에다 미츠요에 의해 브라질에 전해진 경로에 대해 설명해 보았습니다. 이번 칼럼에서는 그렇게 전수된 주짓수란 무술이 어떻게 브라질인들에 의해 개발되어 발레투도(Vale Tudo)와 UFC(Ultimate Fighting Chanmpionship)의 탄생으로 이어지게 되는가에 대해 이야기해 보겠습니다.

 

엘리오 그레이시와 그레이시 주짓수

 

현대 이종격투에서 그레이시 가문과 브라질리안 주짓수가 얼마나 비중을 차지하고 있는가는 새삼스럽게 강조할 필요가 없을 정도다. 우선 이종격투경기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 UFC가 그레이시 주짓수의 류조(流祖)인 엘리오 그레이시의 장남, 호리온 그레이시에 의해 만들어진 대회다. 또한 UFC와 더불어 종합격투의 양대 산맥이자 메이저 이종격투대회라 할 수 있는 PRIDE FC가 힉슨 그레이시 vs 일본 프로레슬러의 격투 이벤트로 인해 탄생되었다. 그리고 아직까지 PRIDE FC는 일본인VS그레이시 일족의 대결구도를 유지하며 흥행을 꾀하고 있다. 게다가 전세계의 많은 이종격투대회의 출전 선수들을 보면 그레이시 가문과 직간접적으로 영향을 받은 경우가 대부분이라 이들이 없다면 대회가 성립되지 못할 정도다. 그뿐만이 아니라 전세계 모든 이종격투대회에 출전하는 선수 중 80퍼센트 이상은 브라질리안 주짓수를 필수적으로 연습하고 시합에 출전한다. 한마디로 그레이시 가문과 브라질리안 주짓수는 현대 이종격투의 대명사라 해도 과언이 아닌 것이다.

 

이 모든 것이 마에다 미츠요, 즉 콘데 코마가 브라질의 그레이시 가문에게 주짓수를 가르치면서 시작되었다.

 

그레이시 가문의 선조는 죠지 그레이시라는 스코틀랜드 사람이다. 그가 가난했던 고향을 등지고 멀고 먼 브라질 북부에 도착한 것은 1801년 이었다. 그 후 백년후인 1914년, 무자수행(武者修行)를 하며 세계를 떠돌던 마에다 미츠요가 죠지 그레이시의 손자인 가스타오 그레이시와 만난다. 이때 마에다 미츠요는 일본 이민자들의 브라질 정착촌을 건설하고 이민자의 복지를 위해 애쓰고 있었는데, 정치가이자 학자인 가스타오 그레이시가 마에다를 여러모로 도와주게 된다. 고마움을 느낀 마에다 미츠요는 그 답례로 주짓수를 가스타오의 장남 카를로스 그레이시에게 가르치게 된다. 5남중 장남인 카를로스는 엘리오 그레이시보다 11살 연상인데, 엘리오가 마에다 미츠요에게 직접 주짓수를 교수 받지는 않았다. 엘리오는 가족의 주치의조차 어떤 운동도 연습시키지 말라고 주의를 받을 정도로 신체적으로 왜소하고 연약했기 때문이다. 심지어 조금만 움직여도 기절할 정도였다고 한다.

 

1925년 카를로스에 의해 그레이시 주짓수 아카데미가 브라질의 수도 리오 데 자네이로에 설립되는데, 14살이던 엘리오는 허약한 몸 때문에 연습은 하지 않고 2년 동안 줄곧 매트에 앉아 형이 연습생을 가르치는 것을 보고만 있었다고 한다. 그래도 세계를 떠돌며 1000전 이상의 이종격투전을 펼쳤던 마에다 미츠요의 유술, 그 정수를 습득한 카를로스의 연습을 보면서 엘리오는 머리속으로 차근차근 주짓수의 이론과 이치를 채워나갔다.

 

일본의 옛 검술서에는 이처럼 무술에 대해 올바르게 관찰하는 것만으로도 큰 수련이 된다고 했는데, 이것이 확실히 엘리오에게 도움이 된 모양이다. 엘리오가 16살 때 한 학생이 수업을 받기 위해 왔으나 마침 카를로스가 자리를 없어서 그가 대신 학생에게 기술을 가르쳐 준다.

 

오늘날로 치면 연습 한번 안했던 사람이 주짓수 테크닉 강좌를 동영상으로만 보고 가르치는것과 비슷한데, 수련생은 크게 만족하며 앞으로는 엘리오와 연습하고 싶다고 카를로스에게 말한다. 엘리오 자신도 자신이 주짓수를 가르치는데 재능이 있음을 깨닫게 된다.

 

자신감이 생긴 엘리오는 이때부터 정식으로 주짓수 수련을 시작했다. 그는 선천적으로 약골인 탓에 유술에서 상당히 근력을 요하는 기술을 버리고, 유술의 근본적인 목적인 약한 사람이 강한 사람을 이기는 법, 즉 능유제강의 이론을 철저히 연구했다. 예를 들어 강한 상대를 끌어안듯 기술을 거는 셀프 가드포지션 같은 기술등이 역시 체격이 마르고 허약한 그의 아들 호이스에게로 이어진다.

 

그는 비록 평생에 63킬로그램을 넘어서 본적이 없는 왜소한 체격이었지만, 자신이 변형시킨 주짓수의 실전성에 강한 자신감을 가지게 되었다. 그리고 마에다 미츠요의 기술뿐 아니라 정신도 계승된듯 엘리오는 자신보다 강한 육체를 소유한 타 무술인들과 도전자에 맞서 싸워 실전에서의 강함을 증명해 나간다.

 

17살 때 최초로 발레투도(Vale Tudo-무규칙) 시합에서 복싱선수 안토니오 포르투갈과 싸워 30초만에 암록으로 승리한다. 1932년에는 일본의 주짓수 달인 나미키와 싸워 무승부로 끝났지만 일본과 브라질 국내에 그의 이름을 알리게 된 계기가 되었다. 그 후 그는 왜소한 체격으로 거구의 도전자와 연속으로 싸워 이겨나가면서 전국적으로 명성을 얻게 된다. 20년간 그는 불패의 주짓수 챔피언으로 있었는데 같은 시기에 무자수행을 위해 브라질을 방문한 최영의 관장과는 대결이 이루어지지 않은 듯하다. 최영의 관장은 브라질에서 카포에이라 달인과 실전대결을 했다고 하는데 엘리오 그레이시와 싸웠다면 세기의 대결이 되었을 터라 무척 아쉽다.

 

1951년 7월에는 기무라 마사히코와 유도인 두 명이 브라질에 초빙되었다. 기무라는 스무살에 전 일본 무제한급 유도 챔피언이 된 이래 13년간 단 한번도 패배한 적이 없다는 고수중의 고수다. 아직까지 일본 유도계에는 '기무라 이전에 기무라 없고 그 이후에도 없다.'라는 말이 전설처럼 전해져 올 정도였으니 그야말로 일본 제일의 유도인이라 할 수 있다. 기무라와 함께 대학 챔피언이었던 야마구치 6단과 가토 5단이 동행했는데 엘리오는 그들에게 도전장을 내밀었다. 당시 엘리오는 42살 체중이 고작 62킬로에 불과할 뿐이었다. 반면 엘리오와 맞서 싸운 가토는 체중이 100킬로를 넘는 거구에 엘리오보다 훨씬 젊었다. 경기는 한쪽이 기절하거나 항복할때까지 싸우는 무규칙의 발레투도 룰로 진행되었기 때문에, 가토는 유도에서의 한판인 메치기로 엘리오를 메쳐도 소용이 없었다. 10여분 동안 메치기를 시도했던 가토는 굳히기로 엘리오 그레이시를 상대하지만 오히려 엘리오의 조르기에 걸려들어 기절당하고 말았다. 가토는 기절했고 엘리오는 당시 마라카나 스타디움 12만 관중을 열광시키며 국가적인 영웅이 되었다.

 

엘리오는 가토에 이어 기무라에게도 시합을 제의했고 일본제일의 유도선수인 기무라 마사히코는 유도종가의 자존심 때문라도 그대로 떠날 수 없었다. 기무라는 100킬로그램이었고 엘리오보다 10살이 어렸다. 수만의 관중이 몰렸고 그레이시 추종자들은 기무라의 관을 운반해 왔다. 그날의 시합은 브라질 대통령과 부통령도 참관한 시합이었다. 기무라는 12분 동안 업어치기 다리후리기, 허리 후리기로 쓰러뜨린 후 누르기로 엘리오를 괴롭혔다. 그러나 엘리오는 절대로 굴복하지 않았고 기무라는 마침내 팔얽어 비틀기라는 관절기술을 엘리오의 팔에 걸었다. 절대로 궁지에 몰려도 탭(항복표시)하지 않는 전통은 이미 이때부터 엘리오에 의해 만들어진 듯 기무라의 기술에 의해 왼쪽 팔꿈치가 부러져도 그는 항복하지 않았고 결국 카를로스 그레이시가 타올을 던져 시합이 끝나고 말았다.

 

그리고 이때부터 기무라 마사히코가 엘리오 그레이시를 이긴 팔얽어 비틀기 기술을 기무라락(Lock)이라 호칭하게 되었다. 재미있는것은 이 시합후 그레이시 일족이 일본의 격투가를 상대로 불패의 기록을 보이는데, 프라이드 8에서 사쿠라바 카즈시에 의해 엘리오의 아들 호일러 그레이시가 아버지가 당했던 기무라락으로 패하고 만다. 이후 사쿠라바는 카를로스 그레이시의 손자 헨조 그레이시도 이 기술로 이기고, 호이스, 하이언등을 격파해 그레이시 헌터라는 닉네임을 얻으며 일본인들의 그레이시 일가에 대한 콤플렉스를 어느 정도 해소해 주게 된다.

 
엘리오는 이처럼 다른 무술가들에게 도전하게 된 동기를 이렇게 말했다.

 

"아마 다른 유파와의 대결을 회피하는 무술가들은 자신이 수련하는 무술의 위력을 믿지 못하기 때문일 겁니다. 최강의 무술이 뭐냐고 물으면 어떻게 답하겠습니까? 서로 다른 파간의 실전능력을 어떤 기준으로 평가할까요? 저는 그레이시 주짓수의 위력을 굳게 믿고 있었고 공개된 장소에서 다른 유파의 무술가들과 실전대결을 관중에게 보임으로써 그것을 증명했습니다."

 

자신이 수련하는 무술의 강함에 대한 확고한 믿음 그리고 그것을 세상 사람들에게 증명해 보이는 것은 이른바 모든 무술가들의 숙명이자 사명이라고 할 수 있다. 우리가 알고 있고 존경하는 무술가들은 모두 엘리오 그레이시처럼 유파의 강함을 증명해 보였던 사람들 뿐이다. 중국에서의 홍희관, 방세옥, 황비홍, 이서문등의 무술영웅과 미야모도 무사시를 비롯한 숱한 일본무술의 명인들이 그러했고, 현대에 이르러서는 교쿠신 가라데의 최영의도 이러한 신념을 실천해서 세상에 이름을 떨쳤다. 타 유파와의 시합과 실전을 멀리하는 유파조차 자랑스럽게 내세우는 달인은 모조리 실전시합을 통해 세상에 강함을 증명해 보인 사람뿐인 것이다. 엘리오는 이러한 선인들과 마찬가지로 자신의 무술의 강함에 대해 확신이 있었고 이것을 실전을 통해 증명함으로써 그레이시 주짓수를 세상에 알렸다. 이러한 그레이시 주짓수의 전통은 힉슨과 호이스 그레이시로 이어지고 마침내 UFC라는 이종격투대회의 탄생으로 이어지게 되는 것이다.

 

'세상에서 가장 강한 무술은 무엇일까? 가장 강한 사람은 누구일까?'라는 언뜻 듣기에 유치해 보이는 의문이 모든 무술시합과 명인을 배출하고 또한 무술을 발전시키는 계기가 된 것이니 가공할만한 호기심이라고 할 수 밖에 없다. 그리고 이러한 물음이 그리스, 로마의 종합격투경기를 낳았고 현대에 이르러서는 UFC, PRIDE FC, K-1 같은 이종격투경기를 탄생시킨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누구하고 누가 싸우면 어떻게 될까?'라든지'강해지고 싶은데 어떤 무술이 최강의 무술인가요?'라는 질문을 무시해서는 안 된다고 본다. 현대의 이종격투경기는 수많은 선수들의 시합을 통해 이러한 호기심을 충족시켜주는 공간이기 때문이다. 관중과 선수 모두에게 말이다. 

 

 

BJJ는 어떻게 MMA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무술이 되었을까? -上-

 

인간이 만든 맨손 격투기에는 타격과 그래플링이라는 두 가지 방식만 존재한다. 여기서 그래플링(Grappling)은 다시 두 가지로 나뉘는데, 씨름이나 레슬링처럼 넘어뜨리거나 메치는 방식과 조르고, 꺾는 서브미션(Submission)으로 구분된다. 지구상에 존재하는 수백가지의 맨손 무술은 모두 이 범위 안에 포함되는 것이다. 그리고 대부분의 격투시합도 이러한 분류에 의해 나뉘어진다. 이종격투시합을 제외하고 말이다.

 

이종격투경기(MMA)는 인간이 만들어낸 모든 방식의 격투기술을 포용하는 시합이다. 예를들어 쿵푸선수와 스모선수가 대등한 상황에서 마음껏 싸울 수 있으며, 어느 쪽도 불리하지 않다. 왜냐하면 자신이 수련해왔던 대부분의 기술을 거의 제한 없이 구사할 수 있기 때문이다. 요즘에서야 눈찌르기, 금적차기, 물어뜯기, 넘어진 상대에게 팔꿈치로 내려치기 등등의 규제가 있지만, 지금도 이종격투기가 NHB(No Holds Barred-무제한)로 불리고 있는 만큼 초창기에는 노룰(NO-Rule)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실제로 UFC초기만 해도 눈찌르기와 물어뜯기만 제외한 어떤 기술도 허용되었다. 그리고 현재의 이종격투경기의 규칙은 비효율적이고 불필요하게 위험성이 높은 부분만 제한되었을 뿐 이종격투 본래의 성격에는 변함이 없다.

 

그런데 MMA(Mixed Martial Arts), NHB(No Holds Barred),Vale Tudo 등'모든 파이팅 기술을 허용한다.'라는 뜻의 이종격투 경기에는 실제적으로 전부 네가지 방식의 기술이 통용되고 있다. 복싱, 킥복싱, 레슬링, 서브미션 그래플링이 그것이다. 서브미션 그래플링(Submission Grappling)이란 관절기와 조르기가 포함된 그래플링으로서 BJJ, 삼보, 유도, 슛파이팅(판크라스,슈토,링스의 스타일등)이 여기에 속한다.

 

이종격투 선수들은 대부분 BJJ 선수, 레슬러, 슛파이터, 킥복서 출신으로 구성되어있는데, 이종격투 특성상 모든 격투방식이 요구되기 때문에 자신에게 부족한 부분을 다른 기술을 수련함으로써 메꾸고 시합장에 나선다. 예를들어 BJJ 출신이라면 타격을, 킥복서라면 BJJ를 연습하는 식이다. 이런 훈련방식을 크로스 트레이닝(Cross Trainning)이라 하고 이렇게 타격과 그래플링 두가지 방식의 격투법을 조화롭게 구사해서 효과적으로 싸우는 선수를 올라운드 파이터(All Round Fighter)라 부른다.

 

이종격투계에서 일류라 불리는 선수는 이러한 7가지(킥복싱,복싱,BJJ,유도,레슬링,슛파이팅,삼보) 무술중에 하나 이상을 오랜 시간 수련해온 사람이며, 크로스 트레이닝을 하는 올라운드 파이터이다. 선수 비율로 보면 BJJ출신이 첫번째로 많고 그 다음이 슛파이팅, 레슬링, 킥복싱(무에타이포함), 유도, 삼보 순이며 순수 복서출신의 이종격투선수는 거의 전무하다. 또 연습하는 기술을 보면 타격계 출신이라면 거의 필수적으로 BJJ를 연습하고 레슬러나 슛파이터 출신이라도 반드시 주짓수를 연구한다. 지피지기면 백전불태(知彼知己百戰不殆)라는 말이 이종격투만큼 어울리는 곳도 없다. 즉 산전, 수전, 공중전까지 이해하지 못하면 이종격투경기에서 일류 선수가 될 수 없다.

 

그런데 모든 격투방식을 포용하는 이종격투(異種格鬪)경기에서 어째서 특정한 무술만 연습되고 사용되어지는 것일까? 그리고 왜 브라질리안 주짓수는 이처럼 MMA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무술이 되었을까?

 

지난 칼럼에서 언급했듯이 자신이 수련하는 무술의 강함에 대한 확고한 믿음 그리고 그것을 세상 사람들에게 증명해 보이는 것은 이른바 모든 무술과 그것을 수련하는 자들의 숙명이자 사명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이종격투경기는 누가? 어떤 무술이 최강인가? 라는 의문과 최강임을 증명해 보이기 위해 만들어진 대회이다.

 

초창기 이종격투시합에서 그레이시 주짓수가 불패의 무술이라고 세간에 인식되고 MMA 대회가 속속 개최되면서 세계적으로 그레이시 주짓수를 모방한 무술유파가 생겨나게 되었다. 이들은 이종격투에서 효율적이라 평가되는 기술을 조합해서 그럴듯하게 포장해보이는 경향이 있는데, 이들 유파와 단체에서 훌륭한 선수가 다수 배출되거나 이종격투계에 큰 영향력을 발휘할 가능성은 대단히 희박하다.

 

어떤 무술이 강하다고 평가받고 신뢰를 얻는 길은 매우 험난하고 오랜 경험축적을 통한 노하우를 필요로 하기 때문이다. 최강의 가라테 유파라고 평가받는 교쿠신 가라테의 창시자 최영의 관장은 이렇게 말했다.'실전이 아닌 것은 인정받지 못하며 인정받지 못하면 신용을 얻을 수 없게 되며 신용이 없어 지면 존경받을 수 없다.'이처럼 강함을 증명하지 못하면 세상에 신뢰를 얻지 못한다. 아무리 말로써 강하다고 해봐야 소용이 없는 것이다. 신의 아들이라고 주장하려면 사후부활은 몰라도 최소한 물위라도 걸어야 한다. 즉 직접 자신이 강함을 증명해 보이거나 훌륭한 무술가를 배출해서 세상에 신뢰를 얻어야 하는 것이다. 때문에 오래전부터 강함을 증명해 보인 무술은 흥하고 그렇지 못한 무술은 쇠퇴해 갔던 것이다.

 

그런데 이 강함을 증명해 보이는 것은 다른 유파의 무술인들에게 도전해서 그들과 싸워 이기는 수 밖에 없었다. 전설처럼 전해져 내려오는 옛 무술명인들의 진검승부니, 실전대련이니 도장깨기니 하는 것들이 바로 이것을 말하는 것이다. 브라질 주짓수를 만들어낸 그레이시 가문에서는 이것을'그레이시 챌린지(Gracie Challenge)'라 부른다.

 

초창기 유도의 강함을 알리기 위해 혹은 자신의 강함을 알리기 위해 전세계를 떠돌며 싸움을 지속하던 마에다 미츠요에게는 어떻게 하면 실전격투에서 이길 수 있는가에 대한 확실한 노하우가 있었다. 이 노하우는 중세 일본전국시대의 산물인 주짓수 기술과 실전경험의 결합체였다.

 

그리고 이것이 카를로스 그레이시에게 전수된다. 사실 많은 사람들이 그레이시 주짓수가 엘리오에 의해 발전되고 퍼져나간 것으로 알고 있는데, 그레이시 주짓수란 명칭만 놓고 보면 사실이다. 왜냐하면 '그레이시 주짓수'는 엘리오의 아들이자 UFC를 만든 사람인 호리온에 의해 특허상표로 저작권 등록이 되어 있기 때문에 그의 동의 없이는 누구도 그레이시 주짓수란 이름을 사용할 수 없기 때문이다. 심지어 그의 동생인 힉슨조차 '그레이시 주짓수'란 명칭을 사용하지 못한다. 국내는 물론 미국에서도 그레이시 주짓수 하면 엘리오라든지 호이스, 힉슨을 연상한다. 이것은 UFC가 호리온에 의해 개최되고 호이스가 활약하고 힉슨의 전설적인 일화가 알려진 탓에 세인의 관심이 이들 엘리오 패밀리에게만 집중된 탓이다.

 

그러나 밑의 브라질리안 주짓수 계보도에서 보면 알 수 있듯이 그레이시 주짓수, 즉 BJJ의 종가는 카를로스 쪽이고 현재 UFC, PRIDE FC등 메이저 이종격투대회뿐 아니라 브라질 현지의 주짓수 대회에서 활약하는 선수들 대부분이 이 카를로스 패밀리에 의해 지도받은 파이터들이다. 호리온은 엘리오가 그레이시 주짓수의 모든 것을 발전하고 체계화했으며 모든 주짓수 파이터들이 엘리오의 직간접적인 제자라 주장하지만, 사실 그레이지 주짓수는 그레이시 가문의 남자들 전부가 함께 만들어 왔다고 하는 편이 사실이고 엘리오에게 전혀 교수받지 않은 사람도 상당수이다. 즉 칼레이, 카우손을 비롯해 카를로스의 아들 손자들은 엘리오에게 전혀 배운 적도 없는 경우가 많고 이들의 제자 역시 엘리오와는 직접적인 연관이 없다고 할 수 있다.

 

이 때문에 카를로스 계열의 남자들은 엘리오와 호리온을 싫어하는 경우가 많다. 카우손은 호리온이 그레이시 주짓수를 자신의 특허상표로 만들어 버린데 대해 그리고 그레이시 가문의 대표자인양 행동하는 것에 대해 매우 못마땅해 한다. 특히 UFC초창기의 TV인터뷰에서 호리온이 가문의 어른인 자신과 힐리온을 양 옆에 앉혀놓고 떠들어대던 말을 나중에 통역으로 전해듣자 열화같이 분노했다는 일화가 전해진다.

 

그리고 무패라고 자랑스럽게 인터뷰하는 호리온, 엘리오를 다함께 거짓말쟁이라고 싸잡아 비난하며 그들은 전혀 무패가 아니었고 호이스는 미국에서는 제법 잘했지만 브라질 본토의 주짓수 대회에서 한번도 우승해 본적이 없다고 말했다. 이렇게 좋지 않은 감정의 여파인지 모르겠지만, 카우손의 제자 발리드 이즈마이우는 브라질 주짓수 대회에서 호이스를 기절시키며 무패의 마침표를 찍게 했다. 또 호리온은 이러한 카우손에 대해 누구 덕분에 미국에서 밥을 먹고 살게 되었는데 험담이냐며 불만을 토로한다.(左.호이스 그레이시를 이기고 환호하는 발리드 이즈마이우)

 

호리온은 대가족 사이에서 의례 그렇듯이 반목이 있다고 하는데, 브라질인 특유의 다혈질때문인지 모르겠지만 그레이시家 사람들간에 반목과 갈등이 상당하다. 4~5명의 부인을 예사로 두고 있는 가문에서 같은 어머니를 두고 있는 형제들간에도 불화가 있다. 호리온은 힉슨과 사이가 안좋고 카우손은 헤일슨에 대해 저능아에다 정신병원에 처박아야 할 놈이라고 공공연하게 욕을 한다. 또 많은 아이들이 함께 양육되었기 때문에 서로간의 싸움은 다반사다. 하우프는 형인 헨조에게 석궁으로 쏜적도 있고 그의 동생 하이언은 칼부림까지 했다. 그러나 그레이시이라는 불패의 명성에 도전하려는 자가 생기면 그레이시 이름 아래 단결하는 이 이 가문의 특징이기도 하다.

 

 

BJJ는 어떻게 MMA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무술이 되었을까? -下-

 

BJJ가 세계적으로 유명해진 계기는 아시다시피 마르고 허약해 보이는 호이스가 UFC라는 유혈이 낭자한 무규칙 격투대회에서 거구의 상대를 연속으로 격파했기 때문이다. 그레이시 일족은 이와 같은 효과를 미리 예상하고 호이스를 가문의 자객으로 대회에 출전시킨 것인데, 이런 방식이 대중에게 통한다는 것을 이미 수십년간의 경험으로 체득해 왔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시초가 카를로스 그레이시였다.

 

일반적으로 그레이시 주짓수는 어렸을적 너무나 허약했던 엘리오가 자신의 몸에 맞게 고안해 냈다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는 틀린 말이 아니다. 그러나 엘리오뿐 아니라 엘리오의 스승인 카를로스도 그리고 그 스승인 마에다 미츠요도 건장한 체격이 아니었다. 특히 카를로스는 사진에서 보면 알다시피 가문에서 제일 허약한 체구였고 몸무게도 엘리오보다 적게 나갔었다.

 

그렇지만 마에다의 실전 주짓수를 전수받은 카를로스로서는 이 기술로 자신보다 강한 거구의 상대를 이길 수 있으리란 확신이 있었다. 카를로스 jr에게 주짓수를 배운 장 자크 마차도는 이런 말을 했다. '그라운드는 나의 대양. 나는 상어다. 그리고 대부분의 사람들은 수영조차 할 줄 모른다.'


이처럼 주짓수가 중력의 법칙에서 비교적 자유롭고 사람들이 잘 알지 못하는 그라운드 기술이라는 점이 그레이시 일족에게 이득으로 작용했다. 만약 마에다 미츠요가 주짓수가 아니라 가라테를 전수했다면 카를로스가 아무리 뛰어난 기술을 습득했다 해도 그 신체적인 한계로 인해 '챌린지'가 성공하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타격기술은 아무리 뛰어난 기술을 보유하고 있어도 신체적인 환경에 매우 큰 영향을 기 때문이다. 50킬로그램대의 카를로스가 백킬로그램의 단련된 거구들을 타격전만으로 무패의 행진을 계속하기 위해서는 우스개 소리로 정말 장풍이라도 필요할지 모른다. 그래서 교쿠신 가라테를 창시한 최배달 관장은 실전 대결과 더불어 벽돌을 부수고 소뿔을 자르는 등의 격파를 개발했던 것이다. '내 주먹이 돌보다 강하니 덤빌 엄두도 내지 마라!'라는 의미로 말이다. 전성기 때 75킬로그램의 최영의 관장도 미국에서 거구의 프로레슬러를 이기기 위해 눈찌르기와 고환차기까지해서 관중들에게 린치를 당할 뻔할 정도였는데 카를로스나 엘리오 같은 약골이라면 더 말할 나위가 없을 것이다.

 

그러나 다행스럽게도 브라질의 싸움꾼들과 무술인들은 UFC초기의 무술인들처럼 전혀 그라운드에 대한 지식도 없었고 경험이 있는 그래플러라 하더라도 조르기와 관절기는 생소한 탓에 일방적으로 당할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어쨌든 카를로스는 1920년대 초창기부터 작고 허약한 체구로 거구들을 연속적으로 격파하면서 신문에 광고까지 냈고 이 때문에 브라질 전역에 이름을 알리게 되었다. 그레이시 주짓수의 개조(開祖)인 카를로스는 실력뿐 아니라 두뇌도 뛰어난 모양으로 사람들을 효과적으로 가르치는데 소질이 있었고 그 스스로도 기술과 더불어 식이요법까지 개발했다. 이른바 '그레이시 다이어트'라는 식이요법이 그것이다.

 

이것은 호이스와 힉슨을 통해 더욱 유명해졌는데 요가와 더불어 그레이시는 뭔가 다르다는 신비주의적인 효과를 불러일으키게 만들었다.

 

그러나 요가와 식이요법은 단지 신비주의를 위한 것이거나 겉멋을 부리기 의한 것이 아니다. 이것은 수십년간 '챌린지'를 계속한 경험의 산물로써, 긴장과 피로를 이완시키고 안정적인 컨디션을 유지하기 위해 고안된 것이다. 호리온의 말처럼 시도 때도 없이 도장에 무뢰한이 찾아와 도전을 신청하는데 위통이나 치통, 두통이 있다면 정상적인 컨디션을 발휘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레이시 다이어트란 기본적으로 같은 종류의 음식을 혼합하지 않는 것이다. 예를들어 탄수화물의 감자와 파스타를 같이 먹지 않고 설탕, 소금, 조미료와 붉은 고기를 되도록 피한다. 우유는 어린이만 먹이고 청량음료는 절대 마시지 않는다는 원칙이다. 그레이시 사람들에 주장에 의하면 이런 방식이 그레이시 파이터 특유의 체력과 유연성, 지구력을 길러주는데 특효약이라는 것이다. 호이스가 UFC 토너먼트 시합을 끝마쳤을 때 전혀 피곤해 하지 않은점, 엘리오 그레이시가 43살 때 논스톱으로 3시간 45분이나 시합을 한 것이 모두 그레이시 다이어트의 효과를 증명하는 예라고 말한다. 이것이 격투에 효과가 있는지에 대해서는 과학적인 검증이 되지는 않았지만 카를로스가 94세, 엘리오도 90세가 넘도록 무병장수하고 있으니 건강에 긍정적인 영향을 미치는 것만은 분명한 것 같다. 게다가 다이어트 효과까지 있으니 이 식이요법은 그레이시 주짓수라는 상품의 가치를 더 높여주는 계기가 되었다.

 

어떤 무술이 강하다는 평판을 얻고 유파가 번성하기 위해서는 지속적으로 '강함의 증명'이 요구된다. 그리고 2대 3대 훌륭한 계승자와 우수한 후배들이 반드시 필요하다. 주위를 둘러보면 언제적 이야기인지도 모를 창시자와 스승의 '챌린지'로 현재 유파의 강함을 증명하는 증거로 내세우는 무술이 꽤 많다. 이런 점에 있어서 그레이시 주짓수는 무술역사에 있어서 전무후무할 정도의 무술이다. 카를로스만 해도 3명 이상의 부인을 통해 21명의 자식과 106명의 손자, 증손자는 128명에 이른다. 이들이 거의 대부분이 주짓수를 연습하고 높은 수준에 오른 마스터급도 상당히 많다. 엘리오도 부인이 다섯명에 이른다고 한다. 역시 자식들 중 상당수가 주짓수 선수이자 마스터이다. 한마디로 그레이시 일족 대부분이 브라질리안 주짓수 관련 일에 종사하고 있다고 보면 된다.

 

카를로스가 은퇴하고 엘리오가 '챌린지'의 바톤을 이어받아 주짓수를 세상에 알렸는데, 이런 엘리오의 적은 아이러니하게도 내부에서 자라고 있었다. 그레이시 주짓수란 기술은 상대가 그라운드와 서브미션을 모른다는 전제하에 약함이 강함을 이긴다는 등식이 성립할 수 있다. 그러나 상대도 주짓수를 오래 수련한데다 기술수준도 높고 힘이 세다면? 기술수준이 아무리 높은 엘리오도 상대를 이기기는 어려울 것이다. 이런 일이 1957년에 일어났는데, 브라질 YMCA본부에서 그레이시 주짓수를 12년이상 수련한 발데마르 산타나와 43세의 엘리오가 발레투도로 싸우게 된 것이다. 3시간이 넘는 혈투끝에 발데마르가 엘리오의 머리를 걷어찼고 경기는 끝나게 되었다. 그리고 이것을 계기로 엘리오는 공식적인 '챌린지'에서 은퇴하였다.

 

다행스럽게도 그레이시 가문에는 엘리오의 뒤를 이을 자객들이 줄줄이 기다리고 있었다. 카를로스와 엘리오가 각기 수십명의 자녀들을 합숙시키며 어렸을 때부터 연습을 시켜왔기 때문이었다. 카우손은 카를로스의 첫번째 부인의 장남이었다. 이런 카우손에게 그레이시 주짓수의 정통성은 자신에게 있다고 자부심을 가지는 것이 이상하지 않을 것이다. 그래서 그는 오랜 친구였던 발데마르 산타나와 무규칙으로 싸우기로 결심한다. 그는 18살 때부터 발레투도를 시작했는데 지금도 그가 지향하는 것은 오로지 발레투도를 위한 주짓수이다. 데뷔전에서 그는 유클리데스 페레이라에게 패배했는데 심판의 판정이 잘 못된 것이라고 말하며 아직까지 패배를 인정하지 않는다. 왠만하면 시합에 져도 패배를 인정하지 않는 것이 그레이시의 특징이지만, 카우손은 '다른 그레이시에 비해(엘리오를 지칭) 나는 패배를 두려워하지 않으며 누구와도 싸우고 누구에게도 비밀없이 기술을 가르친다'고 주장하며 이것이 좋은 선수를 배출하는 비결이라 말한다.

 

어쨌든 카우손은 산타나와 6번 싸워 4번은 이기고 2번은 비기며 엘리오의 복수에 성공한다. 이후 그는 60년대 브라질에서 가장 강한 파이터로 활약하게 되는데, 지난 칼럼에 실은 BJJ계보도에서 보면 알 수 있듯이 현재 MMA에서 활약하는 브라질 주짓수 선수는 거의 대부분 카우손과 카를로스 주니어의 제자라고 보면 된다. 카우손의 제자를 보면 마리오 스페히,무릴로 부스테만테,비토 베우포드 에서부터 호드리고 노게이라와 히카르도 아로나, BJ 팬이라는 그야말로 거물급들로 즐비하다. 카를로스 주니어는 카를로스의 세번째 부인의 장남인데 유명한 '그레이시 바하(바라)'라는 아카데미의 설립자로도 유명하다. 여기에서 헨조, 하우프, 하이언, 호드리고, 알메이다, 쉠브리등 탑 파이터들이 쏟아져 나왔다.

 

엘리오 이후에는 카우손을 포함해 신체적으로 강하고 재능있는 인물들이 뒤를 잇게 되는데, 60년대 후반부터 70년대 초반에는 카를로스의 두번째 부인의 아들인 칼레이 그레이시가 67년에 출범한 브라질 주짓수 협회의 주최하에 열린 대회에서 무패의 행진을 이어간다. 그 후 홀스 그레이시 부터는 '챌린지'뿐 아니라 다른 스포츠에도 영역을 확대하게 된다. 홀스는 카를로스의 4번째 부인의 아들인데 어렸을적 엘리오에 의해 양육되었다. 카우손은 힉슨과 비교해 누가 가문의 역대 최강자 였느냐는 질문에 홀스가 단연 최고였으며, 기술적으로도 매우 수준이 높았고 천부적인 재능이 있었다고 한다. 힉슨도 홀스야 말로 자신보다 더 강했다고 말했을 정도다.

 

그래플링 대회에 나가 연승하며 브라질 전역에 이름을 날렸다. 마우리시오 고메즈는 생전의 홀스가 유명인 홀스라는 별명으로 불렸다고 말한다. 그러나 아쉽게도 홀스는 1982년 행글라이딩 사고로 사망하였는데, 이때까지 어떤 '챌린지'에서도 무패였다고 전해진다. 홀스이후 80년대부터는 엘리오의 아들 힉슨 그레이시의 시대라고 할 수 있다. 힉슨은 스무살 때인 81년에는 길거리 싸움 140전 무패의 거구(190cm에 117kg)의 유명 파이터 줄루와 발레투도로 싸워서 이기면서 명성을 쌓아 나가기 시작한다.

 

시대가 발전하고 캠코더처럼 쉽게 활동을 기록할 수 있는 영상기기가 등장하자, 그레이시 가문은 이것을 '챌린지'를 홍보할만한 수단으로 활용하기 시작한다. 힉슨과 줄루와의 유명한 시합도 이렇게 기록되어 알려지는데, 이 영상물은 '그레이시 액션비디오'라 불렸다. '그레이시 액션비디오'는 90년대의 UFC를 비롯한 이종격투대회 이전 그레이시 가문의 '챌린지'를 말이 아닌 눈으로 전세계에 확인시킬 수 있었던 놀라운 도구였다. 게다가 이 영상물은 겉으로 보기에 비쩍 말라서 별 힘이 없어 보이는 호리온이나 호이스 같은 사람이 미국에서 자신의 강함을 아주 쉽게 증명해 보일 수 있었던 물건이기도 했다. 결과적으로 호리온이 UFC를 만들기 위한 스폰서를 구하는 데에 이 비디오도 큰 역할을 했다.

 
450전 무패의 신화적인 파이터라는 힉슨 그레이시의 전설도 이 비디오로 인해 신뢰를 받은 면이 크다. 액션 비디오에 보면 힉슨이 13살 때 1분만에 이십대의 가라테 선수를 이기거나 30초만에 러시안 유도 챔피언을 이겨버리는 장면이 나오기 때문에, 과연 힉슨이라면 450전 무패도 거짓이 아니겠구나 하는 생각을 들게 만든다. 장삿속에 밝은 호리온은 교습 비디오와 함께 액션비디오도 함께 팔아서 큰 돈을 만지기도 했다. 그만큼 이 비디오는 그레이시 가문에 여러모로 든든한 아군 역할을 했다.

 

그레이시 액션 비디오에서는 힉슨이 루타 리브레(LUTA LIVRE) 의 최강자 우고 듀와르치를 상대로 해변에서 난투극을 벌이는 장면이 나온다. 브라질에는 대표적으로 세개의 무술이 존재하는데, 첫번째가 브라질리안 주짓수고 두번째가 카포에이라, 그리고 루타 리브레가 있다. 루타 리브레는 주짓수처럼 서브미션 그래플링이며 60년전 마스터 타투라는 사람이 그레코로망 레슬링과 관절기를 섞어 루타 리브레를 창시했다고 전해진다. 루타 리브레는 포루투갈어로 '자유롭게 싸우는 기술'을 의미하고 BJJ와 다르게 맨몸으로 수련하고 전문적으로 타격도 연습한다. 이름만큼 발레투도를 지향하는 무술이라 예전에는 벽앞에 선수를 세워 놓고 다른 사람이 주먹으로 쳐서 내성을 기르는 무서운 훈련법도 행해졌다고 한다. 그런데 비슷한 성격의 루타 리브레와 BJJ는 발레투도등의 '챌린지'에서 서로 부딪히는 경우가 많아서 예로부터 앙숙지간으로 유명하다.

 
힉슨과 해변에서 싸운 우고 듀와르치는 루타 리브레의 제왕이라고 불렸던 파이터다. 체격이나 체중도 헤비급인데다 번개 같은 태클로 마운트 포지션을 빼앗고 안면에 펀치를 퍼붇는 것을 장기로 삼는 선수다. 이 때문에 우고를 가리켜 '세계에서 가장 빠른 격투가'라고도 한다. 루타 리브레 연합의 회장까지 맡았던 사람인데 아쉽게도 그는 장렬한 패배로 더 기억되는 선수다. 우선 그레이시 액션 비디오에서 힉슨에게 얻어 터지는 장면으로 유명하고 UFC에서는 탱크 애봇에게 처절하게 얻어 터지는 수모를 당했기 때문이다. 우고는 해변에서의 싸움이후 친구들을 데리고 힉슨의 도장으로 가서 또다시 도전했는데, 도장 바닥이 아니라 주차장에서 10분동안이나 힉슨에게 얻어 터지고 말았다. 루타 리브레의 얼굴인 우고가 힉슨에게 지고 UFC에서 탱크 애봇에게 패했다고 루타 리브레가 약하다고 말하려는 것은 아니다. BJJ도 스포츠 주짓수 시합에서 뛰어난 실력을 보인 선수가 이종격투 경기에서 변변찮은 파이팅을 보여주는 경우도 많기 때문이다.

 

게다가 루타 리브레 출신의 파이터로는 '거리의 제왕'이라는 별명과 함께 힉슨도 슬슬 피해다녔다고 하는 마르코 후아스가 있다. 그런데 후아스는 우고와 달리 루타 리브레만 익힌게 아니라 유도, 카포에이라, 태권도, 복싱, 무에타이등 여러 무술을 골고루 익혔다. 그는 그레이시 주짓수도 약간 익혔는데 BJJ와 연속으로 싸워서 이겨나가는 탓에 쫓겨나고 말았다고 한다.본인의 말로는 '너무 강해서 아무도 도전하지 않는 터라 이러저리 옮겨다니며 시합을 했다.'라고 한다. 힉슨에게도 몇번 도전했지만 응하지 않은 탓에 '힉슨이 후아스를 피해다닌다.'는 소문이 들려올 정도였다. 마르코 후아스는 무에타이 브라질 헤비급 챔피언 출신으로 매우 강력한 타격 테크닉을 소유했고 그라운드에서는 루타 리브레의 기술로 싸우는 올라운드 파이터다. 그리고 이런 경험을 바탕으로 후아스 발레투도라는 무술을 창시했는데, UFC7에서는 부상으로 1%의 실력도 내지 못했다고 스스로 말했지만 토너먼트 챔피언이 되기도 했다. 제자로는 UFC에서 챔피언이자 최고수준의 타격으로 유명한 페드로 히조가 있다.

 

BJJ와 루타 리브레간의 불화는 오늘날까지 계속되고 있는데, 그레이시 가문의 악동으로 유명한 하이언 그레이시는 루타 리브레의 정상급 선수인 에우지뇨 타데우와 몇번이나 충돌했고 언젠가는 디스코테크에서 말싸움을 벌여 타데우가 총으로 하이언을 쏘려고 한적도 있다. 그 후에는 하이언이 타데우의 제자를 폭행하고 그에 대한 보복으로 타데우가 하이언의 동료를 칼로 찔러버리는 사건도 있었을 정도였다. 타데우는 유달리 그레이시측과 사이가 안좋은데 하이언의 형인 하우프나 사촌 호일러도 타데우라면 이를 간다. 이런 갈등이 계속되다 97년에는 브라질에서 열린 발레투도 시합인 '펜타곤 컴뱃'에서 하이언의 형인 헨조 그레이시가 타데우와 시합을 하게 되었다. 그런데 시합중 구석으로 몰린 헨조의 머리를 타데우측 세컨이 걷어차면서 이것을 계기로 경기장에서 그레이시 측과 루타 리브레간의 집단 난투극으로 번졌다. 브라질에서는 과거에도 이처럼 유파끼리의 신경전이 난투극으로 이어진 경우가 있는데 이 때문에 리오 데 자네이로등에서 발레투도가 금지되기도 했다. 어쨌든 그레이시 주짓수와 다른 무술간의 반목을 단적으로 보여준 예이다.

 

어떻게 BJJ가 MMA에서 가장 영향력있는 무술이 되었는가에 대해, 어떤 무술이 강하다고 평가 받고 길은 매우 험난하고 오랜 경험을 통한 노하우를 필요로 하다고 서두를 뗀 적이 있다. 그레이시 주짓수는 기술적인 강함을 증명하기 위해 이토록 오랜시간 다른 무술과의 '챌린지'로 경험을 쌓고 우수한 격투가를 길러 오늘에 이르게된 것이다. 그야말로 험난한 여정이 아닐 수가 없다.

 

세계 이종격투경기의 시작인 UFC는 이처럼 그레이시 가문이 BJJ의 강함을 증명하기 위해 미국에서 만들어진 '챌린지'의 무대였다. 결론적으로 BJJ가 MMA에서 가장 영향력있는 무술이자 세계최강의 유파라는 명성을 얻게 된 원인을 꼽자면. 첫째, BJJ가 마에다 미츠요에 의해 개발된 우수한 서브미션 그래플링(Submission Grappling) 이었다는 점이다. 후세의 노력을 간과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레이시 주짓수는 출발부터 '강한무술'로 성장할 가능성이 있었다. 전수자 마에다가 1000전 이상의 이종격투경험이 있었던 불세출의 무술가인데다, 전수한 기술이 실전에서 상대방에게 치명적인 부상을 입히지 않고도 실력을 증명해 보일 수 있는 서브미션 그래플링이란점이 장점으로 작용했다. 그리고 앞에서 설명했듯이 만약 마에다가 타격기를 전수했다면 왜소한 카를로스나 엘리오가 무패행진이 가능할리도 없었고 피를 보지 않고 많은 횟수의 '챌린지'를 완수할 수도 없었을 것이다.

 

두번째는 카를로스, 엘리오, 카우손으로 이어지는 훌륭한 스승과 우수한 후배들이 정체성을 잃지 않고 기술개발을 지속한 것이다. 20세기초 스포츠를 지향해서 실전기술을 상당수 제외한 유도나 레슬링의 길을 따르지 않고, 6~70년대 동양무술의 신비주의를 쫓지 않은 점이 그 예이다.

 

세번째는 BJJ의 강함을 증명하는 것을 여러 세대에 걸쳐 게을리하지 않은 점이다. 선대의 활약과 영웅담에 안주하지 않고 '챌린지'를 계속한 것이 오늘날의 BJJ를 있게한 가장 큰 일등공신이라고 할 수 있다. 네번째는 환경적으로 행운이 따라서이다. 발레투도를 가능하게 만든 브라질의 특성과 캠코더등 현대문명의 발전, 그리고 호리온이 때마침 동양무술붐이 내리막길을 걸을 때 미국에서 이종격투대회를 열수 있었던 점도 BJJ가 세계적인 무술로 성장하게 된 원인 중 하나라고 할 수 있다.

 

브라질에서 최초의 그레이시 주짓수 도장이 열린지 내년으로 80년이 된다. 그레이시 일족이 줄줄이 서로 어깨에 손을 얹는 입장 퍼포먼스인 '그레이시 트레인(Gracie Train)'처럼 이들의 '챌린지'가 꼬리를 물고 계속되는한 이종격투대회 역시 결코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호리온 그레이시와 UFC의 탄생

 

'로마는 하루아침에 만들어지지 않았다' 라는 말이 있듯이, 오늘날의 BJJ와 이종격투경기가 하루아침에 갑작스럽게 생겨난 것이 아니었다. 이점에 대해서는 지난 칼럼에서 브라질리안 주짓수가 어떤 경로를 거쳐 MMA(Mixed Martial Arts)계에 가장 큰 영향력을 끼치는 무술이 되었는가를 보았으면 이해하기 쉬울 것이다. 초창기의 이종격투시합은 '최강'에 대한 의문에서 출발하였다. 어떤 무술이 최강이고 누가 최강인가? 에 대한 의문과 그것을 입증해 보이려는 시도가 이종격투의 출발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이종격투경기의 시도는 UFC가 등장하기 이전부터 있어왔다. 특히 현대 도복무술의 진원지라고 할 수 있는 일본에서는 그러한 시도가 20세기 초부터 시작되었다. 브라질에 주짓수를 전수한 마에다 미츠요의 격투 기행을 비롯해 안토니오 이노키의 이종격투시합, 그리고 이노키의 뒤를 이어 실전 프로레슬링을 지향하는 단체들에 의한 다양한 시도가 UFC가 개최되기 이전까지 계속되었다.

 

이종격투시합은 격투시합의 종착점을 의미한다. 서로 다른 성격의 기술과 그것을 익힌 선수들이 격투하기 위해서는 시합의 규칙이 모든 무술의 기술을 포용할 만큼 '오픈' 되어 있어야 한다. 그래서 그 시합 모습은 처음 접한 사람들이 보기에는 매우 생소하고, 익숙하지 못하기 때문에 잔인해 보일 수도 있다. 또한 상대와 치고 받기도 하고 바닥에서 뒹굴면서 싸우는 방식을 격투 문외한이 처음부터 이해하기란 지 않다. 따라서 일본처럼 격투가 대중화되어 있고 사랑받는 곳에서조차, 외부의 영향 없이 자체적으로 이종격투시합이 활성화되기 위해서는 많은 시간이 걸렸을 것이다. 그런데 이처럼 일본의 격투단체가 서서히 이종격투를 시도하던 와중에 갑작스럽게 도화선의 불을 붙이는 사건이 발생했다. 바로 1993년 미국 콜로라도 덴버에서 열린 제 1회 UFC(Ultimate Fighting Championship)대회가 그것이다.

 

UFC는 이종격투팬이라면 누구나 알다시피 브라질에서 미국으로 이민 온 호리온 그레이시라는 사람에 의해 만들어진 대회다. 초창기 이종격투대회의 출발이 그렇듯 UFC도 '최강'에 대한 의문과 이것을 입증하기 위한 목적으로 만들어졌다. 표면적으로는 다양한 스타일의 무술가들이 서로 기량을 겨뤄 최강을 가리자는 의미였지만, 원래는 그레이시 주짓수가 실전에서 얼마나 강하고 유용한 기술이냐를 입증하기 위한 것이 목적이었다. 말하자면 UFC는 '그레이시 챌린지'의 연장선상에 있다고 할 수 있다.

 

호리온 그레이시는 엘리오 그레이시의 장남이다. 호리온은 양자로 키워진 홀스 그레이시나 동생인 힉슨에 비해 브라질에서 주목받을 만큼의 '챌린지' 활동을 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레이시家의 남자답게 어린시절부터 오랜기간 동안 익혀온 주짓수 실력만큼은 어디에서건 통할 정도로 강했다. 그는 그레이시 남자들 중에서 매우 기회주의적이고 계산이 빠르다는 평가를 받았는데, 가문에서도 대학을 마친 사람은 그와 홀스 뿐이다. 호리온은 1969년 17살 때 처음으로 미국에 왔고 하와이에서 1년간을 지냈다고 한다. 69년이라면 브라질에서 엘리오와 바헤트에 의해 처음으로 BJJ협회가 설립된지 2년 후이다. 그가 왜 어린 나이에 미국에 갔는지에 대해서는 알려지지 않았다. 그러나 당시 주짓수 협회도 설립되고 엘리오,카우손, 홀스등의 연이은 활약으로 브라질내에서는 이미 그레이시家 사람들이 먹고 살만한 일은 충분히 있었기 때문에 아무도 그가 미국에 건너가려는 것을 이해하지 못했다고 한다. 그래서 그가 17살이라는 어린 나이에 돈벌이도 할 수 없어서 길거리에서 구걸을 하다가 다시 고향에 돌아오고 말았을때, 모든 이들이 그를 두고 바보라고 놀려댔다고 한다.

 

그러나 호리온은 브라질 내에서는 출세에 한계가 있다고 보고, 미국에서 성공하면 세계적인 성공이라 생각한 끝에 다시 도미하게 된다. 호리온이 27세때인 1978년의 일이었다. 당시 그는 이혼하고 아이 둘이 딸린 아버지인데다, 주위의 만류도 상당했지만 개의치 않았다고 한다. 어쨌든 그는 아메리카 드림을 가슴에 품고 미국에 왔지만, 할 줄 아는 것이라고는 주짓수를 제외하곤 아무것도 없었다. 그레이시 주짓수를 가르쳐 볼까도 했지만 당시는 이소룡을 필두로 한 동양무술의 붐이었던 시기라 화려하지 않고 세간에 알려지지도 않은 주짓수를 사람들이 배우려고도 하지 않았다. 70년대 초반 호리온보다 먼저 미국에 건너온 칼레이 그레이시도 이 때문에 주짓수 교습을 그만두고 복사공장에서 일하고 있던 중이었다.

 

그래서 역시 17살때와 마찬가지로 해변에서 노숙을 하기도 하고 구걸을 하기도 하는 등 완전히 거지꼴로 여기저기 방랑을 하는 수밖에 없었다. 그러다 아는 사람의 도움으로 월 25달러를 받는 청소부로 어느 부잣집에 취직하게 되었는데, 집주인이 '스타스키와 허치'라는 영화의 조감독이었다. 그는 청소를 열심히 했고 안주인의 눈에 들어서 '브라질인 타입은 신선한데 영화배우 한번 해보지 않겠느냐'는 제의에 그때부터 단역배우 일을 하게 된다. 그 후 그는 십년간 TV 드라마의 엑스트라를 하게 된다. 그러나 호리온은 자신이 출세할 수 있는 길은 그레이시 주짓수밖에 없다고 판단하고, 단역배우 십년간 꾸준히 주짓수를 여러 사람에게 알리고 다녔다. 처음에는 무료로 가르쳤는데 1989년도 즈음에는 차고를 개조한 도장의 수련생만 120명을 넘었고 대기자만 80명을 헤아릴 정도로 인기를 끌었다고 한다.

 

그는 종종 격투대회에도 출전했는데 어느날 킥복서와 싸우는 모습을 영화 '리쎌 웨폰'의 제작자가 와서 보고는 무술감독으로 기용했다. 그래서 '리쎌 웨폰'의 멜 깁슨이나 르네 루소를 가르치고 직접 스턴트맨으로 출연하기도 했다. 이처럼 꾸준한 노력으로 마침내 '플레이보이'지에 호리온과 그레이시 주짓수에 대한 시리즈 기사가 실리기도 하는 등 점점 이름이 알려지기 시작했다. 도장이 커지고 '어떤 사람이라도 자신 있으면 도장에 찾아와 나에게 도전해 보라'는 '챌린지'식의 발언 등으로 유명세를 타자 격투가들이 찾아와 호리온에게 도전하는 일이 많아졌다. 뿐만 아니라 체육관에서 소규모의 발레투도 경기를 열어 직접 선수로 출전하기도 했는데, 호리호리한 호리온이 쉽사리 거구의 격투가들을 이기는 장면이 지방 방송국에 의해 방영되자 더욱 유명해졌다. 도장이 커지자 그는 당시 브라질 주짓수 선수권과 발레투도를 제패하고 있던 힉슨과 호일러, 헬슨, 마차도 형제와 17세의 호이스 그레이시도 브라질에서 불러왔다.

 

1992년에는 도장의 수련생이자 광고인이었던 아트 데이비란 사람과 손을 잡아 '챌린지' 장면을 찍은 캠코더 영상을 비디오로 제작해 통신 판매해서 큰 성공을 거둔다. 이 테잎이 그 유명한 '그레이시 액션비디오' 이다. 이러한 성공에 고무된 그들은 '그레이시 주짓수' 교육용 테잎을 만들어 팔게 되는데, 이것도 대성공을 한다. 그레이시 주짓수와 발레투도가 돈이 될 수 있다는 것을 깨달은 호리온과 아트 데이비는 역시 수련생이자 영화 '코난'을 감독했던 존 밀레스를 영입해 대대적인 규모의 발레투도 시합을 기획하게 된다. 그리고 이 기획서를 가지고 스폰서를 찾던 중 새로운 PPV 컨텐츠를 찾고 있던 SEG사에 의해 채택되어 뉴욕에서 이 이벤트에 대한 구체적인 사항을 협의하기에 이른다.

 

회의끝에 도출된 이벤트의 제목은 'War of the Worlds' 줄여서 WOW라는 다소 촌스런 명칭이었다. 특정 무술을 대표하는 수준높은 무술가들이 극한의 싸움을 한다는 컨셉으로 인해 경기장 디자인에 여러 의견이 엇갈렸다. 유리로 보호벽을 만들자는 안건부터 전기 철조망, 해자를 파서 악어를 풀어놓자는 등의 황당한 안건이 나왔지만, 결국 호리온에 의해 팔각의 철망 링이 선택되었다. 옥타곤이라 불리는 이 경기장은 인기 격투 비디오 게임인 '모탈컴뱃'을 연상시키는 강렬한 인상과 함께 브라질 발레투도 시합에서 선수가 링 바깥으로 떨어지는 것을 막기 위한 목적으로 채택되었다. 대회명칭도 UFC(Ultimate Fighting Championship)로 교체되었다.

 

제1회 UFC는 토너먼트제 시합으로 결정되었다. 감독은 앞서 말한바 있는 호리온의 제자이자 '코난'의 감독인 존 밀레스였다. UFC가 토너먼트로 결정된 데에는 최후에 한 사람만 싸워 살아남는다는 드라마틱한 전개가 흥행에 도움이 될 거란 존 밀레스의 판단에다, 그레이시 파이터가 최후의 승자가 되면 더욱 스포트라이트를 받게 되리라는 호리온의 꿍심이 합쳐졌기 때문이다. 그레이시를 대표해서 UFC에서 싸울 전사는 호이스 그레이시로 선택되었다. 이것은 허약해 보이는 신체가 거구를 이겼을 때 얼마나 열렬한 호응을 받을 수 있는지 이미 카를로스, 엘리오시절에 검증이 되었기 때문이다. 원래는 호이스 다음에 힉슨이 UFC에 출전할 예정이었지만 힉슨과는 도장문제로 사이가 원만하지 못한데다 본인 스스로도 사양하였고 호리온 입장에서도 자신에게 고분고분하고 늘 곁에 있어준 호이스가 더 믿음이 가기도 하였다.

 

11월에 콜로라도 덴버에서 시합을 열기로 결정하고 호리온과 아트 데이비가 선수 섭외에 나섰다. 무규칙의 격투대회(NHB)가 열릴것이라는 소문이 퍼져 나갔지만 아무도 진짜 그렇게 시합할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그런 대회가 제대로 열릴리가 없다.'라고 장담하는 관계자가 있을 정도였다. 호리온은 루머에 아랑곳하지 않고 잡지에 광고를 내고 유명 선수와 체육관에 팩스를 보냈다. 주최측인 SEG에서도 흥행에 도움이 될만한 선수를 원했다. 그러나 주최측에서도 이런 대회에 거물급 선수가 나올리가 없다고 예상한데다 구색만 맞추고 장사만 잘되면 그만이라는 심산이었고 호리온은 호리온대로 호이스가 시원하게 이겨버리면 되었기 때문에 당시로서는 아무도 UFC가 현대 이종격투의 출발점이 되리라고는 생각지 못했을 것이다.

 


호이스 그레이시의 예견된 승리 
 

제 1회 UFC 대회 출범

 

그레이시측의 인터뷰를 보면 복싱,K-1,판크라스,가라테,스모등에서 일류 선수부터 차례로 전화해서 복싱 랭킹 6위(혹은 10위)의 애트 짐머슨과 K-1의 제랄드 고르듀, 판크라스의 챔피언 켄 ?락이 캐스팅에 응했다고 한다. 그런데 참가 선수들의 말을 들어보면 차이가 있다. 켄 ?락 같은 경우는 '블렉벨트' 잡지를 보다가 직접 전화를 걸었다고 술회하고 다른 선수들도 호리온의 이야기와는 캐스팅 절차가 다르다. 게다가 요즘의 이종격투대회와 비교해 UFC의 출발은 매우 엉성한데다 불합리한 점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그도 그럴 것이 UFC는 이종격투대회 출범이라는 거창한 목표를 세우고 시작한 대회가 아니라 오로지 흥행과 그레이시 주짓수 선전이라는 이해가 맞물려 탄생한 대회이기 때문이다.

 

우선 초창기 UFC 토너먼트 대회에는 공개적인 선수 추첨의 개념이 없었다. 즉 개최자인 호리온 마음대로 매치업(match up)을 했다는 이야기다. 호이스의 인터뷰를 보면 1회 대회에서 스모선수인 테일라 툴리와 싸웠다면 가장 어려운 상대가 되었을 것 같다고 인터뷰한 적이 있는데, 테일라 툴리가 강해서라기 보다는 호이스의 격투방식으로 볼 때 툴리 같은 타입은 호이스를 이기진 못하더라도 매우 피곤하게 만들 상대임은 분명했다. 체중이 190kg인데다 옷을 입지 않고 땀으로 번들거리는 툴리의 비대한 몸과 그래플링 기술은 UFC에서 상대를 넘어 뜨린 후 타격하거나 굳히기 기술을 걸어 승리하던 호이스에게 매우 불리하기 때문이다. 이런 생각은 호리온도 하고 있었던 모양이다.

 

테일라 툴리 같이 체중이 과도하게 무겁고 발이 느린 그래플러는 발빠르고 타격능력이 뛰어난 선수가 이기기 쉽다. 쉽게 이기지 못하더라도 난투끝에 어느쪽이든 부상을 입는 경우가 많다. 호리온은 이런 계산끝에 원래 호이스의 첫 상대였던 제랄드 고르듀를 테일라 툴리의 상대로 바꾼다. 바꾼 계기가 재미있는데 원래 고르듀가 어떤 선수인지 몰랐던 호리온이 일본 격투잡지 기자들에게 고르듀의 활약을 듣고 나서 바로 툴리의 상대로 교체했다고 한다. 호이스가 인터뷰에서 말한 것처럼 제랄드 고르듀 같이 그라운드에 대한 지식이 없는 타격가는 상대하기가 매우 쉽다. 그래서 첫번째 상대로 지목해 놓은 것인데 일본 기자단의 이야기를 듣고 테일라의 상대로 바꿔버린 것이다. 아마 호이스의 부상의 위험을 덜고 툴리와의 싸움에서 이기더라도 고르듀가 부상을 입길 바라는 계산에 의한 것이 아닌가 싶다. 이런 추측이 맞다면 결과적으로 호리온의 계산이 멋지게 들어 맞게 된다.

 

테일라 툴리는 고르듀에게 잔인하게 얻어 맞고 패했고 고르듀는 부상을 당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반면 호이스의 첫 상대인 애트 짐머슨은 어떤가. 그는 출전에서부터 다른 선수와 다른 대우를 받았다. 다른 선수들에 비해 짐머슨은 출전하기만 해도 2만달러를 출전료 명목으로 받아 챙기게 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애트 짐머슨이 어떤 생각으로 출전했는지 모르겠지만 어쨌든 챔피언이 될 생각으로 출전한 것은 아닌 것 같다. 그는 호이스를 맞아 처음부터 소극적인 자세를 취하다 테이크 다운후 별다른 공격도 받지 않았는데 바로 시합을 포기해 버렸다. 즉 호이스는 그가 상대하기 가장 쉬운 타입인 복서, 그것도 싸울 의사가 별로 없던 선수를 상대로 부상없이 1회전을 통과한 것이다. 물론 호이스의 승부가 주최측에 의해 조작되었다는 것을 말하려는 것은 아니다. 호리온의 조작여하에 관계없이 호이스는 켄 웨인 ?락이라는 걸출한 종합격투가를 아주 쉽게 이겨버렸다. 어쨌든 호이스는 1회 UFC에 출전한 선수 모두를 이길만한 기량이 있는 파이터였고, 호리온은 좀더 안전하고 확실하게 호이스가 챔피언에 오를 수 있도록 주최자로서 최선의 노력을 다한 것 뿐이다. 물론 그것이 페어 플레이는 아니지만 말이다.

 
브라질의 발레투도를 경험한 호리온 그레이시에게는 UFC룰이 생소하지 않았고, 그레이시 주짓수를 빛내기 위해서라면 시합이 얼마나 잔인해지든 안중에도 없었다. 오히려 UFC가 국내에 출신된 비디오 제목인 '지옥의 링매치'처럼 아무도 간섭 않는 링에 올라가 한쪽이 죽을때까지 싸우는 극한의 싸움이 컨셉이었던 만큼 주최측에서는 오히려 잔인함을 부추기는 경향도 없지 않았다. UFC의 첫 시합인 제랄드 고르듀와 테일라 툴리의 시합만해도 고르듀가 툴리를 펀치로 때려서 철창에 넘어뜨린후 돌려차기로 툴리의 안면을 강타하자 이빨이 부러져 캐스터까지 날아가게 된다. 그로기 상태의 툴리를 고르듀가 가격하려 하자 심판이 제지하는데 호리온은 제지하지 말고 걷어차게 놔두라고 고함을 친다. UFC 초창기 시합은 이처럼 마우스 피스나 글러브 같은 선수 보호장비나 반칙 규정도 제대로 없는 말그대로 무규칙 격투시합이었다. 게다가 초창기 UFC 에 출전한 선수들이 발레투도를 경험했던 브라질 선수들처럼 수준이 높거나 능숙한 올라운드 파이팅을 구사한게 아니라, 일부를 제외하곤 수준이 높지 않고 이종격투에 생소한 격투가들이라 경기는 필요이상으로 잔인해 졌다. 또 경기의 홍보도 권투나 레슬링 같은 스포츠 격투시합이 아니라 '잔인한 싸움'에 초점이 맞춰져 있기 때문에 관중들도 격투관전보다는 오로지 잔인함을 보려는 경우가 많았고 이것이 UFC가 유혈 이벤트에서 격투 스포츠로 전환하는데 애를 먹었던 이유이기도 하다. 그러나 의도야 어쨌든 간에 이런 잔인함이 세계 격투시장에 큰 충격을 준 것만큼은 사실이다.

 

어쨌든 호리온의 의도대로 테일라 툴리는 탈락했고 제랄드 고르듀는 발등에 부상을 입게 된다. 호이스의 두번째 상대는 켄 웨인 ?락이었는데, 이 시합이 일본에서 이종격투기대회가 만들어지게된 직접적인 계기가 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켄 ?락은 당시 일본에서 가장 공격적이고 유능한 프로레슬러들의 실전 격투장인 판크라스의 챔피언 이었다. '세상에서 가장 위험한 남자'라는 별명처럼 켄 ?락은 미국에서의 프로레슬링은 성에 안차 일본의 종합격투시합에 어 들어 챔피언이 되었고, 그 스스로도 일본에서도 켄이 세계 최강의 파이터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이런 명성에 어울리게 켄 ?락은 UFC 첫 시합에서 덴버 출신의 킥복서 패트릭 스미스를 힐훅으로 가볍게 꺾어 버리고 준결승전에 올라 호이스와 대적하게 된 것이었다. 사실 켄 ?락으로서는 UFC라는 시합에 큰 의미를 두고 있지 않았고 시합장에 오기전에는 호이스 그레이시가 누구인지도 몰랐다. 경기 이틀전에야 일본에서 미국으로 건너온 것만 봐도 그의 생각을 알 수 있다. 아니 호이스 그레이시라는 이름은 켄 ?락뿐 아니라 그 누구도 알지 못했기 때문에 이것이 시합이 끝난 후에 더욱 충격으로 작용했다. 그러나 이유야 어쨌든 간에 켄 ?락은 경기시작후 57초만에 호이스의 조르기에 의해 치욕적으로 패배하고 말았다. 경기후 켄은 어이가 없다는 표정을 지었는데 일본의 격투 관계자들이나 팬은 어이가 없다기 보다는 경악에 가까운 상태였다. 일본에서 상대할 자가 없다는 켄 ?락을 허약해 보이는 몸으로 그토록 쉽게 이겨버리는 호이스와 그레이시 주짓수란 기술에 일본인들은 경악하고 열광하기도 했다. 그리고 호이스가 UFC 대회를 3연패하고 힉슨이 발레투도 저팬을 제패하자, 그레이시 주짓수를 연구하고 극복해서 일본 격투의 자존심을 지키자는 의도가 오늘날의 프라이드 FC라는 대회를 탄생하게 된 출발점이 되었다.

 

결승은 호이스 그레이시와 WKA 킥복싱 삼연패의 케빈 로지어를 두들겨 패고 올라온 제랄드 고르듀가 맞붙게 되었다. 호이스가 쉬운 상대로 꼽은 제랄드 고르듀는 보통 선수가 아니다. 92년 세계 사바트 선수권 우승에다 네덜란드 가라데 7년 연속 우승, 세계 가라데 선수권 6위와 각종 이종격투 출전으로 일본에서도 팬이 많은 격투가다. 특히 UFC 이후 힉슨이 참가하는 발레투도 제팬에서 일본 최고의 주짓수 마스터라는 별칭의 나카이 유키의 눈을 실명하게 만들 만큼 카리스마 넘치는 파이터라 켄과 더불어 일본 격투만화에도 종종 등장할 정도이다. 그러나 제랄드의 치명적인 단점은 그라운드에 무지하다는 점이었다.

'그라운드가 바다라면 나는 상어다. 그리고 대부분의 사람들은 헤엄조차 할 줄 모른다.'라는 장자크 마차도의 말처럼 이종격투에서 그라운드를 모른다면 상어가 우글대는 바다에 맨몸으로 뛰어드는 것과 같다. 게다가 제랄드 고르듀는 테일라 툴리와 케빈 로지어와 싸워서 얻은 부상으로 제 실력을 발휘할 수가 없었다. 그리고 링닥터를 통해 고르듀의 상태를 그대로 전해들은 호리온이 호이스에게 어떤 지시를 내렸는지는 안 봐도 뻔한 일이다. 이에 대해 고르듀는 '호이스가 좋은 선수인 것은 분명하지만 링닥터와 대전짜는 사람이 도와 준다면 그만큼 우승하기 쉬워지는 것이죠.'라며 불만을 토로했다. 결국 호이스는 고르듀의 부상 부위를 집중적으로 노리며 안전하게 경기운영을 했고 마침내 고르듀를 넘어뜨려 목 조르기로 승리한다. 마침내 미국에서 열린 최초의 이종격투대회에서 호이스와 그레이시 주짓수가 챔피언에 오른 것이다.

 

UFC의 성공적인 개최는 호리온이 처음에 기대했던 효과를 훨씬 넘어서는 엄청난 것이었다. 호리온은 '그레이시 주짓수'를 특허로 등록했고 비디오 테잎사업과 캘리포니아 토랜스의 그레이시 아카데미 운영으로 매년 200만 달러를 버는 주짓수 사업가로 변신했다. 그리고 그의 가족과 친척들은 그레이시 주짓수의 세계적인 유명세에 힘입어 미국에 건너와 도장을 차렸다. UFC효과는 그레이시 가문에 국한된 것이 아니다. 일본과 미국, 유럽에서 UFC와 유사한 이종격투대회가 속속 개최되었고 그에 따라 브라질리안 주짓수와 그레이시 가문의 명성은 나날이 높아져 갔다. 호이스는 UFC제패후 자신이 최강이라고 말하지 않고 형인 힉슨 그레이시가 자기보다 10배는 강하다라는 발언을 해서 그레이시 가문에 대한 선망과 궁금증을 증폭시켰다. 힉슨 자신도 발레투도 제팬에서 우승하고 450전 무패라는 소문과 요가나 식이요법등으로 자신을 신비화하면서 더욱 그레이시라는 상품가치가 높아질 수 있는 계기를 만들었다.

 

켄 ?락을 비롯해 초창기 UFC에 출전한 선수들은 한결같이 입을 모아 UFC는 단지 그레이시 주짓수를 선전하는 도구에 지나지 않았다라고 말한다. 그레이시 주짓수의 역사와 성장과정을 훑어봄으로써 지금의 우리는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일이지만, 당시 선수들로서는 상당히 억울한 면이 없지 않았던 모양이다. 자신들이 그저 그레이시 주짓수를 빛내기 위한 들러리이자 희생양에 지나지 않았다는 생각이 들만도 하다. 그러나 세상에는 좋은 의도로 시작한 일이 안 좋게 끝나는 경우가 있고 단순히 속물적인 의도로 시작한 일이 유익한 방향으로 나아가는 일도 많다. 호리온 그레이시가 주짓수를 알려서 잇속을 채우려고 시작한 UFC지만, 결과적으로 현대 이종격투기가 탄생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으니 들러리에 섰던 선수들도 그것으로 노고에 대한 위로로 삼으면 어떨까 않을까 싶다. 마에다 미츠요에 의해 전해진 주짓수가 UFC에 이르는 과정을 살펴 보면, UFC는 자신들의 기술의 강함을 믿고 그것을 증명하는 일을 70년간 지속한 그레이시 가문에게 내린 하늘의 선물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든다. UFC는 브라질리안 주짓수를 세계적인 무술로 도약시켰고 수많은 이종 격투단체를 파생시켰다. 십년이 지난 지금, 수 많은 격투가들이 이종격투라는 무대에서 그레이시 처럼 '챌린지'를 계속하고 있다. 예전의 그레이시家 처럼 자신의 무술이 '최강'이라는 것을 알리기보다는 이종격투경기가 '최강'의 격투흥행이라는 것을 알리기 위해 싸우고 있다는 것이 다르지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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