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를 보면 한 개인이든, 한 나라든 역경과 고난이 없었던 개인도, 나라도 없습니다. 살아 있는 모든 생명들에게는 고난이 있고 고통이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의 인생은 장애물 경기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 장애물이 없이 인생을 살아갈 수는 없습니다. 하나의 장애물을 넘겼다고 생각이 되면 또 다른 장애물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이것은 성도의 삶에도 결코 예외일 수는 없습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하나님의 사람 느헤미야가 기도하고 마음의 비전을 받아서 자신의 조국 예루살렘에 돌아가 허물어진 예루살렘 성벽을 재건하는 일에 착수합니다. 그런데 그는 그 일을 착수하자마자 여러 장애물들을 만나게 됩니다. 그러나 그는 이 모든 장애물들을 뛰어넘어서 마침내 자신에게 주어진 사명을 완수합니다.
오늘 우리도 개인적으로나 혹은 국가적으로 너무 힘들어 보이는 장애물을 만날 수 있습니다. 아니 어쩌면 장애물 앞에 서 있는 분이 계실는지도 모릅니다. 우리는 동족상잔의 비극인 6․25가 끝난 지 60년이 넘었습니다. 그렇지만 60여년 전이나 지금이나 남과 북과의 관계는 본질적으로 달라진 것이 하나도 없어 보입니다. 지구상에서 유일한 분단국가로서 남과 북이 대치하고 있는 상황도 그렇고, 조그마한 한반도 주변을 둘러싼 국제 관계에서 주변 강대국들의 이해관계 속에서 샌드위치처럼 끼어서 강대국들의 눈치를 살펴야 하는 민족의 초라한 처지도 달라지지 않은 현실입니다. 거기에다가 북한의 핵개발 문제로 우리가 살고 있는 삶의 터전이 심각한 위협을 받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북한의 핵개발에 대한 대처방법을 놓고 벌어지고 있는 갈등도 그때나 지금이나 별반 다를 것이 없습니다.
최근에는 세계 경제가 침체의 길에 빠져드는 가운데 조선업을 중심으로 극심한 위기에 처하면서 그 동안 우리가 애써 노력하여 지켜온 경제적인 안정마저 하루아침에 잃어버릴 뿐만 아니라, 지난 우리의 부모님들이 경험했던 가난보다 훨씬 더 힘든 시절을 겪을 수도 있다는 위기의식이 팽배하고 있습니다. 그런가 하면, 남의 나라 이야기로만 생각했던 지진으로 인해 온 국민이 멘붕에 빠져 있기도 합니다. 한 마디로 말해서 지금 우리 앞에는 수많은 장애물들이 직접적이든 간접적이든 우리의 몸과 마음을 불안하게 만들고 있는 것이 오늘의 현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와 같은 오늘의 현실 속에서 우리가 직면하고 있는 장애물을 뛰어넘기 위해서 오늘의 본문에서 배워야 할 교훈은 무엇일까요?
첫째, 하나님이 허락하신 일에도 장애물은 있다는 사실을 기억하셔야만 합니다.
그렇습니다. 믿음의 사람에게도 장애물은 있습니다. 그것을 각오해야 합니다. 그것을 준비해야 합니다. 기억하십시오. 하나님이 허락하신 일에도 장애물은 있습니다. 느헤미야는 자기 조국의 안타까운 현실을 바라보며 기도했습니다. 그리고 기도하는 가운데 예루살렘 성의 재건을 계획했습니다. 드디어 자신이 모시고 있던 페르시아의 아닥사스다 왕에게서 허락을 받아내는 일에 성공합니다.
그런가 하면, 자신이 예루살렘으로 돌아가는 여정에서 부딪히게 될 모든 장애물들을 미리 생각했던 것으로 보여 집니다. 그래서 그는 예루살렘에 도착하기까지의 중간과정에서 겪게 될 불필요한 장애물을 제거하기 위해서 아닥사스다 왕에게로부터 미리 통과증을 받아냅니다. 한 마디로 느헤미야는 자신이 고국 예루살렘에 돌아가 무너진 성벽을 재건하는 일에 있어서 부딪히게 될 불필요한 장애물들을 미리 제거하는 일에 최선을 다했습니다.
느헤미야의 이러한 모습은 매우 성경적인 지혜로운 자의 모습이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할 수 있거든 너희가 모든 사람과 더불어 화평하라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화평하게 하는 자가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이라고 했습니다. 따라서 인생을 살아가면서 불필요한 장애물을 스스로 만들 필요가 없습니다. 어떤 사람은 일부러 문제를 만들어 스스로 인생을 불행하게 만드는 사람이 있습니다. 심리학자들의 표현을 빌리면 일종의 순교 망상증에 걸린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화평하게 하는 자(피스 메이커)에게 행복을 약속하지, 트러블 메이커에게 행복을 약속하지 않습니다. 행복하게 살려면 피스 메이커가 되어야 합니다. 트러블 메이커가 행복하게 사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제발 스스로 문제를 만드는 사람이 되지 마십시오.
그렇지만 여러분, 우리가 인생에서 불필요한 모든 장애물들을 제거하고 평화로운 인생의 삶을 살고 싶어도 살다보면 어쩔 수 없이 부딪히게 되는 관계의 장애물은 반드시 존재하기 마련입니다. 우리가 기도하고 문제를 피하고 최선을 다해서 준비하고, 또한 기도의 응답을 받은 일이라고 해도 여전히 어려운 장애물이 있을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느헤미야도 그랬습니다. 보십시오. 그는 기도하는 가운데 왕의 허락을 받아 고향으로 돌아왔습니다. 그는 그것이 기도의 응답임을 확신했습니다. 그리고 예루살렘 성벽을 재건하는 역사적인 작업에 착수하게 됩니다.
본문 8절을 다같이 읽도록 하겠습니다. “또 왕의 삼림 감독 아삽에게 조서를 내리사 그가 성전에 속한 영문의 문과 성곽과 내가 들어갈 집을 위하여 들보로 쓸 재목을 내게 주게 하옵소서 하매 내 하나님의 선한 손이 나를 도우시므로 왕이 허락하고.”
“내 하나님의 선한 손이 나를 도우시므로 왕이 허락하고.” 왕이 허락했다고 했습니다. 그것은 분명히 기도의 응답이었습니다. 그가 계획했던 예루살렘 성의 재건은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일이요, 그가 인도하신 일임이 분명해졌습니다. 그런데 느헤미야가 그렇게 해서 예루살렘에 돌아가서 성벽을 재건하고자 하는 계획을 시작하자마자 어떤 일이 일어납니까? 본문 10절을 다같이 읽도록 하겠습니다. “호론 사람 산발랏과 종이었던 암몬 사람 도비야가 이스라엘 자손을 흥왕하게 하려는 사람이 왔다 함을 듣고 심히 근심하더라.”
여기에 보면 산발랏과 도비야라고 하는 두 사람의 이름이 등장합니다. 그런데 본문 18절에 보면, 느헤미야가 예루살렘 성벽을 재건하기 위해 예루살렘의 주민들을 설득합니다. 하나님의 선하신 손이 나를 도우신 일과 아닥사스다 왕이 내려준 특혜에 대해서 이야기합니다. 그리고 그 말을 듣고 모두가 일어나 건축을 하자고 말하면서 힘을 내어 성벽 재건에 참여합니다.
그런데 그렇게 모두가 힘을 내어 성벽을 재건하는 일에 참여하는데 어떤 일이 일어납니까? 본문 19절을 다같이 읽도록 하겠습니다. “호론 사람 산발랏과 종이었던 암몬 사람 도비야와 아라비아 사람 게셈이 이 말을 듣고 우리를 업신여기고 우리를 비웃어 이르되 너희가 하는 일이 무엇이냐 너희가 왕을 배반하고자 하느냐 하기로.”
역사를 보면, 느헤미야 이전의 과거에도 예루살렘 성벽을 재건하고자 하는 시도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때에는 아닥사스다 왕이 반대를 했었습니다. 이러한 역사적 정황을 가지고 이들은 예루살렘이 아닥사스다 왕을 배반하려고 하는 것이 아니냐면서 모함을 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보십시오. 분명한 확신을 가지고 의욕을 가지고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시작하자마자 느헤미야와 백성들은 반대의 저항 앞에 부딪히게 된 것입니다.
그들이 왜 그랬을까요? 그들은 본질적으로 이스라엘 백성들이 잘되는 것을 원하지 않았던 사람들입니다. 다시 한 번 본문 10절을 확인해 보십시오. 다같이 읽도록 하겠습니다. “호론 사람 산발랏과 종이었던 암몬 사람 도비야가 이스라엘 자손을 흥왕하게 하려는 사람이 왔다 함을 듣고 심히 근심하더라.”
그들은 이스라엘 자손의 흥왕을 원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의 부흥을 원하지 않았습니다. 그렇다면 이 사람들은 마귀입니다. 마귀의 백성들입니다. 적어도 이 사람들의 배후에는 마귀의 전략과 방해 공작이 있었다는 사실을 부인할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여기에서 우리는 이런 질문이 생기지 않을 수 없습니다. 느헤미야가 시작한 일은 분명히 하나님께 기도한 일이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축복 속에서 시작한 일입니다. 그런데 그 일을 시작하자마자 부딪히게 된 반대가 마귀의 역사였다면 하나님께서는 어쩌자고 이 일을 허락해 놓고 동시에 사탄의 방해를 허용하시는 것입니까?
대답은 저도 모릅니다. 그렇지만 여기에는 하나님만이 아시는 어떤 이유가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추적할 수 있는 한 가지 가능한 이유가 있다면, 그것은 이런 장애물 때문에 느헤미야와 백성들은 긴장의 끈을 풀 수가 없었을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은 계속해서 기도하며 하나님을 의뢰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 시점에서 우리가 기억해야 할 명백한 사실이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허락하신 일,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에도 어려움이 있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는 이것을 미리 준비할 필요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기뻐하시고 허락하신 일에도 어려움은 있습니다.
우리가 잘 아는 찬송가 가운데 이런 찬양이 있습니다. “나의 갈길 다가도록 예수 인도하시니 무슨 일을 만나든지 만사형통하리라 무슨 일을 만나든지 만사형통하리라.”
이 찬송가의 가사처럼 우리 기독교인들은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일은 만사형통할 것이라고 생각할 때가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기독교인들의 실수라고 생각을 합니다. 잊지 마십시오. 하나님께서 기뻐하시고 허락하신 일에도 얼마든지 어려움이 있을 수가 있습니다. 우리는 이것을 마음으로 미리 준비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이 허락하신 일이라고 해서 만사형통은 아닙니다. 하나님이 허락하신 일에도 장애물은 얼마든지 존재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기도하고 허락을 받아 착수한 일에 장애물이 있다고 해서 이것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이 아닐 것이라고 속단하거나 포기하지 마십시오. 오히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이어서 사탄이 질투하는 것이라고 판단하고 강하고 담대해져야 합니다.
중요한 것은 어떻게 해서 이런 일이 우리에게 왔느냐고 질문할 것이 아니라 우리가 어떻게 이 장애물을 뛰어넘을 것인가를 묻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정말 하나님의 계획을 확신하고 주님께서 허락하셔서 이 일이 시작되었다고 한다면 어떤 경우에도 이 장애물은 극복되어야 한다는 믿음으로 이 장애물에 도전하셔야 합니다. 이런 사람만이 장애물을 뛰어넘기에 성공할 수가 있습니다. 우리 모두가 인생에서 만나게 되는 장애물을 믿음으로 뛰어넘으시기를 축복합니다.
동물들 가운데 장애물을 가장 잘 뛰어넘는 동물이 개라고 합니다. 그런데 우리가 장애물을 뛰어넘지 못한다면 어떤 사람이 될까요? 개보다 못한 사람이 됩니다.
유머 가운데 개가 다시 해석한 개에 관한 속담이 있습니다. 예를 들어서, “하룻강아지 범 무서운 줄 모른다.” 범 무서운 줄을 모르는 하룻강아지, 이것이야말로 개의 타고난 용맹성을 가르치는 말이다. 얼마나 용기 있는 개입니까? “복날 개 패듯 한다.” 개는 어떤 시련과 역경도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다. “닭 쫓던 개가 지붕을 쳐다본다.” 이것은 무슨 뜻인가 하면, 개는 어떤 일이 있어도 좌절하지 않고 저 높은 곳을 바라본다.
그렇다면 우리가 역경과 장애물을 뛰어넘지 못한다면 정말 개보다 못하지 않겠습니까? 중요한 것은 이것입니다. 우리는 어떻게 장애물을 뛰어넘을 수 있을 것인가?
두 번째, 하나님을 신뢰함으로 장애물을 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본문 20절을 다같이 읽도록 하겠습니다. “내가 그들에게 대답하여 이르되 하늘의 하나님이 우리를 형통하게 하시리니 그의 종들인 우리가 일어나 건축하려니와 오직 너희에게는 예루살렘에서 아무 기업도 없고 권리도 없고 기억되는 바도 없다 하였느니라.”
느헤미야는 이렇게 말합니다. “하늘의 하나님이 우리를 형통하게 하실 것이다.” 느헤미야의 이 말은 그가 얼마나 하나님을 믿고 신뢰하고 있는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지금은 비록 장애물을 만나서 어려움을 겪고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결국에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형통하게 해 주실 것이라는 사실을 믿는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느헤미야가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이 구체적으로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요? 두 가지로 대답할 수가 있을 것입니다.
첫째로, 하나님께서 나에게 맡기신 그 사명을 믿는다는 것입니다.
본문 20절에서 느헤미야는 “하늘의 하나님이 우리를 형통하게 하시리라”고 하면서 이어서 “그의 종들인 우리가”라고 고백을 합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종이라는 것입니다. 지금 우리가 이 일을 하는 것은 하나님의 종으로서 하나님이 맡겨주신 일에 대해 심부름을 하기 위해서 일을 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 일을 기필코 승리할 것이다. 이 일이 그냥 이 일이 아니라, 내 일이 아니라, 그냥 내가 한 번 하고 싶은 일이 아니라 하나님의 종으로서 하나님이 맡겨주신 일이다. 우리는 이것을 사명이라고 합니다. 우리는 지금 하나님의 종으로서 그분의 일을 하기 위해 여기에 있습니다. 느헤미야가 예루살렘의 성벽을 재건하는 일에 착수한 것은 하나님의 종으로서 그에게 맡겨진 사명이라고 믿었습니다.
지금 느헤미야가 하고자 하는 일은 사실 설교도 아니요 전도도 아닙니다. 심지어 성전 건축도 아닙니다. 그냥 허물어진 성벽을 쌓는 일입니다. 그러나 느헤미야는 이 일을 하나님의 거룩한 일로 확신했습니다. 그는 이 일을 세속적인 일이 아니라 거룩한 일, 곧 거룩한 하나님의 사명으로 받아들였습니다. 그것이 또한 그로 하여금 어떤 장애물에도 불구하고 최선을 다하게 했습니다.
저는 종교개혁이 인류 역사에 기여한 것들 가운데 가장 중요한 기여가 있다면 그것은 “모든 직업의 성직성”을 깨닫게 한 일이라고 생각을 합니다. 제가 이렇게 설교를 하고 목회를 하는 것을 성직이라고 할 것입니다. 그러나 목회만 성직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여러분이 지금 가지고 있는 직업도 똑같이 성직입니다. 한 마디로 말해서 직업에는 빈부귀천이 있는 것이 아니라, 모든 직업이 다 성직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주신 거룩한 직업이라는 것입니다.
종교개혁자 마틴 루터는 이런 말을 했습니다. “만일 소젖을 짜는 하녀가 하나님이 이 일을 나에게 맡기셨다는 확신을 가지고 그 일에 임한다면 그녀의 직업은 바로 성직이다.” 직업의 내용이 직업의 성직성을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참으로 중요한 것은 직업에 임하는 동기, 하나님께서 이 일을 나에게 맡겨주셨다고 믿음으로 받아들인다면 그 일은 거룩한 일이 될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직장에 갈 때 그냥 먹고 살기 위해서 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나에게 이 일을 맡기셨으며 하나님의 일을 하기 위해 직장에 나간다면 이 땅의 사회는 얼마만큼 달라질 수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만일 오늘날 이 땅의 그리스도인들만이라도 자신의 직업에 대해 이런 거룩한 사명감을 가지고 있다면 우리의 사회는 얼마나 달라지겠습니까?
느헤미야가 방해와 위협이라는 장애물 앞에서도 예루살렘 성벽을 재건하는 일을 포기하지 않겠다고 선언한 이유는 그 일이 하나님께서 맡기신 거룩한 사명이라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유명한 아프리카의 선교사 리빙스턴은 그가 선교의 숱한 장애물을 만났음에도 불구하고 포기하지 않았던 이유를 이렇게 말했습니다. “사명이 다할 때까지 나는 죽을 수 없었다.”
하나님께서 나에게 맡기신 이 선교적 사명을 다할 때까지 나는 결코 죽지 않을 것이다. 그렇습니다. 인생의 여정에서 수많은 장애물들을 만나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나에게 이 일을 맡기셨다는 사명을 붙잡을 때 우리는 그 어떤 장애물도 뛰어넘을 수 있을 것입니다.
둘째로, 하나님의 형통하게 하심을 믿는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섬기는 일이 하나님께서 나에게 사명으로 맡기신 일임을 확신할 수 있다면, 동시에 하나님께서는 그 일을 형통하게 하도록 도우신다는 사실을 믿어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기뻐하시고 뜻하신 일인데 그분이 가만히 있으시겠습니까? 방관하시겠습니까? 주님께서 기뻐하신 일인데 그대로 좌절하도록 버려두시겠습니까? 그럴 수 없는 것입니다. 기억하십시오. 하나님께서 기뻐하심으로 시작하신 일이라고 한다면 하나님께서 반드시 그 일을 끝내주실 것입니다.
물론 하나님이 기뻐하고 허락하신 일에도 하나님이 허락하신 어떤 장애, 어떤 난관은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어떤 장애물을 만났을 때 우리는 느헤미야처럼 하나님의 형통하게 하심을 굳게 믿어야 합니다.
느헤미야는 산발랏, 도비야, 게심과 같은 사람들의 방해를 받으면서 본문 20절에서 뭐라고 외치고 있습니까? “하늘의 하나님이 우리를 형통하게 하시리니”
이것이 느헤미야의 믿음이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일을 시작하게 하신 이가 또한 일을 마치게 하실 것을 믿으십시오. 장애물은 좀 있겠지만 우리는 기어이 그 일을 해낼 것입니다. 그것이 빌립보 교회 교인들을 격려하던 사도 바울의 믿음이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빌립보서 1장 6절에서 이런 말을 했습니다. 말씀을 다같이 읽도록 하겠습니다. “너희 안에서 착한 일을 시작하신 이가 그리스도 예수의 날까지 이루실 줄을 우리는 확신하노라.”
그렇습니다. 일을 시작하게 하신 하나님이 그 일을 끝내시는 하나님이신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우리는 장애물을 뛰어넘을 것이고, 마침내 그 일을 완성하고야 말 것입니다. 이것은 허드슨 테일러와 그의 동역자들이 중국의 오지에서 선교하며 때로 설명하기 어려운 난관에 부딪히면서도 너무 쉽게 사람들의 도움을 호소하며 손을 벌리지 않기로 결심한 이유였습니다. 허드슨 테일러와 동역자들은 중국의 오지에서 선교를 하면서 이렇게 다짐을 했습니다. “우리는 어떤 경우에도 사람들에게 너무 쉽게 손을 내밀지 말자. 하나님이 기뻐하면서 우리가 이 자리에 왔다면 하나님께서 도우실 것이다.”
허드슨 테일러는 이런 말을 자주 강조했습니다. “하나님의 뜻에 맞는 하나님의 일에 하나님의 지원이 결코 부족할 수 없다.”
후일에 중국 내지 선교회를 계승한 OMF는 이 원칙을 “믿음 선교”라고 불렀습니다. 그들은 교회를 찾아다니면서 사람들에게 도와달라고 요청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일이라면 하나님께서 도우실 것이라고 믿고 있습니다. 그리고 선교 현장에서 하나님께서 성실하게 도우시는 역사를 허다하게 경험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사랑하는 여러분, 중요한 것은 내가 서 있는 자리가 얼마나 어려운 자리인가가 아닙니다. 내가 지금 얼마나 좋은 환경을 누리고 있느냐도 아닙니다. 정말 중요한 것은 내가 하나님이 원하시는 자리에 서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만약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하나님의 뜻과 합당한 자리에 서 있다면 하나님은 반드시 우리를 도와주실 것입니다. 이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것은 우리의 가정도, 민족도 마찬가지입니다. 저는 우리가 우리 민족을 위해서 먼저 기도해야 할 제목은 단순히 경제 회복도 아니고, 남북통일도 아닙니다. 그것보다 훨씬 더 중요한 기도의 제목이 있다면 우리 민족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민족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경외하고 하나님을 신뢰할 수 있는 민족이 되게 해 달라고 기도하셔야 합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기뻐하시면, 우리 민족을 기뻐하시면 하나님은 하나님의 때에 통일 한국을 허락하실 것입니다. 경제대국도 허락하실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우선순위를 분명히 하는 것입니다.
저는 우리 민족사의 비극적인 분단 상황에 대해서 가끔 이런 의문을 가질 때가 있습니다. “하나님은 세계 어느 나라에서도 유례를 찾아보기 힘든 복음의 부흥을 주셨습니다. 짧은 기간에 놀라운 부흥의 축복을 주셨습니다. 그리고 이 땅의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은 끊임없이 통일을 위해 기도해 왔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남북분단은 계속되고, 철책선을 무너뜨리지 않고 그대로 두시는 이유는 도대체 무엇 때문인가?”
이런 의문을 던질 때마다 이런 결론을 내리게 됩니다. 어쩌면 그대로 두는 것이 우리 민족에게 더 유리하기 때문일는지도 모른다. 그것 때문에 우리가 긴장을 풀지 않고, 그것 때문에 하나님 앞에 겸손할 수 있고, 그것 때문에 기도할 수 있고, 그것 때문에 하나님의 도움을 구할 수가 있다면 하나님께서는 아직도 때가 아니라고 판단하고 계실는지도 모릅니다.
실상 우리 민족은 너무 쉽게 잊어버리는 민족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광야에서 나온지 사흘만에 하나님의 은혜를 잊어버렸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작심사흘이라고 하지만, 그 사흘도 가지 못해서 하나님의 은혜를 잊어버릴 것입니다. 그래서 통일이 되고 배가 부르게 되면 우리는 쉽게 하나님의 은혜를 잊어버릴는지도 모릅니다. 그것은 이 땅에 더 큰 재앙을 가져오는 결과가 될는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우리 민족으로 하여금 하나님을 더 의지하게 하고, 더 기도하게 하시고자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장애물일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합니다. 만일 그렇다면 우리는 이 장애물을 비관하기보다는 감사하며 더 기도하는 민족, 하나님께 더 나아가는 민족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 개개인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에게 장애물이 없었다면 우리의 교만은 어쩌면 하늘을 찌르고 남았을는지도 모릅니다. 그 장애물이 없었다면 우리는 하나님을 버리고 세상으로 달려갔을는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우리로 하여금 더 자고하지 않게 하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우리들에게 장애물을 허락하실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 앞에 더 겸손할 필요가 있습니다. 더욱 낮아져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 더욱 가까이 나아가 하나님을 진심으로 신뢰하는 민족이 되는 것, 그것이 우리가 나라와 민족을 위한 기도의 제목이어야 합니다.
과거 2003년에 미국 일리노이 주에서 열린 US오픈 골프 경기장에서 짐 퓨릭이라는 의외의 선수가 우승을 차지했습니다. 그는 누구처럼 변변한 스승 한 사람을 둬 본적이 없었습니다. 8자 변칙 스윙을 하는 선수였습니다. 그는 우승 소감을 묻는 자리에서 우승의 비결을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나를 유일하게 믿어준 아버지이자 나의 코치를 따라 한 걸음 한 걸음 최선을 다한 결과였습니다. 이 모든 기쁨을 내 아버지에게 드리고 싶습니다.” 그날이 마침 아버지의 날이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그의 이 우승 소감이 많은 사람들에게 따뜻한 감동을 주었다고 합니다.
한편 그날 이 대회의 우승자로 일찌감치 점쳐 왔던 골프 천재 타이거 우즈는 스윙 한 번 제대로 못한 채 20위라는 굴욕적인 성적을 남겼습니다. 당시 무척 화가 난 표정이 우승한 짐 퓨릭과 함께 크로즈가 되면서 전 세계에 소개가 되었습니다. 그때 타이거 우즈가 스윙을 하려는 순간 어디선가 휘파람 소리가 들려왔습니다. 그는 이 휘파람 소리에 마음이 흔들리면서 스윙이 무너졌습니다. 그때 타이거 우즈는 신경질 나는 표정으로 쏘아보았습니다. 신문들은 앞을 다투어 그 사진을 실으면서 이런 헤드라인을 실었습니다. “휘파람에 무너진 우즈!” 그런 그에게 어떤 기자가 그날 경기 소감을 물었을 때 그는 이렇게 대답을 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나는 한 순간도 골프 앞에 교만할 수 없었습니다. 나는 골프 앞에 항상 겸손하고 진지해질 수 밖에 없었습니다. 골프는 인생을 닮았습니다.”
그런가 하면, 그때 한국을 대표한 최경주 선수는 그날 불행하게도 컷오프 탈락이라는 시련을 겪어야 했습니다. 일반적으로 골퍼들은 경기에 나가서 이런 결과가 나오면 대개 며칠 동안은 낙심하고 슬럼프에 빠진다고 합니다. 그러나 최경주 선수는 다음날 US오픈이 진행되는 경기장 바로 옆의 연습장에 나타나서 다시 연습에 몰두했다고 합니다. 그런 그에게 감동을 받은 한국인 기자가 떨어진 소감이 어떠냐고 소감을 묻자 그는 담담하게 대답했습니다. “다음 경기가 있지 않습니까?”
그렇습니다. 경기는 아직 끝나지 않았습니다. 다음 경기가 저와 여러분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인생은 마치 마라톤 경기와 같습니다. 더 정확하게 말하면 마라톤 장애물 경기입니다. 하나의 장애물을 비켜 가면 또 다른 장애물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장애물들을 통과할 때마다 우리는 실망과 희망, 슬픔과 기쁨, 좌절과 영광을 함께 얻게 됩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어떤 경우에도 아직은 긴장의 끈을 풀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넘어지더라도 일어나서 계속해서 달려야 합니다. 왜냐하면 인생은 경주이며, 그 경주는 아직 끝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마지막 휘슬이 불릴 때까지 우리는 믿음으로 일관성 있게 달려야 합니다. 기도하고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하며 내 앞에 있는 장애물을 하나하나 넘어서야 합니다.
이 땅에 인간의 모습으로 오신 예수님께서도 그렇게 사셨습니다. 예수님은 이 땅에서 짧은 생애를 사셨지만 그분에게도 많은 장애물이 있었습니다. 그렇지만 예수님은 그 장애물들을 믿음과 기도로 이겨내셨습니다. 그리고 마지막 장애물인 십자가를 앞에 둔 전날 밤에 겟세마네 동산에서 이런 유명한 기도를 하셨습니다. “아버지여, 할 수 있거든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 그러나 내 뜻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옵소서.”
그는 다가오는 십자가의 고난을 단순한 고통으로 받아들이지 않고, 하나님의 뜻으로 받아들였습니다. 그리고 그 뜻을 잘 이루게 해 달라고 기도하셨습니다. 그렇게 기도하고 있던 예수님의 이마에 흐르던 땀방울은 변하여 핏방울이 되었다고 성경은 증거하고 있습니다. 성경은 이렇게 기도하고 있던 예수님에게 하늘의 천사들이 나타나 힘을 북돋아 주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기도하셨고, 하나님의 뜻을 수용했습니다. 그리고 이튿날 십자가를 지시고 골고다 언덕으로 올라가셨습니다.
그렇습니다, 여러분! 그분이 십자가에서 피 흘리심으로 저와 여러분이 깨끗함을 얻었습니다. 그분이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저와 여러분이 새로운 생명을 얻었습니다. 그가 다시 사셨기에 우리도 다시 일어나 승리할 수 있다는 사실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렇다면 사랑하는 여러분, 예수 그리스도를 당신의 코치로 영접해 보십시오. 그분을 인생의 구주와 주님으로 삼고 그분의 발자취를 따라가 보십시오. 그리고 성령께서 주시는 능력을 힘입고 삶에 의욕을 불태우십시오. 그러면 새로운 인생이 시작될 것입니다. 보람과 의미가 가득한 인생이 열려지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마침내 우리는 그 장애물을 뛰어넘어 어느 날 내 인생의 마지막 순간 앞에서 우리의 주님이신 예수님처럼 이렇게 고백하게 될 것을 기대하십시오. “하늘에 계신 아버지여, 아버지께서 저에게 하라고 하신 그 일을 제가 다 이루었습니다.” 이것이 저와 여러분의 고백이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