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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한 페이지 요약 및 견해
‘우리’나라 사람들은 유독 ‘우리’라는 말을 많이 쓴다. 어떤 것을 언급할 때마다 ‘우리’가 아닌 ‘나’라고 지칭하는 순간, 괜스레 이기적인 것 같다는 느낌을 받아서일까. 이 용어를 자주 쓰게 된 명확한 이유는 모르겠으나, ‘우리’라고 지칭하면 이상한 부분까지도 붙여서 쓰는 순간들이 많다. ‘우리’ 남편, ‘우리’ 아내……. 아주대학교에서 심리학을 가르치고 있는 김경일 교수는 ‘우리’라는 말을 많이 쓰는 한국 사람들은 무언가 좋은 것을 얻기 위한 ‘접근동기’보다 무언가 좋지 않은 것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한 ‘회피동기’가 강하다고 얘기한다. 행복보다는 안도감을 좇고, ‘회피동기’가 충족되지 않았을 경우 불안감을 느낀다는 뜻이다. 그래서인지 많은 사람들이 스스로가 생각하는 삶의 기준을 세웠을 때 그게 비록 소수가 원하는 길이라 할지라도 기꺼이 전진하는 것이 아니라, 모두가 안전하다고 생각하는 길을 자신이 지향하는 바와 관계없이 선택하는 것이 아닐까 싶다. 그래서 안정적인 돈벌이 수단이 될 수 있는 검사, 판사, 변호사, 의사, 공무원 등의 직업은 항상 직업 선호도 상위를 다툰다.
모든 직업이 그러하지만, 특히 법조계는 단순히 ‘회피동기’만으로 선택하면 안된다. 억울한 사람들, 목소리를 내기 어려운 사람들을 대변해야 하는 만큼 직업에 대한 소명의식이 필요하며, 자신만의 돈벌이 수단으로만 여기면 안 되기 때문이다. 변호사는 상대방이 국가라 할지라도 의뢰인의 편에 서서 싸움을 벌여야 하는 존재이다. 의뢰인들 중에는 성적소수자, 억울함을 호소하는 사회적 약자도 있을 테고, 판례를 찾아보기 힘든 새롭고 난해한 사건을 맡아달라고 요청하는 사람들도 있다. 다양한 사람들과 사건을 마주하게 되는 건 판사와 검사도 다르지 않다. 그래서 이런 일들을 잘 해내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폭넓은 경험과 지식, 그리고 공감능력이 필요한 건 당연지사. 하지만 <헌법의 풍경>으로 접한 법조계는 그런 역량을 갖고 있다고 보기 어려웠다. 저자가 예로 든 여러 판례들 속에서 법조계에 있는 사람들이 국가가 아닌 의뢰인들의 편에 서서 공정하게 판정을 내렸다고 생각하기 힘들었다. 또한 저자의 말대로 절대로 가족적이어서는 안 되는 법조계가 실상은 사법연수원 몇 기냐에 따라 그 법률가의 위치가 좌우되는 풍토가 만연하다. 그런 곳에서 소신있게 다른 목소리를 내기란 쉽지 않을 것이다. 이런 그들만의 세상이기에 세상 밖에 있는 사람들의 이러한 풍토를 알기가 어려웠는데, 그런 사실들을 같은 법조계에 있던 김두식 저자가 <헌법의 풍경>에 담은 것이다.
저자 스스로 칭하듯, 여느 법조인들과 달리 2류의 삶을 살았기에 이러한 책을 펴내는 것도 가능했을 것이다. 법조계에 몸담았던 시절, 그들만의 세상 속에서 벌어지는 부조리함을 고민 끝에 뿌리치고 다른 삶을 살아낸 그 소중한 경험, 현재까지 경북대 법학전문대학원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면서 접하게 되는 아쉬움 등이 녹아들어 오랜 기간 사람들이 찾는 책을 펴낼 수 있었다고 생각한다. 물론 저자가 서두에 밝히고 있는 말처럼, 이 책이 오랜 시간이 지났는데도 무용지물이 되지 않은 이유가 자유권에 속하는 기본권이 아직까지도 지켜지지 않는 암울한 현실을 반영하는 것 같아 마음이 무겁다. 하지만 이 책으로 인해 필자와 같이 법에 무지하거나 관심이 없던 사람들이 법이 삶과 크게 괴리되어 있지 않음을, 오히려 깊게 관여하고 있어 반드시 생각해보아야 할 부분임을 알게 되어 기쁘다.
특히, ‘그럼에도 불구하고’를 헌법 정신으로, ‘인정한다. 그러나’를 잘못된 판례의 폐해로 언급하는 부분이 가장 인상깊었다. 일상에서도 표현의 자유와 같은 기본권과 사회적 이해가 충돌하는 사건들을 심심찮게 보게 된다. <제국의 위안부>라는 책에서 위안부를 ‘자발적 매춘부’라 칭한 박유하 교수 기소사건이 그렇고, 어린아이가 지은 잔혹시에 대한 논란도 역시 표현의 자유를 지켜야 한다는 사람들과 문제가 없다고 받아들이기 힘들다는 사람들 간 여러 논쟁이 있어왔다. 필자 역시 표현의 자유를 어디까지 인정해야 하는지에 대해 오랜 기간 고민해 왔었는데, 위에 언급한 저자의 2가지 표현이 정답인 듯하다. 법조계는 개인 또는 사회적으로 문제가 될 수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본권인 표현의 자유를 보장해야 한다. 개개인은 표현의 자유가 보장되어야 하는 건 ‘인정한다. 그러나’ 스스로의 생각은 이렇다는 입장이 있어야 한다. 다시 말해, 개개인의 입장은 종합, 절충보다는 소신있는 치우침이 있어야 하지만, 법은 어느 한쪽으로 치우침 없이 헌법정신에 준하여 기본권을 침해하지 않도록 항상 경계해야 한다는 것이다.
2. 나를 확장시킬 책 속의 내용들
p. 10
‘신의 명령’과 같은 절대적인 규범이 사라진 세상에서 정의란 결국 올바른 절차와 합리적인 토론을 통해서 ‘함께 만들어가야 하는 것’일 수밖에 없습니다. 정의나 진리를 찾아가는 이런 과정을 일부 전문가들이 독점해서는 안 되며 그럴 수도 없습니다.
그런데 ㅈ어의를 찾아가는 그 과정에 시민이 당당한 주체로서 참여하기 위해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 하는 것이 국가, 법, 법률가, 인권의 문제입니다. 헌법은 국가를 언제든지 괴물로 변할 수 있는 위험한 존재로 바라봅니다. 헌법과 법률의 목적은 흔히 오해하듯 국민을 통제하는데 있는 것이 아니며, 오히려 국가 권력의 괴물화로부터 시민을 보호하는 데 있습니다. 그리고 헌법과 법률이 권력 통제라는 제 기능을 다하도록 돕는 일차적 책임은 변호사, 판사, 검사를 비롯한 법률가에게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나라 법률가들은 청지기라는 본래의 소명을 저버린 채 자기 집단과 권력자를 옹호하는 데 지식과 능력을 악용해온 아픈 역사를 가지고 있습니다.
이 책은 우리 법률가들이 그렇게 될 수밖에 없었던 왜곡된 법조 문화에 대해 설명하면서 그 결과로 주인을 잃고 길바닥에 나뒹굴게 된 여러 기본권들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p. 11
남을 비판한다는 것은 참으로 어려운 일입니다. 남을 비판한 그 잣대로 내가 비판받으리라는 것은 꼭 성경의 가르침이 아니더라도 매일의 일상 속에서 확인할 수 있는 진리입니다. 그걸 잘 알고 있으면서도 법조계를 이야기하면서 다른 사람들의 허물을 들춰내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게 지금도 마음에 걸립니다. 인격적으로 저보다 훨씬 훌륭한 분들인데도 세계관 차이로 제 비판의 대상이 된 분들게 마음 속 깊은 곳으로부터 사죄의 말씀을 드립니다.
p. 18
어렵게 말할수록 더 인정을 받는 법조계 출신답지 않게 노무현 대통령은 늘 일상의 언어로 사람들에게 다가가려 노력했습니다. 마음을 열고 대화하면 진심은 통하기 마련이라고 믿었습니다. 토론을 계속하다 보면 적절한 지점에서 합의가 이루어지리라 생각했고, 그런 대화와 토론을 가능케 하는 규칙과 절차를 마련하여 지키려고 노력했습니다. 그러나 우리 정치 현실은 그의 생각과 많이 달랐습니다. 탈권위적이고 솔직한 그의 어법은 품위 없고 부적절한 막말로 평가받았습니다.
p. 22
대화와 토론이 이루어지는 폴리스(polis)나 아고라(agora)는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습니다. 죽을 때까지 서로를 물어뜯는 원형경기장 아레나(arena)만이 남아 있을 뿐입니다. 차분하게 논리를 펼치고 자기 한계를 인정하며 상대방의 주장을 수용할 줄 아는 진지한 대화 참여자는 아레나에서 잠시도 숨을 쉴 수 없습니다. 아레나는 처음부터 검투사를 위한 공간이지 대화하기 위한 공간이 아닙니다.
p. 23
<헌법의 풍경>은 ‘말할 자유’보다 ‘말하지 않을 권리’에 초점을 맞춘 책입니다.
p. 32
내부 구성원들은 자연히 자기 검열에 나설 수밖에 없습니다. 어지간한 용기 없이는 이런 분위기를 거스르기 힘듭니다. 언론의 자유에 헌신한 기자나 프로듀서라 하더라도 개인적으로는 매월 급여를 받으며 승진을 기대하는 평범한 생활인이기 때문입니다.
p. 42
기본권을 지키고자 하는 투쟁에는 끝이 없다는 것입니다. 역사상 어떤 기본권도 기득권층의 일방적 시혜로 주어지지 않았습니다. 지금 이 순간에도 누군가는 기본권을 지키기 위해 생명을 건 싸움을 하고 있습니다. 앞으로 누가 집권하든 기본권 환경이 어떻게 개선되든, 어딘가에서는 이런 싸움이 계속될 겁니다. ‘권리 위에 잠자는 자는 보호받지 못한다’, ‘법의 목적은 평화이며 그 평화를 얻는 수단은 투쟁이다’라는 루돌프 폰 예링(Rudolf von Jhering)의 고전적인 명제로 돌아가는 거죠. 예링이 적절하게 지적한 것처럼 노예제나 농노제의 폐지, 토지소유권이나 영업 혹은 신앙의 자유와 같은 모든 권리는 수 세기에 걸쳐서 치열하게 계속된 투쟁으로 쟁취되었습니다. 이 사실은 지금도 변함이 없습니다. 시대가 변하고 새로운 기본권이 만들어질 때에는 당연히 기득권과의 투쟁이 필요합니다. 누구나 자기 시대에 주어진 투쟁의 의무를 집니다. 한때는 투쟁의 선두에 섰던 세대도 어느 시점에 이르면 새로운 세대가 벌이는 투쟁의 대상이 됩니다. 예링의 말대로 이미 생성된 것은 새롭게 생성된 법에 의해 밀려날 수밖에 없는 까닭입니다.
p. 43, 44
기본권 침해는 지금 이 순간에도 우리나라는 물론 세계 구석구석에서 일어나고 있습니다. 스탠리 코언(Stanley Cohen)이 적절히 지적한 것처럼, 이런 우울한 소식을 접할 때마다 사람들은 흔히 그 고통을 모른척하거나 이미 알았던 사실도 미처 몰랐다는 듯이 반응합니다. 그렇게 해야 마음이 편하기 때문입니다. 계속 그런 식으로 반응하다 보면 어느 순간 피해자로 변한 자신을 발견하게 됩니다. 정규직 노동자로 살면서 비정규직 문제를 나 몰라라 하다가 갑자기 해고당할 위기에 몰리는 게 좋은 예입니다. 당연히 내가 피해자가 되었을 때 이웃도 전혀 관심을 주지 않습니다. 이런 비참한 지경에 몰리지 않으려면 기본권 침해현장을 목격했을 때 당사자의 고통에 동감하는 습관을 갖는 것이 중요합니다.
p. 57
‘선의라 함은 어떤 사정을 알지 못하는 것이고, 악의는 이를 알고 있는 것이다.’ 우리 법전은 이와 같은 낱말 뜻에 따라 어떤 사정을 알지 못하는 사람을 ‘선의의 제3자’라고 부릅니다. 그런데 이 뜻은 우리가 일반적으로 사용하는 선의, 악의와는 전혀 다른 것이지요. 우리가 보통 사용하는 ‘선의’란 남을 위하는 마음, 남을 좋게 보는 마음을 뜻하고, ‘악의’란 남을 해치려는 나쁜 마음을 뜻합니다.
p. 58
일반인들과 다른 언어를 사용하는 것은 법률가들이 자신들만의 세상에서 고유한 특권을 누리는 출발점입니다. 법률가들은 일반인들이 모르는 언어로 가득 찬 법전 해석 권한을 독점함으로써 권력을 누리게 됩니다. 언어가 쳐준 장벽 덕분에 보통 사람들의 진입이 차단됨으로써 법률가들의 기득권이 보호받게 되는 것입니다.
p. 63
판결문도, 공소장도, 심지어는 변론 요지서도 모두 정답이 정해져 있었습니다. 그 정답은 바로 우리 대법원의 입장을 말하는 것이었지요. 판결문을 쓰는 형식도 선배 판사들이 써온 양식을 그대로 따라가야 했습니다. 자기 논리 대신 남(대법원)의 논리를 빌려 정답을 적어야 하는 시험 제도는, 그렇지 않아도 도망갈 구멍을 찾던 저에게 좋은 변명거리를 제공해주었습니다.
p. 65
한번 궤도를 이탈해보고 나니 ‘남과 다르게 사는 자유’를 알게 되었고, 그 자유에 기초한 선택은 이전보다 훨씬 더 수월했습니다. 마침내 좀 거칠더라도 ‘읽어야 할 책’ 대신 ‘읽고 싶은 책’을 읽는 길을 걷기 시작한 것이었습니다.
p. 66
보통 소크라테스식 강의라고 불리는 미국 법과대학원 수업 방식은 이처럼 미리 정답을 설정하지 않고 교수와 학생 사이에 오가는 대화와 토론을 통해 학생들의 논리적 사고를 증진시킵니다. 어차피 의뢰인의 요구에 따라 자기 입장을 정하는 것이 변호사의 삶이라면, 이처럼 정답 대신 자기 나름의 논리를 갖추도록 훈련하는 수업방식이 합리적일 수밖에 없습니다.
p. 69
학문 언어와 일상 언어 사이의 괴리가 법학만의 문제는 아니지만, 법학은 사회학, 정치학 등 다른 분야보다 그 정도가 훨씬 심합니다. 접근 자체가 불가능한 법조문과 법률 교과서들은 시민과 법률 사이에 넘을 수 없는 강을 만들게 됩니다.
p. 78
자신이 처한 형편을 설명한 후에는 전문가인(정확한 이야기하자면 전문가처럼 보이는) 저로부터 즉각적인 답을 얻기를 기대하는 것입니다. 그것도 그냥 답이 아니라 ‘유일한’ 해답을 기다리는 것이 보통입니다.
p. 88
당장 걸리는 것이 ‘일반 보통인’의 개념입니다. 도대체 누가 ‘일반 보통인’인가요? 여러분은 스스로 일반 보통인에 속한다고 자신할 수 있습니까? ‘일반 보통인’은 가상의 개념입니다. 누가 일반 보통인인지가 민주적 절차에 의해 결정되는 것도 아니고, 통계에 의해 정당화되는 것도 아닙니다.
p. 99
극단에 선다는 것은 개인적으로는 매우 행복한 일입니다. 극단에 서 있는 사람은 고민할 필요가 없습니다. 자신은 언제나 옳고, 남은 언제나 틀리기 때문에, 흔들리지 않는 자기 확신 속에서 행복한 삶을 살 수 있습니다. … 그러나 마음 아프게도 이런 분들이 누리는 자유는 다른 사람들의 불행이 됩니다. 이분들의 확신이 구현되는 세상은 다른 쪽 극단에 선 사람에게는 바로 지옥인 까닭입니다.
p. 101
자연법과 함께 일방적으로 기준을 정해줄 ‘사제’가 사라진 시대에는 정의를 찾기 위한 새로운 수단이 필요하게 되었습니다. 바로 ‘대화’ 또는 ‘절차’라고 하는 기준이 작동하기 시작하는 지점입니다. ‘대화’는 “나만이 절대적인 진리를 갖고 있는 것은 아니다.”라는 자각에서 출발합니다. 우리들 중 누구도 정답을 지니고 있지 않다는 것을 솔직히 인정하는 데서부터 대화가 시작되는 것입니다. 내가 잠정적으로 정답이라고, 정의라고 생각하는 것은 존재하지만, 그것은 상대방과 나누는 대화에 의해 언제든지 수정 가능한 것이어야 합니다. 상대방과 나누는 대화에 의해 내가 가진 정보의 양이 늘어나다 보면 분명히 어느 지점에선가 내 생각을 바꿔야 하는 순간이 찾아옵니다. ‘대화’란 다른 사람의 생각을 받아들임으로써 내 생각을 발전시켜 나가는 재미있는 작업입니다.
p. 119
국가에 대한 충성서약이 정당하려면, 그 국가가 절대적으로 선한 존재이며 그 선함이 변할 수 없는 것임이 전제되어야 합니다. 신에 대한 충성 서약은 신의 존재 자체가 절대적인 정의임을 인정한 사람들에게나 가능한 일입니다. 그러나 국가는 그런 절대적인 존재가 될 수 없습니다.
p. 140
밀그램과 짐바르도의 실험은 인간이란 과연 무엇인가를 생각하게 해줍니다. 우리는 과연 문명화된 존재일까, 아니면 그저 문명의 탈을 쓴 야만인에 지나지 않은 것일까.
… 우리들 모두는 어려서부터 ‘순종’을 최고의 미덕으로 받아들이며 살아온 사람들입니다.
p. 146
국가는 언제든지 괴물로 변할 수 있는 존재이며, 그 위험성은 오늘날에도 변함이 없다…
p. 158
우리는 누구나 패배자로 낙인찍히는 것이 두려웠습니다. 그 두려움은 특권을 잃을지 모른다는 공포로 이어집니다.
p. 176
국가가 제정신을 되찾은 후에도, 괴물의 수족이 되었던 법률가들이 우리나라처럼 떳떳하게 잘살고 있는 사례를 찾기란 쉽지 않습니다. 과거에 대한 반성 없이 더 나은 미래는 만들 수 없습니다.
p. 190
절대로 가족적이어서는 안 되는 것이 바로 법조계입니다. 검사는 국가를 대신해서 범죄자와 싸움을 벌이는 존재입니다. 변호사는 국가고 뭐고, 신경 쓸 것 없이 의뢰인을 위해 싸움을 벌여야 하는 존재입니다. 판사는 거대 담론과 여론으로부터 한 발자국 떨어져 법리에 의해 냉철한 판단을 해야 하는 고독한 존재입니다. 이들 모두에게 요구되는 가장 중요한 덕목은 바로 독립성입니다. 그러나 사법연수원 몇 기냐에 따라서 그 법률가의 위치가 좌우되는 풍토에서 독립성 보장이란 생각하기 힘듭니다.
p. 195
극단적인 상대평가가 법학전문대학원에 도입되면서, “풍부한 교양, 인간과 사회에 대한 깊은 애정과 이해 및 자유 ‧ 민주 ‧ 평등 ‧ 정의를 지향하는 가치관을 바탕으로, 건전한 직업윤리관과 복잡다기한 법적 분쟁을 보다 전문적 효율적으로 해결할 수 있는 지식과 능력을 갖추고, 개방되어 가는 법률시장에 대처하며 국제적 사법체계에 대응할 수 있는 세계적인 경쟁력과 다양성을 지닌” 법률가를 양성한다는 법학전문대학원 설치 목표도 퇴색되었습니다. 10명 이하 단위 강좌에서까지 극단적인 상대평가 기준이 적용되면서 학생들은 소규모 강좌를 기피하게 되었고, 국제 경쟁력과 다양성을 기르기 위해 필요한 과목들은 대부분 폐강 위기에 몰리고 있습니다.
p. 201, 202
새로운 시대의 도래는 변호사들에게 청지기의 윤리를 요구합니다. 특권을 누리는 계층이 아니라 변호사 자격증을 잠시 맡아 시민에게 봉사하는 청지기들이 필요한 것입니다. 자기가 누구인지, 자기 주인이 누구인지를 알게 된 청지기들은 이제 자기 집단 내부의 평판이나 이익을 위해서가 아니라 고객의 이익을 위해 싸움터에 나섭니다. 고객의 이익을 위해 싸우는 청지기의 증가는 궁극적으로 국가 권력의 통제라는 법률가 본연의 임무를 다하는 데에도 유익합니다.
p. 233
… 지나치게 많은 권한을 가지고도 제대로 일할 자신이 없는 검사들은 저처럼 빨리 옷을 벗고 나와야 한다는 말씀으로 검사들에 관한 이야기를 마칩니다. 검찰은 특별한 사명감과 용기를 지닌 사람들의 집단이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p. 243
헌법을 이해하는 열쇳말은 ‘인정한다. 그러나’가 아니라 ‘그럼에도 불구하고’라는 것이 제 생각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신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면, 헌법은 ‘그림의 떡’ 또는 ‘잘 포장된 한 장의 종이쪽지’에 지나지 않게 됩니다. 권력자들은 누구나 그때그때의 필요에 따라 ‘인정한다. 그러나’의 논리를 들이대며 자기 눈에 거슬리는 것을 마음대로 제한하려고 합니다. 그것을 막지 못하면 이미 헌법이 아닌 것이지요.
p. 256
종교의 자유뿐만 아니라 우리 헌법이 보장하고 있는 다른 기본권에 있어서도 ‘그럼에도 불구하고’의 정신은 중요합니다.
p. 260
이것이 바로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러 기본권을 인정한 헌법 정신입니다. 결국 ‘관용’ 또는 ‘똘레랑스’라 표현되는 ‘서로 받아들임’의 정신과 일맥상통하는 것이지요.
p. 278
무죄추정의 원칙이든 표현의 자유든 우리 편과 상대편 모두에게 적용되는 것임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이런 오해와 이해의 과정을 통해서 헌법상의 기본권이 우리 일상 속으로 서서히 스며들게 됩니다. 시행착오는 있더라도 논란이 벌어지는 것 자체가 부정적인 일은 아니죠.
p. 310
조금 편한 길을 가겠다는 자백 위주의 사고가 결국 사법 시스템 전체에 대한 불신을 불러들인 것입니다.
p. 310
무엇보다 진술 거부권을 인정한 헌법 정신을 무시해서는 안됩니다. 조사받을 때 거짓말을 해서라도 자기를 보호하려고 하는 것은 인간의 본성에 속한 문제입니다. 진술 거부권의 행사도 마찬가지입니다. 국가가 인간에게 기대할 수 없는 것을 기대해서는 안 됩니다. 사람이 누구나 자기 방어를 위해 거짓말을 하거나 침묵하기 마련이라면, 수사기관도 더 이상 진술에 큰 가치를 두지 말고 달리 증거를 화곱할 방법을 찾아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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