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포엔 부산진성이 있었고 임진왜란 이후에 자성대를 포함한 부산진성이 관문의 역할을 하였었다.
부산진성에서 왜로 가는 곳에 무사항해를 비는 '영가대'가 있었다.

<사진인용 : 조장섭님(부산향토문화연구회)>

한 때 부산포 부근엔 항거왜호가 있었다. 왜인들은 규제를 받고 있었지만 조선에 세력을 펼치고자 한 기록들이 있다. 위의 지도를 보면 부산진성의 서문이 왜의 사신, 상인들이 드나드는 길을 향하고 있으며 남문은 부산포의 바다를 향하고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西門鎖鑰'이란 글자의 뜻대로 서문을 자물쇠로 잠그면 왜 사신, 상인들은 조선에서 그들의 목적을 달성할 수 없게 되는 것이다. '南門咽喉'란 글자처럼 남쪽 바다를 향한 남문이 열리면 조선으로 침입될 우려가 있는 것이다. 왜성처럼 몇 겹을 겹쳐 성곽을 쌓지 않을 수 없을 정도로 당시의 부산진성의 재정이 열악했나 보다.
한편,
동부경찰서 정문 옆 화단의 비석-釜山鎭埋築記念碑에서 보듯이 부산진 앞 바다의 매립은 1939년에 마무리하였다. 매립으로 인해 육지가 되었고, 해방과 함께 돌아온 동포들로 인해 인구가 22만명이나 더 늘어나게되자 나대지로 있던 매립된 땅에 사람들이 몰려 들어 오늘날과 같은 도시가 되었다.







서문은 자물쇠라고 표현하고 남문은 목구멍이어서 순시를 한다고 쓴 것을 본면 서문을 통해 왜인들이 드나들고 남문은 왜인들이 드나드는 것이 아니라 부산진성을 지키는 수군들이 사용하는 문으로 보인다.

<1811년 무렵에 판화로 대중에게 보급될 정도로 통신사의 정보는 중요했다

<사진인용 : 조장섭님(부산향토문화연구회)>

<사진인용 : 조장섭님(부산향토문화연구회)>

<사진인용 : 조장섭님(부산향토문화연구회)>
부산첨사 정발(鄭發 1553~1592) 자는 자고(子固), 본관은 경주(慶州)
1553년(명종 8년) 경기도 연천 출생 25세(선조 10년) 무과급제 선전관에 등용
선조 24년 절충장군으로 부산첨사에 배명
1592년 4월 14일 장군은 검은 갑옷을 입고 노도와 같이 밀어닥친 수많은 왜군을 맞아
분전을 거듭하다 무인답게 장렬히 순절하였다. 성중 군민은 장군의 충의에 격발되어 너나 할 것 없이 죽음으로써 항전하다
모두 죽어갔다. 소수 군민의 항전이었으나, 매우 굳세어
성을 함락한 왜군은 그 분풀이로 군신(軍神)의 혈제(血祭)라 하여
개, 고양이까지도 죽였다.
난 후 잔혹한 왜인들은 [우리는 부산에서 크게 좌절되었다],
[흑의장군이 가장 두려웠다]고 말할 정도로
첫 싸움에서 장렬한 전투를 치루었다.
묘소는 경기도 마전에 있다.
출처-->부산 충렬사
임진왜란의 첫 격전지 부산진성의 옜자료 부산진순절도(釜山鎭殉節圖)
부산진순절도 해설 동영상 바로 보러가기-->서울문화재 홈페이지
이 그림은 선조(宣祖)25년(1592) 4월 13일과 14일 양일간에 걸쳐 부산진(釜山鎭)에서의 왜군(倭軍)과의 처절한 공방전(攻防戰)을 보여준 것이다. 한 폭(幅)의 그림이긴 하나 처절한 양상에 새삼 놀라움을 금하기 어려운 절박한 상황을 잘 표현하였다.
부산진(釜山鎭)의 진성(鎭城)은 지금 수정초등학교(水晶初等學校) 뒤에 위치하여 있었으므로, 당시에는 바로 해안이었다고 할 수 있다. 사경(寫景)을 곁들인 이 그림은 성곽을 위쪽으로 밀어 올리고 해안선을 대각(對角)으로 끊어 그 아래를 즐비하게 밀어닥친 대형 왜선(倭船)으로 빈틈없이 채워 그 뒤의 바다도 왜선으로 뒤덮여 있음을 암시하였다.
선중(船中)의 왜군(倭軍)과 접안(接岸) 상륙중인 왜군, 공성중(攻城中)인 왜군 등 끝이 없는 듯한 전력(戰力) 앞에 절의금도(節義襟度)로써 침착하게 수성(守成)하는 성내의 소수 아군(我軍)들이 엄청난 대비(對比)를 이룬다. 성하(城下)는 도검난무(刀劍亂舞)하는 많은 왜병으로 뒤덮여 있고 왜병이 아군보다 왜소(倭小)하게 그려진 것은 성내의 소수에 대한 다수를 표현하는 데 효과적인 기법이었음을 알 수 있다.
이 순절도(殉節圖)는 동협부순절도(東莢府殉節圖)와 함께 근년까지 (동협(東莢) 안락서원(安樂書院))에 봉안(奉安)되었던 것이며, 영조(英祖)36년(1760)에 개모(改摹)된 것이다. 원래 광주시립박물관(光州市立博物館)에 있던 당포전양승첩도(唐浦前洋勝捷圖)와 함께 드문 임란전도(壬亂戰圖)임과 동시에 희유(稀有)의 교전도(交戰圖)이다. 숙종(肅宗)35년(1709)에 그려진 것으로 전하는 원본의 소전여부(所傳與否)는 분명하지 않다.
민족의 수난과 국기(國基)의 수호라는 엄청난 체험을 재현하여 모범을 보여 주는 그림으로서 민족정기의 훈향(薰香)에 접할 수 있는 드문 유작(遺作)이다. |
"고니시는 20,000명의 전투원과 함꼐 총 643척의 크고 작은 배에 편승하여 쓰시마섬을 출발하였다. 특히 부산성이라?불리는 요새는 일본인들이 들이닥칠 첫 관문인 관계로 그곳에는 600여명의 병사가 있었으며, 그외에도 마을에서 모은 평민들이 있었다.
연도에는 모두 적의 침입을 막기 위해 진지 앞에 끝이 뾰족한 쇠(마름쇠)들을 뿌려 놓았으며, 요새 내부에는 구리로 만든 작은 포들이 2,000개나 배치되었다. 그 중 어떤 것들은 작은 포환을 발사하기도 하고, 또 어떤 것들은 크기가 두뼘 정도되는 화살촉을 발사할 수 있는 것이었다. 코라이 병사들은 모두가 매우 견고한 가죽으로 만든 흉감을 몸에 두르고 무장을 하고 있었으며, 머리에는 화살을 막아내기 위해 철모를 쓰고 있었는데 그들 가운데는 궁수들이 많고 또한 미늘창을 쓰는 병사도 있었다.
마침내 고니시는 음력 4월 12일에 요새 밖의 모든 마을들을 일차적으로 불지를 것을 명령했다. 그리고 나서 요새의 대장 앞으로 나아가 항복할 것을 권하고 목숨만은 살려 주겠다는 내용의 서찰을 보냈다. 이 서한을 받은 대장은 이를 비웃으며 국왕에게 보고하여 허락을 한다면 항복하겠노라고 회답하였다. 코라이 병사들은 훌륭한 무사들로서 왕에 대한 충절이 넘쳐 흘러 최후의 한 사람까지 용감히 싸웠다.
수비대장이 앞장서서 처음으로 전사하였으며 아무도 살아남은 자가 없었다. 가문있는 코라이 여인들은 정결하고, 수절하는 것으로 명성이 나 있었다. 한편 양반집 남녀 자제들은 용모가 반듯하고 교육도 받은 자들인데, 다리를 저는 자나 입을 꼬아 비둘어 지도록 위장하였다. 그러나 일본군들은 사실을 알아차리고 그들을 포로로도 살려 두려 하지 않았다."
당시 전투는 묘시(5~7시)에서 사시(10~12시)까지 였고, 일본군은 부산진성 점령후 남자, 여자, 개 그리고 고양이 할 것없이 모두 살해했다고 "吉野日記"는 적고 있소.
[출처] [펌]포르투갈 선교사의 임진왜란 부산진성 전투기록 |작성자 미르별
지도를 보면 지금의 부산 5부두 주변이 모두 바다였음을 알수 있습니다
바다였기 때문에 왜구가 부산진성 남문까지 배를 끌고와서 침략을 한것이지요
18,700명 VS 600명의 전투라 정말 죽기로 마음먹고 장렬하게 싸우다 전사한 정발장군과
부산진성민에게 애도를 표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