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춤’으로서의 주크(Zouk)와 춤으로서의 키좀바(Kizomba) 이야기이다. 여기서 주크는 브라질리언 주크(Brazilian Zouk)가 아니라 ‘원래 주크’이고, 이 '원래 주크'는 캐리비안 제도에 있는 프랑스 식민지(Guadeloupe, Martinique 등의 섬)에서 발생하고 발전했다. 키좀바는 아프리카에서 발생하고 발전했는데 그 전파와 확산 과정에서, 특히 프랑스에서 춤인 키좀바는 춤인 주크와 만나게 되었다.
“키좀바는 주크가 아닙니다. 음악으로서는 주크에 영향을 받아 키좀바가 생겨났고 아주 유사합니다. 하지만 춤에 있어서는 아무 관계가 없고 전혀 다릅니다. 주크 추듯 추면 절대로 안 됩니다.”
아나이스 밀롱(Anais Millon)이 키좀바 베이직 강습 때마다 강조한 말이다. 아나이스뿐만이 아니었다. 어떤 강사든 키좀바와 주크를 혼동해서는 안 된다는 점에서는 일치했다. 하지만 나처럼 살사, 메렝게, 바차타 정도나 아는 동양인에게는 어려운 설명이었다. 키좀바가 무엇인지 배워보려고 강습을 들으러 간 것인데 생전 들어본 적 없는 ‘주크’부터 알아야 키좀바를 이해할 수 있게 된다는 그런 설명이었기 때문이다.
물론 저 설명만으로도 알 수 있는 것은 있었다.
우선, 주크 덕분에 키좀바가 생겨났지만 반면 주크 때문에 키좀바를 제대로 추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말이고, 게다가 그 악영향이 적지 않은 상황이라는 것을 추측할 수 있었다. 그렇다면 최소한 주크처럼 추지만 않아도 일단은 성공적인 키좀바일 수 있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그리고, 키좀바를 이해시키기 위해서 주크를 반례로 든다는 것은, 키좀바 초급 강습을 들으러 온 사람들에게조차 주크는 이미 유명하고 익숙한 것이었음을 추측할 수 있게 했다. 당시 프랑스에서는 사람들이 키좀바는 몰라도 주크는 잘 알고 있던 상황이었다고 짐작할 수 있었다. 어쩌면 키좀바 베이직 강습을 듣던 사람들 중에 주크처럼 자세를 잡고 스텝을 밟고 있던 사람이 꼭 있었기 때문에, 키좀바는 주크와 다르다고 번번이 힘주어 말했을 지도 모른다.
프랑스에서 키좀바를 배우고 느끼던 시간을 보내면서 그 상황을 보다 더 이해하게 된 바로도 그랬다. 우리나라는 보통 살사나 바차타를 추다가 키좀바를 시작하는 사람들이 많은데, 그때 프랑스에서는 주크를 추다가 키좀바를 시작하는 사람이 상당수였다. 그리고 ‘주크적인’ 자세와 스텝과 정서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주크를 췄던 식으로 추면서 그것을 키좀바라고 추던 사람들도 적지 않았다.
키좀바가 프랑스에서 시작되었던 초기에도 키좀바는 주크와 얽혀 있었다. 당시에는 파리에서 일주일 중 딱 하루 한 곳에서만 키좀바를 출 수 있었다. 반면 주크는 이미 한 시대를 풍미한 문화현상이었기 때문에 가능한 여러 장소가 있었다. 게다가 음악에 있어서 주크와 키좀바는 아주 유사하니, 키좀바에 대한 열정이 가득하여 주 1빠에 만족할 수 없었던 프랑스 키좀바 1세대들은 키좀바를 추기 위한 대안적 장소로 주크 소셜을 택하곤 했다. 그 덕분에 주크를 추던 사람들에게 키좀바가 쉽게 소개되기도 했고, 또 그렇게 주크 추는 곳에 와서 키좀바를 추는 사람들을 기존의 주크인들은 곱지 않게 볼 수밖에 없었다.
춤 키좀바와 춤 주크는 프랑스에서 그렇게 모종의 애증관계였다. 키좀바 음악은 주크 음악 덕분에 태어났고, 음악과 춤은 서로 뗄레야 뗄 수 없으니 동류의 음악에 대한 춤인 키좀바와 주크이면 서로 공유할 점이 많을 수도 있을 법 한데, 춤 키좀바와 춤 주크는 서로 달랐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프랑스에서는 음악 때문에 한 장소에 서로 다른 두 춤이 공존하는 일이 빈번하게 되었으며, 사람들의 유동과 교류가 일어나게 되면서 갈등이 생겼고, 그렇게 두 춤은 가깝지만 충돌하는 사이가 되었다. 그리고 결국은 주크가 아니어야 키좀바이고 키좀바가 아니어야 주크라는 전적인 결별을 줄곧 강조하게 되었다. 내가 키좀바를 시작했던 때 프랑스는 그렇게 주크와 키좀바가 서로에 대한 애정보다는 애증이 깊었던 상황이었다.
II.
2011년도에 주크 쪽의 한 사람이 “Kizomba a tué le Zouk(키좀바가 주크를 죽였다).”라고 선언한 글을 올렸고 큰 반향이 일었다. 그는 주크의 입장에서 ‘춤에 대한 열정’을 주크식으로 표현하는 것과 키좀바식으로 표현하는 것의 차이를 피력했는데, 그의 사견에 대한 동의와 반박, 취향의 차이들이 댓글로 표출되었다.
키좀바가 주크를 죽여버렸다. 안타까운 일이다. 주크는 강습을 듣지 않아도 출 수 있는 춤이다. 살사, 바차타, 차차 등 강습을 들어야 춤을 추러 나갈 수 있고, 프리스타일의 자리가 한정되어 있어서 하고 싶은 대로 추기 힘든 춤들과는 다르다. 주크는 이게 쿠반인지 푸에르토리칸인지 복잡하게 따질 것도 없고, 댄싱라인을 지켜야 하지도 않고, 4박이니 8박이니 그런 이상한 카운트도 없다. 주크는 그야말로 음악에 대한 개인적인 해석이고, 하고 싶은 대로 파트너랑 즐거우면 그게 전부인 춤이다.
반면 키좀바는 어색한 탱고 같은 걸 가지고 있고 음악에 딱 어울리지 않는 순간들이 있다. 키좀바 추는 걸 보면 음악적 맥락 없이 딥을 하기도 하고 멈추기도 하고 여자가 빗자루인양 바닥을 쓸게 한다. 키좀바가 주크를 죽여버리는 장면은 주크 음악에 키좀바 스텝을 밟을 때 볼 수 있다. 키좀바는 왜 살사나 하우스 음악에 추지를 않는가. 더 심각한 때는 키좀바 음악에 주크를 추려고 할 때이다. “싫어요. 나는 키좀바를 추고 싶지 비비는 거는 싫어요” 여자들은 이렇게 말한다. 그러면 우리는 여자를 만날 기회가 없지 않은가. 더구나 키좀바를 추러 가려면 그 전에 강습을 들어야만 한다. 키좀바는 배우지 않고는 출 수 없는 특수한 무엇이다. 3박이었다가 6박이었다가 4박이었다가 아주 복잡하다. 그래서 키좀바를 추려면 과거를 버려야 한다. 살사는 ‘레벨4’였어도 키좀바를 배우려면 ‘레벨1’ 강습비를 내야 한다. 물론 그 레벨1이 수준이라도 높다면 모를까, 심지어 다른 춤을 추며 몸에 배어 있는 춤에 대한 이해까지 버려야 한다. 키좀바는 주크 뿐만 아니라 우리의 모든 자존감도 제거한다.
그렇다고 키좀바를 비난하기 위해 이 글을 쓰는 것은 아니다. 나는 키좀바를 사랑한다. 내가 애석하게 여기는 점은 키좀바 인구가 늘어나면서 주크의 입지가 파괴되고 있다는 것이다. 이상적으로는 살사든 바차타든 키좀바든 주크든 춤을 추는 사람들이 다 모여서 키좀바가 나오면 키좀바를 추고 주크에는 주크를 추는 그런 소셜일 것이다.
키좀바를 추는 사람들(진짜를 추는) 모두에게 한 마디 더 하자면, 나는 진짜 키좀바를 추는 사람들을 알기도 하고 그들이 추는 걸 보기도 하는데, 키좀바는 아주 아름다운 춤이고 고유한 원리와 규칙도 가지고 있음을 안다. 그런데 흔히 키좀바 춘다고 하는 90프로 정도는 문자 그대로 춤을 춘다고 할 수가 없다. 내 생각에는 그저 키좀바가 유행이라니까 발을 들여놓는 그런 가짜들 때문에 키좀바가 왜곡되고 있다.
먼저 이 글의 주장부터 이해해보자.
그의 견해를 단순히 말하자면, 주크는 음악을 따라 자유롭게 추는 춤인 반면 키좀바는 소위 패턴을 따라 카운트로 추는 춤이다. 물론 이 부분은 댓글에서도 그렇지만 상당한 논란거리이다. 그런데 그의 도식은 ‘자기 춤’을 추느냐 ‘배운 춤’을 추느냐로 춤을 춘다는 것을 나누고 있다고 볼 수도 있다. 또 달리 보면, ‘느낌’이냐 ‘형식’이냐의 대비로 볼 수도 있다. 이는 단지 ‘주크냐 키좀바냐’보다 더 큰 담론에 속한다.
그의 글이 드러내는 보다 실제적으로 불편을 야기하는 문제는, 키좀바를 추는 사람들이 주크 추는 곳에 와서 주크 음악에 키좀바를 추고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주크적인 춤을 추고 있는 사람들 사이에서 키좀바적인 춤을 추는 것 자체만 문제가 아니라, 사람들이 그 키좀바라는 춤에 매료되고, 나아가 주크를 즐기는 일에 방해가 되더니, 종국에는 위협이 되었다는 것이다.
핵심적인 첫번째 문제점은 우선 여자들이 주크보다 키좀바를 선호하는 상황이 되었다는 점이다. 춤 신청을 했을 때 "Ah non, moi, je veux kizomber ! Pas frotter !"(키좀바 추고 싶다. 비비는 건 싫다)라며 거절을 당하는 경험을 하게 되는 상황이 그의 불편이었고, 주크를 춘다는 많은 남자들 공통의 경험이었다. 여기서 frotter라는 프랑스어는 지하철에서 벌어지는 성추행 중 하나인 frotteur에 쓰이는 바로 그 단어이고, '마찰애호증'이라고 번역되는 frotteurism에서 쓰이는 그 단어이다. 결국 좋은 느낌을 따라서 서로 즐기기만 하면 된다는 주크적인 세계는 춤을 추려는 사람들의 바람으로 인해 끝났음을 드러내는 말이다.
두번째 문제점은 키좀바라는 새로움을 위해 비용을 지불하고 싶지는 않다는 것이다. 지불할 비용은 단지 ‘돈’의 문제만이 아니라, 규칙을 따르지 않으려는 방종의 욕망을 포함하여, 새로움을 받아들이기 위한 노력과 시간, 그동안 나름 정립했던 소위 ‘춤’에 대한 인식 전반을 포함한다. 그는 그런 비용 지불을 원치 않고, 그냥 그간 해오던 대로 하고 싶다는 바람을 표현하고 있다. 그러니 그는 자신에게 익숙한 음악이 나올 때 그간 해오던 대로 그걸 자신의 춤으로 즐길 수 있는 것이 보장되는 세상을 이상향으로 제시하고 있다. 하지만 그런 개인적인 희망사항은 이미 죽어버린 주크에 대한 추도사처럼 아무런 생명력을 가지지 못한다.
(그의 글에 대해서 100개 가까이 댓글이 달렸는데, 상당수가 원문보다 더 긴 댓글이다. 댓글들을 살펴보면 당시 쟁점이 되던 주크와 키좀바 사이의 직접적인 문제가 무엇인지를 엿볼 수 있다. 나아가 ‘춤’이란 무엇인지에 대한 생각들도 들여다 볼 수 있다. 이 댓글들에 대한 소개는 이 글의 말미에 가능한 한 첨부하도록 하겠다.)
III.
‘키좀바는 주크 같지 않아야 한다’는 프랑스 키좀바 강사들의 말로 돌아가보자. 그들의 말하는 ‘주크 같지 않아야 한다’는 핵심은 이렇다: 우선 포스쳐가 바르고 견고해야 한다. 커넥션은 상체 상부에서 이루어져야 한다. 즉 체스트 커넥션이어야 한다. 반면 하체는 서로 떨어져야 한다. 골반 위치부터는 주먹이 두 개 정도 들어갈 공간이 있어야 하고 그렇게 남녀가 홀딩한 모습이 A자 모양이 되어야 한다. 남녀 하체가 떨어져 만들어진 공간이 춤을 추는 공간이다.
반면 주크는 거의 정반대이다. 남자의 발이 여자 두 발 사이에 들어가며 남녀의 발은 겹치게 된다. 그래서 걷다보면 성기부분의 접촉이 일어나기 십상이다. 그리고 하체가 가까우니 서로 배가 닿기가 일쑤고 상체의 윗부분으로 갈수록 벌어지게 된다. 결국 남자의 등은 여자쪽으로 굽고 목을 내밀며 구부정해지기가 쉽다.
지금 보면 그리 새로울 것도 없는 키좀바 포스처에 대한 기본 중의 기본이고 당연한 말이다. 하지만 저렇게 주크와의 차이를 의식하고 구분한 것이 그후 키좀바를 키좀바되게 했다. 그리고 프랑스 키좀바는 세계 키좀바를 선도하는 위치로 발전하게 되었다. 그들이 익숙했던 주크와는 다르기 때문에 받아들이기 불편했지만 그래도 올바르게 키좀바를 춰야 한다는 의식과 노력이 결국 훌륭한 키좀바를 만들어낸 것이다.
반면, 주크는 소멸되었다. 아니 엄밀히 말하면, 주크 음악은 오히려 더욱 발전하고 새로워지고 있고 번창하고 있다. 일례로 브라질리언 주크를 들 수 있다. 음악 주크는 죽어버린 람바다를 살려냈다. 한때 세계적으로 유명해진 람바다는 그후 역사의 뒤안길로 잊혀져 버렸다. 그런데 음악 주크는 그 브라질의 람바다에 새로운 생명력과 영감을 불어넣어 다양한 스타일을 창조해는 동력이 되었다. 그러나 그렇게 왕성한 생명력을 가진 음악에서 태어나서 그 음악과 같은 이름를 공유하는 춤 주크는 사라졌다.
이와 같은 주크 춤과 음악의 흥망성쇠을 보면서... 키좀바의 내일은 오늘 키좀바를 추는 사람들이 어떤 키좀바를 추느냐에 따라 달라지는 것이 아닐까... 키좀바는 주크와 다른 운명으로 예정되어 있다고 자신할 수 있을까... 이런 생각은 지나친 비약일까... 만감이 교차한다.
IV.
키좀바를 주크처럼 추지 않아야 한다는 말을 보다 더 깊이 이해해보기 위해서 과연 주크는 어떻게 추는 춤이었나 영상을 살펴 보자. 영상 하나로 주크의 전모를 파악할 수는 없을 것이라 가급적 다양한 종류의 영상을 열거할 것이다. 물론 관전 포인트는 포스처이고 컨택의 위치이다. 참고로 인터넷에서 ‘Zouk’를 검색하면 거의 모두 브라질리언 주크 영상이 나온다. 그리고 영상을 올린 사람이 충분히 모르고 올린 경우에는 키좀바나 따라싱아, 콤파 등 다른 춤에 대해서 주크라는 타이틀을 붙이기도 한다. 제목에 주크라고 올라왔다고 다 주크가 아니다.
(사족: 사실... 이 글에서 다 밝히지 못한... 주크와 키좀바의 애증관계의 현재진행형도 있다.
하나는, 저 시절 주크 추듯 키좀바를 추던 사람들이 여전히 주크 추듯 키좀바를 추고 있기도 하다는 것이다. 특히나 키좀바를 춘 지 오래 된 사람들에게 저 주크의 흉터가 짙게 남아 있는 경우가 많다.
또 하나는, 주크의 본고장에서 나고 자라서 프랑스에서 활동하는 댄서 중 일부는 자신의 ‘태생적 주크’를 바탕으로 키좀바에 주크적인 요소들을 계속 유입 시키고 있기도 하다. 주로 얼마 안 된 댄서들에게서 관찰되는 이런 ‘키좀바의 주크화 현상’은... 참 심란해진다.)
암튼... 100개 가까이 원문보다 더 긴 댓들들이 달리며 키좀바와 주크 사이의 감정적 골이 얼마나 깊은 지를 드러낸 부분. 대략의 내용들만 언급하자면 이렇다:
사실 많은 사람들이 키좀바를 춘다고 하며 주크를 춘다. 키좀바는 상당한 테크닉을 요구하기 때문에 시간과 연습이 많이 필요하다. 주크와 키좀바는 서로 다른 춤이다. 하지만 춤이라는 보편성 속에서 서로 영향은 줄 수 있고 결국 하나가 될 수도 있다.
키좀바가 주크를 죽였다는 말에 동의한다. 하지만 다른 춤들은 배운 스텝을 밟아야 한다는 주장에는 동의하지 못하겠다. 진실로 춤을 추지 못하는 사람은 스텝을 소화할 수 없다. 훌륭한 댄서는 음악에 맞춰 춤을 추는 사람이 아니라 음악과 함께 춤을 추는 사람이다. 그래서 스텝을 하나도 안 밟으면서도 한곡 춤을 출 수 있다. 나는 개인적으로 키좀바가 싫다. 음악이랑 안 맞기 일쑤이고 카운트도 희안하다. 홀수로 끝나는 카운트를 가진 구조를 짝수로 끝나는 구조에 맞춘다는 건 말이 안 된다.
출 줄 모르는 춤과 알지 못하는 음악에 대해 의견을 피력한다는 건 잘 못 된 일이다. 다른 걸 비판하려면 그걸 먼저 알아야 한다. 키좀바가 스텝으로 제한되어 있다는 말은 틀리다. 키좀바를 추는 건 일정한 패턴을 수행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쇼나 데모를 위한 키좀바와 소셜을 하는 키좀바를 구분할 줄 알아야 한다. 그리고 주크는 춤이 아니라 음악이다. 왜냐하면 이성끼리 성기를 서로 비벼대는 것이 춤이었던 적은 없다. 또한 음악에 대해 말하는데, 키좀바 추는 사람들은 주크 추는 사람들보다 음악적 토양이 더 풍성하다. 앙골라 키좀바 음악을 찾아 들어보라. 카보 러브(Cabo Love) 같은 주크 음악과 전혀 다르다. 요약하자면, 너가 보는 것이 아니라 너가 아는 것을 말해라. 왜냐면 너가 보는 것이 주류가 아니기 때문이다. 물론 나도 쓰레기가 많다는 건 잘 보고 있다. 그렇다고 온통 쓰레기뿐인 것은 아니다.
주크가 춤이 아니라니 더는 같이 대화를 할 수가 없다.
근거를 가지고 이야기를 해야 한다. 주크는 음악이다. 맞다. 하지만 춤의 이름이기도 하다. 물론 ‘주크한다(zouker)’라는 단어로 쓰일 때는 춤을 의미하지 않는다. 그리고 이성끼리 성기를 서로 비벼대는 것은 확실히 주크도 아니고 키좀바도 아니다. 하지만 춤이란 그 정의가 음악에 맞춰 움직이는 행위이기 때문에 음악에 맞춰서 서로 성기를 비벼댈 수도 있지 않은가. 또한 키좀바 추는 사람들의 음악적 소양이 더 풍부하다고 말하는데, 그건 광신도나 극단주의자들 같은 말이다. 타인의 음악적 소양이라는 건 그리 쉽게 평가할 수 없는 것이고 지극히 개인적인 것이다. 그저 개개인의 차이가 있을 뿐이다. 그리고 나도 키좀바 추는 사람들을 여기 저기 프랑스 전국에서 보았는데 프랑스 키좀바가 아직 딱 이렇다고 보편화시킬만큼 확실한 상황은 아닌 것 같다. 쓰레기야 어디든 있는 법이고.
주크는 확실히 음악이다. 나는 마르티니크 출신이라 모르면서 하는 소리가 아니다. 위키페디아에 쓰여 있는 게 다 맞는 것이 아니다. 그런데 주크를 너무 표면적으로만 보고 있는 것은 아닌가 싶다. Uli 주크라는 것도 춤이다. 물론 주크 강습소는 없다. 그리고 춤 추는 동안 파트너와 밀착한다. 그래서 뭐? 게다가 보통 사람들이 도시에서 듣는 주크는 Waren 스타일인데 그건 똥이다. 우리는 그런 거에는 주크를 못 춘다. 우리는 retro에 춤을 춘다.
이성끼리 서로 성기를 비벼대는 것이라 주크가 춤이 아니라고 하는 거에 동의하지 않는다. 부비부비는 주크가 아니다. 물론 주크를 추는 동안 비벼대주길 좋아하는 여자들에게 비벼대는 남자들이 있기는 하다. 그리고 그건 주크 러브(Zouk Love)다. 그런데 그리 말하려면 따라싱아는 부비부비와 뭐가 다른가. 게다가 음악 말인데 키좀바 음악이 셈바에서 나왔는데 동시에 주크에서도 나왔다. 키좀바 지상주의 세계에서 나와 보길 바란다.
자 정리해보면, 부비부비하는 사람들, 주크 추는 사람들, 키좀바 추는 사람들 이렇게 셋이라는 말인가. 그렇다면 왜 둘이 서로 불편한가.
주크 추는 사람들이 부비부비한다고 보는 건 본래 주크는 모른채, 주크가 프랑스에 들어올 때 불행히도, 느리면서 거의 움직이지 않는 주크 러브(Zouk Love)로 들어왔기 때문이다. 주크인들은 보통 retro를 선호한다. 음악적 소양에 관해서는, 우리 Antile 사람들은 주크 음악 속에서 태어났다. 우리는 주크 음악의 발전과 춤의 발전과 함께 성장했다. 우리는 태생적 주크인이다. 대부분의 키좀바인들이 학습된 키좀바인인 것과는 다르다. 키좀바는 자신의 모국 문화가 아니니까 음악도 배워야 하고 춤도 배워야 한다. 어쨌든, 키좀바인들은 셈바가 키좀바의 어머니라고 말하는데, 그렇게 따지면 주크가 키좀바의 아버지라는 말은 자주 깜빡한다. 한 마디만 더 하겠다. 누구도 자신의 부모를 선택할 수 없다.
키좀바가 주크를 죽였다니 말이 안 된다. 주크는 영원히 존재할 것이다. 춤이란 게 각자 자기 스타일이 있는 거다. 살사만 해도, 쿠반은 팔이 장점이고 콜롬비안은 발재간이 좋다. 음악도 어제의 살사가 있지만 오늘의 살사도 있다. 키좀바도 훌륭한 앙골라 춤이고 음악도 멋지다. 키좀바도 주크도 각각 영원할 것이다. 여기서 진정으로 토론해야 할 바는, 엉망으로 추는 사람들이다. 여기 저기 어디나 있다. 아프리칸 춤에만이 아니라 라틴 춤에도 있다. 음악을 듣는 법을 모르고 배운 테크닉을 어떻게 음악이 흘러가고 있든 지 함부로 집어 넣는 그런 사람들 말이다. 그런데 제한적인 춤이 있나? 우리가 알파벳을 배우면 원하는 단어를 조합할 수 있는 것처럼 춤에 있어서도 마찬가지로 배운 걸로 무엇이든 조합할 수 있다. 제발 음악은 듣자.
키좀바가 주크를 죽일 위험은 없다. 키좀바가 주크이기 때문이다. 주크의 한 스타일이라고 할까. 키좀바에 게토 주크라고 하는 게 있지 않나. 그런데, 한 30년 전에 주크가 프랑스에 들어올 때를 경험했는데 그건 분명히 주크 러브 전이었다. 그런데 주크 러브가 프랑스 춤판의 풍경을 확 바꿔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