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명산 설화산(雪華山 441m)이 마을을 뒤에서 든든하게 지켜주고 있다.
그 명산은 명당수를 또 뿜어내고 있다. 그 명당수는 마을 가운데를 흐르며 생기(生氣)로 마을을 감싼다.
온양쪽에서 보면 동남쪽으로 차령산맥이 뻗어 있다. 이 산맥의 한 줄기가 내려오다 이룬 큰 설화산이다.
배방산(排方山)이라고도 한다. 촛불같이 뾰족한 산봉우리가 다섯이 솟아있어 오봉산(五峯山)이라고 한다.
이 산의 맥이 북쪽으로 굽이쳐 내려오다가 평평한 지형을 이룬다. 단정한 좌청룡(左靑龍)의 지세와 웅장한
우백호(右白虎)의 지세가 호위하고 있는 풍수상 길지(吉地)에 명당(明堂)마을이 들어앉았다.
예로부터 우리나라의 기(氣)는 물을 만나면 꼼짝 못한다. 그 기는 물을 넘지 못한다.
지키고 싶은 명당을 지켜내는 바리케이트 금천(禁川) 명당수이다. 그 명당수를 건널 수 있는 금천교다.
금천교를 밟고 명당수 금천을 건너면 조선초기의 그 유명한 고불(古佛) 맹사성 (孟思誠)의 맹씨행단(孟氏杏檀)이다.

충남 아산시 배방읍 중리 아산 맹씨행단(사적 109호)이다.
아산 맹씨행단은 조선초 세종때 청백리로 유명한 맹사성이 살던 고택과
고택 앞 수령 600년 이상된 은행나무를 지칭하는 말이다.

아산 맹씨행단이다. 그 이름 때문에 아산 맹씨로 오해하는 사람이 많은 모양이다.
그래서 맹씨행단의 안내표지판 위에 '아산은 단순한 지명이다. 아산 맹씨가 아니라 신창맹씨임을 강조하는
설명문을 따로 붙여놓고 있다.



청백리 고불 맹사성이 살던 고택으로 들어가는 문간채는 소박하다.
단정하고 소박한 아름다움이 빼어나다. 그 흔한 요란한 치장도 없고 평범하다.

충남 아산시 배방읍 중리 맹씨 행단(사적 109호)에 있는 맹씨 고택이다.
맹사성 고택은 고려 최영장군의 집이었다. 이 집은 최영 장군의 부친인 최원직이 처음 지었다.
실제 최영 장군이 거처했던 집이다.
이웃에 살던 맹사성의 사람됨을 눈여겨본 최영 장군이 손녀사위로 삼고 집까지 물려주었다.
그 후 맹사성 일가는 이곳에 뿌리를 내렸고 현재도 후손이 살림집을 따로 지어 거주하고 있다.
최영장군은 ‘황금을 돌 같이 보라’고 하는 청렴결백의 상징이었다.
맹사성은 조선조의 대표적 청백리였다. 2명의 청백리가 살고 간 집터이다.
현재 맹씨행단 본채는 'H'자형 건물이다. 건물 가운데 두 칸의 대청을 두고
좌우에 세 칸씩 온돌방을 배치했으며 반 칸 크기의 퇴칸을 앞으로 낸 구조다.
우리나라 일반 백성이 살던 집 중에서 가장 오래된 건물 가운데 하나로 알려지고 있다.
고려시대의 건축구조를 이해할 수 있는 귀중한 유산으로 꼽힌다.

맹씨행단은 설화산을 배산으로 배방산을 바라보고 있다.
금곡천이 우에서 좌로 횡류하는 보기가 드문 북향의 명당이다.
북향의 터에서도 자연의 흐름보다 햇볕을 받기 위해 남향을 선호한다.
이곳은 자연의 흐름대로 북향으로 집을 지었다.
북향의 터에서는 북향으로 집을 짓는 것이 자연의 순리다.
"임금이 계신 한양이 북쪽이라 그 곳을 향해 지었기 때문이 아닌가 합니다."
이 집은 독특하게도 북향(北向)으로 지은 이유이다. 집 앞에는 배방산이 보인다.
그 산 너머 임금을 향한 맹정승의 마음이 느껴지는 고불고택이다.

고려말.조선초 건축양식이 많이 남아 있는 한옥이다. 난방을 위해 창문을 많이 사용하지 않고 있다.
툇마루 양쪽에는 작은 2개의 창문을 두고 있다. 출입문이라기 보다는 창문에 가까운 구조이다.
대청마루 뒷쪽에는 판문을 달았으며, 후대 한옥과는 달리 문틀을 두껍게 만들었다.
대청마루 내부. 양쪽 온돌방을 출입하는 작은 여닫이 출입문이 있다.

대청마루 가운데에 분합문을 두어 통로로 사용하는 툇마루와 생활공간인 대청마루를 분리하였다.

주심포 방식에 가까운 공포, 고택 가구부에 남아 있는 고부재와 창호 등에서 당시 건축양식을 볼 수 있다.
고택의 목재는 세월의 두께만큼이나 생활의 흔적을 오롯이 담고 있는 듯 그을렸다. 기둥과 도리 사이에는 단구로
봉설(봉황의 혀)이 장식되었다. 내실의 천정은 ‘소라 반자’로 흔히 볼 수 없는 나무반자로 지어진 것이 특징적이다.


“지식이 넘치면 인품을 망치고, 고개를 숙이면 부딪치는 법이 없다.”
열아홉에 장원급제하여 스무살에 파주 군수가 된 맹사성은 자만심으로 가득차 있었다.
어느 날 그가 무명선사를 찾아 물었다. "스님, 군수인 제가 삼아야 할 좌우명이 무엇입니까?"
이 말을 들은 스님은 "그건 어렵지 않지요. 착한 일을 많이 베푸시면 됩니다."고 답했다.
"그건 삼척동자도 다 아는 이치인데 고작 그것뿐이오?" 맹사성은 거만하게 말하며 자리에서 일어난다.
그러자 스님은 녹차나 한 잔하고 가라며 붙잡았다. 그는 못이기는 척 자리에 앉았다.
스님은 그의 찻잔에 넘치도록 차를 따르고 있다. "스님, 찻물이 넘쳐 방바닥을 망칩니다." 맹사성이 소리쳤다
하지만 스님은 태연하게 계속 차를 따른다. 그리고는 잔뜩 화가 난 맹사성을 물끄러미 쳐다보며
"찻물이 넘쳐 방바닥을 적시는 것은 알고, 지식이 넘쳐 인품을 망치는 것은 어찌 모르십니까?"
스님의 이 한마디에 맹사성은 부끄러워 황급히 일어나 방문을 열고 나간다.
그러다가 문틀에 세게 부딪히고 말았다. 그러자 스님이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고개를 숙이면 부딪히는 법이 없습니다."

본채 뒤쪽에서 들여다 본 대청이다. 대청의 가구틀을 통해서 끌어다 본 앞 산 배방산(排芳山 362m)이다.

유명한 터에는 전설이 있기 마련이다.
맹씨행단도 맹사성 탄생과 관련된 전설이 전해져 오고 있다.
맹사성 어머니가 시집을 왔다. 아버지 맹희도는 혼인을 마치자마자 과거 공부하러 개경으로 올라갔다.
어느 날 어머니가 꿈을 꾸었다. 커다란 태양을 치마폭에 받는 꿈이었다.
꿈이 하도 괴이한지라 시아버지께 꿈 이야기를 해드렸다. 그러자 시아버지는 절대로 다른 사람에게는
이야기를 하지 말라 이르고 사람을 시켜 급히 아들 맹희도에게 서찰을 보냈다.
과거 공부에 열중하고 있던 맹희도가 서찰을 받아보니 아버지가 위독하다는 내용이었다.
부랴부랴 고향 집을 찾은 맹희도가 아버지를 찾으니 아버지는 태평하게 앉아 있었다.
그리고는 “내 병은 그동안 다 나았으니 염려 말고 며칠 쉬었다 가라”는 것이었다.
영문을 모르는 맹희도는 아버지 뜻대로 며칠 집안에 머무르는 동안 부인이 맹사성을 잉태하게 됐다.
맹사성 할아버지는 좋은 태몽이 있을 때 설화산 정기가 모인 땅에서 아이를 잉태하라고 아들을 불렀던 것이다.
풍수에서는 좋은 땅에서 잉태하고, 출생하고, 성장해야 큰 인물이 난다고 보고 있다.
며느리를 아들이 있는 개성으로 보내도 되겠지만 과거 공부에 바쁜 아들을 부른 이유는 바로 좋은 잉태지 때문이다.

뜰 한켠에 수령 600년 이상의 은행나무 두 그루가 시원하게 뻗어 있다.
이 은행나무는 맹사성이 직접 심은 것으로 수령이 600년 이상인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은행나무 아래서 맹사성이 뜻이 맞는 사람들과 강학을 논의하던 곳이라 해서 맹씨 행단이라고 불린다.
공자가 은행나무 밑에서 제자들을 가르친 것에서 유래되어 행단이 학문을 연구하는 곳이라는 의미가 파생됐다.
그 후 유교사상을 가르치는 곳에 은행나무를 많이 심게 됐다고 한다.

조상들의 위패를 모신 사당 세덕사(世德祠)이다.
궁궐이나 사찰 향교에서는 가장 높은 곳에 중요한 건물을 배치한다.
맹씨행단에서도 아주 높은 양명한 곳에 세덕사를 배치하였다.

세덕사는 두문동 72현인 맹유와 맹희도, 조선조의 정승인 맹사성의 위패를 모신 사우(祠宇)이다.
맹유는 고려말 불사이군의 절개를 지키다 순절하였고, 맹희도는 벼슬을 버리고 한민(閒民)으로서 충절을 지켰다.
맹사성은 조선시대의 대표적인 청백리로 백성의 아픔을 함께 나눈 서민적 정승으로 유명하다

집 경역은 2,300여평으로 자연석 담을 둘렀다.
후원은 느티나무, 전나무, 감나무 등이 넓은 원림(園林)을 이루고 있다.
또한 집 앞 개울가에도 느티나무, 버드나무 등의 원림이 조성되어 있다.
담장내 마당가에는 채소밭도 조성되어 있다.

이 정각은 조선 세종 때의 정승이었던 맹사성이 황희, 권진과 함께 느타무를 세 그루씩 아홉 그루를
심었다는 데에서 구괴정이라고 불리게 되었다.600여 년 전의 이곳은 오봉산을 배경으로 앞에는 북풍을
막아주는 배방산과 북부성이 병풍처럼 둘러져 있고 금곡천의 맑은 물이 당긴 활 모양으로 흘러내려 시인과
묵객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았던 명승지였다.
세 정승은 이곳에 정각을 세워 시문을 읊으며 망중한을 즐겼고, 국정을 논의하기도 하였으며, 일하는 농민을
불러 위로하며 민정도 살폈다. 600여 년이란 세월이 흘러 아홉 그루 중 일곱 그루의 느티나무는 수명을 다하였고,
두 그루만이 허리를 굽힌 채 받침대에 의지하여 흥망성화하였던 500년의 역사를 말없이 증언하고 있다.
한편 이곳은 삼정승이 국사를 논의하였다고 하여 삼상당이라고도 한다.-아산시청 안내문에서-



청백리 맹사성의 정자 구괴정(九槐亭)이다.
구괴정(九槐亭), 그 앞에 아홉그루의 느티나무를 심었다(九槐)고 한다.
지금은 수령 600여 년이 넘은 2그루만 남아 있다.

그는 효성이 지극하고 청렴하여 청백리로 추앙을 받았던 인물이다.
벼슬이 좌의정에까지 올랐지만 그는 소탈하고 조용하며 엄하지 않았다고 전한다.
비록 벼슬이 낮은 사람이 찾아왔더라도 반드시 공복(公服)을 갖추고 대문 밖에까지
나아가서 맞아들여 윗자리에 앉혔다고 한다. 돌아갈 때에도 역시 공손하게 배웅하여
손님이 말을 탄 뒤에야 들어왔다.
그는 음악에 조예가 있어 스스로 악기를 만들어 즐겼다고 한다.
집 밖을 나설 때는 소를 타고 다니는 등 남루한 행색 때문에 사람들은
그가 재상인 줄 알아채지 못했다고 한다.

아산 맹씨 행단, 사적 109호, 충남 아산시 배방읍 중리, 조선초기
맹씨 행단은 조선 초기 청백리로 유명한 맹사성(1360~1438년)의 집안이 살던 곳으로
지역 안에는 고택과 세덕사, 구괴정, 두 그루의 은행나무가 있다.
고택은 정면 4칸, 측면 3칸의 “工”자형 집이다. 중앙 2칸에 커다란 대청을 사이에 두고
왼쪽과 오른쪽에 온돌방을 둔 홑처마의 맞배지붕 건물로 우리나라의 대표적 고민가이다.
세덕사(世德祠)에는 고려말 두문동 72현인 맹유.맹희도.맹사성의 위채가 있다.
구괴정(九槐亭)에는 세종때 황희.맹사성.권진 등 3정승이 9그루의 느티나무(槐木)를 심었다고 전하는데,
지금은 2그루만이 남아 있다. 맹씨 행단은 맹사성이 심었다고 전해지는 600여 년 된 은행나무가 있어
‘행단(杏壇)’이라 부르게 되었다고 전한다. 또한 ‘행단’은 후학에게 글을 가리치고 공부하던 자리를
의미하기도 한다.-아산시청의 안내문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