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葆軒公(東晛) 贈詩《보헌공(동현) 증시》
보헌공 휘 동현(東睍․1628~1677)은 반계공(磻溪公)의 장남으로 자는 천중(天中) 호는 보헌(葆軒)이다.
그는 당시 병사(兵使) 박이소(朴而昭)와 윤요뢰(尹夭賚)가 조정에 등용토록 추천하려 하자 이를 말류 하는 시를 보내 그치게 했다. 바로 그 시가 전해지고 있다. (지장록 p. 1146)
「早知學業聖賢希淸選莫曾問布衣半世詩書藏墨壘百年菽水供慈闈○○出處雲靑白取捨幽喧事是非恐負先人耕讀訓寸心夙夜望乎幾」
〈해설〉일찍 학업을 알았음은 성현 되기를 바랐던 것이니 고귀한 벼슬 포의에게 묻지 말라.
반평생 시서는 검은 상자 속에 감춰두고 백년의 하찮은 음식으로 어머니를 봉양하리. 나고 들며 구름은 청백하여 취하고 그윽하고 시끄러운 시비를 일삼는다.
갈면서 읽으라는 선인의 가르침 저버릴까 두려워 마음속에 품은 조그마한 뜻 조석으로 이루기를 바라네.
□ 醉睡軒公(天會) 遺稿《취수헌공(천회) 유고》
삼수공 휘 천회(天會․1629~1669)의 자는 여우(汝遇) 호는 취수헌(醉睡軒)으로 통덕랑 휘 국보(國寶)의 셋째 아들이다.
그는 호남어사의 신분으로 장흥을 들른 노봉(老峰) 민정중(閔鼎重)이 공을 보고 무과에 응시하도록 추천하여 출사하게 됐다.
공은 내직을 역임하다 1659년 함경도 변경 삼수부사(三水府使)를 제수 받아 재직(족보에는 1663년으로 기록)하고 있었다.
그런데 해남출신 남인(南人) 고산(孤山) 윤선도(尹善道․1585~1671)가 71세의 늙은 나이에 조대비(趙大妃)*의 상례문제로 서인들과 다투다 위리안치(圍離安置)하는 귀양 오자 고향의 어른이라 죄인임에도 불구하고 잘 보살펴줬던 모양이다.
* 조선 제16대 국왕인 인조의 계비(새중전, 예송논쟁의 원인이 됨)
이 때문에 조정 서인들의 미움을 사서 관직에서 물러나 행원으로 귀향하여 지우들과 수창하며 여생을 보냈다. (지장록 p. 1146)
早年弓劒意猶深 나이 어릴 때 활과 칼에 뜻이 깊었는데
湖海風聲動遠林 호수와 바다의 바람소리에 먼 숲이 움직이네
退倚層欄依斗立 물러나 층계의 난간 기대고 북쪽의 별은 의지하니
誰知夜夜望京心 누가 밤마다 서울을 바라본 마음을 알리요
※ 취수헌공의 시를 보면 관직에서 물러남이 몹시 안타까웠던 모양이다. 대개 당시의 관리들은 억울하게 퇴진할 경우 다시 복직시키는 사례가 많았음으로 공도 또한 그럴 가능성을 가지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기에 밤마다 층계의 난간에 기대어 북쪽의 별과 서울을 응시하면서 세월을 보낸 마음을 시로 표현한 것으로 보인다. 벼슬에 대한 미련을 남자라면 모두 한결같은 것이다.
(144-037일차 연재에서 계속)
첫댓글 (144-036일차 연재)
(장흥위씨 천년세고선집, 圓山 위정철 저)
36일차에서는 '보헌공(동현) 증시' 와 '취수헌공(천회) 유고'가 밴드에 게재됩니다.
길지 않는 문장이지만, 그 속에서 세상의 이치를 깨우치고 갑니다.
※ 주1) 읽는이의 편의를 위하여 게재자가 일부 제목에 음을 달고 단락을 나누었습니다.
※ 주2) 144-037일차에는 "수우옹공(세직)의 가사작품"이 게재됩니다,
[본문내용- 선조님들의 유시 등 계속]/ 무곡
취수헌공,
의리로 똘똘 뭉친 대장부네요. 윤선도와 친분이 깊어서겠죠!/ 벽천
일반적으로 책에서 배우는 위인들은 대부분 공적이나 치적등을 보고 본보기로 삼으면서도 박제된 인물로 각인되기 쉽습니다만, 천년세고선집에 등장하는 우리의 선조님들은 공적도 커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친근하고 자상한 모습이 연상되어 매우 인간적으로 접근이 되는것 같습니다.
한마디로 훌륭하면서도 친근한 할아버지 그 자체라고나 할까요.
이것이 바로 "피는 물보다 진하다"는 징표가 아닌가 합니다./ 무곡
무곡 위상환 님
"요람"은 씨족백과사전,
"천년세고"는 씨족지성사로 두 玉童子인 셈이죠./ 벽천
조선시대의 경우만 하더라도,
한양에서 격리시키는 차원에서 강진이나 화순, 제주,영월 등지로 귀양을 많이 보내고 했습니다만, 그분들과의 교류의 적정선을 잘 설정하는게 일종의 처세의 한 방편이기도 한것 같습니다. 일종의 사상이나 정치적인 이유로 유배를 가는 경우는 곧바로 풀려나 중앙정계로 복귀하는 경우도 많은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이래저래 처세가 참으로 어려운것 같습니다./ 무곡
위윤기 님!
어렵게 태어난 옥동자를 잘 보살피고 다듬어 후손들이 크게 참고할 표본 내지 표준 자료로 정립을 해나가야 되겠죠.
"사람은 책을 만들고, 또 그 책은 사람을 만든다고 하네요"/ 무곡
무곡 위상환 님
맞습니다. 저와 견해가 일치합니다.
요람과 세고의 최고가치는 normal form의 창시라고 봐야합니다.장흥위씨 씨족사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前無後無'겠죠. 저술체계와 내용 양면에서요. 종친들께서 옥석을 구별해야하는데...,
안타까울따름입니다./ 벽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