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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공적인 예배의 삶 ① - 아벨의 제사
(창 4:1) 아담이 그의 아내 하와와 동침하매 하와가 임신하여 가인을 낳고 이르되 내가 여호와로 말미암아 득남하였다 하니라
(창 4:2) 그가 또 가인의 아우 아벨을 낳았는데 아벨은 양치는 자였고 가인은 농사하는 자였더라
(창 4:3) 세월이 지난 후에 가인은 땅의 소산으로 제물을 삼아 여호와께 드렸고
(창 4:4) 아벨은 자기도 양의 첫 새끼와 그 기름으로 드렸더니 여호와께서 아벨과 그의 제물은 받으셨으나
(창 4:5) 가인과 그의 제물은 받지 아니하신지라 가인이 몹시 분하여 안색이 변하니
(창 4:6) 여호와께서 가인에게 이르시되 네가 분하여 함은 어찌 됨이며 안색이 변함은 어찌 됨이냐
(창 4:7) 네가 선을 행하면 어찌 낯을 들지 못하겠느냐 선을 행하지 아니하면 죄가 문에 엎드려 있느니라 죄가 너를 원하나 너는 죄를 다스릴지니라
(창 4:8) 가인이 그의 아우 아벨에게 말하고 그들이 들에 있을 때에 가인이 그의 아우 아벨을 쳐 죽이니라
여러분은 자신의 가치를 어떻게 산정하십니까? 모든 사람은 평등하니까 똑 같은 가치를 갖고 있다고 생각하시는지 아니면 사람마다 제 각기 다른 가치를 지니고 있다고 생각하는지요? 그렇다면 그 가치를 매기는 기준은 어디에 근거를 갖고 있는 것이 옳은 것일까요? 1977년 4월호 다이제스트지에서 예일대학의 생물학자 모로윗츠(Harold J. Morowitz)는 인간의 몸을 이루는데 필요한 호르몬, 단백질, 효소 등의 여러 가지 요소들로 복잡하기 그지없는 세포들을 형성시키는 작업에만 6,000조 달러의 비용이 들 것이라고 주장했습니다. 그러나 이것도 가설(假說)에 불과(不過)합니다. 사람의 생명은 어떻게 만들 수 있습니까?
처음 사람 아담은 가장 비상한 머리를 가진 천재도 그의 두뇌 속에 있는 지적인 잠재능력의 1%의 1/10밖에 사용하지 못한 다고 알려져 왔습니다. 이것은 아담이 오늘날의 지식인들 보다 적어도 천배나 더 우수하였음을 의미합니다. 우리는 아마 자연이 나타내는 색채배합에 대하여 95% 가량 눈 뜬 장님일 것이며 그리고 자연의 수많은 음향에 대하여 98%정도 귀머거리일 것입니다. 그러나 아담의 오관은 완전무결하게 조화되어 있었음을 추정해 볼 수 있습니다. 그는 초감각적 영감까지 소유하고 있었을 것이고, 또한 동물들과 의사소통은 물론 모든 자연과도 그렇게 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 아담이라 할지라도 예수 그리스도의 거룩한 피로 사신바 된 믿음의 성도와는 비교도 되지 않습니다. 베드로후서 1:4 “이로써 그 보배롭고 지극히 큰 약속을 우리에게 주사 이 약속으로 말미암아 너희가 정욕 때문에 세상에서 썩어질 것을 피하여 신성한 성품에 참여하는 자가 되게 하려 하셨느니라”고 하셨습니다. 사람은 창세기 2:7에서는 땅의 흙으로 지으셨다고 하셨습니다. 흙은 ‘아파르’(rp;[)로 ‘먼지. 티끌, 푸석한 마른 흙’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은 그 분의 “생기를 그 코에 불어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된지라” 코는 ‘아프’(#a)로서 숨을 쉬는 기관인 코를 의미하지만 동물에 사용할 때는 그 코에 갈고리를 끼워서 다스릴 때 쓰이기도 합니다. 하나님이 사람을 만드시고 코를 먼저 점령하셔서 생기를 불어 넣어주신 것은 사람이 하나님의 다스림을 받지 않고는 마른 흙처럼 쓸모없어 무너지기 쉬움을 교훈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육신은 흙으로 와서 흙으로 되돌아갑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 육체를 살리시기 위하여 예수님을 보내신 것이 아니라 우리의 영을 살리기 위하여 보내셨다고 했습니다. 죄악으로 죽었던 영이 그리스도의 피로 되살아나면 이 영에게 부활의 영광된 몸으로 덧입혀 주시는데 그 때의 모습을 “신성한 성품에 참여하는 자”라는 표현을 사용했습니다. ‘신성한’은 ‘데이오스’(qei'o")로 ‘하나님이 가지고 계시는 모든 특성, 본질’을 나타냅니다. ‘성품’은 ‘퓌시스’(fuvsi")로 ‘근원적인 자질’을 말하고 ‘참여하는 자’는 ‘코이노노스’(koinwnov")로 ‘동역자, 파트너’를 의미하는 것으로 하나님의 피조물로 종 된 모습이 아닌 하나님과의 동역자로서 수직적인 관계가 아니라 수평적인 관계로 그 신분을 급상승시켜 줄 것을 약속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도 제자들에게 하신 말씀이 요한복음 15:15에 나오는데요. “이제부터는 너희를 종이라 하지 아니하리니 종은 주인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라 너희를 친구라 하였노니 내가 내 아버지께 들은 것을 다 너희에게 알게 하였음이라”하시면서 종과 친구의 구분을 설명하십니다. 종은 ‘둘로스’(dou'lo")입니다. 둘로스는 자기의 의지와 자율권이 없습니다. 오직 주인이 시키는 대로 그 의미도 목표도 알지 못한 채 주인의 명령에 따를 뿐입니다. <벤허>라는 영화를 보면 배 밑창에서 노를 젓는 노예들을 보셨을 것입니다. 북소리에 맞춰 느리게 치면 느리게 빨리 치면 빠르게 노를 젖는 노예가 ‘둘로스’입니다. 그러데 이런 종의 모습에서 친구로 부르심을 받을 것이라고 예수님이 말씀하십니다. 친구는 ‘필로스’(fivlo")로 모든 희노애락(喜怒哀樂)을 함께 나누는 절친한 친구를 말합니다. 다윗과 요나단의 우정에 대하여 사무엘상 18:1에 “다윗이 사울에게 말하기를 마치매 요나단의 마음이 다윗의 마음과 연락되어 요나단이 그를 자기 생명같이 사랑하니라”고 했습니다. 요나단은 사울의 아들로서 다윗과는 정치적인 라이벌 관계에 있었지만 사심 없이 다윗을 사랑했습니다. '연락되다'라는 말은 '묶다, 매다'의 뜻으로 요나단과 다윗의 마음이 사랑으로 수평적인 관계를 맺었음을 의미합니다. 요나단은 사울의 뒤를 이어 왕좌에 오를 수 있는 위치에 있었고 다윗은 백성들의 신망을 받는 자였기에, 두 사람은 적대 관계에 놓이기 쉬웠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환경과 조건을 초월하여 진실한 마음으로 서로 사랑하였습니다. 진정한 사랑은 어떠한 장애물도 뛰어넘을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사랑이 이런 사랑으로 제자들을 세워주시겠다고 하였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를 지시기 전에 아버지 하나님께 간절한 기도를 올리셨는데 그 내용 중에 “내게 주신 영광을 내가 저희에게 주었사오니 이는 우리가 하나가 된 것같이 저희도 하나가 되게 하려 함이니이다”(요 17:22)라는 요청이 있습니다. 여기서 영광은 ‘독사’(dovxa)인데 ‘하나님께 속한 특성’을 말합니다.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시고 죽기까지 하나님께 복종하셨더니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이셨다고 하였는데 이 때 ‘높임’이 하나님의 영광으로 그를 높이셨음을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 영광을 그의 택하신 자녀들에게 주실 것을 요청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일을 사람의 힘으로는 절대 불가능합니다. 모든 지혜와 총명에 뛰어나신 하나님의 능력으로만 가능합니다. 빌립보서 1:6에 “너희 안에서 착한 일을 시작하신 이가 그리스도 예수의 날까지 이루실 줄을 우리는 확신하노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착한’은 ‘아가도스’(e[rgon)는 구약성경에서는 ‘토브’(b/f)로 사용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옳다고 여기시는 것을 말합니다. 하늘과 땅과 만물을 창조하시면서 보시기에 좋다고 하셨는데 그 중에 사람을 창조하실 때는 창세기 1:26에서 “하나님이 이르시되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 그들로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가축과 온 땅과 땅에 기는 모든 것을 다스리게 하자 하시고”라는 말씀이 있는데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라는 말씀 속에서 형상은 ‘첼렘’(!l,x,)으로 ‘그림자나 허상(虛像)’이며 모양은 ‘데무트’(tWmD)로 ‘닮은 것, 유사한 것’을 말합니다. 창세기 외에 어디서도 이 두 명사는 병행되거나 서로 연결되어 나타나지 않습니다. 인간은 하나님의 그 자체의 모습이 아니라 '닮은 모양이나 형상'입니다. 이런 모습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씻어 주시고 그의 영을 부어주셔서 완벽한 하나님의 형상이 나타나도록 하는 것이 하나님의 선하신 뜻이요 그것을 주님이 오실 때 까지 이뤄주실 것을 약속하여 주셨습니다.
창세기 2:17에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으리라 하시니라”하셨습니다. 여기서 ‘죽는다.’ ’무트‘(tWm)라고 하는데 이것은 두 번의 죽음을 의미합니다. '아담'은 범죄 이후에 즉시 죽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 순간에 영적으로 하나님과 단절되어 영원한 생명을 상실하였던 것이죠. 그리고 에덴동산에서 쫓겨 난 아담의 육체적인 죽음 역시 언젠가는 닥치게 되므로 본문이 말하는 '죽음'은 '영적인 죽음'과 '육적인 죽음' 두 가지 모두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살리시는 방법도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영을 살리는 것이요 두 번째는 우리가 영혼과 육이 분리되어지는 죽음에 이르게 되면 하늘의 영광스런 몸을 덧입혀 살리시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부르셔서 행하시는 일을 로마서 8:30에 “또 미리 정하신 그들을 또한 부르시고 부르신 그들을 또한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느니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정하심을 ’프로오리조‘(proorivzw)라고 하였습니다. 이는 ‘미리 결정하다’로 하나님이 택하심은 어떤 근거에 의한 것인지 비밀스러운 것이지만 분명한 것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정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내가 하나님으로부터 택정함을 받았다는 것을 알 수 있는 것은 내 안에 예수님의 마음을 지니고 있는지를 살펴보면 됩니다. 예수님의 마음은 다양하게 표현할 수 있지만 압축해서 하나로 말하면 희생입니다. 내 속에 있는 사람이 다른 사람의 유익을 위하여 나를 내어 줄 수 있는지를 살펴보십시오. 또한 하나님께 대한 지식이 생겨납니다. 하나님이 어떠한 분인지 그 분과 나와의 관계는 어떤지에 대한 관심을 갖습니다. 부르신 자를 ‘의롭다 하시고’하셨습니다. ‘디카이오오’(dikaiovw)로 ‘정당하다고 판단하여 선언하다’라는 의미로 마지막 심판과 연관되어 이것은 심판을 면하게 됨을 입증하여 주는 것입니다. 죄 아래 있는 사람들은 누구나 하나님의 심판의 엄중한 진노아래 있음을 그 양심으로 지적받기에 마음속에 담겨있는 불안과 두려움에서 절대로 벗어날 수 없습니다. 자기도 원인을 알 수 없는 불안 증세가 늘 함께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구원받은 자는 의롭다하심을 받은 증거로 성령을 보내 주십니다. 내 안에 임하는 성령은 하나님의 사랑을 누리게 하시고 또한 그 분을 사랑하게 합니다. 그리고 그 분을 찾게 만듭니다.
예수님을 믿어 영이 살아 난 사람은 하나님이 살아계신 것을 깨닫게 되고 그 하나님 앞에 경배하며 예배하고자 하는 마음을 주십니다. 예배는 ‘프로스퀴네오’(proskunevw)로 동사 ‘프로스’(prov",) ~에, ~을 향하여 와 ‘퀴네오’(kunevw) ‘입 맞추다’의 합성어로 가장 거룩하고 온전하신 분에 나가 엎드려 사랑을 표현하는 것으로 사용되었습니다. 예배의 가장 큰 핵심은 사랑의 마음을 품고 겸손하게 자신을 엎드려 경배하는 것을 말합니다.
오늘 본문은 아담과 하와가 타락하여 에덴동산에서 추방된 후의 말씀으로 창세기 4:1에서 “아담이 그의 아내 하와와 동침하매 하와가 임신하여 가인을 낳고 이르되 내가 여호와로 말미암아 득남하였다 하니라”고 하였습니다. ‘동침하다’는 ‘야다’([d'y)인데 ‘알다, 이해하다’라는 뜻이 담겨 있지만 다른 사람과의 친숙한 관계에 의하여 온전히 아는 것으로 사랑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한 생명이 탄생하는 것은 사랑에 의하여 이뤄짐을 성경은 말씀합니다. 그 생명을 하나님으로부터 주어졌음을 아담은 고백합니다. 이로 미뤄보아 사람은 하나님의 사랑으로 말미암아 주어졌고 사랑의 대상이므로 사람은 반드시 사랑을 가지고 하나님께 나가야 됩니다.
창세기 4:2~3에서 “그가 또 가인의 아우 아벨을 낳았는데 아벨은 양치는 자였고 가인은 농사하는 자였더라 세월이 지난 후에 가인은 땅의 소산으로 제물을 삼아 여호와께 드렸고”라고 하였습니다. 여기서 자녀의 출산의 주체는 아내였던 하와가 아니라 남편 아담입니다. 무엇을 말하고자 할까요? 신앙의 계보는 아버지로부터 시작됨을 말합니다. 가정의 머리는 남편입니다. 아버지가 제대로 된 신앙을 갖고 있어야 그 신앙은 튼튼한 기반을 가지고 이어지는데 그의 가르침을 들었음에도 불구하고 가인은 땅의 소산으로 하나님께 제물을 드렸습니다.
이어서 창 4:4에 “아벨은 자기도 양의 첫 새끼와 그 기름으로 드렸더니 여호와께서 아벨과 그의 제물은 받으셨으나 가인과 그의 제물은 받지 아니하신지라 가인이 몹시 분하여 안색이 변하니”라고 하였습니다. 제물은 ‘민하’(hj'n]m)인데 자기보다 우월한 사람에게 환심을 사거나 감사의 표시로 드리는 선물이나 공물을 말하는 것으로 하나님께 드리는 제물은 어떠하여야 되는가에 대한 기준을 정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그들이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는 형식이 자발적이었겠냐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문맥상으로 보아 그들의 아버지였던 아담을 통하여 하나님은 어떤 분이시며 그들이 왜 에덴동산에서 쫓겨났는지 그리고 그들의 죄악을 가려 주시려고 동물을 잡아 그 피를 흘리고 그 가죽으로 자신들의 벌거벗은 몸을 덮어 주셨기에 육신의 몸이 살림을 받게 되었음을 헤아리지 못할 정도로 그 자식들에게 이야기 하였을 것입니다. 아버지 아담이 갖고 있는 제사의 개념은 짐승의 피를 드려서 죄 사함을 받아야 됨을 설명하였고 이를 들은 자녀들은 분명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가인은 이 교훈을 귀담아 듣지 않았습니다.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를 먹고 그 영향으로 행하는 것 중의 대표적인 것이 ‘제 생각에 옳은 대로 행하는 것’입니다. 가인은 자기는 농사일을 하므로 농사의 소산물로 하나님에 제사를 드리는 것이 맞는다고 생각하여 그대로 행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으로부터 의롭다함을 받고 영화롭게 하는 과정에서 반드시 필수적인 것은 자기를 깨트리는 훈련을 받아야 합니다. 독일의 신학자 본 회퍼는 “하나님은 우리를 종교로 부르신 것이 아니라 삶으로 부르신다”고 말했습니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전서 9:27에서 “내가 내 몸을 쳐 복종하게 함은 내가 남에게 전파한 후에 자신이 도리어 버림을 당할까 두려워함이로다”고백했습니다. ‘내가 내 몸을 쳐’라고 할 때의 ‘치다’는 ‘휘포피아조’(uJpwpiavzw)로 그 당시에도 권투가 있었는데 선수가 소가죽 띠로 만든 것을 사용하여 상대방에게 치명상을 입히기 위하여 때릴 때에 쓰는 단어로서 바울은 자신의 생각으로 옳고 그름을 판단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바를 이루기 위하여 자신을 혹독하게 다뤘음을 말합니다.
아벨은 아버지의 교훈을 정중하게 받아들여 ‘양의 첫 새끼와 그 기름으로 드렸더니’라고 하였습니다. 첫 태생 중에서 가장 기름진 것은 그가 소유한 것 중 가장 좋은 것을 드렸다는 것을 말하며 ‘받으셨다’는 ‘샤아’(h[;v)로 ‘관심을 가지지고 바라보다’입니다. 이 말씀을 제대로 이해하려면 양과 목자의 관계가 어떠한지는 알아야 합니다. 야생 양이 아닌 목자에 의해 키워지는 양은 맹수로부터 자신을 방어할 수 있는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맹수를 대적하기 위한 힘, 들이 받을 큰 뿔, 할 퀼 발톱이 없고 양은 시야가 매우 좁고 멀지 않기에 멀리서 보고 피할 수도 없고. 맹수를 피해 도망갈 빠른 발을 가지고 있지도 않습니다. 결국 양은 자신을 보호 할 수 없기에 자신을 돌보는 목자를 떠나서는 절대 살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양과 목자의 관계는 매우 친밀합니다. 물론, 목축을 해 본 적이 없는 사람들에게는 쉽게 이해가 되지 않을 것이지만 양 한 마리만 없어져도 목자가 금방 아는 것을 통해 서로의 관계가 얼마나 친밀한지를 짐작은 할 수 있습니다. 또한, 양들의 모양이 비슷해서 분간하기 힘들 텐데도 모든 양들에게 각각 이름이 붙어져 있는 것을 보면, 목자와 양 사이에 생명의 관계가 형성되어 있다는 사실을 더욱 분명히 알 수 있습니다. 목자에게서 양은 자기 자식과 같습니다. 그 자식과 같은 양을 잡아 피와 함께 하나님께 제물삼아 드립니다. 자기를 드리는 것이요 하나님께 사랑스런 양을 드림은 온전한 사랑의 마음을 드리는 것이지요. 그래서 본문은 “아벨과 그의 제물은 받으셨으나”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제물을 통하여 아벨의 마음을 받으셨다는 것입니다. 히브리서 11:4에서는 “믿음으로 아벨은 가인보다 더 나은 제사를 하나님께 드림으로 의로운 자라 하시는 증거를 얻었으니 하나님이 그 예물에 대하여 증거하심이라 저가 죽었으나 그 믿음으로써 오히려 말하느니라”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벨의 제사는 받으시고 가인의 제사는 받지 아니하신 이유에 대해서 구약 성경 자체에서는 아무런 언급이 없습니다. 그러나 히브리서 기자는 아벨의 제사는 믿음의 제사였고 가인의 제사는 믿음 없는 제사였음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의 믿음은 아담으로부터 전해들은 말씀에 근거를 두고 있습니다. “피 흘림이 없이는 사함이 없다”는 말씀대로 짐승의 피로 자기의 죄를 고백하고 사함 받는 은혜를 누리며 사랑의 헌신을 담아드린 제사입니다. 아벨은 인류 최초로 피살당한 자가 되었는데 그를 죽인 자는 형 가인이었습니다. 아벨이 가인에게 미움을 산 이유는 하나님께서 아벨의 제사는 받으시고 가인의 제사는 받지 않으신 것 때문이었습니다. 제사를 하나님께서 받으셨는지 안 받으셨는지를 판단하는 근거는 무엇이었을까요? 어떤 성서학자는 하나님께서 불이 그 제물위에 임하므로 징조를 보이셨다고 하였는데 성경에 나오지 않는 것을 추론해 보는 것은 참 어려운 것입니다. 그러나 말씀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실마리를 잡을 수 있는 것이 나오는데 창세기 4:5절에 “가인이 몹시 분하여 안색이 변하니”에서 안색이란 ‘파님’(!ynIP)이란 단어입니다. 사람의 얼굴은 그 사람을 식별하게 해주고 그 사람의 마음가짐과 감정을 반영해 주기도 합니다. 따라서 ‘파님’은 자아 또는 자아 감정의 대용어가 될 수 있습니다. 성경에서 얼굴은 외적 기관으로 묘사될 뿐만 아니라 어떤 형태의 행동 방식과 관계되는 것으로 기술되었으며 얼굴을 통하여 상대방의 감정, 기분, 성격을 밝혀주는 것으로도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아벨이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고 난 후 그 얼굴에는 말할 수 없는 평안과 기쁨이 나타나게 되었을 것입니다. 그것을 가인이 보았을 때 시기심과 더불어 분 냄이 있음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하나님이 받으시는 예배의 요소는 무엇인지를 살펴 볼 수 있습니다.
첫째는 하나님의 언약을 근거로 하는 피의 제사입니다.
요한복음 4:23에 “아버지께 참되게 예배하는 자들은 영과 진리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아버지께서는 자기에게 이렇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느니라”하나님은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느니라”고 하셨습니다. ‘찾다’는 사람이 하나님을 찾을 때 사용하는 ‘에크제테오’(ejkzhtevw)가 있고 하나님이 사람을 찾을 때 사용하는 ‘제테오’(zhtevw)가 있습니다. 사람이 하나님께 나갈 때는 믿음으로 그 분을 향하여 무엇을 얻기 위하여 나갈 때 ‘에크제테오’를 사용하였습니다만 하나님이 사람을 찾으실 때는 ’목표를 삼고 얻으려고 노력하다‘는 의미가 있습니다. 예배의 자리에서 하나님은 사람의 중심을 보십니다. 하나님의 심판대는 미래적인 것이 아니라 예배의 형식에서 이미 이뤄지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여기서 하늘에 속한 사람과 땅에 속한 사람들이 나뉘는 것이지요. 또한 예배는 하나님께서 인생에게 약속하신 모든 축복의 통로이기도 합니다. 예배를 받으시고 영과 진리로 예배하는 자들에게 약속의 축복들을 선언하시고 실제화시킴을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시고 돌아가실 때에 마태복음 27:51~52 “이에 성소 휘장이 위로부터 아래까지 찢어져 둘이 되고 땅이 진동하며 바위가 터지고 무덤들이 열리며 자던 성도의 몸이 많이 일어나되”라고 하였습니다. 이 휘장은 성소와 지성소를 구분 짓는 것인데 지성소 안에는 하나님의 약속을 상징하는 언약궤가 있습니다. 지성소에 들어갈 수 있는 자격은 오직 대제사장만이 정한 날에 들어갈 수 있습니다. 그런 휘장이 하나님의 능력으로 위로부터 아래로 찢어짐으로 믿음의 성도들에게 하나님의 언약이 성취됨과 동시에 하늘의 왕 같은 제사장으로 부르심을 받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성도는 왕 같은 제사장답게 하나님을 향하여 전심을 다하여 예배를 드려야 합니다. 대제사장은 대 속죄일이 되기 칠 일 전부터 준비하였습니다. 이 기간 동안 대제사장은 특별한 장소에 거하면서 그 날에 사용할 번제단과 분향단을 비롯한 기구들을 점검하고, 속죄 제사를 실수 없이 집전할 수 있도록 모든 규례를 숙지하였습니다. 대속죄일 전날 밤에는 그는 또 다른 방으로 인도되었고, 그곳에서 내일 제사에 쓰일 제물들이 들어오는 것을 지켜보았습니다. 이토록 대제사장의 특권도 크지만 거기에 따르는 임무도 상당하였던 것과 마찬가지로 바른 예배자로 세움받기 위하여 바른 준비가 필요합니다.
둘째는 사랑의 헌신입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시라’고 하였고 그는 창조주이시며 우리는 피조물입니다. 창조주와 피조물이 어떻게 사랑을 나눌 수 있을까요? 하나님이 우리에게 베푸시는 사랑은 베푸시는 것입니다. 내어주고 내어주다 마지막에는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을 주셨습니다. 그러면 우리의 하나님께 대한 사랑은 무엇이어야 될까요? 로마서12:1에서는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 이는 너희가 드릴 영적 예배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몸을 드리라는 것입니다. 말씀드린바와 같이 우리의 몸은 흙으로 지어졌습니다. 이 몸이 가치 있고 보배로운 몸으로 하나님께 드리기 위한 전제 조건은 ‘산’이란 ‘자오’(zavw)의 의미를 되새겨야 될 것입니다. 여기서의 산 몸은 죽었다가 다시 산 즉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의 피로 다시 성령으로 살아난 생명체를 의미합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오직 성령의 도우심으로 감사를 하나님께 드림으로 이뤄집니다. 성령이 내 안에서 하나님께서 베푸시는 풍성한 사랑을 누리고 깨닫게 하시며 그 성령으로 감격하여 나 자신을 온전하게 드리고자 하는 마음이 생기는데 이것이 바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마다 하나님께서 싫어하시는 곁길에 마음을 빼앗기지 않습니다.
셋째는 예배를 통하여 이루시고자하시는 하나님의 선하신 뜻입니다.
예배는 진실하시고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서 세움을 받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 분 앞에서 드러나지 않을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정직한 마음으로 하나님께 세움 받는 예배의 자리에 서게 될 때 인간은 자기의 허물과 죄를 보게 됩니다. 그리고 회개하도록 마음이 움집입니다. 예배의 자리에서 하나님이 베푸시는 은혜로 점점 성화되고 영화(Glorification)됩니다. 이 영화(榮華)는 ‘신의 거룩한 성품’을 의미하는 것으로 하나님의 완벽한 사람으로 만들어지는 과정이 바로 예배입니다. 이 지상에서 예배가 그치지 말아야 될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예배를 통하여 나의 속사람이 변화를 받고 하나님의 사람으로 바뀌게 되기 때문입니다. 요한계시록 21:1에 “또 내가 새 하늘과 새 땅을 보니 처음 하늘과 처음 땅이 없어졌고 바다도 다시 있지 않더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이 이 땅에 그의 택하신 자녀들을 보내시고 예배라는 통로를 통하여 훈련시켜 세우고자하는 사람은 바로 새 하늘과 새 땅을 다스릴 자로 세우시는 것입니다. 누가복음 19장에서는 므나의 비유가 나옵니다. 한 므나를 가지고 열 므나를 남긴 종에게 주인이 하는 칭찬이 나옵니다. “잘하였다 착한 종이여 네가 지극히 작은 것에 충성하였으니 열 고을 권세를 차지하라”고 말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고을은 조그만 초락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폴리스’(povli")로서 ‘큰 도성 또는 한 국가’를 말합니다. 그런 고을을 한 개가 아닌 열 개를 말합니다. 여기서는 문자적인 숫자인 열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충성의 정도에 따라 많은 도성을 차지할 권세 즉 다스리고 통치할 수 있는 왕권을 주실 것을 말합니다. 예배는 나의 것을 하나님께 드리고 하나님의 은혜를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15:42~44 “죽은 자의 부활도 그와 같으니 썩을 것으로 심고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살아나며”라고 했습니다. ‘썩을 것’이란 ‘프도라’(fqora)로
‘점차 죽음을 향하여 나가는 것’입니다. 예배자의 모습을 갖지 않으면 사람은 어쩔 수 없이 사망의 권세에게 굴복당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 우리를 사망의 권세를 이기게 하시고 하늘에 속한 영생체로 만드실 뿐 아니라 영광스럽게 하실 것을 약속하셨습니다. 예배는 이런 축복이 담겨 있기에 기쁨과 소망을 지니고 드려야 합니다. 장차 우리 믿음의 예배자가 얻을 상급이 얼마나 큰지 상상이나 할 수 있겠습니까?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우주의 크기와 그 안에 존재하는 별의 수효가 얼마인지를 아십니까? 우주의 크기에 대하여 빛의 속도는 1초당 지구의 일곱 바퀴 반을 도는데 그 속도로 은하계의 직경을 지나는데 10만 광년 걸리고 그러한 크기의 은하계는 천억 개가 넘는다고 합니다. 그 가운데 별의 수효는 얼마만큼이나 될까요? 우리의 육안으로 볼 수 있는 별의 수효는 약 4,000개 정도라고 합니다. 그런데 성경에는 "하늘의 만상은 셀 수 없으며 바다의 모래는 측량할 수 없나니"(예레미야 33:22) 라고 하심으로써, 별들이 모래 숫자만큼이나 많음을 이미 말씀하셨고, 구약성경 여러 곳에서도 하늘의 별들과 바다의 모래를 대비시켜서 말씀하셨습니다.
오늘날 천체 망원경을 통해 관찰해 본 바 우주에는 통계수치상 약 10의 25승개의 별이 있는 것으로 천문학자들은 추정하는데요. 그런데 묘하게도 지구상의 모래의 수효도 대략 그 정도라고 한다. 10의 25승이란 숫자의 크기가 어느 정도인지 머릿속에 잘 잡히지 않는 사람이 대부분일 것입니다. 사람이 1초에 20개를 셀 수 있다고 가정해도 10의 25승개를 다 세려면 적어도 100,000조 년이나 걸린다는 것이 수학적 설명입니다. 그러면 이 수많은 별들이 아무런 목적 없이 떠다니는 것일까요? 저는 새 하늘과 새 땅이 펼쳐지는 그날에 이런 별들도 엄청난 변화가 생기고 그 별들을 고을이란 단어를 사용하여 하늘에 속한 예배자들을 위하여 예비하신 것이라고 믿습니다. 하나님의 자녀는 만물을 상속받을 수 있는 상속권자이기에 능히 받을 수 있는 조건을 갖추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지금도 예배의 현장을 두루 살피시면서 충성된 자를 찾고 계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