습2:8-15절) 이웃 나라들의 멸망 5-175.
요즘 우리는‘문명의 충돌’이라는 말을 듣고 있습니다. 그동안 사람들은 이슬람 문화에 관심이 별로 없었고, 관심을 가지려 들지도 않았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이슬람권이 미국에 테러를 감행하는 것을 보면서, 또 미국과 아프가니스탄의 전쟁을 보면서 혹시 이런 대립이 기독교 세계와 이슬람 세계 전체의 전쟁으로 확대되지는 않을까? 염려하고 있습니다.
사실 어느 나라도 주변 나라와 상관없이 살아갈 수는 없습니다. 우리나라도 좋든, 싫든, 일본이나, 중국과 관계를 맺어야 하며, 북한도 완전히 무시할 수 없습니다. 그렇다고 북한을 전적으로 믿을 수도 없고, 불신할 수도 없는 것이 우리의 고민입니다. 오늘 본문은 유다와 늘 가까이 있으면서 갈등하며, 충돌했던 두 나라, 모압과 암몬의 멸망에 대해 말씀하고 있습니다. 또 유다와 가까이 있었던 것은 아니지만, 영향을 끼쳤던 구스와 앗수르의 멸망에 대해서도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가까이 있는 나라들과 멀리서 영향을 끼치던 나라들이 망하면, 어떻게 될까? 우리는 흔히 이런 상황을 가리켜‘판이 뒤집혔다’고 말합니다. 하나님은 유다의 멸망을 통해 세상의 판을 완전히 뒤엎어서 새로운 질서와 세계를 만들고자 하십니다. 그 전까지는 애굽과 앗수르 즉 애굽과 메소포타미아를 연결하는 초승달 모양의 지역이 세계의 중심을 차지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유다의 멸망을 계기로 그 중심지를 지중해 권으로 옮겨버리십니다. 즉 유다와 그 주변 나라들이 망하고, 그 후에 바벨론과 페르시아가 알렉산더 대왕의 손에 망함으로써 초승달 지역은 완전히 폐허가 되고, 세계는 지중해 시대로 돌입합니다. 그리고 그 지중해 시대도 로마가 망하고, 이슬람교가 그 지역을 침략하면서, 또한 신대륙이 발견되면서 종말을 고하고, 대서양 시대가 새로이 열리게 됩니다. 이처럼 세계 질서는 영원불변하지 않습니다. 전혀 생각지도 못한 요인에 의해 기존 질서가 붕괴되고, 새 질서가 창출됩니다. 그렇다면 그 전환기마다 교회는 어떻게 될까? 새로운 질서에 떠밀려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더 새로운 모습으로 그 중심으로 파고 들어가 새로운 역할을 감당합니다.
오늘 본문을 얼핏 보면, 유다가 망하면서 그 주변 나라들도 동시에 망한다는 사실을 말하려고 하는 듯합니다. 그러나 좀 더 자세히 살펴보면, 유다와 주변 나라들의 동반몰락을 말하는데 그치지 않음을 알게 됩니다.
오늘 본문은 세상 강대국은 전부 멸망해도 하나님의 교회는 점점 더 넓은 세계로 헤엄쳐 나아가 결국에는 세계의 중심이 된다는 사실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교회의 역사를 살펴보면, 이 점을 확실히 알 수 있습니다.
우리가 볼 때, 교회는 아주 작은 배(船)처럼 미약(微弱)해서 거대한 세계사의 격랑(激浪)에 휩쓸려서 침몰 할 것만 같습니다. 그러나 금방이라도 가라앉을 듯, 이리 기우뚱 저리 기우뚱 위태로워 보이던 그 작은 배(船)는 점점 더 넓은 강으로 내아가 마침내 망망대해에 이르게 됩니다. 그리고 결국은 세계의 중심을 차지합니다. Ⅰ.요압과 암몬의 교만 모압과 암몬은 이스라엘의 가까운 이웃이었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한 미움과 증오를 버리지 못했습니다.
2:8절)내가 모압의 비방과 암몬 자손의 조롱하는 말을 들었나니 그들이 내 백성을 비방하고 자기들의 경계에 대하여 교만하였느니라.”성경은 하나님께서‘모압의 비방과 암몬 자손의 조롱’을 들었다고 말씀합니다. 그들은 다른 일은 몰라도 이스라엘에게 무지무지한 욕설을 퍼붓는 일에는 단연 선두(先頭)였습니다. 그들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나타났다고 하면, 자다가도 벌떡 일어나서 욕을 퍼부을 정도로 그들을 미워했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잘되지 않기를 바랐을 뿐만 아니라, 기회만 나면, 직접 경계를 침범하고, 공격했습니다. 그들이 이처럼 이스라엘 백성들을 미워한 이유가 무엇일까? 이스라엘 백성들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은 정말이지, 잘난 데가 한 군데도 없는 족속이었습니다. 한 가지 다른 점이 있다면,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뿐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런 별 볼일 없는 족속이 하나님을 믿는다는 그 한 가지 이유만으로 전 세계 사람들의 주목의 대상이 되고, 하나님의 모든 축복(祝福)을 누리는 것을 볼 때, 그들은 속이 뒤틀려서 견딜 수가 없었습니다. 예를 들어서 어려서부터 아주 잘 알고 지내던 이웃이었다고 합시다. 그 이웃은 실력도 없고, 공부도 못하고, 인품도 별 볼일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갑자기 그 사람이 성공해서 신문에 이름이 나고, 사람들의 인기를 독차지한다면, 얼마나 속이 뒤틀릴까?
다른 사람들이야 존경하고, 좋아할지 몰라도, 내막을 아는 나는 그 사람에 대해서 좋게 말하지 않을 것입니다. 대화 중에 그 사람 이름만 나와도 마구 흥분하면서 욕을 하고, 눈을 흘길 것입니다. 즉‘내 숙제를 맨날 베끼던 놈이 어쩌다 잘돼 가지고 잘난 척하는 꼴을 못 봐주겠다.’고 하면서 미워할 것입니다. 압과 암몬 사람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들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자신들과 별반 다를 바 없는 보잘 것 없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애굽에서 엄청나게 인구를 불러 나오더니, 가나안 땅을 차지해버렸습니다. 오랫동안 그 지역에 살았던 자신들은 가나안 동편에 겨우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데, 그들은 단숨에 세계의 중심을 차지해 버린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들을 미워하고, 욕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깨닫지 못한 점이 무엇일까? 하나님이 이렇게 형편없는 민족을 축복(祝福)하신 것을 볼 때, 다른 민족들도 그들처럼 하나님께 나아가기만 하면, 똑같은 복(福)을 받을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런데 자신들은 하나님께 나아가지도 않으면서, 하나님께 나아감으로써 복(福)을 받은 이스라엘은 그토록 미워했던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 원리를 잘 알고 있었습니다. 딤전 1:15-16절)...죄인 중에 내가 괴수니라. 그러나 내가 긍휼을 입은 까닭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내게 먼저 일절 오체 오래 참으심을 보이사 후에 주를 믿어 영생 얻는 자들에게 본이 되게 하려 하심이라”
예수께서 그토록 심하게 교회를 핍박하던 바울을 높이 들어 사용하신 것은 누구든지 말씀에 사로잡혀서 헌신하기만 하면, 그처럼 영광스럽게 사용될 수 있음을 보여 주시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러니까 아무도 바울을 시기하거나, 욕할 필요가 없습니다.‘나도 하나님께 나아가면 저렇게 사용될 수 있겠구나’라고 생각하면 됩니다. 하나님이 아무 자랑할 것 없는 이스라엘을 그토록 축복(祝福)하신 것, 또한 모압과 암몬이 시기할 거리가 아니라, 오히려 찬송할 제목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이것을 깨닫지 못했습니다. 내 주변에서 늘 빌빌거리던 친구가 한순간에 유명한 사람이 되었다 해서 시기하거나 욕할 필요가 없습니다. 오히려‘아, 하나님은 누구라도 축복하실 수 있구나’라면서 찬양을 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복(福)은 큰 바다처럼 무궁무진합니다. 어느 한 사람에게 나누어 주셨다 해서 줄어들지 않습니다. 아직도 남은 복(福)이 엄청나게 많습니다.
그 사람은 그 사람대로 축복(祝福)하고 사용하시며, 나는 나대로 축복(祝福)하고 사용하실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 사람을 미워하고, 시기할 것이 아니라, 나도 하나님께 나아가면,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모압과 암몬 사람들은 하나님의 부요함은 보지 못하고, 눈앞에 있는 땅만 보았기 때문에 이스라엘이 못되어야만 자기들이 잘될 수 있을 것처럼 시기(猜忌)했습니다.
예를 들어서 지하철에 빈 좌석이 많을 때는 경쟁적으로 뛰어갈 필요가 없습니다. 그러나 오직 하나 의자(倚子)만 눈에 보이는 사람은 그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사람이 그렇게 얄미울 수가 없을 것이며, 오직 그 사람이 내리기만을 학수고대할 것입니다. 모압과 암몬은 장차 어떻게 된다고 말씀하십니까? 9절)그러므로 만군의 여호와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말하노라. 내가 나의 삶을 두고 맹세하노니 장차 모압은 소돔 같으며 암몬 자손은 고모라 같을 것이라. 찔레가 나며 소금 구덩이가 되어 영원히 황폐하리니 내 백성의 남은 자들이 그들을 노략하며 나의 남은 국민이 그것을 기업으로 얻을 것이라”
소돔과 고모라는 가나안 중에서도 특히 아름답고, 비옥한 평지였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은혜를 거두시니, 소금 구덩이로 변하고 말았습니다. 모압과 암몬도 그렇게 될 것입니다.
물론 소돔과 고모라처럼 유황불로 망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바벨론의 공격을 받아 소돔과 고모라처럼 황폐해질 것입니다. 어떤 지역에 사람이 몰린다는 것은 거기에 무언가 돈 될 만한 일이 있다는 뜻입니다.
예를 들어서 광산에 금(金)이 나오기 시작하면, 사람들이 벌 떼처럼 몰려들고, 하숙집이나, 술집 같은 부대시설이 우후죽순처럼 생겨납니다. 그러다가 더 이상 캘 금(金)이 없어지면, 그 많던 사람들이 전부 빠져나가 유령도시가 되고 맙니다. 모압과 암몬은 목축(牧畜)으로 유명한 곳이었습니다. 또 요단 동편 왕의 길로 많은 상인들이 내왕(來往)했기 때문에 통행세 수입도 짭짤했습니다. 그러나 세계의 중심이 옮겨지면, 더 이상 아무 이익도 얻지 못할 것이며, 자동적으로 사람들의 발길도 끊어질 것입니다.
큰 길을 끼고 있으면, 음식점 장사도 잘되고, 여관업도 잘됩니다. 그런데 다른 곳에 더 크고 좋은 길이 뚫리면, 사람들이 오지 않는 이치(理致)와 같습니다. 그러면 예전 지역은 다시 번창할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이 길을 지중해 쪽으로 옮겨 버리시면, 한때 번창했던 모압과 암몬도 자동적으로 소금 구덩이가 되고, 인적이 끊어진 황폐한 곳이 될 것입니다. Ⅱ.하나님의 끼친 백성들에게 주시는 축복 하나님께서는 9절)...나의 끼친 백성이 그들을 노략하며 나의 남은 국민이 그것을 기업으로 얻을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는 여기에서‘백성(百姓)’과‘국민(國民)’이라는 단어에 특히 주의를 기울일 필요가 있습니다.‘백성(百姓)’이라는 뜻의 히브리어‘암미’는 이스라엘 자손을 가리킵니다.
그리고‘국민(國民)’이라는 뜻의‘고이’또는‘고임’이라는 히브리어는 이방인을 가리킵니다. 즉 이스라엘 백성들이나, 이방인들 중에 하나님의 백성이 된 자들이 모압과 암몬 족속의 땅을 차지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꼭 물리적인 땅을 차지한다는 뜻이라기보다는, 그들이 누리던 주도권과 일반은총이 이스라엘 자손 중에서 올바른 신앙을 가진 자들과 이방인들 중에 믿는 자들에게 넘어간다는 뜻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이 보잘 것 없는 사람들을 들어서 존귀하게 하시고, 그들을 통해 일하시는 것은 세상의 똑똑한 사람들에게 굉장한 시험(試驗)거리입니다. 사도 바울은 고전1:26-29절)형제들아 너희를 부르심을 보라 육체를 따라 지혜로운 자가 많지 아니하며 능한 자가 많지 아니하며 문벌 좋은 자가 많지 아니하도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세상의 미련한 것들을 택하사 지혜 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고 세상의 약한 것들을 택하사 강한 것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며 하나님께서 세상의 천한 것들과 멸시 받는 것들과 없는 것들을 택하사 있는 것들을 페하려 하시나니 이는 아무 육체도 하나님 앞에서 자랑하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라”고 했습니다.
원래 지식이 많고, 똑똑한 사람들을 높이신다면, 아무도 수군거리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모든 면에서 자기보다 못한 사람, 계급도 낮고, 가난하고, 무식한 사람들을 높이실 때, 그들을 진심으로 존경하고, 따르기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바벨론 사람들이나, 애굽 사람들을 높이셨다면, 모압과 암몬도 군소리 없이 따랐을 것입니다. 그런데 자기들보다 못한 이스라엘 백성들을 높이시니까 자존심과 교만 때문에 받아 들이지 못한 것입니다. 그러나 다른 민족들 중에는 일찍부터 자존심을 버리고, 이스라엘을 받아들인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모압과 암몬과 앗수르가 가지고 있던 주도권뿐 아니라, 일반은총까지 넘겨받게 될 것입니다.
우리나라에 처음 기독교가 들어왔을 때, 지체 높고 자존심이 강한 양반들은 선듯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기독교를 받아들인 사람들은 주로 가난하고, 신분이 낮은 자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시대가 바뀌면서 기존 체제를 고수하던 양반들은 몰락하고, 기독교를 받아들여 새로운 가치관과 교육을 받은 사람들은 사회 지도층으로 진입하여 과거에 양반들이 누리던 일반은총을 누리게 되었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끼친 백성들이 모압과 암몬의 땅을 차지한다는 것은 영적인 주도권은 물론이고, 물질적인 축복이나, 학문적인 축복, 경제적인 축복까지 차지한다는 뜻입니다.
복음(福音)은 항상 세상을 바꾸어 놓습니다. 이것은 우리나라뿐 아니라, 세계적으로 공통되게 나타나는 현상들입니다. 그리고 그 변화의 주역은 하나님을 먼저 받아들이는 가난한 자들입니다. 그들은 사회적으로 인정받지 못하며, 억압받는 자들이지만, 복음(福音)을 통해 마음과 정신이 열림으로써 앞선 사고방식을 가지게 되며, 결국 세상의 축복(祝福)도 먼저 누리게 됩니다. 환경의 도전을 받아들이지 않으면, 도태되게 마련입니다. 처음 철도가 생겼을 때, 거부했던 도시들은 삼류도시로 전락하고 말았습니다. 사람은 도전을 받아들이면서 적응력도 커지고, 통찰력도 생기게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환경의 도전보다 더 무서운 것이 복음(福音)의 도전입니다. 복음(福音)은 기존의 사고방식과 생활방식을 전부 뜯어고칠 것을 요구합니다.
유명한 역사학자인 아널드 토인비는 그리스 문명의 몰락을 살펴보면서 복음(福音)의 도전을 거부한데, 그 원인이 있었다고 진단했습니다. 즉, 바울이 전한 복음에 반응하지 않았기 때문에 몰락한 것입니다.
다음절을 보십시오. 10-11절)그들이 이런 일을 당할 것은 그들이 만군의 여호와의 백성에 대하여 교만하여졌음이라. 여호와께서 그들에게 두렵게 되어서 세상의 모든 신(神)을 쇠약하게 하리니 이방의 모든 해변 사람들이 각각 자기 처소에서 여호와께 경배하리라” 진리의 중심에 들어 있는 영광은 찬란하기 그지없습니다.
그런데 그것을 싸고 있는 껍데기가 너무 초라해서 겉만 보는 사림은 실망하기 십상입니다. 기독교를 전혀 모르는 사람들이 교회를 무시하고, 업신여기는 것이 아닙니다. 기독교를 어느 정도 알기는 아는데, 그 안에 들어 있는 영광은 보지 못한 채, 인간적인 껍데기만 보고, 실망한 사람들이 무시하고, 업신여기는 것입니다. 그래서 교회에 처음 온 사람들보다는 믿은 지 오래 된 사람들이 훨씬 더 교회에 대해 비판적일 뿐만 아니라, 신앙도 냉소적인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런 사람은 기독교 신앙의 인간적인 면만 보았을 뿐, 그 안에 들어 있는 신적(神的)인 영광은 보지 못했으면서도 자신이 기독교의 진리(眞理)를 다 알고 있다고 착각하며, 기독교에는 더 이상 기대할 것이 없다고 단정해 버립니다. 모압과 암몬 사람들이 하나님의 백성을 비방하고, 스스로 자신을 높여서 교만해진 것은 이스라엘의 인간적인 면만 보고, 그 안에 있는 신적(神的)인 영광은 보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세상에서 가장 불행한 사람은 이처럼 기독교를 피상적(皮相的)으로만 접한 사람입니다.
오히려‘해변 사람들’은 여호와를 받아들일 것입니다. 즉 이스라엘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 있는 사람들은 오직 말씀을 통해 하나님을 배우고, 하나님께 경배함으로써 축복(祝福)에 동참할 것입니다. 그리나 모압과 암몬 사람들처럼 모든 내용을 잘 아는 것 같지만, 실상은 인간적인 겉모습만 보고, 실망하고, 등을 돌린 자들은 심판(審判)을 받을 것입니다. Ⅲ.세계 질서의 재편성 고대(古代) 세계는 앗수르와 애굽이라는 강력한 두 축을 중심으로 움직이고 있었습니다. 가나안 땅은 곧 그 곳을 연결하는 중앙에 위치하고 있었기 때문에 자연히 세계의 중심지가 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유다와 예루살렘의 멸망으로 세계의 중심은 새로운 곳으로 옮겨질 것입니다.
12-13절)구스 사람들아, 너희도 내 칼에 죽임을 당하리라. 여호와가 북쪽을 향하여 손을 펴서 앗수르를 멸하며 니느웨를 황폐하게 하여 사막 같이 메마르게 하리니”
한때 구스가 막강한 세력으로 애굽 전 지역을 지배한 적이 있습니다. 여기‘구스’라는 말은 곧 애굽을 의미하기도 하고, 피부가 검은 사람들을 총칭하기도 합니다.
여기에서‘구스’사람들이 죽임을 당한다는 것은 세계의 한 축을 이루고 있는 애굽을 멸망시키신다는 뜻입니다. 또한 하나님은 다른 축 앗수르도 멸망시켜서 사막 같이 황폐하게 하겠다고 하십니다. 유다와 예루살렘의 멸망을 통해 세계 질서를 재편성하시겠다는 것입니다.
세계의 중심은 이제 일원화(一元化)되어 바벨론 폐르시아. 마케도니아. 로마로 넘어갈 것입니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 전 세계로 하여금 그리스도의 오심을 준비하게 하시기 위해서입니다.
지금까지 세계는 애굽과 앗수르라는 두 축을 중심으로 움직였고, 이스라엘은 아시아와 아프리카를 연결하는 다리로서 양 방향으로 하나님의 의(義)를 전하는 역할을 맡았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하나님의 의(義)를 저버린 채, 제 역할을 감당하지 못하자, 하나님은 그들을 멸망시켜 전 세계로 흩어 보내심으로써 신약 교회를 준비하게 하셨습니다. 중심적인 위치를 빼앗긴 애굽과 앗수르는 어떻게 됩니까?
14절)각종 짐승이 그 가운데에 떼로 누울 것이며 당아와 고슴도치가 그 기둥 꼭대기에 깃들이고 그것들이 창에서 울 것이며 문턱이 적막하리니 백향목으로 지은 것이 벗겨졌음이라”
당아와 고슴도치는 인적이 없는 곳에 서식(棲息)하는 동물들입니다. 당아는 주로 물고기를 잡아먹고 사는 학처럼 생긴 새입니다. 애굽과 앗수르는 모두 운하(運河)로 유명한 곳이었습니다. 그들이 인공적(人工的)으로 만든 호수는 그 규모가 얼마나 컸던지, 바다처럼 보일 정도였습니다. 그런데 그곳에 이런 새들만 한가로이 살게 된다는 것입니다.
연세대학교 원주 캠퍼스에 큰 못이 있는데, 그 가운데 섬이 하나 있습니다. 그 섬에는 사람들이 접근하지 않기 때문에 흰 새들이 많이 서식합니다. 애굽과 앗수르가 곧 그런 곳이 된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무게중심이 일단 옮겨진 후에는 다시 회복되지 않을 것입니다. 이제 세계는 새로운 방향으로 나아갈 것입니다. 다음절은 이 두 곳에 대한 조롱(嘲弄)입니다. 15절)이는 기쁜 성이라. 염려 없이 거주하며 마음속에 이르기를 오직 나만 있고 나 외에는 다른 이가 없다 하더니 어찌 이와 같이 황폐하여 들짐승이 엎드릴 곳이 되었는고, 지나가는 자마다 비웃으며 손을 흔들리로다.”
그동안 애굽과 앗수르가 강대국 행사를 할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이 힘을 실어 주셨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제는 하나님이 세계를 새롭게 재편(再編)하실 것입니다. 하나님의 계획안에서는 애굽과 앗수르 뿐만 아니라, 바벨론도 잠깐 지나가는 나라이며, 페르시아도 잠깐 지나가는 나라이고, 알렉산더의 마케도니아도 잠깐 지나가는 나라입니다.
오직 영원한 나라는 로마 시대에 탄생할 그리스도의 나라뿐입니다. 그 유명한 나라들은 지금 역사책이나, 고고학(考古學)책에 그 이름만 남아 있습니다. 로마에 가 본 사람들이 하는 말이 무엇입니까? 이 작은 곳이 어떻게 세계를 지배했느냐? 는 것입니다.
로마의 지금은 광장에 노인들이 어슬렁거리고, 비둘기들이 한가하게 날아다니며, 관광객들이 깃발 들고 한 줄로 서서 열심히 돌아다니고 있을 뿐입니다. 이런 일들을 통해 우리는 오직 하나님께서 역사를 주관하신다는 사실을 확인하게 됩니다.
세상 나라는 결코 영원하지 않습니다. 즉 소련이 무너지고, 이렇게 갑자기 냉전시대가 끝나 버릴 줄 누가 알았겠습니까? 그것은 하나님이 하신 일입니다. 하나님이 성도들의 기도를 들으시고, 공산 치하에 있는 사람들을 불쌍히 여겨신 것입니다. 소련이 무너진 후, 얼마나 많은 젊은이들과 선교사들이 그곳을 찾고 있는지 모릅니다. 그동안 이슬람 세계는 우리에게 잊혀진 곳이었습니다. 그런데 미국에서 큰 테러 사건이 일어나고, 전쟁이 벌어지면서 이슬람에 대한 관심이 급속히 커지고 있습니다.
이러한 이슬람과의 충돌이 하나님께서 그 문을 열어서 수억에 이르는 사람들에게 구원의 기회를 열어 주시는 기회가 되었으면 합니다. 세상 나라들뿐만 아니라,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교회(敎會)도 한번 촛대가 옮겨지면, 전혀 힘을 내지 못하고, 이름만 남게 됩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구원 역사의 중심에 끝까지 남아 있을 수 있습니까?
무엇보다 교회의 본질을 잃지 않아야 합니다. 인간적인 것으로 신적(神的)인 영광을 죽이거나, 억압하면, 안 됩니다. 항상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고 말씀을 구하며, 기존의 사고방식을 버리고, 새로워 질 생각을 해야 합니다. 교회가 사는 길은 오직 복음(福音)의 도전을 항상 받아들이는 이것입니다. 케케묵은 옛날 사고방식을 고집하면, 하나님의 새로운 요구에 응할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이 무엇을 요구 하시든지, 그대로 순종하는 자세가 필요합니다. 과거가 아무리 영광스러웠어도 그 시절만 돌아다보고 있으면, 안 됩니다. 세계는 지금 들끓고 있습니다. 오늘날 하나님께서 요구하시는 것이 무엇이며, 내가 버려야 할 것이 무엇인지 생각하지 않으면, 순식간에 삼류로 전략해 버릴 것입니다. 나중에 깃발 들고, 한국의 교회당 주변을 관광하는 여행객들에게‘이것은 교인들이 만 명씩 모이던 큰 교회였는데, 지금은 박물관으로 쓰고 있다’라는 설명을 들려주게 된다면, 얼마나 부끄럽겠습니까? 무엇보다 중요한 일은 교회의 정체성을 분명히 하는 이것입니다. 교회는 단순히 많은 사람들이 모이는 문화적인 공간이 아닙니다. 교회는 죄인을 치료하는 병원입니다. 교회는 실패한 자, 질병에 시달리는 자, 우울증 환자, 정신병자를 말씀으로 치료해서 새롭게 만들어 세상으로 다시 내보내는 곳입니다. 만약 교회가 세상 적으로 성공한 사람들과 훌륭한 사람들만 모이는 문화적인 공간이 되었다면, 이미 그 정체성을 잃은 것입니다.
교회는 죄인들을 치료해서 세상 구석구석으로 내보내어 하나님의 일을 하게 해야 합니다.
지나친 제도화(制度化)는 성령의 역사를 제한할 수 있기 때문에 제도(制度)가 성령의 역사를 죽이지 못하도록 항상 주의할 필요가 있습니다. 제도(制度)는 성령의 기능을 보완하고, 돕는 것이 되어야지, 성령의 역사가 소멸될 정도로 절대적인 것이 되면. 안 됩니다.
교회 안에는 인간적인 요소와 신적(神的)인 요소가 함께 있어서 항상 갈등을 일으키게 되어 있습니다. 신적인 요소만 너무 강조하면 교인들이 답답하고 사랑이 없으며 재미가 없다고 불평합니다. 그러나 인간적인 요소가 너무 번창하면 말씀이 사라지고 사람 사이의 친목과 자랑으로 가득 차 버립니다. 바로 이 갈등이 우리로 하여금 늘 기도하게 만들고, 하나님 앞에서 우리의 부족함을 인정하게 만들며, 복음을 이론이 아닌 실제로 만드는 것입니다.
교회는 진리를 풍성하게 밝히는 곳이 되어야 합니다. 예배 때마다 성령의 역사가 흘러 넘쳐서 우리의 상한 심령이 고침을 받는 일이 일어나야 합니다. 말씀의 역사가 풍서하게 나타냐는 곳이 결국은 세계의 중심지가 될 것입니다. 또 그곳에 있는 사람들이 세계의 역사를 바꾸어 갈 것입니다. 우리는 지금 대단히 불안정하고, 어려운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그러나 저는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과거의 성도들은 우리보다 훨씬 더 어려운 시기를 이겨 냈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더 큰 일을 해 내지 않았습니까?
지금 세계가 왜 이렇게 들끓고 있을까? 하나님이 판을 새로이 짜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이럴 때, 우리는 어느 누구보다 말씀에 앞장서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기도에 가장 앞장서는 사람이 되어야 하며,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소식을 가장 먼저 듣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남이 잘된다고 해서 시기(猜忌)하거나, 불평(不平)하지 않고, 자신 또한 사도 바울처럼 하나님께 헌신하기를 힘쓸 때, 하나님께서 그 준비하신 풍성한 축복(祝福)을 내려 주실 것입니다. 찬송가 351장 *믿는 사람들은 주의 군사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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