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24:1-23절) 바울의 양심선언 4-75. 사도 바울이 유대인들에게 체포되어 총독 벨렉스 앞에서 재판을 받았다. 이때 유대인을 대변한 변호사 더둘로가 바울을 고발한다(1-9절).
그리고 바울은 그의 고발에 대한 변증을 양심을 따라 거리낌이 없이 하겠다고 한다(16). 양심(良心)은 인간에게 있는 도덕적 의식이지, 하나님의 음성 자체는 아니다. 그렇지만 그것은 하나님의 음성을 받으며 전하는 기관이라고 할 수 있다. 인간이 타락한 이후로 양심도 어두워져서 하나님의 음성을 바로 듣지도 전하지도 못한다. 그러나 성경말씀을 믿는 양심작용은 그 말씀을 따라 순종(회개)함으로 거리낌이 없어진다. Ⅰ.화인 맞은 양심 ⟶ 더들로와 벨렉스의 양심 바울을 재판하고 있는 벨렉스는 로마의 총독이었다. 그는 지위를 가졌으나 그의 배경은 자랑할 만한 것이 없다. 그는 노예였었는데 글라우디오 때 자유인이 되어 황제의 타락한 행동을 돕는 뚜쟁이 노릇하다가 유다 지방의 총독으로 임명되었다. 그는 부패한 행정을 하므로 유대인들의 미움을 샀다.
그의 아내는 십대 여아(女兒)로 다른 왕으로부터 도적질해 온 자다. 이 같은 자가 지금 사도 바울을 재판하고 있다. 당시 법정에서는 라틴어를 사용했다. 유대인들은 가정에서 아람어를 사용했고 시장에서는 헬라어를 구사했기 때문에 라틴어를 말하는 변호사 더들로를 앞장 세웠다. 더들로의 논고(論考)를 보면 그가 양심에 화인(火印)을 맞은 인간임을 쉽게 알 수 있다.
내심(內心)으로는 벨렉스를 존경하지 않으면서 또 그의 치적(治積)을 인정하지 도 않으면서 마치 그가 명군(名君)이라도 된 것처럼 아첨(阿諂)하는 말과 찬양의 말을 하고 있다(3절).
그리고 무고(無辜)한 사람을 죽이려고 없는 것을 있는 것처럼, 못 본 것을 본 것처럼 꾸며 바울을 ⒜소요(騷擾)범(troublemaker) ⒝나사렛 이단의 괴수 ⒞성전 모독자로 단정했다(5-6절). 그리고 ⒟침략자의 상징인 전염병(傳染病)같은 자라는 폭언을 거침없이 구사한 자이다. 이처럼 더둘로는 아첨의 능수요 조작의 명수이며 이중인격의 표본으로 양심이 완전히 마비된 자였다. 그리고 총독 벨릭스의 선고도 그의 양심이 살아있다고 볼 수는 없다. 그는 이미 예수님의 가르침과 사역에 대해 자세히 알고 있었다(22절).
그렇다면 바울을 더 이상 심문(審問)할 필요가 없으련만, 그는 바울의 재판을 뒤로 미루고 그를 계속 가두어 두었다.
이것은 ⒜유대인의 감정을 자극시키지 않으려는 정치적 술수이며, ⒝바울로부터 뇌물을 기대한 간악한 처사였다(26절). 이는 재판장의 양심이라고 할 수 없다. 이 재판의 원고 측 더둘로나 재판장 벨릭스는 하나같이 양심의 기능이 마비된 자들이다.
오늘날 우리 사회에도 이 같은 이들이 많이 있다. 그들은 양심이 마비되어 찔러도 아픈 줄 모르고 악취(惡臭)를 맡으면서 토할 줄 모르는 사람이다. Ⅱ.사도바울의 양심선언 이같이 타락한 원고와 재판장 앞에서 피고인 바울은 정중한 태도로 양심을 선언하고 있다. 바울은 16절)하나님과 사람에 대하여 항상 양심에 거리낌이 없기를 힘써왔다”고 했다. ⒜예루살렘에 온지가 12일 밖에 되지 않으니(11절) 그동안 성전이나 회당 그 어느 곳에도 누구와 변론한 적이 없으며(12절),
더욱이 백성을 소요케 했다는 말은 어불성설(語不成說)이요, 벨릭스는 바울이 가이사랴에서 감옥에 5일간 있었고(1절), 예루살렘에서 옥중에 하루 있었던 것을 알고 있었다.
그렇다면 6일안에 어떻게 백성을 선동할 수 있었을까? ⒝조상들이 가르친 하나님을 믿고 율법과 선지자의 글에 기록된 말씀을 믿으며 유대인들이 기다리는 메시아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나를 이단의 괴수라고 함은 언어도단(言語道斷)이며, ⒞오랫만에 동족을 위한 구제금과 재물을 가지고 귀국하여 그동안 성전에서 결례까지 행한(17-18절) 사람에게서 성전모독죄를 씌운 것은 천부당만부당(千不當萬不當)하다는 것이다.
⒟이같이 언행이 깨끗한 바울을 전염병이라고 한 것(5절)은 또한 잘못된 편견 때문이라는 것이다.
전염병(傳染病)이란 페스트 흑사병을 말한다. 예수를 믿는 것은 흑사병 같은 전염병이므로 빨리 없애거나 막지 않으면 모든 시민이 다 죽는다는 것이다. 실은‘천국은 마치 누룩과 같다’고 주님은 말씀했다. 가루 속에 누룩이 조금만 들어가도 금방 퍼져 변화를 일으키는 것처럼 누룩과 같은 것이 복음이다.
좋은 의미로 보면 이처럼 변화를 일으키는 종교를 전염병이라고 한 것이다. 바울은 양심에 거리낌이 없이 산 사람이다. 즉 하나님과 사람들 앞에서 양심에 부끄러움 없이 살았다고 벨릭스 총독 앞에서 선언하고 있다. 그리고 바울은 공회 앞에서 23:1절)...나는 범사에 양심을 따라 하나님을 섬겼노라”고 했다. Ⅲ.어떻게 바울은 양심을 따라 살 수 있었나? ① 하나님을 믿고 하나님 앞에서 살았기 때문이다(14,16). 하나님은 무소부재(無所不在)하시고 전지전능(全知全能)하시다. 이 같은 하나님을 믿는 사람은 양심에 어긋나는 삶을 살수 없다. 어느 누구도 하나님을 속일 수 없기 때문이다.
범죄를 방지하기 위해서는 엄격한 법률이 제정되고 강력한 사회 여론도 조성되어야 한다. 그러나 법이 무서워 죄를 범치 못하는 자는 그 법이 조금만 약(弱)해져도 곧 범죄케 되고, 남의 눈이 무서워 악(惡)을 행치 못하는 자는 남의 눈을 피 할 수 있을 경우 곧 악(惡)을 행하게 된다.
요셉이 보디발의 아내의 유혹을 물리칠 수 있었던 것은 애굽의 법이 엄격했기 때문도 아니요, 남의 이목이 무서워서도 아니었다. 언제 어디서나 감찰하시는 하나님이 두려웠기 때문이다.
요셉은 창39:9절)...내가 어찌 이 큰 악을 행하여 하나님께 죄를 지으리이까”라고 했다. 하나님 신앙보다 더 좋은 사회 정화 책은 없다. 바울은14절)...율법과 선지자의 글에 기록된 것을 다 믿는다”고 했다. 하나님을 믿는 바울은 하나님의 말씀도 믿었다. 참으로 탐관오리(貪官汚吏)의 근절을 바라고, 진정 청소년 선도를 원한다면 무엇보다 그들로 하여금 먼저 하나님 신앙을 갖게 해야 한다. 그리고 하나님 말씀을 믿게 해야 한다. 이것만이 민족과 국가가 사는 길이다.
시33:12절)여호와를 자기 하나님으로 삼은 나라 곧 하나님의 기업으로 선택된 백성은 복이 있도다” ②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의 죽음과 부활을 믿기 때문이다(15,21절).
종교개혁자 M.Luther는 Worms국회의사당에 소환이 되어 심문을 받았다. 그때 그를 협박하여 ‘네가 지금까지 쓴 것을 다 소각하고 이제 우리 법을 따르겠는가’ 라는 질문에 ‘성경에 비추어 오류가 없는 한 나는 나의 주장을 철회 할 수 없습니다. 나의 양심은 이미 성경에 포로가 되었습니다’ 라고 대답했다.
그리고는 ‘하나님이여 내가 여기 있나이다(Here I stand)라고 기도했다. 이 같은 루터의 용기와 양심의 선언은 어디서 기인된 것일까? 그것은 성경(聖經)이었다. 성경의 주제는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의 죽음과 그의 부활이다. 내 죄를 대신하여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신 예수를 믿는다면 그 주님을 배신하여 다시 주님을 슬프게 할 수는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바울은 양심에 거리끼는 일을 하여 주님을 다시 십자가에 못 박는 일을 할 수 없다는 것이다.
당신도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의 은총을 믿으라. 그리고 그 은혜를 확인하라. 그리하면 그를 배신하지 못할 것이다.
또한 바울은 부활하신 주님을 직접 영광스럽게 만난 경험을 갖고 있다(고전15:8). 그 후 바울은 자신을 가리켜 부활의 증인 이라고 말해 왔다. 이는 그리스도의 부활을 믿을 뿐 아니라, 그 안에서 믿는 모든 사람들이 생명의 부활을 할 것을 믿는다는 말이다.
이 부활에는 영광스런 부활과 욕된 부활이 있다(고전15:23-24). 즉 예수 그리스도에 속한자의 부활과 그리스도 밖에 있는 자의 부활을 가리킨다. 그러므로 부활한다고 모두가 반가워 할 일 만은 아니다. 우리의 부활은 그리스도께 속한 자의 부활 즉 그리스도를 영접하기 위한 부활이어야 한다.
그러나 부활을 믿는 사람은 양심을 외면하고 자신을 더럽히는 일은 할 수 없다. 그렇게 될 경우 욕되고 부끄러운 부활이 따르게 될 것이며, 이것은 도리어 무거운 형벌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바울은 자신의 부활을 믿는 자이기 때문에 하나님과 사람에 대하여 부끄러움 없이 살 수가 있다는 것이다(16절). 부활신앙 그것은 강력한 오염(汚染)방지제가 될 것이며, 경건의 촉진제(促進劑)가 될 것이다. ③ 성령의 내주하심과 인도하심을 믿기 때문이다. 성령은 회개의 영(靈)을 불어넣으시어 맑고 깨끗한 양심을 회복하게 한다. 즉 어떤 운전사가 사람을 치고 뺑소니를 쳤다. 양심의 가책을 받아 도무지 핸들은 잡을 수 없어 경찰서에 가서 자수했다. 이 같은 회개의 영(靈)은 성령께서 부어주시는 것이다. 어거스틴은 임종 시 시51편(회개의 시)를 기록하여 벽에 붙여 놓고 열흘 동안 그것을 읽으면서 회개하다가 죽었다고 한다. 이렇게 성령의 내주(來住)하심과 인도하심을 믿는 이는 회개하고 다시 죄의 길에 빠지지 않는 양심을 따라 살다가 죽는다.
사실 바울의 변증이 벨렉스를 감동시켰던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성령 충만한 바울의 모습이 벨렉스로 하여금 23절)백부장에게 명하여 바울을 지키되 자유를 주고 그의 친구들이 그를 돌보아 주는 것을 금하지 말라”고 했다. 만약 어느 재벌 총수가 나쁜 병에 걸렸는데 아무도 모르게 외국병원으로 가서 치료를 받았다고 한다. 소문이 나면 그 회사 주가가 폭락하기 때문에 아무도 모르게 출국한 것이었다. 자신의 몸가짐이 중요하다. 성령 충만한 사람은 기쁨이 충만하다.
우리의 기쁜 모습을 보고 많은 사람들이 매력을 느끼고 우리가 믿는 그리스도를 믿게 된다. 성령의 내주(來住)하심과 인도하심을 믿는 이가 되어 양심을 따라 살 수 있어야 한다. 결론(結論) 그의 말을 들으면 그 사람 됨됨이를 알 수 있다. 항상 의도적으로 사실과 반대되는 말을 하는 자는 사악(邪惡)하다. 꿀처럼 달콤한 말을 매끄럽게 쏟는 자는 본성이 간사(奸邪)하고 교활(狡猾)하다. 으레히 남을 헐뜯고 비방이나 하는 자는 잔인(殘忍)하고 비뜰어진 성품을 가졌다. 미사여구(美辭麗句)를 엮어낸다고 해서 아름다운 말이 되는 것이 아니라, 언성을 높여 말한다고 해서 힘 있는 말이 되는 것도 아니며, 천연스럽게 말한다고 해서 진실한 말이 되는 것도 아니다.
하나님을 믿고 그리스도의 대속 적 죽음과 부활을 믿고 성령의 내주하심과 인도하심을 믿어 선한 양심을 따라 하는 말만이 가장 아름답고 힘차고 진실한 말이 된다. 그러기 위해서는 하나님이 주신 양심을 따라 살아야한다.
죽은 양심, 부패(腐敗)한 양심, 화인(火印)맞은 양심이 아닌 선(善)한 양심을 따라 살아야한다. 옳게 살지 못한 자의 입에서 흘러나오는 직언(直言)처럼 듣기에 역겨운 것은 없다. 참된 용기는 신앙과 양심에 있다. 우리 주님도 이 길을 가셨다. 그리고 바울도 이 길을 쫓았다. 우리 또한 그 길을 갈 것이다. 양심 따라, 성경의 도를 따라, 그리스도 따라, 성령 따라 살아갈 것이다.
사랑하는 성도(讀者)여러분, 14절 말씀대로 어떤 핍박이 와도‘이 도(道)를 따라’하나님께 나아가는 그리스도인이 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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