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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뜻함(情) 그리고 바름(正)의 눈으로 바라보기 삶의 미학
- 신수옥 수필집 <보석을 캐는 시간> -
최원현/수필가·문학평론가·한국수필창작문예원장
nulsaem@hanmail.net
1. 들어가며
문학은 삶의 이야기다. 그 삶의 이야기가 진실이냐 아니냐를 떠나서 ‘삶=사람’의 이야기는 따뜻한 것일 때 공감과 감동이 있다. 특히 만들어진 이야기가 아닌 실제 있었던, 그것도 내가 체험한 진실의 이야기라면 더욱 감동이 클 수 있다.
문학은 사람의 행복을 궁극적인 목표로 한다. 그 중 수필은 성찰 특히 자성을 통해 자기 바라보기를 수없이 한 결과물이다. 남을 보기는 쉬워도 자신을 바라보기란 결코 쉽지 않다. 그러나 수필가의 삶은 바로 그 자신을 바라보기가 일상화 되지 않으면 안 된다. 자신의 삶의 체험이 오랜 기간의 생각과 다듬기와 사전 구성의 산고를 거쳐 주제화 내지 의미화로 표출될 때 비로소 문학이란 이름의 한 편 수필이 된다.
수필가 신수옥의 첫 수필집《보석을 캐는 시간》에는 우리가 일상 속에서 안고가야 할 수많은 숙제들을 따뜻한 보듬기로 자신의 문제화하고 그 문제를 성찰로 다시 끌어안아 삶의 의미로 승화해 낸다. 각박한 현대를 사는 사람들에게 좋은 글은 아침 이슬과도 같은 신선함이 되기도 하고 깊은 산속 맑은 물 한 모금 같은 청량감을 주기도 한다. 그래서 글은 읽는다기보다 맛보는 것 곧 먹는 것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마시고 먹는 글에서 온몸 가득 스며드는 향기로움과 신선함을 충만하게 느낀다.
신수옥은 과학도였고 과학자다. 남편과 함께 문학과는 거리가 멀다 할 수 있는 화학의 세계에서 공부하고 연구하고 가르치며 살아왔다. 화학과 문학은 좀처럼 어울릴 수 없어 보인다. 그런데 신수옥에게선 그가 애당초 길을 잘못 든 것이 아닌가 싶을 만큼 상쾌하고 통쾌한 글쓰기가 되고 있다.
어디서 비롯된 재능인지는 모르겠다. 그가 글쓰기를 시작한 것도 고작 3년이고 등단한지는 1년밖에 되지 않은 초보자요 신인이다. 그런데 그가 평생 끌어안고 살아온 과학적 사고들이 글쓰기에선 어떻게 문학적 구성력으로 전이되어 특별한 훈련이 없었는데도 구성력 있는 글쓰기를 하게 했는지는 모르겠다. 여하튼 그의 글들은 그냥 쓴 것이라고 하지만 비교적 탄탄한 구성력을 갖고 있고 또 작가의 성격상 그게 선행되지 않으면 글을 쓸 수 없었던 것 같다.
신수옥의 수필들은‘따뜻함’과‘바름’의 수필이다. ‘따뜻함’은 가족을 중심으로 한 사랑 나눔이고, ’바름‘은 바른 눈으로 세상보기이다.
2. 가족이라는 사랑의 동심원-추억과 그리움 그리고 성찰
신수옥 수필의 대 주제는 가족에 대한 사랑이다. 가족이라는 사랑의 동심원 속에서 추억을 통해 그리움을 열고 그리움 속에서 자신을 들여다보며 성찰로 이어간다. 이야기가 구체적이어서 읽으면 눈앞에 상황이 그려진다. 작품 속에서 두 명의 화자가 자연스레 상황을 이끌어 가면서 한 편의 드라마를 보는 것 같게도 한다. 그 속에 추억과 그리움과 후회를 담은 사랑론을 펼친다.
<엄마의 원피스>는 어릴 적 나와 엄마가 된 내가 서술자로, 그리고 지금의 나보다도 훨씬 젊었던 엄마와 지금의 내 엄마가 또 한 명의 화자로 이야기를 꾸며간다.
신수옥은 6.25전쟁이 일어나던 며칠 전인 6월 초에 태어났다. 위로 두 오빠와 언니, 갓난쟁이인 그까지 넷을 데리고 부모님은 피난생활을 하셨다. 그리고 밑으로 동생이 둘 더 태어났다. 6남매 중 네 번째란 묘한 자리다.
<엄마의 원피스>에서 작가는 안타까운 피해자가 된다. 겨우 여섯 살 신수옥에겐 너무나도 큰 충격이요 절망일 수밖에 없던 사건, 그래서 그는 ‘아주 많이 성장한 후까지도 추석이 가까워오면 언제나 그 때의 억울함이 되살아나서 혼자서 씩씩거리곤 했다.’ 라고 했다. ‘아주 많이 성장한 후까지도’라는 표현 속에 잠재되어 있는 그의 억울함, 왜 그런 일이 생겼을까
추석을 며칠 앞두고 동대문시장으로 추석빔을 하러 가신 엄마. 학교에 간 오빠와 언니를 대신하여 동생을 돌보고 있는 착한(?) 딸은 가슴이 설렜다. 엄마가 사올 자신의 추석빔에 대한 기대다. 드디어 엄마가 나타나고 지루함과 힘듦의 동생 보기에서도 해방된 그에게 안겨질 포상과도 같은 행복을 기대하며 그는 양손 가득이 보따리를 들고 웃으면서 다가오는 엄마를 향하여 소리치며 뛰어가 끌어안는다. 그런데
엄마의 보따리 속에서는 여러 가지가 나왔겠지만 내 머릿속에 남아있는 것은 예쁜 원피스 세 벌, 푸른 무늬의 언니 원피스, 노란 무늬의 동생 원피스, 빨간 무늬의 막내 동생 원피스, 그런데, 그런데 아무리 뒤져도 내 것은 없었다.
‘여섯 살짜리가 이 상황에서 달리 대처할 수 있는 방법이 있었을까. 돈이 모자라서 넷 중에 둘만 산 것도 아니고 어떻게 네 딸 중에 세 명의 옷은 구색 맞춰 사면서 내 것만 빼놓을 수 있단 말인가. 그러나 엄마는 나를 달래줄 생각도 않고 저녁식사 준비가 늦어졌다고 종종걸음으로 부엌으로 가버리셨다.
세상엔 이해할 수 있는 것과 이해할 수 없는 것, 이해될 수 있는 것과 이해될 수 없는 것이 공존한다. 그러나 여섯 살짜리에겐 그 어떤 이해할 수 있는 것도 이해될 수 있는 것도 있을 수 없었다. 그 때 엄마는 왜 그랬을까, 그 이유는 어디에도 나타나 있지 않다. 그런데 그로부터 30년도 훨씬 지난 어느 날 엄마와 단둘이 누워 모녀의 정을 나눌 때 그 엄마가 문득 생각난 듯 장롱을 열고 옷 한 벌을 꺼냈다.
“이 원피스 내가 입으려고 샀는데 나보다는 젊은 너한테 더 잘 어울릴 것 같으니 너 입지 않으련?” (중략)
“엄마, 이렇게 좋은 옷을 엄마 입지 않고 왜 저를 주세요?” 그냥 나는 그렇게 말했다. 그때, 죄를 지은 사람이 고백하듯 더듬더듬 하시는 엄마의 말씀.
“내가 그 옛날에 세 딸만 예쁜 옷을 사주면서 네 것은 못 산 것이... 나도 그때 왜 그랬는지 기억은 안 난다만 그것이 늘 마음에 걸렸다. 이 옷 괜찮은 옷이니 네가 잘 입고 그때 일은 잊어주면 좋겠다.”
“엄마!...” 하며 작가는 말을 잇지 못한다. 작가는 자기만 마음이 아팠다고 생각했는데 엄마는 더 많이 아팠던 것이다.
옷을 받아들고 어둠이 내리는 저녁 길을 집으로 돌아오면서 나는 그동안 마음고생을 했을 엄마가 안쓰럽고 죄송해서 눈물을 흘렸고 옹졸했던 내 마음이 한심스러워 소리도 못 내고 눈물을 삼켰다.
이해와 용서는 동류항이다. 둘 다 사랑이 전제가 된다. 그러나 부모자식 간에는 일방적 내리사랑이다. 신수옥의 <엄마의 원피스>에도 세월 따라 자신들 이해의 폭이 줄어든 것은 생각지 않으면서 머리가 커지고 키가 자랐다고 엄마만큼 가슴도 자란다고 생각하는 이 시대의 자녀들에게 아무리 키와 머리가 자라도 엄마만큼은 가슴이 깊어질 수도 넓어질 수도 없다는 메시지를 담고 있다.
여기서 신수옥의‘엄마’를 생각해 보게 된다. 대개의 경우 어린 시절에는 엄마로 부르다가도 결혼을 하고 어른이 되면 어머니로 부르게 되는 것이 일반인데 신수옥은 ‘엄마’를 고집하고 자녀들에게도‘엄마’를 강요(?)한다.
나는 친정엄마가 여든셋에 하늘나라로 가실 때까지 엄마를 한 번도 어머니라고 부른 적이 없다. 또한 우리 아이들이 말을 배우기 시작할 때부터 나를 부르는 호칭을 엄마로 가르쳤다.
그런데 그날 나는 큰댁에서 정말 이상한 일을 보았다. 나보다 두 살 위인 사촌언니와 놀고 있는데 안방에서 누군가 ‘영옥아’ 하고 언니를 불렀다. 언니가 “네”하고 안방으로 들어갔다. 당연히 나도 얼른 따라서 들어갔다. 언니는 내가 처음 보는 어떤 아줌마 앞에 무릎을 꿇고 앉아서 “어머니 부르셨어요?” 한다. 이 사람은 누구지, 어머니? 왜 엄마가 아니고 어머니지? 엄마라면 부엌에 있어야지 왜 안방에 저렇게 고운 옷을 입고 있는 걸까. 어린 눈에 그 안방에서의 장면은 너무나 생소했다.
그랬다. 새로 들어온 큰 어머니, 말하자면 나는 뵌 기억도 없는 큰어머니 대신에 우리 사촌언니들의 새어머니가 된 분이었다. (중략)
그러니 나를 낳아준 친엄마를 어머니라고 부르는 것은 엄마를 계모 대접하는 예의에 벗어난 일이라고 나는 혼자서 그렇게 단정 짓고 말았다. 어쩐 일인지 우리 엄마도 자녀들이 어른이 되도록 한 번도 당신을 어머니라 부르라고 가르치지 않았다. 엄마와 어머니에 대한 어릴 때의 생각이 머리에 자리하고 있던 나는 물론 자녀들에게 나를 어머니라 부르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엄마라는 정겹고 좋은 이름으로 평생 불리고 싶었다. <엄마와 어머니>
신수옥에게‘엄마’는 삶의 출발이며 삶의 진행형이다.‘엄마’라는 호칭만으로도 추억이 살아나고 그립고, 더러는 미안해서 후회가 되는, 그렇게 용서와 이해와 화해가 이뤄지게 하는 삶의 만병통치약이다.
그런가 하면‘아버지’는 신수옥 삶의 보호막이었다.‘아버지’에 대해서는 이 수필집에서 <평창동 그날>과 <아버지의 넓은 등> 두 편에서만 언급이 되었다. 엄마만큼 사랑이 덜해서일까. 아니다. 아버지는 그냥 아버지로 그의 삶 전부에 녹아있다. 아버지는 그녀의 힘이었고 버팀목이었고 보호막이었다. 엄마에 비해 상대적으로 너무 크고 깊고 강하게 존재되어 있던 아버지였기에 오히려 그의 글 속에선 많이 등장하지 않았을 뿐이다.
‘어릴 때부터 유난히 몸이 약하고 툭하면 넘어지기도 잘하고 다리가 아파 고생한 적이 많았’던 신수옥은 먼 거리를 걸어서 학교 가는 것이 싫으면 다리가 아프다고 울며 떼를 썼다. 그런 딸을 출근을 미루며 ‘넥타이를 맨 정장차림 그대로’ 딸을 업고 집을 나서곤 하셨던 아버지다. 그런 아버지의 넓은 등과 산길을 기억하고 있다.
아무리 몸이 마르고 약했다고는 해도 여덟 살이면 학교까지 삼십분 남짓 업고 가는 일이 쉬운 일은 아니었을 텐데도 아버지는 단 한 번도 힘드니까 쉬었다 가자고 하신 적이 없다. 시간을 절약하기 위해서였을까 아버지는 아이들끼리 다니는 넓은 길이 아닌 산길을 택하셨다. 그 산길. 나는 아직도 아버지의 등에 업혀 바라보던 그 산길이 눈에 선하다. <아버지의 넓은 등> 중
‘넓은 등’에서 느끼던 든든함과 안온함은 그가 삶을 사는 동안 가장 큰 힘이었을 것이다. 그 아버지가 돌아가실 때에야 작가는 철이 든 후 처음으로 아버지의 뺨에 자신의 뺨을 대어본다. 그리고 아직 온기가 남아있는 아버지의 뺨에서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아버지의 살결을 느껴본다.
아버지는 나를 기다리시느라 눈을 감지 못하셨던 것 같다. 여섯 남매 모두 다 눈 속에 그려 넣고 가시고 싶었나 보다. 한 번 눈을 감아버리면 다시는 뜨지 못해 달려오고 있는 둘째딸을 못 본 채 가시게 될까봐 남은 힘을 다해 눈을 뜨고 계셨다. 얼마나 힘드셨을까. 아버지의 입술이 바짝 말라있었다. 거즈에 물을 묻혀 입술을 추겨드렸다. 울고 있는 나를 작은 오빠가 등을 쓸어주며 달래주었다. 동생이 아버지께 말씀드렸다.
“아버지 잠시라도 눈을 감으세요. 계속 뜨고 계시니까 힘드시잖아요. 작은언니도 보셨으니 잠시 눈을 감고 주무세요.”
동생이 아버지의 눈을 감겨드리는 순간 아버지는 이생의 끈을 완전히 놓으시고 먼 길을 떠나셨다.
신수옥의 수필들이 그려내는 이와 같은 그림들은 단순히 부모 자식 간의 사랑이 아니다. 바로 매일이다시피 매스컴을 오르내리는 깨어진 가정들의 소식을 보며 나는 참 많은 사랑을 받고 자랐구나 감사하면서 속히 이 시대의 가정들도 회복되기를 염원하는 간절한 기도를 담고 있다. 그는 아버지에게 마지막 사랑을 표한다.
이름 모를 호스들이 아버지의 몸 여기저기 연결되어 있었지만 나는 몸을 숙여 그대로 아버지를 내 품에 안아보았다. 아니, 안겨보았다. 쏟아지는 눈물을 주체하지 못한 채 아버지께 한 번도 들어본 적 없고 나도 해드린 적 없는 말씀을 처음으로 아버지의 귀에 대고 속삭였다.
“아버지 사랑해요. 그리고 존경합니다. 아버지의 딸이어서 참 자랑스러웠어요.”
<엄마의 원피스>와 <아버지의 넓은 등>을 통해 신수옥은 온전한 가족의 회복을 희원한다. 내가 누린 것이 나만의 특별한 축복이 아니라 모두가 함께 누려야만 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것이 세상을 향한 따뜻함과 바름의 눈과 마음을 갖고 지나온 삶과 살아갈 삶을 생각하는 작가 신수옥이 풀어내는 사랑의 의미다.
신수옥에겐 정열적인 면도 있다. 겉으로는 냉철하고 접근하기 어려워 보일 것 같지만 그의 수필 한 편만 읽고 나도 그 안 가득 넘쳐나는 열정에 그냥 동화되고 만다. 아마도 젊었을 때 그러니까 스물을 막 넘어선 꽃봉의 나이엔 더욱 매력이 넘쳤을 것 같다. 그래서 그는 단 번에 한 남자의 표적이 되었고, 그 진실함에 사로잡힌 그 또한 뜨거운 사랑의 포로가 된다.
⑴ 하루 종일 눈이 내려 캠퍼스가 흰 눈으로 덮이고 나뭇가지 위에도 소복이 눈이 쌓여 아름다운 겨울 풍경으로 젊은 가슴이 뛰던 날 이웃한 S대학에 심부름을 가게 되었다. 화학과가 있는 R관을 들어서다가 그 교수님과 우연히 마주쳤다. 대학생활의 마지막 학기에 내가 다니던 대학에 오셔서 우리 클래스를 가르친 분이었다. 예기치 못한 만남이었기 때문이었을까. 그렇게 반갑고 마음이 설레었다. 하지만 내색을 할 수는 없는 일이어서 속마음을 감추고 일을 보는데 그 분은 반가운 기색을 전혀 감추지 않고 내 일을 도와주었다. (중략)⑵ 한낮부터 내린 폭설로 길이 마비될 지경인 어느 오후 퇴근이 임박한 시간에 그분한테서 전화가 왔다. 함께 눈길을 걷자고 했다. 신촌의 한 찻집에서 기다리고 있던 그는 나를 데리고 비원으로 갔다. 그것이 아마도 우리의 첫 데이트가 아니었나싶다.
⑶ 그는 손이 시리겠다며 갑자기, 그러나 아주 자연스럽게 내 손을 잡아 자신의 코트주머니에 넣었다. 얼떨결에 손이 잡힌 나는 당황한 중에도 그이의 따뜻한 손의 체온을 느끼며 가슴이 뛰는 환희로 벅차올랐다. 아까부터 내리던 눈은 그대로였지만 내게는 전과 사뭇 다른 풍경이 되어 있었다. 눈송이 하나하나가 오직 나를 축복해 주기 위한 것처럼 느껴졌다. 눈 내리는 비원의 숨 막힐 듯 고요한 아름다움 그것이 내 사랑의 시작의 모습이었다.
⑷ 책을 펼치면 책속에 그가 있었고 실험을 하려면 비커 속에, 플라스크 속에도 그가 있었다. 밖으로 나오면 하늘 가득 그가 나를 보며 웃고 있었고 잠들면 꿈속에도 그가 내 곁에 있었다. 그의 사랑을 받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나는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여자였다.
⑸ “여기 좀 나와 보세요. 함박눈이 쏟아지고 있어요.” 곁에 온 남편이 어개동무를 한다.
⑹눈송이 하나하나에 우리들이 살아온 날들의 편린들이 실려 함께 춤추듯 나부낀다. 사랑했던 순간들, 아이들을 낳고 키우며 기뻤던 순간들, 힘들고 고달팠던 순간들조차 눈송이에 실리니 아련한 그리움이 되어 나른다. 세월은 그렇게 흘러가고 있었다. <눈이 내린다>
<눈이 내린다>를 보면서 한 영혼과 또 하나의 영혼이 만나 어떻게 삶을 이루고 세상을 살아가는지를 보게 된다. ‘사랑’이란 말은 이해와 협조와 용서와 희생에 전적 나눔, 전적 배품, 전적 낮아짐, 전적 높임들이 합해져 만들어낸 맛있는 주스 한 잔이란 생각이 든다.
신수옥은 이 수필의 처음을‘눈이 내린다. 함박눈이 펑펑 내린다.’로 시작한다. 그리고는‘세월은 그렇게 흘러가고 있었다.’라고 마감한다. 그 세월 속에 그는 무엇을 흘러 보냈는가. 사랑했던 순간들, 아이들을 낳고 키우며 기뻤던 순간들, 힘들고 고달팠던 순간들이란다. 어쩌면 신수옥 삶의 요약은 바로 크게 이 셋으로 대별될 것 같다.
누구나 다 그렇겠지만 신수옥에게 가족은 무엇보다 소중한 존재다. 부모, 6남매, 부부, 자식은 사랑의 대명사들이다. 그가 존재할 수 있었던 이유요, 그가 존재해야 하는 이유요, 그가 존재하는 의미다.
그는 1968년 1월 21일 저 유명한 1.21사태가 일어난 날 대학시험을 하루 앞두고 있었다. 그것도 그 사건의 중심지인 평창동에 살던 그가 총소리 속에도 엄마 옆에서 편히 잠을 자고 살벌한 긴장 속에서도 아버지의 주선으로 야채장수 트럭을 얻어 타고 시험장에 도착해 시험을 치렀다. 사랑하는 가족의 힘이었다.
내게는 전날 밤의 그 소란으로부터 온 마음을 다해 기도하는 마음으로 나를 지키며 밤을 지새운 엄마와, 자식같이 어린 군인에게 머리를 조아려 주신 아버지의 사랑이 있었고, 상황을 이해하고 트럭을 타게 해준 인간적인 고마운 군인아저씨와 아무 대가도 바라지 많고 안전한 지역까지 나를 태워다 준 트럭아저씨, 그리고 몇 살 차이 나지 않으면서도 동생을 알뜰히 보호해 주었던 언니가 있었다. 그것만으로도 나는 한평생 사랑에 빚진 자로 감사의 마음을 잃지 않고 살아야 한다. <평창동 그날>
사랑에 빚진 자는 행복하다고 했다. 빚을 졌다는 것을 인식하는 순간부터 빚을 갚기 위한 노력이 시작될 수밖에 없다. 그러나 사랑의 빚은 갚아도 더 늘어나는 빚이다. 그러니 마음뿐이다. 그래서 한 번 진 사랑의 빚은 결코 다 갚을 수가 없다.
. 세 자매가 여행길에 나섰다. 나는 육남매의 넷째, 딸로는 둘째딸이다. 부모님 밑에서 옹기종기 자라던 일이 엊그제 같은데 어느 새 우리는 손자, 손녀를 서넛씩 둔 할머니, 할아버지가 되었다.
. 일곱 밤을 매번 다른 호텔에서 잤다. 유난히 잠자리에 예민한 나를 위해 두 사람은 불평 한 마디 없이 항상 가장 아늑하고 좋은 자리를 내게 양보해 주었다. 언니와 동생은 툭하면 배탈과 설사로 고생하는 나를 염려해 식사시간마다 이것저것 신경 써 주었다. 자신은 별로 좋아하지 않으면서도 내가 좋아하는 간식을 챙겨온 두 사람의 염려 덕분에 열흘 가까운 여행에 배탈 한 번 나지 않고 잠자리가 불편해 날밤을 새운 날도 없이 건강하게 즐거운 여행을 할 수 있었다.
. 하지만 이제부터는 아니다. 칠순을 바라보는 언니에게는 살가운 동생으로서, 이순에 들어선 동생에게는 푸근한 언니로서, 그동안에 받아온 사랑을 갚으며 오래오래 지금처럼 사랑을 나누며 살고 싶다. <자매여행 이야기>
몸이 약한 작가에겐 언니도 동생도 보호자다. 그러나 그것이 어찌 보호 만이랴. 희생이 전제된 사랑, 가족 사랑이다. 사랑이란 할 수 있는 것을 해주는 것이 아니라 해줄 수 없는 것까지 해주는 것이다.
환경이란 때로 사람을 아주 바보스럽게 만들어버리기도 한다. 그래서 오해 아닌 오해가 생기고 혼자서 절망하기도 한다. 그러나 그 또한 가족이라면 이해가 되고 부부라면 믿음으로 회복이 된다.
. 난생 처음 미국에 간 것은 내 나이 만 스물일곱 살 때였다. 결혼한 지 4년, 두 돌 반 된 딸과 함께였다.
내가 흑백TV라면 그녀들은 화려한 컬러TV 같다고 하면 옳은 비유가 될지 모르겠으나 하여간 나는 열등감을 느끼기 시작했다.
. 우리는 누가 뭐래도 당신은 내게, 나는 당신에게 길들여진 부부 아니요? 당신은 그런 존재요. 아무리 아름다운 여자들 틈에 있어도 그리워지는 사람, 부족하면 부족한 대로 내게 가장 합당하기에 하나님이 내게 허락하신 단 한 사람의 여자가 당신 아니겠소?
. 이 날까지도 내가 완벽하게 신뢰할 수 있을 만큼 신실한 남편이 고맙고, 나 또한 남편에게 똑같이 믿음을 주는 사람으로 인정받는 아내인 것이 참으로 감사하다. <내 별의 한송이 붉은 장미>
가족은 사랑이란 말로는 다 표현하기 어려운 질긴 운명체다. 수필의 내용은 작가의 체험이기에 신변잡기라고 폄훼되기도 하지만 그만큼 강력한 공감을 불러오기도 한다. 어떤 고통도, 어떤 슬픔도, 어떤 절망도 이겨낼 수 있는 힘은 가족이기에 가능해 진다. 끝없는 수용과 화해, 받는 사랑은 이기적이 될 수 있어도 주는 사랑은 그냥 희생인 것도 바로 사랑의 본질이‘주는 것’이기 때문이다. 내 것 모두를 주어도 아깝지 않은, 그래서 내 생명보다도 더 소중하다. 내 목숨도 주저 없이 내놓을 수 있는 상대, 신수옥은 그걸 남편에서 자식으로 확대하며 사랑의 지경을 확인한다. 아이들을 낳고 기르는 것 또한‘생명보다 소중한’것이었다. 그래서 세상의 부모들에게 그리고 자식들에게 그는 마구 외치고 싶어 한다. 더욱이 부모자식간의 기본 도리까지 잊어지고 깨어지고 말살되어가는 현대를 바라보는 그의 눈은 그래서 더‘내 생명보다 소중한’을 외친다.
3년간 나는 아이의 사진을 가슴에 품고 다니며 기도했다. 필요하면 내 생명까지라도 드릴 테니 아이를 깨끗하게 고쳐달라고. 이제 수술 후 조심하며 약을 복용하는 기간도 끝나가고 있다. 이 감사한 마음을 어찌 말로 할 수 있을까.
사람들이 가끔 묻는다. 손자가 예쁘냐 손녀가 예쁘냐, 또는 친손이 귀하냐 외손이 귀하냐. 그래서 한참을 생각해 본 적이 있다. 아무리 생각해도 두 명의 외손자와 한 명의 친손녀 중에 뒤에 세울 놈이 없다. 나는 내 생명도 아낌없이 내어줄 수 있는 손자가 셋이나 있는 할머니임이 자랑스럽고 행복할 뿐이다. <내 생명보다 소중한>
이게 부모의 마음 아니랴. 이처럼 사랑 그 이상의 힘을 신수옥의 수필들에선 보여준다.
신수옥에게도 참으로 힘들었던 순간들이 있었다. 무엇이 그를 그토록 힘들게 했느냐 보다도 삶이란 그런 순간도 맞게 된다는 쪽이 옳은 표현일 것이다. 따뜻하고 바름의 신수옥이기에 더욱 견딜 수 없었던 순간이지만 우리네 삶에서 겪어야 할 통과의례일 수도 있다. 그걸 이겨내는 것이 삶이고 또한 우리다.
. 희생하는 자에게 감사하기 보다는 날이 갈수록 더 많은 희생을 요구하는 현실 앞에서 내 연약한 영혼은 결국 더 이상 견디지 못하고 불면증으로 고통 받기 시작했다. 불면증, 혼자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내가 왜?’ 약을 먹다 끊다 하는 악순환이 계속되었다.
. 입원한 날 밤, 모든 시중을 끝낸 남편이 곁에 앉아 위로해 주었으나 아마 내 영혼은 아무것도 생각할 수 없을 만큼 피폐해 있었다.
. 허우적거릴수록 더 깊이 빠져드는 수렁, 무서운 우울증이었다.
. 아이들의 엄마 노릇을 제대로 해낼 자신이 없었다.
. 자포자기의 시간을 보내면서 내가 살아있다는 것이 아무에게도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생각에 죽음을 생각하는 시점까지 이르렀다.
. 필설로는 다 표현할 길 없는 숱한 혼돈과 고통의 시간을 거쳐 드디어 머리맡에 놓인 다량의 수면제를 손에 들었다. 그 순간 무슨 힘이었을까. 신기하게도 살아야 한다는 생각이 한줄기 빛처럼 내 심장을 관통했다. 그 때부터 죽을힘을 다해 몸부림치며 수렁을 헤치고 나왔다. 한 손은 하나님을 잡고 다른 한 손은 남편을 잡고서, 물론 의사의 도움도 거부하지 않았다.
. 젊은 날, 그 날의 고통이 있었으므로 나는 삶의 소중함을 개달았고 내게 허락된 오늘을 감사로 맞이하고 감사로 마무리 할 수 있는 사람이 되었다. 고통 또한 견디고 넘어서면 소중했던 순간으로 남는 우리 인생의 한 부분이 아닐 수 없다. 겨울을 참고 견디면 봄은 꼭 오게 되어있다. <내 삶의 겨울을 넘어서>
문학 특히 수필이 회복과 치유가 되는 것은 이런 끊임없는 자신 돌아보기의 성찰이 있기 때문이다. 아픔 고통 슬픔 절망을 극복할 수 있는 계기도 곧 가족이라는 든든한 믿음이 작용함이다. 신수옥의 수필들은 이런 가족의 힘을 사랑이라 믿음이라 말한다.
신수옥 수필은 희망과 승리의 긍정적 삶을 지향한다. 사람들은 완전하고 완벽하다고 하는 곳에서 오히려 상처를 입는다. 평상의 눈높이에서는 보이지도 않는 것, 평상의 청력으로는 들리지도 않는 것, 너무 낯익었거나 너무 하찮을 정도로 작은 것, 그런 속에서 나만 소외된 것으로 느끼고 실망하고 절망까지 한다. 그러나 아무도 그런 내 마음을 알아주진 못 한다. 특히 성실하게 삶을 사는 이들이 겪는 갈등이다. 남이 보았을 때는 전혀 문제도 아니고 아무렇지도 않은 것 같으나 내 안에서는 감내할 수 없을 만큼의 아픔을 겪을 때가 있는데 그걸 더 견디기 어려운 것은 가장 가까운 사람, 가장 이해를 해줘야 할 사람이 알지도 못함이다. 신수옥도 그랬다. 그러나 이 또한 그만의 사랑법으로 잘 풀어낸다.
3. 바른 눈으로 세상 바라보기
<무엇이 명품인가>는 사회수필적 성격을 띠면서 평소 신수옥의 생각과 성품이 잘 나타나 있는 수필이다. 사랑하는 딸이 큰 맘 먹고 사준 명품 가방, 그런데 그런 딸의 마음이 고마우면서도 편치 못한 것은 그가 생각하는 명품의 의미 때문이다.
. 캄보디아나 아프리카의 가난한 많은 나라에는 한 달에 3만원이 없어 굶는 아이들이 수도 없이 많다고 하던데 수백만원짜리 가방을 들고 다니는 것이 귀한 생명들을 다년간 먹여 살리고 교육시키는 것보다 의미 있는 일일까.
. 나는 그 가방을 소중히 보관해 두었다가 딸네 집에 갈 때만 꺼내서 사용한다.
. 그 가방을 들 때마다 생각한다. 과연 무엇이 명품인가.
. 봄꽃이 흐드러지게 핀 아름다운 봄, 손자 녀석들에게 줄 선물을 넣은 명품가방을 들고 지금 나는 사랑하는 딸네 집에 간다. 명품 같은 내 딸과 사위, 그리고 손자들을 만나기 위해.
세상을 바라보는 그의 따뜻한 눈과 마음을 보여주는 아름다운 수필이다. 그렇게 신수옥에게 추억은 글을 여는 마중물이다. 그는 그렇게 퍼내어진 추억들을 가공하여 맛깔스런 수필로 요리해 낸다. 이해와 사랑이 가득한 그의 마음속에서 추억들은 따뜻한 연민과 사랑으로 위로와 치유의 여운이 된다.
. 초등학교에 들어가면서부터 나는 두 살 위인 작은오빠와 등하교를 함께 하게 되었다.
. 절망이었다. 나는 얼굴을 두 손으로 가리고 울면서 집으로 뛰어 들어갔다. 식구들의 눈에 뜨이지 않으려고 창고로 쓰는 작은 방에 들어가 구석에 쭈그리고 앉아 수치심으로 어찌할 줄 모르고 한참 울었다.
. 온화하다, 여자답다, 얌전하다, 이런 말들을 들으며 거기에 내 자신을 맞추며 살아온 날들이 정말 나다운 삶이었을까. 가슴 속에는 화롯불을 품고 정열적으로 행동하고 싶은 마음이 절실한 순간이 있었음에도 나는 다른 사람들이 만들어 준 틀을 과감하게 깨지 못했다. <인생은 화롯불> 중
누구에게나 특히 여학생에게 이런 추억 하나쯤은 없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그 나이에는 하늘이 내려앉는 절망일 수 있었다. 그런데 여기서도 삶의 지혜와 교훈을 만들어낸다.
인생은 하나의 가면을 완성하는 일이라고 어떤 작가가 말했듯이 나도 다른 사람들의 마음에 드는 가면을 만들어 내 본래의 모습을 숨기며 살아온 것은 아니었나 돌이켜보게 된다. 이제는 60년 가까이 익숙해진 가면을 벗어버리는 것은 어려운 일이겠지. 하지만 가능하다면 누구의 아내로서, 엄마로서 내게 덧씌워져 있던 허울 따위는 다 벗어버리고 있는 그대로의 모습으로 살아가고 싶다. 내 내면의 외침을 애써 억누르지 않고 그 순간의 감정에 충실하면서 그렇게 자유인으로 살고 싶다. <인생은 화롯불> 중
자유인, 그가 원하는 자유인이란 어떤 것일까. 모성애적 포근함으로 편안케 하는 수필, 진부한 이야기인데도 새로운 것처럼 묘한 매력이 느껴지게 하는 신수옥의 수필들에는 그리움에 바람(願)의 메시지가 들어있다. 바로 그가 원하는 자유인의 답이다.
아마 앞으로도 목련이 피고 라일락이 향기를 흩날리고, 밭에 쑥이 지천이라는 시골친구의 전화를 받을 때마다 내 가슴은 뛰겠지. 새록새록 깊어가는 향수병을 가슴에 안고 마음의 고향, 시골로 달려가는 내 마음을 누가 붙들어 줄까. <봄앓이>
내 것 네 것을 가리지 않고 나누던 그 후한 인심을 지금은 어디에서 찾아볼 수 있을까. <버섯>
한 아름 들국화를 품에 안고 향기를 맡으며 행복했던 그 어린 시절 이후 나는 들국화에 대한 그리움을 향수병을 앓는 사람처럼, 첫사랑을 못 잊어하는 사람처럼 가슴속에서 지워내지 못하고 있다. 언젠가 그대 그 숲속에서 내게 자신의 모든 향기를 주던 그리도 순결했던 들국화를 또 다시 볼 수 있을까. <잊을 수 없는 향기>
더 이상은 이런 불쌍한 아기들이 낯선 나라로 떠나 평생을 자신의 뿌리를 그리워하며 살게 하지 않을 수는 없는 걸까. <비행기 안에서>
나는 가난한 나라에서 자라면서 형성된 내 모습에 얼마나 마음이 아팠던지. 어쩔 수 없이 형성된 내 준비성에 비애감마저 느끼면서 정말 울고 싶었던 하루였다. <불필요한 준비성>
향수병을 가슴에 안고 시골로 달려가는 마음, 내 것 네 것 가리지 않는 후한 인심, 자신의 향기를 모두 내주던 순결한 들국화, 결국 그가 추구하는 자유함이란 현대라는 섬 속에 갇혀 차단되어버린 옛 것들 속으로 돌아가고픈 것이 아닌가. 그렇기에 그렇게 돌아갈 고향이라도 있는 작가이기에 아무것도 모르고 낯선 나라로 떠나보내지는 불쌍한 아기에 연민이 가고, 내가 가난한 나라일 때 살며 갖게 되었던 준비성의 비애감에 슬퍼한다.
그의 수필들은 이처럼 평범함 속에서 귀한 진리를, 익숙하고 낯익은 것들은 낯설게 하면서 눈을, 귀를, 가슴을 그의 세계로 끌어들인다. 그렇게 공감을 유도하여 그와 마음을 포개게 한다.
4. 나가며
사실 신수옥에게 문학은 넘볼 수도 없는 전혀 다른 세계였다. 그러나 어느 날 친구 따라 가본 한 길에서 또 다른 한 세계가 있음을 발견한다. 그리고 이내 그 맛과 매력에 빠지고 만다. 처음 맛본 그 맛에 그는 밤 가는 줄 모르고 펜을 놀린다. 어떻게 그렇게 하고픈 말들이 많았는지 신기하기만 했다. 무심코 작은 돌멩이 하나를 빼냈는데 그 자리에서 펑펑 물줄이 솟아오른 것처럼 신수옥에게 이야기는 이야기를 낳았고 그 이야기는 글이 되어 그의 가슴을 돌아 나왔다.
행복이란 누리는 것일 수도 있지만 느낌만으로도 행복할 수 있다. 신수옥에게 글쓰기는 이런 실존과 행복의 의미를 깨닫게 하는 가보지 않은 길이었다. 그런 글쓰기의 세계에 자신을 내어놓자 내면 깊이 잠재해있던 것들이 아름다운 반란을 일으킨다. 그는 자연스럽게 그 반란을 즐기며 튀쳐 나온 생각들을 수필이란 그릇에 담아내놓는다. 그래서 그의 글들에선 특별한 치장도 억지스런 숨김도 없다. 해서 신선하다. 내놓은 그의 글 상(床)에서 어떤 것은 은어처럼 파닥이며 반짝이고 어떤 것은 다소곳이 누워있기도 한다.
표제작 <보석을 캐는 시간>은 노후 소일거리 얘기지만 삶의 마무리를 위한 얘기다.
그는 노후에 관심이 많다. 그럴만한 나이이기도 하지만 과학적인 사고로 길들여진 그답게 모든 것은 미리 준비되어 있어야 한다. 그래서 40대에 만난 퀼트야말로 남은 생을 즐겁게 할 수 있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가느다란 손목이 먼저 백기를 들었다. 그러다가 문학을 만났다. 그는 이게 확실한 노후대책이라고 확신한다. 노후 대책 중 가장 큰 것은 남은 시간을 사는 일이다. 흘러 보내는 것이 아니라 내 의지대로 내가 사는 방법, 내가 그 시간의 주인이 되어 살아갈 수 있는 생산적이고 창조적인 소일거리로 그가 찾은 문학에서 그는 광산에서 보석을 캐는 광부로 자신을 비유한다. 그는 ‘지금 문학에 대한 갈증으로 목이 탄다’고 한다. 또 ‘세상 모든 것이 글의 소재가 될 수 있음은 신기한 일이다’라고 신나 한다. 세상 모든 것이 소재가 되는 그의 글쓰기에서 그가 갈증을 해소할 만큼 독자에게 풀어놓을 그만의 이야기들이 더욱 기대된다.
<착한 남편의 실수> <놀부 심보 아내> 같은 부부이야기, <딸아 미안하다> <장성한 내 아들> 같은 자식 이야기, <프린스턴에서 오신 선생님> <내 친구 메리엘렌> 같은 선생님과 친구 이야기, <안녕, 나의 천사들> 같은 봉사이야기, 거기에 5부의 기행수필, <아줌마와 교수님> <대표 바보> 등 시사적인 성찰 이야기, 6부의 ‘여중생과 국회의원’같은 이야기 등 그의 글은 ‘세상 모든 것이 글의 소재가 될 수 있음’을 증명하고 있다. 그러나 그가 살아있는 동안 해야 할 일로서의 글쓰기는 단순한 자신의 소일거리만은 아니다. 과학적 사고에 자신의 감성이 어우러지면서 연륜이 더해가는 글쓰기에선 분명 지금까지 보여준 그 이상이 나올 것이다. <아우스비츠의 통곡> <행동하지 않는 죄> <그럴 수도 있지> <선진사회와 장애인> 등에서 보여준 사회를 향한 그의 사색과 사고는‘가족사랑’을 말하던 그의 눈과 마음이 아니다. <보다 좋은 나라로 가는 길목>처럼 열린 눈, 깨어있는 생각, 그리고 나보다 우리를 먼저 생각하는 마음으로 내 몸을 내어줄 수 있는 사랑보다 더욱 큰 사랑을 품고 있다.
신수옥의 수필들에선 일상적이고 익숙한 것들이지만 사유를 통한 낯설게 하기로 독자에게 읽을 맛을 선사한다. 사유가 없는 수필은 향기 없는 꽃과 같다. 사유를 통해 작가의 철학도 반영된다. 특히 신수옥의 사유 속엔 신앙이 전제가 되어있다. 천성적인 그의 따뜻한 마음에 배움을 통해 쌓아온 바름, 그리고 신앙은 세상을 어떻게 살고 어떻게 보고 어떻게 그의 역할을 할 것인지를 수필 속에서 잘 차린 삶의 한 상으로 펼쳐낸다.
이순의 나이에‘한 사람의 문학인이 되기 위해 새로운 것을 배우며 글을 쓰는 시간, 그것은 자연과학을 공부하면서 느꼈던 것과는 또 다른 희열’이라는 신수옥이‘미숙한 첫 항해일지를 검사받는 떨리는 마음’으로 내놓는다는 수필집엔 가족. 남편, 아들, 딸, 선생님, 친구, 그리고 그와 함께 한 시대를 사는 모든 것들과 함께 소중한 것이 무엇인지 그리고 그것들이 어디에 있는지를 다시 한 번 생각해 보게 한다. 그의 문학에 대한 열정과 그만의 능력에 연륜이 더해지면서 보이게 될 더 많은 수필들도 기대를 하면서 그만의‘보석을 캐는 시간’이 아니라 이 시대를 살아가는 특히 이 수필집을 읽게 될 행운의 사람들 모두에게도 복된‘보석을 캐는 시간’이 될 걸로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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