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령이씨족보 임인보(壬寅譜)란
경술보(庚戌譜)가 1850년에 간행된지 50여년이 지나
1901년에 세보를 중간하는 논의가 영해의 충효당에서 거론되었다.
영해의 우헌공(于軒公 휘 壽岳, 1845-1927)이 주관하여 그 서문은 함안의 효산공(휘 壽瀅, 1837-1908)에게 부탁하고 보소를 독동 사암에 설치하였다.
함안의 처사공(휘 酉) 후손이 경술보에 김해사직공파에 기록되었는데 심헌공(휘 有杞)의 가승(家乘)이 발견되어 이를 바로잡고저 하였으나 함안 율간공파의 반발이 심했고 또 임인년(1902년)은 흉년이 들어 백성들은 굶주리고, 계묘년(1903년) 7월에 우박의 재변으로 연사가 훙작이어서 족보 간행의 일을 중지하고 후일로 연기하였다.
그러나 효산공이 지었다는 족보서문이 공의 문집에 있으므로 이를 소개하고자 한다.
그러나 필자가 생각컨대 효산공이 경술보에 누락된 김포파를 10여년전에 방문했던바 이 간행 사업에 동참하기를 원했을것인데 김포파의 합류에도 많은 논란이 있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결국 임인보는 간행되지 않았고 1941년에야 파별로 신사보(辛巳譜)가 나와 고서로 도서관에 비치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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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령이씨족보서(載寧李氏族譜序) 족보는 한 집안의 역사를 돈독하게 하는 기록이다. 우리 족보의 편찬은 숭정 병자년부터 시작되었고 영조갑오년에 다시 이루어졌다. 신라 초기에 이씨가 성을 얻게된 유래와 고려 중기에 본관이 나뉘게 된 사실은 석계와 밀암 두 선생의 서문에 모두 상세히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당시에는 종족을 거두어 모으는 범위가 넓지 않아, 구양수와 소순의 족보처럼 가까운 친조의 범위가 다하면 기록을 그치는 정도였다. 철종 경술년에 이르러 석계공의 7대손인 오와공이 호남과 영남의 여러 종인에게 처음으로 대동보 편찬을 논의하였고, 비로소 큰 족보를 완성하였다. 우리 선친 또한 그 일에 참여하였다. 이것이 이른바 온갖 갈래를 모아 하나의 근본으로 돌아가게 하는 일이다. 그러나 경술년으로부터 지금까지 50여년이라는 오랜 세월이 흘렀다, 그동안 늙은 사람은 무덤의 나무가 이미 한 아름이나 자랐고, 젊았던 사람도 검은 머리가 이미 희어졌으며, 타향에 흩어져 살면서 족보에 이름을 올렸던 사람들도 모두 손자를 안게 되었다. 만일 지금 서둘러 족보를 편찬하지 않는다면 여러 대의 족보를 수찬해 온 공적이 장차 증거없이 사라지고 말 것이다. 온 문중이 이를 안타깝게 여겼다. 지난해 봄, 오와공의 손자인 수악이 나에게 편지를 보내 족보 편찬을 재촉하고, 또 안녕에서 가까운 곳과 먼 곳의 여러 종인에게 통문을 보내 단구 충효당에 모이게 하였다. 큰 논의가 한번 시작되자 모두의 뜻이 같았다. 이듬해 봄에는 독동 사암에 편찬소를 마련하였다. 나는 늙고 쇠약하여 별다른 능력이 없는 사람이었지만 여러 사람의 권유를 받았고, 또한 선조의 뜻을 저버리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다시 먼길을 넘어서 간행하는 일을 함께 하였다. 대체로 족보의 체례는 옛 규정을 충실히 따르고, 종족의 차례를 엄격하게 하였다. 항렬자는 온 문중이 하나의 원칙을 따라 정하여 소목의 차례를 분명히 드러냈다. 이에 앞서 세차례에 걸처 족보를 수찬해 온 공적이 오늘날 다시 환하게 드러나게 되었다. 비록 서로 거처가 멀리 떨어져 평소에는 길 가는 사람처럼 서로 낯설었지만, 한 번 계보를 살펴보니 효도하고 형제간에 우애하는 마음과 같은 혈통에서 나온 정이 저절로 생겨났다. 정 선생이 말한 ‘천하 사람의 마음을 거두어 들이는데는 종족을 모으고 족보를 밝히는 것만 한 것이 없다“는 말이 참으로 이 때문이다. 세상이 혼란하고 재정이 어려운 때에 여러 종인이 힘을 다해 이일을 완성하였으니, 이 또한 우리 이씨가 선조를 추모하고 효를 실천하는 증거라고 할 수 있지 않겠는가. 족보가 거의 완성되었을 때 여러 종인에게 말하였다. “우리 종족 가운데 서울과 지방에 흩어져 사는 사람들은 모두 사재령의 형제들에게서 나온 후손이다. 사재령으로부터 지금까지 불과 14 15 16세 정도밖에 지나지 않았으나, 세대와 항렬의 차례가 손바닥을 보듯 분명하다. 어찌 분양왕과 영호씨의 친목에 견주어 말할 수 있겠는가. 천 갈래의 가지를 가진 나무도 뿌리는 하나이다 동쪽 가지가 쇠하고 서쪽 가지가 번성하는 것은 일정하지 않고 순환하며 변하는 법이다. 바라건대 우리 여러 종인은 어느 지파가 쇠하거나 번성한다고 하여 서로 사이를 벌리지 말고, 거리가 가깝거니 멀다고 하여 친소를 달리하지 말라. 근심과 즐거움을 서로 나누고, 충실함과 신의를 서로 권면하며, 선조의 덕이 끊어지지 않도록 생각하고 후손들이 그 것을 이어가도록 힘써야 한다. 그렇게 한다면 봄비가 만물을 적시듯 뿌리가 더욱 자라고 싹이 더욱 무성해져, 오래도록 복이 모두 우리 집안에 모이게 될 것이다. 여러 종인은 어찌 서로 힘쓰지 않겠는가?‘ 모두가 말하였다. ’그대의 말이 참으로 좋다.“ 그리고 나에게 글을 지어 이일을 기록해 달라고 청하였다. 나는 분수에 넘치는 일이라며 사양했으나 끝내 사양할 수 없었다. 이에 마음속에 느낀 바를 이와같이 서술한다. 曉山 李壽瀅(1837-1908)著 (曉山文集卷之四)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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