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韓國的 書論 定立을 爲한 思想的 背景에 關한 考察
Ⅰ. 序 言
조선조 숙종 2년(1675년)에 北崖子(북애자)가 쓴 揆園史話(규원사화) 漫說(만설)에 의하면 '자기의 장점을 지니고 남의 장점을 겸하는 자는 이기고, 자기의 장점을 버리고 남의 장점만을 쓰는 자는 약하다 하였고, 남의 부족한 점만을 취하는 자는 망한다.' 하였다. 삼국시대 이후 서예뿐만 아니라 우리 문화 전체를 회고해 볼 때 북애자가 지적한 3가지 중 우리는 어느 경우에 해당될까? 분명히 전통문화를 경시하고 외래문화의 장점을 받아들이는 경우에
해당한다고 보는 사람이 많을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 문화 전체는 물론 書藝文化도 독자성이 약한 문화 또는 事大文化라 평가받게 되었고 심지어는 종속문화라는 말까지 나오게 된 것이다. 이러한 현상이 빚어진 원인은 필자가 보기에는 光復이전보다 光復이후가 오히려 더 심하다고 본다. 왜냐하면 우리는 중국역사를 잘못 인식하고 있었기 때문에 우리문화의 소지를 많이 잃게
되었고 事大 아닌 우리 문화를 사대문화로 오인하는 경우도 없지 않았기 때문이다.
司馬遷(사마천)의 『史記』卷1에 의하면 黃帝로부터 舜임금, 禹임금에 이르기까지 다 同姓인데 국호는 달리 하였다 하였고 『孟子』 離婁章(이루장) 下에는 舜이 東夷人이라 하였으며, 또 신라의 朴堤上(박제상)이 지은 『符都誌(부도지)』에 의하면 堯와 舜은 우리 민족의 根源地인 麻姑城(마고성)에서 나왔다 하였으니, 혈통으로 보아서는 堯·舜이 모두 司馬遷의 『史記』와 일치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그렇다면 『十八史略(십팔사략)』에 堯의 후예라 한 漢高祖 劉邦(유방)도 혈통적으로는 우리 민족 계열이 되는 셈이다. 역사는 차치하고라도 고대 중국문화는 우리문화의 영향권 내에 있었다 함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漢民族 스스로도 漢나라 초기까지는 민족 호칭마저도 漢民族이라 하지 않다가 나라가 강해지면서 주위 국가에서 漢民族이라 칭하므로 인하여 魏晉南北朝(위진남북조)시대에 와서야 그들 스스로도 漢族이라 칭하게 되었다는 사실을 중국 어원사전 『辭海』에서도 분명히 밝히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 선조들은 『通鑑』을 가르칠 때에도 중국역사라고만 하지 않았고 서예 또한 중국서법을 굳이 외국서법이라 인식하지 않고 가르쳤던 것이다.
漢字 또한 우리 민족이 먼저 만들기 시작했다는 것을 알았든 몰랐든 생활 자체 속에 우리 문자로 인식하고 있었으며 葛弘(갈홍)이 지은 『抱朴子(포박자)』에 의하면 중국 史記에 나오는 최초의 帝王인 黃帝가 고대 우리 나라인 靑丘에 와서 紫府(자부)선생을 만나 「三皇內文(삼황내문)」을 받아가서 萬神을 부르고 부렸다 하고 있는가 하면 黃帝의 史官으로 문자를 창제하였다는 倉힐 역시 『桓檀古記(한단고기)』 <三聖記全 下篇>에 의하면 符圖의 글을 우리 나라에서 배워 갔다 하였는바 근래 중국의 金學智(김학지)가 지은 『書法美學談(서법미학담)』을 보면 창힐이 글자를 만들 때 주간에는 粟雨(속우)가 내렸고 야간에는 귀신이 모여 곡을 하였다 하였으니, 우리나라에서 배워간 符圖의 글과 黃帝가 얻어간 三皇內文을 보고 神通한 경지에 들어 새로운 문자로 개량하였음을 알 수 있다.
周易 八卦를 그었다는 伏犧(복희)도 『한단고기』「太白逸史」 <神市本記>에 의하면 桓雄(한웅)으로부터 5대째인 太虞儀(태우의) 한웅의 열두 아들 중 막내아들이라 하였으니 역시 우리 민족 계통 인물이므로 이러한 점 등을 총관해 볼 때 대만의 문자학자 李敬齋(이경재)가 문자에 대한 지혜가 東夷人이 서쪽 夏族보다 우월하다(卽知東夷對於文字之智慧優於西夏)한 것은 너무나 당연하다 하겠다. 우리나라 陳泰夏 교수도 중국의 학자들이 여러 가지 遺物을 객관적으로 고증하여 주장한 것을 보면 漢字는 동이족의 문화인 仰韶文化(앙소문화)·大汶口文化(대문구문화)·龍山文化(용산문화) 등을 거쳐 殷代 甲骨文으로 발전한 문자임을 알 수 있다고 하였다. 이같이 서예가 주된 대상으로 삼고 있는 漢字가 우리 문화에서 發源되었고 동양역사 또한 상고 때에는 우리 東夷族이 주된 역할을 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오랜 기간 식민사관이나 사대주의자들의 주장이 時勢에 아부하는 사조를 타고 우리의 의식 가운데 깊이 스며들게 됨으로 인하여 서예문화는 물론 우리 문화 전반이 독자성을 잃은 채 종속문화로 빠져들게 되었으니 고대 우리문화의 선진성을 아는 사람은 거의 없어지게 되었다. 그러므로 서예인 개개인의 인격은 물론 민족의 自矜心마저 손상되어 가고 있는 것이다.
필자는 서예를 하면서 먼저 느낀 바는 중국서론의 사상적 배경인 老莊思想을 나오게 한 우리의 『天符經』이 있고 儒學도 「程朱學」보다 더 구체적인 「理氣論」 등이 있는데도 왜 독자적인 서론 하나 만들지 못하고 남의 것에만 의존하고 있는지 안타깝기만 했다. 그래서 전통문화 중에서 외래문화와 구별되는 이론을 抽出하여 이들의 사상을 서론과 접목시켜 봄으로써 한국의 독자적인 서예 이론을 정립하는 데 기여코자 한다.
Ⅱ. 三一神氣와 文字創造論
역사상 문자가 나온 근거를 보면 대부분 倉힐이 새의 발자국을 보고 문자를 만들었다는 鳥跡說(조적설)이나 우리나라 桓雄(한웅) 때 神誌(신지) 赫德(혁덕)이 모래밭에 달아난 사슴의 발자국을 보고 만들었다는 鹿圖文(녹도문)처럼 자연의 형상을 보고 만들었다는 이론이 많다. 그러나 유독 우리 민족만은 문자 창조의 사상적인 이론을 가지고 있으니 특이하다. 여기 논하게 될 三神一氣論(삼신일기론)이 그러하고 三才와 음양오행을 一氣論的으로 정립한 한글의 製字論이 그러하다. 그러나 한글의 제자론은 형태론만 달랐지 이론적인 배경은 중국의 철학을 그대로 응용하고 있는데 비하여 여기 논하는 三神一氣論的 문자창조론은 중국 음양오행론과 전연 다른 우리 사상 독자적인 것만으로 되어 있다는 데 그 의의를 찾아볼 수 있다.
한단고기 태백일사에 인용한 <大辯說(대변설)>을 보면 '大始에 옛것을 전함에 있어 다만 전해오는 이야기에만 의지한지 오래다. 나중에 형상을 그림으로 그렸고 또 다시 그림이 변하여 문자가 되었다. 대저 문자의 근원은 나라의 풍습에 믿음을 존중하는 것에서 나오지 않음이 없다.
하나의 氣로부터 셋으로 갈라진 기는 곧 極이다. 극은 즉 無다. 저 하늘의 근원은 곧 三極을 꿰뚫어 虛가 되고 빈 것이다. 안과 밖도 역시 그런 것이다. 하늘의 宮을 곧 빛이 모이는 곳, 만가지 변화가 나오는 곳이라 한다. 하늘의 一神은 능히 그 虛를 體로 할 뿐 아니라 곧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것이다.'하고 있으며 이의 해설서처럼 연속되어 있는 문장에는 '그런고로 一氣는 즉 天이며 곧 빈 것이라.' 하였고 또 부연하기를 '그렇다면 스스로 中一의 신이 있어 능히 三이 된다.' 하였는가 하면 '三神은 곧 天一 地一 太一의 신이라 하였다. 또‘一氣는 그가 스스로 능히 동작하여 이루고(造), 가르치고(敎), 다스리는(治) 三化의 신인데 신은 즉 氣이고 기는 곧 虛이며 허는 즉 一이다.' 하였다. ...中略...
一은 즉 三인데... '하나를 잡아 삼을 머금는(執一含三) 이유는 곧 그 기를 하나로 하며 그 신을 셋으로 하기 때문이라 하며 셋을 모아 하나로 돌아간다(會三歸一)하는 이유는 역시 신을 셋으로 하고 기를 하나로 하기 때문이다.' 하였고 또 '삶을 사는 자의 體는 一氣이고 이 일기 안에 三神이 있으며 智의 근원도 역시 삼신에 있다.' 하였으며 '이 삼신은 밖으로 일기를 포함한다.' 하였고 또 '그것은 밖에 있는 것은 一이고 그 내용도 一이며 그 統制도 一이다. 역시 포함되어 있을 뿐 놓을 수 없는 것이라.' 하면서 '그것이 글자가 이루어진 근원이 된다.' 하였고 또 '會를 포함하고 잡고 돌아온다는 뜻은 여기에 있다.'고도 하였다.
이 글은 古神道的인 성격을 띠고 있기 때문에 현대인이 이해하기에는 어렵게 되어있다. 그러나 이 소도경전 본훈은 원전 자체라기보다는 조선조 연산군과 중종 때의 학자인 一十堂 주인 李陌(이맥)이 펴낸 것으로 후세인이 이해하기 쉽게 당시의 어문으로 쓰여진 것으로 여겨지기 때문에 이해가 불가능한 것은 아니라고 본다. 그래서 여기서는 문자 창조와 관련된 것만 음미해 보면 첫째, 이 글은 唯氣論的(유기론적) 입장에서 짜여져 있으므로 자연계나 인간세계에 일어나는 모든 神妙함은 이 氣의 離散 聚合작용에 依하게 되어있고 이 기는 一神이므로 一神(體)은 三神(用)으로 작용하고 또 三神(用)은 一神(體)으로 환원될 수 있게 되어있다. 그러므로 하늘의 빛이 모이는 宮처럼 인간의 지혜의 근원도 三一神에 있는 것이 되며 이 三一神이 밖으로는 일기를 포함하는 것이 되므로 바깥·내용·統制 또한 一氣처럼 하나로 통할 수 있어 사람이 어떤 象을 取象(취상)하여 기호문자로 바꾸면 그 기호화된 문자가 지니고 있는 내용도 바깥과 통하는 一氣처럼 他에도 통할 수 있어 文字가 형성된다는 것이다.
<周易十翼·下篇>에 상고 때 結繩文字(결승문자)에서 書契(서계)로 바꿀 때 대개 쾌卦(쾌괘)에서 취하였다고 만 하였을 뿐 별 다른 설명이 없는 데 비하면 삼일신기 문자 창조설은 정신세계와 現象界를 아울러 이론이 정연하므로 우리민족의 위대한 발상이라 하지 아니할 수 없다.
Ⅲ. 「한」思想과 創造意識의 淵源
여기서 「한」사상은 우리 민족의 근원적인 사상을 말한다. 어느 민족이든지 근원적인 사상은 神話나 說話에 의존하는 경우가 많으나 우리 민족은 桓雄(한웅)께서 직접 說하였다는 天符經(천부경)이 전해지고 있으므로 이 <天符經>을 중심으로 「한」사상과 창조의식의 연원을 밝혀보고자 한다. 檀君哲學釋義(단군철학석의)에 의하면 우주삼라만상의 근본적인 실재를 一이라 하고, 이 「일」이 「한」을 의미하기도 하므로 우리 민족의 우주관을 담고 있는 천부경의 「一」개념부터 시작하는 것이 순서이겠다. 이 「一」 즉 「한」은 存在論的으로는 窮極的 根源者인 存在 그 자체로서 스스로 天地 萬物을 創造할 능력을 가진 존재이다. 그러므로 민영현 교수는 '천부경에 나타난 「한·一」의 철학적 존재론과 그 한국적 이해' 라는 논문을 통해서「한」은 人格神的 槪念도 神格的 초월자도 아닌 神格的 槪念들의 上位에서 전체 존재들의 모든 속성을 자체 내에 간직하고 있는 영원하고 무궁 불변하는 존재의 무한한 根源으로 파악된다고 하였는가 하면 또 존재 「한」은 존재 자체의 특수성을 가지고 단 일회적인 體用 운동에 의하여 運動 「한」으로 轉化하는 존재이기 때문에 모든 形而上學的 존재론이 그러하였듯이 本體 「한」에 대한 論理的 認識은 한계가 있다고도 하였다. 그러므로 천부경의 '一始無始一'에서 「一」 즉 「한」은 해석자에 따라서는 여러 가지 의미로 해석될 수 있다.
「無」를 無極으로 보고 「一」을 太極으로 보면 周濂溪(주염계) 太極圖說(태극도설)의 '무극이면서 태극이다(無極而太極)'한 것과 같으며,
「無」에서 「일」이 나왔다고 풀이하면 '無에서 有가 나왔다.'는 道敎사상이 되며, 또 이 「一」을 「一心」으로 보면 원효가 「一切唯心造(일체유심조)」라 한 불교사상과 관련 있는 것이 된다.
또 이 「一」을 「理」로 보면 (性理學의 主理論的 성격을 띠게 되며, 「氣」로 보면 主氣論의 宇宙觀과 같아진다.
그러므로 崔孤雲(최고운)은 그의 「鸞郞碑序文(난랑비서문)」에서‘나라에 玄妙한 道가 있으니 이름하여 風流라 한다. 그 가르침을 세운 내력은 仙史에 자세히 실려있으니 이는 실로 三敎(儒敎·佛敎·道敎)를 포함하고 뭇 생명을 접하여 서로 화하며 더불어 생하게 하는(接化群生) 것이라.' 하였던 것이다. 또 이 '一始無始一'을 宇宙論的으로 보면,「一」의 시작은 아직 可視的인 現象의 시작이 아닌 형상을 가능케 하는 可能態의 「一」로써 現象界의 입장에서는 '無始一'이 된다. 이 元氣가 자동적인 유동성으로 인하여(自能爾) 세가지 極氣를 이루어 天·地·人이 생겨날 機微(기미)가 되니 析三極(석삼극)이라 하고 있다. 그러나 그 근본은 다함이 없으니 無盡本(무진본)이라 하였고, 또 천부경(이하 경이라 함)에 '天一一 地一二 人一三'이라 한 것은 천·지·인마다 「一」이 각각 하나씩 있는 것은 形象으로 변화할 원기가 각각에 주어졌음을 의미하고 天에 「一」, 地에 「二」, 人에 「三」이 주어져있는 것은 先天 元氣가 형상 있는 天, 地, 人으로 바뀌는 순서이기도 하겠으나 하늘은 하늘대로, 땅은 땅대로, 사람은 사람대로 고유한 특성과 自生能力이 생겨났음을 의미하기도 한다.
이 自生能力이 創造力인 동시에 有機體에 있어서는 생명력이 되는 것이다. 그래서 만물이 나고 또 나서 무궁하다. 우리가 일반적으로 알기에는 최초의 궁극적 근원자가 계속 만물을 만들어 주는 것으로 알고 있으나 그렇지 않고 궁극적 근원자는 민영현 교수의 理論처럼 단 일회의 변화만 가져오게 할 뿐이다. 그 이후부터는 새로 생겨난 생성물이 기존의 것을 서로 感應하면서, 또 새로운 생성을 생겨나게 하는 것이다. 이를 수리로 표현하면 기존의 것은 總體로 「一」이 되고, 새로 생겨나 추가된 것은 「二」가 되며 이것이 또 서로 영향을 미치면서 새로운 것 「三」을 만들어내는 「三·一」 「化三」의 원리가 되어 계속 작용하게 되는 것이다. 이것이 천지 造化의 기본원리이다. 그래서 經에 '一積十鉅 無墑化三'이라 하였고 大三合六이라 하였던 것이다. 서예에 있어서도 이 「三·一」의 원리처럼 <三折法>을 쓰면 創意力이 생겨나 창작하기가 쉬운 것은 그 때문이 아닌가 한다. 또 과거에 생성된 존재물이나 창조의식이 바로 사라진다하더라도 그 기본 因子는 사라지지 않으므로 현재의 창조의식이나 생성물에 영향을 미치게 된다는 것을 이 경전(천부경) 마지막 구절에 '근원적 하나가 마치는 듯하나 그 마치는 하나는 끝남이 없는 하나다(一終無終一)'라고 표명하고 있는 것이다.
서구의 過程 철학자 화이트헤드(A. N. Whitehead)도 창조성은 과거의 완결된 현실적 존재들을 수용하여 이들을 현재의 새로운 현실적 존재들의 생성에 與件으로 넘겨준다고 하였는바, 현대 철학으로 보아도 천부경의 창조론이 얼마나 정확한지를 알 수 있다.
예술의 창조의식 또한 이 원리로 되어있다. 서구의 심리학자 스타우트(Stout)는 현재의 의식상태는 현재의 실제적인 자극과 앞선 과정에 의해 남겨지게 된 심리적 경향이라는 두 因子가 합쳐진 산물이라 하였고 藝術史家 제돌마이어(H. Sedolmayr)도 '예술가의 창작에서 활동은 했지만 작품의 자연스러운 발생과 성장을 방해하지 않게 하기 위하여 無意識 상태로 남을 수밖에 없었던 것을 意識化하지 않고서는 예술작품을 再創造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하였다.
하르트만(N. Hartmann)도 '모든 의식된 것은 이미 무의식적인 것을 배경으로 하여 나타난다.'고 한 것을 보면 우리의 천부경처럼 소외된 사상이 얼마나 중요한지 알 수 있다. 그러나 무의식이 이처럼 현재의식으로의 효력타당성(Geltung)을 가진다 하더라도 現象學의 철학자 훗설(E. Hussel)이 말한 것처럼 무의식은 새로운 의식에 의하여 폐기될 수도 있으므로 현재의식으로 부상(浮上)하여 활용하기 위해서는 현재적 자극이 필요하다. 그러므로 천부경과 같은 「한」사상을 우리의 정신세계에 자극시켜 無意識속에 잠재해있는 한국적 창조의식을 떠오르게 하여야 할 것이다.
註
1) 朴堤上 著, 金殷洙 譯解 <부도지(符都誌>, 1989. 12. 20 「기린원」발행, 56-60p 참조
2) 金學智 著 [書法美學談], 中華民國 78年 3月 初版. 32面에 「...倉綖造字時又爲什徼天上會下粟雨, 夜間會有
鬼哭媀 ?」라 하고 있음
3) 월간 [한글+漢字文化], 2001. 7월호, 陳泰夏博士 論文<한자와 東夷族의 淵源> 참조
4) [천부경(天符經)]은 한웅천황(桓雄天皇)께서 천강(天降)하시어 이 세상을 이화세계(理化世界) 홍익인간화(弘益人間化)하기 위하여 백성들에게 설(說)한 81자로 된 경전(經典)으로 현재 전해지고 있는 것은 최고운(崔孤雲)이 한웅(桓雄) 때 신지(神誌) 혁덕(赫德)이 만든 녹도문(鹿圖文 : 神誌의 篆文이라고도 함)으로 되어 있던 것을 한문(漢文)으로 번역하여 전했다는 <사적본(史蹟本)>과 계연수(桂延壽)란 분이 영변(寧邊)의 백산(白山)에 채약하러 갔다가 암벽(岩壁)에 새겨져 있는 것을 발견하고 전사(轉寫)하여 대종교(大倧敎) 종단에 전하게 되므로써 전해졌다는 <석벽본(石壁本)> 두가지가 있다. 이 두 본(本)은 글자 수는 각각 81자로 같으나 음(音)은 같고 글자가 틀리는 곳이 7곳이나 되어 현재로써는 어느 것이 맞는지 알 수 없다.
5) 최민홍 저 <「한」철학>, 1990. 3. 25, 성문사 발행 30p 참조
6) 사단법인 한배달 편집부 편집 <법인설립 8주년기념 천부경(天符經) 학술대회 자료집>, 1994. 9. 25 발행, 9
8p 참조
7) [三國史記] 권4, 신라본기 진흥왕조 참조
8) 프랑수아 자콥 저, 이정우 역, <생명의 원리·유전의 역사>, 1995. 8. 10, 민음사 발행, 131p 참조
9) 한국 화이트헤드 학회 저 <창조성의 형이상학>, 1998. 12. 23, 도서출판 동과서 발행, 60p 참조
10) 아론걸비치(A. Gurwitsch)저, 최경호 옮김 [의식의 장], 1994. 3. 20, 도서출판 인간사랑 발행, 306p 참조
11) 渡邊 護 著, 이병용 옮김 <예술학>, 1994. 2. 20, 현대미학사 발행, 61p 참조
12) 李吉雨 著 ,현상학적 정신이론>, 1986. 8. 15, 강원대학교 출판부 발행, 104p 참조
Ⅳ. 栗谷의 理氣論的 善惡觀과 美醜
조선 중기 유학자 栗谷 李珥(1536∼1584)는 氣發理乘一途說(기승이발일도설)을 주장하여 理氣兩發說(이기양발설)을 주장한 退溪 李滉(1501∼1570)과는 理氣論에서부터 四端七情論(사단칠정론)에 이르기까지 그 견해를 달리 하였다. 李珥가 「氣發理乘一途說」을 주장하게 된 것은 朱熹가 理는 氣를 動靜하게 하는 所以 즉 까닭이라 한 것을 계승하여 理는 스스로 動靜할 수 없고 氣를 타야만 動靜할 수 있다고 봄으로써 그의 모든 理論이 氣發理乘을 중심으로 論及되고 있기 때문에 氣發理乘一途說이라 칭하게 된 것이다. 그러므로 理가 능히 動하고 능히 靜하면서 主宰性을 가졌다는 李滉과는 理가 언급되는 이론마다 견해를 달리 하였다. 그러나 唯氣論이라 하지 않고 一途說이란 어미를 덧붙인 것은 理氣의 관계를 둘이면서 하나이고(二而一) 하나이면서 둘(一而二)로 보면서도 氣에 치중하였기 때문이며 또 朱熹가 理氣의 先後관계를 本源을 논하면 理가 먼저이지만 稟賦 즉 現象에서 보면 氣가 먼저라고 본 것과는 달리 所以然으로서 理는 現象物도 所以然 즉 그 까닭이 되는 바는 역시 理이므로 理先氣後로 보아야 한다면서도 전체적인 이론은 주로 氣에 바탕을 두고 있기 때문이다.1)
이처럼 李珥는 氣를 위주로 理論을 전개하고 있으나 氣를 타고(乘) 있는 理도 중요시하였다. 그러므로 藝術論的으로는 純善인 理와 감성적 現象인 美를 연관지어 보기에 쉬우며 또 동양의 예술론이 眞·善·美의 개념 속에는 도덕적이고 윤리적인 면이 내포되어 있다고 보고 있으므로 그에 대한 내용을 고찰하는 데도 善惡을 아울러 가지고 있는 氣質之性을 중요시한 李珥의 학설이
적합하며 또 서구의 感性的인 美學과 연관짓는 데도 氣論 중심의 善惡觀이 용이하므로 여기에서 다루어 보기로 하였다.
李珥는 「理有善惡說」에서 理는 원래 純善이나 氣를 타고 유행하면서 그 나누어짐이 萬殊로 되니 氣稟에 善惡이 있고 이 氣稟의 局限으로 인하여 그 안에 담겨 있는 理도 선악이 있게 된다 하였다.2) <說文解字注>에 '美는 善과 더불어 같은 뜻(美與善同意)'이라 하였고 <爾雅義疏>에도 '美는 좋고(好也) 선한 것(善也)'이라 하였으니 古典的 의미로는 善은 즉 美와 직결되며 그의 對인 惡 또한 醜로 인식할 수 있다.
그러므로 이 現象界의 아름다운 形相은 理의 顯現인 동시에 氣稟의 淸濁 중 淸淨한 기운이 발로한 것이 되며 또 선악을 겸비한 氣質之性 중 善이 現象化한 것이 된다. 따라서 醜한 것은 惡氣와 濁氣가 나타난 것이 되는 것이다. 또 이이는 心性論에서 '性은 理요 心은 氣며 情은 心의 動이라.'하였고 또 '心의 未發은 性이 되고 이미 발한(已發) 것은 情이 되며 발한 뒤에 商量함은 意로 된다.'하였으며 또 四端七情論에서는 朱熹의 설을 따른 李滉이 '四端(惻隱·羞惡·辭讓·是非)은 理의 發이고, 七情(喜·怒·哀·懼·愛·惡·欲)은 氣의 발이다.'한 것과는 달리 四端은 純善이되 理는 발할 능력이 없으므로 七情 중에서 善一邊만 택한 것이라 하고 七情은 마음의 움직임(心之動)에서 나오는 것이라 하였다.3)
또 人心道心說에서는 '人心은 形氣의 사사로움에서 발생하고 道心은 性命의 바른 것(正)에 근원한다.'하였는가 하면 '道心은 純粹天理이므로 善은 있되 惡은 없으며 人心은 天理도 있고 人欲도 있으므로 惡도 있고 善도 있다.'하였다. 그리고 선악이 있는 인심을 선만 있는 도심으로 바꾸려하면 마음이 발할 때 形氣用事를 정밀히 살펴서 正理대로 하면 된다고 하였다.4) 여기서 이이가 性을 理라 한 것은 理가 形質의 氣 가운데 있어 人性 物性이 각기 特殊性으로 국한되면서 性으로 되기 때문이라 하겠는바 본래 性은 善한 것이나 형질의 기로 인해 개성으로 나타날 때는 선악을 아울러 가지는 것이 된다. 그러므로 인간의 조작물이 美的이기 위해서는 性의 本然인 純善이 形質의 氣를 타고 現象界로 나타날 때 人欲이나 私心으로 타락하지 않게 하여야 된다는 것이다.
또 心의 動인 情도 理의 發이 아니라 氣의 發이므로 七情에서 보는 바와 같이 善惡이 섞여 있으므로 예술작품을 構想할 때 純善인 道心으로 이루어지게 私心을 버리고 正道로 나아가야만 아름다운 작품이 되고 그렇지 못하면 醜한 작품이 되기 쉽다는 내용을 암시해주고 있다 하겠다. 따라서 순선인 道心으로 顯現한 작품은 純善한 四端을 내포하고 있는 것이 되어 倫理的으로나 道德的으로나 결함이 없는 작품이 된다는 사상과 같다. 그러나 이러한 면은 현실이 지향하는 理想일 뿐 현실적으로는 어렵다 하겠는 바 서양의 美學이 美醜를 混有하고 있는 것처럼 선악이 섞인 七情을 純善인 理와 모순되지 않게 적절히 具現하는 것이 현실적이라 하겠다. 이러한 점으로 볼 때 李珥의 「心性論」과 「四端七情論」은 현대 미학적으로 보아도 善用의 가치가 있다고 본다.
물론 善과 美를 直結해 보는 견해에 대한 異說이 없는 바는 아니지마는 善 즉 美를 理想으로 삼아야만 感性的 美가 極에 달하여 타락할 때 새로운 방향을 摸索할 기준이 있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孔子가 舜의 韶樂과 武王의 음악을 평하면서 舜의 음악은 善과 美가 다 極致에 달했지만 武王의 음악은 美는 극치에 달했으나 善의 극치에는 달하지 못했다5)하여 善과 美는 槪念上 다소의 차가 있는 것으로 볼 수 있겠으나 孔子 스스로도 善과 美가 일치하는 것을 理想으로 하여 여기에 미치지 못한 것을 善의 극치에 이르지 못한 것으로 표명하였을 뿐 굳이 선과 미를 구분해 보려고는 하지 않았다고 본다. 孟子가 盡心章에서 '마음에 지닌 善을 充實케 하는 것을 美라 한다.'한 것만 보아도 알 수 있다.
서구에서도 「美」와 「善」은 동일하다고 보는 철학자(아리스토텔레스)도 있는가 하면 토마스 아퀴나스(T. Aquinas : 1225-1274)처럼 '「美」와 「善」은 동일하나 그 樣相에는 차이가 있다.'하는 견해도 있다.6) 칸트도 「善」은 도덕적 槪念의 규정에 의하여 결정되는 것인데 비하여 「美感」은 主觀과 對象의 表象이 일치될 때 만족감을 주는 感性的인 것이라 하여 구분해보면서도 美感이 普遍性을 띠어야 한다는 대목에 가서는 「美」와 「善」은 공통성을 갖는다 하였고 또 應用美를 언급함에 있어서도 物의 형식이 도덕적 窮極目的에 일치한다면 그것은 최고의 응용미를 갖는 것이라 하며 이러한 物을 '美의 理想'이라고 한 것을 볼 때7) 칸트 자신도 「善」과 「美」는 불가분의 관계에 있음을 시인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이러한 점 등을 미루어 볼 때 李珥가 純善인 理와 感性이 들어 있는 氣를 논할 때 理는 無形 無爲요 氣는 有形 有爲라 하여 구별해 보되 理氣가 形而上學的으로는 妙合하여 하나(一)라 하면서 「理」와 「氣」는 '하나이면서 둘이고(一而二) 둘이면서 하나다(二而一).'한 것은 「善」과 「美」를 상관관계적으로 관찰할 수 있는 개념의 것임을 알게 하고 있다 하겠다.
따라서 이러한 점을 書論에 응용하려면 美論的인 면으로 접근함이 가능하다고 본다. 그러나 칸트철학을 이이의 理氣論과 관련지어 논할 때 조심해야 할 것은 李珥는 理가 스스로 움직일 능력이 없다고 보고 있는 데 비하여 칸트는 理性이 스스로 「善」을 규정할 능력이 있다고 봄으로써 「善」은 반드시 實踐理性의 개념적인 규정에 의하여 결정된다 하였고 「美」는 直觀的인 취미판단에 의하여 판단되는 것으로 구분해보았던 것이다. 이와는 달리 性善說的 입장에서 보는 이이의 說은 개념적인 규정 없이도 바로 本源的으로 「善」이 되어 氣와 더불어 現象界로 나타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직관적으로 外界의 「美」를 느낄 수 있다고 보는 사상이다. 그러므로 칸트의 「善」은 「美」와 관계함이 간접적이며 混線的인 면이 없지 않은데 비하여 李珥의 「善」과 「美」는 본원적으로 상통할 수 있다는 데 근본적인 차이가 있다 하겠다.
Ⅴ. 結 語
이상 본 바와 같이 우리 만족은 고대로부터 문자창조의 사상을 가졌을 뿐만 아니라 鹿圖文(神誌篆이라고도 함)과 한글형체의 加臨多文(가림다문) 38자도 한웅 때부터 가지고 있었다.8) 또 三皇內文이라는 經文도 중국 역사상 최초의 帝王인 軒轅이 紫府仙人으로부터 얻어 갔으며 문자를 만들었다는 倉綖9) 역시 符圖의 글을 우리 민족에서 얻어가 文字를 개량하는 데 도움을 주게 되었고 八卦를 만들었다는 伏犧도 우리 민족 계열이며 또 중국 고대 저명한 군주는 대부분 우리 민족 계통임에도 불구하고 이들 모두를 남의 역사, 남의 문화라 인식하면서 半島史觀에 젖어 있는가 하면 天符經이나 三一思想과 같은 고귀한 사상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巫俗이니 迷信이니 하면서 외면하고 외래사상 一邊途로 나아가 從屬文化로 轉落하여 뿌리없는 민족으로 誤認 받게 되었다.
서예 문화 역시 중국 書法을 크게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것은 形相의 뿌리인 精神이 외래 사상에 젖어 한국적인 창의력을 발휘하지 못하기 때문이라 본다. 그러므로 남의 장점인 종합적인 작품은 나올 수 있어도 창작적인 작품은 나오기 어려운 것이다. <천부경>이나 <삼일신기론>과 같은 사상이 고차원의 사상이기 때문에 어떤 종교나 무속으로 이용될 수 없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이러한 깊고 奧妙한 사상일수록 합리적으로 이용하면 심오한 철학사상도 나올 수 있고 과학사상도 될 수 있는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우리 고유의 「한」사상을 합리적으로 이해하여 書論에 응용해 봄으로써 서예에 있어 새로운 창조의식을 개발해 보아야 할 것이다.
우리의 「한」사상이 들어 있는 <천부경>은 본론에서도 언급한 바와 같이 대부분 數로 되어 있기 때문에 무궁무진한 뜻을 함유하고 있는 경전이다. 太始에 宇宙創造論에서부터 만물의 형성 원리는 물론 인간의 정신세계까지 다 含有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 민족의 「한」사상은 우리 민족의 사상인 동시에 인류 전체의 사상이라 할 수 있다.
老子의 '一生二 二生三 二生萬物'이라 한 사상도 여기서 나왔고 周濂溪의 太極思想도 여기에 內包되어 있다.10) 「三·一 사상」역시 천부경에서 나온 것으로 만고불변의 진리이다. 周易의 小成卦가 三爻로 되어 있는 것도 이 「三·一」의 원리이고 서예의 창작원리도 마찬가지이다. 무한한 정신의 세계를「一」이라 한다면 주관과 객관의 多樣을 종합하여 예술적 構想을 하는 것은 「二」와 같으며 이 구상을 形象化하여 작품을 만들어내는 것은 「三」으로 보는 것과 같다. 다시 이 「三」을 정신 「一」에 담으니 「三·一」원리 바로 그것이 된다. 意先筆後든 筆先意後든 이 원리를 떠날 수는 없는 것이다. 李珥의 理氣論도 精神과 形象은 氣의 所産이므로 「氣」로 보고, 形象으로 나타나는 까닭(所以) 즉 예술적 표현으로는 構想的인 形式의 근원을 「理」로 인식한 것과 같은 이론이므로 「三·一」의 원리를 「二·一」 즉 理氣로 양분한 데 지나지 않는 것이다. 그러나 이 「理氣」 또한 하나로 돌아가지 않을 수 없으니 우리 사상 「한·一」과 같은 것이라 하겠다.
李珥의 理氣論은 朱熹나 李滉의 理氣論과 다를 뿐만 아니라 서구의 칸트철학과도 다른 점이 많기 때문에 그의 善惡觀을 서구 美學의 美·醜觀과 바로 적용하기에는 어려운 점이 없지 않으나 主氣論的 입장을 취하고 있는 점에서는 感性的인 서구 「미학」에 가장 가깝게 접근할 수 있는 이론인 것이다. 또 性善說的 입장을 취하면서도 觀念的인 「理」나 「理性」의 세계를 독립적으로 작용하는 세계로 보지 않고 어디까지나 感性的인 「氣」의 所以(까닭)로 보고 있기 때문에 「善」을 悟性 개념의 規定的 판단으로 인식하거나 「美」를 趣味判斷으로 구분하여 인식하지 않더라도 性의 「善」은 氣와 더불어 바로 「美」와 直結되어 보편적인 「美」로 顯現할 수 있다고 볼 수 있는 것이다. 다만 그 性善이 「美」로 發現할 때 濁氣가 강하여 醜로 전락하지 않게끔 평소에 心修하면 된다는 사상이다.
李珥는 어떤 先驗的인 것에 의지하여 「善」을 規定하거나 이와 구별되는 감성적 「美」를 별개의 것으로 보는 것은 「理」나 「理性」이 스스로 能力을 가진 것으로 잘못 인식함으로써 생긴 誤謬로 보는 主氣論的 사상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理自能否認). 그러므로 修己治人도 氣로 된 몸을 닦는 것이 먼저이고 예술에 있어서도 人格陶冶를 먼저 하여야 無意識 중에 純然히 나타나는 形象이 「眞」·「善」·「美」를 갖추게 된다고 보는 사상과 같다. 만일 그렇지 않은 경우는 어떤 가식적인 욕심이 의식적으로 善의 탈을 쓰고 美인 양 나타나는 데 지나지 않는다고 보는 것이다. 이러한 眞心은 孔子가 말한 '욕심 따라 쫓아도 法度에 넘지 않는다(從心所慾不踰矩).'는 聖의 경지와 다름이 없는 것이다.
이같이 李珥의 理氣論的 善惡觀은 氣論을 근간으로 하고 있기 때문에 書論의 美醜觀과 연관될 뿐만 아니라 天符經과 더불어 한국적 서론 정립에 그 思想的 背景이 될 수 있다고 본다. 이 두 思想뿐만 아니라 元曉의 和諍論, 惠崗 崔漢綺의 氣測體義論(기측체의론) 등 書論에 응용할 수 있는 사상이 많은데도 우리 문화 獨自的인 書論이 아직 없다는 것은 우리 모두가 반성해 볼 일이라 생각하며 우리의 것을 우리 스스로가 천시함으로 인하여 우리 獨自文化를 死藏시키는 일이 없어야만 새로운 서예문화로 도약할 수 있을 것이다.
1) 한국철학회 편 <韓國哲學史 中卷>, 1987. 6. 30, 동명사 발행, 246-247p 참조
2) 앞 인용 <한국철학사 중권>, 252-253p 참조
3) 앞 인용 <한국철학사 중권>, 257p 참조
4) 앞 인용 <한국철학사 중권>, 259-263p 참조
5) <論語> 八佾 25
6) 河在昌 저 <美學의 諸問題>, 1994. 8. 30, 원광대학교 출판국 발행, 33p 참조
7) 김용정 저 <칸트 哲學硏究>, 1978. 3. 25, 유림사 발행, 334-342p 참조
8) 임승국 번역·주해 <桓檀古記>, 1986. 6. 16, 정신세계사, 232p 참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