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꽃
이 응 철
실개천이 신촌천新村川이란 이름표를 달고 무성한 갈대숲을 감돌아 토끼길 같은 사암층 굽잇길을 스쳐 흐른다. 그 옆 제방 사이로 정리 안 된 여염집들이 분류를 기다리는 플라스틱 바구니들을 껴안고 을씨년스럽게 졸고 있는 오후, 토끼 꼬리만 한 겨울 햇살이 설핏하다.
동장군의 위세가 수갑을 벗고 도주한 탈주범처럼 한결 느슨해진 오후, 제방 둑을 걷는다. 내외가 나란히 걸으면 부부애도 돈독해 보여 좋지만, 유별나게 나는 절대 자유를 외치며 혼자 걷기를 즐긴다.
올겨울은 유난히도 눈 오는 날도 잦고, 잦은 혹한으로 겨울나기가 만만치 않다. 겨울이 막바지에 이르렀지만, 들판을 덮은 새하얀 눈을 보니 아직은 잔설이란 말이 무색하게 느껴진다. 논 그루터기로 길게 깔린 눈이 옥양목으로 겹겹이 논두렁의 냉기를 감싸고 겨울 발목을 잡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신촌천 상류에 사는 인척 집을 방문하고 귀로에 모처럼 아내와 함께 둑길을 걷는 시간을 갖게 되었다. 좁은 제방 길을 눈과 얼음이 점령해 걷기가 여간 어렵지 않았지만 어렵게 얻어진 기회라 절대 자유의 카드를 접고 걷는다. 앵무새 같은 내자의 음성이 실개천과 합류한다.
-물기 있는 곳은 밟아서는 안 된다. 진창은 돌아서 가야 한다. 얼음 위에서는 발걸음을 늦추어야 한다. 배를 내밀고 걸어서는 아니 된다. 모자의 귀마개를 꺼내야 한다. 조심, 빙판 또 조심-.
두세 시간을 걸어 반환점을 돌아선다. 기력이 쇠잔하여 눈꺼풀이 내려앉은 겨울 햇살을 등지고 보니, 한적한 변방이라는 이유를 제1로 들어선 눈총 따가운 교도소, 도견장 두어 군데가 둑과 이웃해 살아가고 있었다.
도견장-, 말만 들어도 아내는 오싹해 한다. 운수가 비색否塞해서 세파 속에서 감성들이 구겨졌지만, 아직도 여리다. 지천명을 넘어섰음에도 꿈 많은 소녀처럼 움츠리고 아예 눈을 내리감는다. 노란 좁쌀이 마치 유충의 알로 연상돼 속반粟飯을 한 번도 지어보지 않은 아낙이다. 그런 동반자와 생의 후반기를 노 저어 가며 살얼음 걷듯 살고 있지만, 늙어도 그 본성은 잃지 않는다는 늑대처럼 매사에 덥석 동화되지 못하는 내자가 아니던가!
질펀하게 둑을 베고 누운 벌판에 가녀린 햇살마저 거둬 갈 무렵, 인부 몇이 작업장을 서성거리며 남은 상자들을 갈무리하느라 부산을 떨고 있었다. 유년의 날 어머니가 푸성귀며 송편을 빚어 내다 팔 때 약골인 내 손을 끌며 읍내에 가면 반드시 사 먹이던 국밥을 기억한다. 알고 보니 보신탕이라 내겐 어떤 트라우마 한 올도 없이 늘 좋은 음식으로 가까이 한 식품이다.
그런 내심의 추억이 발동하여 아내의 눈치를 볼 겨를도 없이 서둘러 주인과 흥정을 끝낸다. 부른 금액보다 더 얹어주고 싶을 만큼 흡족한 마음으로 흔쾌히 물건들을 넘겨받았다.
마지륵했다. 하루 일과를 끝낸 장터처럼 어둠의 장막이 내린 벌판에 백설이 어설프다. 실개천 좁은 둑을 아내와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며 걷는다. 비닐에 담은 혐오식품, 별로 무게가 있어 보이지 않았는데, 막상 혼자 들고 보니 버거웠다. 큰 비닐에 넣어 둘이 한 쪽씩 잡고 좁은 둑길을 따라 걷는다. 예상 밖의 부담이다.
아직 반 시간은 족히 걸어야 세워둔 애마에 당도할 수 있는데, 둑이 비좁아 걸음이 무척 불편했다. 참다못해 검은 비닐봉지를 낚아채 인삼행상처럼 왼쪽 어깨에 걸머졌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어깨 통증이 스멀대 다시 오른쪽으로 옮겼지만 위태롭긴 마찬가지였다.
팔려가는 당나귀 보듯 하던 아내가 차마 그대로 두고 볼 수가 없었던지 채치듯 넘겨받아 옆구리에 끼어 보았지만 불편하기는 매한가지였다. 비닐 보따리를 주고받으며 엎치락뒤치락 앞으로 나가긴 하지만 영 속도가 붙지 않는다. 내심 어쩔까 고민인데, 갑자기 아내가 혼자서 번쩍 비닐봉지를 들어 올리더니 똬리도 없이 냉큼 머리에 이는 게 아닌가!
혐오감이나 저항감 투성의 보따리다. 일부 명사 앞에 붙어 참 것이 아닌 개꿈, 개떡, 개죽음, 개살구, 아내가 가장 꺼리는 접두사의 진원지 개xx 뭉치를, 아뿔싸! 지금 아내가 그 고운 머리 위에 버젓이 모시고 가다니! 놀랍기만 했다. 처음엔 뒤뚱대더니 이내 자세를 바로잡고 보무도 당당히 둑을 따라 전진이다. 신기했다. 단 한 번 머리에 물건을 얹은 일이 없는 아내가 그것도 혐오식품을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이이고 어둠의 숲을 헤쳐 내달린다.
빠른 행보를 계속하다 보니 복병처럼 도사린 비탈진 얼음에 몇 번이고 미끄러지기도 해서 나를 한껏 불안케 했다. 『그대 등 뒤에 서면 나는 왜 작아지는가』 어느새 나는 그대 등 뒤에서 한껏 작아진 존재로, 괜찮으냐고 채근하는 게 고작이었다.
어둠이 한껏 달구어진 감정들을 가로막는다. 순간, 홀연히 앞서 가는 아내의 모습을 보며 천상의 어머님께서 하강해서 동행하는 게 아닌가 싶은 착각마저 들 정도였다. 그러나 어머니와는 달랐다. 아내가 이고 가는 보따리는 손으로 바치고 있어도 머리 한쪽으로 기우뚱하게 흘러내리지만, 어머니는 정중앙에 올려놓고 손까지 내리고서 보따리를 운반하지 않으셨던가!
어둠이 죽음의 신과 함께 어깨동무하며 활개를 치고, 아름드리나무들은 괴성을 지른다. 밤이 공포감을 자아낸다. 제방 한쪽의 여린 나무에 기생한 하루살이 덤불 속에서도 귀신 울음 같은 객쩍은 소리가 몽환적으로 커지는 초저녁이다.
집에 당도해 보니 보따리에서 선혈이 흘러내려 아내 옷깃에 진달래꽃 무늬를 그리고 있었다. 보신탕조차 질색이던 아내가 진달래꽃 무늬에도 이토록 의연하다니!
통증이 가시지 않은 두피를 가볍게 눌러보는 모습에 주눅이 드러나는 숨소리조차 크게 낼 수 없을 지경이었다.
차라리 푸념을 토하며 끝내는 편이 오히려 내겐 더 편할 것만 같았다. 그녀와의 삶에서 처음 건져 올린 묘한 사랑이요, 생뚱맞은 행짜에 애면글면한 날이었다.
묵언으로 일관하던 아내는 외람스레 나를 두둔한다. 평생 처음 머리에 얹고 균형을 잡지 못한 아내가 어머니 운운하던 내 말에 실토한다. 무엇일까? 학처럼 몸을 비우고 마음을 내려놓고 살다 가신 예전 어머님의 균형감각은 지극한 당연지사라고! 물욕과 허세로 중무장한 현대판 며느리의 뒤뚱대는 언밸런스야말로 예상한 일이 아니겠느냐고 반문을 하며 몸을 낮춘다.
생의 질곡에서 어렵게 만나 못된 성깔 다 받아주며 살아온 아내를 다시 본다. 백설이 분분한 벌판에 피어난 한 떨기 진달래꽃, 집안 가득히 겨울꽃 향기가 진동하던 그날, 내 가슴엔 안개비가 내리고 있었다.
첫댓글 고운글 보고 갑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