팀 켈러의 "설교" 215-221 요약
조나단 에드워즈 <인간감정론>
서구는 ‘의지’와 ‘감정’을 구분하거나, 영혼을 생각, 느낌, 의지 세 부분으로 구분했다.
그런데 에드워즈는 ‘지성’과 ‘성향’으로 구분했다.
-지성은 사물의 본성을 인지하고 판단하는 능력이다.
-성향은 우리가 인지한 것을 좋아하거나 싫어하거나, 사랑하거나 거절하는 것이다.
에드워즈는 성향을 상황에 따라 다르게 부른다.
-행동과 관련될 때는 ‘의지’
-지성을 통해 인지한 것의 아름다움을 느낄 때는 ‘마음’
-가장 “격정적이고 감각적인 발현”이 ‘정감’인데 성경은 이것을 “성령의 열매”라고 하며, 사랑과 희락, 열심과 감사, 겸손 등이 있다.
정감은 감정으로 가득하지만, 감정과 동일하지는 않다.
-감정은 다양한 물리적, 심리적 자극으로 일어날 수 있으나 행동에는 변화를 일으키지 않거나 미미한 변화만 일으키고 사라지는 경우가 많다.
-정감은 어떤 대상의 아름다움과 탁월함을 감지했을 때 전인으로부터 나오는 성향이다. 정신의 확신에 관여하는 동시에 행동과 삶의 변화도 일으킨다. 그리고 감정에 비해 더 항구적이다.
만일 어떤 사람이 “하나님이 나를 돌보신다는 걸 알아요. 그렇지만 나는 여전히 두려움으로 떨고 있어요”라고 말한다면 에드워즈는 “그건 당신이 아직도 하나님께서 당신을 돌보신다는 걸 진정한 의미에서는 ‘알지’ 못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정말로 안다면, 확신과 희망의 정감이 당신 안에서 일어날 것입니다”고 말했을 것이다.
만일 청중이 다분히 물질주의적이라면, 그들에게 필요한 메시지는 ‘더 많이 나누라’는 권면이 아니다.
그것은 단지 그들의 의지에만 적용할 것이다. 일시적 죄책감만 줄 뿐 장기적인 삶의 양식에는 변화를 일으키지 못할 것이다. 설교가 마음에까진 이르지 못했기 때문이다.
자선행위를 통해 변화된 사람의 이야기도 연민이나 영감을 불러일으키고, 선한 일을 해야겠다는 지나가는 충동을 이끌 수 있겠지만 감정은 조만간 사라지고 장기적인 변화는 나타나지 않을 것이다.
사람들이 물질주의적이고 인색하다면 그건 그들이 아직도 예수님을 진정으로 이해하지 못했다는 의미다. 부유한 분이신 예수님이 우리를 위해 가난해지셨다는 것과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가 모든 부요함과 보배를 얻었다는 게 무슨 의미인지 이해하지 못한 것이다.
하나의 교리로서는 이 가르침을 받아들였을 수 있지만 그들 마음의 정감은 여전히 물질적인 것에 얽매인 나머지, 예수님보다 그런 것들이 더 탁월하고 아름답다는 생각에서 헤어나지 못하는 것이다.
물질주의의 경우, 사람들에겐 돈의 안정성이 하나님의 사랑과 지혜로운 섭리의 안정성보다 더 실재다.
우리가 마땅히 살아야 할 삶을 살지 못하는 이유는, 우리가 무엇을 행해야 할지를 알지만 단지 실패하기 때문이 아니라, 우리가 안다고 생각하는 것이 진정한 의미에서 우리 마음에 실재로 다가오지 않기 때문이다.
조나단 에드워즈 (Edwards, “Divine and Supernatural Light”, 112)
“하나님이 거룩하고 은혜롭다는 ‘의견’을 가지는 것과, 그 거룩함과 은혜의 사랑스러움과 아름다움에 대한 ‘감각’을 가지는 것은 엄연히 구분된다. 꿀이 달콤하다는 합리적인 판단을 하는 것과, 그 달콤함에 대한 감각을 가지는 것은 구분된다. 전자를 가지고 있으면서도, 실제로 꿀이 어떤 맛인지는 모를 수 있다. 그러나 애초에 정신 안에 꿀맛에 대한 생각이 없다면, 후자를 가질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