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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설명: 지난 26일 동화사 통일대불전에서 열린 11번째 화엄논강 모습. |
화엄논강이 강원은 물론 재가불자들 사이에서 새바람을 일으키고 있다. 당초 논강의 의미를 경전의 대중화와 사회화에 맞추었던 만큼 이러한 변화의 바람은 이미 예고된 것이었다는 평가도 나온다. 특히 논강의 열기는 동화사 화엄논강에 그치지 않고 다른 여타단체에도 일파만파 확산될 움직임이다. 영남대학교가 불교신문과 공동으로 ‘왜 지금 불교인가’를 대주제로 논강을 준비하고 있고 그 외 동학사 등 전국 유명사찰에서도 개최의지를 보이고 있기 때문이다. 한편 지난 26일 동화사 통일대불전에서 열린 11번째 화엄논강에도 사부대중 300여명이 참석했다.
■ 질의응답
중국불교사 2, 5, 10단계로도 구분가능
화엄경 대중화는 수지독송이 최고
세등스님(동화사 강사) 스님은 중국불교역사를 번역의 시대와 교학발전의 시대로 구분하셨는데 그 이유는
수진스님 중국불교 전반은 번역의 시대이고 후반은 교학발전의 시대라고 밝히긴 했지만, 번역시대에도 교학발전시대가 있었고 교학발전시기에도 번역시대가 있었다. 2단계 외에도 5단계, 10단계로도 구분가능하다.
세등스님(동화사 강사) 학자들마다 차이 있지만 일본학자들은 5단계로 구분한다. 제1단계는 전역(傳繹)시대로 후한 명제부터 동진 안제까지 약 330년이고, 제2단계는 강구(講究)시대로 동진 안제부터 수 문제까지 약 200년간, 3단계는 입교(立敎)시대로 수 문제에서 당말 오대까지 약 360년간, 4단계는 존립(存立)시대로 송 고조에서 남송 말까지 약 310년간이며, 마지막 5단계는 점쇠(漸衰)시대로 원 세종에서 현대 청조까지 약 620년간이다.
해월스님(동화사 강주) 단계를 나누는 것은 교학적인 측면에서 가능한 이야기지만, 자칫 부처님 사상이 단계성을 갖는다는 것으로 오해될 위험이 있다.
범천스님 스님이 말씀한 5법계관 이란.
수진스님 4법계(四法界)는 사법계(事法界), 이법계(理法界), 이사무애법계(理事無碍法界), 사사무애법계(事事無碍法界)인데 사사무애법계가 나오기 전에 이치와 이치 사이에 걸림이 없어야 한다. 추가되어야 할 것이 이이무애법계(理理無碍法界)이다.
각묵스님(실상사 화림원) 이이무애법계는 있을 수 없다고 본다. 현실은 천차만별이지만 이치는 차별이 들어갈 수 없다. 왜 중국불교 스님들이 이이무애법계를 세우지 않았겠는가.
수진스님 5법계는 지극히 나의 소견이다. 설령 10법계를 나눈다 해도 화엄에서 질책할 이유는 없다고 본다.
세등스님(동화사 강사) 중국불교에는 폐불(閉佛)사건이 많았는데 26만 명이나 되는 스님이 환속되는 등 그 내용이 매우 혹독했다. 하지만 일부학자들은 오히려 폐불사건으로 인해 중국불교가 생명력을 얻었다는 견해도 피력한다. 스님의 견해는.
수진스님 폐불사건을 긍정적으로 본다는 것은 기능주의 관점에서 또 다른 학설을 제기하는 것이다. 그러나 모두가 하나 되고 융화되어야 한다는 화엄사상의 견지에서 폐불은 너와 나를 갈라버린 것이기에 긍정적으로 보는 것은 잘못이다.
경진스님(동학사 승가대학원) 경전의 대중화라는 측면에서〈금강경〉의 경우 김용옥씨에 의해 대중화된 면도 있지만 격하된 부분도 없지 않다. 스님의 생각은.
수진스님 긍정적 요소가 있다. 화엄이나 천태나 사실 난해한 면이 없지 않아 일반 민중이 접근하기 힘든 부분이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불교 강의는 신앙과 수행이 함께해야 발전적이다. 신앙과 수행을 부정하고 그 내용만을 해석하는 것은 위험천만한 일이다. 일반 재가불자가 강의를 하면 안된다는 것이 아니라 수행과 신앙이 병행하면 더 큰 효과를 발휘하지 않겠느냐는 생각이다.
지성스님(동화사 주지) 화엄사상의 신앙적 요소는 무엇이며 어디에 근거하고 있고 현대에 미치는 영향은 무엇인가.
각묵스님(실상사 화림원) 불교의 핵심은 연기법(緣起法)이다. 현실을 바로 이해하고 정확하게 문제를 진단하는 것은 금세기에는 연기 밖에 없다. 얼마 전 미국 경제학의 최고대가에게 내년경기를 물으니 이런저런 조건을 걸며 경기를 관망했다. 이것이 연기법이다. 21세기 불자들은 연기를 깊이 사유하고 고뇌해야 한다.
현석스님(동화사 강사) 각묵스님은 매회 연기를 얘기했다. 비유하자면 연기는 구구단을 배우는 것이라면 화엄경은 미분적분을 공부하는 것이다. 화엄경은 구구단 공부하는 것이 아니며 업그레이드된 연기사상을 배우는 것이다.
각묵스님(실상사 화림원) 그 말은 부처님이 구구단 밖에 몰랐고, 중국스님은 미분적분을 공부했다는 말로도 들린다. 하지만 한국불교는 구구단에 충실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수진스님 서로간의 견해차이 있을 수 있다. 하지만 모두 화엄을 부정하고 있지 않음을 염두 하자.
봉녕사 학인 한국불교사에서 조선시대의 숭유억불정책을 패배적 시각으로만 볼 것이 아니라 자생불교가 뿌리내린 시기로도 평가하는데 중국의 폐불 정책도 마찬가지 아닌가.
수진스님 그렇다면 10.27법난도 긍정적으로 바라봐야 하겠는가. 법난을 통해 불교가 발전했다고 말할 수 없는 것처럼 긍정적 측면으로 볼 것이 아니라 그것을 교훈으로 보고 미래지향적으로 나가야 한다.
일진스님(운문사 강사) 청량국사의 10가지 서원중 불답니사(不踏尼寺, 비구니스님 절의 티끌도 밟지 않겠다)의 의미는.
수진스님 니사의 티끌마저도 밟지 않겠다는 말씀은 비구니 스님 존재 자체를 부정한 것이 아니라 당시의 시대적 상황을 설명한 것이다.
범천스님(동화사 강사) 화엄의 사회화에 대해 구체적으로.
수진스님 수지독송(受持讀誦)하는 패턴을 가진다면 대중화, 사회화는 쉬울 것이다. 한국불교사에서 화엄경만큼 인기 있는 경전도 드물다. 만약 화엄논강 아닌 아함논강 이었다면 이렇게 많은 분들이 참석할 수 있었을까. 화엄의 질문이 200개라면 답변은 2000가지가 될 수 있다. 지루함을 지루하지 않게 만드는 것이 중요하다.
■ 수진스님 발제문 요지
중국 황제의 불교 신앙 이끌고
화엄통해 민중들도 다스려
신화시대를 거쳐 인간의 시대 가운데 피어난 중국불교는 진시황의 통일시대를 거쳐 전한(前漢)시대에 전래되었다. 그 역사가 1900여년인데 전반은 번역의 시대요, 후반은 교학발전의 시대라 할 수 있다.
화엄경이 중국에 처음 역출된 것은 동진의희(東晋義熙) 14년 북인도에서 온 불타발타라에 의해서 였다. 불타발타라는 선과 율에 능했고 지엄스님의 간청에 의해 중국 장안에 들어와 〈60 화엄경〉을 번역했다. 이후 약 220년이 지난 뒤 현수법장스님이 화엄종을 개창하기에 이른다. 물론 현수법장스님의 화엄종 개창 이전에 두순, 지엄 스님의 활발한 활동과 연구, 저술이 나와 화엄종을 개창할 만한 토대를 형성했음도 사실이다.
화엄을 얘기할 때 두순, 지엄스님 보다도 현수스님을 떠올리는 것은 개창한 분이기 때문이다. 현수법장스님은 정치적으로 선종의 신수스님 못지않고, 뒤의 청량징관국사 못지않게 보호를 받았다. 측천무후는 현수스님을 매우 높이 평가해 대원사를 짓고 거쳐하게 했는데 이때 측천무후가 그의 화엄경 강설을 듣고 감명을 받아 호를 ‘현수대사’라 했다. 또 청량징관국사는 덕송, 순종, 순종, 목종, 경종, 문종 등 여섯 황제의 왕사가 되었다. 특히 덕종은 청량국사의 화엄경 강설을 듣고 마음을 청량케 했다는 의미에서 ‘청량법사’라는 호를 내리기도 했다. 이러한 정치적 보호는 왕의 실질적 신앙은 물론 화엄을 통해 민중을 리드하기 위함이었다고 볼 수 있다.
중국불교에는 화엄종 외에도 13종이 있는데 그중 천태, 화엄, 정토, 선종이 대표종단이다. 천태종은 법화경을 소의경전으로 일심삼관(一心三觀), 삼지삼관(三智三觀)을 수행방법으로 한다. 화엄종은 화엄을 소의경전으로 삼종, 사종, 법계관을 수행방법으로 하고 천태의 삼지삼관과 무관하지 않았다. 그리고 정토종은 염불수행을 위주로 7세 어린아이까지도 하루에 7만 번씩 아미타염불을 하게 했고 아미타경을 10만독, 50만독씩 하게 했던 종파이다. 선종은 후진(後秦)의 지루가참에 의해 전해졌지만 대승선(大乘禪)은 남북조 시대 달마대사에 의해 전래되었다는 것이 통설이다. 이중 천태와 화엄은 교(敎)로서, 정토와 선종은 실수로써 이름을 날렸고 이들 마저도 당 말에 쇠퇴의 길을 걸어 선종만이 유일하게 남아 오늘에 이른다.
화엄에서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화엄의 사회화이다. 현수법사도 화엄재를 열어 화엄을 독송하고 수행하였고 양대 이후로 매년 방광재를 열어 일반 시민들에게 권하여 60여명의 시민이 화엄경을 독송하고 매월 15일에 법문을 듣고 헤어졌다 한다. 또 고승전에는 도경이 보현재를 열어 신도40여명과 함께 화엄경을 읽고 행원품을 읽으며 수행했다고 전한다. 물론 다른 종파도 그 교세와 종파의 대중화를 위해 재의 형식을 빌렸다. 이러한 중국의 화엄결사는 신라에도 큰 영향을 준다. 성덕왕은 오대산에서 화엄결사를 해 다섯 분의 스님이 낮엔 화엄경과 600부 반야를 독송하고, 밤에는 화엄신중을 염송하게 했다. 이러한 화엄결사는 왕으로서 국태민안, 문무화평이었고 스님으로서는 불교의 대중화 사회화였다.
■ 논주 수진스님은…
수진(守眞)스님은 1971년 부산 마하사에서 문성스님을 은사로 출가했다. 해인강원과 금산사 화엄학림을 졸업한 후 84년부터 수도암 수선안거 이래 해인사, 봉암사, 통도사, 쌍계사, 용주사 등에서 10년간 참선 수행했다. 특히 93년부터 7년간 해인강원의 강주로서 후학양성에 힘을 쏟았다. 조계종 11대 중앙종회의원, 조계종 교육위원, 교재편찬위원, 전국승가대학 교직자 협의회장을 역임했고 현재는 부산해인정사에서 대중포교에 진력하고 있다. 저서로는〈시로 본 화엄〉〈보현행원품소〉가 있으며 논문으로〈화엄경과 원자물리〉〈화엄에 나타난 선지식〉 등 다수가 있다.
[불교신문 2003.07.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