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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경제용어
조량목(助粮木)
정의
① 관부의 토목 공사 등에 징발된 역군이 역량을 대신하여 지참한 면포.
② 교환 수단으로서 시장에서만 쓰던 추포.
개설
관부의 토목 공사 등에 징발된 역군은 부역 기간에 필요한 식량을 각자 마련하여 지참하였다. 먼 곳에서 징발된 역군은 흔히 조량목으로 면포를 준비하여 역소 주변에서 쌀인 역량(役糧)과 교환하였다. 한편 조선후기 민간에서 시장 거래에 쓰던 추포(麤布)의 한 가지를 조량목이라 부르기도 하였다[『영조실록』 3년 9월 12일].
연원 및 변천
부역 노동에 징발된 역군들은 부역 기간에 사용할 역량을 스스로 준비해서 지참해야 했다. 요역 노동에 징발된 연군(烟軍)이나 승역(僧役)에 징발된 승군은 역량을 대신해서 면포를 휴대하는 경우가 많았다. 역량에 충당하기 위하여 준비한 면포를 조량목이라 불렀다. 조량목은 무게가 가볍기 때문에 먼 곳의 역소까지 들고 올 수 있었다. 토목 공사 등에 징발된 연군·승군 등은 공사장 주변에서 각자 준비한 조량목으로 곡물과 교환하는 일이 많았다.
17세기 이후 승군은 부역 노동의 일환으로 산릉역 등에 징발된 일이 많았다. 승군은 부역 기간에 필요한 식량을 각자 마련하여 지참하였다. 예컨대 산릉역에 승군을 징발할 때, ‘스스로 역량을 준비하여 1개월 동안 부역하도록 한다.’는 조건은 오랫동안 지켜 온 전례(前例)로서 산릉역이 있을 때마다 도감사목(都監事目)에 포함되는 기본 사항이 되었다. 조량목을 비롯한 각종 경비는, 승군이 소속된 사찰에서 공동으로 부담하여 마련되었다. 산릉도감에서 역소에 도착한 승군을 점고할 때, 부역 기간인 1개월분의 역량을 지참하였는지 점검하였다.
형태
조량목은 토목 공사 등에 징발된 역군이 역량을 대신하여 지참한 면포를 지칭하였다. 그러나 조선후기에는 추포의 한 가지이자 시장에서 교환 수단으로 쓰던 상목(常木)을 지칭하기도 하였다. 상목은 길이나 너비가 매우 짧으며 거친 면포였다.
생활·민속 관련 사항
1652년(효종 3) 창덕궁·창경궁의 건축 공사에 징발된 승군들은 관례대로 조량목을 들고 왔다. 그러나 당시 나라에서는 화폐 통용정책을 추진하여 시장에서 상품을 거래할 때에는 반드시 화폐를 사용하도록 조치하였다. 그 때문에 조량목으로 미곡을 구입할 수 없었던 승군은 양식이 떨어져 간다고 호소하였다. 결국 조정에서는 평시서로 하여금 별도의 시장을 열게 하여 승군들이 싼 값에 미곡을 구입할 수 있도록 조치하였다.
참고문헌
양은용·김덕수 편, 『임진왜란과 불교의승군』, 경서원, 1992.
오경후, 「조선후기 승역의 유형과 폐단」, 『국사관논총』 제107집, 2005.
윤용출, 『조선후기의 요역제와 고용노동: 요역제 부역노동의 해체, 모립제 고용노동의 발전』, 서울대학교 출판부, 1998.
조사(역)(詔使(役))
정의
중국 사신의 접대에 따른 노동력 징발과 잡물 수취의 임시세.
개설
조사역(詔使役)은 산릉역(山陵役)과 더불어 대동법 이후에도 민역(民役)을 사용할 수 있도록 규정된 요역 종목에 포함되었다. 사신이 왕래하는 연로(沿路) 각관에서는 많은 요역 부담이 따랐다. 특히 의주를 비롯한 평안도 여러 군현과 황해·경기 지역이 그러하였다. 사행의 접대와 관련하여 각종 잡물이 분정되는가 하면, 교부(轎夫)·담궤군(擔櫃軍) 등 각종 운송역에 징발되기도 하고, 이들이 머무는 역로의 관사를 수리하는 일도 매번 되풀이되었다.
조사(詔使), 곧 중국 사신 일행이 서울에 들어오기까지 도중 7군데에서 맞이하여 위로연을 베푸는 일, 수백 마리의 쇄마(刷馬)를 징발하는 일 등은 지방군현에서 맡는 힘든 일거리였다. 특히 탐학한 것으로 알려진 1625년(인조 3)의 조사 일행은 내를 건널 때에 다리가 없으면, 무교가(無橋價)란 이름으로 은자(銀子)를 받아냈고, 인삼 500근을 개성부에서 강탈하느라, 결국 가호마다 강제로 징수하는 사태를 빚게 하였다. 조사가 오면 외방의 군현에서는 특산물의 조달을 비롯하여 갖가지 부역이 평상시보다 크게 늘었고, 이 틈에 관리들이 사리(私利)를 추구하는 수탈을 자행함으로써 민의 부담은 가중되었다.
제정 경위 및 목적
1471년(성종 2년)에 제정된 역민식(役民式)에서, 역사의 규모가 커서 별례조발(別例調發)이 필요할 경우에는 6결에서 1명씩 역부를 차출할 수 있다고 규정하였다. 8결에서 1명의 역부를 내는 상례조발과 달라서, 더 많은 노동력이 투입되어야 할 중요한 요역 종목으로 지정한 것이었다. 별례조발의 요역 종목에는 축성역, 미곡 운반 등의 일과 함께 중국 사신의 가마꾼을 차출하는 일이 포함되었다. 이처럼 조선초기부터 중국 사신을 접대하는 데 많은 노동력이 소요되었음을 알 수 있다.
내용
1606년(선조 39) 사신 접대를 위하여 임시로 설치된 영접도감(迎接都監)에서는 경기·황해·충청·강원의 수군과 차비군(差備軍) 약 800여 명을 1개월씩 징발해서, 남별궁(南別宮)·태평관(太平館)·남관왕묘(南關王廟)·성균관(成均館) 등을 고쳐 짓는 수리역군(修理役軍)으로 사역하였다. 1608년(선조 41) 영접도감에서는 다시 중국 사신을 맞이하기 위하여 각 도에서 300명의 연군(烟軍)·수군을 수리군으로 1개월간 징발했는가 하면, 따로 300명의 병조 상번군을 동원해서 각처 수축, 도로 닦기, 교량 건설 등의 역사를 맡겼다. 그 밖에 차비군·수소군(修掃軍)·조역군(助役軍) 등의 명목으로 한성부의 방군(坊軍) 및 각 도의 연군 등이 징발되었고, 궐문 밖의 채붕(彩棚), 연로의 결채(結彩) 등을 위해서도 많은 민력(民力)의 소모가 따랐다.
조사역에는 운송의 노역을 담당하기 위해서 많은 마필(馬匹)이 조달되었다. 쇄마(刷馬)는 외방 각 군현의 민결(民結)에서 고립가(雇立價)를 내는 방식으로 마련되었다. 물납세화 된 쇄마역을 전결에서 거두어들인 것이었다. 각 군현에서 쇄마를 몰고 온 이들은 모두 1개월분의 식량을 휴대하고 상경하였다. 1개월의 체류 비용 및 오고 가는 노자 등을 포함하면 쇄마 1필을 조달하는 데 드는 비용은 면포 수십 필을 넘어서는 큰 부담이었다. 이러한 폐단을 고치기 위해서, 1608년(광해군 즉위년)의 조사역에서는 처음으로 각 도에서 가포를 대신 거두도록 조치하였다. 각 도의 원근에 따라, 쇄마 1필에 5승목 8필~10필씩을 거두어 서울에서 고립하게 한 것이었다. 당시 서울에는 말을 가지고 있으면서 고립에 응하는 사람들이 매우 많아서, 먼 지방 농민들이 왕래하는 폐단을 덜 수 있었다.
조사의 역에 드는 많은 경비와 인력은 공식적인 접대에 한정되지 않았다. 사신 및 그 일행에 대하여 여러 명목의 사례가 주어졌는데, 흔히 막대한 양의 은자나 인삼 등의 물자가 소모되었다. 조사에게 주는 예단뿐 아니라, 사신 일행인 원역(員役)에게 증여할 물자도 준비되어야 했다. 이런 식으로 많은 양의 은과 인삼을 예물로 바치는 일은 17세기 초부터 성행하는 새로운 관례였다.
인조대에는 조사 접대를 위해서 10,000냥 가량의 은을 마련하는 경우가 일반적이었다. 사신 접대를 위한 은자는, 대부분 각 도의 전결에서 면포를 거두는 조치, 곧 임시적인 결포(結布)의 수취를 통해서 충당되었다. 3결포(三結布)·4결포(四結布) 등의 형태로 전결에 부과해서 거두어들인 면포로, 시전과 민간에서 은을 구입하였다. 조사를 맞이하기 위해서, 전결에 따라 면포를 거두는 것은 곧 항규(恒規)라고 인식될 만큼 관례로 자리 잡게 되었다.
전란이나 기근이 들어서 민력이 이에 따르지 못할 때, 혹은 결포만으로 부족할 때, 은자 마련을 위한 다양한 방책이 강구되었다. 예컨대 조정 백관을 대상으로 품계에 따라 은을 내게 하는 품은(品銀)과 도성 방민의 가호 단위로 부과하는 호은(戶銀)을 거두기도 하였다. 중앙 각사에 비축된 면포, 예컨대 군수목(軍需木)·여정목(餘丁木)·장인가포(匠人價布) 등을 옮겨 쓰는 것을 비롯해서 공조·선공감·사복시·비변사·병조·호조·훈련도감·진휼청 등의 재원을 활용하는 방도, 남부 지방의 수군들에게 포를 받고 입방(入防)을 면제시켜 주는 방법 등도 채택하였다. 동원 가능한 모든 비축 재화와 신역세(身役稅) 수입 등이 여기에 투입되었던 셈이다.
조사의 역에 막대한 재정 지출이 따르게 된 것은 선조대 이후의 일로 보인다. 1602년(선조 35)의 조사 일행을 접대하는 데 지출된 액수는 은자 10,000냥, 삼 1,000근 정도였다. 1621년(광해군 13)의 조사 일행을 접대하는 데에는 은자 70,000여 냥에 달하였다. 그러나 인조대 들어서 지출 액수는 더욱 크게 늘어서 100,000냥을 넘나들게 되었다. 조사역을 위한 은자의 지출 액수가 지속적으로 증가하였던 셈이다. 병자호란 이후 해마다 청(淸)에 대한 막대한 세폐(歲幣)를 부담하게 되었다. 그러나 새로운 칙사인 청사(淸使)에 대한 접대에 드는 비용은 현저하게 줄어들었다. 1645년(인조 23)의 경우 2차례의 청사 입국에 모두 21,000여 냥의 은자를 지출하는 데 그쳐서, 그 추세를 알 수 있었다.
변천
중국에서 보낸 사신은 광해군대까지는 학사(學士) 가운데(중에) 임명된 자가 많았으나, 인조대 이후에는 수만 냥의 은자를 뇌물로 바치면서까지 사신으로 파견되기를 희망하던 환관들로 채워진 경우가 많았다. 파견될 조사가 청렴한지 아닌지의 여부가 조정의 중요 관심사가 되었다. 조사의 청렴·탐욕 여하에 따라서 호조에서 지출할 은자의 총량이 40,000냥에서 130,000냥을 오르내렸기 때문이다. 국가적인 대역으로서의 조사역에 응할 재정적 부담 수준이 결정되는 중요한 근거가 되었다. 인조대 이후 입국한 여러 사신은 가혹한 수탈을 자행하였다. 그들을 수행하는 원역도 많아서, 1625년(인조 3)의 경우에는 일등두목(一等頭目)이 140여 명까지 이르렀다. 반면 그 이듬해에 입국한 조사는 청렴·검소하여서 평안·황해도에서의 수탈량이 상대적으로 적었다. 그 때문에 이곳 백성들이 송덕비를 세우겠다는 격식 밖의 청원을 한 일조차 있었다. 조사의 징색(徵索)에 의한 국가의 재정적 부담, 민간의 요역 부담이 과중했던 실정을 알 수 있다.
17세기 초엽에는 조사의 접대를 위한 재정 충당책으로 결포(結收)를 거둔 사례가 많았다. 인조반정 직후 조정에서는 한때 광해군대의 결포 수취를 중지하는 조치를 취한 바 있었다. 조사를 접대하기 위하여 전결 3결마다 면포 1필을 거두는 조치가 아직 채 완료되지 못한 상태에서 일단 수포의 명령을 거두었지만, 곧 번복되고 말았다. 조사가 입국한다는 보고를 다시 받았기 때문이다. 결포는 비상한 상황 아래서 최선의 재정 보완책으로 채택된 것이었다. 이듬해, 정부는 다시 조사 접대를 위한 결포를 시행하게 되었다. 이때의 수취량은 4결에서 1필의 면포를 거두는 것으로 결정되었다.
정묘호란 이후 민생이 피폐한 지경에 이르렀던 1628년(인조 6)경에는, 조사의 접대를 위한 결포를 분정하지 않았다. 외방의 민력을 감안하여 중앙 각사의 비축분을 활용하는 것으로 대신하게 되었다. 1634년(인조 12)의 경우에는 3결에서 1필씩 거두어도 필요량을 충당할 수 없게 되자, 삼명일방물(三名日方物)을 면포로 대신 거두는 조치를 취하고, 이어서 호남의 수군들에게 면포를 받고 입방(入防)을 면제시켜 주는 방법을 채택하였다. 인조대 후반에는 칙사를 접대하는 비용도 현저히 줄어들었다. 1638년(인조 16)에는 10결당 1필을 거두었고, 이듬해에는 8결당 1필을 거두었다. 1645년(인조 23) 청의 조제사(弔祭使)를 접대하는 데에는 23결마다 1 필씩으로 정하되, 각종 특산물은 별도로 지방에 분정하였다. 중국 사신을 접대하기 위한 결포로서는 가장 마지막 사례에 속하였다.
의의
조사의 역은 국가의 재정적 부담이나 민간의 요역 부담이 매우 과중하였던 점에서 17세기 초엽 국가 재정과 민생을 피폐하게 했던 최대의 폐원 중 하나였다. 그것은 대체로 전결에 따라 면포를 거두는 결포의 방식으로 채워지는 것이 관례였다.
17세기 초엽에는 별역(別役)이라는 이름 아래 규례 밖의 대규모 부역 노동이나 현물세를 일시적으로 거두는 일이 빈번하였다. 이것은 임진왜란을 겪고 나서 병자호란에 이르기까지 복잡한 주변 정세 속에서 국방·외교 분야의 비상한 대응 방식과 깊은 관련이 있었다. 이 같은 별역으로는 서량미(西糧米), 군량미의 임시 조달, 부서군(赴西軍)의 자장목(資裝木), 군수물자의 조달 등이 속하였다. 그 조달 방식은 흔히 전결에의 분정이었다. 이 시기의 여러 가지 별역 중 특히 많은 인력과 물자가 소모되는 분야는 역시 산릉역·조사역의 2가지였다. 모두 대동법 이후에도 민역의 대상으로 파악되는 국가적인 대역이었다. 17세기 초엽의 빈번한 결포 징수의 조치가 이 분야에서 집중적으로 나타났던 것이다. 한편 이 같은 역사에서 결포가 수취되었던 것은 요역의 물납세화·전결세화를 반영하였다.
참고문헌
『광해군일기(光海君日記)』
김경록, 「朝鮮時代 使臣接待와 迎接都監」, 『韓國學報』 117, 2004.
김옥근, 『朝鮮王朝財政史硏究』, 일조각, 1984.
윤용출, 「17세기 초의 結布制」, 『釜大史學』 19, 1995.
족징(族徵)
정의
군포를 내야 할 사람이 내지 못할 경우 친인척이 대신 부담하게 한 제도.
개설
족징은 군역을 지고 있던 사람이 너무 빈곤하여 군포를 내지 못하거나 도망·사망으로 인하여 사라지면 우선 가까운 친인척에게 연대 책임을 물어 군역을 대신 부담하게 한 것이었다. 족징이 법으로 규정된 것은 아니었다. 그렇지만 나라에서는 일정한 양의 군포 징수에만 관심을 두고 구체적인 과정에 대해서는 군현에 맡겨 두었다. 이러한 이유로 지방 고을에서는 족징이 관행처럼 이루어졌다.
내용 및 특징
단순히 군포를 내지 못하는 경우뿐만 아니라 군포를 내지 않고 도망하거나 죽은 경우에도 족징이 적용되었다[『현종실록』 6년 3월 14일]. 정부는 필요한 군사의 수와 그 군사를 경제적으로 뒷받침할 보인의 숫자를 책정하여 군총(軍摠)을 정하고, 그 군총을 군현의 크기에 따라 적절히 나누어 배정하였다. 따라서 군현 안에 도망자나 사망자, 나이가 들어 군역을 면제받아야 할 사람이 생겨도 군현이 납부해야 할 군역 총액은 바뀌지 않았다.
만약 도망·사망으로 군적(軍籍)에 빈자리가 생기면 적절한 절차를 거쳐 다른 사람을 대신 그 자리에 채우고 군적을 새로 작성하였다. 대개 그 친인척이 빈자리를 채우는 경우가 많았다. 그런데 정식 절차를 거쳐 군적을 새로 작성하기에는 절차가 까다롭고 각종 비용이 발생하였다. 그러다 보니 군적을 고치지 않고 도망자·사망자의 이름을 그대로 둔 채 군포만 친인척에게서 징수하는 경우도 많았다.
참고문헌
『목민심서(牧民心書)』
김용섭, 「조선후기 군역제의 동요와 군역전」, 『동방학지』 32, 1982.
손병규, 「호적대장 직역란의 군역 기재와 ‘도이상’의 통계」, 『대동문화연구』 제39집, 2001.
송양섭, 「19세기 양역수취법의 변화 -동포제의 성립과 관련하여-」, 『한국사연구』 89, 1995.
정만조, 「조선후기의 양역변통논의에 대한 검토: 균역법성립의 배경」, 『동대논총』 7, 1977.
정연식, 「조선후기 ‘역총’의 운영과 양역 변통」, 서울대학교 박사학위논문, 1993.
직정(直定)
정의
역종별 군역 정원의 결원에 대하여 직접 대정하는 것.
개설
직정은 역종(役種)별 군역 정원에 결원이 발생하였을 때, 군역자를 재원으로 가지고 있는 중앙 관서나 군문(軍門), 지방 군영 등이 군역 대상자를 직접 대정(代定)하는 것을 의미하였다. 그러나 직정은 군역자를 직접 대정하는 데에만 사용되지는 않았다. 가령 중앙의 경차관(敬差官)이 도(道)에 들어와 관찰사의 개입 없이 임시로 일할 차사원(差使員)을 직접 뽑아서 쓰는 등의 일도 직정이라 하였다. 그러나 직정이라는 용어는 군역과 관련하여 그것을 금하는 상황에서 주로 사용되었다.
중앙과 지방의 국가기관들은 각 기관 소속 군역자를 직접 장악하고 또 그들에게 새로운 군역자를 찾아오게 하였다. 나아가 군역자들이 거주하는 지방에 사람을 직접 파견하여 새로운 군역자를 탐문하고 충당하였다. 이에 대하여 상급 기관의 군역자 직정을 금하고 지방의 관청을 통해서 군역자를 파악하도록 하였다. 이 직정 금지 조치는 소속별·역종별 군역의 액수(額數)를 고정시키고자 하는 군액 정액(定額) 사업 과정에서 수시로 취해졌다. 그리고 소속별·역종별 군액이 지방마다 정액화되어 공표되고, 지방관청에서 행정 구획 내의 군역자를 전반적으로 파악하게 되면서 상급 기관의 군역 직정 현상은 점차 사라졌다.
내용 및 특징
일본·청나라와 전쟁을 치른 후에 통치 체제를 재정비하는 과정에서 군역 재원을 확보하는 새로운 방안이 제기되었다. 기존의 중앙 및 지방관서에서 산발적으로 인력을 동원하고 재원을 확보하기 위하여 추진해 온 활동을 통제하기 시작한 것이다. 당시의 군안(軍案)에는 실제로 군역을 부담하기 어려운 사람들이 대거 등재되어 군역 부과를 실현하기 어려운 상황이었다. 특히 중앙의 관서와 군문은 군역 부담을 낮춘 역종을 만들어 소속자를 모집하는 등 기관마다 경쟁적으로 군역자 확보 활동을 벌였다. 중앙의 상급 기관은 지방 군현에 군역 재원의 제공을 요구하고 직접 군역 대상자를 수색하기도 하였다.
숙종대부터 정부는 소속별·역종별 군액의 정원을 설정하였다. 그리고 그것을 넘는 개별적인 군역자 모집을 사모속(私募屬)으로 규정하여 자의적인 군액 증대를 억제하기 시작하였다. 허구화한 군안을 실제 군역을 부담할 능력이 있는 자들로 채우고자 한 것이다. 또한 소속별·역종별로 군액을 고정시키고 액외(額外)의 사모속을 제거하였다. 대정할 때에는 소속 기관이 직접 대정에 나서지 않고 도(道)와 지방 본관(本官)이 개입하게 하였다.
하지만 중앙 기관 소속 군역에 대한 직정 금지는 곧바로 실현되지는 않은 듯하다. 1687년(숙종 13) 영의정 남구만(南九萬)은 “15세 이하를 충군하는 것은 군역 대상자인 한정(閑丁)을 얻기 어렵기 때문이고, 한정을 얻기 어려움은 경사(京司)에서 직정을 하기 때문이니, 마땅히 금해야 한다.” 하여 직정을 금지하자고 주장하였다[『숙종실록』 13년 12월 23일].
1704년(숙종 30)에는 다시 군역의 직정을 금하는 명령이 내려졌다. 『신보수교집록(新補受敎輯錄)』에 의하면, 각 군문이 군역을 직정하는 폐단이 매우 많아 각 고을에서 이를 받들어 실행하기 어렵다고 하였다. 또한 민간에서는 소란스럽고 어지러우니 중앙의 군문이 군역을 직정하는 일이 있으면 그 즉시 논죄한다고 하였다.
중앙 기관 소속 군역에 대한 역종별 군액을 확정하는 사업이 한창이던 1711년(숙종 37) 비변사에서는 「양역변통절목(良役變通節目)」을 만들었다. 「양역변통절목」에서는, 중앙과 지방의 각 아문(衙門)·군문·영문(營門)·영장(營將)에 소속된 각종 군역은 직정하지 못한다고 금령을 내렸는데 여전히 함부로 양정(良丁)을 모집하고 있다고 지적하였다. 그러면서 결원이 생겼을 때에 한해서 새로운 군역자를 충당하되 만일 직정하는 일이 있으면 지방관청은 일체(일절) 시행하지 말라고 하였다. 그리고 감영에 보고하여 중앙에 계문(啓聞)하는 절차를 밟으라고 하였다. 비로소 중앙 기관 소속 군역만이 아니라 지방의 감영과 군영에 소속된 군역 역종에 대해서까지 직정을 금하는 조치가 취해졌던 것이다.
군역 직정을 막는 조치는 지방군현 단위로 소속별·역종별 군역의 액수를 확정하여 상급 기관의 군역자 확보 활동을 불가능하게 하는 것이었다. 이러한 정책은 이미 1727년(영조 3)에 제안되었다. 기사에 따르면 상사(上司)에서 부역(賦役)을 직정함으로써 본읍(本邑)에서는 실지의 수효조차 알지 못한다고 지적하고, 중앙에서 직정하는 명목과 군액을 각 읍에 알리면 본읍이 관문(關文)을 보내 대정하도록 하는 방안이 건의되었다.
실제로 양인 군역의 소속별·역종별 군액이 각 군현마다 정액(定額)화되어 전국에 공표된 것은 1740년대였다. 지방관청은 이때에 책자로 작성된 『양역실총(良役實摠)』의 액수에 따라 행정구역 내의 군역 대상자를 파악하여 역종별로 군역을 부담시켰다. 이렇게 지방관청에서 「읍안(邑案)」을 작성하여 군역자를 관리하게 되자 상급 기관의 직정이 행해질 여지가 없어졌다.
참고문헌
『수교집록(受敎輯錄)』
『신보수교집록(新補受敎輯錄)』
『양역실총(良役實摠)』
손병규, 「18세기 양역 정책과 지방의 군역 운영」, 『군사』 39, 1999.
정연식, 「조선 후기 ‘역총’의 운영과 양역 변통」, 서울대학교 박사학위논문, 1993.
차역(差役)
정의
요역 등 부역 노동의 징발.
개설
조선초기 세종·성종대를 거치면서 요역(徭役) 노동의 징발 기준을 전결(田結)에 두게 되었다. 이는 개별 민가가 보유한 가족 노동력이나 노비의 노동력보다는 사유지의 크기로 역을 차출하는 방식이었다.
내용 및 특징
조선 세종대에 이르러 요역제 운영의 중요한 원칙이 성립되었다. 차역, 곧(즉) 요역 징발의 기준을 전결에 둔다는 것이었다. 이는 개별 민가가 보유하는 가족·노비의 노동력보다는 사유지의 크기를 징발의 기준으로 삼는 방식이었다. 요역제 운영 원리의 변동은, 상경농법(常耕農法)의 보편화라고 하는 농업생산력의 발전을 토대로 삼고 있었다.
요역 징발의 기준을 토지에 두는 원칙은 성종대에 확립되었다. 이때에 이르러 요역제는 전 단계에 비하여 구체적인 내용의 규정을 갖추어 제도화되었다. 1471년(성종 2) 왕이 호조에 내린 역민식(役民式)에 의하면, 전지(田地) 8결마다 1명의 역부를 차출할 수 있다고 하였다. 아울러 역사가 클 경우에는, 6결마다 1명의 역부를 낼 수 있도록 규정하였다[『성종실록』 2년 3월 19일].
역민식의 규정은 『경국대전』에서 보완되었다. 전지 8결마다 1명의 역부를 차출하되, 사역 기간은 연간 6일을 넘지 않게 한다는 원칙이 설정되었다. 이 규정은 차역하는 단위 전결과 사역의 기한에 대하여 제한을 두었다. 이로써 일정 면적의 사유지에 대한 일정량의 요역 부담량이 규정될 수 있었다. 이는 민가의 요역 부담량을 표준화하려는 시도였다. 다만 이와 같은 요역제 규정이 전국적으로 통일되게 지켜진 것은 아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차역의 기준을 토지에 두는 원리가 확정되었다는 데 의의가 있다.
이처럼 전결을 헤아려 노동력을 징발하는[田結出夫] 방식에 따라 운영된 역부를 곧 연군(烟軍)이라 하였다. 그러나 개별 민가가 부담하는 요역 노동의 총량에 대한 제한 규정은 지켜지기 어려웠다. 수령은 필요할 때마다 관내 민가에 요역을 부과하였다. 특히 과도한 징발이 문제시 되던 요역 종목에서는 요역의 기한에 대한 규정이 별도로 마련되기도 하였다.
또한 수령은 자의적으로 징발의 대상자를 선정할 수 있었다. 이 때문에 전결을 기준으로 하는 차역의 원칙은, 군현 내부에서 차별적으로 적용될 여지가 있었다. 외방 군현에서 각종 요역을 부과할 때마다 세력이 있는 자는 역을 면하고 약한 자는 다른 사람의 역까지 겸하며, 부자는 면하고 가난한 자만 홀로 시달린다고 했던 것이 그러한 실태를 말해 준다. 요역제 운영은 실제로는 신분적 지배 질서라고 하는 현실적인 사회관계와 긴밀한 관계를 맺고 있었다. 양반 지주층은 흔히 차역을 면할 수 있었고, 내수사 노비, 재상가 노비 등 권력의 보호를 받는 노비들도 요역의 의무를 불법적으로 면제받았다. 따라서 군현에서 요역 노동을 부담하는 이들은 주로 피지배 신분의 하층 농민이었다. 이처럼 요역제 운영의 모순은 하층 농민에게 과도한 요역 부담을 전가시키는 데 있었다.
변천
15·16세기의 부세제도는 노동력을 직접 징발하는 수취 방식이 적지 않은 비중을 차지하고 있었다. 신역·요역·공납을 위한 부역 노동이 그것이었다. 그러나 차역의 기준이 전결로 바뀌었는데, 이는 농민 지배 방식에 있어서 큰 변화가 일고 있음을 말해 준다. 즉, 인정의 직접 지배가 아니라 토지를 매개로 한 지배 방식이 채택된 것이었다. 중앙집권적인 지배 체제의 보다 확실한 부세의 원천이 여기에서 확보될 수 있었다. 전결은 잡다한 현물 납세를 징수하거나 요역을 징발하는 데 있어서 부담자의 경제력을 가늠하는 척도가 되었기 때문이다.
참고문헌
강제훈, 「조선초기 요역제에 대한 재검토: 요역의 종목구분과 역민규정을 중심으로」, 『역사학보』 145, 1995.
김종철, 「조선초기 요역부과방식의 추이와 역민식의 확립」, 『역사교육』 51, 1992.
윤용출, 「15·16세기의 요역제」, 『부대사학』 10, 1986.
이종하, 『우리 민중의 노동사』, 주류성, 2001.
출신(出身)
정의
조선시대 문과·무과·잡과 등의 국가시험에 합격한 사람.
개설
고려시대와 조선시대 문·무과나 잡과에 급제하고 아직 출사(出仕)하지 못한 사람을 일컬었다. 군역자를 파악하거나 시취(試取), 포호(捕虎) 등으로 포상할 때 무과 출신자는 주로 군관이나 군역 예비자인 한량과 함께 거론되었다. 조선후기에 출신은 무과 출신자를 주로 가리키며, ‘출신군관(出身軍官)’이라는 직역명도 나타났다.
담당 직무
과거 합격자인 출신자들은 시험 성적이 우수한 사람을 제외하고는 대부분 품계만 있어서, 직사(職事)가 없는 산관직(散官職)인 권지(權知)에 임명되었다. 문과의 경우 갑과(甲科者) 합격자 3명은 즉시 서용되었지만 나머지 을과·병과 출신 30명은 정8품과 정9품의 품계(階)를 받고 성균관·교서관·승문원·홍문관 등의 권지로 나누어 배치되었다. 무과는 훈련원과 별시위에 권지로 배치되었다.
이들은 매달 월례 고사 성적과 근무 일수를 기준으로 하여 매년 인사행정인 도목정(都目政)을 거친 뒤 6품에 이르러서야 직무에 배치될 수 있었다. 이런 과정은 1425년(세종 7)에 마련되었다. 그 이전에는 비출신자(非出身者)도 권지가 될 수 있었다. 물론 이후에도 제생원·혜민국의 권지는 비출신자도 될 수 있었다.
다만 출신자는 비출신자보다 여러 가지 특전이 있었다. 잡과의 경우에 출신자는 참상관이 될 수 있었으며, 생원·진사 및 유직인(有職人)의 사례에 따라 의금부에서 심문을 할 때도 태장(笞杖)은 칠 수 없었다.
변천
출신은 과거시험에 합격한 자를 일컫는 일반적인 말이었으나, 조선후기에는 주로 무과 입격자를 가리키게 되었다. 생원진사과 합격자인 생원·진사와 대조적인 관계로 인식된 듯하다.
참고문헌
『수교집록(受敎輯錄)』
이성무,『朝鮮初期 兩班硏究』, 일조각, 1980.
우인수, 「『赴北日記』를 통해 본 17세기 出身軍官 의 赴防生活」, 『韓國史硏究』 96, 韓國史硏究會, 1997.
이성무, 「朝鮮初期의 技術官과 그 地位」, 『유홍렬박사화갑기념논총』, 유홍렬간행위원회, 1971.
정해은, 「조선후기 武科연구」, 한국정신문화연구원 석사학위논문, 1993.
취련군(吹鍊軍)
정의
조선초기 국가에서 필요한 철을 생산하기 위하여 동원된 일반 양인.
개설
조선건국 이후 체제가 안정되면서 특수한 물자를 생산하기 위하여 일반 민호나 군사를 동원하는 경우가 빈번해졌다. 이러한 현상은 조선건국 이래 호적과 군적이 어느 정도 정비되어 국역 부담자가 증가한 반면에, 국내외 정세는 안정된 데 따른 것이었다. 이에 국역 대상이나 특별하게 부여할 일이 없는 노동력을 이용할 필요가 있었다. 그래서 일반민이나 군사들을 임시로 공사에 동원하는 경우도 많았으며, 정역호와 같이 의무를 명시해서 ‘모모군’으로 부르는 경우도 있었다. 이들 중에서 철을 생산하여 공물로 바치는 역을 담당하였던 이들을 취련군이라고 하였다.
이 당시의 군은 단순히 상습적으로 어떤 일에 종사하는 자에게 붙이던 ‘꾼’과는 동의미가 달랐다. ‘군’은 양인으로 차정되는 것이 원칙이었고, 따라서 그 역은 양역의 일종으로 간주되었다.
담당직무
취련군은 조선시대 철을 생산하여 공물로 바치는 역을 담당하였다. 취련군은 철간과 달리 양인 신분으로 국가의 역에 동원되어 철장(鐵場)에서 철을 생산하였다.
변천
고려말까지 국가는 철의 생산에 전혀 관여하지 않고, 각 고을에서 일정량의 철을 거두는 것으로 국가에서 필요한 철의 수요를 충당하였다. 1391년(공양왕 3) 이후에는 군역 대신 철을 생산하여 납부하는 역을 부담하는 철간(鐵干)을 지정하여 철을 공급받았다. 이들 철간에게는 그 반대급부로 구분전(口分田)을 지급하고 잡역을 면제해 주었다. 그 대신 철을 생산해서 공물로 바치는 모든 과정은 철간의 책임이었다.
이와 함께 일반민, 즉 취련군을 동원하여 철을 생산하는 철장(鐵場)도 운영하였다. 조선조에 들어 철장 운영이 확대되면서 태종 말이나 세종 초에는 각 고을마다 철을 거두는 제도를 폐지하였다. 1430년(세종 12)에는 철간을 혁파하고 군역에 충당함으로써 철간이 사라졌다. 그 결과 철간이 지던 부담은 철장에 동원되는 취련군의 부담으로 전가되었다. 취련군은 철의 생산에서 철간이 하던 일을 일반 민호(民戶)의 부담으로 전가시키는 과정에서 나타난 존재였던 것이다.
참고문헌
유승원, 『조선초기신분제연구』, 을유문화사, 1987.
퇴번(退番)
정의
군인들이 서울로 번상 근무를 마치고 근무처에서 나오는 것.
개설
1628년(인조 6) 9월 병조(兵曹)에서는 번상(番上) 군인의 무예 훈련에 대하여 “상번(上番)한 군사들 중에서 힘이 세고 용감한 자를 따로 뽑아 편성하고 훈련도감(訓鍊都監)의 포수(砲手) 중 기예가 이루어진 자로 30명을 뽑아 교사를 정해 준 다음 검술을 가르치게 하여 정해진 기일 안에 입격(入格)한 자에 대해서는 한가한 시간을 주어 더욱 기예를 익히게 하는 한편, 월등하게 뛰어난 자에 대해서는 본조에서 별시(別試)를 보여 시상함으로써 나머지 사람들을 격려시킵니다. 그리고 퇴번(退番)할 때에는 따로 상첩(賞帖)을 지급하여 거주하는 고을로 하여금 호역(戶役)을 헤아려 덜어 주게 하고, 상번할 때에 본조에서 다시 그 검술을 시험하여 그동안의 숙련도를 고과(考課)하여 상벌을 실시하면 될 것입니다.” 하고 건의하였다[『인조실록』 6년 9월 29일]. 이 가운데 상번과 퇴번을 각각 대비시켜 말하고 있다. 즉, 상번은 군인들이 고향에서 근무처로 올라오거나 근무처에 있는 것을 말하고, 퇴번은 군인들이 근무처에서 나오거나 고향으로 돌아가는 것을 말하였다.
내용 및 특징
조선시대의 중앙군은 임진왜란 이후 등장한 훈련도감 군인을 제외하고는 대체로 번상제의 형태로 군역을 치렀다. 훈련도감 군인은 장번(長番) 병으로서 서울에 상주하고 있었지만, 나머지 군인들은 번상제의 형태로 군역을 수행하였던 것이다. 조선전기 중앙군의 대표적 병종(兵種)인 갑사(甲士)와 정병(正兵), 조선후기 어영청(御營廳)·금위영(禁衛營) 등 군영의 번상병들 모두 번상제의 형태로 군역의 의무를 수행하였다. 즉, 이들 군인들은 번상제에 의하여 당번(當番)이 되면 고향에서 근무처로 이동하여 일정 기간 상번을 서고, 근무 기간이 끝나면 다시 고향으로 돌아가는 퇴번을 되풀이하였다.
변천
상번이나 퇴번의 과정은 매우 힘들었다. 강원도나 전라도, 경상도의 연해·산간벽지에 거주하는 군인들은 서울로 올라오는 데만 8~9일이 걸렸다. 또 상번이나 퇴번 과정에서 강물에 빠져 죽거나 산을 넘다가 다치는 경우도 비일비재하였다. 이러한 상번과 퇴번의 어려움으로 인하여 자기 대신 다른 사람을 보내는 대립제(代立制)가 등장하고, 군인들은 군역을 지는 대신 포(布)를 납부하는 납포군(納布軍)화 경향이 심화되었다.
참고문헌
김종수, 『조선 후기 중앙 군제 연구: 훈련도감의 설립과 사회 변동』, 혜안, 2003.
포보(砲保)
정의
조선후기 훈련도감의 운영을 위하여 설정한 군보.
개설
조선전기 중앙의 군사제도인 오위제(五衛制)가 임진왜란으로 그 취약성이 드러남에 따라 새로운 군사조직이 필요하게 되었다. 1593년(선조 26)에 이미 병사들에게 각종 화포 및 방패·전차·창검 등을 익히게 하였다. 이것이 계기가 되어 총포를 사용하는 포수(砲手), 활을 쓰는 사수(射手), 창검을 쓰는 살수(殺手)와 같은 전문 군병으로 구성된 훈련도감이 설치되었다. 이들 삼수(三手)는 급료를 받으며 장기적으로 번을 서는 전문 군병이었다. 이들을 양성하기 위하여 삼수량(三手糧)이라는 토지세가 추가로 생겨났다. 또 포보(砲保)·향보(餉保) 등을 설정해 군포를 수취하여 훈련도감 운영 경비에 충당하였다.
내용 및 특징
포보는 광해군대에 형성된 것으로 보인다. 평안도와 함경도를 제외한 6도에 포보가 설정되었고, 초기에는 한 해에 1보당 포 3필을 거두었다. 그러나 포보가 다른 보인보다 역이 무겁다는 이유로 1662년(현종 3)에 2필로 줄여 주었고, 영조대 균역법이 시행되면서 다시 1필을 감해 주었다.
포보는 당해 10월 이내에 목(木)·포(布)·전(錢)의 형태로 가포(價布)를 상납하였다. 포보가 납부한 가포는 대개 삼수병의 의복 비용으로 쓰였다. 포보가 상납한 목·포·전의 총수는 목 712동(同) 20필(匹), 포 25동, 전 72,160냥이었다. 포 1필이 감해진 뒤의 부족액은 균역청에서 대신 지급하였다.
삼수병의 수는 유사당상(有司堂上) 이덕형(李德馨)이 선조에게 보고한 내용에 의하면 1,000명 내외였던 것 같다. 1808년(순조 8)에 편찬된 『만기요람』에 의하면 포수는 2,440명, 살수는 738명으로 기록되어 있다. 그런데 포보는 1662년에 19,690여 명이었던 것이, 1732년(영조 8)에는 36,820명으로 늘어났으며, 이때에 37,000명으로 수를 제한하였다. 실제로 『만기요람』에 나타난 포보의 수를 집계해 보면, 경기 2,746명, 해서 8,710명, 호서 6,672명, 호남 8,773명, 영남 7,040명, 관동 3,253명 등 총 37,194명으로 책정되었다.
변천
포보는 훈련도감의 재정 부족을 호소하면서 거론되었다. 1616년(광해군 8)에는 호조가 훈련도감의 삼수량으로 1년에 받아들이는 것이 28,000여 석인데, 그해 재정이 완전히 바닥이 난 이유를 모르겠다고 하면서 훈련도감의 비용을 호조에 지속적으로 떠넘기는 것에 대하여 보고하였다. 재원 마련을 위하여 호조가 삼도(三道)의 삼수량을 토지 매 1결마다 쌀 3승 혹은 2승을 더 거두어 지출에 감당할 수 있게 하는 방책을 건의하였다. 이에 대하여 비변사는 훈련도감의 둔전을 설치하고 혹 차인(差人)을 시켜 무판(貿販)하게 한 것은 이러한 때의 수용(需用)을 위한 것이니 결코 민결(民結)에서 더 거두어서는 안 된다고 반대하였다[『광해군일기』 광해군 8년 8월 25일 5번째기사]. 1665년(현종 6)에는 포보 상납액 3필 중 1필을 줄여 주고, 그에 따라 모자라는 액수를 호조에서 대신 지급하도록 청하였다[『현종실록』 6년 10월 23일].
한편, 훈련도감 소속 군병의 증액에도 포보가 동원되었다. 1674년(현종 15)에는 훈련대장 유혁연(柳赫然)의 건의에 따라 경기의 포보 중 건장한 자들을 훈련도감의 별대(別隊)로 편입시켜 8초(哨)를 만들고 관에서 조총을 지급하였다[『현종실록』 15년 3월 25일].
참고문헌
『대전회통(大典會通)』
『훈국등록(訓局謄錄)』
『만기요람(萬機要覽)』
차문섭, 『朝鮮時代軍制硏究』, 檀國大學校出版部, 1973.
포작간(鮑作干)
정의
어포나 해산물을 진상하는 신역을 담당한 사람.
개설
바다에 들어가 조개·미역 따위 해산물을 채취하거나 여러 국가제사에 쓰는 어포(魚鮑)를 떠서 소금에 말려 진상하는 신역(身役)을 담당한 사람이었다. 이들이 사용하는 포작선(鮑作船)은 가볍고 빨라 전선(戰船)으로도 이용하였다. 그들은 선박 운행에 능숙하였기 때문에, 사공의 일을 돕는 격군(格軍)으로 동원되기도 하였다.
담당 직무
조선초기 연해나 제주에는 해변에 장막을 치고 일정한 거처 없이 배에서 살면서 해산물을 채취하는 일을 업으로 하는 이들이 있었다. 이들은 배의 조작과 물질에 능숙하여 국가에서 진상하는 해산물은 모두 이들이 채취한 것이었다. 이들은 어업이나 해산물 채취를 주업으로 삼았고, 때로 해적으로 돌변하기도 하였다. 이러한 폐단을 막기 위하여 조선 성종 연간에는 이들에게 포작간의 역을 부과하고, 해물을 채취하여 진상하게 하였다. 그리고 그들의 이름이 기록된 지역을 함부로 이탈하지 못하게 하였고, 해당 지역 관리로 하여금 관리하게 하였다.
변천
포작간에 대한 지방관, 특히 변장(邊將)의 침탈이 심하였다. 이 때문에 역을 피해 도망하는 이들이 적지 않았다. 특히 임진왜란을 전후로 해 일본으로 도망치는 이들이 많았다. 이 때문에 임진왜란 당시 일본군에 투항한 포작간들이 우리나라를 침범하는 안내자가 될 것을 걱정하기도 하였다.
한편 임진왜란 당시에는 포작간이 전선(戰船)을 운행하는 주력군이 되기도 하였다. 하지만 포작간은 그 역이 고되기 때문에 징집을 피하여 도망치는 경우가 많았다. 조선 정부는 이를 막기 위하여 바다를 통행할 수 있는 문첩(文帖)을 발급해 주고, 이를 소지하지 않은 포작간은 바다의 통행을 금지하는 정책을 시도하기도 하였다. 임진왜란이 끝난 뒤에는 이들이 수군의 운영비를 담당하였다.
피역(避役)
정의
부역 노동을 기피하는 행위.
개설
부역제도는 신역(身役)과 요역(徭役)의 2가지 방식으로 민간의 노동력을 무상으로 강제 징발하는 수취제도였다. 피역은 백성들이 무거운 신역과 요역을 기피하는 행위를 지칭하였다. 특히 조선후기 신분제가 동요하고 상품화폐경제가 발전하는 가운데 피역이 성행하였다.
내용 및 특징
피역은 부역제도 운영에서 나타나는 폐단, 특히 부역을 부담하는 백성의 과중한 부담에서 비롯된 바가 많았다. 군역이나 요역을 부담하던 농민들은 군문(軍門)·아문(衙門)에 투속하여 역의 부담에서 빠져나가는 일이 흔하였다. 17세기 이후 중앙 각사 뿐 아니라, 각 지방의 관아에서도 역이 헐한 곳을 찾아서 투속하는 농민들이 많아서 문제가 되었다. 감영 이하 각 영문 및 각 읍의 군관(軍官) 등에 투속하는 자가 많았다. 특히 각 진의 소모군(召募軍)이나 남한산성 등의 모입민(募入民)에 자원해 들어가면 소속 군현에서 부담하던 신역이나 호역 등을 면제받을 수 있었다[『광해군일기』 2년 12월 20일].
부잣집에 투탁하는 것도 역시 피역의 한 방편이었다. 사노(私奴)로 전락하거나, 또는 협호(狹戶)가 되어서 부잣집에 의탁할 경우 자신의 호역이 면제될 수 있었다. 혹은 권세가에 의탁하여 관의 부역 노동 징발 대상에서 자신을 숨기거나 누락시키는 경우도 있었다.
피역의 마지막 방법은 유망(流亡)이었다. 군역·요역 등 부역 노동의 과도한 부담을 견디지 못한 농민들은 살던 곳을 떠나 유리하는 일이 많았다. 1632년(인조 10) 경기감사 김경징(金慶徵)은 인목왕후 산릉역을 위하여 경기 지역에서의 요역 징발이 과중하다는 것을 들어서, 1개월간 부역하는 경기 연군(烟軍)의 징발을 특별히 덜어달라고 건의하였다. 그는 여러 형태의 무거운 부역에 시달리는 경기 지역 농민들은 모조리 도산할 것이라고 경고하였다. “흉년에 본디 항산(恒産)도 없어서 모두 이고 지고 달아날 생각을 품고 있다.”는 것이다. 무거운 요역 부담을 피하고자 줄지어 달아나는 농민들의 실상을 표현한 것이었다.
이와 같이 피역은 여러 가지 형태로 나타났으며, 결국 역에 응하는 사람은 점차 줄어들었다. 1710년(숙종 36) 당시 도성의 여러 방역(坊役) 중 가장 힘든 일로 알려졌던 부지군(負持軍)의 역에는 수만 호 가운데 불과 4,000~5,000호의 사람밖에 확보할 수 없었다. 다른 지방에서도 사정은 마찬가지였다[『숙종실록』 36년 5월 6일]. 1735년(영조 11) 경기감사 조명익(趙明翼)에 의하면, 양주목의 전체 민호 약 9,000여 호 중 역에 응한 사람은 단지 500여 호에 불과하다고 하였다. 양주에서 역을 면제받은 사람 중에는 비교적 신역의 부담이 가벼운 각종 보인(保人)으로 등록된 자가 많았다.
변천
지배층 관료들은 이와 같이 역을 피하는 사람이 늘고 역에 응하는 사람이 줄자 이에 대한 규제책을 세우지 않을 수 없었다. 1787년(정조 11)에 편찬된 『전율통보(典律通補)』에는 부역 노동을 피하는 자에 대한 처벌이 규정되어 있다. 즉, 호민(豪民)의 자제로서 관원의 시중드는 하인[跟隨]이 되어 역에서 빠지려는 자, 민가에서 이웃 고을로 도망가 역을 피하는 자, 그리고 이를 용납·은닉하거나 뇌물을 받고 묵인한 관원·이임(里任) 등을 모두 처벌한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규제책만으로는 각종 합법·비합법적인 피역(避役)을 막아낼 수 없었다. 조선후기 신분제가 동요하고 상품화폐경제가 발전하면서, 더 이상 민간의 노동력을 파악하고 징발하는 부역제도를 원활하게 운영하기는 어렵게 된 것이다.
참고문헌
『전률통보(典律通補)』
김용섭, 「조선후기 군역제의 동요와 군역전」, 『동방학지』 32, 1982.
송양섭, 「19세기 양역수취법의 변화-동포제의 성립과 관련하여-」, 『한국사연구』 89, 1995.
윤용출, 「임진왜란 시기 군역제의 동요와 개편」, 『부대사학』 13, 1989.
윤용출, 『조선후기의 요역제와 고용노동: 요역제 부역노동의 해체, 모립제 고용노동의 발전』, 서울대학교 출판부, 1998.
이지원, 「17~8세기 서울의 방역제 운영」, 『서울학연구』 3, 1994.
한량(閑良)
정의
고려말 조선초에는 직첩·직함은 있지만 직사가 없는 무직사관이나 직역이 없는 사족 자제 등을 가리켰으나 조선후기에는 무과(武科)에 응시하는 사람을 가리키는 말로 쓰임.
개설
조선초기의 한량은 본래 관직을 가졌다가 그만두고 향촌에서 특별한 직업 없이 사는 사람을 가리켰다. 그 뒤로는 벼슬을 하지 못하고 어디에도 소속되지 않은 사람을 뜻하게 되었다. 조선후기에는 무예를 잘하여 무과(武科)에 응시하는 사람을 가리키는 말로 쓰였다.
내용 및 특징
고려말부터 사족 자제 중에 군역을 피하려고 호적과 군적에 등재되지 않은 채 직역(職役)을 갖지 않는 자들이 있었다. 이에 대하여 국가는 그들을 호적에 등재하고 강제로 추쇄(推刷)하여 군역에 충당하려 하였다. 과전법(科田法)에서는 경성에 거주하면서 삼군도총제부(三軍都摠制府)에 소속되어 숙위(宿衛)하는 한량에게는 과전을 지급하고, 외방에 거주하는 한량에게는 군전(軍田)을 지급하도록 규정하였다.
조선초기에도 사족 자제 중에 직역이 없는 자를 군역에 편제하여 조선초기 국방력을 강화하는 데에 도움이 되도록 하였다. 사족 자제로서 경제력이 있으면서 무예를 수련하는 자들에게는 일정한 시험을 거쳐 갑사(甲士)직을 제수하였던 것이다[『세종실록』 13년 3월 8일]. 중종대부터는 그들에게 무과 응시를 허용하였다. 이들은 군역 복무에 그치지 않고, 과거를 통하여 중앙 관료로 진출하기도 하고, 향촌에 유향소(留鄕所)를 설립하여 향촌 자치를 주도하면서 자신의 사회적 지위를 상승시켜 갔다.
15세기 말 이후 흔히 ‘한량 자제(閑良子弟)’로 불리는 새로운 한량이 거론되었다[『세종실록』 19년 3월 1일]. 이들은 나이가 20세가 넘고 재산도 있고 유학과 무예도 어느 정도 익힌 사족·평민의 자제들로서, 학교에 입학한 학생도 아니고 군역도 지고 있지 않은 부류였다. 이들은 호적에도 올라 있지 않아 과거 시험도 치를 수 없어서 양인으로서의 권리와 의무를 가지지 않았다. 국가에서는 이들을 조사하고 그 재능을 시험하여 고급 군인으로 선발하기도 하고 강제로 군역을 지우기도 하였다. 시간이 지나면서 한량의 존재는 계속 늘어가기만 하였다.
조선후기에는 무과와 잡과(雜科)를 응시하고자 준비하는 자를 한량이라 불렀다. 무반(武班) 집안 출신으로 아직 과거에 급제하지 못한 사람이라는 뜻으로도 사용되었던 것이다. 정조대의 『무과방목(武科榜目)』에는 무과 합격자로서 전직(前職)이 없는 사람은 모두 한량으로 불렀다.
호적상에는 평민 중 상층이면서 군역을 지지 않고, 양반을 칭하지는 못하지만 양반 지향적인 자를 한량이라는 직역명으로 기재하였다. 19세기 호적에는 수많은 평민들이 ‘유학(幼學)’을 기재하여 신분을 상승하려고 하였는데 한량은 이때에 그 중간 과정으로 많이 사용되었다.
참고문헌
이준구, 『조선 후기 신분 직역 변동 연구』, 일조각, 1993.
한영우, 「여말선초 한량과 그 지위」, 『한국사연구』 4, 1969.
한유(閑遊)
정의
양인 남성 중 16세부터 60세까지의 장정임에도 불구하고 역을 지지 않는 자.
개설
한유(閑遊)는 여러 가지 이유로 역을 지지 않고 ‘한가로이 놀고 있는 자’를 가리켰다. 조선초기의 한량은 본래 관직을 가졌다가 그만두고 향촌에서 특별한 직업이 없이 사는 사람을 가리켰다. 조선후기에는 무예를 수련하여서 군관에 임명할 수 있는 자들을 의미하였다. 양역변통(良役變通) 당시에는 양역 예비자인 양정으로 아직 군역을 지지 않는 상황, 또는 그런 자들을 가리켰다.
내용 및 특징
한유층은 17~18세기 군역제를 개혁하는 과정에서, 군역의 결원을 채우기 위하여 양정을 확보할 때에 ‘양정(良丁)의 한유자’로 자주 거론되었다. 하지만 이미 조선초기부터 의미가 약간 다르게 사용되기도 하였다. 이때는 향리의 사역을 ‘향역(鄕役)’으로 국역화(國役化)하는 과정에서 1~2년만 역을 지고 일체의 잡역을 면제받아 ‘한가로이 놀고 있는’ 것을 의미하였다[『세종실록』 7년 4월 1일]. 한편 군관 및 시위패(侍衛牌)와 같은 상층 군사가 훈련이나 번을 잠시 서고 평상시에 한유하는 것을 뜻하기도 하였다[『세종실록』 12년 8월 2일].
일반 군역자에 대해서도 한유라는 말이 쓰이는 경우가 있었다. 본래 군정(軍丁)은 군적(軍籍) 상에 정해진 숫자가 있었다. 그런데 사람이 적은 지역은 상대적으로 군적에 군역자의 수[元額]가 많게 기재되어서 한 사람이 여러 역(役)을 겸하게 되고, 사람이 많은 지역은 반대로 군적에서 빠진 누호(漏戶)나 여정(餘丁), 한유(閑遊)한 이가 많았다[『세조실록』 2년 2월 14일]. 정유재란이 일어난 해에는 한유하는 출신(出身)·군관 등을 색출하여 오위(五衛)에 소속시켜 숙위(宿衛)케 하기도 하였다[『선조실록』 30년 4월 17일].
조선전기에 한유는 일반 군병보다 상층의 무리들이 역을 지지 않는 상황을 가리킬 때 많이 사용되었다. 그런 의미에서 한량과 용법상 관련성이 깊다고 할 수 있다.
변천
한량은 관직을 가졌다가 그만두고 향촌에서 특별한 직업이 없이 사는 사람을 가리켰다. 이들은 주로 사족의 자제였다. 이들이 군역에 편제되기도 하였다. 사족 자제로서 경제력이 있으면서 무예를 수련하는 자들에게 일정한 시험을 거쳐 갑사(甲士)직을 제수하였던 것이다. 중종대부터는 그들에게 무과 응시를 허용하였다. 조선후기에는 무예를 잘하여 무과에 응시하는 사람을 뜻하기도 하였다. 또한 ‘한량무학(閑良武學)’이라는 군관 직역도 있었다.
반면 한유는 양역변통 과정에서는 교생과 같은 양반자제를 ‘한유를 오래한 자’로 표현하고 있는 반면에 단순히 ‘무역한유(無役閒遊)’, ‘양정의 한유’로 군역으로부터 빠져 있는 양인 남정을 지칭하기도 하였다.
참고문헌
『각사수교(各司受敎)』
『수교집록(受敎輯錄)』
이준구, 「朝鮮後期의 閑良과 그 地位」, 『국사관논총』 5, 국사편찬위원회, 1989.
한정(閑丁)
정의
16세부터 60세까지의 양민 장정 중에 군역이 부과되지 않은 자.
개설
조선시대의 군역은 본래 16세부터 60세의 양인 남자에게 부과되었다. 그러나 이에 해당되는 사람들 모두에게 군역이 부과된 것은 아니었다. 대개 군현별로 일정한 숫자를 배정하여 그 숫자만큼의 양인에게만 군역을 부과하였기 때문이다. 따라서 고을 안에는 군역이 부과되지 않은 양민 장정이 적지 않았다. 이들을 한정(閑丁)이라고 하였다.
내용 및 특징
군총은 군현 내 양정의 수보다 적게 배정되었다. 그렇기 때문에 당연히 한정이 있기 마련이었다. 문제는 누가 한정이 되고 누가 군정(軍丁)이 되는가 하는 것이었다. 대개 가난하고 힘없는 백성들은 군정이 되고 부유하고 힘 있는 백성들은 한정이 되었다. 그러므로 가난한 군정들이 세금을 내지 못하게 되고 그것이 누적되면 도망하여 여러 가지 문제를 일으켰다.
중앙정부는 군역제의 원활한 운용을 위하여 충분한 한정을 확보하고자 하였다. 충분한 한정을 확보하는 방법은 2가지였다. 한정을 대대적으로 색출해 내거나, 아니면 군총 자체를 줄이는 것이었다.
변천
임진왜란 이후 숙종 초까지는 임진왜란 이전의 군제를 복구하고 새로 신설된 오군영(五軍營)의 군사를 채우기 위하여 한정 색출이 간헐적으로 이루어졌다. 광해군대부터 현종대까지 종종 논의되고 시행되었던 오가작통법(五家作統法)이나 호패법(號牌法)이 바로 이 맥락에서 진행된 일이었다[『현종개수실록』 1년 7월 3일]. 그러나 군역 부담자를 늘리기 위한 이러한 정책은 여러 가지 문제를 불러일으키고 그다지 효과를 거두지도 못하였다. 그래서 숙종 초부터는 군액 감축이 논의되고, 호포론을 시작으로 양역제 자체를 근본적으로 뒤바꾸려는 양역변통론이 대두되기 시작하였다.
참고문헌
김성우, 「조선후기 ‘한유자’층의 형성과 그 의의」, 『사총』 40·41, 1992.
김용섭, 「조선후기 군역제 이정의 추이와 호포법」, 『성곡논총』 제13집, 1982.
정만조, 「조선후기의 양역변통논의에 대한 검토: 균역법성립의 배경」, 『동대논총』 7, 1977.
정연식, 「조선후기 ‘역총’의 운영과 양역 변통」, 서울대학교 박사학위논문, 199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