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서 보내놓고 또 눈시울을 적셨다
- 60 넘으면 한국에 와서 살아야 한다!
지난 3.25(금) 에서부터 4.8(금)까지, 큰 아이 오인이네 식구가 집이라고, 서울에 왔다가 자기들 본거지인 시카고로 돌아갔다. 2주 동안, 서울에 머물면서 그런대로 이번에는 의미 있는 방문이었다.
시골인 고향 아산에서의 선산 방문, 그리고 4촌, 6촌 및 가까운 친구들과 외갓집 식구들과 오인이의 40회 생일축하 별도저녁, 그리고 동해안 속초에서의 2박 3일이 어떻게 지나갔는지 모를 정도로 지나갔다. 동반한 꼬맹이 선이와 선영이가 하나뿐인 4촌 준혁이와 친교, 한 차에 아이들만 태우면, 떠들어 대고 소리를 지르는 바람에 시끄러워서 운전할 수가 없었다.
그렇게 피붙이라고 서로들 좋아했다. 그것이 인생이거늘! 아이들이 떠난다고 하여 금 8일 또 눈시울을 붉히었다. 이를 본 집사람이 “얼씨구! 저 사람 좀 보게나! 저게 요즈음 보통 하는 일 예요. 저 사람이 왜 저러는지 모르겠어요!” 라고 말 하는 것 같았다.
그래서 얼른 돌아섰다. 무엇보다도 손녀, 선이와 선영이가 예뻤고, 헤어지는 것이 싫었다. 자기들 4촌인, 만 5살 박이, 준혁이가 말하는 것처럼 “귀여웠다” “그런데 그런 표현도 못하고 눈물만 흘리는 나는 무엇이란 말인가?” 생각해 보면 65세가 넘은 한심한 영감이었다. 할아버지로서 아이들 눈엔 내가 그렇게 비추어 지지 않았을까?
지난 번에도 오인이의 유학생활 등 교육문제에 관하여 몇 마디 하였지만, 큰 놈에 관하여 일반적으로 아버지의 생각은 좀 달랐다. 나도 그랬다는 이야기이다. 서울에서 1차를 떨어져, 2차로 외대를 다니다가 군대에 간 녀석이, 학교를 서울에서 다 마치기도 전에 미국에 유학하여야 되겠다고 말하여, 본인이 희망하던 건축분야를 공부시켰던 것이고, 한국에서 10 살 된 꼬마로 엄마의 손을 잡고 미국에 이민 간 며느리 수진이를 우연히 만나 결혼하여 시카고에 살림을 차린 것이다.
생각해 보면 큰 녀석의 팔자는 제가 타고나는 모양이었다. 며느리의 수입이 좋아서 아버지인 나와 공부를 잘하던 제 동생 등, 우리 3부자 중 가장 잘 살았다! 그리고 건축설계 부분에서는 일가견이 있어, 탄탄대로를 걷고 있단다. 미국사람들도 못 쫓아온단다. 그래서 대견해 보였다! 120 킬로로 체구가 커서 그런 것만은 아니었다. 큰 아들이기 때문이다?
Say in English! I could not speak in English. 손녀 선이, 선영이 와 의 대화 내용이다.
나는 최소한 2가지 언어는 하여야 한다고 계속 주장하였고, 아이들은 제가 편하자고 영어로 이야기를 하라는 것이다. 턱도 없는 이야기였다. 그러나 우리는 마음과 뜻이 통하였다. 얼굴을 비비고 손을 마주치면서 뜻이 통하였다. 그렇게 우리는 한 식구였다. 단지 한 가지 나쁜 것이 있다면 내가 곧 잘 눈물을 흘리는 것이었다. 남자들이 나이를 들면서 여성 Hormone 이 많이 나와서 그런지, 원!
준혁이도 서울에서 고등학교를 마치면 미국으로 갈 것이다. 이때부터는 큰 녀석이 꼬마들의 부모책임을 맞을 것이다. 물론 큰 아들이 아버지 노릇을 한다는 한국의 장자개념을 이때부터 미국사람들도 잘 알아야 할 텐데! 그래야만 준혁이의 교육이 수월해 질 텐데! 매 주일 아침 미사시간에 “한국에서 준혁이가 지도자로 커 나갈 수 있도록 지혜와 슬기, 용기와 건강을 주십시오. 그리고 선이와 선영이도 미국에서 지도자가 될 수 있도록 지혜와 용기 및 건강 등을 주십시오. 그래야만 한. 미간의 협조로 우리 한반도에서 6.25와 같은 동족상잔의 전쟁이 다시는 일어나지 않습니다!” 라고 매번 기도를 올리고 있었다. 우리 집사람 말마따나, 이것도 병일까?
그리고 Chicago라는 특수성을 인정하여 큰 녀석에게 건축기사로서의 실력이 인정되어, 앞으로의 전망이 밝다면, 온양에 세워질 “한국 현대외교전시관”에 큰 녀석 오인 이와 둘째 녀석 오중이가 함께 참여하여 “우리 땅에 오인 이가 설계한 건물이 들어서고, 교육용 전시관이 번창하기를 내가 지금 빌고 있다면, 이도 사치일까?”
그래서 세계적인 명성을 얻은 오인 이가 60이 넘어 한 해에 몇 번씩 한국에 나오는 구실을 마련해야 될 것 같았다. “미국에서는 문제가 없다니, 한국의 건축기사로서 다시 태어나는 것이다” 나는 꿈꾸듯, 공항에서 손녀 꼬맹이들의 Good-bye 소리도 못 듣고 있었다. 그래서 보내놓고 또 눈시울을 적셨다, 끝.
첫댓글 그때까지 저희들이 너무 늙어 버리면 어쩌지요?
기술이 필요한 직업이니까, 다르겠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