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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 초등학교 교사
고 향
이 옥 영
7월8일 월요일 오전 동생에게서 전화가 왔다.
강원도에 사시는 친정 큰고모님께서 돌아가셨다는 전화였다.
9일 오전 6시 30분에 출발약속을 하고 나는 바빠졌다. 미장원에 가서 머리 손질도하고, 염색도하고 입고갈 옷 준비도하고, 몇해 만에 만나는 친척, 형제들인데 체면은 잘 갖춰야하니까.
출근 시간대를 피해서 일찍 출발한 덕에 강원도 철원까지 거의 5시간만에 도착했다.
우리 큰고모는 93세로 아버님 형제분 칠남매 중의 첫째이시다.
3년전 84세로 동갑이셨던 부모님께서는 어머니께서 두달정도 편찮으시다가 돌아가시고 꼭 두달 이틀만에 건강하시던 아버지께서 돌아가셨다. 상중인 와중에도 두분이 정말 사랑하시고 천생연분이라는 위로의 말을 들었다.
그리고 큰고모가 형제분중 두 번째로 돌아가신 것이다. 고모부는 한 이십년 전에 돌아가셔서 함께 해로는 못하셨지만 복노인 인것같다. 그 나이대의 대한민국 국민이면 고생안하신 분이 있겠는가?
철원평야에서 부농으로써 큰 오빠는 철원군수를 두차례, 8년간 지내시고 지난 7월 1일에 후임 군수에게 자리를 인계하셨다. 그러니까 아드님이 군수를 그만둔지 7일 만에 정말 편안히 천수를 다 하신것이다. 이야기를 들어보니 돌아가시기 며칠 전부터 몸이 조금 무겁다는 말씀외에는 평소와 같이 생활하셨는데, 돌아가신 아침에는 늦도록 일어나지를 않으셔서 이상히 여겨 방에 들어가 보니 반듯이 누우신채로 고통의 흔적도 없이 그냥 잠드신 모습 그대로 천수를 다하셨다고 했다.
장례식장은 호상이라 분위기가 좋았다.
그런데 고모님의 사진을 보는 순간 나는 소리내어 울고 말았다. 몇십년만에 뵙는 사진속의 고모 얼굴인데..... 이것이 혈육의 정이란 것인가?
옛날 6.25사변때 고모네는 대구로 피난을 오셔서 우리 집 근처에 몇 년간 사셨다. 그때 고모는 삯바느질로 생계를 도왔다. 남은 헝겊조각으로 고모는 리본을 만들어 내머리에 꽂아 주시면서
"아이고,우리 예쁜이 리본꽂으니까 더 예쁘네.” 하시며 웃으시던 그 모습, 고운 비단을 이어서 동그랗게 꽃모양으로 만든 그 리본을 나는 지금도 기억한다.
"우리 고모님 함자가 이교이 여사님 이네”
"그래,우리엄마 이름 요즘에 봐도 아주 세련되고 신경써서 지은 이름이야.”
"'내 이름자에 교자가 들어갔는데 너는 선생님을 계속하라’고 말씀하셨지. 그런데 나는 선생 몇 년하고 그만뒀어 하하하.”
"그리고 우리외가 DNA는 굉장해, 남은 형제 다섯분이 다 건제하시니.” 말씀하시는 오빠의 모습은 70세의 노 행정가가 아니라 가슴으로부터 나오는 어머니에 대한 사랑과 추억을 어린동생들에게 이야기하는 18세 소년의 모습이었다.
그날 오빠가 장례식장 밥 안먹이고 고기 사주던데 강원도 소고기값 대단했다. 200g 1인분에 4만 5천원, 고기맛도 좋았고 부자니까 마음놓고, 신경 안 쓰고 남기기까지 하면서 잘 먹었다.
내 친할머니의 산소는 철원 민통선 안에 있다. -내가 태어나기 전에 돌아가셨고 우리 집안의 고향은 경주 안강인데 할아버지께서 솔가를 하여 강원도에 터를 잡고 사시다가 전쟁으로 인하여 전재산을 다 버려둔 채 대구로 피난 오셔서 우리집안은 대구에 계속 눌러 살았고
고모네는 몇 년 후 다시 강원도로 가셔서 재산도 찾고 집안을 일으키셨다.-
친할머니 산소 찾아 가는길, 막내 숙부와 나, 내 남동생, 나는 처음길이다. 민통선 안에 제2땅굴을 지나 개망초꽃이 흐드러지게 핀 들을 지나, 준비해 간 간단한 제물을 놓고 절을 올렸다.(산소는 큰고모네가 관리하신다.)
"할머니, 여기 계시지마시고 극락왕생하십시오.”
부산에 사시는 막내고모가 나에게 몇 번이나 한 이야기
"옛날 우리가 살던 집에는 보라색 나팔꽃이 담장주위에 많이 피어 있었는데 그 집터는 밭으로 변했지만 그 자리에 여전히 보라색 나팔꽃이 피어있더라.”고모는열살 때 피난을 나왔으니 다 기억하지....
나도 밭둑들에서 보라색 나팔꽃을 찾아보았지만 못 찾았다. 나는 집터 자체의 위치를 모르니까.
내 아버지 형제분들의 고향과 우리국토의 거의 국경(휴전선)까지 갔다는 기분, 그것을 생각하면 나는 가슴이 다시금 설레이고 흥분된다.
2014년 7월 15일
출근길
이 옥 영
나는 1971년 3월 2일에 첫 출근을 했다.
동해안 바닷가의 소도시(?), 면 소재지.....
면사무소, 은행, 우체국, 등 등 모두 다 갖춰 있고, 밀려오는 파도소리가 24시간 들리고, 해송이 방풍림으로 해안가에 빼곡하고, 봄이면 온 동네가 꽃으로 뒤덮이고, 길이며 집들이 너무나 깨끗한 동네. 바닷가의 검은 조약돌이 별처럼 반짝이는, 깨끗한 하천이 흐르고 햇볕이 눈부신 마을.
그러나 전기는 들어오지 않았고, 버스는 하루에 몇 차례 밖에 다니지 않았고, 장작불을 때야하고, 집과의 거리는 자동차로 두시간 반 거리.
아무리 경치가 아름다우면 무엇하랴.....
도시에서 태어나고 대학졸업 할 때까지 시골이라고는 한번도 살아보지 않았고, 젊은 엄마의 맏딸로 밥 한번 해보지 않았던 내가 2년간을 다른 사람이 보면 동화 같은 풍경 속에서 내 딴에는 인고하는 마음으로 출근했다.
그리운 가족도, 친구도, 너무나 익숙한 도시생활과도 멀어진 채.
2년 후, 기차역이 있고, 과수원으로 둘러싸인 시골로 전근을 했댜. 봉이면 사과 꽃, 배 꽃등으로 둘러싸인 그림 같은 마을, 전기도 들어오고 집과의 거리는 차로 1시간 30분의 거리,
그곳에 3월에 부임하여 여름방학 마치고 9월에 사표를 냈다. (의원면직)
나는 시골에서 출근을 그만하여도 되었다. 결혼을 한 것이다. 그 다음 부터는 신랑 출근 시켰다. 두 아이 낳고 큰 아이가 6살 때까지 7년간 도시에서만 살았다. 시골생각은 전혀 안했다. 그립지도 않았고 생각할 여가도 없었다.
살림살고 아이들 키우면서 저 아이들이 조금만 더 크면 무언가 해야겠다고 내 딴에는 계획을 세우고 있을 때, 부산 직할시 교육위원회에서 ‘초등교사 채용고시’공고가 있었다. 꼭 10년 만에 있는 일이란다. 나는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원서를 냈고, 열심히 공부해서 우수한 성적으로 합격했다.(합격하면 누구나 우수한 성적이라고 한다.)
1980년 3월 2일 나의 두 번째 첫 출근일.(그전에 며칠간 사전 연수를 받았다.)
몇 년 만의 출근인가? 그것도 대도시에서, 날아 갈 것 같은 그 기분, 지금도 어제 일처럼 떠오른다. 차창으로 들어오는 바람은 또 얼마나 상쾌하던지, 차를 내려 교문으로 들어가려 하니 벌써 길에서부터 인사 한다, 학생들이 선생님 알아보고. 운동장은 먼지 안 나게 물을 뿌려두어 상쾌했다,
바쁘지만, 정말 바쁘지만 (1인 3역의 생활), 든든하고 미더운 출근길 이었다.
그 때 내가 근무한 학교는 부산시 영도구에 위치했는데 근무한지 4년 뒤에 가까이에 대단지 아파트가 들어서게 되어 분양을 받았다. 그 당시 부산의 영도구는 구정목표가 구 전체의 공원화여서 경치가 좋았다. 그래도 우리가 살던 곳은 도심이라 복잡 했는데 새로 생긴 아파트는 경관이 좋았다.
집에서 학교 가는 출근길, 두 갈래 길이 있었다. 한쪽은 차로 가는 거리만 10분, 다른 한쪽은 15분, 나는
15분을 택했다.(주부교사로써 아침시간 5분은 적은 시간은 아니다.)
새로 이사 간 곳은 영도 중 에서도 경치가 아주 좋은 곳이었다. 거기서 학교 가는데 10분을 택하면 3분정도 좋은 경치를 지나면 도심으로 들어갔고, 15분을 택하면 10분정도 영도구 동삼중리의 빼어난 경치를 감상하고 출근할 수 있다.
요즘은 모르겠으나 그 당시는 동삼중리는 청정해역이어서 미역, 김 등의 양식장이 있고 해안가는 아름다운 경치가 펼쳐진다. 거기댜 버스기사 아저씨 항상 음악을 틀어주니 출근길이 무슨 관광버스 탄 기분 이었다
이른 봄이면 해안가 목련 나무에 찬 기운을 헤치고 정말 청아한 백목련이 어김없이 피었다. 버스에 탄 사람 모두에게서 동시에 나오는 탄성
"벌써, 목련이 피었네! 곱기도 해라!” 그러나 그 고운 목련은 얼마를 견디지 못했다.
어느새 심술꾸러기 찬 서리가 내려 며칠 지나지 않은 아침에는 그 아름답던 모습이 누렇게 절여져 있었다.
모두의 입에서 나오는 말
"그놈의 서리, 그놈의 꽃샘...!”
이 모두가 자연의 순환이겠으나 이것도 인간사에 비유하여 고운 것에 대한 시샘이라고 예쁘게 이름 지으신 우리 조상님... 그리고 또 며칠 후면 목련 나무는 꽃은 벌써 잊은 듲 여린 잎새를 내 놓으며 지나가는 사람들의 눈길을 즐겁게 헸다.
그렇게 부산에서의 출근길 9년 후
나는 원에 의하여 대구로 전근을 왔다. 아이들도 커서 중학생들이니 아무래도 고향으로 가는것이 좋겠다는 판단에서다.
대구에 와서도 부지런히 출근했다.
세월은 흘렀다. 집의 아이들이 내 손길이 좀 뜸해도 될 때가 되었을 때 나는 출 퇴근 시간에 걷기로 했다. 출근길 40분, 퇴근길 40분, 합쳐서 80분이면 하루 운동은 될 것 같았다.
부지런히 걸어서 출근, 퇴근했다. 큰길 보다는 먼지가 덜 나는 골목길, 샛길, 지름길 등등으로
퇴직하기 전 8년간, 두 학교 근무하는 동안 대구의 아름다운 길 따라 거의 매일 걸었다. 따로이 운동시간을 낼 필요도 없고, 차비도 절약하고, 그런데 신발이 좀 잘 닳았다.
요즘 살고 있는 집으로 이사 온 후로 출근길이 더욱 아름다워졌다. 집에서 나와 삼성생명 빌딩을 지나 MBC네거리, 동부 정류장, 한전 동부지점, 효목 네거리까지는 대구가 자랑하는 벚꽃길이 아닌가? 나는 그 길 따라 한전 동부지점에서 좌회전 하는 곳까지...
봄이 되면 꽃망울이 맺힐 때부터, 꽃이 만발하고, 눈꽃이 내리고, 잎이 나올 때 까지 나의 출근길은 꽃 잔치, 꽃 터널이었다.
나는 요즘도 걷는다. 운동하기 위해서, 또 연금 아카데미에 갈 때, 집에서 나와 신천둔지 돌다리를 지나 수성교로 올라가서 연금공단으로, 빠르게 걸으면 편도 40분, 천천히 걸으면 1시간.
앞으로도 나의 출근길은 계속될 것이다.
2014년 10월 8일
교단 에피소드
이 옥 영
나는 34년 2개월 동안 초등학교 선생님으로 교단에서 아이들을 가르쳤다. 그 생활 중에 있었던 몇가지 이야기를 적어보겠다.
이야기 하나; 나는 초임 첫해에 2학년을 담임했다. 그 2학년 과정 중에 ‘모내기’라는 단원이 나온다. 거기 삽화도 생생하게 떠오른다. 아기를 업고 점심광주리를 머리에 인 엄마와 주전자를 들고 따라가는 아이.
교과서 첫줄이 ‘오늘은 우리 집 모를 찌는 날이다.’ 나는 처음 듣는 말이다. 모를 찌다니 논바닥 어디에서 불을 때서 찐다는 말인가? 내가 아는 찐다는 말은 찜 솥에 채반을 넣고 고구마등을 찐다던가, 푹푹찌는 더위 등등.......
참고서 어디에도 모를 찐다는 말의 설명은 없었다. 정말 난감했다. 에라 모르겠다 부딪혀 보자. 국어 시간에 교과서를 펴는 순간, 아이들이 다 말해줬다. 시골 아이들은 다 알고 있었다. 원 참, 내가 선생인지, 배우려온 학생인지........
이야기 둘; 국어 글짓기 시간 제목은 ‘가족’에 대하여 써 보라고 했다. 어떤 아이의 글 제목 ‘우리가족 포비(개이름)’ -우리 포비는 나를 무척 좋아하고, 내가 학교에서 돌아오면 항상 나를 반겨 주었다. 그런데 며칠 전 뭐가 먹고 싶은지 쓰레기통을 뒤지고 있었다. 나는 화가 나서 억지로 집으로 끌고 왔다. 어제는 용돈을 아껴서 포비에게 줄 쥐포를 1마리 사가지고 집으로 갔다. 그런데 포비가 보이지 않았다.
“엄마, 포비는?”
“개소주.........”
“............................”
이야기 셋; 일기장 검사를 했다. 어느 녀석의 일기가 기억에 남는다. 참고로 이 아이는 병원집의 위로 누나 셋 있는 넷째 외아들이다. -오늘은 엄마의 생일이다. 누나들은 모두 엄마께 선물을 했는데 나만 쏙 빠져서 미안했다. 그래서 엄마께 선물대신 300원을 드렸다. 엄마가 고맙다고 하며 아주 좋아하셨다. ‘나는 아깝다.’
이야기 넷; 부산 영선초등학교에 근무할 때 학교 근처에 보건소가 있었다. 보건소 에서는 여름이 시작되면 항상 제한된 몇 명분의 뇌염예방주사를 무료로 접종해 주었다. 그 기간에 맞춰서 빨리가면 무료로 맞을 수 있다. -우리 반 아이 한 녀석이
“선생님, 뇌염 예방주사 공짜로 맞았는데요.”
“오, 그래! 좋아 오늘 숙제는 공짜 뇌염예방주사 맞기다. 내일 검사한다.”
“예!!!!!”
이튿날 우리 반 숙제는 모두 다 잘 해왔다...-
이야기 다섯; 우리 반에 말썽꾼 한명이 있었다. 힘이 세서 친구를 건드리고, 공부시간에는 떠들고 그런데 같이 근무하던 선생님의 아들이다. -어느 날 조용히 녀석을 불렀다.
“너, 어떡 할래 이렇게 공부도 못하고, 친구만 괴롭히니 이제 니엄마는 선생님 못하겠구나. 자기 자식이 이렇게 말썽꾼인데 어떻게 다른집 아이들을 가르칠 수가 있겠니?” 이녀석 내 앞에서 눈물을 줄줄 흘리며 울었다. 그후 2학기 때 그놈 반장했다.-
나에게는 추억의 보물단지가 너무 많다. 화수분처럼, 꺼내도 꺼내도 자꾸만 나올것같다. 하지만 아껴서 조금씩 꺼내야지..........
2014년 10월 28일
첫댓글 재밌게 잘 읽었습니다. 최상순드림
재미있게 읽어주셔서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