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해 한용운 심우장은 한용운이 1933년부터 1944년까지 만년(晩年)을 보내다가 세상을 떠난 곳이다. 대지의 동쪽으로 난 대문을 들어서면 왼편인 남쪽에 한옥으로 지은 심우장이 북향하여 서 있고, 대문 맞은편에는 벽돌조 단층으로 지은 관리인 주택이 심우장과 직교하며 동향으로 서 있다. 한용운은 충청남도 홍성 출신으로 본관은 청주(淸州), 본명은 정옥(貞玉)이다. 용운(龍雲)은 법명이며, 만해(萬海, 卍海)는 아호이다. 만해는 1919년 승려 백용성(白龍城) 등과 불교계를 대표하여 독립선언 발기인 33인 중의 한 분으로 참가하여 <3·1독립선언문>의 공약 삼장을 집필한 분으로 유명하다. 처음 설악산 오세암에 입산하여 승려가 되었다가, 시베리아와 만주를 순력한 후 28세 때 다시 설악산 백담사로 출가하여 정식으로 승려가 되었다. 1910년에는 불교의 변혁을 주장하는 ≪조선불교유신론≫을 저술하였고, 1926년에는 근대 한국시의 기념비적 작품인 ≪님의 침묵≫을 펴낸 뒤 민족운동단체인 신간회에 가담하였으며, 1931년에는 조선불교청년동맹을 결성하였다. 이곳 성북동은 원래 성밖 마을 북장골, 한적한 동네였다. 만해는 3·1운동으로 3년 옥고를 치르고 나와 성북동 골짜기 셋방에서 어려운 생활을 하고 있었다. 그 때 승려 벽산(碧山) 김적음이 자신의 초당을 지으려고 준비한 땅 52평을 내어주자 조선일보사 사장 방응모 등 몇몇 유지들의 도움으로 땅을 더 사서 집을 짓고 '심우장'이라고 하였다. '심우'는 선(禪) 수행의 단계를 소와 목부(牧夫)에 비유하여 열 폭의 그림으로 그린 심우도(尋牛圖, 일명 十牛圖ㆍ牧牛圖)의 첫 번째 그림으로 소를 찾는 동자가 산 속을 헤매는 모습을 초발심의 단계에 비유한 내용이다. 한용운의 아호 중에는 '목부'가 있는데, 이는 소를 키운다는 뜻을 가졌다. '목부'는 '심우'와 같은 뜻으로, '심우장'의 '심우'란 소를 사람의 마음에 비유하여 잃어버린 나를 찾자는 뜻을 가졌고, '심우장'은 불교의 무상대도(無常大道)를 깨우치기 위해 공부하는 집, 즉 공부하는 인생을 의미한다. 만해의 <심우장> 시는 그의 수양의 경지를 보여주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잃은 소 없건마는, 찾을 소 우습도다. 만일 잃을시 분명타면, 찾은들 지닐소냐. 차라리 찾지 말면, 또 잃지나 않으리라. 그는 이 곳에서 1934년 첫 장편소설인 ≪흑풍(黑風)≫을 집필하여 조선일보에 연재하기도 하였다. 심우장은 북향한 산비탈에 집을 지었는데, 그 이유는 한용운이 남향하고 있는 조선총독부 청사를 보기 싫다 하여 등을 돌려 북향〔丁坐癸向〕한 집을 지었다고 한다. 정면 4칸, 측면 2칸의 역(逆)'ㄴ'자형 평면으로 된 건물로, 중앙에 대청 2칸을 두고, 왼쪽인 동쪽에는 서재로 쓴 '심우장' 온돌방 한 칸을 두었고, 오른쪽으로는 부엌 1칸이 있으며, 부엌에서 남쪽으로 꺾여 나간 곳에 찬마루 1칸이 있다. 대청과 온돌방은 반자틀 천장이고, 부엌과 찬마루 사이는 벽이 없이 트였으며, 삿갓천장을 하여 서까래를 노출시켰다. 대청과 부엌 북쪽으로는 창문을 단 툇마루를 놓았고, 온돌방의 북쪽에서 동쪽·남쪽을 돌아가는 대청 남쪽과 찬마루 동쪽으로는 쪽마루를 놓았으며, 온돌방 남쪽 마당에는 굴뚝이 서 있다. 외벌 화강석 댓돌을 돌려 조성한 기단 위에 선 단층 팔작지붕의 한옥으로 민도리 소로수장집인데, 정면인 북쪽은 겹처마이고, 남쪽은 홑처마이다. 한용운이 서재로 쓰던 온돌방 밖 북쪽에는 위창(葦滄) 오세창(吳世昌)이 전자체(篆字體)로 쓴 '尋牛莊(심우장)'이 걸려 있다. 한용운이 서재로 사용하던 당시에는 이당(以堂) 김은호(金殷鎬)의 포대화상(布袋和尙) 그림, 일주(一洲) 김진우(金振宇)의 대나무 그림(竹畵), 석정(石丁) 안종원(安鐘元)의 글씨 등 족자가 걸려 있었고, 중국판 불경 등 수백 권의 장서가 보관되어 있었다고 한다. 현재 심우장은 대청마루와 온돌방에 한용운 관련 자료를 전시하고 있는 기념관으로 사용되고 있다. 대문 안 바로 왼쪽에는 소나무, 오른쪽에는 은행나무 한 그루가 각각 서 있고, 그 오른쪽 모서리에는 만해가 손수 심은 향나무 한 그루가 서 있다.
주변의고궁및 건축물 만해한용운심우장 인기멤버 mapooh67 카페매니저 1:1 채팅 2009.12.17. 14:02조회 16 댓글 0URL 복사
만해한용운심우장 萬海韓龍雲尋牛莊 |
| ▒ | 지정번호 | : | 서울특별시 기념물 제7호 |
| ▒ | 지정연월일 | : | 1984년 7월 5일 |
| ▒ | 시 대 | : | 1933년 |
| ▒ | 규모·양식 | : | 대지 374㎡(112.99평), 건평 52㎡, 단층 팔작기와지붕 |
| ▒ | 재 료 | : | 석조 기단, 목조 |
| ▒ | 소 유 자 | : | 성북구청 |
| ▒ | 소 재 지 | : | 서울특별시 성북구 성북동 222-1, 2 (심우장길 16) | | 만해 한용운 심우장은 한용운이 1933년부터 1944년까지 만년(晩年)을 보내다가 세상을 떠난 곳이다. 대지의 동쪽으로 난 대문을 들어서면 왼편인 남쪽에 한옥으로 지은 심우장이 북향하여 서 있고, 대문 맞은편에는 벽돌조 단층으로 지은 관리인 주택이 심우장과 직교하며 동향으로 서 있다. 한용운은 충청남도 홍성 출신으로 본관은 청주(淸州), 본명은 정옥(貞玉)이다. 용운(龍雲)은 법명이며, 만해(萬海, 卍海)는 아호이다. 만해는 1919년 승려 백용성(白龍城) 등과 불교계를 대표하여 독립선언 발기인 33인 중의 한 분으로 참가하여 <3·1독립선언문>의 공약 삼장을 집필한 분으로 유명하다. 처음 설악산 오세암에 입산하여 승려가 되었다가, 시베리아와 만주를 순력한 후 28세 때 다시 설악산 백담사로 출가하여 정식으로 승려가 되었다. 1910년에는 불교의 변혁을 주장하는 ≪조선불교유신론≫을 저술하였고, 1926년에는 근대 한국시의 기념비적 작품인 ≪님의 침묵≫을 펴낸 뒤 민족운동단체인 신간회에 가담하였으며, 1931년에는 조선불교청년동맹을 결성하였다. 이곳 성북동은 원래 성밖 마을 북장골, 한적한 동네였다. 만해는 3·1운동으로 3년 옥고를 치르고 나와 성북동 골짜기 셋방에서 어려운 생활을 하고 있었다. 그 때 승려 벽산(碧山) 김적음이 자신의 초당을 지으려고 준비한 땅 52평을 내어주자 조선일보사 사장 방응모 등 몇몇 유지들의 도움으로 땅을 더 사서 집을 짓고 '심우장'이라고 하였다. '심우'는 선(禪) 수행의 단계를 소와 목부(牧夫)에 비유하여 열 폭의 그림으로 그린 심우도(尋牛圖, 일명 十牛圖ㆍ牧牛圖)의 첫 번째 그림으로 소를 찾는 동자가 산 속을 헤매는 모습을 초발심의 단계에 비유한 내용이다. 한용운의 아호 중에는 '목부'가 있는데, 이는 소를 키운다는 뜻을 가졌다. '목부'는 '심우'와 같은 뜻으로, '심우장'의 '심우'란 소를 사람의 마음에 비유하여 잃어버린 나를 찾자는 뜻을 가졌고, '심우장'은 불교의 무상대도(無常大道)를 깨우치기 위해 공부하는 집, 즉 공부하는 인생을 의미한다. 만해의 <심우장> 시는 그의 수양의 경지를 보여주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잃은 소 없건마는, 찾을 소 우습도다. 만일 잃을시 분명타면, 찾은들 지닐소냐. 차라리 찾지 말면, 또 잃지나 않으리라. 그는 이 곳에서 1934년 첫 장편소설인 ≪흑풍(黑風)≫을 집필하여 조선일보에 연재하기도 하였다. 심우장은 북향한 산비탈에 집을 지었는데, 그 이유는 한용운이 남향하고 있는 조선총독부 청사를 보기 싫다 하여 등을 돌려 북향〔丁坐癸向〕한 집을 지었다고 한다. 정면 4칸, 측면 2칸의 역(逆)'ㄴ'자형 평면으로 된 건물로, 중앙에 대청 2칸을 두고, 왼쪽인 동쪽에는 서재로 쓴 '심우장' 온돌방 한 칸을 두었고, 오른쪽으로는 부엌 1칸이 있으며, 부엌에서 남쪽으로 꺾여 나간 곳에 찬마루 1칸이 있다. 대청과 온돌방은 반자틀 천장이고, 부엌과 찬마루 사이는 벽이 없이 트였으며, 삿갓천장을 하여 서까래를 노출시켰다. 대청과 부엌 북쪽으로는 창문을 단 툇마루를 놓았고, 온돌방의 북쪽에서 동쪽·남쪽을 돌아가는 대청 남쪽과 찬마루 동쪽으로는 쪽마루를 놓았으며, 온돌방 남쪽 마당에는 굴뚝이 서 있다. 외벌 화강석 댓돌을 돌려 조성한 기단 위에 선 단층 팔작지붕의 한옥으로 민도리 소로수장집인데, 정면인 북쪽은 겹처마이고, 남쪽은 홑처마이다. 한용운이 서재로 쓰던 온돌방 밖 북쪽에는 위창(葦滄) 오세창(吳世昌)이 전자체(篆字體)로 쓴 '尋牛莊(심우장)'이 걸려 있다. 한용운이 서재로 사용하던 당시에는 이당(以堂) 김은호(金殷鎬)의 포대화상(布袋和尙) 그림, 일주(一洲) 김진우(金振宇)의 대나무 그림(竹畵), 석정(石丁) 안종원(安鐘元)의 글씨 등 족자가 걸려 있었고, 중국판 불경 등 수백 권의 장서가 보관되어 있었다고 한다. 현재 심우장은 대청마루와 온돌방에 한용운 관련 자료를 전시하고 있는 기념관으로 사용되고 있다. 대문 안 바로 왼쪽에는 소나무, 오른쪽에는 은행나무 한 그루가 각각 서 있고, 그 오른쪽 모서리에는 만해가 손수 심은 향나무 한 그루가 서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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