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교육태도에 대한 소고(小考)
얼마 전부터 우리 집에 로타리 교환학생 프로그램으로
17살짜리 프랑스 아이가 약 10개월 여정으로 머물고 있다.
우리 아이도 17살짜리 고등학교 1학년 학생이어서
우리 아이의 영어 실력 향상에도 도움이 될 것 같기도 하고,
먼 나라 친구 하나 사귀어 놓으면 나중에 어떤 도움이라도 생길까 해서
그 프랑스 아이를 받아들였다.
프랑스 아이는 겸손하고 착해 보였으나 생각보다는 소극적으로 보였다.
아이의 아버지는 프랑스의 소도시에서 마취과의사로 어머니는 학교 교사로 일한다고 했다.
왜 한국을 선택해서 오게 되었냐는 질문에 원래는 네팔에 가고 싶었는데
‘한국’으로 배정이 되었다고 하면서,
자신은 몽고나 사무라이 문화 등과 같은 아시아 문화에 관심이 많다고 답을 했다.
우리 집에서는 그 아이에게 동네에 있는 고등학교에
청강생으로 다닐 수 있도록 주선을 해 주었고,
학교에서도 도우미학생들과 전담 선생님을 배치해서 아이를 도와주려고 노력하는 것 같았다.
2~3주 지나면서 아이는 우리 생활에 점점 더 잘 적응하기 시작하는 것 같았는데
이 아이는 우리의 기대에 조금씩 어긋나기 시작했다.
오후 5시쯤 학교에서 돌아오면(청강생이어서 야간자습은 하지 않는다) 책가방을 내팽개치고는
컴퓨터 앞에 앉아 온라인게임에 몰두하거나
유튜브에 접속해서 동영상을 보는 일만 하는 것이다.
주말에 틈을 내어 수원의 화성행궁, 무예24기 공연과 근처박물관에도 데리고 다녔는데
억지로 따라다니는 듯한 표정이었고 공연이나 전시에는 도통 관심이 없어 보였다.
그러면서 덧붙이는 말은 이런 것이었다.
“루브르 박물관에 가보셨어요? 일주일을 보아도 다 못 볼 거예요.
7월 달에 미국 라스베이거스에 갔었는데 날씨는 섭씨 45도가 넘는 지옥이었지만 환상적이었어요.
21살이 되면 다시 라스베이거스에 꼭 갈 거예요.
카지노에는 21살이 되어야 들어갈 수 있거든요.”
환장할 일이다.
그 말을 들으면서 속으로 생각했다.
‘너도 내 아들과 똑같이 아무 생각 없는 17살 사내놈이구나.’라고.
며칠 전 정신과동기인 친구를 만났다.
그 친구에게는 현재 중학교 3학년 아들과 중학교 1학년인 딸이 있다.
그 친구는 아들이 초등학생 때 2년간 가족을 싱가포르로 보내서 조기 유학을 시켰었다.
2년간 기러기 아빠였던 셈이다.
귀국한 아들은 한국에서도 잘 적응했는데
중학교에 진학하면서 짜증스러워지고 쉽게 화를 내는 등
약간의 우울증세가 보이면서 성적도 떨어지더라는 것이었다.
이유를 물어보니 방과 후에 다녀야 하는 학원, 과외 등
꽉 짜인 생활에 스트레스를 크게 받고 있더라는 것이다.
그러면서 한국에서 고등학교를 다니기는 너무 싫다고 자기를 유학을 보내달라고 요구했단다.
반복적인 아이의 요구에 하는 수 없이 모든 사교육을 중단시켰고,
유학에 대해서는 약속을 했다고 한다.
“네가 혼자 열심히 공부해서 전교 10등 안에 들면 유학을 보내주마”라고.
그런데 그 이후 그 아들은 중학교 2학년 때부터 성적이 오르기 시작하더니
그 해 기말시험에서는 전교 2등을 했다고 한다.
결국 하는 수 없이 약속대로 미국의 한 소도시에 있는 기숙형 학교에 아이를 유학시켜야 했다.
올여름 1년 만에 아이를 만나러 갔을 때
아이는 백인, 흑인, 중국인 등 다양한 인종의 친구들과 어울리며,
럭비와 야구를 즐기는 활기찬 아이로 변해 있었고,
학교에서도 인정받는 거의 최상위의 성적을 유지하고 있었다고 한다.
친구는 아이의 변화에 흡족해 하면서도
한 편으로는 걱정이 되는 면이 있다고 한다.
“한국 애들은 지금도 밤낮없이 책상에 앉아 공부만 하는데,
우리 애는 학교에서만 공부하고 그 외 시간에는 스포츠를 하거나 놀기만 하는데...
이게 잘하는 짓인지 아닌지 모르겠어...”
아이들은 우리가 원하는 방향대로 성장하지 않는다. 결코!
세상의 부모들, 교육학자, 교육자들에게는 참 미안한 말이지만
우리는 교육을 통해 아이들의 뇌 속에 아름다운 그림을 그려 넣거나,
논리적인 사고력이나 창의력을 집어넣어 줄 수 없다.
신생아의 뇌는 백지 상태로 태어나는 것이 아니다.
이미 유전자에 코딩된 설계도를 바탕으로
대강의 밑그림이 그려진 상태에서 세상에 태어나는 것이다.
그 밑그림의 세부 구조를 구체화 시키는 것은 물론 환경과 뇌의 상호작용을 통해서이다.
아이에게 제공되는 환경도 뇌의 발달에 매우 중요한 부분이며,
그 중 적절한 교육도 환경의 가장 큰 부분 중의 하나라는 것도 사실이다.
문제는 아이의 뇌 스스로가 환경적 자극을 받아들이느냐 아니냐를 결정할 뿐더러,
그리고 자극을 매우 자의적으로 해석하여 긍적적 자극으로 또는 부정적 자극으로 결정해버린다는 것이다.
같은 '사랑의 매'라도 어떤 아이에게는 득이 될 수도 있지만, 다른 아이에게는 독이 될 수도 있다는 얘기다.
다음과 같은 연구 결과를 참고해보자.
이스라엘 키부츠(집단농장)는 여러 해 동안 남녀의 상투적 성차이를 없애려고 노력했다.
어린아이의 의상, 구두, 머리 스타일, 생활 스타일, 등을 유니섹스적 중성 모델에 입각하여 준비했다.
남자아이들에게는 인형놀이, 바느질, 뜨개질, 요리, 청소 등을 하도록 했고,
여자아이들에게는 축구, 나무 올라타기, 다트놀이 등을 권장했다.
키부츠의 이상은 성차를 철폐하여 각각의 구성원이
동일한 기회와 책임을 부여받는 중성적 사회를 건립하는 것이었다.
“남자 아이는 울지 않는다” “여자 아이들은 지저분한 곳에서 놀지 않는다” 등의 성차별적 언어와 표현은 일상 언어에서 완전히 배제되었다.
키부츠는 남녀간의 완벽한 호환성을 증명하겠다고 주장했다. 그런데 그 결과는?
키부츠를 실시한 지 90년이 지난 후, 여러 연구조사 결과는
키부츠의 남자 아이들은 여전히 공격적이며 불손한 행동을 보이고, 권력 단체를 구성하고, 불문율의 서열제를 실시하고, 거래를 했다고 보고했다.
반면 여자아이들은 서로 협동하고, 갈등을 피하고, 우애있게 행동했고, 서로 친구처럼 지냈다.
자신들이 좋아하는 과정과 학과목을 자유롭게 고르라고 하자, 그들은 성 구분적인 과정을 선택했다.
남자아이들은 물리학, 엔지니어링, 스포츠를 선택했고,
여자아이들은 교사, 카운슬러, 간호사, 인사 관리사가 되고 싶어 했다.
그들의 생물학적 구조가 두뇌 회로에 적합한 활동과 직업을 선택하도록 한 것이다.
이 키부츠 사회에서 중성적으로 양육된 아이들을 연구한 결과,
어머니-아이의 유대관계가 제거되었다고 해도
어린아이의 성적 차이나 성적 기호는 감소되지 않았음이 밝혀졌다.
오히려 그것은 소외감과 혼란을 느끼는 아이들의 세대를 만들어냈고,
그들은 정체성이 혼란스러운 성인으로 자라날 가능성이 많았다.
(말을 듣지 않는 남자 지도를 읽지 못하는 여자/ 앨런 피즈, 바바라 피즈/ 이종인 옳김/ 가야넷)
남녀의 성 차이는 수태 후 6~8주 사이 기간에
테스토스테론 호르몬이 태아의 뇌에 충분히 많이 혹은 적게 작용하느냐
아니면 거의 작용하지 않느냐에 의해서만 결정된다.
이 시기 이후에는 어떠한 환경적인 자극도 성 역할에 미치는 역할은 미미할 뿐이다.
아이들의 능력은 어느 정도 아니 상당 부분 타고 난다.
능력은 부족하되 부족한 능력을 만회하려고 노력하는 기질도 어느 정도 아니 상당 부분 타고 나는 것 같다.
아이들의 능력과 기질의 차이를 부모나 교육자들이 인정을 해야 한다.
청소년들이 가장 듣기 싫어하는 말은 남과 자기를 비교해서 평가하는 것이라 한다.
그런데 우리 어른들은, 우리 사회 시스템은
우리 사랑스런 아이들에게 획일적인 가치관과 교육 시스템을 강요하고 있다.
고등학교 1학년인 우리 아이만 해도
아침 6시 35분에 집을 나가서 밤 10시 50분에 무거운 가방을 지친 어깨위에 걸머지고 집에 들어온다.
묵묵히 잘 견뎌내는 아들을 보면서 대견하기도 하지만 참 안쓰러운 마음이 그리고 미안한 마음이 드는 것도 사실이다.
우리는 우리 아이들을 잘 되게 하기 위해 교육한다.
우리는 우리 세대의 지식을 전달해 주어야 할 뿐만 아니라
올바른 길을 제시하고 대안을 찾아주며 용기를 북돋아주고 희망을 잃지 않게 해주어야 한다.
단 지식과 지혜의 수준들이 아이들이 받아들일 수 있는 수준을 과도하게 넘어가지 말아야 한다는 점이다.
자녀에 대한 지나친 기대와 욕심 그로 인한 과도한 교육이
아이의 성장에 독이 되는 경우를 정신과 의사로서 많이 보기 때문이다.
나는 가끔 이런 얘기들을 부모에게 이야기해준다.
“아이를 너무 나무라지 마세요.
우리는 아이를 잘 키우고 아이의 나쁜 행동을 바로 잡아 주려고 때때로 훈계하고, 혼내고, 벌을 주는 것이잖아요.
그런데 그렇게 해서 아이들의 행동이 변한다면 세상의 어른들은 다 착한 사람만 있어야 하지 않을까요? 그렇지 않잖아요.
아이가 나쁜 행동을 한다고 계속 혼내고 벌을 주면 아이는 이렇게 생각할 거예요.
‘나는 항상 부모를 실망시키는 나쁜 아이야’라고.
그러면 아이의 자존감은 떨어지게 되고 아이는 나중에 문제가 될 가능성이 더 많아지겠죠.
반면, 아이들도 자기가 잘하는지 잘못하는지 다 알고 행동하거든요.
조금은 잘못하더라고 잘하는 행동을 했을 때 충분히 칭찬해주면 아이는 이렇게 생각할 거예요.
‘내가 단점이 있기는 하지만 우리 부모님은 그래도 나를 자랑스럽게 생각하시는구나’라고.
그러면 아이의 자긍심은 조금 더 살아날 것이고 더 나은 행동을 할 가능성이 높아지지 않을까요?”
나는 양육이나 교육의 목적 내지 목표가
인재의 양성이나 사회에서 꼭 필요로 하는 사람을 기르는 것이 되어서는 아니된다고 생각한다.
그 진정한 목표는 아이가 가지고 태어난 기질과 능력이
충분히 발휘되고 계발될 수 있는 조건과 다양한 경험을 제공해 주고,
타인들과 그리고 사회와 적절히 조화시켜 나갈 수 있도록 돕는 것이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우리 집에 와 있는 프랑스 아이는 우리나라에서 뭘 배우고 갈까?
아시아 문화에 관심이 많다고는 하지만 사실 말 뿐인 것 같고,
그렇다고 우리말을 열심히 배우려는 태도도 보이지 않는다.
앞으로도 그 아이는 그저 거의 한국어로 진행되는 학교 수업에 의미 없이 참관할 것이며,
집에 와서는 컴퓨터에 매달려 있을 것이다.
로타리에서 가끔 진행하는 프로그램에 몇 번 참석하기도 하겠지만
그것이 그에게 얼마나 큰 도움이 될지는 모르겠다.
그 아이가 프랑스로 돌아가면 한 학년을 다시 다녀야 한다.
우리 기준으로는 17살이란 귀중한 한 때를 거의 허송세월하며 보내는 것이다.
이런 사고방식은 어느 나이가 되면
어느 정도의 성취를 이루어야 하고
어느 정도의 위치에 올라서야 하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적어도 그 나이 또래의 평균에서 벗어나면 안된다고 생각하는 우리나라 사람들에게는 낯 선 것이다.
직업이 교사, 의사인 프랑스 아이의 부모들도 당연히 이런 생각을 했을 것이다.
그렇지만 그들은 아이가 원하는 것을 존중해줬다.
나는 그들이 부럽다.
2010.09.12.
정두훈
첫댓글 멋진 글입니다. 많은걸 생각하게 합니다.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