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세룡(曺世龍,1676~1735)
1676년(숙종 2)∼1735년(영조 11). 조선 중기 유학자. 자는 태여(泰如)이고, 호는 인재(訒齋)이다. 본관은 창녕(昌寧)이다.
문장공(文莊公) 매계(梅溪) 조위(曺偉)의 후손으로, 고조는 통정대부(通政大夫) 예빈시정(禮賓寺正) 조윤희(曺胤禧)이고, 증조부는 조익(曺瀷)이며, 조부는 조제창(曺悌昌)이다. 부친 조유(曺逾)와 모친 호군(護軍) 김진수(金震鐩)의 딸 선산김씨(善山金氏) 사이에서 5남 중 차남으로 태어났다. 형 조세호(曺世虎)와 동생 조세룡(曺世龍)‧조세봉(曺世鳳)‧조세붕(曺世鵬)이 있다. 부인은 김선(金墠)의 딸 안동김씨(安東金氏)이다.
성품이 바르고 신중하고 용모가 단정하였다. 어려서부터 효성이 지극하고 우애가 돈독하였다. 부모상을 치를 때에 성심을 다하였다
한수재(寒水齋) 권상하(權尙夏)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학문에 뜻을 두고 성현(聖賢)의 서적들을 두루 탐독하였으며, 자기 수양에 독실하였다. 도의(道義)가 높고 학문과 덕행이 독실하여 사람들이 높이 받들어 숭배하였다.
슬하에 2남 1녀를 두었는데, 아들은 조방(曺霶)‧조박(曺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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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원진(韓元震, 1682~1751) 자 덕소(德昭), 호 남당(南塘), 양곡(暘谷). 권상하(權尙夏)의 문인. 호론(湖論)의 주창자
訒齋曹公墓表
한원진(韓元震, 1682~1751)
公諱世龍。字泰如。號訒齋。昌寧人也。新羅時有諱繼龍封昌城君。是爲鼻祖。入我朝。有諱偉。世稱梅溪先生。贈諡文莊公。以道學文章。冠冕一世。於公爲六世祖也。高祖諱胤禧。官禮賓正。以壽陞通政。曾祖諱瀷。祖諱悌昌。考諱逾。號愚拙堂。以學行贈持平。妣善山金氏。護軍震鐩之女。公生於丙辰四月十七日(1676)。歿於乙卯二月十九日。是年四月日。葬于黃澗馬巖山卯向之原。從先兆也。公性度沉靜。操履端方。居家孝友。克紹世德。尤好聖賢之書。手抄口誦。探索其義。與弟進士世鵬。道義相磨。甚有塤箎之樂。又嘗一遊寒水齋先生之門。獲聞爲學之指。平生言議不苟。多令人敬服者。其丁外艱也。持制甚嚴。羸瘁成疾。而不脫衰絰。不近薑桂。及其後喪。公年方六十矣。居憂以禮。一如前喪。過再祥。不肉素。患嘔逆之證。因氣損火發。竟至不救。當戊申逆變起於道內。往見邑倅。激勸其預備之策。自製倡義文。欲爲赴亂計。母夫人已篤老。又不忍公之離側。遂不得自遂。此公平日志行之大者。餘可略也。公娶安東金氏。進士墠之女。擧二子一女。長霶娶冶隱後孫吉重龜女。生四男一女。次䨰娶冲菴後孫金世秋女。生一男二女。女適光山金湜。余與進士君。有同門之契。進士狀公行。以書來求墓文曰。先兄之行誼泯沒可惜也。余拙於文詞。且病世之爲狀誌者。不質不殺。反不足以徵信於後。就其狀。擧其綱而序次之如右。進士之言。非阿好者。余之文。又質略如此。庶幾不爲知德者之所厭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