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격성의 뿌리>
공격성은 우리의 본성이 발현된 결과가 아니라 우리를 진정한 본성으로부터 분리시키는 장막으로 작용하고 있을 뿐이기 때문이다. 본질적 본능적 힘들이 쳐놓은 어두운 장막을 뚫고 나가면, 우리는 우리 내면의 가장 깊은 알맹이가 야수성이 아니라 신성임을 깨닫는다. 이런 깨달음은 앞서 인용했던 인도 《우파니샤드》의 유명한 구절과 완전히 일치한다. 《우파니샤드》의 메시지는 대단히 명확하다. “그대가 바로 그것이다(Tat tvam asi/Thou art That)-그대의 가장 깊은 본성은 신성과 동일하다. 이처럼 우리는 진지하게 일체지향적 상태를 연구함으로써 매우 고무적인 성과를 얻을 수 있다. 진지한 내적 탐구는 공격성과 파괴 성향을 눈에 띄게 줄여주고 관용과 연민을 길러준다. 또한 생명에 대한 경외심, 다른 종에 대한 공감, 생태적 민감성도 크게 높아진다.-코스믹 게임 257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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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끝없는 탐욕의 심령적 원천>
외적 목표를 추구함으로써 만족을 얻고자 하는 그릇된 노력은 오히려 모순된 결과를 가져오는 경우가 많다. 나는 수십 년간 혹독하게 일하고 노력해서 평생 꿈꿔왔던 목표를 마침내 달성해낸 바로 다음날부터 심각한 우울증에 빠져버린 사람들을 연구한 적이 있다. 조셉 캠벨은 이런 경우를 “사다리 꼭대기에 올라가서야 그 사다리가 잘못된 벽에 서 있었다는 사실을 발견하는 상황으로 묘사했다. 탄생의 기억을 의식 속으로 완전히 가져오고, 탄생과 관련된 죽음의 공포를 마주하고, 심령적 재탄생을 체험함으로써, 우리는 이런 실망스런 습성들을 눈에 띄게 약화시킬 수 있다. 또한 출산 전후의 상황을 생생히 떠올려 출생 시의 고통스러운 충격에서 벗어남으로써, 우리는 미래의 성취에 대한 집착을 크게 줄이고 현재에서 더 큰 만족을 찾을 수 있다.
하지만 우리의 불만과 실존적 불안은 주산기보다 훨씬 깊은 수준에 뿌리내리고 있다. 즉, 인간의 삶을 조종하는 이 끝없는 갈망은 그 본질상 선험적이다. 르네상스 초기 이탈리아의 위대한 시인 단테 아길리에Dante Alighieri는 “이생에는 영혼의 목마름을 풀어줄 만큼 커다란 기쁨이나 즐거움이 존재하지 않기에, 완벽하고자 하는 욕망은 언제나 모든 즐거움을 불완전한 것으로 보이게 한다”고 표현했다. 가장 일반적인 관점에서 보면, 만족할 줄 모르는 탐욕의 깊숙한 초개아적 뿌리는 ‘우주아의 계획(the Atman Project)’ 이라는 켄 윌버의 개념을 통해 가장 잘 이해될 수 있다.
윌버는 궁극의 철학의 기본 사상이 가리키는 구체적 결론을 탐사하고, 그것은 우리의 본성이 신성임을 단언한다고 설명했다. 우리는 이러한 우리 존재의 본질을 하느님(God), 우주 그리스도(the Cosmic Christ), 케테르(Keter: 유대 신비주의 철학인 카발라에서, 무한한 신이 방출한 열 가지 속성(세피로트) 중 첫 번째를 가리키는 용어. 본래의 뜻은 왕관이다.), 알라, 부처, 브라흐만, 도道, 그 외 여러 이름으로 불러왔다. 창조 과정이 우리를 우주적 근원, 신성한 본성과 떼놓고 분리시킬지라도 이런 연결성에 대한 자각은 결코 완전히 소실되지 않는다. 인간 정신의 모든 발달 수준에 작용하는 가장 깊은 동력은 신성의 체험으로 돌아가고자 하는 열망이다. 하지만 우리는 육신이라는 억압적 굴레 탓에 신 안에서의, 그리고 신으로서의 완전한 영적 자유를 체험하지 못한다. 세속적인 성취로는 견줄 만한 상대가 없는 알렉산더 대왕도 예외가 아니었다. 그는 모든 사람이 바라마지 않는 물질적 성취의 극한에 이르렀던 사람이다. ‘신이 내린 알렉산더’ 라는 별칭만 보아도 잘 알 수 있다. 아래는 그와 관련되어 전해지고 있는 이야기다.
전쟁에서 승승장구하며 광대한 영토를 정복해가던 마케도니아의 왕 알렉산더는 마침내 인도에까지 이르게 되었다. 거기서 그는 비범한 힘(siddhis: 초월적 명상을 통해 얻어지는 초능력.), 특히 미래를 보는 능력이 있는 요기에 대한 소문을 듣고 그 요기를 만나러 갔다. 알렉산더가 동굴에 도착했을 때 그 요기는 여느 때처럼 영적 수행에 빠져 있었다. 알렉산더는 성급하게 끼어들어서 요기의 명상을 방해하고는 정말로 미래를 보는 힘을 가졌느냐고 물었다. 요기는 침묵 속에서 고개를 끄덕이고는 다시 명상에 들었다. 알렉산더는 다시 집요한 질문으로 요기를 방해했다. “나의 인도 정복이 성공할지를 알려주실 수 있습니까?” 요기는 잠시 명상을 하더니 천천히 눈을 떴다. 그리고 온화한 눈길로 알렉산더를 한동안 바라보고는 측은한 듯이 말했다. “결국 당신에게 필요한 것은 6피트(1.8미터) 정도의 땅조각 뿐입니다.”
인간의 딜레마-물질적 수단으로 신성을 실현하고자 하는 절망적인 노력-를 이보다 더 신랄하게 드러내주는 예는 찾기 어렵다. 우리가 신성한 존재로서 잠재력을 완전히 실현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내적 체험뿐이다. 그러려면 분리된 자아의 죽음과 초월, 즉 ‘살가죽에 싸인 에고’ 라는 정체성이 소멸되어야만 한다. 하지만 소멸에 대한 두려움과 에고에 대한 집착 때문에, 우리는 우주아(Atman)의 대역이나 대체물로 만족해야만 한다. 그리고 이 대체물은 삶의 단계마다 특정한 대상으로 바뀌어간다. 그것들은 우리의 삶 속에서 툭하면 변덕을 부린다.
태아와 신생아에게는 훌륭한 자궁과 젖무덤의 경험이 주는 행복이 바로 우주아의 대체물이 된다. 유아는 안전하고자 하는 욕구와 생리적 욕구의 충족을 대체물로 삼는다. 우리가 성인기에 가까워질수록, 우주아의 계획은 점점 더 엄청나게 복잡해진다. 그때는 음식과 섹스는 물론이고 돈, 명성, 힘, 외모, 지식, 그 외 온갖 종류의 것들이 우주아의 대체물로 섬겨진다. 하지만 우리의 깊숙한 곳에서는 자신의 참된 본성이 우주 창조의 총합과 창조 원리 그 자체임을 느끼고 있다. 그래서 우리는 아무리 좋고 많은 대체물을 획득하더라도 항상 불만스러운 상태로 남게 되는 것이다. 만족할 줄 모르는 탐욕을 궁극적으로 해결하는 길은 무수한 종류와 범위의 세속적인 추구가 아니라 내면세계 속에서 발견된다. 비일상적 의식 상태에서의 신성 체험만이 우리의 가장 깊숙한 욕구를 충족시켜줄 수 있는 것이다.
페르시아의 신비주의 시인 루미는 이 진리를 매우 명쾌하게 표현했다. “아버지, 어머니, 친구, 천국, 지구, 궁전, 과학, 일, 음식, 술 등 온갖 것을 향해 사람들이 품는 희망, 욕망, 사랑, 애착들………. 성자는 이것이 신을 향한 욕망이며 그 모든 대상은 가리막에 불과함을 안다. 사람들이 이승을 떠나서 가리막 없이 왕(King)을 대면할 때, 모든 것이 가리막이자 덮개였으며, 자신이 욕망했던 대상들이 사실은 하나(One Thing)였음을 알게 되리라.” 스스로 ‘지복(felicity)’ 이라 부른 삶의 길을 열렬히 따랐던 17세기 영국의 시인이자 성직자였던 토머스 트러헌Thomas Traherne은 그 체험을 이렇게 묘사했다.
거리도 내 것, 교회도 내 것, 사람들도 내 것이었다. 하늘도 내 것이었고, 해와 달과 별들도, 온 세상도 다 내 것이었고, 나는 그것의 유일한 목격자이자 수혜자였다. 나는 얄팍한 교양과 경계와 분별을 조금도 알지 못했다. 하지만 모든 교양과 분별도 내 것이었고, 모든 보물과 부자들도 내 것이었다. 나는 그 혼란 속에 타락했고 속세의 간계를 배워야 했으니, 이제 나는 그것을 잊어버리고 다시 신의 왕국에 들어갈 어린 아이가 된다.-코스믹 게임 261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