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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물지 않은 상처, 되풀이할 수 없는 치욕의 역사”
나가사키-사세보 평화발자국
2016년 2월 18일(목)~21일(일)
2월 18일(목)
“군함도는 꼭 가보고싶었다”, “홍보자료를 보는 순간 이거다 싶었다”, “평소 관심이 많았던 주제라 참가했다”, “미군기지가 우리와는 어떻게 다른지 보고싶었다”, “아버님도 징용을 갔다오셨다. 일제치하 역사를 배울 수 있을 것이라 생각되어 참가했다”, “한미일 삼각동맹에 관한 생생한 경험을 하게 될 것이라 기대하고 왔다”, “사드 배치를 계기로 전개될 한미일 삼각동맹의 문제는 한국만의 문제가 아니기에 동아시아 평화를 위해 일본 평화운동과 연대, 교류를 하는 계기가 되기를 바란다”...
과거는 멈추어있는 것이 아니라 지금 이 시간으로 이어지고 지금 이 시간은 미래를 향해가는 여정에 늘 과거가 되기에 과거를 돌아본다는 것은 지금 여기에서 무엇을 할 것인가를 판단하는 일입니다. 평통사 평화발자국은 더욱 그렇습니다.
2014년부터 부산평통사는 전쟁과 분단의 상흔이 있는 역사의 현장을 찾아 평화와 통일의 염원을 심는 평화발자국을 시작했습니다. 2014년에는 ‘임진왜란에 맞선 부산사람들’이라는 주제로, 2015년에는 ‘일제에 맞선 부산사람들’이라는 주제로 진행했습니다. 올해 부산 평통사는 일본으로 그 보폭을 넓혀 나가사키와 사세보로 떠나는 기행을 기획, 추진했습니다.
이 기획은 지난 해 아베 정권이 안보법제를 강행처리함에 따라 일본군의 한반도 재침략이 가능해진 현실에서 일제 하 조선인 강제징용의 현장―군함도―을 방문하여 과거 치욕적인 역사를 되돌아보고 그 역사를 되풀이하지 말자는 취지를 담았습니다. 이런 뜻에서 이번 기획에는 또한 안보법제 강행 처리 이후 강화되고 있는 사세보 주일미군기지를 돌아보는 일정도 포함시켰습니다. 사세보는 군함도가 있는 나가사키 현 내에 있는 도시로, 유엔사 후방기지로서 주일미군기지가 들어서 있습니다. 유사시 한반도로 출격하는 미일 해군력의 최전방이 될 사세보 기지는 과거가 과거에 머물지 않음을 보여주는 생생한 현장입니다.
아울러 이번 일정에는 나가사키에서 피폭당한 재일 조선인의 처참한 역사도 만나는 시간을 담았습니다.
부산 뿐 아니라 전국 각지에서 온 20여 명의 참가자들은 2월 18일 오후 2시, 부산역에 모였습니다. 참가자들은 여정을 시작하기에 앞서 부산 대연동에 있는 일제하강제동원역사관부터 방문했습니다.
참가자들은 이 역사관에서 확인한 강제동원의 실상에서 새삼 충격을 받았지만 이 역사관이 지난 해 말에야 세워졌다는 사실에 더욱 놀라와했습니다.
일제하 강제동원역사관에서 최광섭 대표의 해설을 듣는 참가자들
강제동원역사관을 둘러본 참가자들은 부산역 건너편에 있는 국제여객선터미널로 이동하여 후쿠오카로 가는 배를 타기 위해 준비했습니다. 2만톤에 달하는 카멜리아호는 옛날 부산항에서 일본으로 끌려간 분들이 탔던 배와 전혀 다르지만 참가자들은 밤새 이야기를 나누며 당시 식민지인의 설움을 안고 어디로 가는지도 모른 채 끌려가야했던 분들의 한숨과 고통을 되새기며 마음을 여몄습니다. 참가자들의 등에 단 ‘평화발자국’ 배너를 보고 부산 시민들은 관심을 보이고 궁금한 것을 물어보기도 했습니다. 설명을 듣고난 시민들은 “참 좋은 일을 하신다”, “애국자네요~”라며 격려해주셨습니다. 평화발자국이 시민들에게 평통사를 친근한 모습으로 다가가게 해주는 좋은 사업임을 다시 한 번 확인하는 시간이었습니다.
힘찬 출발!
부산항을 떠나며
배안에서 자기소개와 일정 이해하기 진행
2월 19일(금)
아침 일찍 후쿠오카항에 도착한 참가자들은 전세버스로 옮겨타고 곧바로 나가사키로 이동하여 오전 11시 30분 경 나가사키항에 도착했습니다. 이곳에서 통역을 비롯하여 이번 일본 평화발자국 현지 일정을 도와주신 기무라 하데토 선생님을 만났습니다. 기무라 선생님은 이번 일정을 꼼꼼하게 챙기고 헌신적으로 도와주셨습니다. 이 자리를 빌어 다시 한 번 깊은 감사의 인사를 올립니다.
나가사키항 부근의 식당에서 점심을 마친 참가자들은 기무라 선생님으로부터 군함도에 관한 간단한 설명을 들은 후 나가사키항에서 19km 떨어진 군함도로 이동했습니다.
해설해주시는 기무라 선생님
나가사키는 미쓰비시 조선소를 비롯해 수많은 군수산업 기지들이 자리했던 곳입니다. 당시 세계 최대의 전함이었다는 ‘무사시’를 제조한 곳이 이곳 조선소였고, 이를 군함이나 함정이 사용한 어뢰를 제작한 곳도 미쓰비시의 병기 제작소였습니다. 미쓰비시 중공업사사(社史)에는 여기서 만들어진 어뢰가 진주만 공격에 사용되었고 7,343개의 어뢰가 만들어 졌다고 적혀있습니다. 미국은 이곳에 1945년 8월 9일 원자폭탄을 투하합니다.
나가사키는 미쓰비시 조선소를 비롯해 수많은 군수산업 기지들이 자리했던 곳입니다. 미쓰비시 조선소, 제강소, 병기 제작소 등에서 노역을 착취당하던 조선인 징용자의 규모는 최대 8천명에 달하며 군함도에는 500~800명이 있었습니다. 조선인 노동자들은 미국이 1945년 8월 9일, 나가사키에 원자폭탄을 투하하자 그 피해를 복구하는 일에도 동원되었습니다.
하시마는 지하 1km까지 파내려간 해저 탄광입니다. 10m높이의 콘크리트 제방이 담장처럼 섬을 에워쌌는데, 일본 광부들에게는 최초의 철근 콘크리트 아파트를 제공받은 근대식 삶의 터전이었습니다. 하시마 탄광은 최전성기인 1941년에는 41만 톤의 석탄을 캐냈다고 합니다. 1960년에는 총 거주자가 5,300명으로 세계에서 가장 인구밀도가 높은 섬이었던 하시마. 조선인들에게 이곳은 처절한 감옥이었습니다. 이곳까지 강제로 끌려온 조선인은 소모품이었고, 노예였습니다.
하루 12~14시간, 가장 힘든 노동에 동원되어 지옥같은 생활을 하던 조선인들은 대부분 살아돌아오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일본은 이를 철저히 은폐하고 “문화유산”으로 이 섬을 유엔에 등재시켰습니다. 일본인 해설사는 자신의 문명을 자랑스레 선전했습니다. 동아시아 민중들을 압살한 가해자로서의 모습을 감추고 역사를 왜곡한 일본의 생얼굴입니다. 일본은 여기에 머물지 않고 또다시 미국의 손을 잡고 아시아에서 패권을 휘두르기 위해 몰두하고 있습니다.
군함도를 돌아본 참가자들은 비통한 심정으로 일본인 해설사의 유창한 설명에서벗어나 기무라 선생님의 '사실과 진실'을 들었습니다. 그리고 아직도 구천을 떠돌고있을 참혹하게 희생된 분들의 넋을 위로했습니다.
군함도에서 돌아온 참가자들은 오후 6시부터 나가사키시 교육문화회관에서 이하라 도요이치(井原東洋一) 선생의 강의를 듣고 교류하는 시간을 진행했습니다. 교류회에는 평화발자국 참가자들 뿐 아니라 나가사키 대학 대학원생 등 일본분들도 참석했습니다.
이하라 도요이치 선생은 일본의 피폭1세로서 나가사키 시의회 의원을 지냈고 <나가사키 현(縣) 피폭자수첩(手帖) 친구의 회>(이하 <회>) 회장입니다. 이하라 선생은 한국이 70년간 분단되어 고통당하는 이유가 일본에 있다며 사과했습니다. 이하라 선생은 1995년 피폭자에 대한 원호법이 제정되기까지의 경과를 설명하고 최근 아베 정권의 전쟁법과 원전재가동 정책에 대해서도 반대활동을 펼치고 있는 <회>의 활동에 대해서도 소개했습니다.
이하라 선생은 후쿠시마 사고를 계기로 일본 국민들 사이에서는 핵의 평화적 이용에 대한 회의가 다시 확산되었고 있다고 소개하고 한국에서 원전사고가 발생하면 일본은 살아남을 수 없다며 “핵도, 전쟁도 없는 평화로운 세상을 만드는 것이 소원이다. 나가사키가 최후의 피폭지가 되기를 바란다”고 강조했습니다. 이를 위해 <회>는 비핵3원칙을 법제화하고 핵우산을 제거하며 동북아시아의 비핵지대화를 이루기 위해 노력한다면서 무엇보다 “인간에 의한 평화의 연대”를 강조했습니다. 또한 한반도 평화통일을 지지한다면서 북한의 핵실험에 대해 원칙적 반대 입장을 표명하고 일본도 북한을 고립시키지 말고 북한과 국교정상화를 이루는 데 나서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이하라 선생은 “나가사키에 군함은 필요없다. 하시마는 문화유산이 아니라 징용의 섬으로 남아야 한다”는 말로 이야기를 마쳤습니다.
평통사는 지난 해 NPT에서 유엔본부에서는 처음으로 미국과 일본 정부가 한국인 피폭자 문제에 대해 사죄하고 배상할 것을 촉구했습니다. 일본의 평화세력도 이러한 활동을 전개하고 있다면 큰 힘이 될 것이기에 <회>가 이 문제에 대해서도 제기하고 있는지 궁금했습니다. 아쉽게도 이하라 선생의 답은 “없다” 였습니다. 이하라 선생은 미국과 일본 정부는 이 문제에 대해 책임지지 않으려한다면서 그러한 활동은 매우 어려운 일이라고 대답했습니다.
왼쪽 분이 기무라 선생, 가운데 분이 강의를 해주신 이하라 선생. 그리고 서있는 분이
오카 마사하루 자료관장 다까자네 선생.
기무라 선생의 따님이 만드신 종이 현수막!
국가의 이름으로 전쟁을 일으키고 그 전쟁을 끝낸다는 명분으로 인류를 절멸시킬 수도 있는 핵폭탄을 사용한 일에 대해 아무런 책임도 지지 않으면서 평화를 말한다는 것은 가증스러운 일입니다. 평통사는 미일 정부가 한국인 피폭문제에 대해 책임을 지게 만드는 어렵고 외로운 길을 뚜벅뚜벅 걸어갈 것입니다.
저녁식사를 마친 참가자들은 전차를 타고 숙소로 이동했습니다.
2월 20일(토)
지난 밤에 시작된 비는 아침에도 멈추지 않습니다. 비가 많이 오면 일정을 진행하는 데 힘들 것이라는 걱정을 안고 오전 8시 30분, 참가자들은 사세보를 향해 출발했습니다.
1시간이 채 걸리지 않아 사세보에 도착했습니다. 사세보에 도착하니 비가 마침 멈추어주었습니다. 다행스러운 일입니다.
<RIMPEACE(림피스); www.rimpeace.or.jp> 사세보 편집위원으로 일하는 시노자키 마사토 선생이 사세보 미군기지를 소개하기 위해 일행을 마중나왔습니다. 사세보 일정에 동참하기 위해 일부러 교토에서 오신, AWC 나가야 선생이 통역에 나서주었습니다. 나가야 선생은 1968년 베트남전에 참전하기 위해 핵 항공모함 엔터프라이즈호가 사세보에 기항하자 시민들이 대규모 시위를 벌였고 이에 전국 각지의 운동권 학생들이 합세하여 거센 투쟁을 벌인 일이 있다고 소개했습니다.
림피스는 “기지나 군사문제에 안보상의 이유로 비밀이 있어서는 안 된다”는 기조 아래 미군기지가 있는 일본 지자체의 시의회 의원 네트워크로 1996년 12월에 설립되었습니다. 미군기지의 정보를 수집하고 공개하는 것으로 평화운동에 이바지하는 단체입니다. 사세보 외에도 이와쿠니, 가나가와현 사가미하라, 도쿄도 훗사와 야마토시가 림피스의 네트워크로 소속되어 있습니다. 그 외 협력지로써 아오모리현 미사와, 오키나와현 우루마시, 나하시 등이 있습니다.
시노자키 선생은 참가자들을 사세보항이 내려다보이는 유미하리산으로 안내했습니다. 작지만 울창한 산은 마치 작은 한라산처럼 느껴졌습니다. 이 산은 사세보가 군항으로서 전면적인 역할을 하기 전에 국립공원으로 지정되었다고 합니다. 미일동맹이 하늘이 내린 자연을 군사요새로 전변시킨 셈입니다.
유미하리산 정상에서 바라본 사세보항. 오른쪽에 이지스함들이 늘어선 모습이 보인다.
사세보는 나가사키현 북부에 위치한 인구 24여만 명의 항구도시입니다.
1886년 일본 해군진수부가 자리한 이후 군항으로 발전해 지금은 미일동맹의 세계 재패를 위한 출격기지로 기능하고 있습니다. 해상자위대 기지, 주일미 해군기지(7함대 기지), 아이노우라 육상자위대 기지가 배치되어 있고 상주하는 미군은 약 5400명 정도이며 기지 총면적은 123만평 규모입니다.
사세보 기지는 한국전쟁 시 탄약, 탱크 등을 보급하는 역할을 했으며 서 태평양 보급 중계 거점으로서 미 7함대가 전진 배치되어 있는 곳입니다. 시노자키 선생은 일본의 주요 해상기지는 사세보와 교토의 마이주르, 요코스카, 히로시마 구레, 아오모리현 오미나토에 있다고 소개했습니다. 이 중 사세보 기지의 주 역할은 연료보급으로, 네 곳에 연료저장시설이 있으며 84만kl가 저장되어 있다고 설명했습니다. 이 규모는 동아시아 지역에 소요되는 모든 연료를 보급할 수 있는 양이라고 합니다. 심지어 아라비아해까지도 보급이 가능하며 제트유를 사용하기 때문에 미국의 동맹국들이 국적에 상관없이 사용할 수 있다고 합니다.
동행한 고영대 공동대표는 한국의 국방연구원 자료에 따르면 주일미군기지 재편과 관련하여 미군 작전상 아쯔기 기지의 함재기가 이와쿠니로 배치됨에 따라 사세보 기지가 항공모함의 준모항 역할을 할 수 있도록 준설공사가 진행될 것이라는 내용이 있는데 이에 대해 설명해달라고 요청했습니다. 그러나 시노자키 선생은 2020년까지는 그런 계획은 없는 것으로 안다고 대답했습니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추가 확인이 필요할 것 같습니다. (추가 확인결과 고대표가 파악한 대로, 사세보는 준 항공모함의 기항지로서 기능을 하고 있습니다. 즉, 본험리처드(USS Bonhomme Ricahrd)가 사세보에 배치되어 항공모함의 임무 일부를 수행하고 있습니다. 본험리처드는 항공모함과 같은 형태의 대형 상륙함으로 AV-8B 해리어 전투공격기를 운용할 수 있어 유사시 항공모함 임무를 일부 대체합니다. [출처: http://nownews.seoul.co.kr/news/newsView.php?id=20150817601003#csidx4b69efd69062d44a7714a47059164b0 ) 시노자키 선생은 핵잠이나 핵항모가 1년에 10여차례 입항하는데 항구쪽에는 수심이 얕아 항모는 항구에서 조금 떨어진 지점에 정박한다고 소개했습니다.
사세보 항에는 해상자위대가 보유한 이지스함과 최근 북한의 인공위성 발사를 계기로 추가배치된 미군의 이지스함들, 그리고 강습상륙항도 배치되어 있었습니다. 참가자들은 이렇게 많은 군함들이 한꺼번에 배치된 것은 처음 본다며 이곳이 한반도 유사시 해상자위대의 출격기지가 될 것이라는 사실을 실감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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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미하리산 정상에서 항구를 내려다보며 시노자키 선생의 설명을 듣는 참가자들
버스 안에서 바라본 이지스함. 대부분의 참가자들은 항구에 이지스함이 여러 대 정박해있는 것을
처음 보았고, 또 이렇게 가까이에서 군함을 본 것도 처음이었습니다.
참가자들은 미군들에 의한 범죄는 어느정도인지? 환경문제는? 미군기지 문제에 대한 시민단체와 많은 질문을 쏟아냈습니다. 미군기지에 대한 대응에서 지방자치단체, 의회와 시민단체는 어떤 역할을 하는가? 일본의 방위비분담은 어느정도인가? 등...
시노자키 선생은 96년 이후 미군들의 범죄는 거의 일어나지 않으며 연료탱크 보수 과정에서 새어나온 기름을 무단으로 매립하거나 폐기물을 부두에서 무단으로 소각하는 등의 문제가 있었지만 그런 것도 대부분 해결되었다고 소개했습니다. 다만 중금속 문제에 대해 미군 측은 책임을 인정하지 않고 있으며 조사도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아 대응을 하는 중이라고 답했습니다. 지자체와 시민단체는 각각 대응을 하고 있는데 많을 때는 시 의회 의원의 1/4이 대응에 나서기도 했다며 지금은 30명의 시의원 중 4명 정도가 반대운동에 나선다고 설명했습니다. 일본은 방위비분담금을 배려예산으로 부르며 약 2700억엔(3조원) 규모에 달한다고 합니다.
참가자들은 시노자키 선생을 따라 마애하타 탄약고를 둘러본 후 부두로 나가 좀 더 가까운 곳에서 미 해군 기지와 해상자위대 호위함대 등을 살펴보았습니다. 그곳에서 참가자들은 “일본의 한반도 재침략 반대!”, “전쟁위기 부르는 한미연합연습 중단!” 피켓 시위도 벌였습니다.
군함을 좀 더 가까이 볼 수 있는 "암벽"에서 시노자키 선생의 설명을 듣는 참가자들
문홍주 공동대표를 비롯한 참가자들이 잠시동안이지만 피켓 시위를 벌였습니다.
사세보 항을 떠나기 전 기념촬영. 아랫줄 왼쪽에서 네 번째가 시노자키 선생님.
사세보 시민과 노동자들은 매 월 9일과 19일에 시내에서 미군기지 문제에 대응하는 정례집회를 진행하고 있다고 합니다. 일본과 한국의 기지는 미국에 의해 하나로 운영되고 있다는 시노자키 선생의 설명을 들으며 참가자들은 가속화되는 한미일동맹에 맞서 한일연대를 높여내는 과제가 시급함을 자각하였습니다.
참가자들은 사세보 근로자복지센타에서 도시락으로 점심을 하고 나눈 뒤 참가자들은 시노자키 선생과 작별인사를 했습니다. 시노자키 선생은 참가자들이 준비한 김선물을 어머님이 좋아하실 것이라며 정말 기뻐하였습니다.
탄약저장시설도 둘러보았습니다. 민가들이 탄약고 바로 옆에 있었습니다.
참가자들은 다시 나가사키로 돌아와 오카 마사하루 자료관을 방문했습니다.
이 자료관은 ‘나가사키 재일 조선인 인권을 지키는 모임’을 만든 오카 마사하루 목사를 기념하여 세운 곳입니다. 오카 마사하루 목사는 조선인 강제징용 실태와 원폭피해를 조사하고 재일조선인의 인권을 옹호하는 데 평생을 바친 분으로, 나가사키 평화공원 안에 한국인 피폭자 추모비를 세우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하셨습니다.
참가자들은 이곳 관장인 다까자네 야스히로(高實康稔) 선생의 안내로 자료관을 둘러보았습니다. 참가자들은 일본시민들의 힘으로 만들고 운영되는 이 자료관에 한국사람도 잘 모르는 재일조선인들의 징용과 위안부, 그리고 피폭의 역사가 상세히, 구체적으로 전시된 것에 큰 감동을 받았습니다.
다카자네 관장의 설명을 듣는 참가자들
자료관에는 하시마 탄광과 관련 유물도 전시되어 있었습니다.
당시 조선인 노동자들이 먹던 식사-생선국과 겨밥.
이것을 먹다가 구토를 하고 위장병에 걸리기도 했습니다.
참가자들은 나가사키 원폭자료관 문이 닫히기 전에 가보자시는 기무라 선생의 독촉에 이끌려 아쉬운 발걸음을 뒤로하고 평화공원으로 이동했습니다.
이곳은 히로시마 평화공원과 그곳에 있는 자료관과는 비교가 되지 않는, 작고 소박한 규모였습니다. 오카 마사하루 자료관과는 대비되게 일본인이 ‘가해자’라는 사실은 어디에도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원폭자료관을 둘러보는 참가자들
피폭되어 죽은 동생을 등에업고 선 어린이의 모습.
자료관에서 나와 원폭낙하 중심지로 가는 길 한 구석에 나가사키 원폭 조선인 희생자 추도비가 서있었습니다. 자칫 발견하지 못하고 지나칠 정도로 비석은 조용한 모습이었습니다. 비석에는 ‘추도’라는 두 글자만 눈에 띄었습니다. 기무라 선생은 이 추도비는 오카 마사하루 목사의 주도로 일본 시민사회의 모금을 통해 세워졌다고 설명했습니다. 참가자들은 부끄러움과 분노와 비탄이 뒤얽힌 심정을 안고 추도비 앞에서 묵념을 드렸습니다.
추도비 옆에는 나가사키에서 북한으로 돌아간 동포들을 기념하여 철쭉나무를 심은 작은 기념석이 놓여있는데, 재특회 등 혐한론자들이 철거를 요구하는 등 수모를 당한다고 기무라 선생이 소개했습니다.
재일교포들이 단결하여 추모행사를 치르지 못한다는 이야기를 들으며 분단의 비극이 미치지 않는 곳이 없다는 생각에 참으로 고통스러웠습니다.
오카 마사하루 목사가 중심이 되어 일본 시민의 힘으로 세운 조선인 추도비(왼쪽)와 북송된 분들을 기념하여 심은 철쭉나무 소개석(오른쪽)
참가자들은 폭심지 부근에 있던 형무소터도 둘러보았습니다. 이곳에서 주중 일본공사 암살 작전을 시행하다 발각된 백정기 열사가 순국했다고 합니다. 그러나 철제 안내판에는 당시 형무소의 크기와 시설에 대한 설명과 함께 “1945년 8월 9일 11시 2분에 형무소 직원, 수감자 등 134명이 사망했다”는 문장만 적혀있었습니다.
폭심지로 가는 길목에 ‘평화의 샘’이 분수를 뿜고 있었습니다. 피폭자들의 목마름을 달래는 의미로 조성되었으며 야마구지 사지코라는 9세 소녀가 당시 상황을 그린 시가 새겨져 있습니다. 지금은 병 든 노인이 된 이 소녀는 당시 이 시를 지은 후 피폭문제에 대해 단 한마디도 하지 않고 살았답니다.
평화의 샘 앞에 선 참가자들
목이 말라서 견딜 수 없었습니다.
물 위에 기름같은 것 - 위에 떠있습니다.
아무래도 물을 마시고싶어
결국 기름이 떠있는 그대로 마셨습니다.
------ 그 날 어느 소녀의 수기에서-------
폭심지에는 숨져간 원폭 피폭자들을 위한 위령비가 서있고, 그 옆에는 당시 동아시아 최대 규모였던 우라카미 성당의 피폭된 한쪽 벽면이 서 있습니다. 우라카미 성당은 폭심지에서 500미터 떨어진 곳에 있는데 12000명의 신도 중 8500명이 사망했다고 합니다.
폭심지를 배경으로 기념촬영
우라카미 성당은, 이번 일정에서는 시간이 촉박하여 둘러보지 못했지만 나가사키 원폭 피해의 참상을 고스란히 보여주고 있습니다. 인터넷에 올라있는 사진 몇 장을 소개합니다.
참가자들은 이곳을 배경으로 기념사진을 찍은 후 이번 평화발자국의 마지막 일정이 될, 나가사키 야경을 보기 위해 이나사산 정상으로 올라갔습니다.
나가사키시 야경은 세계 3대 야경 중 하나라고 합니다. 그러나 참가자들의 마음을 사로잡은 것은 나가사키시로 징용온 조선인들이 아리랑 노래를 부르며 넘어다닌, 전혀 빛이 보이지 않는 산이었습니다. 숙소인 산 오른쪽 마을에서 미쓰비시 조선소나 중공업이 있는 산 서쪽까지 매일 걸어다니며 부르튼 발의 고통을 이겨내게 한 것은 고향에 대한 그리움이었습니다.
참가자들은 그 분들을 기억하며 아리랑을 낮게 불렀습니다.
나가사키시 야경
2월 21일(일)
참가자들은 일찍 둘러 짐을 챙겨 다시 후쿠오카항으로 이동, 배를 타고 5시간에 걸쳐 오후 6시경 부산항에 도착했습니다. 부산항 8부두에는 대형군수함이 정박해있습니다. 키 리졸브 한미연합연습에 참가하는 미군의 무기와 장비들이 도착했을 겁니다. 전쟁급 연습은 이미 시작된 것이죠. 사드 배치도 초읽기에 들어간 상황이니 여독을 풀 겨를없이 사드 배치 중단과 곧바로 전쟁연습 중단 촉구 활동에 나서야 할 것입니다.
부산항에서 우리를 맞이한 것은 석양을 받으며 미군전용부두인 8부두에 서있는 대형 미군 수송함이었습니다.
어려운 조건에서 참가하신 분들, 지지하고 성원하고 후원하신 모든 분들께 감사드립니다.무엇보다 한국사람보다 더 한국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이번 일정을 도와주고 참여해주신 기무라, 나가야 선생님 등 일본분들께 감사의 인사를 드립니다.
돌아오는 배안에서 나눈 소감들을 간략히 소개합니다.
- 부산 일제 강제동원역사관이 제일 인상깊었다. 이제야 생긴 것에 반성 필요 느낌.
- 일본 평화활동가들의 헌신과 책임성에 대해 다시 한 번 존경의 마음을 갖게 되었고 배워야겠다고 생각했다. 폭심지를 보고 비핵화의 필요성을 더 절감했다. 평택 미군기지 경험에 토대하여 사세보를 주의깊게 보았는데 한국과 일본의 미군기지 대응을 공동으로 해나가야 할 필요가 있다는 생각을 한 계기가 되었다.
- 가장 인상깊은 일정은 오카 마사하루 자료관. 한국인 피폭자가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것이 작년. 부끄럽다. 한국인이 제대로 못한 일을 일본분이 “죄송하다”면서 소개하고 설명한 것이 감동적이었다. 목적과 내용을 갖고 현장을 둘러보는 것은 언제나 좋다. 잘 배우고 어울리고 간다. 부산 평통사에 감사드린다.
- 기행인줄 알았는데 MT에 온 느낌. 기무라 선생을 만난 것이 가장 인상깊었다. 그분의 역사를 대하는 태도와 진실함, 열정이 고맙다. 우리가 수탈당한 역사를 우리보다 잘 알고 열정적으로 활동하는 모습이 감동적이었다. 그 분을 만난 것이 이번 기행의 가장 큰 성과.
- 군함도가 가장 인상깊었고 그러나 껍데기만 보고가는 아쉬움. 비핵화 절실 새삼 확인. 사세보 한일합동 대처 필요성 절감. 부산평통사 큰 일 했고 첫 프로그램인데 잘 된 것 같다. 프로그램 이런 형태로 하되 청년들과 학생들, 일반인을 구별해서 진행하면 좋을 것. 대표자, 실무자 등 대상별 맞춤형 일정이 되면 더 좋을 것 같다. 1년에 3, 4차례 하면 좋을 것 같다. 일본 평화운동가들과 새로운 프로그램 만들고 발전적인 관계로 만들어가면 새로운 평통사의 역사를 만들 수 있을 것 같다.
- 강제동원역사관이 이제야 만들어진 것, 오카 평화자료관이 정말 비교되었다. 반성하게 된다. 한국인 피폭자 문제에 대한 현실 알게 되었다. 우리 관점에서 기획하는 일본으로 가는 평화기행을 좀 더 자주, 다양하게 하면 좋겠다. 정말 도움이 되었고 기획과 준비, 추진한 부산에 감사.
- 나가사키 폭심지와 평화자료관이 가장 인상적임. 우리에게 평화란 무엇인가 생각을 하게 되었다. 가해자의 입장에서 조금이라도 돌아보는 기록이 없는 한 평화란 구호는 의문. 조총련이 제안하여 북이 만든 초라한 한국인 위령비도 남북관계와 분열의 역사를 상징한다고 느껴 비통한 심정이었다. 이런 현실을 극복할 수 있는 방안이 나와야 하고 이것은 청년세대의 과제이기도 하다. 민간의 역사 지키기도 중요하지만 당국 사이의 평화 역사 이루기가 더 절실하고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부산평통사에 진심으로 감사.
- 일본서 태어나서 해방공간에서 학교도 다님. 일본 국민들은 보수적이고 순응적인 사람들. 사세보에서 보듯 군사강국으로 도약하는 일본의 모습을 확인하게 되었음. 그 동안 일본을 안다안다 하지만 피부적으로 제대로 몰랐다. 제대로 알아야 한다.
- 하시마섬과 폭심지가 가장 인상깊은 장소. 오카 자료관 등 충격적이었다. 자유시간 부족하고 힘들었지만 인상적인 여행이었다.
- 사세보 기지 기대보다 작더라. 탄약창고도 인상적이었고 미군기지에서 치외법권 때문에 어떤 범죄가 일어나도 책임지지 않는다는 게 가장 인상깊었다. 기무라 선생이 통역해주셨지만 잘 못알아들어서 아쉬웠다.
- 가장 인상깊은 시간은 피폭자 교류회와 오카 자료관. 일본 시민사회의 모습을 보고 이야기 들은 것은 쉽지 않은 기회였다. 왕성하게 도와주신 일본분들 인상적. 군함도와 평화자료관은 일본 근대화를 홍보하는 일본의 모습을 보여준 과정이었다. 이들은 석탄쿠키도 만들어 팔던데 나가사키 원폭자료관도 사실상 승리한 일본 사람들의 역사기록이다. 좋은 것, 예쁜 것들만 두고 진실은 통역을 통해서 알게 된 것이다. 한국인이든 일본인이든 진실을 아는 게 중요하다.
- 오카 자료관이 가장 인상적이었다. 일본분들이 겸손한 태도로 나서서 하고 있는 것이 감동적. 평화 자료관에 전시된 것은 폭력. 진실을 제도 알고 바꾸고자 노력하는 것이 평화라고 생각한다. 폐허가 된 섬을 유네스코에 등재한 일본에 충격받았다.
- 역사를 바라보는 시선이 생기는 과정이었다. 오카 마사하루 자료관을 통해 우리를 지배했고 지배하려하는 일본 지배세력의 모습의 일단을 본 것 같다. 웃으면서 사람을 죽이는 사진을 보며 분노와 슬픔이 밀려왔다. 잘못된 세력이 권력을 쥐게 되면 오게 되는 결과. 모든 것은 연결되어있다고 생각한다. 참상을 묵인하면 역사가 그대로 간다는 것을 확인한다.
- 오카 평화자료관 인상적. 꼼꼼한 노력 볼 수 있었다. 현장체험만큼 교육과 홍보가 중요한데 우리도 그런 게 있어야 하지 않나하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시간이 너무 부족했다. 해설이나 교류회 내용을 사전에 협의를 해서 정확히 전달되도록 했으면 좋았겠다. 개선점을 모아 일반인이 참여해도 손색이 없는 평발로 만들기를 바란다.
*추신 : <조선인 인권을 지키는 모임> 시바타 사무국장과 기무라 선생님이 몇 가지 사실을 더 구체적으로 알려주시고 보완해주셨습니다. 그 내용을 반영하여 2월 22일자 글을 3월 22일 보완하여 다시 올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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