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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알을 청소한 예후와 예후 왕조의 한계
예후가 이와 같이 이스라엘 중에서 바알을 멸하였으나(왕하 10:28) ... 내 마음에 있는 대로 아합 집에 행하였은 즉 네 자손이 이스라엘 왕위를 이어 사 대를 지나리라 하시니라 그러나 예후가 전심으로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의 율법을 지켜 행하지 아니하며 여로보암이 이스라엘에게 범하게 한 그 죄에서 떠나지 아니하였더라(왕하 10:30,31)
예후(28년) -> 여호아아스(17년) -> 요아스(16년) -> 여로보암 2세(41년) -> 스가랴(6개월) ->// 살롬에 의해 멸족 -> 북왕국 패망 ···>// 에브라임 지파의 소멸(계시록 7:8)
예후는 주전 841년경 북이스라엘의 10대 왕입니다. 님시의 손자이며 아합왕의 군대장관입니다. 왕이 되기 전에 엘리야에 의해 기름 부음을 받았습니다(왕상 19:16,17). 예후는 북이스라엘에서 바알 신봉자를 모두 없애고 바알 제단과 신상을 모두 불에 태워서 바알을 진멸한 청소부입니다. 아합의 아들과 손자 70인을 진멸하였고(왕상 10:1,17), 이세벨의 주검은 이스르엘 토지(나봇의 포도원)에 거름처럼 뿌려져서 디셉 사람 엘리야의 예언이 성취되었습니다(왕하 10:30~10:1).
예후는 바알 추종자를 척결할 때는 용기가 있고, 지혜도 있었습니다. 신실한 신앙을 가진 레갑의 아들 여호나답과 협력하고, 백성들을 규합할 줄도 알았습니다. 그러나 예후의 바알 청소는 여기까지입니다. 예후의 바알 청소는 오므리와 아합 왕조를 무너뜨리고 자기가 왕이 되는 정치 혁명이었습니다. 예후는 여호와의 율법을 지키지는 않습니다. 곧 예후는 종교와 정치는 바꾸었으나 백성들의 삶과 관련된 여호와의 율법은 지키지 않습니다.
다만, 하나님은 예후가 바알 우상을 타파하고, 아합과 이세벨의 왕족을 멸한 공로를 인정하여 그 후손들이 4대까지 왕이 나게 하십니다. 그러나 여호와의 율법을 지키지 않으므로 4대 후에는 족보를 끊어버립니다.
예후의 4대손으로 왕이 된 사람이 여로보암 2세입니다(왕하 14:23). 이스라엘 초대 왕인 여로보암과 구분하기 위하여 예후의 4대손 여로보암을 여로보암 2세라고 부릅니다. 여로보암 1세는 주전 931년경에 북이스라엘의 초대 왕이며, 여로보암 2세는 138년 뒤 주전 793년경에 왕이 된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여로보암 1세와 2세는 부자 관계가 아니며, 여로보암 1세가 에브라임 지파이므로, 여로보암 2세도 에브라임 지파일 것으로 추정이 되기는 합니다.
정치로 보면, 여로보암의 2세의 통치는 성공적이었고, 이스라엘이 전성기를 맞습니다. 그의 통치에서 이스라엘 영토가 하맛 어귀에서부터 아라바 바다(사해)까지 넓혀서 솔로몬 시대와 비슷했습니다(왕하 14:25). 그의 치세로 왕성해진 국력으로 이스라엘 역대 왕들 중 가장 긴 41년간을 통치했습니다. 그러나 그의 치적은 아들 스가랴에서 6개월 왕으로 끝이 납니다.
예후 왕조는 이렇게 5대로 족보가 끊어집니다. 그 이유는 여로보암 2세가 느밧의 아들 여로보암의 모든 죄에서 떠나지 아니한 것에 있습니다(왕하 14:24). 예후가 바알 추종자를 처단하고 바알 제단을 헐어버린 것은 잘하였지만, 그것은 외형적인 혁명이었고, 여로보암 1세처럼 왕조를 바꾸는 정치적 수단에 그쳤습니다. 예후의 혁명은 여호와를 섬길만한 영적(거듭남) 혁명은 없이 인간적인 수단에 의존했습니다. 예후와 여로보암 2세는 진정으로 여호와를 섬기고, 백성들의 삶을 위해 필요한 여호와의 계명을 지키지는 않았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여로보암 1세와 여로보암 2세를 동일 선상에 올려놓고 “느밧의 아들 여로보암의 죄”라고 꾸짖고 있습니다. 왕의 치적을 다루는 열왕기는 아합이 바알 신을 섬긴 이래(왕상 16:31), “느밧의 아들 여로보암의 죄(또는 길)”를 15회가 넘도록 묻고 또 묻기를 반복하며, 그 죄를 되새기고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이스라엘 왕들의 범죄를 경고하고, 백성들에게 미래를 알리기 위하여 아모스와 호세아를 선지자로 불러 세웁니다.
드고아 사람 아모스와 사회 정의의 한계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되 이스라엘의 서너 가지 죄로 말미암아 내가 그 벌을 돌이키지 아니하리니 이는 그들이 은을 받고 의인을 팔며 신 한 켤레를 받고 가난한 자를 팔며(암 2:6)
아모스는 남유다 출신이나 여로보암 2세 때 북이스라엘에서 활동(주전 760~755년)한 선지자입니다. 아모스는 베들레헴 남쪽 7~8km 지점에 위치한 드고아 출신입니다(암 1:1). 드고아는 해발 820m로 높은 지역이며, 아모스의 직업은 드고아 계곡에서 양을 치는 목자이었습니다(암 7:14). 양을 치는 목자로 있을 때 하나님의 부름을 받습니다.
아모스 7:14에서 “뽕나무 재배자”라고 번역을 했으나 뽕나무 재배는 누에를 치는 양잠을 해야 하는데 부농이 아니면 목자가 누에치기까지 겸업을 하기는 어렵습니다. 그래서 원문을 찾아보니 "뽕나무"는 히브리어로 “쉬크마”이며, 어원이 불확실합니다. 따라서 삭개오가 나무에 올라가서 예수님을 만난 돌무화과(눅 19:4)와 비슷한 나무입니다. 원래 이스라엘은 뽕나무가 없었으며 포로기 이후에 들여온 외래식물로 분류되고 있습니다(정정숙, 성서식물, 크리스챤 뮤지엄, 2007, 174쪽). ‘재배’라는 번역도 “바라쓰”이므로, ‘거두다’는 뜻을 가진 단어입니다. 돌무화과는 익으면 열매가 바로 떨어지므로 재배하기 어렵고, 들판에서 야생하는 나무입니다. 그래서 뽕나무는 들판에서 자라는 돌무화과나무로 보아야 할 것입니다.
그래서 아모스의 직업에서 "쉬크마"와 "바라쓰"라는 두 단어를 종합하면, “돌무화과 열매를 거둔다(또는 줍는다)”는 뜻이 적합할 것 같습니다. 아모스 8:1에서 여름 실과는 무화과일 것입니다. 하나님은 아모스 7:14의 돌무화과와 8:1의 여름 무화과를 비교하여 이스라엘의 죄를 보여주었을 것입니다. 아모스는 자신이 직업상의 선지자는 아니며, 양 떼를 몰고 다니며, 들판에 돌무화과 열매를 줍는 사람이라고 자기 신분을 밝히고 있습니다. 아모스는 전문적인 교육을 받은 바 없는 일개의 목자이지만, 역사에 대한 통찰력과 국내외의 상황과 정세에 대한 상당한 지식을 소유한 자입니다(암 2:10-12:5; 25-27). 아모스는 특별하게 사회적 공의를 외친 자입니다(암 5:15).
이렇게 나무와 과일을 길게 언급하는 것은 드고아 사람 아모스는 신분이 하층민으로 보이기 때문입니다. 아모스는 자신이 상속받은 기업이 없었을 것이고, 있다면 그 기업은 빚 담보로 잡혀있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아모스는 목자이지만, 주인의 양 떼를 돌보아주는 고용인이었을 가능성이 큽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부자가 판을 치는 이 시대에 하층민들의 삶을 대변하기 위하여 아모스를 특별하게 불러 세운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 부자들은 가난한 자에게 신 한 켤레의 값으로 사람을 사며, 머리에 묻은 티끌을 탐을 낸다고 합니다(암 2:6,7). 그러면서 이스라엘 기득권층은 상아궁에 살고 있습니다(암 3:15, 6:4). 사마리아성은 고고학자들에 의해 두 번 발굴되었습니다. 발굴에서 500여개의 상아(코끼리 잇빨)가 발견되었고, 그중에는 예술적 조각품들이 많아서 아모스의 지적이 사실로 드러났습니다.
기득권층은 성문에서 뇌물을 받고 궁핍한 자를 억울하게 합니다(암 5:12). 여기서 성문은 생활에서 발생한 다툼이 있으면 지역 장로들을 불러서 자문이나 판결을 받는 곳입니다. 특히 희년법을 따라 기업 무르기를 하거나 사람의 몸값을 속량할 때 증인을 세우는 곳입니다(룻 4:1.2). 이런 곳에서 증인들이 뇌물을 받고, 부자나 기득권층의 편을 들어 가난한 자들의 판결을 굽게 하는 만행을 저지릅니다. 곧 아모스의 외침은 지도자들이 성문에서 지켜야 할 희년법의 불순종을 신랄하게 꾸짖고 있습니다.
그러나 아모스는 잘못을 꾸짖기만 한 것은 아니고, 미래에 희망을 주는 메시지도 전합니다. 하나님께서 때가 되면 무너진 장막을 다시 일으키고, 남은 자가 내 이름으로 만국을 기업으로 얻게 합니다(암 9:11,12). 여기서 남은 자는 오실 메시아에 속한 백성을 말합니다. 밭을 가는 자가 곡식을 베는 자의 뒤를 이으며, 사로잡힌 몸이 풀려서 포도원을 다시 만들며, 그 과실을 먹는다고 합니다(암 9:13,14). 이것은 희년법이 지켜질 때 이루어지는 경제적 상태를 뜻합니다. 곧 아모스는 우리가 지키지 않은 희년법이 다시 지켜져서 온 세상이 진정한 자유와 정의가 실현되는 사회를 내다보고 있습니다.
그래서 아모스는 희년법을 어기고, 백성들의 삶을 돌아보지 않는 이스라엘 지도자들에게 이렇게 외칩니다. “오직 공법을 물같이 정의를 하수같이 흘릴 지로다"(오직 정의를 물같이, 공의를 마르지 않는 강같이 흐르게 할지어다, 암 5:24).
그런데 이 구절은 주로 진보층에서 그들의 정체성을 들거나 집단 행동이 요구될 때 많이 인용합니다. 또 보수층에서도 간혹(자주는 아니고) 사회 정의가 필요할 때 이 구절을 사용합니다. 이 구절은 하나님의 공의와 사회 정의가 필요한 곳에서는 약방의 감초처럼 등장하는 상투적인 문구입니다. 그러나 자세히 관찰하면, 주로 정치나 선거 등 사회에서 이념이나 분파가 갈려서 극한 대립을 하고 있을 때, 이 말을 끄집어내어 이용합니다. 곧 이 성구를 자기 계층의 기득권 보호나 유지, 그리고 세력 확장을 위해서 사용합니다. 정치를 하든, 공동체를 운영하든, 아모스 5:24의 말씀을 정치적 수단으로 사용하고 있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필자는 이념이 진보든, 보수든, 아모스 5:24의 공의를 말하기 전에 백에 한 번이라도 성경의 희년법을 한번 찾아보라는 말을 해주고 싶습니다. 우리가 성경 희년법을 바로 알고, 깊이 알아야 진보의 설익은 정책에 기울어지지 않으며, 보수의 막힌 틀에서 빠져나올 수가 있다는 뜻입니다.
성경의 희년법을 준행하면 사회는 공산주의 이념보다 더 평등할 수 있으며, 자본주의보다 자유로운 사유재산제와 시장사회가 될 수 있습니다. 물론 필자의 이런 생각은 경제의 구조적인 문제에 국한된 견해입니다. 구조적 문제는 약점을 가진 인간이 꾸려가는 운영 방식과 사고 구조에 따라 정도의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러한 정도의 차이를 감안하여도 희년법은 기존의 양 체제보다는 월등하게 우수하다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지금의 우리 사회는 정치 집단이든, 종교 집단이든 희년법을 수용하지 않습니다. 아니 수용을 한다고 해도 희년법은 생활 실무인데 진보는 정치적 수단으로 이용합니다. 보수는 늘 덮어두고 있다가 한번 끄집어낼 때에는 생활 실무를 종교적 목적으로만 이용하고 곧바로 덮어버립니다. 그래서 진보든, 보수든, 성경의 희년법이 말하는 생활 실무는 너무 모르고 있는 것이 안타까울 뿐입니다.
호세아로 보여주는 하나님의 구속사
(회개를 호소하며, 속량의 유일성을 보여준 사랑의 선지자)
호세아 선지자는 브에리의 아들인데(호1:1), 소속 지파는 모르며 보잘것없는 신분입니다. 호세아는 남왕국의 왕들 중에서 웃시야(10대)에서 히스기야(13대) 왕까지 북이스라엘에서 활동한 선지자입니다(주전 755~722년). 그는 이사야, 아모스, 미가와 같은 시대의 인물로서, 북이스라엘의 13대 왕이었던 여로보암 2세(주전 793~753년) 때에 사역을 시작하여, 주전 722년 북이스라엘이 앗수르에게 멸망하기까지 활동했습니다. 호세아는 북이스라엘의 출신으로는 백성들에게 예언한 내용을 기록으로 남긴 유일한 선지자이며 대표적 선지자입니다.
호세아는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아서 음란한 여성인 고멜과 결혼을 해야 했고, 다시 음란에 빠진 아내를 값을 주고 사서 함께 살아가는 이야기로 시작하고 있습니다(호 3:2). 그런 부정한 고멜과 결혼으로 이스르엘, 로루하마, 로암미 세 남매를 낳습니다.
성경 인명사전을 찾아보면 “호세아는 결혼이라는 은유적 표현을 통해 하나님과 이스라엘과의 사랑을 선포한 사람(호 2:16, 19,20)”이라고 소개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학자들은 호세아가 음란한 고멜과 결혼한 사례가 실제로 있었는지, 상징성을 가진 비유(알레고리)인지를 두고 이견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호세아의 이야기는 음란한 여자와 결혼한 예를 들어 이스라엘의 역사와 하나님의 구속사를 알려주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호세아서는 결혼의 실제 여부를 밝혀내기보다 하나님이 호세아를 통하여 사람들에게 주시려는 메시지가 무엇인지를 찾아보는 것이 중요합니다.
결론적으로 말하면, 하나님은 호세아를 통하여 바알 종교의 속성(음란성)과 여호와가 행하시는 구원의 원리(속량과 구원)를 비교하여 보여주고, 그 원리를 따라서 죄를 범한 이스라엘의 멸망과 미래에 있을 메시아의 구원 역사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호세아는 바알 신, 바알 제도의 세 가지 속성을 알려줍니다.
여호와께서 처음 호세아에게 말씀하실 때에 여호와께서 호세아에게 이르되 너는 가서 음란한 여자를 맞이하여 음란한 자식들을 낳으라 이 나라가 여호와를 떠나 크게 음란함이라(호 1:2)
하나님은 호세아가 음란한 여자를 아내로 맞게 하여 이스라엘의 종교, 정치, 경제를 물들인 바알 신의 음란한 모습을 보여줍니다. 바알 신은 탐욕을 부추기고 쾌락과 부를 추구하는 신인데, 바알 신의 음란성은 크게 보면 세 가지로 나눌 수 있겠습니다.
첫째, 바알 신의 육체적 음란입니다. 바알은 남성 신이며, 주인이고, 남편 신입니다. 이에 비하여 함께 있는 아세라와 아스다롯은 여성 신입니다. 바알 신의 아내이고, 어머니입니다. 그래서 바알 종교는 제사 자체가 남성과 여성이 만나서 음란 행위로 제사를 하며, 육체적인 쾌락을 추구합니다. 특히 몰록 신을 비롯한 우상 숭배자들은 낳은 아들을 불에 살라 제물로 바치기도 하는 잔인성을 가집니다(왕하 16:3, 렘 19:5). 하나님은 이런 인신 제사에 격노하며, 엄하게 금하고 있습니다(레 18:21).
한국 기독교는 우상 숭배나 신체적 음란에 대해서는 민감한 편입니다. 그런데 그 민감성은 여기서 그치는 것이 종교의 한계입니다.
둘째, 바알 신의 종교적(영적) 음란입니다. 종교가 인간의 탐욕을 채워주워 만족하게 하는 신을 믿는 것을 뜻합니다. 그래서 이러한 사람의 사적인 만족을 추구하는 바알 종교는 종교를 자신의 탐욕을 채우는 수단으로 이용합니다. 종교가 이기적이고, 사적인 풍요만을 기원합니다. 여기서 이기적이고 사적이라는 말은 개인뿐만 아니라 공동체 내에서도 자기 집단의 이익만 추구하는 속성을 가진다는 뜻입니다. 이것이 흔히 말하는 기복(祈福) 신앙입니다. 기독교가 하나님이 주시는 복을 빌고 풍성한 복을 추구하는 것은 맞습니다.
그러나 종교가 자기 자신과 가족, 자기 소속, 자기 공동체의 목적(이익) 달성만 생각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하나님의 계명은 첫째가 하나님 공경이고, 둘째가 이웃 사랑입니다. 이 계명을 지키려면 하나님을 위해, 이웃을 위해, 자기를 희생하는 나눔과 헌신이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종교가 헌신이 없고, 개인과 공동체가 자기 이익(목적)만 챙기는 이기적 태도를 가지면, 그런 신앙에는 바알 우상이 틈을 타고 들어오게 됩니다.
그러므로 한국 기독교가 종교적 열성은 가졌으나 기복 신앙에 빠져 있거나(이에 편승하여 복음 전수) 기복 신앙이 가진 폐단을 이겨내지 못하는 것이 한계입니다. 신앙 공동체라고 해도 개인의 치병기복만 빌어주고, 이웃의 아픔이나 삶에 대해 관심이 없다면, 그런 공동체는 바알 종교의 속성을 가졌다고 볼 수 있습니다. 계시록이 경계하는 음녀가 바로 이에 해당할 것입니다(계 17:1,2). 미래를 보여주는 소아시아 일곱 교회는 한두 교회를 제외하고는 모두 문제가 있습니다.
예후는 바알 제단을 헐고 추종자를 척결했지만, 그것은 외형뿐이었습니다. 그의 마음(종교성)과 행동, 정치적, 경제적 삶은 바알 우상을 여전히 섬기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후는 여호와의 계명을 어기고 백성들의 생활을 살피지 못했습니다. 유대인들은 겉으로는 하나님을 섬기지만, 행동은 철저한 자기 중심적이고, 이기적(배타적)이기 때문에 바알을 따른 자가 많습니다.
지진으로 3만 명이 죽었다는 세상 소식이 들려오는 바로 그날, 그 시간, 때마침 본문에 지진이 들어있는 그 시간마저도 "이웃의 지진 이야기"는 한 마디 언급이 없었습니다. 오전은 기도로 인생을 역전시킨 성공 사례를, 오후는 "지진(행 16:26)"이 들어있는 성경을 본문으로 읽었습니다. 그런데 그날 그 시간, "지진"이라는 용어는 말 한 마디 없었습니다. 바울과 실라가 옥문이 열려서 풀려 나듯이 무너진 건물 더미에 같힌 사람 구조에 대한 말 한마디가 없습니다 참으로 신기하고 놀라워서 이 시간의 기억을 기록으로 남겨둡니다. (기도의 성공 사례 : 2023, 2.11. AM 11시, 지진 본문 : PM 2:30).
셋째, 바알 신의 경제적 음란입니다. 바알 신은 사람에게 물질의 풍요를 추구하는 신입니다. 그래서 이 바알 신은 우리의 생활, 곧 경제활동을 통하여 현실적 이권을 추구하게 만듭니다. 생활에서 사람을 유혹할 줄을 아는 아주 교묘한 기술을 가진 신입니다. 예를 들어서 장사를 한다면, 좋은 상품을 팔기보다 마진(차액)이 큰 상품을 파는 경우 인간의 그 심성에는 바알 신이 들어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만약, 약을 파는 자나 처방하는 자가 몸에 좋은 약을 두고, 마진이 높은 약을 골라서 파는 경우가 이에 해당합니다. 지금도 이러한 바알 신은 우리의 생활 속에서 깊숙하게 침투해 있기 때문에 우리가 생활에서 그 유혹을 이겨내기 어렵습니다.
이 바알 신이 구약시대는 이스라엘, 오늘날은 신앙 공동체에도 들어와서 성경의 희년법을 파기하도록 만들었습니다. 그 대신 세속적 토지법을 세상에 오염시키고 키웁니니다. 성경 희년법은 토지 거래에서 시한부 거래만 허용하기 때문에 거래액의 파이(총액 크기)가 작아집니다. 따라서 토지 거래로 인해 발생하는 차익이 줄어들어서 이에 따른 문제의 크기가 작아집니다. 그러나 세속 토지법은 영구 거래를 하게 하여 이 파이를 크게 키웁니다. 그래서 값이 커져서 발생하는 문제도 커지고, 무르기 제도마저 없애버려서 커진 문제는 물가를 올리는 외에는 해법이 없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이 파이가 커지고, 차익이 커지는 토지의 영구매매와 영구주식을 그렇게 좋아합니다. 이것이 지금은 원금도 거의 존재하지 않은 가짜 돈, 가상화폐까지 나와서 사람의 영혼을 갉아먹고 있습니다. 가상화폐는 90% 이상이 내재가치가 없는, 곧 실물 없는 가짜물입니다. 계시록 18장이 말하는 특수 상인들이 이에 해당할 것으로 보입니다.
그런데 바알 신이 추구하는 물질 탐욕과 이를 채워주는 인간 행동은 에덴에서부터 생긴 것이므로(창 3:6), 아마도 뱀이 결박을 당하기 전에는(계 20:1) 사람의 신앙으로 이기기가 어려울 것입니다.
호세아는 하나님의 구원원리, 곧 속량의 유일성을 알려줍니다.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이스라엘 자손이 다른 신을 섬기고 건포도 과자를 즐길지라도 여호와가 그들을 사랑하나니 너는 또 가서 타인의 사랑을 받아 음녀가 된 그 여자를 사랑하라 하시기로 내가 은 열다섯 개와 보리 한 호멜 반으로 나를 위하여 그를 사고 그에게 이르기를 너는 많은 날 동안 나와 함께 지내고 음행하지 말며 다른 남자를 따르지 말라 나도 네게 그리하리라 하였노라(호 3:1~3) 내그 그들을 스올의 권세에서 속량하며 사망에서 구속하리니...(호 13:14)
성경이 말하는 구원이 무엇인지? 그 구원의 범위는 어디까지이며, 어떻게 이루어지는지를 알아야 합니다. 다시 말하면 구원이 무엇인지, 어떻게 구원을 받는지를 알아야 호세아서를 이해할 수가 있습니다. 본문으로 제시한 호세아 3:1~3은 성경이 말하는 구원의 방법과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 죄를 속량하는 데 사용하신 구원의 원리를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내가 빚을 졌으면 그 빚을 갚아야 내가 물질적인 자유함을 얻을 수가 있습니다. 그렇지 못하며 내 마음은 늘 이 빚을 갚아야 하는 부담감을 갖고 살아가게 됩니다. 그런데 이 빚은 내가 갚지 못할 경우 이를 형제가 값을 치러서 대신 갚아 주거나 채권자가 스스로 탕감을 해줍니다. 이것이 속량입니다.
프로 축구에서 선수가 구단에 몸이 팔려서 묶여 있으면 자유가 없습니다. 이것 역시 스스로 이적료를 내면 내 몸이 풀려나서 자유함을 얻습니다. 내가 다른 구단으로 몸을 옮길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내가 그 몸값을 치르지 못하면 형제나 구단 대표가 대신하여 값을 치러줄 경우 이것이 속량입니다.
내가 목돈이 필요하여 희년법대로 토지를 팔고(잡히고) 돈을 빌린 경우(레 25:15,16), 그 팔린 토지를 형제나 이웃이 값을 치러 무르기를 해주면(레 25:24~28) 이것이 속량입니다. 필자가 자주 언급하고 있는 계대결혼도 속량의 한 방법입니다.
내가 하나님께 죄를 지어 영혼이 자유롭지 못하거나 죽어야 할 운명에 처해지면, 하다 못해 짐승 한 마리가 피를 흘려서라도 죽어야 나의 죄가 사해집니다(레 17:11).
이것이 성경이 말하는 속량(贖良, redemption)입니다. 성경이 말하는 구원은 이 속량이 유일한 수단입니다. 여기서 유일 수단이란 다른 방법이 없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태어날 때부터 탐욕을 이기지 못하는 원죄를 가지고 태어났고, 살면서도 이 타고난 탐욕 때문에 자꾸 죄를 짓게 됩니다. 이 죄를 갚지 못하면 우리는 죽어야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이 죄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레위기 제사법을 만드셨습니다. 짐승이 내 죄를 대신하여 피를 흘려 죽고 내가 사는 것입니다. 이것이 속죄의 제사입니다.
호세아의 속량과 십자가의 구원원리
이 죗값은 너무 커서 사람이 스스로 감당하기는 불가능합니다. 그리고 이 속죄를 위한 짐승의 피 제사는 반복되어야 합니다. 애꿎은 짐승만 자꾸 죽습니다. 그래서 이 죗값을 사하는 큰 제사가 필요한 데, 그 값을 예수 그리스도가 대신하여 치르고 우리를 살려 주십니다. 이것이 바로 십자가의 도(道)이고, 죄를 사하는 유일한 수단이며, 거룩한 구원의 방식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분명하게 알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성경이 말하는 구원의 원리, 속량은 공짜가 아니고 반드시 그 대가나 값을 치러야 합니다. 앞에서 예를 든 속량의 여러 방식을 보면 반드시 그 대가를 치르고 있습니다. 그래서 사람이 죄를 지으면 반드시 그에 대한 대가나 희생을 치러야 죄 문제가 해결됩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세우신 이 속량의 해결법은 이것을 내가 할 수 없을 때 남을 대속자로 세워서 해결을 해주는 것입니다. 이것이 성경이 말하는 속량이며, 구원의 유일한 수단입니다. 그러므로 속량은 창조의 질서이고, 경제생활에서는 시장원리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희생된 것은 우리를 살리기 위한 유일한 수단이었습니다. 예수님이 죄가 있어서 죽은 것은 아닙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피흘려 희생하지 않아도 우리를 살려줄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는 왜 십자가에 희생되는 방법을 택하여 우리를 구원하였을까요?
하나님의 장조질서에는 문제가 생겼을 경우, 그 문제는 원인자를 제거해야만 문제가 비로소 해결이 됩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그 문제의 해결법을 따라서 십자가에 희생이 되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자신의 희생으로 우리에게 속량의 원리를 가르쳐 주고, 죄를 지은 사람에 대한 사랑을 확정하신 것입니다(고후 5:14, 엡 5:2). 이것은 문제 해결을 위한 속량에도 궁극적 완성자는 바로 예수 그리스도라는 뜻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몸소 이렇게 값진 희생을 치러서 은혜를 베풀고 사랑을 실천하심으로, 우리는 은혜가 무엇인지, 사랑이 무엇인지를 깨달아 알게 됩니다. 그래서 우리도 삶에서 문제가 생기면, 그렇게 서로서로 값을 치른 속량으로 문제를 해결하라는 뜻입니다. 이것이 "주님 가르치신 기도"에서 담겨있는 빚을 없애고, 죄를 사하는 희년법의 내용입니다(마 6:12, 눅 11:4). 그러므로 성경이 말하는 속량에는 반드시 값을 치러는 시장원리, 대속자를 세우는 문제 해결의 유일 수단, 희생자로 인하여 문제를 해결하는 사랑의 방법이 하나로 융합되어 있습니다.
호세아가 음란한 고멜을 아내로 맞이한 것과 다시 음란에 빠진 아내를 값을 치러 집으로 데려오는 것은 바로 성경이 말하는 속량의 구원원리입니다. 고멜이 죄를 지었어도 그 생명은 살아야 하고, 자유함을 얻어야 합니다. 성경이 말하는 구원은 윤리 도덕과는 차원이 다른, 생명을 살리고, 묶인 것으로 풀어주는 수단입니다. 고멜이 몸을 파는 음란 행위를 했더라도 고멜은 사람이며, 귀한 생명입니다. 고멜이 살아서는 음행으로 몸을 팔았더라도 사후에는 하늘 천국으로 가야합니다. 그런데 고멜은 몸이 남자(또는 사창가)에게 성의 담보물로 팔려 있으므로 값을 치러야 풀려날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호세아에게 값을 치르게 하여 음란한 아내를 구원하여 자유하게 해주라고 합니다. 예수님은 간음한 여성을 정죄하지 않고, 용서해 주십니다(요 8:10,11).
하나님이 보여주신 고멜의 경우는 한 가정, 개인의 문제가 아닙니다. 위 본문은 “이스라엘이 다른 신을 섬길지라도 여호와가 그를 사랑하나니”라고 합니다. 호세아의 아내에게도 구원은 필요하고, 사랑의 대상자입니다. 이와 같이 이스라엘 백성들이 우상을 섬기고 생활은 바알법을 따라서 나라를 망하게 하고 있지만, 그래도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구원을 베푸시겠다는 뜻입니다. 그러니 호세아 너도 그렇게 한번 해 보라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죄를 지었으니 그 죄값은 누가 담당을 하든 죗값을 치러야 하고, 그 후는 다시 사는 중생의 과정이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호세아를 통하여 죄를 지은 이스라엘은 나라가 패망할 것이며, 이때 시대적 책임이 있는 에브라임 지파는 족보가 끊어질 것을 알려줍니다. 그런데도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남은 자를 살리시고, 새 역사를 이루어 가시겠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은 호세아의 아들 이름을, 이스르엘과 이스라엘의 대비(호 1ㅣ4,5), 로루하마와 루하마, 로암미와 암미라고 서로 상반된 의미를 갖게한 것도 그 이름을 통하여 구원의 의미와 원리를 알려 주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호세아를 통하여 이토록 자상하고 실감 나는 구원의 방법(원리)을 알리며, 하나님의 사랑을 보여주십니다.
호세아가 본 에브라임 지파와 이스라엘의 미래
벌하는 날에 에브라임이 황폐할 것이라 내가 이스라엘 지파 중에서 반드시 있을 일을 보였노라 유다 지도자들은 경계표를 옮기는 자 같으니 내가 나의 진노를 그들에게 물 같이 부으리라 에브라임은 사람의 명령 뒤따르기를 좋아하므로 학대를 받고 재판의 압제를 받는도다 그러므로 내가 에브라임에게는 좀 같으며 유다 족속에게는 썩이는 것 같도다(호 5:9~12)
여로보암 2세는 아람을 공격하여 그 수도인 다메섹을 정복하고 영토를 확장시킴으로써 그 경계가 하맛 어귀에서 이르고, 북이스라엘은 다윗과 솔로몬 이후 최고의 정치적 번영을 누리게 됩니다(호 4:7). 그러나 에브라임은 우상과 연합하였습니다(호 4:17). 이스라엘은 종교적으로는 우상을 섬기고, 경제적으로 오므리의 율례를 답습하여 부패하였습니다(미 1:11, 6:16). 앞에서 본 아모스는 이스라엘의 기득권층들이 바알과 이방 제도로 부패한 것을 경고하고, 사회 정의를 부르짖고 있습니다.
호세아도 아모스와 같은 말을 하고 있습니다. 호세아는 에브라임 지파에게 반드시 닥칠 징계를 알리고 있습니다. 에브라임은 학대와 재판을 언급하며, 여호와의 계명을 따르지 않고 사람의 명을 따른다고 했습니다. 그러면서 유다도 지계표를 옮기는 자들과 같다면서 진노를 나타냅니다. 여기서 사람의 명령과 지계표의 옮김이란 가장 큰 것 하나만 지적하면 북이스라엘과 남유다가 모두 희년법을 위반한 사례입니다.
하나님이 호세아를 통하여 보여준 음란한 바알 신의 실체가 이것입니다. 이 바알 신이 이스라엘 사회에 들어오면서 육체적 음란 행위가 시작되고, 이것이 제단 제사에서 제물을 드리면서 그 제물에 기복을 추구하는 신을 섬기는 종교적 음행까지 커집니다. 그리고 제단 밖으로 나오면 이 죄가 더 크게 커집니다. 이것이 바로 생활에서 아무 제약도 받지 않는 자유함으로 나의 부와 권력을 채워주기 쉬운 사람의 계명과 제도를 쫓는 것입니다. 이것이 희년법을 버리고 세속 경제법을 취하는 바알 경제법입니다. 이스라엘 지도자와 백성들이 바알 신을 섬기는 이유가 바로 쾌락과 탐심을 채워주기 쉬운 바알의 생활 방식과 제도가 그 안에 들어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바알 신을 강하게 거듭거듭 경고를 하여도, 지도자와 백성들은 돌아서면 다시 바알 신을 섬기고 그 제도를 끈질기게 받아드리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잠을 자지 못하여 졸릴 때는 장수라도 눈꺼풀 내려오는 생리적 자용을 이겨내지 못합니다. 이와 같이 사람은 영웅호걸이고, 도덕군자라도 인간의 탐욕을 부추겨서 그 만족을 채워주는 바알 신과 바알 제도의 심리적 유혹을 이겨내기가 어렵습니다.
본문에서 호세아의 경고는 특별히 에브라임을 지칭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에브라임은 북이스라엘 전체를 대표하는 이름입니다. 북이스라엘은 10 지파로 구성되지만, 이 10 지파 중에서 에브라임과 므낫세가 형제애로 함께하는 요셉 지파이며, 북이스라엘 영토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습니다. 요셉 지파 중에서도 에브라임 지파는 할아버지 야곱으로부터 장자권을 직접 상속받습니다. 그래서 에브라임은 북이스라엘에서 대표적 장자권자입니다. 그래서 호세아는 호세아 전체에서 에브라임을 30여 회나 언급하면서 북이스라엘의 대표적 장자권자를 꾸짖고 있습니다.
호세아의 경고와 예언은 주로 북이스라엘에 대한 것이지만, 본문에서 본 바와 같이 남유다도 포함되고 있습니다. 북이스라엘의 대표는 에브라임 지파이고, 베냐민 지파가 들어있는 남유다의 대표는 유다 지파입니다. 그래서 호세아는 북쪽은 에브라임을, 남쪽은 유다를 지목하여 경고하며 미래를 예언하고 있습니다. 이 경고를 듣지 않으면 나라가 망할 것이라고 말입니다.
그 경고와 예언대로 북이스라엘을 주전 722년에 망했습니다. 북이스라엘은 여로보암 2세에 전성기를 맞았으나 아들 스가랴는 6개월로 끝이 납니다. 스가랴를 죽이고 왕이 된 살룸은 1개월로 그칩니다. 그다음 4명은 3명이 모반으로 왕이 되지만 앗수르에 의해 패망합니다. 유다는 북이스라엘보다는 136년 늦은 주전 586년에 패망합니다.
희년법과 족보로 보는 에브라임 지파와 북이스라엘의 종말
에브라임이 우상과 연합하였으니 버려 두라(호 4:17) 에브라임의 영광이 새 같이 날아 가리니 해산하는 것이나 아이 배는 것이나 임신하는 것이 없으리라 혹 그들이 자식을 기를지라도 내가 그 자식을 없이하여 한 사람도 남기지 아니할 것이라 내가 그들을 떠나는 때에는 그들에게 화가 미치리로다(호 9:11,12)
에브라임 지파는 족보에서 끊어졌습니다. 에브라임 지파는 마지막 시기에 나올 12 지파에도 이름이 없습니다. 계시록을 보면 이스라엘 12 지파 중 므낫세 지파는 이름이 남아있지만, 에브라임 지파는 요셉 지파로 이름이 바뀌어버립니다(계 7:8). 이것은 북이스라엘이 느밧의 아들 여로보암의 죄를 쫓아서 하나님의 계명을 어기고 바알 법을 따랐기 때문입니다. 10 지파 모두가 이 범죄와 관련되지만, 하나님은 그중에 장자권자로서 그리고 북이스라엘의 대표 지파로서 시대적 책임이 있는 에브라임 지파에게 그 책임을 물은 것입니다(호 4:17, 13:1).
사실 에브라임은 야곱의 일가족을 기근에서 구한 요셉의 아들입니다. 가나안 땅을 정복하여 가나안 족속들이 섬기든 바알 신을 내어쫓는 데 크게 쓰임을 받은 여호수아도 에브라임 지파입니다. 그래서 유다 지파가 5대 이상 장기간 족보가 끊어진 애굽 종살이 시기에도 에브라임의 후손들 족보는 한 대도 끊어지지 않고, 사사시대 초기까지 이어왔습니다. 하나님은 에브라임 지파에게 장자권을 줄 때는 그만큼 장자권에 합당한 권리와 책임을 다하기를 바랐습니다. 그러나 그 장자권의 책임을 감당하지 못한 에브라임 지파는 하나님이 이렇게 족보에서 이름을 빼버리십니다.
물론, 하나님이 이런 질책으로 인하여 에브라임 지파가 모두 구원에서 제외된 것이 아닙니다. 에브라임 지파에 소속된 족속들은 남아있습니다. 이것은 애굽 종살이에서 유다 지파의 족보가 장기간 끊어져 있었어도, 유다 지파는 20세 이상 장정들만 7만 6천 500명이 남아있었던 것과 같습니다(민 26:22). 그래서 하나님은 이렇게 말씀하시며 에브라임 족속들과 이스라엘의 남은 자들에게 소망을 주고 호세아의 예언을 마칩니다.
에브라임의 말이 내가 다시 우상과 무슨 상관이 있으리요 할지라 내가 그를 돌아보아 대답하기를 나는 푸른 잣나무 같으니 네가 나로 말미암아 열매를 얻으리라 하리라 누가 지혜가 있어 이런 일을 깨달으며 누가 총명이 있어 이런 일을 알겠느냐 여호와의 도는 정직하니 의인은 그 길로 다니거니와 그러나 죄인은 그 길에 걸려 넘어지리라(호 14:8,9)
여호와의 도(道)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말하며, 길은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는 참 길을 의미합니다(요 14:6).
필자는 생활 실무로 이스라엘 백성들이 도로교통법처럼 지켜야 했던 희년법을 중심에 두고 성경을 읽거나 이해하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족보는 세상에서 실제로 있었던 한 가계의 역사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이 세상을 인도하고, 구원하는 구속사의 축약입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의 족보도 생활 실무인 희년법으로 풀어보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족보를 희년법으로 풀어보니 사람들이 바알법을 따르고, 희년법은 지키지 않은 이유가 밝혀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바알법의 추종과 희년법의 준수 여부가 예수 그리스도의 족보의 계승과 단절에 직접적인 인과관계가 있다는 것이 구체적으로 드러나고 있습니다.
북이스라엘은 에브라임 지파인 느밧의 아들 여로보암부터 오므리 왕조, 아합 왕조, 그리고 바알 우상을 청소했던 예후 왕조마저 끝내 버리지는 못하고 바알 신과 바알 제도의 유혹에 빠지게 됩니다. 그래서 나라가 실패합니다. 이에 하나님은 왕들을 대신하여 아모스와 호세아를 선지자로 세워서 활동하게 하십니다. 그리고 북이스라엘에서 시대적 책임을 다하지 못한 에브라임 지파의 족보는 끊어버리고, 그 대신 유다 지파의 족보만 이어지고 있습니다. 여기서도 왕들의 족보는 자꾸 끊어지고 있으나 같은 시대에 희년법을 따라 베들레헴 기업을 지키고 있는 한 가계의 계보, 곧 누가복음의 족보는 한 대도 끊어지지 않고 이어져 내려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경 역사에 들어있는 희년법, 곧 족보에서 씨와 땅을 이어가는 하나님의 역사적 경륜을 살펴보고 찾아내어야 합니다. 이것이 희년법과 예수 그리스도의 족보로 살펴보는 북이스라엘의 역사이며, 성경의 구속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