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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르크스의 복수
Marx’s Revenge(2002)
메그나드 데사이 지음, 김종원 옮김, 아침이슬 2003.
자본주의 논쟁: 독일의 논쟁
유럽 마르크스주의자 사이에서 벌어진 자본주의 행로에 관한 논쟁은 에두아르트 베른슈타인에 의해 촉발되었다. 독일 사민당 지도자들이 망명을 떠나야 했던 시기에 베른슈타인은 스위스로 갔다가 1888년에는 그곳에서도 머물 수 없어 영국으로 건너갔다. 1890년 독일 사민당이 합법화되고 나서도 그는 1901년까지 영국에 머물렀다. 자본주의의 혁명적 종말이라는 진단에 도전한 수정주의 이론을 그가 구축한 것은 바로 이 시기였다. 당내 지도적 마르크스주의자이자 엥겔스와 긴밀히 협력하는 동료이며 당의 평론지 《사회민주주의자》의 편집인으로서 베른슈타인은 마르크스주의의 표준 노선을 걷어차 버렸다. 나중에 당의 노지도자 아우구스트 베벨에게 쓴 편지에서 말한 것처럼, 그는 “마르크스의 가르침을 확장함으로써 그것을 실제 현실에 부합하도록 만들려고 했다.” 이 현실이란 자본주의의 계속되는 생존과 경기순환의 상대적 온건성이었다.
자본주의는 새로운 기술뿐만 아니라 새로운 사회적 발전이 자본주의에 던진 도전에 맞추어 스스로를 조정하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베른슈타인은 영국판 자본주의를 고찰함으로써 깨달았다. 그래서 그는 단지 마르크스 이론의 이 측면 또는 저 측면에 대한 약간의 국부적 비판이 아니라 이론 자체의 근본적인 수정을 원했다. 1896년에서 1898년 사이에 당 기관지 《새 시대》에 기고한 ‘사회주의의 제 문제’라는 제목의 일련의 논고에서 그는 끊임없이 증대되는 위기와 노동자 계급의 궁핍화라는 테제에 의문을 던졌다. 그는 대안으로 진화적⋅개량주의적 사회주의 길이 존재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163-164
베른슈타인은 마르크스 사후 독일 사민당이 설립한 새로운 마르크스주의 교회의 첫 배교자였다. 마르크스 자신이라면 자기 모든 저술의 문자적 진리를 그렇게 고집했을 것인지는 논란의 여지가 있다. 러시아 무정부주의자 바쿠닌이 불평했듯이, 그는 제1 인터내셔널 동료들과 관계에서 종종 독단적이었다. 그러나 러시아 마르크스주의자 베라 자술리치와 교환한 서신에서 마르크스는 자신의 역사 이론의 범위에 관해 제자들이 주장하고 있는 것보다 훨씬 더 겸손하였다. 마르크스의 개인 성격은 여기서 다룰 문제가 아니다. 마르크스는 너무도 인간적이었고, 그래서 명백한 오류에 빠지기도 쉬웠다. 그러나 1890년대 말에 이르러 독일 사민당 지도자들−칼 카우츠키, 아우구스트 베벨, 빌헬름 리프크네히트−이 결정한 것을 당원들이 지지하면서 마르크스의 교의는 진리가 되었다. 이 교의는 《자본론》 전체에 입각한 것이 아니라 1권 32장에 나오는 하나의 구절에 의거한 것이었다. 그리하여 1891년에 채택된 에어푸르트 강령의 한 조항은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프롤레타리아트와 소멸해 가는 중간 계급인 소영업자와 농민에게 (독점자본주의는) 생계 불확실의 증대를 뜻한다. 즉 궁핍과 억압과 종속과 타락과 착취를 뜻한다.
프롤레타리아가 계속 늘어나면 늘어날수록 노동 예비군의 규모는 더욱더 거대해지고 착취자와 피착취자 사이의 대립은 더욱더 날카로워진다.……
유산자와 무산자 사이를 가르는 심연은 산업 공황에 의해 더 한층 멀어진다. 공황은 자본주의 체제에 그 원인을 가지고 있고, 자본주의 체제가 발전함에 따라 더욱더 광범위해지고 파괴적으로 된다.164-165
이것은 통속적 마르크스주의이다. 전세계 수백만 사회주의자에게 이데올로기적 기치로 복무해 온 마르크스주의는 바로 이것이다. 이러한 자본주의 상(象)은 내가 이미 주장했듯이, 《자본론》 1권 7편이나 또는 《자본론》 3권의 이윤율 저하론에서 서술되고 있는 마르크스의 공황 이론에 의해 지지받지 못한다. 분명히 말하지만, 더욱더 증대하는 노동 예비군은 그 이론의 필수적인 부분이 아니다. 《자본론》에서는 그저 하나의 경기 하강기에서 다음 하강기까지 노동 예비군의 증대를 예언하고 있을 뿐인데, 이조차도 19세기 후반의 많은 시기들에서는 경험적으로 입증되기 어렵다. 베른슈타인의 대답은 이러했다. “우리가 가까운 미래에 부르주아 경제의 붕괴를 기대해야 한다는, 그리고 사회민주주의는 그 같은 임박한 파국이라는 전망에 맞추어 전술을 바꾸어야 한다는 관점에 나는 반대한다.”
불꽃을 지키는 파수꾼으로서, 마르크스주의의 교황으로서 카우츠키는 격노하였다.
당신의 마르크스주의는 붕괴했습니다. 당신은 당신의 마르크스주의를 더 높은 형태로 한층 더 발전시킬 필요가 없습니다. 당신은 마르크스주의의 비판가들 앞에서 항복한 것입니다.……당신은 영국인이 되기로 결정했습니다. 책임을 지고 영국인이 되십시오.…… 당신이 겪은 상황 전개는……독일 사회민주주의로부터 기수를 다른 쪽으로 돌린 것입니다. 비록 사회주의로부터는 아니라 하더라도 말입니다. 영국 운동에서 한자리를 차지하고 영국 사회주의의 대표자나 되도록 하십시오.165-166
여기서 카우츠키는 온갖 색조의 사회주의자들에게 훨씬 더 심각한 것이 될 하나의 문제를 무심코 드러내고 있었다. 자본주의는 글로벌한 규모로 발전해 왔다. 자본주의는 각국에서 불균등하게 발전해 왔고, 이 불균등성은 자본주의 과정에 본질적인 것이었다. 그러나 사회주의 운동은 일국적이었는데, 왜냐하면 사회주의 운동의 초점은 평화적으로든 혁명적 수단에 의해서든 정치 권력의 장악에 맞추어져 있었기 때문이다. 사회주의 운동은 프랑스 혁명식 권력 장악 모델에 사로잡혀 있었다. 그러나 자본주의가 글로벌한 현상이라면 영국에서 사회주의자들이 어떻게 자본주의에 성공적으로 도전할 수 있을 것인가?
마르크스주의 논쟁은 불안하게 이어져 갔다. 마르크스의 이론을 글로벌 자본주의에 대한 이론으로 받아들이기는 했지만, 그 이론을 특정 정당이 번성하는 특정 나라에 적용하면서 말이다. 그러나 혁명적 좌파는 독일, 폴란드, 러시아, 프랑스, 네덜란드 등에 존재했으며 국제주의적이었다. 이들 가운데 가장 총명한 이가 폴란드 경제학자인 로자 룩셈부르크였다. 룩셈부르크는 독일 사민당에서 활동적 생애를 보냈고 1919년 일부 불만을 품은 독일 군인의 손에 죽임을 당하였다. 로자 룩셈부르크는 베른슈타인이나 그 밖의 다른 사람들보다 훨씬 더 깊은 지적 차원에서 자본주의의 동학 문제를 제기했다.166-167
물론, 문제들 가운데 하나는 자본주의의 최종 위기의 시기를 예상하는 것이었다. 자본주의의 붕괴는 얼마나 가까이 임박했는가? 독일 사민당의 수사(修辭)는 이 점에 대해 양면적이었지만, 그러나 위기가 점점 더 심화되고 있다는 생각에는 변함이 없었다. 5장에서 내가 말했듯이, 《자본론》의 계시록적인 제32장조차도 자본주의의 임박한 붕괴를 예언하는 것으로는 읽힐 수 없다. 그 장은 단지 자본주의에서 사회주의로의 이행은 봉건제에서 자본주의로의 이행보다 시간이 덜 걸릴 것이라는 점만을 말하고−다소 에둘러서−있다. 그러나 그 기간은 4백 년일 수도 있고 6백 년일 수도 있다. 어떤 정당도 지지자들에게 그러한 약속을 하면서 유지될 수는 없다. 그래서 독일 사민당은 시간표를 단축시켜야만 했다.
그러나 《자본론》 2권의 이면에는 마르크스의 재생산 표식 문제가 존재했다. 이 표식은 자본주의의 실제 전진 또는 가능한 전진−위기로부터 자유롭고 안정적인 영구 성장−의 표식인가, 아니면 자본주의의 지속적인 성장이라는 것이 자본가들 간의 조화로운 투자 행태를 전제로 하기 때문에 사실상 그것이 불가능함을 입증하는 것인가? 어쨌든 마르크스주의자라면 어떻게 끊임없이 확대되는 상품−사용가치−생산이 시장을 발견할 것이라고 믿을 수 있겠는가? 노동자는 경제가 확대됨에 따라 더욱더 궁핍해지며, 그리하여 소비재 재화를 위한 시장을 공급하지 못하게 된다는 것이 마르크스주의자의 가정이다. 확실히 노동자 쪽에서 이와 같이 시장을 공급하지 못하게 되는 상황이 발생하면 체제는 무너져 내린다. 결국 투자의 유일한 목적은 이윤을 남기고 팔 수 있는 물건을 생산하는 것이다. 그리고 물건이 팔릴 수 없다면 자본가가 무엇 때문에 계속해서 투자를 하겠는가?167
이 문제의 이면에는 왜 자본주의가 많은 사람들이 마르크스가 예언했다고 생각하는 것처럼 자기 파괴적이지 않은가 하는 의문이 담겨 있다. 베른슈타인은 대단위 산업−자본의 집중−의 출현으로 자본가가 생산량을 통제하고 과잉 생산을 피할 수 있는 능력이 개선되었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만일 그렇다면, 자본의 집중은 경쟁 업체를 몰아내고 계급투쟁을 격화시킨다는 마르크스의 예언과 정반대의 효과를 낳게 된다. 이 때문에 자본주의가 19세기를 넘어 계속해서 생존하고 있는 현상은 유럽 마르크스주의자 사이에서 열띤 논쟁의 주제가 되었다. 이 논쟁 과정에서 그들은 케인스가 1936년 《고용, 이자 및 화폐의 일반 이론》에서 유효 수요 문제를 처음 제기하면서 주류경제학의 일부가 된 많은 쟁점들을 제기했다. 당시 주류 경제학은 과소 소비나 과잉 투자 문제에 관심을 두지 않았는데, 멩거나 제번스 또는 마셜 같은 주요 경제학자들의 저작을 보면 확실히 그러했다.
논쟁 와중에 발간된 어수선할 정도로 방대한 문헌 가운데 가장 우수한 것은 로자 룩셈부르크의 《자본축적론》이다. 그녀는 독일 사민당 내 좌파의 일원으로서, 당시 혁명적 이론(베른슈타인에 반대하여)을 개량주의적 실천(좌파에 반대하여)과 결합시키고 있던 카우츠키에 대한 예리한 비판가였다. 논쟁에서 룩셈부르크가 기여한 것은 그녀가 마르크스의 재생산 표식에 대해 내재적 비판을 가했다는 점과 그리하여 이 논쟁 기간 전체를 통해 마르크스의 방법을 사용하여 마르크스를 비판한 유일한 마르크스주의자라는 점이다. 마르크스의 재생산 표식에서는 기계재(생산재)를 생산하는 부문과 임금재(소비재)를 생산하는 부문, 이 두 부문이 노동자의 부족 없이, 즉 수요의 부족이나 신용의 결여 없이 병행해서 확대되는 것으로 되어 있다. 마르크스는 이 맥락에서 화폐의 문제는 제기조차 하지 않았다. 제1부문의 자본가들은 그들의 모든 생산물을 판매한 것으로, 즉 가치와 잉여가치를 실현시킨 것으로 확신하기도 전에 어디서 투자할 화폐를 발견한 것인가?(5장의 M→C→C’→M’도식을 상기하라). 자본가들이 생산물을 판매하는 문제, 노동자를 발견하는 문제, 혹은 투입 자재와 노동력을 구매할 화폐를 가져야 할 필요를 마르크스는 어떻게 무시할 수 있었는가?168-169
룩셈부르크는 자신의 책에서 마르크스 경제학에 두 가지 주요 공헌을 했다. 첫째, 그녀는 선진 자본주의 경제의 수요 문제를 그 선진국의 제국 주변부와 연결시켰다. 마르크스주의 정당들은 물론 선진자본주의 나라에서 출현하였고, 그들의 시각은 유럽 중심적이었다(물론 그들은 이를 국제주의라고 불렀다). 독일은 이 시기에 이렇다 할 제국이 없었다(이것은 독일이 영국 및 프랑스와 분쟁을 야기한 원인 중 하나였다). 룩셈부르크는 제국(즉 제국 판도 내 식민지)이 선진국 생산물, 특히 기계재(철도는 그 한 예였다)를 위한 시장이라고 말했다. 식민지화한 영토는 제1부문이 지속적으로 팽창할 근거를 제공했고, 동시에 값싼 원료와 식료품을 공급했다. 이러한 공급은 임금재 바구니 속의 노동 내용물 가격(노동력 비용)이 오르는 것을 막아 주었다. 그리하여 노동자의 임금재 차원에서 측정한 실질임금은 그들의 화폐임금의 상승과 이윤 축소 없이도 오를 수 있었다. 이렇게 되면 임금재 차원에서의 실질임금과 노동자가 생산한 생산물 차원에서의 실질임금 사이에 간극이 존재하게 된다. 이 간극은 영국의 경우 매우 중요한 것이었다.
논지의 전문적인 세부 내용이나 어떠하건 간에(그리고 룩셈부르크의 내재적인 마르크스 비판을 둘러싼 맹렬한 논쟁이 어떠했든 간에), 룩셈부르크는 마르크스적 자본주의 이론에 글로벌한 시야를 회복시켜 주었다. 독일 사민당이 사로잡혀 있던 일국적 시야가 확대된 것이다. 경제사가들은 제국이 지배국에게 수익성이 있음을 부정해 왔지만, 그러나 제국주의가 자본주의의 임박한 붕괴를 넘어 그 수명을 연장시킨다는 생각은 좌파 경제학의 일부가 되었다. 잉여 생산물의 방출구이자 원료 공급원으로서 식민지는 중심부 나라들에 대한 공생적 의존의 논리에 결박되어졌다. 물론, 로자 룩셈부르크가 당시 예견하지 않은 것은 이들 주변부가 값싼 현지 노동을 채용할 수 있는 잉여자본의 입지가 될 수 있다는 사실이었다. 그 경우 자본의 국외 이주는 국내 노동자에게 피해를 준다. 이런 일은 아직 오지 않았다.169-170
룩셈부르크가 도입한 다른 테마는 마르크스의 표식에 ‘제3부문’을 추가하는 것이었다. 이 부문의 역할은 잉여 생산물을 흡수하고, 노동자나 다른 소비자가 아니라 정부의 수요를 위해 생산물을 생산하는 것이다. 이것은 군수 산업이었다. 이런 식으로 군수 산업은 제1부문으로부터 잉여 기계류를 흡수하고, 정부가 구매하는 군수품을 만들 수 있었다.
여기서 제시된 시각은 자본주의가 기계류의 잉여 생산물을 흡수할 수 있는 ‘방출구’부문을 필요로 한다는 것이다(마르크스가 그의 재생산 표식에서 기계류의 잉여 생산물 문제를 풀어야 했다는 점을 상기하라). 물론, 군수 부문도 다른 모든 부문처럼 평균 이윤율을 달성해야 한다. 그리고 군수 부문도 물론 약간의 고용을 창출한다. 그렇지 않다면 그 부문에서는 잉여가치가 존재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뒤에 이러한 통찰이 폐기물 부문이라는 개념으로 확대되었을 때 제3부문은 공적 소유가 될 수 있었고 이윤을 남겨야 할 필요조차 없어질 수 있었다(이에 대해서는 밑에서 보다 상세히 논의할 것이다). 그러나 문제는 여전히 남아 있었다. 정부는 그 같은 구매에 대해 어떻게 지불할 것인가? 한 가지 방법은 이윤이나 임금에 과세하는 것일 것이다. 마르크스주의자는 무기 구매를 위한 재정 조달 때문에 노동자의 소비가 집중적인 과세 대상이 되고 있다고 가정하였다. 이것은 간접세가 정부의 주 세입원이었고 군비 지출의 재정원이었던 독일에서는 말이 되는 이야기였다. 영국에서는 소득세는 물론 상속세까지 있었다.
룩셈부르크는 마르크스를 비판하고 개선한 것 때문에 자신도 많은 비판을 받았다. 많은 필자들이 정통 마르크스주의 입장에서 마르크스를 옹호하는 글을 제출했다. 그러나 여기서도 그 세부 내용은 우리의 관심사가 아니다. 마르크스주의자는 자본주의의 계속된 생존은 풀어야 할 수수께끼라는 생각을 확고히 받아들였다. 룩셈부르크는 중심부 나라들을 주변부와 연결시킴으로써 그것을 설명하였다. 여기서 제국주의는 정치적 지배를 의미하지 않는다. 그것은 중심부가 주변부에 대해 기계재를 판매하고 원료를 구매하는 교환 관계를 의미한다. 그 같은 과정은 물론 영구적인 것이 아니다. 조만간 주변부는 포화 상태가 되고 시장은 고갈될 것이다. 룩셈부르크에 따르면, 그 점이 머지않아 자본주의의 자기 재생산 능력에 대한 한계로 작용할 것이다.
자본주의의 생존이라는 문제에 대한 다른 대답은 좀더 수정주의적인 태도를 취했다. 마르크스에 대해 내재적 비판−그의 전제를 인정하고 그 위에서 그의 결론을 전복하는 것−을 가하는 대신에 이들은 외재적이고 경험적인 비판을 택했다. 마르크스는 고전파 경제학자들이 그랬던 것처럼 경쟁적인 경제를 가정했다. 마르크스의 시대에는 규모가 비슷한 산업체가 여럿 존재했다. 자본은 자유롭게 한 부문에서 다른 부문으로 이동하였고, 독점은−적어도 이론상으로는−존재하지 않았다. 그러나 세기의 전환기에 철강, 화학, 전기 회사들은 거대해졌으며, 어느 산업에서나 소수의 대단위 업체와 다수의 소단위 업체가 존재하였다. 이들 부문에서 미국과 독일이 선도적이었던 반면, 영국은 뒤떨어졌다. 이들 신흥공업국에서는 카르텔이 형성되는 뚜렷한 경향이 존재했다. 일부 마르크스주의자들은 이들 카르텔이 새로운 비경쟁적 행동의 세계로 가는 전조라고 말했다.171-172
이와 같이 대규모 산업 단위들이 시장을 통제하기 위해 카르텔을 형성하는 경향에 특수한 독일적 제도가 덧붙여졌다. 산업혁명이 영국에서 일어났을 때 공업 기업들은 지방 은행과 사적 차용을 통해 재정을 조달했다. 19세기의 끝에 이르러 지방 은행들은 몇몇 대규모 어음 결제 은행으로 흡수되었고, 산업 금융에서 손을 뗐다. 대신에 주식 시장이 발전하여, 영국 산업은 사실상 주식회사 형태로 안착하였다. 그러나 독일에서는 은행이 기업 금융에서 매우 능동적인 역할을 했고, 은행 간부들이 기업 이사회에 이사로서 참석했다. 은행은 독일 자본주의에서 지배적인 파트너였다.
대단위 기업들이 카르텔을 형성하고, 한편 여기에 대규모 은행이 금융 지원을 하는 이러한 결합 양식은 루돌프 힐퍼딩으로 하여금 금융 자본주의라는 착상(《금융자본론》)을 제출하게 했다. 이것은 마르크스가 자본주의를 이론화한 것과는 다른, 새로운 단계의 자본주의였다. 그리하여 이른바 마르크스주의의 법칙은 유보되었다. 이윤율 하락은 연기될 수 있었고, 은행의 절대적인 중요성이 그 새로운 요인이었다. 시장 통제가 이루어졌고, 조건이 유리해졌을 때 팔려고 잉여 생산물을 재고로 비축하는 데 드는 재정 조달을 위해 신용이 대규모로 공급되었다.
힐퍼딩은 어떠한 새로운 가치이론도 내놓지 않았으며, 또한 은행의 금융 지원을 받는 대단위 기업의 존재가 《자본론》 전 3권에서 마르크스가 계산한 것을 어떻게 수정 또는 무효화하는지에 관한 어떠한 입증도 내놓지 않았다. 만일 일부 단위가 엄청난 이윤을 얻었다면, 이는 모든 부문이 같은 이윤율을 얻는다는 관념에서 이탈하는 것을 의미하는가? 만일 그렇다면, 부등가의 이윤율은 어떻게 유지되는가? 이들 문제는 단순히 학술적인 것이 아니다. 룩셈부르크는 난점에 부딪히자 이를 마르크스의 이론 구조 내에서 처리하려 했다. 힐퍼딩은 마르크스의 서술에 교정 조항을 도입했지만, 이론 구조를 개선하지는 않았다.172-173
하나의 지본주의 혹은 다수의 자본주의?
금융 자본주의는 독일 자본주의에−잘해야 대륙 서유럽에−특유한 관념이었다. 영국의 경험은 이 패턴에 들어맞지 않았다(19세기를 막 지나면서 일단의 영국 논평가들이 독일 경제의 역동성을 부러운 눈으로 주목하기 시작했지만). 미국은 카르텔 현상을 독일과 공유했고, 이 시기를 전후하여 미국 의회에서는 트러스트 해체를 위한 미약한 시도가 있었다. 그러나 산업 금융에서 은행이 하는 역할이라는 측면에서 보면 영미권의 패턴은 독일의 패턴과 대조를 이루었음을 알 수 있다. 주식 시장은 미국과 영국에서 여전히 중요하였다. 자본주의가 한 가지 모델이 아니라 여러 가지 모델이 있는 것처럼 보이기 시작했다.
마르크스주의는 또한 미국 및 영국의 사회주의자한테는 그 호소력이 약했다. 이들 나라에도 마르크스의 추종자는 있었지만, 마르크스주의는 결코 어느 정도라도 실질적인 규모를 갖는 정당의 철학이 아니었다. 영미권의 사회주의자는 의도적으로 마르크스주의로부터 등을 돌렸고, 반고전파 한계효용론이 매우 급속히 유행하였다. 페이비언 사회주의자들이 마르크스의 잉여가치론을 놓고 논쟁을 벌였지만, 그들은 곧 한계효용론 및 한계생산성론이 가치와 분배에 대한 더 나은 설명을 제공한다고 확신했다. 그 이론에 따르면 재화가 가치를 지니는 것은 재화의 노동 내용 때문이 아니라 재화가 그 수요에 비해 희소하기 때문이다. 소비자는 한계효용(사용가치의 척도)과 가격을 등치시킨다. 생산자는 서로 다른 양의 요소 투입물−노동, 기계 등등−을 구매하고 각 요소는 자신의 한계생산물을 받는다. 이것은 생산자에게 이윤을 극대화시켜 준다. 그러나 그때, 생산자간의 경쟁 과정에서 이 이윤은 완전한 최저 지점으로까지 떨어진다. 이것이 정상 이윤이다. 비정상 이윤은 영(零)이다. 이윤과 수익성이 새로운−신고전파−경제학에서는 탐구 대상에서 사라진다.173-174
그러나 영국 사회주의자는−그리고 휘그파의 급진 진영은−자본주의가 삶의 질에 미치는 효과에 대한, 그리고 오늘날이라면 우리가 노동자의 소외라고 부를 것에 대한 존 러스킨과 토머스 칼라일의 비판에 민감히 귀를 기울였다. 그들의 성향은 개량주의적이었다. 페이비언 사회주의자들은 시장 경제에 변화를 이루어 낼 수 있는 중립적이고 테크노크라트적인 공무원제의 권능에 대해 강한 믿음을 가졌다. 영국 신헤겔파의 국가관이 가장 큰 영향력을 지녔던 때는 바로 이 시기−1890년대와 1990년대−였다. 헤겔이 자유방임주의를 믿지 않았다는 점을 상기하라. 시민사회는 그 자신의 과도함 때문에 국가에 의해 규제받고 관료제에 의해 인도되어야만 했다. 신헤겔파 정치철학자들이 주로 옥스퍼드에서 활동하고 있는 동안 케임브리지의 경제학자들−주로 알프레드 마셜과 그의 정치경제학 교수직 계승자인 아더 세실 피구−은 조세와 보조금을 통한 시장 개입을 뒷받침할 경제 이론을 발전시켰다. 이 이론에 따르면 경제적 복지는 시장의 작동에 대한 제한적이되 적절한 국가 개입에 의해 향상될 수 있다. 매연 공장과 소음과 대기 오염에 대해서는 세금을 물려야 하고, 노동자의 교육에 대해서는 보조금이 지불되어야 한다. 목표는 자본주의의 폐해를 완화하는 것이었다.174-175
마르크스는 시장 개입에 대해 할 말이 없었다. 이 점에서 그는 애덤 스미스와 데이비드 리카도 유형의 고전파 경제학자였다. 체제는 그 자신의 논리를 가지고 있었고, 자본가의 이윤 추구 행동 덕에 그러한 논리를 따라 발전하였다. 노동 시간 단축 같은, 쟁취할 수 있는 종류의 개량은 계급투쟁의 결과였다. 이것이 나라마다 다른 형태를 취할 수는 있었지만 말이다. 그리하여 노동 시간 단축이 프랑스에서는 전 산업에 걸쳐 입법화된 반면, 영국에서는 고용주와 노동자 간에 산업별로 협상을 해야 했다고 마르크스는 말했다.
소외에 관한 마르크스의 초기 저작은 20세기 중엽까지 공개되지 않았고, 마르크스주의자는 자본주의에 대한 그 같은 모든 비판을 낭만주의적인 것으로 간주했다. 또한 마르크스주의자는 영국 사회주의의 기독교적, 비국교도적 뿌리를 수용해 낼 수도 없었다. 마르크스주의자는 무신론자였다. 그들은 또한 자본주의의 미래가 어떠하건 간에, 그리고 그 자본주의가 얼마나 비참한 곤궁을 야기하건 간에 자본주의는 진보적 생산양식이며 이전의 모든 생산양식들보다 더 낫다는 견해를 확고히 고수했다. 낭만주의자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더 이상 존재해서도 안 되는− 과거에 대해 단지 향수에 젖어 있는 것일 뿐이라고 그들은 주장했다.175
(계속 이어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