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봄이다 / 정선례
아직 작년의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있는 강진만 갈대밭 사이로 샛바람이 분다. 옛시절 이야기를 품은 탐진강도 겨우내 움추림을 벗어놓고는 따스한 볕이 넘실댄다. 올 봄도 여전히 엄마 품처럼 포근하다.
내가 좋아하는 단어 중 케렌시아(Querencia)라는 말이 있다. 스페인어로 나만의 공간 혹은 휴식처를 뜻한다고 한다. 이 땅을 살아가는 모두에게 그들만의 공간 그리고 삶의 전쟁터에서 한발자국 물러나 휴식하고 회복하는 장소가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차갑고 길기만 했던 내 인생의 겨울을 오롯이 이겨낸 후 다시 봄을 붙잡을 수 있다면 내 마음에도 봄꽃으로 채워질 것 같다. 그리고 그 봄이 다 가기전 그 꽃들을 다발로 묶어 사랑하는 이들에게 건네며 용서를 구하고 감사를 전할 수 있다면 이 봄은 온전히 나의 계절이 될 것이다.
군청앞에서 ‘중년 여성 마음 건강 치유 프로그램’ 참가자 모집 공고를 봤다. 정신 건강 검사 교육 및 상담이 중심 내용이고 쉼 프로그램으로 원예 치유와 요가, 다도 등을 섞어 6회 차 일정으로 만족도 높은 프로그램이다. 지금 내 마음은 건강할까? 닥치는 문제들 앞에서 속절없이 무너지는 내 모습이 떠오르자 곧바로 등록 절차를 밟았다. 참석 인원이 15명으로 제한되는 점이 아쉽다.
장소는 고성사 오르는 길, 물놀이장 못 가서 우측에 새롭게 마련한 보은산 힐링센터이다. 이곳 쉼터는 군민 누구나 사용할 수 있는 열린 공간이다. 보건소 정신 건강 복지 센터에서 운영한다. 마음 건강 프로그램은 매주 수요일 열 시에 시작해서 열한 시 삼십 분에 끝난다고 했다. 건강에 도움이 될 거라는 기대감으로 사뭇 가슴이 울렁거렸다. 오늘 드디어 1회 차 프로그램이 있는 날이다. 차로 20여 분을 달려 가장 먼저 도착했다. 보건소 직원이 슬리퍼를 내주며 환한 미소로 반긴다. 담당자들의 다정한 얼굴과 친절하게 건네는 말 한마디의 배려가 봄볕처럼 따스하게 스며들었다. 축사일을 끝내고 바쁘게 오느라 아침도 먹지 못했는데 정성스럽게 준비한 유제품과 생과일이 허기를 달래준다.
사전 검사로 갱년기 우울증 선별 검사를 받았다. 체성분(in body)을 측정하고 뇌파, 맥파로 스트레스 지수를 살펴보고 혈액 검사로 호르몬 양을 측정했다. 평소에 유산소 운동으로 만 보 걷기와 밴드를 써서 근력 운동을 실천한 덕분인지 대체로 정상에 가까운 수치다. 하지만 자율신경(omnifit)균형 검사에서는 두뇌 스트레스 고위험군에 해당했다. 이 대목은 늘 내게 경각심을 불러일으키는 부분이다.
예전에 크게 몸이 아픈 적이 있다. 의료 기관의 도움으로 한동안 치료를 받았다. 그런데 불안증세가 남아있는 걸 보면 마음이 아직도 회복이 덜 되었나 보다. 잠을 통 못 자고 체중이 빠져 전문의 상담을 받아 보았다. 내 심신에 따른 문제가 무엇인지 물었다. 미래를 위해 준비하지 않았던 지난날이 후회된다고 말했다. 전문의가 약물 치료를 받아 보라고 권유했다. 알겠다고 말했다. 하지만 속마음은 쉽게 드러낼 수 없었다. 그런중에 중년 우울증을 예방하고 관리하는 특강을 들으니 스스로 치유할 수 있을 것 같은 자신감이 들어 위안을 삼았다.
참가자를 위해 정성가득한 과정이 어느덧 다 지나고 마지막 프로그램인 6회차만 남았다. 이 과정에서는 보은산을 걷고 다시 1회차에서 실시했던 검사들을 받는다. 그때는 고위험군으로 나왔던 항목이 정상 수치로 결과가 바뀌어 있기를 기대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영양소가 풍부한 좋은 음식을 섭취해야 하고 잠을 제때 자야 한다. 잠자는 동안 뇌에 쌓인 피로 물질이 밖으로 빠져나간다고 하니 충분히 숙면을 취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하겠다.
일상의 번잡한 마음을 비우고 요가와 명상을 하는 시간이다. 매트 위 맨 앞자리 중앙에 자리를 잡았다. 나비 자세를 하고 팔을 옆으로 열어 준 후 손을 머리 위로 올려 목을 왼쪽 오른쪽으로 잡아당기는 동작을 거듭했다. 이어서 목을 굽히고 팔을 뒤로 당기는 스트레칭을 했다. 가슴을 활짝 열고 목을 풀어 주는 동작이다. 초보자들이 하는 기초 동작인데도 근력이 부족하고 유연하지 않아 잘 안되었다. 굽은 어깨와 가슴을 쫙 펴 주는 동작에서는 ‘으윽 아아아 아악’ 비명이 연달아 터졌다. 내 목소리가 가장 크다. 여간 민망하지 않다. 어느 단계에서는 뭉친 근육이 풀어졌는지 시원한 느낌도 있다. 노력하면 어떤 동작이라도 따라 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보았다.
중년의 고질적인 공공의 적, 뱃살이 빠지는 동작도 배웠다. 등을 곧게 편 다음 입으로 슷슷 소리에 맞춰 배꼽을 끌어당겨 오므렸다 편다. 1세트에 30회씩 하루 두세 차례 반복하면 복부에 근육이 생긴단다. 청바지에 면티를 집어넣어 입을 수 있는 그 날까지 부지런히 연습해서 허리둘레를 줄여야겠다. 예쁜 옷을 입고 동작을 직접 시범하는 강사님의 매력에 빠져 눈을 뗄 수가 없다. 강사님과 함께 노래를 부르며 몸을 움직이는 운동을 하니 축 가라앉았던 마음이 한결 가뿐해지는 느낌이다.
“허리 펴고 아랫배에 힘 딱 주고 짧은 들숨과 긴 날숨으로 일정한 속도로 심호흡만 잘 해도 산소 공급이 잘 되어 우리 몸이 건강해질 수 있어요.”
강사님의 말이 자꾸 귓가에 맴돌고 뇌리를 스친다. 짧은 호흡이 아닌 긴 호흡을 하려고 내 안에 자꾸 의식화를 주입하게 된다. 행복해서 웃는 게 아니라 웃다 보면 행복해지는 것처럼 후련하게 툭툭 털어 버리고 봄의 거리로 나선다. 아하하하 화가 나도 웃고, 에헤헤 헤어져도 웃고, 오호호호 호탕하게 웃고, 우후후후 후련하게 웃고 싶다. 강진군 보건소는 군민들의 사랑을 받기에 충분하다. 이에 서현미 소장님과 마음건강팀 직원들에게 고마움을 전한다.
나만을 위한 휴식처에서 남다르게 세상천지 호사스러운 체험을 한 봄날이다. 얼굴에 다시 봄꽃이 피어났다. 각자의 방식으로 좌절을 이겨내고 있는 이웃들에게 사랑의 말을 전한다. 나의 봄이 그들의 화단에 꽃으로 미소로 피어나길 소망한다.
다시 봄이다. 나에게도 너에게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