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간’ 2025 겨울 창작세미나 발제>
「여자는 존재하지 않는다」, 박영진(2020) 중 ‘상담사’(304-313)
‘배심원 #2’를 보고
이은숙
어떤 상황이 벌어지거나 벌어진 상황을 접하면, 가장 먼저 하는 것은 사실 확인이다. 어떻게 왜 일이 일어나게 되었는지가 궁금하고, 그 과정에서 누구의 잘못인지가 초점이 된다. 그 상황이 피해자와 가해자가 있는 사건이라면, 가해자에 대한 처벌이 필요한 사건이라면 더더욱 그렇다. 그러나 항상 명확한 사건은 그리 흔하지 않다. 정황과 증거를 가지고 대다수가 합리적이라고 생각되는 서사를 구성하고, 그에 근거하여 필요한 것-범인, 가해자, 실수를 한 사람 등등-을 판단할 뿐이다. 그렇지만 그 사실확인과 그에 따라 만들어진 서사가 정말 사실인지 알 수 없는 경우는 허다하다.
사실 관계 이해를 돕는 것은 사건과 관련된 인물들의 서사다. 사실 관계가 드러내는 것과 함께 그 사건을 책임질 인물에 대한 재판이 이루어진다. 죄값을 먹이는 것이다. 이는 정식 재판정이 아닌 곳에서도 일어난다. 사건에 관심을 가진 개개인이 모두 검사(또는 피해자의 변호인)이 되기도 하고, 피고인의 변호사가 되기도 하고 재판관이 되기도 한다. 이 정도에 이르면, 사실 관계도 중요하지만 왜 그런 일을 벌일 수밖에 없었는지에 대한 개인의 서사가 궁금해지거나 알려진다. 때로는 안타까운 서사에 동정여론이 일기도 하고, 서사에도 불구하고 엄벌론이 대세를 형성하기도 한다.
사실은 항상 진실인가? 사실확인으로 우리는 주변의 일을 다 이해하거나 해결할 수 있는가 또는 끝났다고 말할 수 있는가? 도대체 ‘사실’이라는 것은 무엇이고, 왜 필요한가? ‘배심원 #2’는 이런 질문을 남기는 영화다.
영화의 시작은 정의의 여신상 그림이다.
저스틴은 켄들 앨리스 카터를 고의로 살해한 혐의로 기소당한 제임스 마이클 사이스에 관한 사건의 배심원 소환장을 받는다. 고위험 임산부인 부인의 출산일이 가까워 기피 신청을 하지만, 결국 사건의 2번 배심원이 된다. 첫 공판에서 검사가 전한 사건의 전말은 이랬다. 1년 전 10월 25일, 제임스 아이스는 여자 친구인 켄들 카터와 올드 퀴리 로드에 있는 아우디스 하이드어웨이에서 술을 마시다 싸우기 시작했고, 싸움이 격해지자 카터가 먼저 밖으로 나갔고 사이스는 카터를 따라 나갔다. 비 오는 주차장에서 두 사람이 싸움이 이어졌고, 다수의 목격자와 핸드폰 영상이 남아 있다. 빗속의 언쟁 끝에 두 사람은 각자의 길로 헤어졌지만, 검사는 사이스가 카터를 뒤따라가 둔기로 머리를 치고 도로 밖으로 밀어 떨어뜨렸다고 주장한다.
사건의 전말을 듣던 저스틴은 그날, 그 시각, 같은 장소에 있었던 자신을 떠올리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무언가를 친 기억도 함께 떠올린다. 잃은 쌍둥이 출산할 예정일이었던 그날, 알콜중독 이력이 있던 그는 술을 시켰지만 마시지는 않은 채, 차를 몰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무엇인가를 쳤다. 친 것은 분명한데, 아무 것도 찾을 수 없었고 캄캄한 빗속에서 보이는 것도 없었다. 그는 ‘사슴 출몰’ 표지판을 발견하고 사슴을 치었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이후 법정에서 한 증인은 범인을 목격했다며 정확하게 피고인을 지목했지만, 그가 목격한 것은 바로 자신이었다는 걸 알게 된다. 점점 자신이 그날 친 것이 사슴이 아니라 카터였을지도 모른다는 확신이 들기 시작한다. 저스틴은 변호사 래리 래커스에게 그날 자신이 겪은 일과 이 사건의 배심원임과 그날 사슴을 친 것이 아닐 수도 있다며 스스로 밝히는 것은 어떤지 묻는다. 변호사(그는 상담 내용의 비밀 유지를 위해 1달러의 상담료를 요구한다.)는 저스틴이 자백한 결과로 30년에서 종신형까지 받을 수 있다고 조언한다.
이후 저스틴은 배심원 회의에서 자신의 죄를 고백할 수는 없지만 최소한 사이스가 범인이 아님을 밝히기 위해 노력한다. 논의도 하기 전에 유죄 의견을 던지는 배심원 회의에서 무죄 의견을 내 증거 논의를 시작하게 하고, 그 과정에서 많은 가설이 생겨 배심원들의 유무죄 의견은 6:6이 되기도 했다. 회의 중에는 자신이 알콜중독자였고 음주 운전 사고를 내서 사회봉사 명령으로 간 학교에서 한 여자를 만나 변하게 되었다는 고백을 하기도 한다. 그리고 사건이 시작된 술집과 사건 장소를 견학까지 하러 가게 된 저스틴은 그날의 기억이 점점 명확히 떠오르고, 차를 몰고 여자를 따라가던 범인이 차를 돌려 되돌아가는 것을 본 것도 떠올린다. 하지만, 형사였던 배심원의 불법 수사 결과가 결정적인 증거가 될까 두려웠던 저스틴은 일부러 증거물을 들키도록 하였고, 아내의 출산으로 아기까지 얻게 된 그는 결정적으로 마지막 배심원 회의에서 유죄 의견을 냈다. 한편, 사이스가 법인임을 확신하는 검사는 불법적으로 사건을 재조사한 치카우스키가 배심원에서 배제되고 난 직후 이야기를 나누었고, 사건을 다시 들여다보기 시작했다. 사건 장소와 목격자를 다시 살피고, 뺑소니 사고의 가능성을 열어 두고 사고 차량을 주인을 만나러 다니고, 범인이라 믿어 의심치 않았던 사이스도 만난다. 그러나 검사는 무엇도 명확하기 확인하지 못한 채로 마지막 재판에 임한다. 저스틴 역시 불안감을 감추고 재판에 참여하였다.
사이스가 가석방 없는 종신형을 선고받는 순간, 저스틴은 울먹였고, 그런 그를 본 검사는 자신이 배심원 저스틴의 집을 방문해서 아내에게 진술을 들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이미 법정을 나간 저스틴을 따라 나간 검사는 법원 밖에서 저스틴을 만나 이야기를 나누게 된다. ‘정의는 행동으로 옮긴 진실이다.’라고 믿는 검사에게 저스틴은 ‘때로는 진실이 정의가 아니기도 하다.’고 말한다.
아이를 들여다보며 행복한 시간을 보내는 저스틴의 집 문을 두드리는 소리. 이 집을 다시 찾아온 검사와 저스틴의 불안한 눈동자, 점점 경직되어 가는 저스틴의 표정으로 영화는 끝난다.
솔직히 이 영화가 어떻게 ‘상담사’와 연결되는지 모르겠다.
영화는 억울한 제임스 사이스와 자기 합리화로 불안함을 누르고 행복해 보려는 저스틴과 진실 혹은 정의를 찾기로 결심한 것 같은 검사만 남겼다. 사건은 종료되었으나 사실이 아닐 수도 있다는 것을 안다. 사이스가 범인이 아닐 수도 있는 터라 억울하고, 신념에 찼던 검사와 저스틴은 사이스는 확실한 무죄임을 알기에 불편하다. 그리고 진실은 오리무중이다. 정말 사이스가 범인이 아닐까, 정말 저스틴이 친 것은 사슴이 아닌 카터였을까? 덩달아 정의는 실현되지 않았다. 영화를 시작할 때는 인쇄된 자유의 여신상을 보여주었는데, 중간에는 그녀가 들고 있는 저울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재판이 끝나고 이야기 마친 뒤에도 흔들리는 저울을 보여준다. 어떻게 사실이란 것이 언제나 정확할 수 있겠는가? 그건 그냥 내가 편한 대로 생각하고 판단한 것은 아닐까.
‘배심원 #2’는 진실을 찾아가는, 정의를 실현하는 아주 긴 여정과 서사의 발단에 지나지 않는다. 사실확인에 따른 처벌은 이미 확정되었지만, 사실확인에도 불구하고 진실은 묻혔고, 그에 따라 처벌도 끝나지 않았다.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서 오는 긴장감이 이제부터 더 중요한 일이 진행될 것임을 보여준다. 떨어뜨린 물건을 주워 건네는 친절함으로 만난 두 사람이 한 사람은 자신이 알고 있는 진실을 감춰야 하고 한 사람은 정의를 위해 진실을 파헤쳐야 하는 사이로 만난 것이다. 과연 이들에게 평화를 가져올 방법은 무엇인가? 진실을 밝히고 정의를 실현하는 것은 그렇게 중요한 것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