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바다 / 사 35:1-10, 막 7:31-37
귀 먹고 말 더듬는 자가 이 기적의 주인공이다. 말 더듬는 자는 ‘반벙어리’ 정도가 아니라 ‘말을 꼭 하고 싶은데 말이 안 나오는 사람’이다. 생각을 말로 표현하고 싶은데 말을 할 수 없는 안타까운 처지의 불쌍한 사람이다. 귀 먹고 말 더듬는 사람의 공통점은 의사 소통에 어려움을 겪는다는 사실이다. 성서에는 예수께서 맹인들을 고치신 여러 사례가 기록되어 있다. 이 귀 먹고 말 더듬는 사람은 어떤 의미에서 맹인보다 더 딱한 처지에 있다고 볼 수 있다. 맹인은 적어도 말하고 들을 수 있기 때문에 어느 정도의 대화가 가능하지만 귀 먹고 말 더듬는 사람은 육체의 어려움을 말로 표현할 때 어려움을 겪는다. 신앙인의 입징에서 볼 때 귀 먹고 말 더듬는 자의 가장 큰 단점은 강단에서 선포되는 주님의 말씀을 들을 수 없는 일이다. 또한 찬양할 자유가 없다. 기도할 특권도 없다. 말씀을 듣지 못하고 찬양과 기도의 특권을 빼앗긴 사람을 상상해 보라. 얼마나 불쌍한 사람인가? 그와 비교하여 여러분은 얼마나 감사할 조건이 많은가? 오늘은 예수께서 귀 먹고 말 더듬는 사람을 고치시는 장면을 통해 우리가 믿고 있는 주님이 어떤 분이신가를 살펴보겠다. 병자를 고치신 장면이 다른 장면들과 색다른 점을 볼 수 있다.
1. 주님은 개인에게 관심이 있으시다.
33절상 ‘예수께서 그 사람을 따로 데리고 무리를 떠나사’ 예수께서 귀 먹고 말 더듬는 사람을 한적한 곳으로 데리고 가셔서 1대1의 관계에서 그 사람을 고치셨다. 주님의 기적과 사람들이 생각하는 보통 기적 사이에는 분명한 차이가 있는데, 주님의 기적에는 마술이나 장삿속이 전혀 없다. 요즘 병 고친다는 많은 사람들은 예수님과 달리 자신을 드러내고 과시하는 잘못된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다. 무수한 사람들을 모아 놓고 자신이 치유의 권능을 받았음을 공개할 뿐더러 막대한 헌금까지 거두어 들인다. 예수께는 자기 과시의 의도가 전혀 없다. 오히려 그분은 이 치유의 기적을 아무에게도 이르지 말라고 주의를 주시기까지 한다. 주님은 기적을 베푸실 때 철저히 개인의 필요를 중시하셨다.
예배는 공동체가 함께 드리는 신앙의 표현이다. 그러나 본래 신앙은 가장 개인적인 것이다. 신앙 생활을 할 때 하나님과 단 둘이 함께하는 시간을 갖는 것은 대단히 중요한 일이다. 하나님과 개인으로 만나는 시간을 갖지 않는다면 주님이 각 사람에게 주시는 풍성한 복을 받을 수 없다. 여러분은 예수께서 나 만을 향해 베푸시는 은혜를 경험하기 위해 특별히 시간을 내어 홀로 주님의 말씀을 듣고 주님의 목소리를 경청하는 시간을 얼마나 갖고 있는가? 예수께서는 하나님 나라를 전파하는 바쁜 사역 가운데서도 무리를 피하여 한적한 곳으로 가셔서 살아계신 하나님과 단 둘이 교제를 나누는 모습을 우리에게 보여 주셨다. 눅 5:16절 ‘예수는 물러가사 한적한 곳에서 기도하시니라.’ 마틴 루터는 ‘아, 너무 바쁘다. 더욱 열심히 기도해야겠다’라고 고백했다. 바쁠수록 그 모든 일들을 감당할 수 있도록 하나님과 교제를 나누어야 한다. 주변의 모든 잡음을 차단하고 TV를 끄고 라디오를 끄고, 주님과 나 사이의 은밀한 만남에 몰두하라. 주님은 공동체에게 복을 주시기도 하지만 홀로 있을 때 가장 큰 은혜를 베푸신다.
본문에 언급된 귀 먹고 말 더듬는 사람은 무리와 떨어진 곳에서 치료받았다. 개인을 향한 예수님의 자비와 사랑을 느낄 수 있는 장면이다. 주님은 우리에게도 무리와 떨어져 홀로 그분을 만나도록 요구하신다. 주님의 부르심에 응하라. 무릎 꿇고 조용히 주님과 만나는 시간을 하루의 중요한 일과로 떼어 놓으라. 그분의 역사하심이 놀라울 것이다.
2. 주님은 믿음을 격려하신다.
33절하 ‘손가락을 그의 양 귀에 넣고 침을 뱉어 그의 혀에 손을 대시며’ 이것은 굉장히 상징적인 행동이다. 성서의 모든 상징은 우리의 믿음을 촉진시키려는 의도가 있다. 예수님의 행위는 귀 먹고 말 더듬는 사람을 치료하시리라는 기대를 불러일으킨다. 기대와 믿음은 절대로 분리할 수 없다. 우리가 주님을 신뢰한다면 그 주님을 기대해야 옳다. 예수께서 병자에게 이 기대감을 심어주고 믿음을 촉진하기 위하여 상징적인 행동을 하신다. 그의 귀를 만지고 그의 혀에 손을 대는 순간 귀 먹고 말 더듬는 자는 자신이 정상인으로 회복될 것을 기대한다. 주께서 자신을 고치시리라 확신한다. 믿음이 없는 곳에는 하나님의 역사가 일어나지 않는다. 히 11:6절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 하나님께서 역사하실 것을 믿고 그분을 찾을 때 주께서 상급을 베푸신다. 주님의 영광이 임하고 놀라운 사건들이 일어난다. 여러분은 주님이 위대한 역사를 기대하며 주님 앞에 나올 때마다 나에게 말씀하시고 나를 만지시는 주님의 손길을 체험하는가? 그분의 능력이 나에게 임할 것을 믿고 기대하라. 주님은 귀와 혀를 만지는 상징을 통해 병자의 믿음을 격려하셨다.
3. 주님의 권능은 하늘에서 온다.
치료하는 능력은 하나님께 있다. 예수께서 종종 ‘하늘을 우러러’ 기도하셨다. 예수께서는 진실로 하나님께 도우심을 바라도록 하기 위해 하늘을 우러러보는 상징을 사용하셨다. ‘하늘을 우러러 탄식하시는’ 것은 치료의 능력, 기도의 응답이 하늘로부터 오는 것을 보여 주기 위한 행동이다. 여러분은 하나님을 바라보고 있는가? 그분을 바라보고 사는 사람들에게 그분의 보상과 상급과 능력이 임한다. 약 1:17절 ‘온갖 좋은 은사와 온전한 선물이 다 위로부터 빛들의 아버지께로부터 내려오나니, 그는 변함도 없으시고 회전하는 그림자도 없으시니라.’ 모든 동물들이 다 땅을 바라보고 다니도록 창조되었지만 인간은 앞을 볼 수 있거 위를 볼 수 있는 존재로 지음받았다. 하나님을 바라볼 수 있는 존재로 지음을 받았다.
헬라어로 인간을 ‘안드로포스’라고 하는데 ‘위를 보는 존재’라는 뜻이다. 인간만이 위를 향해 하늘을 바라보고 하나님을 바라볼 수 있다는 사실은 얼마나 놀라운 창조주의 계획인가? 그런데 우리는 놀라운 능력과 도움의 원천을 알고 있지만 너무 바쁘다는 핑계로 하늘을 쳐다볼 시간을 내지 않는다. 땅에 매여 있다. 성서는 위의 것을 찾으라고 말한다. 골 3:1절 ‘그러므로 너희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리심을 받았으면 위의 것을 찾으라. 거기는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느니라.’ 예수께서 부활하고 승천하시어 하나님 우편에 앉아 우리의 중보자로 우리를 위하여 기도하시고 우리를 도우시므로 위의 것을 찾으라는 것이다. 우리의 도움은 천지를 지으신 하나님께로부터 온다. 우리는 우리의 모든 죄를 담당하시고 죄 문제를 해결하시고 우리를 위해 중보 기도를 드리며 하나님 우편에서 우리를 살피시는 그분을 바라보며 살고 있는가?
이스라엘 성지를 여행하는 사람들은 그 땅이 너무 형편 없다는 사실에 놀란다. 어떻게 이 땅이 젖과 꿀이 흐르는 약속의 땅이 될 수 있을까 의아해 한다. 그러나 가나안에 대한 하나님의 특별한 계획과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주시려 한 놀라운 교훈이 있음을 놓치지 말라. 신 11:10-11절 ‘네가 들어가 차지하려 하는 땅은 네가 나온 애굽 땅과 같지 아니하니, 거기에서는 너희가 파종한 후에 발로 물 대기를 채소밭에 댐과 같이 하였거니와, 너희가 건너가서 차지할 땅은 산과 골짜기가 있어서 하늘에서 내리는 비를 흡수하는 땅이요.’ 애굽 땅은 비옥한 땅이어서 농사가 잘 되었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나일강과 같은 큰 강이 없어서 가뭄이 들면 꼼짝없이 죽을 수밖에 없다. 그렇기 때문에 이스라엘 사람들은 하늘을 쳐다보게 된다. 하나님의 도우심을 기대해야 한다. 가나안은 하나님의 도우심을 의뢰하고 그분을 신뢰하면서 젖과 꿀이 흐르는 땅으로 만들어야 할 땅이다.
때때로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인들에게 풍성한 삶을 허락하시지 않는 이유가 어디 있는가? 그것은 하나님께서 내리는 복을 감당할 자질이 우리에게 없을 때 그 풍성한 조건이 우리가 신앙을 떠나고 주님을 멀리할 수 있는 기회가 되기 때문이다. 우리는 우리의 부족함 때문에 하늘을 올려다보게 된다. 우리의 계속되는 삶의 고통 때문에 하나님을 의지하게 된다. 고통스런 상황이 우리에게 주는 놀라운 축복이 있다. 그것은 하나님을 의지하는 삶, 주님을 의지하는 삶이다. 우리에게 닥치는 어려움이 도리어 감사가 되고 은혜가 될 수 있다는 말이다.
4. 주님은 자비로우시다.
34절 말씀에서 예수님의 모습에 주의를 집중해 보자. ‘하늘을 우러러 탄식하시며’ 예수께서 하늘을 우러러보신 것은 우리의 도움이 ‘천지를 지으신 여호와에게서’ 임을 상징으로 보여주신 행동이다. 또한 언제나 하나님을 바라보면서 살도록 교훈하신 사건이다. 훌륭한 교사는 말로만 하는 교사가 아니라 시청각 교재를 잘 사용하는 교사이다. 주님은 행동을 통해 아름답고 복된 교훈들을 전달하셨다. ‘탄식’의 뜻을 원문에서 살펴보면 ‘불쌍한 표정으로 신음소리를 내는 것’이다. 상대방을 불상히 여기는 마음 깊은 곳으로부터 나오는 신음에 가까운 고통의 소리이다. 예수께서는 귀 먹고 말 더듬는 자가 들을 수 없기 때문에 소리로만 탄식하신 것이 아니라 몸짓으로 표현하셨을 가능성이 많다. 그를 불쌍히 여기는 마음을 충분히 전달하셨을 것으로 생각된다. 주님은 그를 불쌍히 여기셨다. 주님이 기적에는 분명한 동기가 있다. 그것은 사랑이다. 다른 말로 표현하면 ‘불쌍히 여김’ 영어로는 ‘compassionate’이다. 영어 단어 ‘compassionate’의 뜻은 ‘하나님으;징계나 사탄의 사역으로 인간이 삶의 권리를 박탈당했을 때 그 일을 하나님의 마음으로 아파하는 상태’이다. 딱한 처지의 사람을 볼 때 하나님의 눈을 가지고 보라. 당연히 있어야 할 삶의 자리를 빼앗긴 이들, 육체와 정신에 고통받는 이들을 주님의 눈과 마음으로 바라볼 때, 우리는 주님처럼 그들을 불쌍히 여기게 될 것이다.
현대 사회에서 기적이 사라지고 있는 이유는 사랑이 식어가기 때문이다. 주님의 심정으로, 정말 안타까운 마음으로 이웃을 위해 기도한다면, 우리 시대에도 기적이 일어날 수 있을 것이다. 본문 말씀은 우리들의 사랑 부족에 대한 주님의 도전이다. 예수께서는 긍휼히 여기는 마음을 가지고 기적을 행하셨다. 예수께서 이 불쌍히 여기는 마음으로 귀 먹고 말 더듬는 자의 귀와 혀에 손을 대시면서 이렇게 말씀하신다. ‘에바다.’ ‘에바다’는 ‘열리라’는 뜻이다. 이로써 그의 귀가 열리고 혀가 풀려 다시 말하고 듣게 되었다. 대화할 수 있게 기능이 회복되었다. 그는 이제 주를 찬양하고 하나님께 기도할 수 있다.
우리는 본문의 기적을 통해 우리가 믿고 신뢰하는 주님이 어떤 분인가를 발견했다. 그분은 긍휼이 많으신 사랑의 주님이시다. 그분은 우리에게 끊임없이 하나님을 바라보도록 요구하신다. 하나님은 신뢰하는 믿음을 격려하신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베푸시는 은총을 체험하도록 그분과 단 둘이 만날 것을 말씀하신다. 그리고 이웃을 불쌍히 여기는 본을 보이셨다. 예수께서 당신이 그분의 발자취를 따르기를 바라신다. 그분이 원하시는 대로 하나님을 신뢰하고 그분과 교제를 나누며 크신 은혜 가운데 이웃을 사랑하는 성도가 되기를 바란다. (1995-03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