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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st. Aug(화) 1978
Las 출항 39일째다. 계속 항해를 하긴 처음 있는 일이다. 앞으로 1주일이면 동경에 닿을 것이다. 지나간 한 달하고도 열흘 가까이 되는 날들이 하루를 기억할 수 있을 만큼 꼬박 꼬박 다져온 듯 한데도 아무런 흔적이 없다.
Las를 출발할 때의 계획과는 달리 아직도 완전히 떼낸 책 한 권이 없다. 좀 더 부지런히 했다면 하는 아쉬움이 없진 않으나 크게 후회하는 일도 없다. 그저 건강하게 무사히 지내온 것만으로도 다행스럽게 여길 수도 있다. 8월! 이 달을 넘기면 더위가 서서히 고갤 숙이는 계절이다. 금년도 4개월이 남았군. 一場春夢이라더니. 결국은 다 살고 보면 지나간 날들이 10년 20년 아니 70년이라도 한낮 부질없는 꿈같이 생각되어진다는 옛 선인들의 말이 실감나는 듯도 한다. 앞으로 20여일이면 부산에 닿을 수 있을거다. 하루는 무섭게 지나가면서도 순간순간은 너무나 지루함을 느낄 때도 있다. 또 하나의 매듭을 엮어야 할 때가 되어간다. 다음은 다음으로서 해결해야 할뿐. 1년 계약을 마치고 다시 재승선 한다거나 아니면 회사마져 옮겨야 한다는 것이 곧 생활의 질서를 잃기 쉬운 경향이 있어 불안을 낳기도 하지만 지금으로선 부득이 한 일이다. 보다 더 크고 Pool제가 실시되는 회사 같으면 좋으련만 그긴 또 거기대로 일장일단을 있을 것이다.
8호 태풍이 동쪽으로 이동하기 시작하므로 안심해도 되겠다. 본사로부터 해난보고서(Sea Protest)에 관한 Telex를 받다. 왜 하필 3월20일 이전이어야 할까? 작년 Las Docking시. 입은 Damage를 이번에 보험공사로서 떼울 모양인가? 검사 수첩에 기재되어 있는데 가능할는지? 출항 후 8개월이 넘으면 일부 보험 Cover가 안 된다고 다시 회신이 왔다만 다소 이해가 안가는 점도 있다. 이제 5-6개월 넘은 사실을 동경해운국에서 인정을 해 줄런지가 의문이다. 어제 물이 많이 먹히더니 오늘 오후 아랫배에 복통이 온다. 자정 가까이는 못견딜 만큼 서너차례 요동을 쳤다. 또 무엇이 잘못 되어 가는가?
2nd. Aug(수)
한밤중 2기원 우군의 소란이 있었다. 세상모르고 들 까불어 대는 놈들이 가끔 당황스럽게 하는 수가 있더니 꼭 그 꼴이다. 젊은 기분, 그 활기는 누구나 인정을 하고 오히려 나이든 사람이 부러워하기도 한다. 그러나 그 좋은 젊음을 헛되이, 너무도 허무하게 낭비하려는 데는 많은 빈축을 스스로 산다. 무슨 놈의 깊은 일들이 숨어 있는지는 알아봐야 알 일이지만 무엇보다 인간자체가 성실하지 못하는 다는 것이 그를 거느리고 있는 직장들의 얘기다. 귀국을 눈앞에 두고 가끔 얼빠진 녀석들이 만용을 부리는 수가 있다만 실상 일본에서 저런 불미스런 일이 생기면 진짜 똥칠이다. 재작년 김경태 주자 모양으로 -.
어제까지도 계속 물이 먹히더니 아침부터 얼굴과 손등이 붓는다. 큰 탈은 없어야 할텐데.
오후 3시경 Luzon섬 북단을 항과. 침로를 대만남단과 Okinawa 안쪽으로 잡았다. 약 30여마일 멀지만 黑潮(구로시오)를 타면 오히려 빠른 입항을 가져올 수도 있다. 또한 은연중 그리운 육지를 계속 보면서 가는 것도 많은 위로가 아닐 수 없다. 이제 여기서부터 6일. 8일 오후에는 Tokyo외항에 닻을 내릴 것이다. 천둥과 번개, 그리고 억수 같은 소나기가 자주 지나간다. 저 맑은 물이 아까운 생각이다. 황량한 사막, 모래산에 생명을 불어 넣어줄 수 있는 저 충만한 물이 아닌가.
만약 이 바닷물이 그냥 청수였다면 역사는 달라졌을 것이다. 물의 이용, 관리에 관한 연구는 개인뿐 아니고 국가 나아가서는 인류전체를 위해서도 보람 있는 일일 것이다. 배안의 전체 분위기가 서서히 마감을 향해 가고 있다. 양하 후의 절차가 아직 미정이지만 어떤 경우가 오건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끝까지 완벽하게 해두는 것이 도리다. 필요한 일들을 지시해 놓았으면서도 정작 내가 해야 할 일들은 아직도 손을 데지 않고 있다. 별다른 이유가 있어도 아니다. 그저 그 놈의 게으름이 자꾸 귓가에 속살거리고 있기 때문이다. 늘 이러다 막판에 가면 부랴부랴 정신없이 설쳐대곤 했었다만 이번에도 예외는 아닌 듯 하다. 三浦군은 벌써 월말보고를 마감하고 봉투에 넣어 두었다. 밤새 술을 먹건 말건 제 시간을 엄수하고 책임을 꼬박꼬박 다하는 일본인들에게 배우고 본받아야 할 점이 바로 이런 것이다. 저것은 결국 개개인이 책임성을 가짐으로서 전체적으로 하나의 뭉친 힘, 국력이 된다. 좀 좋으면 적당히 하려 드는 우리네의 결점에 많은 반성이 있어야 한다. 어떤 환경이나 조건이더래도 자기의 책임과 임무를 이행하고 권리를 주장하는 것이 마땅한 순서다. 내일부터 시작을 하자. 별 것 아니라고 미뤄두면 자꾸 쌓여지고 부피가 커지고 나중에는 그것이 나를 깔아 뭉게려 들 것이다.
3rd. Aug(목)
대만남단 Bashi Channel을 항과하다. 재작년 TungHo No.3의 마지막 항차가 생각난다. 바로 여기였다. Luzon의 San Fernando 출항 후 막 시작된 북서계절풍 때문에 죽을 고생을 한 곳이다. 결국 다섯 번의 피항에 2배가 되는 14일 걸려서 무사히 도착은 했지만-. Bashi Channel은 역시 예전부터 악명 높은 곳이었다. 평소에도 급류 때문에 얕은 곳에서는 파도가 생기는 곳이기도 하다. 예외없이 강한 남서계절풍이 그 위력을 유감없이 나타낸다. 다행이 순풍이라 오히려 유리한 셈이다. 완전히 대만을 벗어나자 바람이 잔다. 아무래도 다시 남서에서 남동으로 풍향이 바뀔 모양이다. 내일아침 D.R(추측위치)는 西表島(니시오모데)이다. 왜만큼 Speed가 나준다면 구주 남단을 향해 직행할 예정. 그렇지 않으면 다소 늦더래도 Okinawa쪽으로 붙어 가자. 예측할 수 없는 해조류의 영향에 비해 Position Fix가 너무 간격이 뜬다. Loran만 고장이질 않아도 아무런 염려 없는 지역인데 -. 잘해 보려다 오히려 망한 꼴이다. Radar를 쓰자면 섬이 많은 쪽으로 붙어야 한다. 의외로 Speed가 없다. 흑조(黑潮)의 영향을 크게 받지 못하는 모양이다. 아무래도 8일 밤 늦게라야 닻을 던질라나 보다. 그만해도 다 온 느낌이다 더 이상 조급증을 내지 말자. 어서 가곺은 심정이야 누구없이 같다만 경험 없는 기관장의 어께만 무겁게 하고 그러다 Eng.에 무리를 빚으면 더 늦어질 우려도 있다. 잦은 비, 강한 해풍이 너무 습하다. 온 몸, 온 선내가 눅눅하다. 이래저래 해풍을 싫어하겠금 한다. 대아 Cable. Las에서 보낸 No.8의 답신이다. 본선 일본도착 이후의 동향에 대해서는 아무런 언급이 없다. 해약하는지 계속하는지의 여부는 연락이 있어야 할텐데-. 역시 계절풍이라 강한 남서풍이 있으나 아무래도 겨울철 보다는 약하다. 轉向하기 위해서는 다소 숙어질테지-.
4th. Aug(금)
아침 8시 Nishiomote섬을 항과. 아련히 얕게나마 보이는 섬이 곧 일본령이고 보면 이제 일본영해에 들어섰다. 엎어지면 코 닿을 만큼 온 기분이다. 여기서 부산으로 직행한다면 3일이면 닿는다. 간밤에 조용해진 날씨. 그러나 예상외로 선속이 더디다. 밀린 서류정리를 시작하다. 오후 늦게부터 예상대로 남동풍으로 전향. 이곳 특유의 여름철 계절풍으로 바뀐다. 묵은 서류가 많다. 버리고 철하고 정리하면서 스스로 이렇게 게을렀음을 다시 한 번 반성한다. 간혹 중파로 일본 방송을 들을 수 있다.
2기원 우군에 대한 평소의 여론을 듣다. 역시 술버릇이다. 술만 취하면 나오는 개버릇 탓이란다. 거느리고 있는 직장이나 같은 부서의 책임자들이 좀 더 적극적인 선도가 아쉽다. 모두가 그에게는 형과 같고 부모 같은 입장들인데 우선 한 동료이기 전에 한 인간으로서 진실을 띈 충고와 가르침이 있어야 할 것을 강조해본다.
5th. Aug(토)
자주 애들 사진을 쳐다본다. 많이들 컸을 것이다. 더운데 집에서 애들 먹일테지. 정화 눈이 아무래도 마음에 걸린다. 더 이상 무리가 없어야지. 어쩌면 “아빠가 오면 가자”하고 바닷가도, 경산도 모두 미루고 있을런지도 모르겠다. 그럼 더더욱 “아빠 와 이래 안 오노” 하는 소리가 잦을 텐데.
오전 중 오키나와를 지났다. 그리 멀지 않게 떨어진 섬들이지만 새로운 물표를 지날 때마다 성큼 성큼 닥아서는 느낌이다. 몇 날이고 계속 아무것도 없는 대양을 하늘만 쳐다보며 하는 항해는 아무래도 지루하고 싫증을 낳는다. T.V에서 영상은 없어도 소리만 들린다. 주위에 사람이 살고 있다는 안도감 같은 것이 있어 좋다. 일본도 폭서가 유례없이 계속, 각 가정에서 얘들 땜에도 바캉스를 가야한다고 야단이다. 변하는 세상사처럼 어린애들의 권위도 많이 신장은 됐다. 무엇보다 다행한 일이다. 벌써 내게도 셋이다. 세 놈이 제 각기 자기의 의사를 표시하고 고집할 만큼 자라고 있다. 벌써부터 어려움을 느낀다고 아내가 말했다만 갈수록 더 할테지. 하나도 유치원엘 보내지 못했다. 그것이 부모들을 위한 것이 아니고 곧 애들 자체를 위한 것이라면 굳이 보내지 않아도 될 만큼 학교생활이래도 미리 익혀주므로 충당이 된다고는 하지만 어쩐지 부모로서 다해주지 못하는 것만 같은 자책은 있다. Piano를 샀으면서도 정화 혼자만 가르친다. 정주 정현이도 미리 가르쳐 주면 좋을 텐데-. 아무려면 그저 몸 건강하고 개성 뚜렷하게 잘 자라주면 된다. 부모로서 가장 보람있게 물려 줄 수 있는 것이 곧 그것이다. 건강, 그리고 능력! 중공과의 여자농구 중계에 한동안 흥분들을 했다. 마지막 순간에 “얏다” 하고 주먹으로 책상을 치기도 했다. 쾌거다. 먼저 번 축구와 같이 쿠알라룸프르에서 열렸단다. 이기고 볼일이다. 딸들이라고 서운해 할게 아니다. 지금까지 여성들이 더 많이 이름을 떨치는 것도 체육계다. 내 딸들이라고 하나쯤 예능계나 학계에 내 보낼 수 없다는 것은 아닐게다. 워낙 거미집안의 자손들이라 체육은 엄두도 못 낼게고-.
불시에 생긴 대만 동쪽해안의 T.D(열대성저기압)이 밤새 신경을 건드린다. 하루만 참아주렴 - 제발. Owner, 대아에서 아무런 연락이 없다. 입항하면 자세한 일정이야 당연히 밝혀지겠지만 무엇인가 있을 법도, 때도 됐는데. 계약관계, 귀국건 등이 꽤나 속을 썩힐지도 모르지만 실상 따지고 보면 간단히 맺을 수도 있다. 아직은 회사측이 Key를 쥐고 있으니 따르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그것이 곧 자신들을 위하는 길이고 방도가 되는 수도 있다. 그러나 얕고 근시안적인 생각으로 잘못 이해하는 선원들이 가끔 없지도 않을 것이다. 양자가 공존하고 신임을 두터이 하는데서 좋은 결과 그리고 원만한 임무수행을 마칠 수가 있음을 상호간 깊은 이해를 필요로 한다. 특히 해상생활을 하는 사람들이 갖기 쉬운 좁은 편견들이 회사에 대한 오해를 낳기 쉽다. 선내에서 생각하고 있는 만큼 육상사람들이 깊은 배려를 해주지 않은 것이 보편적이라는 점을 우선 깨달아야 한다. 직업인으로서 제각기의 일을 하고 있을 뿐이라는 것을 자신이 잊고 과대평가 하는데서 불평이 커지고 자만에 빠지기 쉽다.
6th. Aug.(일)
屋久島 및 種子島(다네가시마)를 지났다. 이제야 黑潮의 영향을 받는가 보다. Las 출항 후 처음으로 12k't를 기록한다. 내일까지만 계속한다면 모래 낮에 닻을 내릴 수가 있겠다. 九州넘어 자꾸만 쳐다보이는 제주도와 부산이 이제는 일본땅에 가려 뵈지 않을 만큼 닥아 섰다.
C/O의 건의서가 올라왔다. 궁금한 것이야 누구 없이 마찬가지 겠지만 지금으로선 낸들 똑같은 입장. 걱정 안 해도 될 일 마져 염려하고 있는 듯하다. 수출선원들이 당하는 매년 한 번씩의 고민, 그것은 어디까지나 개개인인 것이지 공적일 수는 없다. 1년을 마치면 다시 새로운 승선을 위해 노력하는 것은 누구나 갖는 공통된 상황이다. 어느 회사를 택하고 가느냐는 자신의 문제이다. 무엇보다 선원으로서 우선 회사를 신임하고 자기 임무에 충실한 것이 첩경이다. 회사에서 인정해주면 별로 염려할 필요는 없다. 그만큼 회사도 성실한 선원이 필요한 때문이다. 그러기에 승선 중 불성실했던 사람은 불안해한다. 어느 직장이건 불평은 있고 모순도 있다. 그것을 받아드리고 안 받아드리고는 개개인의 선택권이다. 먼 훗날을 위하고 자신의 여건을 위해서라면 당장이 좋다고 그만두는 수가 있고 지금이 불만스러워도 내일의 희망을 기대할 수 있다면 감수하기도 하는 게 도리다. 성급히 알아봐야 별수도 없고 몰라도 그만인 일들을 묘하게도 사람들은 답답해 한다.
2-3일만 참으면 훤히 밝혀질 것을 -. 계약된 1년을 마치고 귀국 하선하는 것은 분명히 실직이다. ‘실직을 두려워 하지 말라’는 자수성가한 독한 사람들의 선견들이 있다지만 아무래도 본인들 특히 가정을 가진 자들에겐 적잖은 정신적 경제적 부담을 준다. 자칫하면 그것이 1년을 끌어버리는 수가 있다. 우선 배가 다를 뿐 그 하는 일이 꼭 같다는 점에서 부터다. 간혹은 마치 선보듯이 회사, 보수 심지어 선박의 크기, 나이까지 따져가며 고르다 스스로 골탕을 먹은 사람도 많다. 휴가 기간 셈치고 1-2개월 놀아도 늘 불안스러운 잠재의식이나 아니면 계속 운동(?)을 해야 하는 것이 1년짜리 수출선원의 가장 큰 비애가 아닐 수 없다. 솔직히 내 자신부터 귀국하는 그날부터 실직이다. 얼마동안은 괜찮을 테지만 아내의 불안해하는 기색이 있을 테고 또 눈치를 봐야 할 것이다. 내 하나뿐 아니고 가족에게까지 부담을 갖게 하는 것이 더욱 안타까운 일이다. 그러나 실직 그 자체를 두려워하는 것은 아니다. 가만히 있으면 “맡아 주시오”하고 회사에서 부탁을 받을 만큼 기반을 다졌다고 할 수 있다. 그것은 순전히 내 성실을 바탕으로 이루어진 것이다. 허나 이제는 오히려 그 반대로 어쩌면 그런 부탁을 물리치고도 살아갈 수 없을까 하는 것이 더 두렵고 어려운 문제로 등장한 것이다. 아직까지 분명한 계획도 자료도 없다. 그저 ‘어떻게 되겠지’하는 막연한 생각뿐이다. 이것이 가장 위험스러운 사고방식임에 틀림없다. 고생은 그것을 이길 수 있는 사람이면 하는 것이 좋다고 해본 사람이 얘길 했다. 실상 이제 내 모든 것을 걸고 투기한다거나 모험을 감행할 수는 없다. 그간의 세월이 고생이었다면 실상 귀중한 것을 지불한 것이었고 생명을 걸었다고도 할 수 있었다. 이제는 내 자신 보다는 커가는 애들을 위해서도 계속 안정을 유지해나가면서 무엇인가를 찾고 이루어야 하는 더욱 신중함이 있어야 한다. 찾으면 길이 있을 것이다. 오직 그것을 찾고 못 찾고는 내 자신의 의지와 정신력에 달렸을 뿐이다.
7th. Aug.(월)
오후2시 潮岬을 Radar로서 확인 항과함으로서 어제밤 계속 11k't정도를 유지한 모양이다. 역시 흑조의 영향이 크다. 오전 중 각 Radio Station 혹은 항공표식무선국을 D.F(방향탐지기)로 잡아 Position을 Check 한 것이 많은 도움을 준다. 참고해둘 일이다. 지금끝 천측과 Radar만을 가지고 47여일간 항해를 해 온 것이 어쩌면 무리한 짓같이 여겨진다. 수리한 Radar의 성능이 뛰어났던 것도 다행한 일이었다. 연일 찜찜하게 더운 날씨, 목욕, 세발 면도를 하고 보니 비록 그을고 번들번들 하던 얼굴이었지만 제법 말쑥해진 느낌도 든다. 내일 모래부턴 다시 시작되는 마지막 고비가 남았다. 몸의 깊숙한 곳까지도 열심히 씻었다. 이제 곧 아내 곁으로 갈 수 있다는 기대가 차 오른다. 계속 순풍으로 좋은 날씨. 염려했던 태풍도 잘 피했다. 내일 오후 조금만 더 선속이 나준다면 어둡기 전에 닻을 던질 수 있을 것인데 -.
8th. Aug.(화)
희부연 안개 속에 神子元(미코모토)의 등대가 보임으로서 동경만에 접근. 의외로 조류의 영향을 잘 받아 시간을 당길 수 있었다. 여전히 복잡한 동경만. 劍崎 분리대 입구에서 Prosper World호가 출항하는 것이 보인다. VHF로 불렀으나 연락이 안 된다. 광환 군이 아직도 승선중인지?
18:00정각 동경항 검역묘지에 닻을 내림으로서 47일간의 긴 항해가 끝을 접었다. 오히려 맥이 빠지고 허탈감마져 휩쓴다. 얼마나 신경을 썼고 정성을 쏟았던가. 안전항해를 마친 것이 이렇듯 허탈스러워도 결국 그것은 그냥 주어진 것이 아니다. 좋은 계절에 그만큼 노력이 곁들어 짐으로서 이루어진 결과이다. 그저 멍멍한 느낌이나 감개도 깊다. 무언의 감사가 진심에서 우러나온다. 낡은 배, 느린 속력, 허술한 장비 등으로 이루어낸 장기항해였기에 더욱 그렇다. 협성의 Estern Mars 정박중이다. 내가 협성해운 공무과에 근무시 대동조선소에서 만든 배이다. 모처럼 보는 밝은 화면의 천연색 T.V가 그간의 노고를 위로하듯 휘황하게 비친다. 내일 아침 09시경 겸역을 마침과 동시에 접안한다는 연락이 있었다. 편지도 와 있을 것이다. 목소리를 직접 듣고 보낼 수도 있을 것이다. 쌓였던 궁금증이 어떻게 풀려 나갈 것인지? 무엇보다 Cargo에 이상이 없어야 할텐데-. 귀국시 위로수당 그리고 인계 등이 오늘 立秋를 고비로 기승을 부리는 더위와 함께 남은 일들이다.
9th. Aug(수)
10시 20분 大井수산부두에 접안. 모처럼 땅 냄새를 맡다. 龍野씨 그리고 水野씨 久保감독이 오다. 편지, 잡지 밀렸던 선용금 모두 찾았다. 예정은 일단 같은 일본회사인 一成海運(靜岡소재)에 매선. 淸水 Dock에서 인수인계 한 후 18-9일경 귀국예정이란다. 타키노씨와 위로수당을 협의 그리고 그 밖의 본사 사람들에게 그간의 수고에 대한 인사말과 특히 배가 깨끗하다고 칭찬을 한다. 마땅히 할 일을 했을 뿐인데도 듣기가 흐믓하고 그간의 보람을 갖게 하는 위에 앞으로의 여러 가지 일에 많은 도움을 가져 올 것도 같다. 사람이 어디가든 인간자체의 성실은 마찬가지임을 재삼 느낀다. 조그만 노력으로 많은 사람들 그리고 회사자체가 그만큼 유리할 수 있다면 충분히 그 대가는 인정받게 되는 것이다. 남은 10여일이 어쩌면 쉽게 잘되고 무사히 끝날 것만 같은 예감이 앞선다.
모처럼 新宿의 Bear Garden에서 三浦군과 시원한 생맥주 한 되씩(?), 그리고 그의 안내로 Bar マドンナ에서 誠ちやん의 살내음을 맡으며 한잔하기도 했다. 무엇인가 원하던 일을 시원스레 이루고 난 뒤의 흡족한 기분이다. Collect Call로 집에 전화도 했다. 반가울 뿐이다. 편지도 찾았다. 암. 무사해야지. 얼마나 염려했는데-. 시큼하리만큼 울컥해 오는 게 있다. 집을 기어이 시작했었군. 그것이 형편상 유리하다면 몇 번이고 짓고 팔고 하는 것이 당연하다. 또한 그것이 하루속히 내 자신을 위하고 우리 전체를 위해서도 바람직한 일이다. 할 수만 있다면 더욱 더 버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가장 현실적인 문제이면서도 마음만은 그렇지 않는 것은 왠 일일까? 남편 없는 사이에 그만한 일을 능히 해 낼 수 있는 아내에겐 정말 그의 말대로 궁둥이라도 두드려 줘야 할만큼 자랑스럽고 훌륭한 일이다. 오직 그것이 내일이면서도 그에게 맡겨지는 것이 곧 빼앗겨지는 듯한 자책감을 버릴 수 없다. 너무도 아내를 혹사한다는 의식이 이제는 거의 완전한 잠재의식으로 고정되어 가는지도 모르겠다. 그 양심마져 없다면 과연 내가 무얼 갖고 그 앞에 설 수가 있을 것인가는 장담하지 못할 일이다. 좀 더 우악스럽게 더욱 조을 수 있는 두둑한 배짱이 없어서 일까? 그는 내가 자기에게 지기 싫어한다고 했다. 사람이 누구한테나 지는 것이 즐거울 리는 없다. 그러나 진다기 보다 지지 않을 수 없을 만큼 마음 약한 것이 내 결점이 아닐까. 이제 곧 가마. 10일이면 닿겠지. 덥고 지루한 10여일이 될 것도 같다.
10th. Aug.(목)
三浦군을 데리고 京橋(교바시) 德丸의 본사를 방문하다. 小川(오가와)상무는 벌써 본선에 갔단다. 그러나 곧 전화연락 곧 오겠다고 기다리랬다. 龍野씨와 수당관계를 다시 협의, 일인당 450불씩 지금하기로 합의하다. 久保감독이 어쩌면 인수인계 때문에 나누어서 귀국할지도 모른다고 한다. 대아에 전화. 서로 무사히 마친 걸 웃음으로 나누다. 一陣은 19일 09:30시 大阪발 비행기로 귀국하기로 했단다. 같이 神德丸가 입항했고 역시 며칠 앞서 귀국했지만 그들은 페리편이었단다. 여러 가지로 편의를 제공하는 셈이군. 小川상무한테서도 정중한 감사의 인사를 들었다. 대사관 둘러 통신국장의 고용기간 연장마치고 귀선하다. 총원을 집합, 그간의 궁금증을 풀어주었다. 무엇보다 사고 없이 끝까지 마쳐주라는 대아 정상무의 얘길 강조했다. 모두 흡족한 표정들이다. “그 봐! 사람이 사람을 믿고 회사를 믿으며 되잖아. 간혹 그렇지 않은 경우도 있지만 아직도 사회 질서가 확립된 사회에서는 개인의 성실이 인정되고 그 대가는 이루어지는 법이다. 얄팍한 눈앞의 작은 이익에 마음들이 들뜨거나 움직이지 말고 좀 더 멀고 큰 것을 볼 줄도 알아야 한다”. 30일이 되어야 만기되는 사람도 그만한 대가는 해주기로 합의했다.
神德丸 선장이 인사차 찾아왔다. 이미 50줄의 사람이다. Lagos에서의 신세진 것을 고맙다고 했다. 역시 예절을 찾는 데는 일본사람들이 더 알뜰하다. 역시 신토쿠마루도 한국의 대림에 매선한다고 한다. “헌배 팔고 새 배를 준다니 전부 매선하면 내 기대는 어긋 나지 않소.” 구보감독이 웃는다. 대신 큰 배를 계속 신조한단다. 신토쿠마루의 선장과 국장도 염려스러운 모양이다. 줄고 느는 척수에 비해 그만큼 인적 자원이 비례하지 않는데 문제가 있다. 높은 임금을 피하기 위해 값싼 외국선원을 써야 하는 선주들의 고민도 크지만 자꾸만 실업자를 늘게 하는 것도 전적으로 무시할 수 없는 중대한 사회적 문제이다. 모처럼 입항한 동경! 이번엔 한 번쯤 주말 관광버스라도 타볼 기회가 있을라나? 낮에 곁을 지난 皇城, 그리고 Tokyo Tower도 한 번쯤 가 볼만 한데-. 해양박물관에서 열리고 있는 우주박람회도 흥미가 끌린다. 어린이를 위한 것이 더 큰 목적일 테지만 좀처럼 얻기 힘든 기회일 것이다. 구보감독의 부탁으로 Sea Protest(해난보고서)를 재 작성하다. 내일쯤 갈 예정이나 잘 될는지?
11th. Aug.(금)
No.4 Hold에 Cargo Damage가 생겼다. 처음 몇 개는 Short로 처리했는데 결국 13Cartons가 완전히 못쓰게 됐다. 이미 가져간 것 중에도 10박스가 상했단다. 옥에 티다. 더 이상은 없어야 할텐데-. 원인은 드래인 홀의 벨브가 상해 그리고 바깥의 온기가 들어갔음을 찾아냄으로 보험처리가 가능하게 했다.
위로 수당을 지급하다. 돈을 가져온 船員課의 Mr. 宏賴가 많은 칭찬을 해준다. 일본말도, 글도 능하여 일하기도 쉬웠고 협조도 잘 해 주었다는군. “그게 널 위한 게 아니고 결국 내 자신을 위한 것” 이라고 얘기할 수는 없지만 그만큼이나마 인정을 받게 된 지금까지의 과정에 대해선 내 자신도 놀라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久保감독과 해운국에 가서 해난보고서 만들다. 무엇보다 일본 공무원들의 對民관계 태도가 마음에 든다. 그것을 이용하는 民의 측에서도 그만큼 일을 갖추고 있긴 하지만 서로가 주고받는 대화속에서 과연 官과 民이 서로 견제하는 입장이면서도 확실하게 믿고 있다는 점에 감명을 받는다. 쉽게 해줬다만 3부중 글자 한 자가 잘못되어 고쳤다. 흡족해 하는, 그 아랫볼이 축 쳐진 久保감독의 얼굴을 보니 또 한 가지를 마친 셈이다. 내일부터 인수할 一成해운측에서 4명이 온단다. 사실상 인수인계가 시작되는 셈이다. 그러나 본사로서도 일단 매선한 이상 가급적이면 더 이상 험 잡히지 않으려 애쓴다. 매선 전에 陸揚해야할 품목도 서류도 오늘까지 모두 올렸다. 추가 Docking Order도 제출했으나 저쪽에 넘겨주지는 않기로 하다. “이렇게 애를 써 주는데 왜 회사에서 맥주 한 잔도 없오?”. “주는 것은 문제가 없고 또 생각 않은 것도 아니지만 먹고 싸울까 봐서-.” 이 한마디가 무척이나 강한 여운으로 울려온다. 결국 한 두 사람의 선원들이 전 한국사람의 얼굴에 똥칠을 한 결과가 됐다. 입항전에도 주의를 했지만 특히 일본에서는 책잡힐 일을 못하게 한 것도 그 때문이다. 역사적 사실을 감안하더래도 더 이상 그들에게 얕잡아 보일 필요가 어디 있는가. 내 할 일 충실히 다함으로서 그들 스스로가 서스럼없이 고개를 숙이고 오는 것이 얼마나 떳떳한가. 어떤 점으로 봐서는 경제적뿐만아니라 국민적 정신면 즉 마음가짐부터 배워야 할 바가 많다고 여겨진다. 염려 말고 몇 Box 올려주라고 했지만 과연 그 맥주맛이 어떨는지?
12th. Aug(토)
인수자측 5명이 방선. 대강 둘러보았다. 어떤, 무엇을 하는 회사인지는 몰라도 과연 일본사람들이 이 배를 타려는 지는 의문이다. 토요일 오후 입항 후 두 번째로 상육. 銀座거리의 물결치는 군중들 속에 오직 혼자서 마치 일을 남겨둔 말단 월급쟁이처럼 허둥대가 말았다. 휘황찬란한 쇼윈도의 깨끗하고 고급스런 상품들과 엄청난 가격, 그래도 법석대는 인파! 극장구경이나 할까 했으나 입장료가 2,400엥이나 된다. 역시 안보고 안 듣는 것이 가장 절약하고 마음 편한 일이다. 이름모를 びやがてん(Bear Garden. 큰 빌딩의 옥상에 만든 노천 맥주 홀)。젊은 친구들의 요란스런 리듬 속에 흔드는 늘씬한 두 아가씨의 검은 팬티차림의 춤. 그것을 쳐다보는 사람 중엔 늙은 사내들과 오히려 여성들이 더 많다는 사실은 극히 주목할 만한 일이기도 했다. 젊은 여성들만의 팀도 있다. 1000cc짜리 생맥주(なまびる)를 두 손으로 받쳐 들고 쭉 들이키는 상쾌함과 아울러 부러움도 솟는다. 저처럼 자유스러울 만큼의 여유와 분위기 그리고 富가 진정 부럽지 않을 수 없다. 눈부신 Neon Sign. 땅 속을 겹겹이 파서 얽힌 지하철역 안을 붐비는 사람의 물결이 한결 유유자적해 뵌다. 개인이건 국가이건 우선은 잘 살아야 한다는 것이 전제조건이 아닐 수 없다. 모기약 하고 내가 쓸 샴푸 등 몇 가지에 만엥짜리 한 장이, 약 두어 가지에 역시 1만엥짜리가 흔적도 없이 사라진다. 2.5배로 계산해도 약 6-7만원이다. $나 ¥을 쓰면서 우리네 돈으로 계산하면 쓸 엄두가 나질 않지만 사실은 그들도 우리와 같은 생활의 수준임을 이해해야 한다.
돌아오는 전차 속에서 내가 귀착해야할 부산과 살아야 할 집과 짖고 있다는 집에 겹쳐 꺼지지 않고 명멸하는 수많은 네온과 욕망과 갈등들이 번갈아 스치고 지나간다. 좋고 잘 사는 것을 볼 때 나도 저렇게- 하는 어떤 결심보다 질투와 부러움을 먼저 생각하는 것도 분명히 잘못된 과욕임에 틀림없다. 갖고 있는 한 장을 씀으로서 두 장을 벌 용기와 지혜를 얻기 보담 당장의 한 장이 더 아까워 지는 지금이 곧 小人스러웁지만 아직은- 하고 스스로 억제해야 한다. 판 돈에 더 얹어 싼 땅에 집을 짓고 있다면 역시 현금이 필요할 것이다. 무슨 수가 있을 것이다만 내 계획이 희미해져 가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13th. Aug.(일)
그처럼 번잡하던 세상이 쥐 죽은 듯 조용한 일요일. 大井 제4공원의 녹음 짙은 풀잎 내음이 싱그럽다. 秋葉原(아키하바라)에 가다. 수많은 전자제품을 진열한 가전제품의 백화점엔 정말 놀라움뿐이다. 淸雅堂(붓으로 유명한 곳)도 찾았으나 휴일이다. 교통박물관를 거치고 石丸(이시마루)에서 Ice Creamer를 하나 사다. 얘들이 좋아 할 거다. 新宿에서 가방을 사고 바로 귀선. 서서히 돌아갈 채비를 해야 한다. 그만해도 2년만에 보는 일본 사회가 많은 변화를 이룬 듯하다. 아니 내 자신이 그렇게 느끼도록 변한 것은 아닐까? 우주박람회에 가는 애들과 부모들의 행렬과 차림들에서 더 없는 향수와 고민 속에 젖어 들기도 한다. 결국 높아지기만 하는 눈과 마음을 끌어내려 제자리에 갖다 놓을 수 없을 때 더욱 큰 혼란이 일어나지 않을까도 싶다. 얘들 장남감, 옷 등이 탐나는 게 많지만 일체 포기하다. 값도 값이지만 가져갈 일도 문제다. 싼짐이 너무 많다. 정작 쓸만한 것이 없으면서도 책과 옷이 대부분이다. 1년에 한 차례씩 출입국 할 때마다 수선을 피워야 하는 봇다리에 비애가 다시 재현된다. 꼭 한 번은 가족들을 데리고 세계를 돌아야겠다.
14th. Aug(월)
海難公事 관계를 Survey하다. 저녁에 三浦군과 다시 한잔. 두 번째 들린 マドンナ(마돈나)에서 호된 바가지만 썼다. 눈뜨고 코베인 격이다. 얼음 탄 위스키 한잔에 6,000엥을 하다니. 미우라 녀석도 눈만 둥그레진다. 그 돈 받아서 폭싹 망해라. 빌어 묵을 놈들!
15th. Aug(화)
지금까지 경험하지 못한 두 번의 현기증이 충격적이다. 온 세상이 빙글빙글 돌고 눈앞이 어두져 갔다. 뒷덜미가 무겁고 뻑뻑한 듯도 했고-. 무엇 때문일까? 흔히 말하는 빈혈에 의한 현기증은 분명히 아니었다.
출항시간 결정을 내일로 연기, 淸水대리점과 두 번 통화. 그리고 다시 T.V 영화 촬영 때문에 水野씨와 大映영상의 中村씨가 다녀가고. 결국 16일 외항 대기. 17일 06:00시 출발, 洲崎(수자키)부근에서 영화를 촬영하고 18일 아침 淸水도착으로 변경하다. 그러나 선원귀국 일정은 아직 없다. 龍野씨가 Ticket을 가져왔다. 결국 기관장과 선장 두 사람은 빠진다. 끝까지 마무리를 해달란다. 별 것 아닌 것 같다만 그렇게 얘기하는 데 박절하게 잘라버릴 수도 없다. 며칠을 참자. 오히려 사람을 사귀고 더 좋은 기회를 만들 수 있을 지도 모른다. 그러나 함께 갔으면 하는 바램은 쉽게 꺼지지를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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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당시 히로시마마루의 기록은 일단 여기서 끝을 맺고 있다. 그러나 그 이후의 일들을 20년이 지난 지금도 기억 할 수 있는 것만 더듬어 남겨 보련다.
1. 영화 촬영
17일 아침 출항. 大映영상의 책임자와 배우 남녀 각 1명씩 승선했다. 뒤에는 일본 해상보안청 순시선 한 척이 촬영에 함께 하기 위해서 따라 온다. 총 지휘는 그쪽에 탄 총감독이 VHF로 지휘하기로 했다. 하늘에는 大映映像이란 글자가 선명한 헬리곱터 1대가 요란한 프로펠러 소리를 내며 지켜본다. 동경만 외항의 지정된 곳에 도착, 뒤에서 지시하는 데로 操船. 좌우회전은 물론 360도 급회전을 두 번이나 했다. 범죄자를 쫓아 나선 형사를 그의 애인이 다시 쫓아온다는 내용으로 범인이 배로 도망치고 배까지 따라온 형사가 임무를 무사히 마치고 경비정으로 따라온 애인을 보자 그대로 바다로 뛰어들어 헤엄쳐 간다는 내용인데 배의 선회, 배에서 뛰어 내리는 장면 등은 실제로 배 아니면 안 되기 때문에 부득이 촬영 할 여건이 되는 선박을 찾아 여러 차례 해운국과 연락했으나 마땅한 선박이 없어 촬영이 지연되어 왔는데, 마침 운 좋게 우리 히로시마마루를 잡게 되었다나 -.
다소 선박이 낡았지만 촬영을 할 수 있게 되어 천만다행이랬다. 무척이나 반가운 모양이다. 그 놈의 책임자와 배우들과 사진이래도 남겨 두어야 했는데-. 그러지 못한 것이 지금도 아쉽다. 사실 통항선이 많은 동경만에서 쉽게 배를 선회하고 속력을 늦추고 할 수가 없다. 여간 신경이 쓰인 일이 아니다. 거기다 총감독이란 놈이 마치 船團長이나 된 듯이 뒤따라오면서 이래라 저래라 하니, 저야 필림 돌아가는데 맞추면 되지만 나는 주위의 사정부터 살피고 위험을 피해야 하니 그게 될 일인가. 결국 그것이 여러 번 되풀이 하게 된 원인이기도 했다. 아무튼 무사히 마치고 가면서 그놈의 책임자 수고 했다며 20,000엥을 주고 간다. “이것뿐이요?” “예산이 없어서 -. 어쩌구...” . 에이 째째한 놈들!
그러나 이 영화를 일본에서 T.V로 보지 못한 것이 못내 서운한 일이었다.
2. 淸水 造船所에서 냉동사의 선원수첩분실
淸水(시미즈)항에서는 도착하자마자 바로 船渠에 넣고 전면적인 검사와 수리가 시작되었다. 선거에 올려 둔 체 귀국자들이 짐을 챙겨 내려오게 되었다. 밤늦게 대형 버스편으로 淸水를 출발하여 익일 아침 오사카 국제공항에 도착, 바로 부산행 비행기를 타도록 수배되어 있다. 마지막 쇼핑을 하러 淸水시내를 갔다 오는 등 부산한 오후 시간들이었다. 그런데 늘 어릿하게 꾸무적대던 냉동사 김○식이가 선원수첩을 분실했단다. 출반 3시간 전이었다.
“허허허” 저절로 허파에서 바람이 세어 나오는 웃음이다. 아마도 기가 찬다는 것이 이런 것이 아닐까. 승선 할 때부터 약간 모자라듯 하더니, 정말로 끝까지 말썽을 부린다. 선원수첩 없이 어떻게 귀국 할 것인가? 비상이 걸렸다. 온갖 곳을 찾고 뒤집어 까집고 털어도 없다. 어디어디를 갔었는지 일일이 물어 함께 시내도 가보고 시내버스 종점 주차장에도 갔었다. 配車겸 타코메타(Taco Meter)를 점검하는 늙은 영감님의 친절한 안내로 그가 타고 온 버스까지 뒤지고 훑었다. 없다. 본사 久保감독에게도 알리지 않을 수 없다.
도리 없는 일. 일단은 오늘밤 일행과 함께 오사카로 보내고 孫壹河 일등항해사의 책임으로 오사카 영사관에 가서 사정을 얘기해보고 안되면 도리 없다.
그렇게 모두들은 떠났다. 기관장과 나는 짐을 들고 조선소 기숙사로 옮겼다. 허전했다. 1년반 동안 낡았지만 정이 들었고 아끼던 ‘히로시마마루’였다. 아무도 없는 배를 혼자서 한 바퀴 돌았다. Bridge에서 내 침실을 거쳐 영욕이 얽힌 휴게실도 식당도 둘러보았다.
그런데 식당 냉장고 위에 그렇게도 찾던 김완식의 수첩이 그기에 있다. 이런 병신 같은 친구! 여기다 얹어두고 없다고 온갖 지랄을 하다가 갔다. “아이구 이 자슥아! 확실히 네 놈이 좀 모자라기는 모자라는 구나. 이제야 분명히 알겠다.”
그래도 반갑다. 보내놓고도 염려가 앞섰는데 -. 밤중이지만 구보 감독에게 전화를 했다. 잠결에 구겨진 목소리지만 그도 웃으며 잘됐다고 한다. 내일 아침 일찍 三浦국장을 택시로 오사카 공항으로 수첩을 가지고 보내잔다. 적어도 350km는 넘을 것이다. 하느님께 감사를 드린다. 마음을 놓고 푸근한 잠을 잤다.
그러나 여기서 놀란 것이 있다. 그것은 당시(1978년도)에 벌써 淸水라는 조그만 소도시의 시내버스가 타코메타를 쓰고 있었다는 사실이다.(실은 타코메타란 말도 그때 처음 들었다만) 무작정 찾아간 버스정류소 사무실에서 만난 늙으수레한 영감님이 친절하게도 쇼파에 앉히고 차근차근이 물었다. 버스 탄 장소과 시간 등을. 그리고는 무엇인가 동그란 돋보기 밑에 역시 동그란 종이를 꽂아둔 것을 돌리면서 찾더니 몇호 버스라고 하며 지금 차고 어디쯤 주차중이나 가보라며 직원을 불러 열쇠를 주었다. 그것이 무엇이냐고 물었더니 들여다보란다. 김 군이 탔다는 버스가 우체국 앞에는 몇시 몇분인데 몇분 몇초간 정차했으며 이 버스가 출발부터 回車할 때까지 운행속도, 정차와 발차시간 등등이 확실하게 그래프로 기록되어 있다. 정말 놀랐다. 안전운행을 위한 필수적인 장비가 아닐 수 없다. 역시 선진국임을 자인하지 않을 수 없었다.
히로시마마루가 완전히 인수인계되고, 참고로 매선한 회사의 공무감독이 필요로 하는 제반 질문에 응하기도 했으나 실상 큰 문제가 없었기에 여유 있는 시간을 보내고 귀국하였던 것으로 기억한다. 물론 귀국 전 德丸와 귀국 후 대아에서도 그간의 수고에 정중한 인사와 더불어 술과 밥을 대접받았음은 말할 것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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宏島丸(히로시마마루)에서 하선. 귀국하여 4개월을 집에서 보냈다. 그 동안의 기억은 별로 없다. 망미동(당시 동방컨테이너 부근) 집을 지었고 몇 가지를 손수 수리하고 달기도 했었지 아마. 편안한 마음으로 잘 보냈다. 한 참 뒤, 마누라의 얘기를 빌리면 ‘그 일(?)밖에 더했냐!’고 할 만큼 열중했었었나 보다.
그리고는 다음해인 79년 1월 역시 대아의 주선으로 일본 고베(神戶)에서 서경인 씨가 운영하는 Anglo Marine社의 선박인데, 히로시마마루와 전연 차원이 다른 냉동운반선인 “Royal Lily”에 승선했다.
냉장화물선이란 점에서는 같지만 그야말로 하늘과 땅만큼의 차이가 있었다. 히로시마가 최대 선속 11k't에, 총톤수에 비하여 화물 적재량이 너무 적은, 선령 17년의 漁船團의 母船이었던 것을 개조하여 운반선으로 사용한 것으로 냉동화물만 취급하게 된 선박인데 비하여, “Royal Lily”는 완전히 최신형 新造 냉동 ˙ 냉장船으로 신조(新造)한 것이었다.
그것도 당시 일본의 기술로 만들어진 몇 척 안 되는 최신형으로 최대 선속 22k't.에 냉동화물은 물론 유지온도 +15도에서 영하 25도까지의 모든 냉장화물을 8개의 구역을 나누어 적재하고 각각 필요한 온도를 최대범위 한도 ±0.2도를 유지하면서 운반할 수 있는 움직이는 거대한 냉장고인 선박이다.
주기관 마력이 10,000마력을 넘고 온도의 Control도 당시 세계최대의 컴퓨터 제작회사였던 미국의 Apple사에서 제공한 Computer에 의해 제어되고 기록되며, 냉각의 방식도 암모니아가 아닌 Freon이란 냉매로 냉각을 하고 그 냉기를 바람으로 순환시키는 System이다. 물론 Bridge의 항해장비도 최신형들이었다. 마치 시골에서 커다란 도회지로 바로 데려다 놓은 촌놈의 모습으로 시작했다.
그러나 이것이 내게는 그 후 계속 이어진 냉동화물선의 권위 있는 선장이 될 수 있게 한 동기가 되기도 했으며 무엇보다도 그것을 뒷받침 할 수 있었던 것은 일본말의 구사와 일본어 서적의 독해, 그리고 그간의 노고가 일본과 한국에서 인증을 받았음은 말할 것도 없다.
지난날 Laspalmas에서 보고 한번 타보고 싶어 했던 ‘토쿄오마루(東京丸)’가 바로 이런 것이었다. 히로시마마루에서의 내 노력이 결코 헛된 것이 아님을 증명한 것이었다.
여기서는 솔직히 말해서 시간적 여유를 가질 수 없었다. 너무나 벅찬 기간이었다. 새로운 환경에의 적응과 지식의 파악. 빠른 속력에 의한 항해 및 운항술의 습득 등으로 전연 새로운 세계를 넘나들었다.(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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